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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시상식과 북콘서트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을 마치고 대상을 받은 최지효 학생은 소감 발표에서 “이책을 통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라사랑 마음이 깊어졌으며,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라를 빛내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초등부 금상인 김세진 학생은 심사위원 및 참석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본인을 뽑아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해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며, “저의 꿈도 장차 국방과학연구원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당선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1부는 국민의례에 이어 김병관 한미안보연구회 회장의 환영사,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과 김재창 명예회장의 축사에 이어 공모전 시상식으로 축제분위기가 이어졌고, 2부에서는 테너 지명훈과 싱어송라이터 이유진의 축가와 ‘할들육(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관련 퀴즈로 시작된 작가 장삼열 박사의 북콘서트가 진행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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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 시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27일 “국가안보를 위해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한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와 취업 촉진을 위해 이날부터 오는 7월26일까지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을 위한 신청·접수를 진행한다”라고 밝혔다.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확보된 일자리에 지속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기업이 제대군인 채용에 적극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특히, 국가보훈부는 2021년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를 법률로 명문화한 뒤, 인증제에 대한 기업의 관심 유도를 위해 행정·재정·법률적 혜택(인센티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제대군인 고용우수 인증기업은 시중은행의 여신지원 시 금리 우대를 비롯해 관세 조사유예, 방위사업청 및 지방자치단체 우수기업 선정 평가 시 가점 부여 등의 우대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신청 희망 기업은 오는 7월26일까지 신청서류(국가보훈부 홈페이지 공지)를 준비하여 한국경영인증원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사무국에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이미 국가보훈부는 6월20일 ‘인증설명회’를 온라인(ZOOM)으로 개최하며,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제도와 인증기준 등 세부 사항을 추가로 안내할 예정이다. 또한, 신청기업을 대상으로 한국경영인증원에서 서류심사와 현장실사를 통해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여부를 심사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보훈부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9월 인증기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서류심사와 현장실사의 평가지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 고용인 수와 우대채용 현황, 제대군인지원센터 협력 정도, 근속 기간, 근로 만족도, 기업 재무 건전성 등이다. 최종 인증기업에 대해서는 제대군인주간인 10월 둘째 주 국가보훈부 장관 인증패와 인증 현판을 수여할 계획이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복귀 지원은 제복근무자로서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지금도 국가수호 일선에서 땀 흘리고 있는 현역 군인들이 맡은 바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국가보훈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제대군인들의 원활한 취업을 위한 고용환경 조성을 위해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고용 우수 인증기업에 대한 우대지원제도를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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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9]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병자년 새해가 되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목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 취임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대로 취임하면 ‘절름발이 대대장 또는 DJ 대대장’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 붙을 것 같았다. 또한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불편하게 만드는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통합병원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진단에 따라 새해 초부터 재차 병원에 입원했다. 통합병원 도착 다음날 바로 2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상단핀을 제거하고 다시 2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미 3개월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기 때문인지 만나는 간호장교와 군의관들도 모두 반기며(?) 인사를 해와 병원 생활을 불편없이 익숙하게 할 수 있었고, 짧은 입원 기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선후배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도 면회오지 않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회복 및 재활치료의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를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름간의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 수술치료, 입원 기간에 병실에 앉아 필자는 동국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에서 예비군분야를 발췌하여 정리한 ‘조국통일을 대비한 예비군제도 비전’이라는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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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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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국회 안보정책 전쟁에 투입할 22대 당선자들의 이모저모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해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은 국민의힘이 낙담하며 쇼크에 빠져 있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물려받은 국민의힘 의석수는 5석 늘어나 패배가 아니라며 이재명의 더불어민주당이 오히려 지역과 비례의원 모두 5석이 줄어 과반수 제1당 달성은 실패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늘어난 국민의힘 당선자 중에 국방전문가로 먼저 강원도 춘천·철원·화천·양구을의 한기호 국방위원장은 철원출신으로 김화중학교를 나온 뒤 서울 한양공고를 다녔다. 육사 31기로 임관하여 2사단장, 육본정보작전부장, 5군단장, 육군 교육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작전분야에 정통했으며 육군중장으로 전역하였다. 한 당선자는 현역 위관시절 탁월한 지휘력과 업무추진력이 돋보여 당시 사단장 박세직 장군의 조카 사위가 되었다. 전역 후 바로 철원·화천·양구 지역에 출마하여 18, 19, 21대 국회의 국방위에서 맹활약을 했으며 장성출신으로는 드물게 4선고지를 점령했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당선자는 경북 영주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로 전략과 정책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2022년 8월, 국가안보실 제2차장으로 발탁되어 윤석열 대통령을 보좌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지역구로 내려가 착실하게 차기 총선준비를 하였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임 당선자를 포함한 국회의원 25석 모두를 보수가 싹쓸이했다. 한편 더불어민주당 ‘남양주시을’ 지역의 김병주 당선자(2선)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강릉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0기 포병장교로 임관해 미사일사령관, 3군단장을 거쳐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독실한 불자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재직후 전역했다. 2020년 1월,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 3호로 입당해 21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이낙연 신임 당대표에 의해 안보분야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가 이재명의 열린캠프에 국방안보위원장으로 합류했다. 2022년 3월, 국방위에서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 건을 두고 전혀 안보 공백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격앙된 모습으로 질문했다. 육사 동기인 이종섭 국방부장관에게 대통령실 이전과 관련된 비행금지구역 재조정에 관하여 사적인 인연과 관계없이 매섭게 몰아치기도 했다. 2023년 1월,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 사건 사건에서 다양한 정부와 국방부의 실책을 비판했으나 정부여당은 북한 도발의 원인을 김 의원이 주도하여 체결한 9.19 군사합의 때문이고, 북한이 합의를 깨고 도발을 해올 때마다 훈련부족을 야기한 안보불안 합의의 책임자라며 오히려 공격을 받았다. 7월 장마 직후 해병대 일병 사망 후 수사 외압, 육사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과 대통령실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도청사건, 한미일 군사훈련을 비판 등이 현역 시절과 다른 이중잣대라고 제기되면서 육사 출신들의 질책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에서 중책을 맡으며 이재명 당대표의 신임을 받고 있다. 경상남도 김해시 갑 선거구의 민홍철 당선자는 김해에서 태어나 김해고등학교를 3년 장학생으로 졸업 후 이후 부산대 법학과(80학번)에 입학했는데 군사정권이 출범에 따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시공부를 시작해 1984년 군법무관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각급 부대에서 검찰관, 송무장교, 군판사, 법무참모와 육본에서 법제·법무과장, 고등검찰부장 등을 거쳐 준장 진급 후 육본 법무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지냈다. 2008년 2월 전역 후 변호사로 일하며 정치에 입문해 2009년부터 3년간 한나라당 당적을 가졌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 군 사법제도 개혁 과정에서 인연을 맺었던 문재인이 혁신과 통합 추진위원으로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탈당하고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시 갑 선거구에 출마해 현역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정권 후보를 꺾어 당시 경남의 유일한 민주통합당 당선자가 됐다. 이후 20대 총선에도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당일에 열린 김해시장 재선거 및 시의원 보궐선거 또한 전부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김해시가 사실상 민주당의 텃밭이 되었고 21대에 이어 이번에도 연속 당선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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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안중근, 천안함 트리플 추모(상)
