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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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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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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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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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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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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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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7]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수관리학교의 8주간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자 비록 군수관리학교장이 보낸 교육 일등 수료 서신으로 부대의 명예를 높이기는 했지만 사단장, 참모장은 목발을 짚고 있는 필자가 대대장을 제대로 할 수는 있을지 걱정하는 눈빛이 분명했다. 그러나 사단장의 부대지휘와 훈련 결과를 평가하는 전투지휘훈련(BCTP)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어 우선 투입하여 도와주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왜냐면 해부대는 향토사단을 대상으로 최초 시행하는 훈련이었지만 전에 근무한 부대에서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며 우수한 평가를 받도록 총괄 실무를 담당했음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향토사단 전투지휘훈련(BCTP)에 투입되기에 앞서 두달간 병원이 아닌 군수관리학교의 교육기간 동안에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얼마나 회복됐는지 걱정하던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호출로 통합병원에 갔다. X-ray 결과는 매우 좋았고 이 대위는 1월중에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진단을 내렸다. 한편 1995년 당시의 정치사회는 불신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낙향한 고(故) 전두환 대통령이 ‘12.12, 5.18 국가반란의 수괴’라는 죄명으로 전격 구속됐다. 국가적으로는 혼돈과 혼란이 지속되었으나 반면에 필자는 성당 수녀님의 귀중한 선물로 따뜻하고 넘치는 사랑속에 있었다. 깊은 산속 청정한 냇가에서 4시간동안 수집한 ‘산골(山骨)’이었다. 수녀님의 ‘이것을 공복에 먹으면 뼈로 바로 내려가 뼈를 잇게 만드는 약제’라며 전해주는 미소 속에 산골 아줌마같이 순박한 정성과 사랑을 느끼게 했다. 1년전 뇌사 위기 상태까지 도달했던 교통사고로 인생은 물론 군생활도 포기하려 했지만 ‘산골(山骨)’까지 어렵게 수집하며 빠른 회복을 기원했던 수녀님의 정성과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의 사랑과 배려가 약해지는 필자의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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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7]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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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6]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⑯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부대에서는 이상신(갑종197기) 사단장이 필자가 37일간의 입원치료를 받고 퇴원하며 부대에 들려 신고도 안하고 임의로 군수학교 교육에 입소하는 것은 소속을 무시한 괘씸한 행동이라며 인사 조치를 못한 인사참모와 군수참모에게 꾸지람을 하며 오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는 사단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수술후에 목발을 짚고 있는 또 모습을 보이는 것이 송구스러웠고 군수참모도 입교일이 다급하니 어느정도 회복되면 빨리 퇴원해서 우선 군수학교로 입교하라는 조언에 그만 무례를 범했다는 용서를 구했다. 또한 과거 수방사에서 사단장은 동원처장으로 필자는 작전장교로 함께 근무했음을 은근하게 표현하여 부드럽게도 만들었다. 사실 군수관리학교 교육중 휴일에 주로 찾아간 곳은 김포(현재 성남으로 이전)에 있는 수도통합병원이었다. 그곳에는 필자와 함께 당시 이상신 사단장이 대령 계급으로 동원처장으로 근무했던 수방사의 참모장이자 28사단장을 역임한 고(故) 이영대(학군4기) 장군이 췌장암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故) 이영대 장군은 필자가 수방사에 이어 28사단에서도 사단장으로 모셨다. 헌데 필자의 교통사고 당일에 박기준 장군에게 사단장직을 이임하는 이취임식이 열렸었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고는 후임 사단장에게 선처를 부탁한 덕에 이처럼 군수관리학교에서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 준 은인이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90~192)] ‘잔인한 4월도 나에게는 축복이었다’참고) 이 장군은 육본 감찰실장으로 근무하며 중장 진급이 거의 확정적일 때 췌장암이 발견되어 병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방문 당시에는 악화된 상태로 살이 모두 빠지고 앙상한 몸이었지만 필자의 손을 잡고 여유있게 미소지으며 “희철아, 너는 스트레스를 절대 받지 말고 군생활 잘해라”라고 오히려 목발을 짚고 있는 필자의 건강을 걱정해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얼마 후 먼길로 떠나셨고, 현재는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필자에게 미소를 보내며 영면에 들어있다. 한편 군수관리학교장 이상선 장군은 입교하는 학생장교들의 학습 독려를 위해 과정 수료와 동시에 개인성적표를 사단으로 보내는 방침을 시행했다. 통보된 서신에는 위의 사진과 같이 필자가 1등하여 교육사령관 표창을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방사에서 동원처장과 작전장교로 함께 고(故) 이영대 장군을 모시며 근무한 인연도 있었지만, 군수관리학교장이 보낸 서신을 보고받자 사진과 같이 ‘Good’ 표시를 하면서 오해는 풀렸다. 