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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은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인민위원회, 조선노동당, 북한군 등에서 활동을 했으며, 6.25남침전쟁 기간 중에 다시 중국으로 귀화하여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등에서 군인으로 활동한 작곡가이다. 중국 바이두백과는 그를 한국 사람이 아닌 ‘근대 중국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0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에 가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무렵부터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물 저우언라이의 양녀 딩쉐쑹(丁雪松)과 연애를 했는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1년 결혼했다. 1939년 4월에는 오랜 심사 끝에 중국공산당 정식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광복이 되자 한반도 공산화을 위해 연안 팔로군 본부 소속 김무정의 명령으로 정율성은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1945년 12월, 소련 군정하에 있던 북한 평양에 도착해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인민군 협주단을 데리고 북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북한 지역주민들에게 새로 수립된 북한 사회주의 정권을 찬양하는 공연을 무려 200여 차례나 치렀고,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 인민군을 찬양하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30여 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으로부터 포상장도 수여받았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군관 신분으로 참전하였으며, 서울 점령 직후 서울에 내려와 주둔했다. 그는 개전 초기 서울 점령 직후부터 9월까지 쭉 서울에 머물렀다. 그의 아내 딩쉐쑹도 함께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그해 8월경 돌연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의 정율성은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 등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작품이 대부분을 작곡했다. 문화대혁명기에 그는 마오쩌둥의 시사 20편에 곡을 붙였으며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일생동안 마오쩌둥의 시사에 곡을 붙인 편수는 34수에 달한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죽고 피바람을 불었던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소외되었던 정율성은 곧 복권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찬양하는 연가와 건국 50주년(정확히는 중국공산당 창당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착수하며 끝까지 공산주의자 나팔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7일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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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㉒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하자,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 수업을 받았는데도 영어 강사들이 연음으로 발음하는 첫 강의 시간부터 벙어리가 되는 고문이 시작됐다. 하지만 주중 수업후 저녁시간이나 토요일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외국인 강사 브래그돈(Bragdon)과 식사를 같이하며 나누었던 서투른 대화 덕택에 조금씩 적응되어 갔다. 또한 매주 토요일에는 동두천으로 향하는 주말부부 생활하는 덕택에 필자보다 먼저 대대장으로 취임한 동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새롭게 무적태풍부대 공병 대대장으로 김준영, 헌병 대장으로 승장래 동기가 취임하여 축하모임이 있었다. 이미 대대장 근무를 시작한 강웅식, 김종완, 안철주, 황종수 동기들을 함께 만나 너무도 즐거운 회후의 시간을 가졌는데 모두들 새로운 부대를 지휘하면서 느꼈던 에피소드 이야기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며 필자도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여 빨리 대대장으로 취임해 동기들과 합류하고픈 마음이 절실했다. 게다가 이봉엽과 김한경 동기도 전방 사단의 기무부대장으로 취임 한다는 소식도 전해져 실로 우리 동기들의 대대장 시대가 열렸음을 실감했다. 허나 주중에는 성남 종합행정학교에서 퇴근도 못하며 영어공부에 빠져있다가 모처럼 토요일 집에 와서는 동기생들의 모임이 무려 두달 동안 계속되자, 결국 건강을 회복하는 재활치료 중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도 소홀하는 필자에 대해 아내는 못마땅한 나머지 비명소리를 터트리며 불평했다. 하지만 7년전 육군대학 소령과정에서 만났던 동기들과 다시 정을 나누는 만남이 소중하고 좋은 시간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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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8월28일 오전 전남 순천역 광장에서‘잊혀진 영웅, ‘호남학도병들’을 기억해야합니다!’를 주제로 한 호남학도병 현충시설 건립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기억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호남의 정신과 호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끈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호남학도병들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보듬는 것”이라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순천역 광장은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학도병’ 출정식을 가졌던 역사적 장소이다. 당시 순천과 여수, 광양, 벌교 등 호남지역 17개 학교 18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혈서로 입대지원서를 쓰고, 같은 해 7월13일, 순천역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에 박 장관은 “호남의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위해 펜 대신 총을 들었고, 목숨을 건 혈투 끝에 차디찬 전장의 이슬로 스러져갔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유 대한민국을 사수하겠다는 정신, 바로 이것이 호남의 정신”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공산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애국 영령들의 원한과 피가 아직 식지 않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눈물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에게 공산당의 나팔수를 기억하게 하고 기리겠다는 시도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며 광주시가 추진 중인 정율성 기념공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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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가 누리는 민주와 자유는 영웅들의 피 묻은 군복 위에 서 있기 가능하다.