[시큐리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3월26일은 ‘이승만 건국 정신 계승 국민대회’가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신일이며, ‘안중근 장군 순국 114주기 추모제’와 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리는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이었다.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 나흘 앞선 지난 22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렸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동시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에 잘 맞서서 대응해야 한다”며 “어떠한 위협도 응징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화를 나눴고 “이렇게 명백하게 도발과 공격을 받았는데도 자폭이라느니 왜곡, 조작, 선동해서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영웅들을 이렇게 모욕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이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반드시 막아 내야겠다”며 “저희가 잘하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차에 탑승하기 전 한 위원장과 악수하며 한 위원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이날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았는데, 내달 총선을 앞두고 당과 대통령실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4·10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 같은 시기에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만나면서 갈등이 봉합 국면에 접어든 상징적 장면으로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정 간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 ‘부활한’ 천안함에 오른 영웅들…“이제 피격당하지 않을 것” ‘제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린 26일 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생존장병들과 전사자의 유가족 등은 신형 호위함으로 다시 태어난 ‘천안함(FFG-Ⅱ, 2800톤급)’에 오르며 “많이 좋아졌어. 이 배라면 서해 나가서 두 번 다시 피격당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야”라며 반겼다. 또 다른 유가족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천안함 사건과 내 아들을 잊은 날이 없다"라며 "이름을 이어간 천안함 장병은 물론이고 국군 모두가 다시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고, 또한 유족회장은 “새 국회에선 천안함 괴담 방지 특별법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호위함 천안함은 '천안'을 함명으로 사용한 해군의 세 번째 함정이다. 천안함은 초계함(PCC, 1000톤급)보다 크기와 무장, 방어능력을 대폭 증가했다. 천안함은 길이 122m, 폭 14m, 높이 35m 크기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55㎞)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할 수 있다. 주요 무장으론 5인치 함포와 함대함유도탄, 한국형 수직발사체계(KVLS)로 발사하는 함대지유도탄·장거리 대잠어뢰(홍상어)·유도탄방어유도탄 등이 탑재돼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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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비호산 전투)과 맥아더의 오판
- ▲ 국군 제 6사단 7연대 1대대가 1950년 10월26일 14시, 압록강 초산진에 최초 도착하기 일주일전인 10월19일 이미 중공군 9/13병단 30개 사단 약 38만명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사진은 1950년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사진제공=국방부] 마오쩌둥, 스탈린 요청받고 1950년 10월 3일 참전 결정 중공군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건너 북한 진입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중국은 북한과 긴밀하게 협조를 해왔다. 중국은 7월에 미군이 참전하자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동북지역으로 파병하였으며, 대만침공을 연기하였다. 1950년 8월말에 인민군의 낙동강 공세가 실패한데 이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지자 북한은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였고. 마오쩌둥은 10월 1일부터 참전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미 9월 30일에는 중국외상 저우언라이가 ‘UN군이 38선을 넘어온다면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10월 2일~4일의 회의에서 참전을 확정지었으며 10월 15일에 압록강을 돌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8일, 동북변방군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되었고, 사령관으로는 펑더화이가 임명되었다. 중국은 소련에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하였다. 12일, 소련의 항공지원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듣자 잠시 출병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13일에 이 결정이 번복되어 소련 공군과는 별개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드디어 10월 19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중공군은 구성-오로리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UN군이 오로리로 진격중인 상황이었기에 중공군은 작전을 바꾸어 기습공격으로 나섰다. 맥아더사령관과 참모진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오판 유엔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 속으로 걸어들어가 10월 15일의 웨이크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초반에 개입했다면 전세에 큰 영향을 줬겠지만 지금은 그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압록강 인근의 종공군은 기껏해야 10만-12만 5000명 정도에, 실제로 강을 도하한건 5만-6만명 선이다”라고 호언 장담하면서 “중국은 항공 지원이 전혀없는 상태인데 반해, 아군은 한반도내에 기지설치를 완료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온다면 인류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러한 맥아더의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국내정세가 많이 혼란스러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참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공군을 얕잡아 보았고, 크리스마스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중공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중공군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을 이용하면 중공군을 쉽게 격파할수 있다. 첸놀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을 타고 다니면서 항공기 500기만 풀어놓으면 된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UN군은 오랜 진격으로 지쳐있었고, 분산되어 있었다. UN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최악의 실수를 하게되었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포획되었고, 정보참모 윌로비에게도 보고되었는데, 윌로비는"그저 중국에 살던 조선인에 불과하다"며 참전 자체를 일축하였다. ▲ 중공군 1차공세와 비호산 전투 상황도[자료제공=이우형교수/국립현충원] 중공군의 1차공세에 따른 청천강선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에 대한 첫 승리로 막연한 공포감 해소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에 태극기를 꽂았지만,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철수해야 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UN군 사령부는 방어로 전환하고 청천강선에서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국군 미1기병사단은(8기병연대와 5기병연대) 국군 15연대의 엄호를 받아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철수도중에 15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어 8기병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됐다. 미 5기병연대가 구출작전에 나서 1대대와 2대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3대대는 탈출하지 못했고, 5기병연대의 구축작전도 실패하면서 결국 3대대의 구출은 포기되었다. 3대대는 중공군에 맞섰지만,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미1군단과 국군 2군단이 청천강으로 철수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방어선의 형성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청천강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비호산 일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비호산은 개천-안추-순천의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수 있고,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감제할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거기다 비호산이 점령된다면 미 8군 전체가 붕괴되어 버릴수도 있었다. 최초 국군 제7사단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덕천-구장동간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는 동시에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라”는 구두명령을 군단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제7사단장으로부터 부대가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은 군단장은 작전계획을 수정하여 개천 동쪽의 비호산 방어임무를 제7사단에 부여하였다. 그리고 청천강 계곡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1개 연대를 개천(군우리) 북쪽에 배치해 미 제7기병연대와 함께 대비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단은 즉시 연대를 이동시켜 11월 2일 오후에 진지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제7사단은 약 1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고 장비는 사단 T/E의 90%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의 제38군단으로서 예하에 제112사단, 제113사단, 제114사단을 둔 약 30,000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장비는 125㎜ 및 160㎜ 곡사포, 82㎜ 및 120㎜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과 소총 등을 보유하였으나, 미군 1개 사단 장비의 54%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성능도 낙후되어 있었다. 11월 3일부터 중공군38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진지에 있던 7사단 3연대는 중국군의 파상공격으로 유무선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3시간에 걸쳐 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로 비호산 정상은 3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졌다. 3연대는 비호산 정상에서 육박전과 혈투 끝에 새벽녘에는 결사대를 편성 육탄공격을 펼쳐 적을 몰아내고 고지를 확보하였다. 1950년 11월 5일 아침 사단장은 제3연대와 예비대인 제8연대를 교대시켰다. 격전을 치른 제3연대는 개천의 조양국민학교에 집결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제8연대는 비호산 주봉에서 청천강 남안으로 연결된 북쪽 능선 일대에 편성된 진지를 강화하고 수색대를 파견해 적정 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제5연대는 비호산 남쪽의 535고지-760고지간의 진지를 강화하고 적과 대치하였다. 쌍방 간에 수색전이 전개되던 11월 5일 새벽 3시에 적은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중국군 제38군단은 개천을 탈취하기 위해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비호산 동쪽의 제5연대를 공격하였다. 덕천-개천간 측방도로를 장악한 적은 비호산 동남쪽 2㎞ 지점에 위치한 535고지의 제5연대 제2대대 진지 정면에 병력을 집중투입 했다. 중국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제2대대 진지에서는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제2대대 진지가 무너졌다. 이는 아군의 방어 진지에 연쇄적인 충격을 주었다. 방어진지가 무너져 흩어진 제5연대는 2㎞ 후방지역으로, 동쪽의 미 제5연대전투단은 1㎞ 후방지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호산 주봉의 제8연대 제2대대도 협상참 계곡으로 밀려 비호산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개천마저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7사단은 11월 6일 아침 8시부터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적의 진지를 초토화시킨 후 제5연대와 제8연대로 고지 남북에서 협공작전을 전개하였다. 남쪽의 제5연대는 신성리에서 미 제5연대 진지를 초월하여 535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저항이 완강했으나 한번에 격퇴시키고 비호산 진지를 탈환하였다. 중공군은 전선에서 이탈하였으며, 결국 중공군의 1차공세는 여기서 멈추었다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한 후, 11월 9일과 10일의 이틀간에 걸쳐 미 제1기병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개천으로 이동해서 부대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퇴한 국군 제7사단의 승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호산 전투는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라는 의미가 컸다. 