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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3)]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거창 대대장인 김종업(육사36기) 선배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으로 선후배간에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으며 동기회장 등 요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었고, 필자와는 육사에서 같은 생활관의 선배로서 지도를 받았고 현재까지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대대장 근무 2년차에 접어든 김 선배는 당시의 사조직 관련 소동과 총기오발 사건 등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정수완과 김종완 동기가 함께 동행하여 위로도 해드리고 회포도 풀겸 거창골짜기를 찾았는데 우리는 그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대대장을 어떻게 해야되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그는 “지휘는 기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말고, 더 잘보일려고도 말고, 건강하게 즐기면서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라”라며 찾아간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게다가 “사향은 아무리 보자기로 싸도 냄새가 나며, 송곳은 호주머니 속에 넣어도 튀어나오는 법(囊中之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신은 선택한 자에게 시련을 주신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위기가 호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면돌파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추진력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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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2)]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짧은 3개월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지만 룸메이트인 정수완 동기와 각별하게 친해지는 12주간의 시간이었다. 정 동기가 대대장반 교육 수료후 부임할 남해대대 방문은 적지않은 교훈을 주었고 우리는 진해 인접의 다른 선배의 대대도 찾아가 장단점을 분석하고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번에는 거창대대를 찾았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63~165)] ‘벤치마킹은 창조적 성공의 지름길’참조) 거창은 신라 때는 거열군(居烈郡)이라 불렀고, 거타, 거열 등의 이름이 음운상 유사성이 있어 자타국이라는 나라가 여기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인 거창군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할 때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경남 서북부의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 지역이며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대 국립 공원 사이에 자리잡아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덕유산 국립공원과 가야산 국립공원이 이 군에 걸쳐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뺏고 뺏기는 전투가 삼국 통일 전까지 계속해서 있었다. 이후에도 김천, 대구, 함양 및 전라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함양으로 그러한 이점이 많이 넘어간 상태이다. 6.25남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거창군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존재한다. 이외에 수승대, 월성계곡, 금원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수승대에서 월성계곡 쪽으로 가는 도로 옆으로 보이는 계곡 풍경이 정말로 장관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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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1)]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음날 오전에 함께 찾아간 곳은 남해섬의 유명한 금산과 보리암이었다.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짖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 했다. 이후 청년시절의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 성공하면 비단으로 보광산을 감싸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조선왕조를 창업했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사용한 금산(錦山),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갓 기이한 형상을 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눈에 볼수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주로 군인, 경찰들을 포함한 공무원 등 많은 신도들이 이성계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쪽빛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수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 동물원으로도 불린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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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0)]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주 일주일간의 수업이 끝나면 토요일 동두천으로 귀가하는 것을 포기하고 룸메이트인 정 동기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남해 지역을 정찰하고 전임자에게 부대 특징을 파악하며 지휘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장연석(육사35기) 선배 부대를 찾아갔다. 4년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경비과장으로 