호국의 별인 백선엽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이들은 너무도 많이 있다. 그가 "나를 쏘라"며 6‧25남침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 고지를 지키지 않았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지난 7월5일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만약 다부동 전투에서 패했다면 소련과 중공의 지원에 힘입은 북한에 의해 한반도는 적화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는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박민식 장관은 지난 6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모독하는 야당 의원에게 발끈했다. 박 장관은 반민특위 출범 당시 백 장군은 친일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도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 부친의 흥남시 농업계장을 지낸 바 있는 이력까지 언급하며 "만주군관학교 소좌(소위)로 북간도가 첫 근무지던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라면. 그도 친일파가 아니냐?"라고 강조했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 백 장군이 북간도에 부임한 1942~1943년 무렵에는 독립군들이 연해주로 쫓겨간 뒤였다. 그가 근무한 부대의 명칭이야 만주특설대로 좌파세력들의 토착왜구 몰이에 그럴싸하다. 문전 대통령은 백 장군이 숨을 거두었을 때 조화만 보냈을 뿐, 끝내 조문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킨 호국의 영웅을 친일로 모독하는 좌파 세력의 정치적 계산과 무관하지 않다. 6‧25남침전쟁 당시에 김일성이 가장 증오했던 남한의 인물이 이승만과 백선엽이었다는 것과도 묘하게 일치한다. 또한 전직 대통령도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걸핏하면 정치적 발언을 한다. 이번에도 홍범도의 흉상과 관련해 언급이 잦았다. 자택으로 찾아온 자파 의원들과 정치를 안주 삼는다. 국가지도자를 지낸 사람답게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신중한 처신을 해야한다.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팩트를 부풀린 것도 아니고 아예 날조에 가깝다. 영웅의 명예를 지키려고 거야에 맞서며'1류 보훈’에 매진하는 박 장관과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주장하는 신원식 의원(국민의힘)에게 박수 보낸다. 일부 세력들이 백 장군을 친일파로 모독하는 행각을 계속 저지르면 좌시하면 안된다. 좌파세력이 호국의 영웅 백 장군을 친일파로 몰아 모독하려는 것을 거듭 개탄하며 박민식 장관이나 신원식 국회의원처럼 적극적인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보훈의 최고 가치인 국가정체성이야말로 박 장관이나 신 의원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하는 엄숙한 과제이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의 제단에 피를 뿌린 분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해야 한다. 제복(MIU)입은 영웅들의 명예를 짓밟는 이적행위와 망동을 당장 중단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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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거양득(一擧兩得)라는 사자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전국시대에 한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싸운지 일년이 지나도록 화해를 하지않자 진나라 혜왕은 참모 진진에게 의견을 물었다. 진진은 “변장자(辨莊子)가 범을 찔러 죽이려 하자, 여관의 사동(使童) 아이가 말리면서, ‘두 범이 방금 막 소를 잡아서 먹는데 곧 서로 싸울 것입니다. 싸우면 큰 것은 다치고 작은 것은 죽으리니, 다친 것을 좇아서 찔러 죽이면, 한 번 들어서 두 범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사동(使童)의 말대로 변장자(辨莊子)가 상한 놈을 좇아 찔러 죽여 한 번에 두 마리 범을 잡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 그는 “한나라와 위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큰 나라는 상처를 입고 작은 나라는 망할 것이니 이때 상처입은 나라를 치면 둘을 한번에 얻게 됩니다”라고 건의했다. 진진의 방책을 수용한 진나라 혜왕은 기다렸다가 출병하여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사자성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탄생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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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22km거리의 대구를 위협하는 다부동 전투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유례없이 치열한 혈전을 치루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 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하지만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독전하며 지휘한 백 장군의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파하며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 방어에 성공하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 김일성의 특명으로 다부동을 버티고 있는 남한의 백선엽을 생포하고자 거액의 포상금까지 걸었고, 결국 사단사령부가 있던 다부동 후방의 동명초등학교에 북한군 1개 중대규모가 기습을 감행했다. 때마침 운동장에서 숙영하던 증원부대 8사단 10연대의 1개 대대가 재빨리 반격하여 기습한 적들을 격퇴했다. 당시에 김일성이 가장 증오했던 남한의 인물이 이승만과 백선엽이었고 제거하기 위해 포상금까지 걸었는데 묘하게도 현재 이 두 인물을 친일파 등으로 몰아 폄하시키는 모습이 개탄스럽다.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평양 최초 점령, 서울 재탈환, 춘계 공세 방어, 동부 휴전선 북상 등 숱한 작전을 지휘한 6·25남침전쟁 영웅이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졌고, 제4대 합동참모의장과 제7·10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백 장군은 전역 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후에는 교통부 장관 재임하며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낸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고귀한 헌신을 이어간 구국영웅이다. 미군들이 지금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은 2020년 100세를일기로 영면에 들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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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4)]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의 무료 치료와 마지막 영면시까지 도움을 주었던 을지병원은 1956년 11월1일 박 산부인과의 개원을 모태로 굴지의 교육의료재단으로 성장했다. 70년이 다되도록 끊임없이 성장해 온 을지재단 역사의 중심에는 박영하 설립자의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가치를 바탕으로 을지재단은 6.25남침전쟁으로 황폐화된 의료시설의 재건과 의료복지 구현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일찌감치 병원을 공익법인으로 전환하여 의료복지 선진화의 길을 개척했다. 