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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5)]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어느덧 짧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 절반을 넘어 한달정도 남겨둘 때인 3월말이 되었다. 교육기간 두달동안 각별하게 가까워진 룸메이트 정수완 동기는 교육종료 후에 다시 만나기가 힘드니 포항과 영덕 사이에 위치한 청하의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곳 인접에는 청송 주왕산이 있고 마침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상관으로 근무했던 차철이 선배가 대대장을 하고 있어 함께 찾아가기로 했다. 해발 721m인 청송 주왕산은 바위, 폭포, 계곡 등의 산세가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아름다운 절경이어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중생대의 마지막 지질 시대인 백악기에 주왕산 일대는 거대한 호수였다. 약 7천만년전 이 호수의 퇴적암층을 뚫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이 최소 9차례 이상 있었는데,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응집하면서 거대한 암벽이 형성됐고 이후 침식과 풍화를 거쳐 오늘날의 수려한 모습이 되었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석병(주왕)산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이했다고도 하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외에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제1폭포에 있는 급수대의 안내판에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고 적혀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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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4)]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대범함이 돋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큰 바다는 맑고 흐린 물을 버리지 않고 모두 받아드린다는 명언 ‘대해불기청탁(大海不棄淸濁)’이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마져 들었다. 김종업 선배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마산고, 육사를 거쳐 멋있게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군 생활 내내 ‘선도수련’으로 일관하여 예편과 동시에 기를 실천과 학문으로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골프, 도를 만나다’를 필두로 ‘보통사람, 나를 찾다’ 등 많은 ‘기(氣)’관련 책을 저술했으며, 가천대, 명지대 등에서 ‘명상’과 ‘단전호흡’이라는 과목으로 10여 년간 강의했다. 현재는 사단법인 ‘도나누리’의 이사장으로 개량한복 껍데기를 즐겨 걸치며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 수련하는 ‘기’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대대장반 교육을 받으며 남해 대대와 거창 대대를 방문했을 선배 대대장들은 후방인 2군지역에 근무하면서 느낀 지휘 및 상하급 관계에서 지저분한 비합리성에 대해 똑같이 언급했다. 헌데 사관학교에서 ‘안일한 불의 길보다 험란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라는 사관생도 신조를 외치며 각인됐던 두 선배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상이했다. 남해의 장 선배는 정면으로 도전하며 그것을 맞부딪혀 극복하려 했고, 거창의 김 선배는 그 것 마져도 포옹해 버렸다. 당시 후방지역의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관료로서 썩어 문드러지는 군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꿋꿋이 나름대로 바르며 특색있게 추진해나가는 두 선배의 모습에서 고독과 강한 투쟁의식을 감지했다. 특히 지역 주민, 기관장들과 원활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김 선배의 능력과 배포는 정말로 높이 살만 했고, 후배들이 찾아왔을 때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더 가르쳐줄려는 지혜와 여유를 가져야 함을 다시 한번 더 느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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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3)]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거창 대대장인 김종업(육사36기) 선배는 사관생도 시절부터 탁월한 리더십으로 선후배간에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으며 동기회장 등 요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었고, 필자와는 육사에서 같은 생활관의 선배로서 지도를 받았고 현재까지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대대장 근무 2년차에 접어든 김 선배는 당시의 사조직 관련 소동과 총기오발 사건 등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마침 정수완과 김종완 동기가 함께 동행하여 위로도 해드리고 회포도 풀겸 거창골짜기를 찾았는데 우리는 그의 의연한 모습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대대장을 어떻게 해야되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그는 “지휘는 기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말고, 더 잘보일려고도 말고, 건강하게 즐기면서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해라”라며 찾아간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조언을 해주었다. 게다가 “사향은 아무리 보자기로 싸도 냄새가 나며, 송곳은 호주머니 속에 넣어도 튀어나오는 법(囊中之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신은 선택한 자에게 시련을 주신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위기가 호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면돌파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추진력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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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2)]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짧은 3개월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지만 룸메이트인 정수완 동기와 각별하게 친해지는 12주간의 시간이었다. 정 동기가 대대장반 교육 수료후 부임할 남해대대 방문은 적지않은 교훈을 주었고 우리는 진해 인접의 다른 선배의 대대도 찾아가 장단점을 분석하고 밴치마킹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이번에는 거창대대를 찾았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63~165)] ‘벤치마킹은 창조적 성공의 지름길’참조) 거창은 신라 때는 거열군(居烈郡)이라 불렀고, 거타, 거열 등의 이름이 음운상 유사성이 있어 자타국이라는 나라가 여기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현재 사용하는 이름인 거창군은 통일신라 경덕왕이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할 때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경남 서북부의 백두대간 자락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산에 둘러싸인 산간분지 지역이며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대 국립 공원 사이에 자리잡아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덕유산 국립공원과 가야산 국립공원이 이 군에 걸쳐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세 나라의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뺏고 뺏기는 전투가 삼국 통일 전까지 계속해서 있었다. 