근무하던 장 선배는 자신이 필자를 추천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 비교적 잘 근무했다는 소문에 대해 대견해 했고, 필자는 비록 수방사 못지 않은 고생은 했지만 대과 없이 업무를 하고 진급하여 대대장반에 올 수 있게 여건을 만든 장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정수완 동기는 자신이 취임할 대대의 전임자를 자연스럽게 만나 사전에 부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에 고마워하며 이 것 저것 많이 질문했고 장 선배는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본인이 느꼈던 병력관리의 애로점 및 착안사항과 지역 주민, 경찰들과의 합동작전이 성패의 지름길이라는 해안 대대장 근무의 기법을 알려주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부대와 지역 특성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층 더 가깝게 소통하는 기회도 되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장 선배는 “남해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명소가 있고, 얼마전에도 모 선배가 이곳을 찾았다며 다음 날인 일요일에 직접 안내하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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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9)]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2주간의 보수교육인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에서 전략과 작전술 및 리더십 교육 등 학과수업도 중요했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어 주변에서 멋있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현재의 경험에 의한 실시간 지휘기법을 전수받는 일 또한 소중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독신자 숙소의 같은 방을 사용했던 정수완 동기가 남해 대대장으로 차후 근무지가 결정되어있었는데, 그곳에는 필자가 수방사 작전장교를 마치고 무적태풍부대 작전보좌관의 보직으로 가도록 강요(?)했던 장연석 선배가 근무하고 있었다. 정 동기는 자신이 몇 개월 뒤에 근무할 부대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현 남해 대대장 장 선배와 일면식이 없어 서먹서먹했다. 허나 필자는 장선배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같이 근무했고 필자의 다음 보직을 해당부대에 추천했던 인연으로 망설일 것이 없었다. 룸메이트의 특권이라고 할까? 필자는 궁금해하는 정 동기를 위해 바로 장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 반갑게 전화를 받은 장 선배도 환영했는데, 마침 자신의 후임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던 차였기 때문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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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28)]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떨어진 체력 보충을 위해 고민하던중 당시 동기생중에 랭킹 1위 수준을 지닌 이제경 동기가 기꺼이 새벽에 테니스 지도를 해주겠다고 배려해줘 우선 테니스부터 시작했다. 필자가 운동신경이 부족하다보니 부대에서 테니스 수준이 매우 저조했는데 이 동기의 도움으로 기초부터 익히게 되었다. 덕분에 약해졌던 체력은 조금씩 보강되어가고 있음을 느꼈고 특전사에서 멋있게 근무했던 이제경 동기와의 우정은 점점 쌓여갔다. 소령급 실무장교로 꽉 짜여진 일정에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7년 동안의 습관이 몸에 베어버린 탓인지 진해 고급과정(대대장반)의 여유로운 삶은 필자를 맨붕에 빠지게 했었는데 새벽운동을 하면서부터는 하루 하루가 또 바쁘게 달려갔다. 특히 7년전에 소령 진급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에서는 전술학 위주로 공부했었는데 당시의 고급과정에서는 전략과 작전술을 배우며 대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는 리더십 교육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입소 직전에 군단 ‘교육훈련TF’ 임무 수행시에 함께 연구했던 요원들을 포함함해서 진해에서 다시 만난 동기생들의 무서운 성장에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느꼈다. 그들은 예리한 분석력과 통찰력을 견지하며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는 간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학과 시간에도 뛰어난 언변으로 자신있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받은 충격으로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느꼈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더 열심히 재충전하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마음만 급했다. 그동안 바빠서 포기했던 대학원 석사 논문도 준비하고 컴퓨터와 테니스도 배워야 하며 고급장교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과정 중의 핵심인 전략이론 등도 익혀야 했다.(다음편 계속)
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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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4)]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 전지역으로 ‘진도개 하나’를 확대 발령에 따라 각 부대가 출동준비를 하는 동안 사단 상황실(TOC)에서 작전토의를 거쳐 사단장이 승인한 무장탈영병 생포 작전명령은 신속하게 각 부대로 하달되고 상급부대에도 보고됐다. 출동 준비를 마친 부대들은 때마침 하달된 작전명령에 따라 사건 발생 원점을 겹겹이 포위하는 2,3봉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절묘한 시점에 명령이 하달되어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며 바로 투입하여 일단 도주하려는 탈영병과 시간 싸움에서 우위를 점령했다. 동시에 탈영병이 발생한 해당 연대는 1봉쇄선 점령을 완료하고 포위된 봉쇄선 안의 은거 가능지역을 사단 수색대대원들과 함께 군견까지 투입하여 정밀 수색했다. 이때 2,3봉쇄선에 근접한 부대들은 도보로 투입했지만, 원거리 부대원들은 사단 수송대의 차량에 포병부대의 포차까지 동원된 수송차량을 지원받아 보다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 야간이 되자 봉쇄선 도로를 따라 라이트를 켜고 차량을 계속 왕복 이동시켜 은거한 무장탈영병이 꼼짝 못하고 지치도록 만드는 기만작전도 시행하였다. 