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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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⑪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서 다시 사병으로 복무하던 중 김종필을 눈여겨보던 중대장이 그에게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여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하였다. 이후 8기생 졸업식에서 우등상장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보병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이때 1,300여명의 8기 졸업생들 중 32명만이 육군본부로 배속됐는데 김종필 역시 그 중 1명이었다. 김종필은 정보장교로 배정되어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북한반장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어 6.25남침전쟁전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박영옥을 만나 결혼하고 박정희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한편 정보국의 북한반장 김종필은 이미 전선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북으로 정찰요원들을 급파했지만 전원이 연락 두절되었고, 1950년 6월25일 새벽 육군본부의 당직 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북한군이 침범했다는 소식에 전면전임을 직감하고, 채병덕 총참모장, 신성모 국방장관 및 육본의 각 국장들에게 상황을 전파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일개 중위였던 김종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후 1951년 대위로 진급했으며 미국 유학 장교단에 뽑혀 조지아주의 포트 베닝(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연수를 수료했다. 이 때 딸 예리를 얻었는데 부인 및 가족들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 6·25남침전쟁 후반부인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6사단19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을 제외하면 계속 정보 장교로 복무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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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1-1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 총리는 1926년 1월, 충남 규암면장이던 부친 김상배의 7남 중 5번째로 태어났다. 부여보통학교와 공주중학교를 졸업했는데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두들겨 맞고 공주경찰서 사상계에까지 넘겨졌다가 면장이던 아버지가 빌어 겨우 빠져나왔다. 이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44년 주오대학예과(예비과정) 독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인은 왜 전역(戰役, 병역 의무)에 참여하지 않나?”라며 시비를 걸던 일본인 선배를 때려눕히고 자퇴원서를 던지며 도망치듯 귀국한 뒤,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했는데 교생 실습 중 일본인 교감과 말다툼 끝에 또 때려눕혀 결국 일본 육군헌병대 영창까지 구경했던 풍운아였다. 역시 면장이던 부친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퇴교는 면했지만 보복 조치로 산간 오지 학교로 발령이 났으나 결국 버티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사표를 제출했을 때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다시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는데 5.16군사정변의 동지 김용태와 동기생으로 만난다.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충남 온양의 육군 13연대 사병으로 입대했으나 해방 정국의 혼란 상황에서 당시 군대의 악폐습과 가혹 행위를 못 이겨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탈영했다. 그렇게 서울로 올라와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용태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한심한 처지의 울분을 억누르며 지내던 중, 옛 황금좌극장(현 국도극장)으로 바람을 쐬러 갔다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와 마주쳤다. 김종필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극장 매점에 있던 교도대 중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털어놓고 재입대하겠다고 하자 탈영이 흔하던 전쟁이전 시절이라 중대장은 흔쾌히 김종필을 받아들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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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1-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부대 방문자 중 한 명인 신민주공화당 대표였던 김종필은 사병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하며 병사들을 만나 격려하겠다고 통보하여 작전처뿐만 아니라 각 참모부 모두가 더 바빠졌다.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인 김종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실 정치에 복귀하여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한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2만 표를 얻으면서 4위에 오른 뒤, 1989년 말 노태우, 김영삼과 비밀리에 의원내각제 개헌을 합의하고 3당 합당에 참여하였다. 부대 방문 당시에 그는 1992년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냈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연합해(DJP연합)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뒤 두번째 국무총리직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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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1-0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부대의 주요 임무가 부여되었을 때 필자가 속한 작전참모부에서는 총괄 업무로 매번 마지막까지 남아 종합을 하는 것 때문에 피로가 쌓여간다. 하지만 작전은 계획하고 진행을 추적하는 주무 부서이다. 따라서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 그 세부추진은 각 참모부/기능별로 임무를 분담하여 시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종합 업무로 피로가 과중되는 것을 오히려 주무 참모부라는 긍지로 승화시키며 즐거워했다. 필자가 승리부대 소대장과 수방사 작전장교 시절을 통해 계속 인연을 맺어왔던 당시의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은 각 참모부를 총괄하는 참모업무를 하기 위해 필자에게 용병술에 대해 한마디 충고를 해주었다. 그는 “써먹을 놈에겐 의리를, 불안해 하는 놈에겐 인정과 신뢰를, 활용할 놈에겐 격려와 확인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를 하며 “모든 업무와 부대운용은 조직활용이 중요하다”는 진리와 철학을 강조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인사, 군수 등 각 참모부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안내와 의전은 인사참모부에서 방문자에게 보여줄 장벽 피복류 및 주요 장비 전시와 사병식당에서의 식사준비는 군수 참모부에서 방송 장비와 통신 지원은 통신대장이 책임지고 각각 준비를 했고 사전에 사단 참모장이 준비 사열까지 시행했다. 헌데 모든 행사는 첫인상인 회의실에서의 부대 현황 보고시에 성패가 거의 결정되었다. 따라서 사단장은 방문객별로 어떤 내용으로 보고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했다. 더불어 사단장은 환등기, 자막교체, 회의실 바닥 정비 등도 보강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작전참모 김 중령은 사전 준비된 자료 등을 활용하여 번개불이 튀는 듯한 기발한 착상과 기동력으로 방문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용어만 선정하여 심금을 울리게 만든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참모업무 수행중 사단장의 보고 연습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하도록 지휘관에게 시간을 많이 보장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모든 것을 사전에 준비하도록 독촉했다. 물론 사단장이 준비하다가 추가로 보강해야 될 소요가 발생되기도 하여 더 바쁘긴 했으나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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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1-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총재에 앞서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위문했던 김대중, 김종필 대통령 후보들과 이틀 뒤인 30일에 부대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떠나자 1992년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들중에 강영훈 총재의 방문은 긴 여운을 남겼다. 