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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1)] 통합메트릭스 신화를 만든 정형진 장군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대와 70년에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에 따라 남한의 혼란을 유도하고 지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1968년 1.21사태와 10월~11월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3월16일에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6월에는 흑산도에 무장공비 침투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연달아 북한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에 보복공격을 요청하는 한편 국민의 반공체제 강화에 주력하여 1968년 4월에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때를 맞춰 1969년 GOP 경계를 담당했던 무적태풍부대에서도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고 사단예하 80연대의 작전지역에서 논두렁에서 비트를 파고 숨어있던 무장공비를 연대지원 포병부대 병사들이 발견하여 사살하는 전과도 올렸다. 필자가 근무하던 1993년에 80연대장은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의 정형진 대령(육사30기)이었다. 그는 필자가 처음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던 중동부 전선의 승리부대에서 성공적인 중대장 근무를 했는데 7년 뒤에 우연하게도 필자가 그 중대장으로 보직되는 등 유독 인연이 많았던 선배였다. 게다가 정 대령이 지휘한 80연대는 수많은 간첩사건과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던 1969년도에 필자의 장인이 연대장으로 재직했던 부대이기도 했다. 필자의 장인 故강철 대령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해방후에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서북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공산당의 폭정이 너무도 가혹해 결국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이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다가 6사단 7연대에서 병사로 입대했을 때 6.25남침전쟁이 발발했다. 헌데 입대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응시했던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3기생에 합격 통지서를 받아 종합학교(전시사관학교)1기로 교육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1사단에서 일선 소대장, 대대참모, 소총중대장으로 생사의 갈림길인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이후 비둘기부대 작전참모로 2년 동안 월남전을 참전하여 대령으로 진급한 장인은 80연대장을 마치고 특전사 작전참모, 육군본부 교육과장직을 수행했다. 마지막 보직인 1사단 부사단장으로 땅굴탐지 작전을 지휘하다가 25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는데, 2년 뒤에 시추했던 그곳에서 제3땅굴이 발견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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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10)]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국방개혁 시행을 위해 기동군단이 2개로 증가함에 따라 무적태풍부대는 소속이 바뀌어 인접 군단 예하부대로 전환되었다. 이에 소속 변경에 따른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소속 부대의 지휘관이 임석하여 각 지역별로 전술토의를 했다. 그날도 변경된 상급부대의 지휘관인 조성태 군단장(육사20기)이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감제고지에서 예하 사단장들과 전술토의를 했다. 필자는 이영대 사단장을 수행하여 참가했다. 무적태풍부대는 책임지역이 광적면에 사선형 방어를 하고 있어 사진속의 그림과 같이 계단형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전술토의에서 사단장의 지침을 받은 필자는 가용병력을 고려시에 임진강 이남의 거점까지 담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조 군단장은 사단의 개념을 수용하며 인접 부대에 해당 거점 방어책임을 넘겨 주었다. 성공적인 토의를 마치고 복귀하는 짚차안에서 사단장은 필자에게 발표를 잘했다고 격려했다. 새로운 군단장이 우리의 건의를 수용함에 따라 사단이 후방거점의 방어 및 관리책임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하게 되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기에 맞춰 지속된 각종 전술토의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육훈련 제일주의 추진에 따라 주요 산악을 등반해 작전계획과 지형을 숙지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술토의와 인접 및 상급부대 역사자료를 정리해 만든 ‘작계변천사’는 전투지휘검열시에 장려사항이 되어 우수부대 표창 수여에 기여했고, 사단장의 신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또한 합동참모본부의 중요 작전부서 과장인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 요구했던 합참 차출을 보류함에 따라 결국 좋은 기회를 놓쳤다. 그후 함께 근무한 경우가 전혀 없었다. 허나 그는 감사하게도 군생활을 마칠 때까지 멘토이자 스승으로 필자를 이끌어 주었다. 아마도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이었던 그는 모두가 선호하는 합참의 좋은 보직임에도 불구하고 현 직책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보류시키다 합류 못한 필자를 오히려 좋게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군인은 현재 모시는 직속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며 복종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이고 애국이다. 이런 군인정신으로 전장병이 무장해야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터의 기로에서나 최악의 조건과 상황에 부딪히는 전쟁에서도 임무를 완수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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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9)]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④