이후에도 김천, 대구, 함양 및 전라북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었으나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함양으로 그러한 이점이 많이 넘어간 상태이다. 6.25남침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인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거창군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존재한다. 이외에 수승대, 월성계곡, 금원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수승대에서 월성계곡 쪽으로 가는 도로 옆으로 보이는 계곡 풍경이 정말로 장관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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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1)]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음날 오전에 함께 찾아간 곳은 남해섬의 유명한 금산과 보리암이었다.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짖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 했다. 이후 청년시절의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할 때 성공하면 비단으로 보광산을 감싸겠다고 약속했고 결국 조선왕조를 창업했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이름을 비단 ‘금(錦)’자를 사용한 금산(錦山), 절 이름을 보리암(菩提庵)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갓 기이한 형상을 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눈에 볼수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주로 군인, 경찰들을 포함한 공무원 등 많은 신도들이 이성계처럼 꿈을 이루기 위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쪽빛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수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 동물원으로도 불린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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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0)]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주 일주일간의 수업이 끝나면 토요일 동두천으로 귀가하는 것을 포기하고 룸메이트인 정 동기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남해 지역을 정찰하고 전임자에게 부대 특징을 파악하며 지휘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장연석(육사35기) 선배 부대를 찾아갔다. 4년전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경비과장으로 근무하던 장 선배는 자신이 필자를 추천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 비교적 잘 근무했다는 소문에 대해 대견해 했고, 필자는 비록 수방사 못지 않은 고생은 했지만 대과 없이 업무를 하고 진급하여 대대장반에 올 수 있게 여건을 만든 장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정수완 동기는 자신이 취임할 대대의 전임자를 자연스럽게 만나 사전에 부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에 고마워하며 이 것 저것 많이 질문했고 장 선배는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본인이 느꼈던 병력관리의 애로점 및 착안사항과 지역 주민, 경찰들과의 합동작전이 성패의 지름길이라는 해안 대대장 근무의 기법을 알려주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부대와 지역 특성에 관한 설명을 마치고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층 더 가깝게 소통하는 기회도 되었다. 밤이 깊어 갈 무렵 장 선배는 “남해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명소가 있고, 얼마전에도 모 선배가 이곳을 찾았다며 다음 날인 일요일에 직접 안내하겠다”며 숙소로 돌아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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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은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제2공화국 시절에 부패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정군 운동'을 벌이다 '항명 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 이후 그는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5.16군사정변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쿠데타 성공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다시 예편했다. 제3공화국 군사정부에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강력한 정보기관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대외 정보수집을 주임무로 하는 CIA를 벤치마킹하여 만들었다지만 실제로는 국내 방첩 위주였던 FBI모델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실은 철저한 박정희 정권의 호위조직이었고, 중앙정보부의 표어인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또한 김종필의 작품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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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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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보던 중대장이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여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였다. 이후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32명만이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1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장교로 배정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어 6.25남침전쟁전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을 만나 결혼하고 박정희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한편 정보국의 북한반장 김종필은 이미 전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북으로 정찰요원들을 급파했지만 전원이 연락 두절되었고, 1950년 6월25일 새벽 육군본부의 당직 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북한군이 침범했다는 소식에 전면전임을 직감하고,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및 육본의 각 국장들에게 상황을 전파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일개 중위였던 김종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후 195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주의 포트 베닝(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연수를 수료했다. 