더불어 주민신고망을 최대로 가동시켰고, 선무심리전으로 방송차량을 활용하여 원점부근과 주변에서 무장탈영병의 안전과 복귀 방송을 계속하며 심리적 동요를 유도했고, 또한 탈영병의 부모를 현장에 도착시켜 방송차량에 탑승하여 안전한 귀가 설득 방송도 추가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미 5년전 승리부대 근무할 때에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난동 및 무장탈영 소동’에서 경험했던 교훈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었다. 한편 상급부대인 군단에서도 무적태풍부대의 무장탈영병 발생에 따른 대침투작전 진행을 관망하면서 혹시 우려되는 탈영병의 도주를 막기 위해 인접 사단에 지시하여 주요 통로 및 목 지점을 차단하도록 조치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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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4)]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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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3)]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대의 무장탈영병 발생 보고가 접수되자 상황실로 각 참모들이 비상소집되었고 전화기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부대관리 위주로 부대를 지휘했던 사단장은 역시 노련하게 침착한 모습을 보였으나 어떤 지침도 없이 인상만 쓰고 있었고 부대는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그때 가장 큰 문제는 상급 부대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최초 보고가 끝나자마자 상급 및 차상급 부대뿐만 아니라 심지어 청와대 상황실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계속된 전화로 실제 사고가 발생한 연대에서의 전화는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장탈영 사고 현장에는 이미 연대의 정보분석조와 헌병 및 군의관 등이 도착하여 사고 조사를 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피해자는 없었다. 또한 연대 자체 병력으로 차단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연대장의 상황조치 보고도 있었다. 연대장 보고에 따르면 윤길영 무장탈영병이 소속된 해당 연대지역은 강화된 대침투작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상태였고, 작전참모는 정보에서 판단한 탈영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하여 우선 사단 전지역으로 ‘진도개 하나’를 확대할 것을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조치했다. 사건을 조기 종료하기 위해서는 무장 탈영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한 작전 투입 시간과의 싸움이었으나, 가장 크게 우려되는 최악의 상황은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이 GOP철책을 넘어 월북하는 것과 도심으로 빠져나가 일반 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때 필자의 과거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지난 1987년 7월 승리부대 작전장교 근무할 당시에 발생했던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이진수 일병이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무장 탈영한 한 사건의 경험이었다. 5년전 승리부대 작전장교 근무시에 업무가 미숙했던 필자는 작전명령서를 적시에 작성조차 못해 작전참모(전 김관진 국방장관)가 직접 초안을 잡아 조치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작전을 담당했던 필자는 우선 서울 방향인 남쪽이나 GOP철책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에 검문소 운용강화 지시를 하달했다. 그리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지도에 작전 상황도를 그리며 명령을 작성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 (73)] ‘숨막혔던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난동 및 무장탈영 소동’ 참조) 그리고는 준비한 작전계획을 PPT로 띄우며 작전상황실(TOC)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설명했다. 1봉쇄선은 해당 연대장이 이미 하달한 지시를 참고하여 최대한 변동이 없도록 도식했고, 2봉쇄선과 3봉쇄선은 가용병력을 고려하여 인접 연대, 포병 및 작전통제 부대까지 투입시켜 점령하며 원점부근에는 지역을 잘 아는 해당 부대와 수색대대로 탐색하여 체포하는 계획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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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3)]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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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2)]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를 무적태풍부대 사단작전보좌관으로 끌어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준 전임자 신현돈 중령(육사35기, 예비역 대장)이 1992년 2월말에 군자산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신 중령의 전임은 필자의 초임지였던 승리부대부터 인연이 있었고, 현 부대로 배치받아 다시 만났을 때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라고 일침을 놓았던 김형배 중령(육사34기)으로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단 정보참모로 부임했다. 마침 필자가 모시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강수명 중령(육사31기, 예비역 준장)으로 그해 가을에 대령 진급이 거의 확실시 되는 분위기이라 김 중령은 차기 작전참모로 영전할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했다. 