그밖에도 초창기 연패로 인해 국군 장병들이 느끼고 있던 중국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또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군 장병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유엔군 B-29기의 대규모 폭격과 중공군 1차공세시 비호산 전투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대규모 공습과 국군 7사단의 승리에 도취된 유엔군의 재반격,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빠져… UN공군역시 대규모 공습에 나섰고, ‘신의주가 안된다면 다른 도시들을 시험삼아 불태우자’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의 끈질긴 요구 끝에 맥아더가 “스트레이트마이어, 그렇게 원한다면 모두 태워버리시오, 강계 외에도 적에게 중요한 시설이라 판단된다면 다른 소도시들도 모조리 시험삼아 불태우고 파괴하시오”라고 지시하였다. 11월 4일-5일간 청진-강계에서 B-29에 의한 소이탄 대량폭격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1월 8일에는 신의주 폭격이 시작되었다. 폭격은 12월 5일까지 개시되었고, 4개 교량이 파괴되었다 11월 6일,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며 반격작전을 발표하였고, 물자가 확보되는 대로 공세에 나서기로 하였다. 하지만 물자의 보급은 늦어졌고, 11월 15일로 예정되었던 작전은 미루어졌다. 철교를 보수하고 진남포항의 기뢰를 제거한 후에야 보급이 활발해졌다. UN군의 재반격은 11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국군 제 1사단은 박천-태천-용산동 방면에서 위력수색을 가하며 공산군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한편 1차 공세후 정비를 마친 중공군은 11월 13일 UN군을 깊숙이 유인해 섬멸한다는 방침을 확정하였고,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압록강변 혜산진을 점령한 21일에는 국군 2군단과 동해안을 목표로 하여 각각 11월 25일, 26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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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비호산 전투)과 맥아더의 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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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8) 고등군사반의 추억, 치열한 경쟁 속 소주잔의 행복
- 고등군사반(OAC) 입교를 앞두고 치열하게 입교 시험 준비하는 대위들 선배들의 공부자료 지칭하는 '고추가루' 확보해야?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軍에서는 장교로 임관할 때 초등군사반(OBC), 대위 진급하면 고등군사반(OAC), 소령 진급하면 육(해공)군대학 등의 보수교육을 필수로 이수하게 되어있다. 물론 중령, 대령, 장군으로 진급해도 직책에 맞춰서 대대장반, 연대장반, 장군반 교육을 받는다. 이 같은 육(해/공)군대학까지의 교육은 필수과정으로 졸업성적은 진급 및 보직을 검토할 때에 우수하고 능력있는 간부라고 평가받는 결정적인 고려요소가 된다. 필자의 경우, 대대장이 '입교시험' 성적이 졸업성적을 좌우한다며 부대에서의 야근을 불허하며 정시 퇴근해서 입교시험 준비에 전념하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입교 시험은 고등군사반(OAC) 교육후 중대장직 수행을 위한 것이다. 중대급부터 대대 및 연대 전술 교범과 전술 전략의 기본이 되는 ‘작전요무령’을 숙독해야 했다. 장교 임관 후 야전에서 3년 가까이 책과 거리를 두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있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또한, 이미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수료하고 현지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는 선배들의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 선배가 몇등으로 졸업했나를 참고하여 가능하면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배의 고추가루를 얻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軍 보수교육과정의 졸업 성적은 향후 승진의 중요 변수 입교 대상자의 상관과 가족은 '대입 수험생'처럼 뒷바라지 군사교육과정의 졸업성적이 상중하에서 ‘상(대략 1/3수준)’에 포함되어야 진급 심사시 그나마 경쟁 대상이 된다. 필자도 과거 진급심사위원으로 몇번 참여를 했지만 진급 공석은 적은데 진급 대상자가 너무 많아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기 보다는 결격 사유를 찾아 제외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급심사시 대상자가 상점, 평점, 근무실적 등이 동일할 때에는 결국 군사학교 성적의 우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도 본인도 현재의 행복과 만족에 안주하기 보다는 시간과 노력을 쪼개는 희생을 감수했다. 신혼 초, 군인은 적과 잘 싸우고 근무만 잘하면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던 필자의 아내는 때늦은 고등군사반 입시수능(?) 준비에 몰두하는 필자를 뒷바라지하면서 훗날 아들들의 진짜 대입 수능준비를 대비한 예행 연습을 미리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등군사반(OAC) 259기’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아내의 행복, 쥐 나오던 관사에서 9평 '백일 아파트'로 이사 드디어 대성산 기슭에서 천연자연의 신선한 공기와 동료 부하들의 땀냄새가 어우러져 신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전라도 광주의 상무대로 첫 이사를 했다.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교육생 부부들을 위해 준비된 ‘백일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비록 9평밖에 안되는 연탄 아궁이 아파트이지만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의 낡은 관사 보다는 너무도 좋았고 아내는 “시집 잘 왔네”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총각장교들은 보병학교인 ‘상무대’ 인근 화정동에 자취방을 마련했다. 자취방 구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현재 노량진의 고시 학원가처럼 자취방 주인들은 6개월마다 입교하는 학생장교들을 대상으로 하숙 영업을 하고 있었다. 화정동에 가면 ‘고등군사반(OAC) 1등을 배출’라는 프랭카드가 걸려있는 하숙집도 있었다. 그곳은 역시 출신을 떠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우수한 성적을 얻으려는 장교들의 피튀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3년만에 만나는 동기생들과 선배들과의 해후였다. 그동안 야전에서 경험한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위기 극복상황과 보람차고 즐거운 성공 사례들을 주고 받으면서 기울이는 소주 한잔은 치열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하는 청량제였다. 입교시험 성적에 실망, 끝없는 '경쟁사회'에 회의감 들기도... 학교장에게 입교 신고를 하고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입교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입교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개인의 성적표가 교실 사물함에 꽂혀 있었다. 실망이었다. 꼴찌는 아니지만 1/3선에는 미달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어떤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입학 기수를 잘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기수는 육사 출신들이 대거 입교하는 시기라 너무 치열하여 목표한 성적을 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동안 대대장님의 배려와 가족의 뒷바라지에 미안할 뿐이다. 인생을 이렇게 피튀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 감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강의를 더 집중하고 마지막까지 더 치열하게 책과 실습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한편 이런 경쟁이 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지 안타까웠다. 부부동반으로 최근 여행한 북유럽은 '평등한 행복' 누려 소주잔 기울이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한국인의 행복' 치열한 경쟁 속 '자기 몫'에 만족하는 태도가 행복의 길... 얼마전 필자의 부부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에서 웅장한 자연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유산들을 관광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헌데 현지 한국인 여성 가이드가 어느 도심에서 안내 중에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현재 한국의 치열한 입시 및 취업 경쟁에 대해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은 대사관 직원으로 이곳에 파견 나왔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고 정착하게 되었다”며 “한국과 이곳이 다른 점은 너무도 많은데 넓은 영토에 비해 적은 국민들로 천연자연이 풍부해 국민소득이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최상인 복지 국가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면서 “방금 창밖에 환경미화원이 거리 청소를 하는데 옆에 왠 청년이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보셨지요?”하며 “누구 일까요?”라고 반문을 했다. 북유럽은 세금이 수익의 40~60%로 과중하지만 국민들은 전여 개의치 않고 있다며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적게 버는 사람이나 실업자는 오히려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그밖의 복지혜택도 많다고 했다. 가이드는 "직업에 귀천이 없어 창밖의 환경미화원은 자기 일에 만족하며 아들도 부끄러움 없이 힘든 아버지를 도와주는 모습"이라며 "계급의 고하에 따른 차별이 없이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살기 좋은 복지국가"라고 설명했다. 가이드는 더불어 본인의 자식이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행복하다며 미소를 띄웠다. 헌데 그녀는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유학가는 청년이 많이 있는데, 한국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한국에 정착하는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며 '도전을 좋아하는 청년들'이라고 했다. 왜냐면 한국은 치열한 경쟁사회이지만 밤새도록 상점을 열어 편리하며, 여의도 광장에서 통닭과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서비스는 북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경쟁이 치열하지만 좋은 점도 있는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경쟁에서 승리해 승진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삶과 주어진 현재에 만족하는 행복을 누리는 북유럽인의 삶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지만 오랜만에 선배 동료들을 만나 회포를 풀 수 있는 행복(幸福)도 있고, 목표한 성적을 한 단계씩 올려가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무한정 평등하지만 무미건조한 북유럽 복지 사회가 그렇게 부럽게 다가오진 않았다. 비록 경쟁은 치열하지만 마음을 비워 복(福)을 받으면 행복(幸福)하다. 왜냐면 “복(福)이라는 글자에는 한사람(ㅡ)이 먹을 수 있는(ㅁ) 밭(田)이 있어 베풀(示)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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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8) 고등군사반의 추억, 치열한 경쟁 속 소주잔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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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 미 7사단의 압록강 기념촬영은 맥아더 추락과 더 많은 피를 불러와