이 때 딸 예리를 얻었는데 부인 및 가족들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6·25남침전쟁 후반부인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6사단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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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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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 총리는 1926년 1월, 충남 규암면장이던 부친 김상배의 7남 중 5번째로 태어났다. 부여보통학교와 공주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두들겨 맞고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다가 면장이던 아버지가 빌어 겨우 빠져나왔다.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44년 주오대학예과(예비과정)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왜 전역(戰役, 병역 의무)에 참여하지 않나?”라며 시비를 걸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자퇴원서를 던지며 도망치듯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또 때려눕혀 결국 일본 육군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던 풍운아였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면했지만 보복 조치로 산간 오지 학교로 발령이 났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했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다시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는데 5.16군사정변의 동지 김용태와 동기생으로 만난다.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충남 온양의 육군 13연대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해방 정국의 혼란 상황에서 당시 군대의 악폐습과 가혹 행위를 못 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용태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옛 황금좌극장(현 국도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김종필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재입대하겠다고 하자 탈영이 흔하던 전쟁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김종필을 받아들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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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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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부대 방문자 중 한 명인 신민주공화당 대표였던 김종필은 사병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병사들을 만나 격려하겠다고 통보하여 작전처뿐만 아니라 각 참모부 모두가 더 바빠졌다.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인 김종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오른 뒤,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부대 방문 당시에 그는 1992년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해(DJP연합)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뒤 두번째 국무총리직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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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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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대의 주요 임무가 부여되었을 때 필자가 속한 작전참모부에서는 총괄 업무로 매번 마지막까지 남아 종합을 하는 것 때문에 피로가 쌓여간다. 하지만 작전은 계획하고 진행을 추적하는 주무 부서이다. 따라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 그 세부추진은 각 참모부/기능별로 임무를 분담하여 시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종합 업무로 피로가 과중되는 것을 오히려 주무 참모부라는 긍지로 승화시키며 즐거워했다. 필자가 승리부대 소대장과 수방사 작전장교 시절을 통해 계속 인연을 맺어왔던 당시의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은 각 참모부를 총괄하는 참모업무를 하기 위해 필자에게 용병술에 대해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써먹을 놈에겐 의리를, 불안해 하는 놈에겐 인정과 신뢰를, 활용할 놈에겐 격려와 확인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하며 “모든 업무와 부대운용은 조직활용이 중요하다”는 진리와 철학을 강조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인사, 군수 등 각 참모부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안내와 의전은 인사참모부에서 방문자에게 보여줄 장벽 피복류 및 주요 장비 전시와 사병식당에서의 식사준비는 군수 참모부에서 방송 장비와 통신 지원은 통신대장이 책임지고 각각 준비를 했고 사전에 사단 참모장이 준비 사열까지 시행했다. 헌데 모든 행사는 첫인상인 회의실에서의 부대 현황 보고시에 성패가 거의 결정되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방문객별로 어떤 내용으로 보고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했다. 더불어 사단장은 환등기, 자막교체, 회의실 바닥 정비 등도 보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작전참모 김 중령은 사전 준비된 자료 등을 활용하여 번개불이 튀는 듯한 기발한 착상과 기동력으로 방문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용어만 선정하여 심금을 울리게 만든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참모업무 수행중 사단장의 보고 연습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도록 지휘관에게 시간을 많이 보장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하도록 독촉했다. 물론 사단장이 준비하다가 추가로 보강해야 될 소요가 발생되기도 하여 더 바쁘긴 했으나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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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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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총재에 앞서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위문했던 김대중, 김종필 대통령 후보들과 이틀 뒤인 30일에 부대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떠나자 1992년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중에 강영훈 총재의 방문은 긴 여운을 남겼다. 그가 걸어온 길에서 보인 참군인과 목민관으로 귀감이 된 삶과 부대방문시에 그가 보여준 군을 사랑하는 마음과 본인의 절도와 기개있는 덕담은 다른 방문자들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다. 한편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으며 최고의 총리로 선정하기도 했다. 