전투지휘검열 평가를 받기 위해 작전지역으로 행군하는 모습과 예하 연대 훈련 평가를 위해 사단에서 지원된 화기가 장착된 짚차 [사진=국방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투적 사고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부대가 전투준비태세를 군장결속과 물자분류에 만 우선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중요한 중요한 ‘목’지역을 적 부대가 선점하기 전에 우리 병력으로 먼저 점령해 전투준비를 하는 등의 전투적 사고가 매우 중요하다. 군인은 이런 전투적 사고로 항상 전투준비를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만 하고, 그 일환으로 전술토의도 하게 된다. 이러한 전술토의를 하는 목적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현재 계획의 미흡한 분야를 보완하고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토의이다. 두 번째는 참가 대상자들이 그 내용을 잘모르기 때문에 교육 목적상 참가자들이 발표와 토의를 하는 경우이다. 마침 당해년도 가을에는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평가 및 검열인 군사령부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어 수검 준비를 위한 자체 전술토의도 계속 되었다. 필자는 보다 성공적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위해 전술토의를 진행하면서 지휘관이 교체 될 때마다 작전계획이 바뀌는 현실을 보고 ‘작전계획 변천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를 위해 문서 보관소를 뒤지고 역대 참모 및 지휘관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바쁘게 전술토의 및 전투지휘검열 수검준비를 하던 어느날 사무실의 전화벨이 힘차게 울려 수화기를 들어보니 합동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옛 직속 상관(전 승리부대 작전참모)의 목소리였다. 그는 합참의 중요 작전 및 전략부서 과장으로 활약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지금 주요업무가 많아 필자가 필요하니 당장 그곳으로 와서 함께 근무하도록 차출하겠다”는 통보였다. 필자는 너무 아쉬웠다. 작전 직능의 장교라면 누구라도 먼저 선점하고 싶은 좋은 보직이었으나 현재 부대의 상황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전술토의가 지속되고 곧 사단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이 있어 존경하는 사단장의 얼굴이 순간 스쳐갔다. 필자는 “참모님, 우선 가겠습니다. 헌데 곧 있을 전투지휘검열이 끝나고 가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야, 사단이 중요해? 모든 사단을 관장하는 합참이 중요해? 우선순위를 알아야지..., 또 니가 없어도 사단의 전투지휘검열은 받을 수 있어... 우선 선조치할터이니 기다려...”라고 강요했다. 필자는 작전 직능이면 누구나 먼저 보직을 받고 싶어하는 합참의 주요 부서에서 발탁해 준 전 참모가 너무도 감사했다. 하지만, 현재의 직속상관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이 신뢰하며 아끼는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부하의 도리를 다해야 했고, 전술토의 등의 산적한 중요한 업무들과 특히 사단장의 중요한 평가인 전투지휘검열 수검을 위해 모든 것을 총괄하여 준비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당장 갈 수가 없어 양해를 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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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8)]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사령부의 간부들이 오른 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의 글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거의 닳아 없어져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감악산비가 삼국시대에 세운 비석임은 거의 확실하다. 북한산 순수비와 형태가 비슷하여 진흥왕 순수비, 진평왕의 순수비 또는 설인귀비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2019년 9월 이 비석의 몇 글자가 해독되었는데, 광(光), 벌(伐), 인(人) 등 글자들이 있었으므로 영토정벌 후 세운 순수비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쏠렸다. '이벌찬'의 벌처럼 신라의 관등명을 뜻하는 낱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근에 칠중성이 있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칠중성 전투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새로 글자가 확인되면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논문도 나왔다. 삼국시대에도 임진강 중류를 낀 군사적 요충지였듯 6.25남침전쟁 중에 치열하게 벌어진 설마리 전투(글로스터 고지 전투 또는 임진강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다. 설마계곡 입구에는 이를 기리는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김희철의 전쟁사](22)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저지시킨 영국군의 설마리 전투’, 2020.02.03. 