하지만 인생은 세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듯이 예측 불허의 상황이라 각자 긴장하며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군자산 대대장으로 취임한 신 중령만이 신바람을 날리며 부대를 마음껏 활기차게 지휘하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가 조금씩 걷혀가는 3월13일 금요일, 상급부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예루살렘’의 확산 경고가 내려져 필자의 주 활동무대였던 상황실은 비상이 걸려 각별히 조심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석양이 기우는 저녁 시간이 되자 지난 연말 지휘관 회의에서 가장 우수한 선봉대대로 선정되었던 임진강 주변의 부대에 소속된 윤길영 일병이 총기를 휴대하고 부대를 이탈한 무장 탈영병 사건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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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2)]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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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㉓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부산 주재 미 군수사령관으로 1953년부터 1954년 12월까지 한국군과 부산 재건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를 위해 스스로 미육군한국지원프로그램(AFAK)을 만들어 부산대 등 교육시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등 각종 의료시설, 고아원 건립, 양정과 청학동 주택단지 건립, 도로 교량 건설,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 구호를 포함한 수많은 인도적 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의료시설 재원이 부족해지자 위트컴 장군은 자선 바자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직접 한복을 입고 홍보 행렬에 참여했고 예하 부대별로 고아원 등 후생시설에 자매결연으로 후원과 기부를 유도했다. 대구에 있는 5군수지원사령관을 역임한 박주홍(육사42기) 장군은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 기업의 어려움을 정성을 다해 본국에 알렸고, 이는 전후 복구와 우리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증언했다. 이어 “테일러 미8군 사령관도 위트컴 장군에게 ‘귀하가 요청한 한국 재건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가 곧 부산에 도착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그가 헌신적으로 전후 복구에 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미 군수사령관 임기를 마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말 전역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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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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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1)]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현장에서 순직한 7군단장 故 이현부(육사 20기) 중장은 육사 졸업시 학업성적과 리더십이 가장 우수한 생도가 받는 ‘대표화랑’상을 수상했다. 그는 기계화부대에서 소대장~사단장등 모든 지휘관직을 역임하고 또 기동군단장에 보직되어 기계화부대 작전분야의 1인자로 통했다. 또한 군사전술과 작전지휘 능력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생활 자세와 리더십을 포함한 인품도 탁월하다는 정평을 얻어 군단장직책에도 동기생 중에 가장 빨리 보직됐으나, 그만 취임 두 달 만에 사고를 당했다. 故 한황진(육사37기) 중령 역시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하고, 럭비부 주장까지 할 정도로 실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특히 한 중령은 임관 후 첫 번째 보직부터 승리부대에서 필자와 군생활을 같이 시작해 인접 중대장직을 수행했으며, 이 장군은 당시 부사단장으로 필자와 함께 근무한 인연도 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참조) 한 중령은 미국 해대원 유학 복귀 후, 필자가 근무하던 무적태풍부대의 인근부대의 대대작전장교로 배치받아 오랜만에 친분을 나눌 수 있었으나, 워낙 우수한 장교인지라 군단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헌데 보직된지 얼마 안되어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들의 순국은 당시 그들을 군생활의 멘토로 삼고 있던 필자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한 “추락 당시 수행원 모두가 이 장군을 끝까지 보호하려 장군을 감싸고 있었다”라는 사고수습자가 전해준 증언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숙연케 했다. 이 장군과 참모 및 동기생 한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바쁜 작전보좌관직을 수행하던 필자도 참모에게 보고후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전역한 병사들까지도 포함한 수많은 장병이 조문했던 7군단 사령부의 장례식장은 애도를 표하던 그들의 안타까운 눈물바다였다. ‘시졸여애자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故 可與之俱死)’, 즉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했다. 대전 현충원의 묘비 번호를 1048번부터 1052번까지 나란히 부여받고 안장되었고, 사랑하는 동기생 한 중령은 새로운 군번인 묘비번호 ‘1-203-1051번’을 부여받았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다가오자 먼저 떠난 전우들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발렌티누스는 사랑을 위해 순교했다. 故 이현부 장군과 한황진 중령 등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순국했다. 