- ▲ 좌측 압록강에서 기념 촬영한 미군 지휘관들 외쪽부터 키퍼, 호디스, 알몬드 10군단장, 바 7사단장과 우측 11월21일 미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성조기를 꽂는 장면 [사진제공=국방부] 11월 21일, 미 제7사단17연대가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한 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미 제 7사단(사단장 소장 바)이 17연대(연대장 대령 파월)를 선두로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하여 320km에 달하는 산악지대를 혹한과 강설을 무릅쓰면서 집요한 적의 저항 속에서 악전고투 끝에 11월 21일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이 전쟁은 끝내 종식되지 못하였다. 이후 제 17연대는 11월 30일 한국군 제 3사단 23연대에 혜산진을 인계하고 철수하게 되었거니와 그간 미 제 7사단은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는 기온의 급강하로 11월 23일까지 발생한 동상자만도 142명에 달하였다. 이상과 같이 북한 동북부의 작전은 끝을 보지 못한 채 장기적이고 불리한 새로운 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선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7사단 17연대의 이원-혜산진 진격 과정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23/26연대 국군 7연대가 이미 압록강 초산진을 점령하고 뱃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고 있었던 10월 27일 미 제 7합동기동함대 소속의 LST 7척에 분승한 미 제 7사단의 선두부대인 제 17연대 전투단은 이날 미명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미 제 7사단 선두부대의 수송 선단은 10월 29일 아침 이원에 상륙하였다. 이원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지 않았고, 10월 23일 수도사단 제 1기갑연대가 이미 이곳을 점령한 바 있어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선두 부대인 제 17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가 상륙 즉시 제 49야전 포병대대와 제 13 야전공병대대 A 중대와 함께 신북청-북청-장흥리를 거쳐 초리에 진출하였다. 이날 제 17연대의 전방에 위치한 풍산에는 수도사단 제 1연대가 임무를 교대하기 우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우측 제 1기갑연대는 성진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였다. 반면 전날 원산 상륙을 끝마친 미 제 1해병사단은 원산탈환 이후 원산 지구의 방어 임무를 맡아 온 한국군 제 3사단과 임무를 교대 하였다. 한국군 제 3사단은 다시 함흥 지구의 경비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함흥 일대로 병력을 이동했고 수도 사단의 제 1기갑연대는 성진을 점령하였으며, 제 1연대는 풍산을 점령했다. 이후 제 3사단 18연대는 보전령 일대에서 잔적을 격파한 뒤 백암산을 공격하였다. 11월 12일 풍산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서부전선의 청천강 일대와 동부전선의 보전호-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종합적 정보보고에 의거하여 미 제 7사단장 바 소장에게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미 7사단장 바 소장은 제 17연대로 하여금 갑산을 거쳐 혜산진으로 진격케 하여 다음 날인 11월 13일 창평리 일대에 도달했다. 미 17연대는 압록강에서 남으로 흐르는 허천강의 지류로서 수심이 30~40cm 인 웅이강의 북안과 연결된 교량에 이미 적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확인한 연대장 파월 대령은 연대에 소속된 한국군 공병대로 하여금 빈 드럼통으로 도보교를 가설케 하였다. 11월 14일 미 제 17연대는 전날 한국군 공병대가 가설한 도보교를 이용하여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선두부대가 도하할 무렵 적의 사격이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무사히 건너 하저평 일대에 전개하였다. 11월 15일 미 제 17 연대는 전날에 이어 웅이강의 도하 작전을 계속 하여 제 1대대가 최후로 무사히 이를 완료하였다. 다음날 전방의 적은 소집단으로 분산되어 갑산방면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항공 관측 보고에 따라 미 제 17연대는 웅이천 북안의 관평리에서 우가리-평인령(1186 고지)를 통과하여 동쪽 갑산도와 서쪽 삼수도의 교차로인 상리에 진출함으로써 이날 13km를 전진하였다. 그리고 전날 보전호의 동단에 진출한 미 제 31연대 3대대 정찰대의 뒤를 따라 이날 본대는 수상리-장진령(1898 고지)-보전호반의 경로를 따라 서북으로 전진하여 보전호 북단 한대리의 보전댐 부근에서 약 200명의 중공군을 격퇴시켰다. 미 제 17연대는 17일 갑산 남쪽 16km 지점인 석우리를 점령하고 18일에 전진을 계속하여 갑산 남쪽 6km지점인 송우리-장평리 일대에 진출하였다. 이어 선두 부대인 제 1대대는 11월 19일 10:30 경에 보, 전, 포 협동작전으로 갑산을 공격, 점령하였다. 특히 미 제 17연대 전차중대는 참호 속에 있는 적을 압살하였으며, 미 제 15대공포대는 40mm 고사포로 교통호의 잔적을 향해 맹열한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동 연대의 제 1대대는 갑산을 점령한 다음, 계속 혜산진 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여 이날 밤에는 갑산 전방 13km 지점인 판장리에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앞으로 혜산진까지는 37km가 남아 있었다. 한편, 지난 10일 사단의 제 7정찰중대가 파견되었던 슬령 발전소에는 이날 밤 한국군 제 3사단의 전차공격대대의 1개 중대가 도착하여 미 제 32연대의 1개 중대와 교대함으로써 동 1개 중대의 미군은 갑산의 연대 집결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받고 한국군 양개 중대가 교전한 끝에 한국군 5명이 부상하였다. 드디어 11월 21일 아침, 미 제 17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혜산진 가로를 전진하여 오전 10시에는 혜산진 시가와 압록강에 연한 주변일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시가는 일주일 전인 13일 동해상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에 의하여 군영과 창고가 파괴되는 등 시가의 85%가 소신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가의 북쪽을 가로지른 압록강의 강폭은 45~70m 정도였는데, 유폭은 불과 2m였다. 강상의 교량은 동 연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괴되어 있었으며, 강의 북쪽 300m 지점의 만주경내에 위치한 장백에는 중공군의 보초와 장교들의 왕래를 역력히 볼 수 있었다. 당시 17연대 대위였던 레이하비씨는 KBS의 ‘6.25 6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인터뷰에서 “압록강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한국부대가 와 있었습니다. 부대장인 대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더군요. 우리 부대가 압록강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하여 한국군이 먼저 도달했음을 증언했다. 또한 그는 “중국군은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폭이 좁아 밤에 중국군이 건너다니는 길목도 보였습니다. 우리 부대 안에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중국군에게 ‘이쪽으로 건너오지 그래’하자 중국군은 ‘네가 이쪽으로 와’라며 밤에 대화를 나눴습니다.”라고 그때 상황을 회상했다. 레이하비 대위의 증언처럼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부대는 두개라는 설이 있다. 그 부대는 10월1일 38도선을 강원도 양양에서 최초 돌파했고 미17사단과 협조된 공격을 한 3사단 23연대와 당시 3사단 소속이었던 26연대(현재는 수도기계화 사단 소속)이고 이 부대들은 부대 명칭을 혜산진 부대로 부르며 자긍심에 차있다. 맥아더,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라는 축전을 보내... 이와 같이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자 전날 갑산에 와 있었던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사단장 바 소장과 연대장 파월 대령을 대동하고 혜산진에 도착하였고, 이어 동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전날 미 제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원수는 다음날인 11월 22일 아몬드 소장에게 "네드여!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바 소장에게도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고 전해주시오"라는 축전을 보내 왔다. 아몬드 소장은 이에 부가하여 사단장 바 소장에게 『불과 20일 전에 이원에 상륙하여 320km 이상의 심산협곡을 적설과 영하의 혹한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저항을 반복하는 적을 무찌르고 귀하가 거둔 성과는 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일 "갑산에 집결한 미 제 32연대는 삼수를 거쳐 신갈파진에 진출하여 미 제 17연대의 서측에 배치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이날 갑산에서 삼수를 통과한 제 32연대가 삼수에서 신갈파진으로 진격을 개시함에 따라 혜산진의 제 17연대도 일부 병력을 신갈파진으로 우회시켜 제 32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 미 제 17연대의 수색대는 서쪽으로 11km를 전진하다가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을 받았고, 제 32연대 3대대의 특수 임무부대 역시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어 양 부대는 사투에 사투를 거듭한 나머지 28일에야 신갈파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 좌측 10월 24일~11월26일간의 동부전선의 유엔군 진격로와 우측 10월25일 중공군 40군 118사단이 국군 6사단을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1월8일까지 진출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접전도 [자료제공=이우형교수] 미 알몬드 10군단장의 압록강 기념 촬영, 맥아더의 추락과 많은 미군의 피를 불러와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유엔군 약 1만7천명 사상 피해 하지만 이미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10월25일 국군 6사단을 궤멸시키기 시작하였고 동부전선에서 미17연대가 치열하게 혜산진으로 북진하던 11월8일 개천 -회천-황초령까지 진출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존재를 확인한 유앤군은 작전을 전환하여 10월 26일~12월 13일까지 함남 장진군, 함주군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전투에서는 많은 미군들의 피를 뿌렸고, 만주 폭격을 시도하려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경질을 확정짓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전투는 피난민들이 흥남 부두에 정박한 미국 군함에 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단연 압권인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각인된 흥남 철수 작전은 아비규환의 필사적 탈출이었다. T R 페렌바크는 책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흥남 철수에 대해 “덩케르크 철수와는 달랐다. 서둘러 배에 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은 없었다”고 썼다. 군 작전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기습 공세로 전멸 위기에 처했던 연합군이 가까스로 빠져나온 덩케르크처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미 군함에 타지 못하면 공산치하를 탈출할 길이 없었던 피난민들의 절박성은 다른 문제였지만 유엔군과 민간인 20만 명의 흥남 철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미 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였다. 1950년 말 개마고원에는 유엔군은 7,83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해겨울은 어느 때보다 더 지독한 추위였다. 옷을 여러 겹 입어도 살을 에는 추위를 막을 수 없던 장병들의 손과 발은 동상으로 하얗게 변했다. 수통의 물도, 캔 속의 전투식량도 얼어버렸다. 수류탄은 불발되기 일쑤였고, 차량은 시동 걸기가 어려웠다. 그런 혹한 속에서 미 해병들은 음산한 나팔 소리와 함께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퇴로를 열었다. 남쪽으로 물러서면서도 공격전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후퇴는 ‘남쪽으로의 공격’이라고 불렸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인들에겐 ‘잊혀진 전쟁’이 된 6·25의 기억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워싱턴 한국전쟁기념공원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함께 서 있는 조형물도 장진호의 해병 장병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6만7천명 중 사상자는 4만 8천명이지만 유엔군 측은 3만명 중 사상자는 약 1만7천명에 달했다. 양쪽의 피해 규모를 볼때는 유엔군의 전술적 승리이지만, 중공군은 전쟁 국면의 전환시켜 본격적인 공세돌입하여 37도선까지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킨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장진호 전투는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불린다. 즉 장진(長津·일본어 발음으로 초신)에서 압도적 병력 열세에도 온갖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선택받은 소수(chosen few)’가 된 영웅들의 전투였지만 미군 지휘관들의 혜산진 기념촬영은 많은 미군들의 희생과 맥아더의 경질 그리고 한국 현 대통령을 배출시킨 흥남철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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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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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 미 7사단의 압록강 기념촬영은 맥아더 추락과 더 많은 피를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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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 이승만이 맛본 수통의 압록강물,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