참조) 또한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감악산은 현재에도 파평산과 더불어 주요 감제고지라는 군사적 요충지라 주변에 많은 군부대도 주둔하고 수시로 전술토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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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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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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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4]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사령부의 전투지휘검열시에도 군자산 대대장 김형배 중령은 수세적으로 검열 수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공세적인 자세로 임했다. 그는 검열관 전원에게 ‘전투지휘 검열관 초청 편지’를 사전에 보냈고 검열관들은 검열전에 상쾌한 기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검열관들의 지적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부대로 검열나오는 것을 회피하는데, 김 중령은 오히려 자신의 부대를 검열해 달라는 적극적인 구애의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투지휘검열을 받기 직전에 발생했던 예하 부대에서의 월북사고와 맞물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군자산 대대를 방문했던 전투지휘 검열관들은 하나같이 군자산 대대를 칭찬했고, 대대장 김 중령의 노력과 우수성 및 지휘능력을 높이 치켜 세웠다. 초청편지 사건은 이후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면서 신화처럼 남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단의 각 참모부는 연말 우수부대 선정시 전 년도에 이어 군자산 대대를 ‘선봉대대’로 선정했다. 하지만 선봉대대 2연패로 인해 예상되는 타 대대장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 ATT(전술훈련 평가) 우수부대로 조정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필자에게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얼마나 오랬동안 모셨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가 중요하다. 허심탄회하게 심중을 드러낼 수 있어야 인정받는 부하가 될 수 있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라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던 김 중령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92년 3월에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단 정보참모로 영전한 뒤에 작전참모까지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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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4]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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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3]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야전 숙영지의 비좁은 텐트 안에서 신임 작전보좌관인 필자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주던 김형배 중령은 어떠한 임무가 부여될 때,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능력을 평가받는다며 진지공사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비록 자신 부대의 별도 임무 수행 때문에 진지공사를 늦게 시작했더라도 김 중령 대대는 타부대 보다도 일정을 앞당겨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쉬는 병력 없도록 간단없이 진지공사가 지속될 수 있게 철저한 계획과 사전 준비를 한 효율적인 ‘공정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형틀을 짜는 병사들은 대부분 병사가 잠이 들었을 때 작업을 했고, 대다수의 주력은 일과 개시와 동시에 분주하게 일했다. 이렇게 조직적인 업무 분담과 통합이 매우 중요했다. 또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높은 곳에는 간이 도르레를 이용해 시멘트와 물들을 운반시켜 병사들의 노력을 최소화 시킨 것도 유효했다고 성공담을 들려주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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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3]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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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2]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형배 중령은 추계진지공사를 위해 적암삼거리 옆 공터에 설치된 야전 숙영지 텐트에 있었다. 필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마음에 대대장 김 중령의 텐트로 들어서자, 그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의아해하며 던진 첫 마디에 움찔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철아, 니가 왜 여기에 왔니?” 수방사 작전장교로 근무했으면 선호하는 기계화 사단 등의 부대로 갈 수도 있었는데, GOP를 담당한 가장 평범한 부대로 배치를 받았냐하는 핀잔이었다. 