고(故) 박영하 박사는 1950년 6.25남침전쟁 당시 자진 입대해 군의관으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했고, 1953년 7월 속초 제1외과병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고도 3년을 더 복무하다가 1956년 7월 중령으로 예편했다. 아내 전증희 여사도 결혼후 강릉의 59육군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하며 휴전을 맞았다. 6.25남침전쟁은 국토를 초토화시키고 엄청난 상흔을 남겼지만, 의학 자체의 발전도 따랐다. 전쟁은 당시 대부분부상병의 치료와 연관성이 높은 일반외과, 정형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마취과 등 외과계열의 의료기관들에게 더욱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 박사 역시 의대를 갓 졸업한 젊은 의사로 전쟁에 뛰어들어 수천건의 수술을 담당하며 군진의학(Military Medicine)의 개척자로 부족함 없는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민족의 비극을 절절히 체험하며 공고화된 조국애를 갖고 실천했고 이후 국민보건의료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더해 그가 별세하자 의사 최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또 2018년 이달의 현충인물로, 그해 4월에는 이달의 영웅으로 각각 선정되기도 했으며, 부인인 전증희씨도 6.25남침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참전했고, 박 박사의 아들인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과 손자 역시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병영명문가’로 선정됐다. 현 박준영 을지재단 회장은 “나라를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확산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라며 “앞으로도 병역 명문가의 값진 용기와 헌신을 극진히 예우하기 위해 실질적인 혜택을 확대하겠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 부자(父子)의 이러한 사명감과 ‘인간사랑 생명존중’의 정신은 국민 영웅인 김일 선수의 장기간 지병 치료와 삶의 마지막까지도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병역 명문가인 박준영 회장의 “제복을 입고 병역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겠다”는 말처럼 비록 전시가 아닌 평시였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군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뻔한 필자와 김종완 동기에게도 직접 을지병원으로 데려와 완벽하게 치료하는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 진심어린 감사와 함께 깊은 감동을 주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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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4)]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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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남침전쟁에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독립 이후 대통령 중심제를 확립한 데 이어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를 쌓았다. 이런 가운데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논의에 속도가 붙고 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출범했다. 원로배우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서울 강동구에 있는 본인의 사유지 약 4천평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 대통령은 독립운동 등의 업적으로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1965년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추모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모두 이끈 명실상부한 국부(國父)이자 공산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한 독립과 호국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별”이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또한 박 장관은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들이 제대로 예우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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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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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황교안) 주관으로 개최됐다. 추모식사(式辭), 내빈 추모사, 추모의 노래, 헌화·분향 및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 이날 추모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1875년 황해도 출생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협성회보와 매일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1898년 독립협회 해산과정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됐으며,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를 발간했으며,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폭로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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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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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 선수는 1929년 전남 고흥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과 괴력을 갖고 있던 김일의 운명은 어느날 우연히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고 바뀐다. 씨름에서는 천하장사였던 김일은 프로레슬링으로 이름을 떨치겠다고 결심했다. 부모도, 16살 때 결혼한 아내도 모르게 씨름판에서 모은 자금을 복대에 차고 일본행 배를 탔다. 그러나 김일의 일본행은 순탄치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체포돼 1년형을 살았다. 그는 1년간 역도산에게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역도산은 얼굴도 모르는 김일의 신원을 보증하고 그를 감옥에서 구해냈다. 