- ▲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가 1950년10월26일 14시즈음 압록강 초산진에서 수통에 물을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 참석...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이승만대통령은 1950년 10월 27일 김일성광장에서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과 국군-유엔군환영시민대회에 참석했다. 그 시각 초산의 압록강변에 선두로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부하에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이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시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산길을 이용해 침투식으로 공격을 하여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들에게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6사단 7연대가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달 패전한 북한군 사단은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 지휘 이대용 대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경에서 오랑캐 막아내다 죽을테니…” [김희철의 전쟁사](2)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편에 소개했던 동락리 전투는 6·25 남침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에게 희망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6·25 남침전쟁 발발 12일째인 7월7일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 7연대는 ▲적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화포 및 총기 2,012정 ▲장갑차 및 차량 88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하며 전쟁 발발 이후 최초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6사단의 선두 부대로서 화천을 점령하고 노획했던 북한 트럭 150 대를 밑천으로 쾌속으로 북진 중에 다량의 트럭들을 더 노획해서 300대의 트럭으로 완전 차량화했던 덕분에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게 10월26일 14시 즈음 1착으로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위의 우측지도는 빨랐던 6사단 7연대의 진격 상황을 보여준다. 1950년 10월 말에 각 경쟁 부대의 북진 도달점은 왼쪽 영연방 여단의 정주가 있고 오른쪽 7, 8사단의 덕천이 있다. 한달 뒤인 11월 말에 미군 7사단과 함께 오른쪽 혜산진까지 북상했던 3사단과 충북 도경 전투 경찰 병력이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전,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는 압록강을 접하고 있는 초산군의 읍 소재지 6km 지점에서 북한군 여단 병력과 압록강 도달을 앞둔 마지막 북진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사단은 계속된 패전으로 축소되어 여단 규모였다. 이 부대 지휘관은 현재 남한으로 망명한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었다고 한다. 적의 저항은 상당히 거셌으나 곧 한계에 와서 국군에게 길을 열어주고 패주했다. 김용주 중령이 지휘하는 1 대대는 텅텅 빈 초산읍내를 통과해서 압록강으로 치달렸다. 최선봉 1 중대장으로 초산 서북쪽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진격하여 압록강에 선두로 도착했던 故 이대용 장군은 그의 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에서 “자동차 도로는 큰 반원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었다. 이 위를 군용 트럭은 달렸다. 서북쪽으로 커브를 꺾어 조금 나가니 거대한 막이 확 열리는 듯 장엄한 신비의 대호수가 화면처럼 떠올랐다. 산과 산사이를 감색의 물로 가득 채운 장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압록강이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 분! 아 ! 이 나라 남아로 태어나서 자유의 종을 울리며 남북을 통일하고 나니 지금 죽어도 무슨 유한이 있으리오! "라고 전했다. 모두들 벅찬 가슴에는 흥분과 감회가 교차했다. 뒤이어 압록강에 도달한 1대대원의 눈에 띈 것은 북한군이 넓은 강을 가로 질러 중국까지 놓은 뗏목 다리와 이 다리를 건너고 있던 많은 북한 주민들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이미 다리를 건너가 중국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북한 노동당원 간부들과 관리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배속된 연대의 57mm 대전차포로 이 다리를 파괴하였다. 북진의 기념비적인 유명한 압록강의 물은 수통에 담아 연대 본부로 보내고 오후 4시경, 김용배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서 이대용 대위의 1 중대를 남겨놓고 대대의 다른 중대들은 모두 6km 남방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방문해서 서쪽 벽동 쪽으로 진격했던 2연대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고 걱정하며 돌아갔다. ▲ 좌측, 7연대 1 대대 1 중대장 이대용 대위(예비역 준장, 전 주월남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와 우측, 중공군의 진격로와 이대용 중대의 적진 탈출 요도 [사진제공=국방부] 초산 압록강물 수통에서 맛본 통일 기쁨, 이틀 못넘기고 비극 시작 7연대, 중공군의 후방차단으로 생존자 22명만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 복귀 그날 이대용 대위는 1 소대장 서근석 소위와 연락병 홍인곤 하사, 그리고 1 중대가 북진하면서 순천에서 구출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 명 박태숙, 정정훈 여사와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던 신도장과 중국 쪽을 오갔던 나룻배의 뱃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압록강에서 머무른 시간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압록강 도착 이틀째인 1950년10 월 28일,오후 다섯 시 이 신도장 나루터에 있던 검문소 성격의 분주소에서 위치한 1 중대 본부로 초산의 대대로 부터 “대군의 중공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는 불길한 정보와 함께 당일로 신속히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이대용 대위는 어이가 없어 대대장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국경선에서 오랑캐를 막아내다 죽을테니 이 곳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하고 철수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초산의 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상황의 엄중함을 설명하며 거듭 빠른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대용 중대는 눈물을 머금고 두 시간 뒤인 저녁 6시 45분 대대 본부가 있던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7연대는 다음 날인 10월 29일 7연대는 중공군의 사격과 교랑 파괴를 무릅쓰고 남하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빨리 벗어나려 노력했었으나 실패했다. 중공군 13병단 예하의 사단 병력 규모 공격으로 길게 늘어선 7연대는 선두 부대부터 맨 뒤 후위 부대까지 피해를 입어 30일 자정 12시즈음에 연대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병력의 76%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부하 160명을 데리고 전투에 돌입한 이대용 장군은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바다와 같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고 철수 전투중에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었다. 이대용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9일 후인 11월 8일 7연대에서 최초로 단지 생존자 22명만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으로 간신히 복귀할 수가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의 의미처럼 초산 압록강물 수통의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지만 생존자들 중에는 기적 같이도 순천에서 북한군에게 끌려 가던 중 국군이 구출해서 데리고 북진했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명도 있었다고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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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 이승만이 맛본 수통의 압록강물,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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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7)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
- 민방위훈련은 1972년 '민방공·소방의 날'이 시초 대대교육장교 시절, 열외 병사 및 간부들로 고민 오토바이 뒷좌석에 최루탄을 달고 주둔지를 돌며 훈련 유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신혼 초, 대성산 기슭의 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살림을 시작한 우리 부부는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 방 속에서 한 겨울 연탄 아궁이 열로 방바닥 아랫목은 시꺼멓게 탔지만 이불 밖의 기온은 영하로 입김이 서렸던 추억을 갖고 있다. 현재 민방위훈련은 연간 총 5회 실시하나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유명무실화 되어 있지만, 필자가 대대교육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인 1980년대에는 매월 15일이 되면 전부대 및 주민들이 민방공훈련을 했다. 그때 어느 달 15일에도 어김없이 민방공훈련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핵심은 전 부대원들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적항공기 침공에 대비해 중대 및 소대별로 대공화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화재 발생 상황을 조성하여 대피 및 물자 운반, 화재진압 등 소방훈련까지 한다. 헌데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훈련을 열외하는 경우가 있어 고민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방독면을 강제로 쓰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노후된 관사에서 한 겨울 추위를 잊게 했던 연탄 운반용 집게에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한 바퀴 돌면 최류 가스 때문에 간부 및 병사들은 자동으로 방독면을 쓰고 훈련에 참가하도록 만들었다. 효과적인 훈련이 되었고 몰래 숨어 훈련 시간만 피해보려고 했던 장병들은 최류가스를 마시면 급하게 방독면을 찾아 착용했다. 또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 아마 군생활동안 요령을 피웠던 예비역들은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독면의 정화기 마개를 열어놓아 착용시 답답함을 모면 하려고 했던 일부 병사들이 방독면을 착용했어도 최류가스가 그대로 들어오는 '재난'을 겪게 됐다. 그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마개를 닫았다. 결국 자동으로 방독면 관리 상태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각 중대 막사마다 최류가스탄을 터뜨려야 했는데 오토바이를 이용하니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최류탄을 결합했던 연탄집게 사용하자 관사에 '최류가스 소동' 국민의 무관심과 경제논리로 소홀해지는 최근 새태 안타까워 그날 부대의 민방공훈련은 연탄 집게에 최류탄을 결합한 오토바이 운용 덕분에 방독면 관리도 확인하고 열외 없이 주둔지 내 전 병력이 제대로 훈련을 하게 되었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훈련이 끝나고 다음 일정에 바쁘게 업무를 하고있는데 관사 지역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필자의 가족이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휘저었던 연탄 집게를 이용하여 아궁 속 연탄을 갈자, 달구어진 집게에서 최류(CS)가 나와 집안은 물론 관사지역에 퍼져 군인 가족들이 비상이 걸린 것이다. 필자는 놀라 관사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사과를 했고 필자의 가족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원망의 하소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날은 민과 군이 제대로 통합훈련을 하게 되었던 셈이다. 동시에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을 낳게 하는 추억도 남겼다. 사실 우리나라 민방위업무 및 민방공훈련은 6·25전쟁 직후인 1951년 국방부 계엄사령부에 민방공총본부가 창설되면서부터 국민과 함께 해왔다. 민방위훈련은 1972년 최초 “민방공·소방의 날” 훈련이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민방위활동이 유사시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그동안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시민들은 민방위 대원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지하대피소, 지하보도 등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다. 또한 운행 중인 차량의 경우 긴급차량 비상차로 확보를 위해 도로 오른쪽에 정차한 후 시동을 끄고 라디오 실황방송을 청취하며 대기했다. 이후 경계경보가 발령되면 시민들은 대피소에서 나와 경계태세를 유지하면서 통행하고, 경보해제 발령 후에는 정상 활동으로 복귀하고 차량 역시 차량통제 해제방송에 따라 행동하면 훈련이 종료된다. 다만 병원, 지하철, 철도, 고속화도로, 항공기, 선박 등은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작금에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단순한 경제 논리에 의해 민방공훈련은 소홀하게 되는 실정이다. 