그러나 이상신 사단장은 이 서신을 보고 필자를 군수직능으로 계속 알고 있었다는 또다른 오해는 남아있었다는 후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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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6]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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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5]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⑮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은 군수직능의 장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략과 기획, 작전 등 모든 직능의 장교들도 알고 있어야 정책과 전략 및 작전을 수립할 때 필요하며 효율적인 통합전투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주차에 군수소요분야 교육을 받으면서 모든 직능의 장교들도 알아야 한다는 진리를 절실하게 느끼며 우선 확신했고, 그때부터는 새롭게 접하는 군수분야 수업에 재미가 붙어 교관들의 농담과 숨소리까지 노트에 모두 적으며 집중했다.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은 8주간으로 전후방 각지의 원거리 부대에서 참여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숙식을 제공했다. 또한 본인이 원하면 수업후에 퇴근도 가능했다. 헌데 학과가 끝나고 대부분의 동료 학생들은 숙소에 남아있지 않고 매일 저녁 시내로 빠져나가 개인 시간을 즐겼다. 하지만 필자는 재수술 치료를 받은지도 얼마되지 않아 행동도 불편하며 목발을 짚고 있어 다른 곳으로 이동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8주간의 교육기간 동안에 평일은 학교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보내며 새롭게 접하며 재미를 느낀 군수분야 수업 내용을 복습하고 예습하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어느덧 그해 11월도 하순으로 접어들며 군수관리학교 교육도 마지막 시험까지 치루고 수료가 며칠 안남았는데 학교본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실날한 토론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도 놀랐다. 그동안의 시험 결과가 군수참모를 역임한 군수전문가들을 제치고 작전직능의 필자가 1등을 하여 평가 성적대로 표창하면 안된다는 논리와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대로 표창하자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학교장에게까지 보고하면서 결과대로 표창하자는 것으로 결정되어 필자는 뜻하지 않은 교육사령관 표창도 받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군수분야에 문외한(門外漢)이었던 작전직능의 필자가 군수전문가 선배들과 동료들을 제치고 1등한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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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5]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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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6‧25남침전쟁영웅, ‘마지막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순국한 호국의 별’ 윤길병 소령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3년 6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북방 812고지 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했던 윤길병 대한민국 육군 소령(당시 대위)을 ‘2024년 5월의 6‧25남침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경상북도 경주시 출생(1931년)의 윤길병 소령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경주 건천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에 자원입대,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1951년 1월20일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대장으로 배속되어 사창리전투(강원도 화천군), 용문산전투(경기도 양평군)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다. 1953년 1월30일, 국군 제12사단 제3대대 제10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정전협정 체결을 목전에 둔 1953년 6월 강원도 인제군에 펼쳐진 중동부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사단의 방어선은 인제로 향하는 주요 접근로인 서화리 계곡을 내려다보는 곳이었고, 북한군이 방어선 주변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어 주저항선이 항상 적에게 노출되는 악조건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인 812고지를 지켜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6월1일, 북한군 제45사단이 812고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제37연대장 김재명 대령은 고지 정상을 지키던 제3대대에 “여하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현 주저항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대대원들은 이미 812고지 일대에 배치되어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북한군의 공격은 812고지의 우일선에 위치한 제10중대 진지에 집중되어 윤길병 소령은 중대원들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무명고지를 둘러싼 제10중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812고지를 사수하던 국군의 상황은 점차 불리해졌고 고지 정상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이에 1953년 6월 5일, 북한군은 812고지 우측의 무명고지에 2개 중대를 투입했고 고지를 사수하던 제10중대는 적의 파상공세에 맞서 격전을 벌였지만, 북한군이 추가 병력을 투입하면서 중대의 방어선이 고지의 정상 부근까지 물러서게 되었다. 이에 윤길병 소령은 정상만큼은 고수하기로 결심하고 지휘소를 중심으로 사주방어를 하도록 부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윤길병 소령은 생사를 초월한 채 마지막까지 화력을 퍼부었지만 적에게 포위되어 부대원을 이끌고 동굴 진지로 들어가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는 적의 항복 강요를 거부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결국 전사했다. 하지만 국군은 재공격하여 6월8일 무명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길병 소령의 공적을 기려 화랑무공훈장 수여와 1계급 특진, 충무무공훈장(1953년)을 추서하였다. 