이어 1957년 김일은 역도산체육관에 1기로 입문하면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다.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은 프로레슬러로서의 첫 이름이었다. 이후 김일은 가난하던 1960년대 서민들의 위안이자 청소년들의 영웅이었다. 온갖 반칙에 코너에 몰리다가 위기의 극단에서 박치기 일격으로 상대 선수를 제압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일본인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대결에서 선보인 박치기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호랑이 모습의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일본 프로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우는 장면은 TV앞의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김일이 세계 챔피언에 오른 해는 1963년이었다. 선천적으로 단단한 이마를 앞세워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대회에서 세계태그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러나 같은 해 스승 역도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한프로레슬링협회를 설립했다.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6년 올아시아 챔피언, 1967년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무수한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으며 승승장구했다. 1972년 도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며 1970년 중반까지 세계 프로레슬링을 휘어잡은 김일은 프로레슬링 인기가 몰락하면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김일에 대한 소식은 이런저런 투병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사업가로 변신은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선수생활에서 얻은 후유증이 김일을 괴롭혔다. 1994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에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기도 했다. 최초 은퇴한 것은 1970년대였지만, 은퇴식은 그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일본 신문기자단은 1995년 도쿄돔에서 김일의 은퇴식을 다시 마련해주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체육회가 2000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거행했다. 이후 건강이 호전돼 후진을 양성하겠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결장 제거수술 이후 운신에도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2006년 10월26일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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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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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레슬링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60~70년대에는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네마다 흑백TV나 라디오가 있는 집이나 주변 만화가게로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곳에 합류했던 필자를 포함해 흑백TV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거구의 외국인 선수를 호쾌하게 링에다 내리꽂는 한국 프로레슬러를 보며 어려운 형편을 잠시나마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일본 선수들과 경기일 경우 그 함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환호성 가운데는 국민 영웅으로 불리던 '박치기왕' 김일이 있었다. 이후 프로레슬링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기억 속에서 '김일'이라는 이름은 잊혀져갔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김일'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있다. 헌데 을지병원 복도에서 재활치료를 위해 열심히 걷고 있는 필자의 바로 눈앞에 그 김일 선수가 환자복을 입어 약간은 초췌해 보였지만 아직도 건장해 보이는 모습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어린시절 국민적 영웅이었던 김일 선수를 직접 만났고, 그가 재활치료 중인 필자를 스쳐간 것에 흥분하며 걷는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김일은 평소 당뇨합병증, 고혈압, 심부전 등의 지병을 앓아왔고, 필자가 을지병원에 입원했던 1994년부터 병원 4층에 병실을 무료로 제공받고 치료를 받아왔다. 박치기 하나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는 결국2006년 10월26일 낮 12시17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13년 동안 치료를 받아왔던 을지병원에서도 김일은 영웅이었다. 당시 김중봉 을지병원 원무부장은 “다른 환자나 문병객들이 그분을 보려고 병실을 방문해 사인을 받아갔다”고 말했다. 스타의 입원을 미리 알고 있었던 다른 병실의 환자들도 그 분위기에 동참했다. 이들뿐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이었던 별이 진 것에 많은 이들이 명복을 빌었다. 그해 10월28일 오후 경기도 벽제에서 화장한 뒤, 유골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 안치됐다. 허나 많은 이들이 김일 선수에게 프로레슬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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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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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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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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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어느날 고교시절 절친인 이일성 한림대 교수가 찾아왔다. 그는 양손에 매우 무거워 보이는 책들을 들고 위문했는데 그 책들은 소설 ‘영웅문’ 시리즈 였다. 의사인 그는 지금은 거의 없어진 소위 영양탕 수육도 정성스레 펼쳐 놓으며 그 수육의 세포조직이 사람과 거의 유사하여 병상 환자들의 회복 영양식에는 최고라며 강권했다. 필자는 그것이 평소에도 즐겨 찾던 음식이었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누워서 너무도 맛있게 먹으며 고교시절 짝꿍의 배려에 감사했다. 이 교수는 고교 3학년때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전날에 수업 휴식 시간에 조용히 필자를 불러내 쟁반만한 크기의 엿을 건네주며 합격을 기원했던 친우로 현재까지 근 50년 동안의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고 있다. 