앞으로는 이 제도가 제대로 부할해서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을 함으로서 국민들의 안보의식 고취시키며 이를 통해 실제 상황발생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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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7)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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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모든 위기와 성공은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 ▲ 선영제 전 전쟁기념사업회장(전 육군참모차장, 예비역 중장)이 그동안의 경험과 강의를 통해 정리하여 발간한 ‘리더십이 답이다’책자 [사진=김희철] 육군참모차장 역임한 선영제 예비역 육군중장, '리더십이 답이다'출간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구 물리친 명량해전의 승리는 성공한 리더십" 모든 조직의 위기와 극복은 모두 서로 다른 리더십에서 비롯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결실의 계절인 10~11월 광화문과 서초동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메우며 대한민국은 분열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 리더십의 부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전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한 선영제 예비역 육군 중장은 “오늘날 리더십은 풍요 속의 빈곤이며 동서고금의 사례와 방법론이 속출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다가온다”며 안타까워 했다. 따라서 본인의 군생활과 전쟁기념사업회장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강의 내용 등을 종합하여 ‘리더십이 답이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선 장군은 프롤로그에서 “조직의 성패는 리더십의 성패에 달렸다”며 과거 예로 임진왜란의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이었다. 특히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랑해전처럼 모든 조직의 성공과 위기의 본질적인 문제는 리더십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리더십이 답이다’라는 책에서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가치추구, 진정, 맞춤형, 경영자 팀 리더십으로 제시하며 지금은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의력이 경쟁력이며 융합과 협업의 시대라고 했다. 특히 리더의 9대 필수 핵심 역량으로 1. 조직관리 2.인간관계 3.소통 및 설득 4.의사결정 5.정보력 6.문제해결 7.갈등 및 분노 조절 8.위기 및 리스크 관리 9.유머 능력이 있다. 이러한 핵심역량을 갖춘 리더들의 특징은 꿈과 목표가 분명하며 성실하면서도 유능하고 좋은 습관을 지니면서도 남의 배려와 친절에 감사할 줄도 알며 경청과 소통에 능하다고 했다. 또한 효과적으로 시간과 인맥 관리를 잘하며 자신감과 적극성, 열정을 갖고 남을 섬길 줄 알고 인내심도 있는데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것 등이다. ▲ 혼돈의 시대에 표출된 광화문 민심과 선영제 전 전쟁기념사업회장이 발간한 리더십 책자 [사진제공=김희철] 저자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국가는 크게 발전했고, 함량 미달 리더십을 구사하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쇠락의 길, 사양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는 필리핀과 파키스탄이었다. 당시 필리핀 기술자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있는 우리나라에 와서 광화문에 있는 정부 청사 일부와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건물도 지을 기술도 능력도 없었다. 이러한 필리핀이 불행이도 3대에 걸쳐 능력이 부족한 최고 정치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추락의 길을 걸었다. 또한 한국은 1963년도에 우리보다 잘사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외무고시 제도 등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잘살았던 필리핀과 파키스탄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선영제 장군은 이와같이 리더십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에필로그에서 “리더십 능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으며 꾸준하고 오랜 노력과 성찰이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칭기스칸이 “한 사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회 각 분야의 리더들이 훌륭한 리더십으로 만인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며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리더십 또한 정답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을 찾아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한다는게 선 장군이 내린 결론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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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CRISI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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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모든 위기와 성공은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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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 선택의 연속……..?
- ▲ 지난 호국훈련 중 공중강습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UH-60 기동헬기 [사진제공=국방부]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선택함을 비유 결혼 날자를 택해 청첩장도 돌렸는데 상급부대훈련이 변경되어 난감한 처지됨 결혼도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인 인생의 선택 중 중요한 하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병아리 우는 소리를 啐, 깨뜨리는 것을 啄이라 하는데,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로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비유한 사자성어이다. 엄동설한의 추위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따사한 봄이 되어 꽃이 피자 언제 삭풍을 몰아쳤냐고 되물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 화사한 봄날에 인접 GP장의 여동생을 처음 만났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가을이 되자 그 만남은 열매를 맺어 결혼식을 올리는 날짜를 잡았다. 평범한 시민들은 길일을 찾아 혼인 날짜를 정하지만 군인들은 길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상급부대 훈련, 검열 등의 고려요소를 참고하여 가능한 날을 선정해야 한다. 필자는 대대교육장교 근무시절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연대 전투단 훈련 겸 평가일과 대대 전슬흔련 평가를 모두 마치고 여유있게 결혼 날짜를 선택했다. . 그러나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라고 이야기 한다. 선택을 잘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을 만나게 된다. ‘군단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연대 전투단(RCT)훈련을 받은 뒤에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가 계획 되어 있었는데 상급부대 일정이 변경되어 연대 전투단(RCT)훈련이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 시기로 연기되어 뒤로 미루어진 대대훈련평가와 결혼 날짜가 중복 되었다.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 이미 청첩장을 모두 발송했는데 난감했다. 고민에 말도 못하고 있는데 송영근 대대장이 호출했다. “교육장교, 니 결혼이 상급부대 일정 변경으로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와 중복되어 고민이지…..?”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픈 곳을 콕 찌르는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어서 대대장은 “송영근이 육군 중위 한명 없다고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를 못 받을 것 같으냐?”라며 “개의치 말고 계획대로 결혼하고 휴가까지 충분하게 갔다 와라”하자 필자가 계획하고 협조한 ‘항공정찰과 연막작전’은 누가하냐고 반문했으나 막무가내로 기간에 맞추어 출발하라며 지시임을 강조했다. 대대장실을 나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본인의 대대장 근무를 평가받는 훈련을 앞두고 부하들을 배려하는 도량에 감동의 연속이었다. 생도시절 훈육관으로 인연도 맺었지만 직속 상관으로 모시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다음주 있는 대대전술훈련 평가 전인 토요일 결혼식을 앞두고 목요일까지 훈련 준비를 한 뒤에 야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인생에 한번 밖에 없는 결혼식도 소속된 부대훈련평가의 부담을 안고 치루게 되었다. 인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선의 해결방법은 필자 본인이 선택해야 했다. ▲ 필자의 결혼식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서울에 도착한 야밤에 처갓집 대문을 두드려 한밤자고 새벽에 다시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바로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다른 동기도 결혼 날짜가 중복되어 걱정했는데 성남 행정학교에서 교육받던 동기들이 많이 찾아와 풍성하고 행복한 인생 출발 행사가 되었다. 제주도 신혼여행도 간단히 마치고 월요일 밤에 부대에 도착하니 이미 전부대원은 주둔지 준비태세 평가를 마치고 야외 훈련장으로 나가 부대는 텅 비어 있었다. 복장을 준비하여 다음날 새벽에 훈련장 상황실 텐트에 도착하니 작전장교는 너무도 반가워하며 맞아 주었다. 상황실 텐트애서 필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은 송 대대장이 지휘관 텐트로 호출을 했다. 들어가자 대대장은 화를 내며 본인의 평가를 위해 부하의 인륜지 대사인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민망하다며 꾸중을 했지만 입가에 숨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결혼식은 성황리에 잘 끝냈고 제주도 신혼여행도 다녀와서 행사는 잘 치루었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항공 정찰 시간이 되어 사단 항공대로 출발해야 된다며 급하게 대대장 텐트를 빠져나와 짚차에 올랐다. 항공대로 이동하는 짚차의 스치는 바람도 미소 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항공대에는 지금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O-2기가 있었다. 고정익 항공기를 타고 공격 대기중인 적지역을 정찰하며 집결해 있는 적군의 위치도 파악하고 좌표를 불러주며 화력 요청한 뒤 부대로 복귀했다. 곧 통제관실에서 대항군의 항의를 접수했다고 한다. 항공기가 적군의 상공을 날자 사전 항공기 사용을 협조 안했다며 본인들이 요청 못한 것을 오히려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해 필자가 한달전에 요청한 항공정찰 중 한건을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마루리 했다. 공격간에는 대대원이 도로를 횡단하게 되어 사전에 사단화학대와 협조한 연막통을 도로에 피워 아군의 위치도 기만하면서 은폐 기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신없이 작전항공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어느덧 대대전술훈련평가(ATT)도 막을 내렸다. 이번 훈련에서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항공정찰과 연막을 활용한 것과 대대장의 창의적인 전술 능력이 돋보이는 훈련이었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수는 부하의 입장에서 배려하여 지휘해야 한다. 또한 적시에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의 啐啄同時(줄탁동시)가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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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 선택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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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3) ‘평양탈환작전’의 영광보다 전략적 실패 분석이 중요