윤길병 소령은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있으며, 2006년 6월에는 모교인 경주 건천초등학교 교내에 ‘육군 소령 윤길병 상’이 건립되어 그의 공적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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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6‧25남침전쟁영웅, ‘마지막까지 진지를 사수하다 순국한 호국의 별’ 윤길병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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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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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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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존슨 하원의장은 “한국전쟁에서 많은 군인이 궁극적인 희생을 치렀다”며 “그러나 퍼켓 대령과 같은 소수는 국가의 부름을 넘어서는 전공을 세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의 군인들은 스스로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옳은 일을 했고 우리가 존경하고 열망해야 하는 예시”라고 손꼽았다. 이어서 참석자들이 각각 헌화하고 조문했다. 미 육군 군악대 ‘퍼싱즈 오운’의 한국계 미국인 에스더 강 하사가 찬송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In the Garden)을 부르면서 고인의 넋을 기렸다. 추도식이 끝나고 고인 유골함은 의사당 밖으로 옮겨졌다. 고인은 콜럼버스 파크힐 묘지에 비공개로 안장될 예정이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가?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된 6·25남침전쟁시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며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었다. 그때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약 2만1500명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에 맞서 싸운 고(故)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반격작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헌데 우리는 영웅인 고(故)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몰았고, 지난 2020년 7월 백 장군이 별세하자 같은 시기에 여직원 성추행 고소 사건으로 자살한 고(故)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장으로 성대하게 치루면서 백 장군의 장례는 시민단체의 손으로 치루도록 했었다. 이번 29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의사당에서 미국 상하원 지도부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등 100여명은 6·25남침전쟁 영웅 고(故) 랠프 퍼켓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의 마지막 여정에 고개를 숙이며 개최한 의미있는 추도식과 너무 비교되어 우리 한국인을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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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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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3]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 동기는 전방 GOP사단에서 부하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임무를 수행해 모범적이며 성공적인 수색대대장으로 인정을 받으며 근무하여 차기 군사령부 군수참모부 실무자로 선발되어 내정됐다. 그러나 보직 만료가 얼마남지 않은 시기에 부하 선임하사관 한 명이 가정문제 등으로 고민하다가 돌연 배신하며 월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군부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하들의 실수에도 해당 지휘관이 책임을 져야하는 특성이 있는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조직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지휘책임을 지고 보직해임되어 군사령부가 아닌 군수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왔고 선발된 요직인 군사령부 근무도 어렵게 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버티며 의연했다. 반면에 박병준과 주충근 등 많은 동기들이 사단 선봉대대 표창을 받으며 모든 상을 싹쓸이했고, 전방 철책에서 근무하던 임방순 동기는 대대장 근무 중에 임진강으로 침투하는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려 희비가 엇갈렸다. 비록 뜻하지 않은 어려운 상황에 따라 군수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게 된 의연한 모습의 이00 중령은 필자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동기, 전우이자 친구였고 하늘이 선물로 보내주신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다. 8주간의 교육 기간동안 목발을 짚고 이동하려면 등교시에 책가방도 들 수 없었으며 식당에서 배식받기도 제한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마다 동기 이00중령이 수호천사처럼 필자 옆에서 수발을 들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군수 업무에 익숙하지 못한 작전 직능의 필자에게 교관의 강의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을 해주어 역시 우리 동기들은 유능하고 탁월하다는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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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3]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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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1월 고(故) 랠프 퍼켓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이 제8 레인저 중대 지휘관으로 청천강 북쪽 205고지 전투에서 10대 1로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6차례 걸쳐 사수하며 심각한 부상을 당했던 당시의 전황은 다음과 같다. 