특히 병원 침대위에서 재활치료를 하던 필자가 지루하지 않게 소일할 수 있도록 영웅문 시리즈를 선물해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기간을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며 극복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지만 한 단계 격상된 재활치료는 내 의지와의 싸움이었다. 한때 당시 상황에 따라 군생활 포기까지도 생각했던 필자에게 사관학교 동기들은 이미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은 필자에게 치료로 당시는 병원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재활시간을 단축시켜 앞서가는 동기생들을 빨리 쫓아가겠다는 각오와 동기부여가 되어 재활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불을 댕겼다.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아 새다리가 된 상태로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훨체어를 타고 물리치료실을 찾아 보행기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그때 근육이 없는 새다리보다는 팔의 힘에 의지했고, 그나마 팔에 힘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도 했다. 위의 사진에 게시된 재활기구들을 사용해 보행 치료를 받는 모습처럼 보행기에서 처음에는 다리가 끌렸으나 몇일이 지나자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점차 좋아지자 우측 사진처럼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때 복도에서 환자복을 입었지만 왠지 카리스마를 느끼며 단단해 보이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우리나라의 프로레슬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김일 선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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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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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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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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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당시에서 24년이 지난 2018년 8월17일 기상청의 '2018년과 1994년 폭염 비교'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8년 여름철(6월 1일∼8월 16일) 전국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은 각각 25.5도와 30.7도에 달해 1973년 통계작성 이래 가장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원 당시인 1994년에는 평균기온과 최고기온이 각각 25.4도(2위)와 30.7도(공동 1위)였다. 2018년 같은 기간 일조시간은 611.3시간으로 역시 가장 길었다. 1994년에는 564.6시간으로 3위였지만 그때의 폭염은 위문온 방문객들의 더위에 지쳐있는 모습에서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치료를 위해 시원한 병실에 누워 극심한 더위를 느끼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필자는 어쩔 수 없이 누워만 있었지만 위의 사진처럼 월력에 그날의 주요 일정 및 방문자들을 메모하는 일로 지루함을 해소했다. 그때 필자의 배앞에는 골절된 골반의 고정을 위해 장착한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이 불쑥 튀어 나와있었다. 헌데 로보캅처럼 쇠가 튀어나와 불편한 것보다는 침대에 누워 생리적 현상까지도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욱더 괴롭고 미안했다. 그래서 당시의 가장 큰 소원은 바로 침대 옆에 있는 화장실을 침대위의 골반고정 그네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나의 다리로 이동하여 직접 용변을 보는 것이었다. 드디어 입원 3개월 정도 지나자 침대에서 일어서도 된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만 있다보니 다리의 근육은 모두 빠지고 앙상한 뼈만 남은 새다리가 되어있었고, 머리가 똑바로 서자 현기증으로 시야가 흐려지며 중심을 잡지 못해 침대에 쓰러지며 다시 누워야만 했다. 하지만 몇일 뒤에 난 당시 최대의 소원이었던 코앞에 있는 화장실을 두다리를 이용해 갈수 있었다. 물론 힘이 빠진 다리보다는 손으로 침대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이동했지만 3개월만에 가족의 도움없이 화장실에서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천하를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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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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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위기극복과 유공자 예우 등 동시 효과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카카오뱅크 윤호영 대표이사, 청소년 그루터기재단 오찬석 이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유공자 다자녀 가정의 학습환경 조성을 위한 ‘미래 드림(Dream)방’ 프로젝트 업무협약을 27일 오후 2시, 서울지방보훈청에서 체결했다. 이번 ‘미래 드림(Dream)방’ 프로젝트는 저소득 국가유공자 중 미성년 다자녀(세 자녀 이상)를 둔 가구에 맞춤형 공부방을 마련해주어 양질의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올해 총 60가구, 3억원 규모로 진행된다. ‘미래 드림(Dream)방’은 국가유공자의 미성년 자녀들에게 미래를 드린다는 의미와 미래를 꿈꾸는 방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며 형제자매가 많은 아이들의 방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꿈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개조하는 사업이다. 사업의 세부 내용은 각 가정 상황에 맞게 도배‧장판 등 맞춤형 방 리모델링과 책상·의자·책장을 비롯한 가구, 태블릿 PC와 같은 최신형 IT기기 제공 등이다. ‘미래 드림(Dream)방’ 1호는 미성년 자녀 일곱을 키우는 가구로 방 3개를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집중할 수 있고 생활하기에 편리한 공간으로 탈바꿈 시킬 계획이다. 한편, 국가유공자 미성년 다자녀 가구는 총 1,000가구로 이 중 생활 정도에 따라 금년에 60가구를 선정하여 지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매년 사업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참고로 세 자녀 908, 네 자녀 85, 다섯 자녀 5, 일곱 자녀 2가구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국가가 지원하고 장려해야하는 부분”이라며 “공부환경 조성으로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이 부모와 같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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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위기극복과 유공자 예우 등 동시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