그가 걸어온 길에서 보인 참군인과 목민관으로 귀감이 된 삶과 부대방문시에 그가 보여준 군을 사랑하는 마음과 본인의 절도와 기개있는 덕담은 다른 방문자들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다. 한편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국무총리실에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공직사회를 비평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총리의 권한과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한 사람’으로 강영훈 전 총리를 꼽으며 최고의 총리로 선정하기도 했다. 정두언의 증언에 의하면, 강 총리는 사표를 책상안에 넣어놓고 일을 했으며 재임 중에 3번이나 사표를 냈었다고 한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역시도 여소야대정국에서 정부의 행동반경은 크지 못한 상황에서, 노태우 정부가 강영훈 총리와 같은 신망 높은 인물을 중용해서 북방외교를 트고 변화하는 대외통상환경에 대응해서 경제체질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인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인사들의 격려 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고 필자는 앞으로의 삶의 롤모델을 강영훈 장군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故 강영훈 장군의 삶과 방문 당시의 모습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던 기독교 신자들처럼 고대하던 국민들이 드디어 진정한 대통령을 만나는 시간 같았다. 그는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영면하고 있지만 국민을 사랑하며 가까이 함께했던 완벽한 대통령감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1-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는 이러한 자료 등을 활용하여 번개불이 튀는 듯한 기발한 착상과 기동력으로 방문객이 가장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용어만 선정하여 심금을 울리게 만들었다. 특히 게재된 사진처럼 김 참모가 직접 제공한 자료로 만든 ‘문덕(文德)을 갖춘 무인(武人)’과 ‘무인기성(武人氣性)을 갖춘 문인(文人)’이라는 강 총재 본인 모습의 슬라이드 보고서를 접한 강영훈 총재는 극찬하며 감동했다. 이때 김 작전참모는 “군문 시절과 당시까지 총재님의 발자취는 우리 군 후배들뿐만 아니라 사회인에게도 많은 귀감이 된다며, 지하철에서 만난 청년과 조크하며 담소한 일화는 생생하게 기억됩니다”라고 보고하자 강 총재는 감사함과 회한에 두눈을 잠시 감았다. 회의실에서 부대현황 보고를 모두 받은 강영훈 총재는 감동에 젖어 극찬하면서 논어에서 자하(子夏)가 말한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사이우즉학, 학이우즉사)” 즉 “벼슬을 하면서도 여유가 있으면 학문을 닦고, 학문을 닦다가도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라며 “일에 나아가기 전에 학문을 닦음은 물론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통해 겪게된 산전수전의 고난의 시간을 학문으로 극복한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용장(勇將)이자 덕장(德將)이었다. 그는 부대 격려 위문을 통해 군후배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덕담을 던지며, 벽창호처럼 올곧은 참군인의 길을 걷고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저력을 지닌 적십자사 총재로서 자랑스런 군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12-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1)]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의 1992년 연말은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생도시절 각종 힘든 훈련을 하면서 외쳤던 ‘극한 속의 여유’란 구호의 의미를 절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부대의 자긍심도 높힐 수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행사를 준비하는 실무자에게 죽을 맛을 느끼는 고생이었다. 마지막 방문자인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를 영접하기 2일전인 12월28일에 전설적인 삶을 주도했던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가 부대를 찾았다. 이때 군사령부에서는 주요 인사들이 유독 무적태풍부대로 집중해서 방문하는 것이 이상하다며 원인을 조사하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와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부대 방문행사 준비를 하면서 신임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육사34기)의 자료 수집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김 참모는 육군대학에 발간되는 ‘군사평론’을 분야별로 분류하여 책자로 만들어 수시로 참조했고, 강 총재에게 보고할 슬라이드를 창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인접 사단 및 군단의 보고내용을 수집하는 등 어떠한 임무를 부여받더라도 총체적인 자료로 참신한 업무보고서를 작성토록 노력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12-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0)]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7년의 재임기간 중에 무적태풍부대를 인상적으로 격려 방문했던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아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된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회장 등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평소에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었으며 늘 국민과 가까이에서 함께하다 2016년 5월10일 95세로 타계하였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12-2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70년부터 그는 박정희정권을 용납하게 되었으나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이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과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주영대사에 임명되었고 1983년 12월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1984년 12월 이후 주로마 교황청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로 첫 남북총리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을 주도했다. 그는 총리 시절에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으며, 1989년 일본 쇼와 천황의 장례식 조문도 참석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충분하게 했다. 총리를 퇴임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매년 수시로 전방부대를 위문했는데 1992년 말 당시 대통령선거의 후보들처럼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방문했다. 또한 그는 7년간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와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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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12-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1921년 평북 창성군에서 태어나 청산보통학교 졸업후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봉천의 보병학교와 1945년 초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다시 입교하여 그해 7월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된 후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한 그는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6.25남침전쟁때에 국방부 관리국 국장, 3군단 부군단장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포천에 있는 6군단장 시절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을 받았으나 강 장군은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고, 곧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된 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참군인이었다. 이후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도 설립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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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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