그해 11월8일까지의 중공군 제1차 공세시 비호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 개천으로 이동했던 국군 7사단과 인접 8사단은 이번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완전히 궤멸되어 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되고 청천강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지자 미 8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어 11월25일부터 미군 선두의 중대, 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좌우 협격을 받았고 얼마 후 미 9군단은 잠복한 중공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때 중공군 38사단은 이미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확보에 나섰지만, 11월26일부터 중공군은 대공세로 밀고 내려와 미군과 한국군은 물론이고 터키여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에는 미 25사단이 중공 39군의 침습을 받았으며, 영국군 27여단 역시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에 의해 삼면으로 포위되어 도륙을 당했다. 11월28일에 이르러서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황의 급변과 중공 정예부대의 대거침략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새로운 전국의 돌발을 대내외에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미 9군단은 한국군 2군단을 엄호하면서 퇴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중공군의 선두는 삼소리 일대에 침습하여 있었고, 중공군 주력은 덕천-영원선을 탈취하고서 덕천 남쪽 3.2km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11월29일 아침부터 유엔군은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작전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과 도처에서 격돌한 끝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어쨌든 이날 일몰 무렵에는 대체로 유엔군 주력이 청천강을 건너 양덕-성천-순천-숙천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였고 고수진지를 점령하였다. 11월30일에는 미 9군단 주력이 신안주 비행장에서 철수하였고, 신안주-숙천-평양을 잇는 경의간선에는 미 1군단 주력의 남하 대열이 길을 메웠다.([김희철의 전쟁사](17)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분수령, 제2차공세시 청천강전투’ 참조)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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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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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2]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담당 군의관에게 교육 입교 날짜가 이미 정해져 있어 완치 후 퇴원보다는 군수학교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에 입교해 회복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아직 퇴원시기는 조금 이르기 때문에 무리한 행동으로 재발할 수도 있으니 교육기간 동안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군의관의 당부를 듣고 통합병원에서 퇴원해 군수학교로 향했다. 지금은 위례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인 신도시가 형성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특전사와 종합행정학교, 학생군사학교 등이 위치한 군사지역이었다.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도 종합행정학교내에 있었던 군수학교에서 시행되어 전반기 동안 교육받은 군사영어반에 이어 후반기 8주간도 또 위례에서 지내게 됐다. 약 20명의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은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라 대부분이 선배들이었다. 필자의 동기들은 당시에 대부분이 대대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필자처럼 작전직능의 장교도 군수과정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헌데 학생장교들 중에 군수직능의 동기생이 유일하게 한명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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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2]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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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에 참전해 미국 최고 훈격인 명예훈장과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랠프 퍼켓 미 육군 예비역 대령의 유해가 29일(현지시간) 미국 의회 의사당에 안치돼 추도식이 열렸다.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중에서 최고의 예우로서 미국 의사당에서 거행된 첫 조문행사이다. 퍼켓 예비역 대령은 지난 8일 미 조지아주 콜럼버스 자택에서 97세 일기로 별세했다. 이날 오후 고인의 유골함과 삼각형으로 접힌 성조기가 의사당 2층 중앙의 원형 홀(로툰다)에 도착하자, 미국 상하원 지도부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등 100여명은 6·25남침전쟁 영웅의 마지막 여정에 고개를 숙였다. 미국 하원의 마가렛 키번 목사의 기도로 추도식이 시작됐다.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와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 추도사를 읽었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고인이 제8 레인저 중대 지휘관으로서 6·25남침전쟁 당시 1950년 11월 중공군에 맞서 사수한 평북 청천강 북쪽 205고지 전투를 언급하면서 “그들은 10대 1로 수적 열세였기 때문에 ‘레인저가 길을 이끈다’는 모토를 완전히 구현하기 힘들었지만 병사들을 명예롭게 이끌기 위한 기도는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의 용기와 자기희생은 후대 군인의 마음에 영원한 유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인은 205고지 진지를 6차례 걸쳐 사수하며 대원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이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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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미국 의회 의사당 6·25남침전쟁 영웅 추도식 개최의 소회(所懷)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