- ▲ 평양입성 직후인 1950년 10월 19일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하는 백선엽 국군1사단장(왼쪽)과 10월 29일 오전 11시 평양시청 앞 ‘이승만대통령 평양입성 환영/탈환기념식’ (오른쪽)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 만큼은 국군이 먼저”, 평양탈환으로 전술적 승리의 영광 38선 돌파/북진 10여 일 지체와 간접접근 전략구현 미흡으로 전략적 실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38선 돌파시 맥아더는 북한 진공의 기본구상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있었다. “1. 제8군으로 서울 북방 지역에서 38선을 돌파, 평양을 향해 진공한다. 2.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한 후 원산에 상륙, 미 해병 제1사단은 중국과의 국경으로 북진케 하고, 미 제7사단은 평양 북쪽을 향해 서진케 한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으로 주력이 붕괴된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거의 없자 후방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3개 사단을 새로 편성, 우선적으로 평양 진입의 요충지인 금천 일대에 북한군 19ㆍ27사단을 배치하고, 해주 일대에 74사단을 배치했다. 따라서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지도부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더라도 유엔군은 38선 남쪽에서 멈춰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대와 달리 가장 먼저 10월 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부대인 1기병사단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조공인 국군 1사단은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향했다. 최초 군단의 예비임무를 부여받았던 백선엽 국군1사단장은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건의했다. “한국군과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적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데 한국군 부대가 빠져서는 안 된다.” 백선엽의 건의에 따라 최초 조공부대로 편성됐던 미 24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됐다. 또한 국군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치면서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줘 미군사단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케 했다. 미 1군단의 북진은 10월 9일 오전 9시,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항전은 결사적이었다. 곳곳에는 지뢰가 대량으로 매설돼 있어 11일까지 기병사단 공격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해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켰다. 그리고 10월 12일 아침, 마침내 기병사단의 2개 연대가 북한군의 후방 한포리를 점령했고 14일까지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했다. 결사적인 북한군의 평양방어와 국군과 유엔군의 선두부대 경쟁 1950년 10월 14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결사적인 저항은 평양을 방위하기 위한 것보다는 북한 수뇌부를 비롯한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금천전투가 치열할 때 강계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10월 16일 새벽 2시경 평양을 빠져나갔다. 이는 김일성을 호위하던 군관 한 명이 희천에서 국군7연대에 투항하여 알게 됐다. 김정일은 당시 10세였는데, 10일 전 이미 만주 장춘으로 피난했다. 평양에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 새벽, 평양을 출발한 김일성은 볼가라는 소련제 고급승용차를 이용하여 순천~개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그리고 희천에 이르렀을 때 난관에 부닥쳤다. 폭격으로 도로가 파손되어 승용차길이 막히고, 그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던 반공애국주민들이 습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 소식을 전해 듣고 내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 북한군 패잔병들을 공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려 찻길을 포기하고 산길을 이용해 10월 26일 강계 근처 별오리에 도착했다. 이후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 후인 1950년 12월 별오리에서 개전 이후 6개월간의 전쟁을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평양진격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이고 각 사단, 사단 내의 각 연대까지도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경쟁심에 불타 있었다. 특히 미 1군단 내에서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의 경쟁이 치열했다.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국군 1사단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오전 11시쯤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철교를 폭파했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폭파작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정확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그 동안의 지체가 불가피하게 됐다. 10월 20일, 날이 밝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반면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1사단은 도섭지점을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일 밤에는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ㆍ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평양탈환작전, 감청 당한 적 통신병 “도망쳐야갔시요.” 아무리 쫓기는 군대라지만, 평양만은 내줄 수 없다는 듯 적의 저항은 제법 완강했던 10월 18일 밤이었다. 적은 나지막한 언덕마다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하고 폭 넓고 종심이 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도로에는 갖가지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촘촘히 매설해 1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한동안의 공격에도 지동리는 좀체 뚫리지 않았다. 밤새도록 적진에 포격을 가했다. 고사포와 전차포를 총동원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적진이 조용해졌다. 진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백장군은 시가지에 무차별 포격을 막기 위해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평양에는 대동문, 을밀대, 연광정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많으니, 그런 곳에는 절대 포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일본의 교토만은 폭격에서 제외해 문화재를 지킨 사례를 알고 있었던 미군 지휘관들은 내 요청을 이해하고 잘 협조해 줬다. 평양 동남쪽 지동리를 돌파해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다 통신참모 윤혁표 대위가 버려진 적 진지에서 전화선을 발견, 인민군 총사령부와의 통신을 감청하다 적 통신병과 통화가 됐다. 백장군은 윤 대위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들고 “동무, 수고가 많소.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는 통신병이라 했다. 김일성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백장군이 “그럼 수고하라. 마지막까지 잘 버티라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적 병사는 “아닙네다. 지금 미 제국주의 땅크 수백 대가 몰려오고 있습네다. 도망쳐 나두 살아야 하갔시요”라고 했다. 적의 동요와 혼란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월 19일 지동리를 넘어선 1사단은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백장군은 그 광경을 “2개 보병연대가 길게 횡대로 전개해 적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들어간 그 순간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라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 19일 오전 10시 50분. 드디어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국군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 대통령,“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특명으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도 평양 조기입성 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국군부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소의 이견이 있다. “국군 7사단 8연대가 하루 먼저 평양을 점령했다”라는 주장도 있어 소개한다. 7사단 8연대가 평양으로 진격하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라는 밀명을 내림으로써 국군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이 평양진출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중 8사단은 19일 성천을 점령하고 이어 20일 강동을 점령했으나 그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사단의 진로를 돌려 덕천 방향으로 진출했다. 7사단 8연대는 18일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를 출발해 오후 8시 쯤 삼등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삼등을 출발한 8연대는 삼산리에서 대동강을 급속 도하한 후 19일 밤, 김일성대학에 도착하여 1사단 15연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본평양에 진입한 것이 된다. 그런데 8연대의 김일성대학 점령 시간이 18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7사단에서 편찬된 ‘상승부대사’는 참전용사의 증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김호규 대위가 지휘하는 8연대 3대대 9중대가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대동강 상류를 도하, 오후 9시쯤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해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김일성대학 옥상에 일착으로 태극기를 게양했고, 퇴각하는 북한군 1사단 및 수도방위사단을 포위·섬멸하는 쾌거를 이룩해 사단의 용맹을 떨쳤다.”라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을 감안해 군사편찬연구소가 2009년에 펴낸 ‘6·25전쟁사’ 제6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에는 관련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다.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에 국군 1사단 11·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7사단 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됐다.” ▲ 평양에 입성하는 국군 및 유엔군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모습 [동영상 캡처] 평양탈환 작전은 전술적 성공했으나 38선 돌파 및 북진 10여 일 지체로 전략적 실패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전략,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 베트남전에서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이와 같이 전쟁 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상대편 국민들에게 전쟁패배 사실을 명확하게 심어주면서 저항의지를 상실케 하는 전략적 효과를 얻는 길이다. 반면 6·25전쟁의 사례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따라서 국군의 제2군단까지 가세한 평양점령은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한 이상 “북한의 중요도시를 점령했다”는 전술적 승리의 의미밖에는 없었다. 그때 만약 주력인 미 1군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평양의 동측을 크게 우회해 평양 후방의 순천이나 숙천으로 진출해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포위하여 김일성을 제거했다면 중공군 참전 명분도 없어지며 전쟁은 조기에 종결될 수도 있었다. 리델하트가 간접접근전략에서 제시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주공인 제1기병사단을 북한군이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금천 축선보다 비교적 미약한 전투력이 배치된 국군 1사단의 지역, 즉 토산-신계 축선에 투입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국군 제2군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1군단이 평양을 공격하는 동안 전속력으로 숙천-순천방향으로 진격해 북한군 철수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북한군 지도부가 안전하게 평양을 탈출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 이유는 유엔군이 9월 30일부터 38선에 근접한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기까지 10여 일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한 3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국군이 지연전을 펼칠 여유를 회복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재연되었다. 유엔군이 지체한 단 며칠 사이에 북한군은 3개 사단을 신편한 후 금천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물론 북진을 위한 유엔총회의 결의(10월 7일)가 필요했고, 낙동강에서 38도선까지 300여㎞를 불과 10여일 만에 진출한 탓에 부대 정비에도 다소 시간이 필요 했었다. 하지만 공격작전의 기세는 단 하루, 한 시간이 중요하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군단이 38선에서 지체함 없이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맥아더가 구상한 원산상륙 작전 부대보다 더 빠르게 동해안의 요충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굴러가는 바윗돌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멈춰 선 바윗돌을 다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것이 공격작전의 기세유지이며 주도권 확보이다.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한 우리 국군은 앞으로의 전쟁에서 전술적 승리보다 전략적 승리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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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3) ‘평양탈환작전’의 영광보다 전략적 실패 분석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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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경항모 도입과 신형 이지스함 SM-3 탑재 ‘지지’