정두언의 증언에 의하면, 강 총리는 사표를 책상안에 넣어놓고 일을 했으며 재임 중에 3번이나 사표를 냈었다고 한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인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인사들의 격려 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고 필자는 앞으로의 삶의 롤모델을 강영훈 장군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故 강영훈 장군의 삶과 방문 당시의 모습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던 기독교 신자들처럼 고대하던 국민들이 드디어 진정한 대통령을 만나는 시간 같았다. 그는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영면하고 있지만 국민을 사랑하며 가까이 함께했던 완벽한 대통령감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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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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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는 이러한 자료 등을 활용하여 번개불이 튀는 듯한 기발한 착상과 기동력으로 방문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용어만 선정하여 심금을 울리게 만들었다. 특히 게재된 사진처럼 김 참모가 직접 제공한 자료로 만든 ‘문덕(文德)을 갖춘 무인(武人)’과 ‘무인기성(武人氣性)을 갖춘 문인(文人)’이라는 강 총재 본인 모습의 슬라이드 보고서를 접한 강영훈 총재는 극찬하며 감동했다. 이때 김 작전참모는 “군문 시절과 당시까지 총재님의 발자취는 우리 군 후배들뿐만 아니라 사회인에게도 많은 귀감이 된다며, 지하철에서 만난 청년과 조크하며 담소한 일화는 생생하게 기억됩니다”라고 보고하자 강 총재는 감사함과 회한에 두눈을 잠시 감았다. 회의실에서 부대현황 보고를 모두 받은 강영훈 총재는 감동에 젖어 극찬하면서 논어에서 자하(子夏)가 말한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사이우즉학, 학이우즉사)” 즉 “벼슬을 하면서도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닦고, 학문을 닦다가도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라며 “일에 나아가기 전에 학문을 닦음은 물론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통해 겪게된 산전수전의 고난의 시간을 학문으로 극복한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용장(勇將)이자 덕장(德將)이었다. 그는 부대 격려 위문을 통해 군후배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덕담을 던지며, 벽창호처럼 올곧은 참군인의 길을 걷고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저력을 지닌 적십자사 총재로서 자랑스런 군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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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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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1)]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의 1992년 연말은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생도시절 각종 힘든 훈련을 하면서 외쳤던 ‘극한 속의 여유’란 구호의 의미를 절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부대의 자긍심도 높힐 수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행사를 준비하는 실무자에게 죽을 맛을 느끼는 고생이었다. 마지막 방문자인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를 영접하기 2일전인 12월28일에 전설적인 삶을 주도했던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가 부대를 찾았다. 이때 군사령부에서는 주요 인사들이 유독 무적태풍부대로 집중해서 방문하는 것이 이상하다며 원인을 조사하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와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부대 방문행사 준비를 하면서 신임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육사34기)의 자료 수집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김 참모는 육군대학에 발간되는 ‘군사평론’을 분야별로 분류하여 책자로 만들어 수시로 참조했고, 강 총재에게 보고할 슬라이드를 창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인접 사단 및 군단의 보고내용을 수집하는 등 어떠한 임무를 부여받더라도 총체적인 자료로 참신한 업무보고서를 작성토록 노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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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1)]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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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0)]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7년의 재임기간 중에 무적태풍부대를 인상적으로 격려 방문했던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아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된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회장 등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평소에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었으며 늘 국민과 가까이에서 함께하다 2016년 5월10일 95세로 타계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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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0)]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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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70년부터 그는 박정희정권을 용납하게 되었으나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이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과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주영대사에 임명되었고 1983년 12월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1984년 12월 이후 주로마 교황청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로 첫 남북총리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을 주도했다. 그는 총리 시절에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으며, 1989년 일본 쇼와 천황의 장례식 조문도 참석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충분하게 했다. 총리를 퇴임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매년 수시로 전방부대를 위문했는데 1992년 말 당시 대통령선거의 후보들처럼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방문했다. 또한 그는 7년간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와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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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