그의 핀잔 속에 숨어있는 필자에 대한 진정한 아낌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가 현 부대와 수방사에서 근무했던 선배의 요청과 추천 때문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상황이야 어떻든 필자의 부대 배치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허나 오히려 필자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선배임을 재확인하면서도 그를 가까이에서 벤치마킹하여 야전에서 성공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였다. 왜냐면 그는 수방사 경비과장을 마치고 무적태풍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창의적이고 효율적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 결과로 선봉대대와 대대전술훈련 우수부대 등 많은 부대 표창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대대장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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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2]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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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1]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단장 이재관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 모락모락 피어났던 전입신고 다음날, 사단 책임지역 지형 정찰을 위해 사령부에서 출발했다. 필자는 지형 숙지를 위한 목적으로 책임지역 정찰을 출발했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선배가 있어 군자산으로 바로 향했다. 10년 전에 중동부 전선 대성산 기슭의 승리부대에서 인접 중대장직을 수행하던 그는 소대장 근무하던 필자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충고를 했던 선배였다. 당시 그는 필자에게 “김소위, 방금 대대장님은 이임 전날 그동안 지휘했던 부대에 애착이 있어 돌아보시는 것인데 자네는 상급자의 의도를 모르고 계속 점호를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하면서 “상급자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다. 오히려 삼촌이나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상급자를 모셔야 한다네...”라고 말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26) “군 생활의 딜레마, 상급자는 우리의 또 다른 적인가?” 참조) 그 충고를 듣고 필자는 상급자가 하급자 지적을 통해 혼을 내며 가르치지만, 하급자는 그 지적에 오히려 감사하며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서는 자세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군생활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험한 파도 속을 헤쳐나갈 수 있는 중요한 강점이 되었다. 또한 그의 가르침 덕분에 상하가 일치되어 '上下同欲者勝(상하동욕자승)'의 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군생활 기간의 실천 노력으로 이렇게 ‘직업군인 이야기’ 칼럼을 쓸 수 있게도 되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 선배는 김형배(육사34기) 중령이었고 당시에 군자산 대대장으로 추계진지공사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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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1]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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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0]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장실로 들어서자 난로도 켜지않은 싸늘한 사무실에서 두꺼운 장군용 잠바를 걸치고 책상에 앉아 사무를 보던 사단장은 함께 들어온 인사참모를 쬐려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짝 긴장하던 인사참모가 ‘사단장님께 신고’라는 구령을 붙였고, 이어 필자는 경례를 하며 “태풍, 소령 김희철은 1991년 10월28일부로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전입 및 보직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라고 우렁하게 외쳤다. 신고를 받은 사단장은 자리에 앉으며 ‘차한잔 가져와’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사단장 앞 테이블에 앉자 문밖으로 나가려는 인사참모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인사참모, 넌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야? 지난번 소원수리 내용에 대해 후속조치를 빨리 하라고 지시했는데 깜깜 무소식이야 .. 멍청하게는 ...”라며 다시 쏘아 보았다. 나가려던 인사참모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칫하다가 지금 보고서가 준비되어 있으니 곧 보고드리겠다면서 절절매며 더듬거렸고, 부동자세를 버텨주던 무릅까지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살벌한 분위기의 신고 자리에서 필자는 사단장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도 안나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다보니 어느새 뜨거운 커피는 방안의 차가운 온도와 분위기 때문에 아이스 커피가 되어 버렸다. 지휘관들은 자신만의 색(色)을 가지고 있다. 전전 사단장 이상호 장군은 ‘교육훈련’을 강조 했고, 직전 사단장 김길부(육사20기) 장군은 ‘전투준비’위주로 부대를 지휘했다. 당시의 사단장 이재관(육사21기) 장군은 ‘부대관리’를 중점으로 안전 사고 예방에 치중하여 지휘했다. 