비록 목적은 달랐으나, 이들의 순교와 순국은 남을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자신의 목숨보다 조국을 더욱 뜨겁게 사랑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오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립 현충원을 찾아 옛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면서, 전후방 각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의를 위한 희생의 길을 정진하며 묵묵히 책무를 다하고 있는 국가 안위의 마지막 보루인 우리 국군장병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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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1)]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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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0)]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s Day)는 꼭 30년 전인 1992년 2월14일 오전 선산에서 발생한 헬기추락 사고로 평소 존경하던 7군단장 이현부 중장과 사랑하는 동기생 한황진 중령을 떠나보낸 날이기도 하다. 당시에 7군단장 이현부 중장은 참모들과 함께 UH-1H헬기를 타고 경기도 장호원을 출발해서 작전통제 부대인 포항의 해병 부대 순시에 나섰다. 헬기안에서 군수참모 이원일 대령은 군단장에게 헬기 아래 내려다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주변의 지형을 설명했고 탑승자 모두는 이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이때즈음 탑승한 헬기가 경북 선산군 삼정산 7부 능선 상공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에 헬기가 요동쳤다. 이어 헬기의 뒷날개가 떨어져 나가더니 균형을 잃고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공포와 당혹감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추락현장을 발견한 마을주민과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이현부 군단장은 “부락을 피해라”고 지시했고 이에 정조종사 이지성 대위는 좌측으로 쏠리며 급강하하는 헬기가 부락을 피하도록 조종간을 잡고 안간힘을 썼다. 또한 참모들과 수행원들은 군단장을 살리기 위해 이 중장의 몸을 겹겹이 껴안았다. 그러나 결국 헬기는 인근 과수원으로 추락했다. 사고 당시 배터리의 전원을 떼어내려다가 우측 문밖으로 튕겨져 나온 부조종사 이수호 대위는 헬기추락 현장에 나타난 마을 주민들에게 “빨리 배터리를 제거해라. 그렇지 않으면 기체가 폭발한다. 군단장님을 살려야 한다”고 절규한 후 실신했다. 이 사고로 탑승장병 10명 중 7명이 현장에서 순직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끝까지 군단장을 껴안으며 지키려고 했던 작전참모 허정봉 대령, 군수참모 이원일 대령, 감찰참모 노용건 중령, 비서실장 한황진 소령, 전속부관 서상권 중위와 조규성 상병은 머리를 다친 군단장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군단장 지시에 따라 추락하는 헬기가 부락을 피하기 위해 조종간을 잡고 안간힘을 썼던 조종사 이지성·이수호 대위와 보조승무원 문기남 상병 등 3명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며 부상을 입었지만, 정조종사 이지성 대위는 사고 후유증으로 한달 만에 군단장 곁으로 떠났다. 육군 사고조사반은 ‘사고 원인을 기상이변에 의한 프로펠러 손상’이라고 발표했고, 순직 장병들은 영결식을 거쳐 이현부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다른 순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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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0)]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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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9)]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육군사관학교는 매년 통상 300명 정도가 입교한다. 필자의 동기들도 약 290명이 청운의 꿈을 안고 입교했으나 45년 동안 불의의 사고 등으로 16명이 운명을 달리했다. 전체 인원의 약 5% 정도 즉 20명 중 1명이 순직 및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중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출중했고 충성심도 강했지만 국가 안위를 위해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순국한 동기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에서 새로운 임무를 시작한 지 100일이 넘어 4개월째 되는 1992년 2월이 되었다. 2월14일은 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s Day)이고 이에 대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군(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여성에 대한 사랑이 전투력을 약화시킬 것이란 우려에 청년 군인들에게 결혼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결혼시켜 주던 사제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발렌티누스였다. 그는 곧 반역죄인으로 지목돼 서기 269년 2월14일 순교했고, 이를 기념해 연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풍습으로 전해지게 됐다. 당시 발렌티누스는 군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는 수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병영에도 매년 이맘때면 예쁜 초콜릿과 사탕, 애인 사진 등이 곳곳에 전해져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에서도 장병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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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9)]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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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8)]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군사안보지원사령부(전 기무사령부)는 북한 해커의 지령을 받아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군의 지상전술C4I체계(ATCIS), 한국군합동지휘통제체계(KJCCS) 해킹 시도에 도움을 준 정보분야 업무를 담당한 A대위를 국가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4월28일 구속 기소했다. 