- ▲ 지난 18일 오후 ‘뉴스투데이’를 방문하여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사진=이원갑 기자]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 10일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해군 국정감사에서 경항공모함과 F-35B, SM-3를 해군의 ‘3대 비상식 무기 도입’으로 규정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와 관련, 해군 예비역 제독 중 작전 분야에 정통한 인물로 알려진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해군중장)과 지난 18일 인터뷰를 가졌다. 이 전 사령관은 대령 시절 제1함대사 작전참모와 광개토대왕함 함장을, 준장 시절 합참에서 해군작전을 전담하는 합참 작전2처장 직책을 수행했으며, 소장 시절에는 서해 바다를 수호하는 제2함대사령관을 역임한 명실상부한 해군작전 전문가로서, 현재 해양대학교 초빙교수로 활동 중이다. 일본 이즈모함 수준의 경항모 도입은 해군 작전능력 향상시켜 경항모 도입이 상식 밖이라는 지적은 너무 지엽적인 안목 Q1. 김종대 의원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을 염두에 두고 경항모를 도입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지적했는데, 맞는 얘기인가? A1. 김종대 의원께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저도 언론을 보고 많이 의아했다. 해군의 전력증강 방향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과 핵·미사일 위협을 대비함은 물론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도 함께 고려하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주변국과 동등한 수준의 전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무력을 사용할 경우 자신들도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느낄 정도의 전력은 보유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수준일지는 비용 대비 효과 등 여러 요소를 판단해 결정하는데, 경항모 도입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항공모함은 배수톤수가 7만 톤 이상인 대형 항모, 4∼7만 톤인 중형 항모 그리고 4만 톤 미만인 소형(경) 항모로 분류된다. 경항모는 27,000톤인 일본의 이즈모함이 대표적으로 헬기는 물론 F-35B 12대 이상을 탑재할 수 있다. 우리 해군이 도입하려는 것은 일본의 이즈모함과 유사한 경항모다. 우리가 경항모를 갖게 되면 특히 전시에 상륙작전 능력이 강화된다. 상륙작전은 상륙군을 적지에 상륙시키는 이동수단과 상륙 과정의 화력 지원이 중요하다. 경항모는 전투기나 헬기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해상 플랫폼을 제공함으로 상륙군을 헬기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고 전투기로 화력까지 동시 제공할 수 있어 상륙작전의 효율성과 즉응성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평시에 원거리 대양작전을 통해 해상교통로 보호, 재외국민 보호 등 해양에서 국익 보호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난민 보호 등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맡아 공헌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국격에 맞는 책임을 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경항모는 전시와 평시에 우리의 국가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해군 자산이다. 그럼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을 두고 경항모를 도입하는 것이 상식 밖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너무 지엽적인 안목이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대급’ 수직이착륙기 F-35B 도입은 경항모 도입 결정 이후 문제 Q2. 청와대가 F-35B 도입 검토를 지시했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도 비상식적이라고 비판했다. A2. F-35B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항공기로서 현존하는 수직이착륙기 중 가장 우수한 전술기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F-35B를 도입하려면 경항모 도입이 먼저 결정돼야 한다. 또한 경항모 도입이 결정된다 하더라도 탑재할 항공기는 경쟁 기종 중에서 가격과 성능 등 여러 가지 요소를 평가하여 절차에 따라 획득된다. 따라서 경항모 도입이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F-35B 도입 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만약 경항모 도입이 확정되면 설계 시부터 탑재할 헬기와 수직이착륙 항공기의 운영을 고려해 기존 함정보다는 훨씬 강한 선체로 비행갑판 및 격납고 등이 건조돼야 한다. 이에 대한 사전 검토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며, 탑재할 기종도 함께 검토해야 하는데 수직이착륙기 중 F-35B가 가장 우수하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경항모가 도입된다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신속히 화력이 지원돼야 하며 이에 적합한 항공기가 도입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F-35B 도입 검토를 비상식적으로 치부하지 말고 이런 기회에 충분히 검토해 국익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지스 구축함에 SM-3 탑재하면 사드보다 훨씬 유리하고 효율적 Q3. 해군이 신형 이지스 구축함(KDX-Ⅲ 배치-2)에 SM-3 탑재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서도 군사적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A3.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는 원거리·고고도 미사일 탐지 및 요격이 가능한 복합다층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원거리 탐지능력을 갖춘 이지스 구축함에 고고도 요격능력을 갖춘 SM-3를 탑재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도 극히 당연함에도 왜 군사적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현재 우리가 보유한 미사일은 40km 이하의 고도인 종말단계에서만 북한의 (핵·생물·화학무기 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일부 보완하기 위해 한·미간 합의로 사드(THAAD)가 배치됐는데, 만약 이지스 구축함에 SM-3가 탑재됐더라면 THAAD를 그렇게 급히 배치할 필요가 없었고, 한·중 및 남·남 갈등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SM-3는 함정에 탑재됨으로 지상에 배치된 THAAD보다 생존성이 훨씬 높고, 북한의 발사 징후를 탐지하면 최적의 요격 위치로 사전에 기동하여 요격 확률도 높일 수 있어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훨씬 많다. 또 북한 미사일을 고고도에서 요격해 핵탄두라 하더라도 잔해들은 대기권 진입 시 모두 소멸돼 잔해에 의한 2차 피해까지 막을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이 있다. 우리가 SM-3를 탑재할 경우 미국의 MD에 편입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의 MD에 편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천명해 왔고 독자적으로 KAMD를 구축 중에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KAMD가 북한의 탄도미사일에 대한 대응임을 지속적으로 이해시키면서 이를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형 차기구축함 전력화는 이지스함 작전능력 획기적 보완 Q4. 미니 이지스함으로 불리는 6천톤급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이 기본설계에 착수했는데, 전력화되면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나? A4. 우리 해군은 현재 3척의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작전·교육훈련·정비의 주기를 고려하면 실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함정은 1척 또는 많아야 2척이다. 북한의 위협이 고조돼 긴급히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전력 부족으로 작전 공백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기동부대 작전 시 대탄도미사일 작전과 기동부대방어를 위한 대유도탄대항 작전 등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지스 구축함이 1척뿐이면 함정에게 매우 큰 부담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적어도 2척 이상 이지스 구축함이 편성돼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함정이 부족해 그렇게 운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지스 체계를 탑재한 차기구축함이 추가로 건조되어 작전에 투입된다면 우리 군의 북한 탄도미사일에 대한 탐지 및 요격 능력이 크게 향상됨은 물론 기동부대의 생존성 향상에도 기여함으로서 해상작전 능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핵잠수함, 북한 SLBM 발사 잠수함 대응 효과적...NPT 위배 안 돼 Q5. 일부 반대의 목소리도 있지만 핵잠수함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A5. 잠수함은 은밀성이 생명이며, 은밀성이 극대화 된 잠수함은 적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 은밀성을 가지려면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장시간 수중작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재래식 디젤잠수함은 밧데리 충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스노켈(snorkel) 항해를 해야 하며, 그 시간이 가장 취약하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핵추진잠수함(핵잠수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핵추진잠수함을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핵잠수함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해군이 보유하려는 핵잠수함은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이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이다. 핵추진잠수함은 재래식 잠수함보다 기동성과 은밀성이 매우 우수해 적 잠수함에 대한 감시, 정찰 및 추적에 유리하다. SLBM(수중발사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북한 잠수함을 탐지하고 격침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전력이 될 수 있다.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하면 주변국의 잠재 위협에 대한 억제에도 아주 유용한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핵추진잠수함 건조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IAEA 안전조치에 위반이 아니냐며 우려하지만 NPT에서는 잠수함 추진용으로 사용하는 핵물질을 규제하지 않으며, IAEA 안전조치 적용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따라서 핵잠수함은 우리 안보 현실에 매우 적합한 무기체계로서 앞으로 보유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해군중장)은 현재 해양대 초빙교수, 한국해양연맹 부총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합참 군사지원본부장, 해군사관학교장, 국방정보본부 해외정보부장, 제2함대사령관, 합참 작전2처장, 제51대잠수함전대장, 한국형 구축함 1호인 광개토대왕함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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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경항모 도입과 신형 이지스함 SM-3 탑재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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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2) ‘국군의 날’이 된 ‘3사단의 38선 돌파’ 비사(秘史)의 교훈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난 15일 북한 평양에서 '남북 대결'로 펼쳐진 월드컵 예선이 무승부로 끝났다.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는 이 결과를 "남북 모두를 살린 최선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날 북한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수령 우상화 작업을 언급하면서 "13일은 북한의 체육절이다. 만약 축구에서 졌더라면 최고 존엄(김정은 국무위원장) 얼굴에 똥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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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2) ‘국군의 날’이 된 ‘3사단의 38선 돌파’ 비사(秘史)의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