아마도 이재관 사단장은 ‘부대관리’를 강조하며 필자에게 사단 전체를 총괄하는 차원의 업무를 하는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무리한 부대운용에 의해 사고를 유발시키지 않도록 전입 신고 면담에서 지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허나 엄격하고 단호하며 거칠어 보이지만 에너지 절약을 강조할 때에는 사단장 본인이 가장 먼저 사무실에서 난로를 피우지 않고 두꺼운 옷을 껴입고는 추위를 견디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볼 때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이 장군은 사단장을 마치고 승승장구하여 4성 장군으로 진급했고 제1군사령관을 마치고 전역하여 재향군인회 부회장까지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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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20]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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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9]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쌀쌀한 가을 바람이 엄동설한의 겨울을 재촉하던 1991년 10월말 무적태풍부대 사단장실 앞에 필자는 사단 전입신고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최전방 부대의 가을은 청명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상쾌한 가을이 아니라는 것을 군생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왜냐면 시원하고 상쾌한 날씨라기 보다는 이미 겨울이 성큼 다가와 옷깃을 여미며 삭풍이 몰아치는 추위와 싸워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에너지 절약 운동으로 사무실에서는 난로도 못켜게 하여 내복까지 속에 껴입고 잠바까지 걸치며 난로를 피우는 한겨울보다도 더 추위에 떨면서 근무하는 실정이었다. 육사 3년 선배인 사단 인사참모는 사단장이 매우 까다로운 분이니 각별히 실수 없도록 잘하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며 오히려 필자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사단 전입 신고를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였던 수방사에서 출발한 필자는 내복도 안입고 야전상의만 걸치고 도착한 탓인지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에 적응이 힘들었고 인사참모가 긴장하며 던진 조언에 더 위축되었다. 긴장한 인사참모의 구령에 맞춰 몇 번의 신고 연습을 반복하고는 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위해 굳게 닫혀있던 사단장실 문을 노크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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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9]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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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8]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명칭이 ‘무적태풍부대’인 28보병사단은 6.25남침전쟁 직후인 1953년 11월18일 충남 논산에서 창설되었으며, 경례구호는 '태풍'이다. 부대마크는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폭풍우를 휘몰아치며 북진하는 태풍의 위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투에 임할때에는 북진의 교두보로서 적의 심장부를 일격에 무너뜨리겠다는 부대원의 결의를 담고 있다. 부대마크의 좌회전은 "영원불멸"을 상징하며, 바깥원은 "견적필살" "천하무적"의 총구를, 청색 바탕은 "정의"와 "평화"를, 백색은 "자유"와 "백의민족"을 의미한다. 창설 이후 강원도 사창리, 포천, 양평 등 4차례의 이동있었고 1966년 현 지역에 배치되어 중서부 전선의 최전방 GOP경계를 담당하고 있다. 부대가 위치한 연천군은 대표적인 안보관광지이다. 6·25남침전쟁 후 대부분이 수복지역으로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한탄강 유원지와 전곡 선사시대 유적지, 재인폭포, 감악산 비룡폭포 및 GOP지역 필승교 옆의 태풍전망대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또한 고려 태조와 혜종·성종·현종·문종·원종(충경왕)·충렬왕·공민왕과 고려조의 충신 정몽주 외 15인에게 제사를 지냈던 숭의전이 있고, 태풍전망대에서 보이는 비무무장지대에는 6·25남침전쟁시 치열한 전투로 유명한 김만술 소위의 베티고지도 있어 역사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헌데 부대창설 후 지난 69년 동안 44회에 걸친 대간첩작전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적 사살 63명, 생포 8명, 장비 노획 1,308점이라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던 28보병사단은 국방개혁 2.0으로 2025년에 해체될 예정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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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8] 아스팔트 수방사에서 비포장도로 무적태풍부대로 가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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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7]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사짐을 모두 싣고 운전석 옆에 어린 아들과 부인과 함께 앉아 남태령 수방사 아파트에서 새 부임지인 28사단으로 출발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작전과장 차철이 중령(육사32기)은 필자에게 “니가 전출을 가는데 이렇게 많은 장교와 부사관들이 새벽에 나와 이별을 아쉬워하며 환송해주는 것은 김 소령의 수방사 근무가 대단히 성공적이고 잘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어깨를 두드려두었다. 