수사 결과 A대위는 장교 임관 후 2020년 3월쯤 민간인 대학 동기 소개로 북한 해커와 서로 연락하게 됐고,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포섭됐다. 이후 최근까지 그는 북한 해커 지령에 따라 군사기밀 및 군사자료를 수회에 걸쳐 전송하고 4800만 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대가로 수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못 찾을 때를 비유한 사자성어로 흔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의미이다 실제 등잔불 자체는 전기가 없던 시절에 방을 환하게 비출 수 있을 정도로 밝고 요긴하게 쓰였는데 등잔 밑은 그 불빛에서 나온 그림자에 가려지기 때문에 오히려 어둡다. 당시에 사무실에서 전관예우 및 텃세에 따른 기무부대 출신과의 차별화된 점검으로 필자가 소속된 요원들은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덕분에 철저한 보안태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정보분야에 근무하던 A 대위가 국가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된 사건과 마찬가지로 보안을 가장 중시하는 정보분야 또는 기무부대 출신 장병들의 보안태세가 오히려 더 취약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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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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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8)]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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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7)]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휴대용 수첩 분실 사건은 보안의식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지만, 항상 작전계획 등의 비문을 다루는 업무를 수행하는 필자에게는 원활한 비문 관리에 매우 제한이 많았다. 평소에 참고하는 자료 및 현황이거나 새롭게 작성하는 공문이나 보고서가 대부분 비밀문서이거나 비문에 준하는 서류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대의 보안업무를 감독하는 기무부대원들은 불시에 사무실의 보안태세 확인 점검을 계속하였다. 실무자들이 업무를 하다가 잠시 자리를 이탈하거나 퇴근 후에도 업무를 하던 책상 위에 서류, 작전계획 및 비문의 방치 또는 무단 반출 등을 확인하는 기무부대원들이 사무실에 들락거렸다. 한편 사단사령부 상황실 벙커 사무실에는 비문관리 등의 보안업무를 전담하는 정보처 간부들도 작전처와 같이 사용했다. 당시의 정보보좌관은 대위 시절에 기무부대에서 근무했던 장교였는데 필자의 부서원들과 차별화된 점검을 받았다. 그는 책상 위에 ‘정보보좌관 책상’이라고 크게 써놓고 퇴근하면 기무부대원들은 전관예우 차원에서 점검을 생략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뜨여 기무부대의 텃세가 심함을 느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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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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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7)]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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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6)]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작전보좌관 보직에 부임하자마자 ‘통일‘92-2워게임 훈련’에 참가한 것은 새로운 임지에서의 적응을 더 빠르게 만든 동시에 군사보안에 대한 경각심을 재차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워게임 훈련장에는 각 부대의 작전계획에 의한 상황판과 자료들이 차고 넘쳐났다. 24시간 계속 진행되는 가운데 워게임 요원들은 임무를 교대했고, 퇴근시에 혹시 작전계획 등의 비문이 무단 반출되는지 확인하는 기무부대원들의 번쩍이는 안광은 눈부실 정도였다. ‘통일‘92-2워게임 훈련’이 끝나자 필자는 지형을 숙지를 위한 정찰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부대 주변 봉암저수지 근처의 독립가옥 및 주요 고지 등을 살펴보다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했는데 휴대용 수첩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정찰 및 워게임을 하며 기록한 사항 등은 비문 등재를 안했지만 중요 내용이 많아 만약 그 수첩이 불순분자 손에 들어가면 큰 보안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휴대용 수첩 분실이 추정되는 정찰지역으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갔다. 아마도 정찰시에 잠시 수첩을 차량 본넷트에 올려놓았다가 깜박하고 그대로 출발하여 분실한 것 같았다. 따라서 그 주변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한집 두집... 계속 확인했지만 모두 못 봤다는 대답이었다. 낙담하며 점심 식사했던 식당에 들어갔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동네 아저씨가 발견하고 기무부대에 신고하려고 한다”는 고마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나 만약 동네 아저씨가 이미 기무부대에 신고했다면 불명예스런 사건이 될 수도 있어 급하게 그 아저씨 집을 찾았다. 다행히도 그는 아직 신고를 안했고, 자신도 청년 시절에 군생활 경험이 있어서 수첩을 보고 중요한 것 같아 보관하고 있었다며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뿜은 필자는 폴더 인사를 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그후 작전보좌관 근무를 하면서 군생활 경험에 따른 보안의식으로 불명예스런 사건 발생을 막아준 동네 아저씨를 수시로 찾아뵈었고, 덕분에 그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민원도 해결하며 친해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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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6)]등하불명(燈下不明)이 된 정보/기무 출신의 보안태세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