그런데 환송나온 선후배중에 당시 경비과장을 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가 필자에게 다가와 한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겠다며 “김희철, 너는 몰랐지만 내가 추천을 해서 28사단으로 배치된 것이니 가서 잘해라”라고 말했다. 필자가 배치받을 부대의 전임자 신현돈(육사35기, 전 1군사령관) 사단작전보좌관이 대대장으로 곧 취임하게 되어 후임자를 물색하다가 육사동기인 장 선배의 추천에 따라 야전군 사령부 인사처 보임과에 요청하여 필자의 보직이 결정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덕택에 기계화부대에서 경력을 쌓을 수있는 기회를 놓쳤지만 장 선배의 호의와 환송나온 동료들에게 감사했다. 또한 필자의 후임자이며 든든한 신뢰와 존경을 갖게 만든 신원식 동기가 육군대학 교관으로 재직전에 28사단 작전장교로 근무하였고, 당시 수방사 작전과장인 차 중령이 신 동기의 상관인 작전보좌관으로 함께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괄목상대(刮目相對)의 놀라움을 던져준 신 동기와 필자는 수방사와 28사단에서 작전관련 보직을 서로 맞교대하는 격이 된 묘한 인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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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7]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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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6]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출중한 업무 능력을 견지한 자랑스런 신원식 동기가 후임자로 내정되었을 때, 필자는 다음 보직이 걱정되어 새로 부임할 야전군 사령부 인사처 보임장교로 근무하던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생도시절 2년동안 같은 중대에서 각별하게 지냈던 그 동기는 “걱정하지 말라며 수방사 작전장교로 고생했으니 당시에 대부분 장교들이 선호하던 기계화사단으로 보직을 검토 하겠다”고 약속했다. 허나 얼마뒤에 그 동기는 다시 필자에게 “보직을 검토했는데 전방 GOP부대에 공석이 생겨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배치되었으니 양해해 달라며 선호부대인 기계화부대 배치가 불가하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예상되는 전장 양상이 단순한 보병부대가 아닌 탱크와 장갑차를 운용하여 속도와 충격효과를 중요시한 기동전 및 미사일 등을 활용한 화력전이다. 결국 필자는 미래 전장에서의 주력 부대인 기계화부대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된다는 희망과 모두들 선호했던 부대 배치의 기대감을 상실하고 초급장교 시절에 근무했던 GOP부대로 다시 배치되어 아쉬웠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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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6]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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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5]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전후방 각지의 부대에서는 바쁜 업무로 교범을 가까이하며 신교리를 연구하는 것이 일부 제한되어 육군대학 교관직을 경험한 장교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왜냐면 그들은 장교들을 가르치기 위해 최신 교리를 연구하여 야전에서 근무하는 장교들보다 군사 지식을 훨씬 더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수방사령관 이하 주요 간부들은 육군대학에서 최우수교관으로 선발되었던 신원식 소령에 대한 기대가 많았고, 그는 짧은 기간에 충분하게 능력을 발휘하며 인정받았다. 마침 합동근무 기간중에 필자가 새롭게 부여받은 업무를 신 소령에게 인계했는데, 그는 신교리에 따른 논리적이고 출중한 필력으로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고 그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필자를 힘들게 만들었던 00과장(당시 상황실장 겸 작전보좌관)도 그의 신교리에 입각한 논리적인 내용의 보고서와 자신감과 소신이 차고 넘치며 거침없는 언변에 반론 제기를 못하고 꼬리를 내리며 인정했다. 육군사관학교 시절의 ‘몽사과(夢史科)’로 불리던 ‘전사과’ 수업시간 중 잠에 쉽게 빠지던 대표적인 생도였던 신원식 동기는 “선비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해야 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라며 사자성어 괄목상대(刮目相對)를 만들게 한 여몽처럼 성장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생도시절 그는 주중에 밤낮없이 책을 읽었고, 이것도 부족해서 타생도들이 휴일 외출하여 여가를 즐기는 시간에도 도서관에 홀로 남아 계속 독서하며 키운 잠재력과 육군대학에서 충분한 학습으로 필자가 넘볼 수 없는 출중한 인물이 되었다. 곧 전방부대로 전출 가야하는 필자는 합동근무 기간 후임자 신원식 동기의 탁월한 업무 능력 과 소신과 자신감 넘치는 달변에 감복했고, 괄목상대의 놀라움은 오히려 든든한 신뢰를 갖게 했다. 전출가는 날 필자는 그에게 “앞으로 어느 곳에 있던지 언제라도 신원식 동기의 팬이 되고 편이 되어 지지하겠다”며 존경을 표했고 지금도 두터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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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15] 애환의 수방사를 떠나며 얻은 영원한 친구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