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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M] 고종,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882년 8월9일 고종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겸 수신사 박영효 등 일행이 인천에서 일본 배를 타고 도일할 때 당장 게양해야 할 국기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선상에서 태극 문양과 그 둘레에 8괘 대신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을 그려 넣은 '태극·4괘 도안' 의 기를 만들어 9월25일부터 사용하였다. 이들 일행은 8월14일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숙소건물 지붕 위에 이 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이 태극기의 효시다. 그리고 10월3일 본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고종은 다음 해인 1883년 3월6일 왕명으로 이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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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4-03-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5)] 작전분야 군생활 중 부담없는 첫 휴일 보내는 DJ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DJ별명의 필자는 비록 지팡이는 짚고 있었으나 직접 운전하여 증평에 위치한 사단사령부에 도착했다. 헌데 전입일자가 금요일이어서 인사참모는 사단장 신고를 월요일로 정하고 먼저 지형 정찰을 다니라고 전했다. 덕분에 충주에서 멋있게 대대장 근무를 하는 동기생 주충근 중령에게 달려갔다. 역시 동기생이 최고였다. 이미 그곳에서 2년 가까이 근무했던 주 중령은 저녁을 함께하며 사단의 분위기와 향토사단에서 유의할 점들을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사단에는 주중령뿐만 아니라 공병대대장을 동기생인 권태환 중령이 보직되어 있었고,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종선(36기)과 사단 참모로 재직중인 신규식(35기), 김영철, 박찬일(34기) 그리고 참모장 김현석(30기) 대령 등의 선배들도 있어 일단 마음도 편했다. 다음날이 토요일이어서 주충근 동기와 저녁식사를 한 뒤에 동두천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작전분야에서 군생활하면서 이렇게 휴일을 부담없이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전입 신고도 안한 상태라 인사참모는 위수지역을 벗어나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용해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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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4-03-13
  • [김희철의 CrisisM] 고종,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공포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3월6일(음력 1월27일)은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가 탄생한 소중하고 특별한날이다. 우리나라에서 국기제정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던 것은 1876(고종13)년 1월이었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 · 일 사이에 강화도조약체결이 논의되는 동안, 일본측은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면서 트집을 잡았지만, 조선 측에서는 ‘국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조선 임금의 어기인 "태극팔괘도"가 있었지만 조정에서 비로소 국기제정의 필요성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당시 청(淸)나라는 자국의 국기인 '용기(龍旗)'를 약간 변형하여 사용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에 분개한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청색과 적색으로 이루어진 태극원과 사괘를 그려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런 와중에 1882(고종 19)년 5월22일에 체결된 조미수호 통상조약 조인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약 조인식에서 역관 이응준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 정부는 종전의 '태극 도형기(太極 圖形旗)'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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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4-03-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4)] 작전분야 군생활 중 부담없는 첫 휴일 보내는 DJ①
    뇌진탕, 횡경막/비장 파열과 골반/대퇴부 골절 등 11가지의 병명으로 대구가야기독병원에 입원했던 필자와 유사한 환자 모습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성경 시편 103장에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 스치는 바람결에도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인생을 정의하고 있다. 1994년 4월 어느날 새벽 군부대의 헌병속보에는 진해 육군대학 대대장반 교육중인 중령진급자 예정자 3명이 대구 팔달천변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1명은 뇌사, 2명 중상이라는 내용으로 전파됐으며, 뇌사상태는 필자를 지칭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필자는 골반 및 치골은 전위골절, 대퇴부는 분쇄골절, 늑골8·9번 골절, 좌5족지 골절, 횡경막·비장 파열, 뇌진탕, 혈복흔 등으로 병명만 세어봐도 11가지인 중태 상태로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이후 서울 을지병원에서 5개월 가까이 치료받고 퇴원하여 목발을 짚으며 사단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중령으로 진급 신고를 했고 해가 바뀌자 선배들의 관심과 배려 덕택에 성남에 위치한 행정학교에서 영관영어반을 다니며 재활 치료를 지속했다. 건강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로 그해 6월말경에 목발이 지팡이로 바뀌자 필자(DJ)는 새로운 근무지인 37사단으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대대장 취임은 그다음 해인 1996년 2월로 정해졌고 그동안 어떤 보직에서 일하게 될지도 궁금하고 이사도 알아봐야 해서 먼저 혼자 이동하기로 했다.음 해인 1996년 2월로 정해졌고 그동안 어떤 보직에서 일하게 될지도 궁금하고 이사도 알아봐야 해서 먼저 혼자 이동하기로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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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4-03-11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참전기간 동안 1개 보병대대와 1척의 구축함 또는 프리깃함을 파견한 네덜란드는 기간 중 연인원 5,322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했다. 교대로 투입된 해군 함정의 경우 에베르센호 237명, 반 가렌호 247명, 피엣 헤인호 237명, 반 나소호 183명, 두보아호 209명, 반 지질호 209명, 기타 임무 28명이 참전했다. 횡성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120명이 전사하고 64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부상자 중 292명은 원복을, 262명은 예편했으며, 91명은 불구가 됐다. 1953년 10월 1일 네덜란드 대대는 그간의 전공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이에 앞서 대대는 횡성-원주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높이 치하하는 미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1951년 8월 9일 밴 플리트 대장으로부터 수여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 대대는 6·25남침전쟁에 참전한 기간 중에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한 3회 부대표창과 156회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또 네덜란드정부의 The Cross for Justice and Freedom의 영예를 차지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국내외의 군사적인 사정으로 지상군의 파병이 불가한 형편이었으나, 많은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참전을 촉구하고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파병이 가능하게 됐다. 네덜란드는 다른 참전국과는 달리 민간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참전을 촉구해파병을 결정한 것에 의의가 있으며, 6·25남침전쟁을 통해 네덜란드 국민이 보여준 용감성과 자유수호에 대한 의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자유세계를 결속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따라서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네덜란드를 방문해 추진한 ‘국제보훈 교류·협력’ 행사는 각별한 의미가 있으며, 또한 국내에서참전용사를 초청해횡성 참전기념비에서 개최하는 추모행사도 매년 지속되며 네덜란드군의 참전과 희생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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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4-03-07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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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4-03-05
  • [김희철의 CrisisM] 2024년 3월의 6‧25남침전쟁영웅, 한문식 해군 대령 선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국가보훈부는 6‧25남침전쟁 중 김해정(YMS-505, 소해정:기뢰를 제거하여 해상 안전을 도모하는 작은 군함) 정장으로 1950년 8월 서해봉쇄 작전에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 차단에 기여하고, 1952년 7월 금강산함(PC-702, 구잠함:잠수함을 탐지하고 공격할 능력을 갖춘 대잠 함정) 함장으로 서북해역의 전략적 도서인 황해남도 옹진에 위치한 창린도 탈환작전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한문식 대한민국 해군 대령(당시 소령)을 ‘2024년 3월의 6‧25남침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문식 대령은 1945년 11월 해방병단(해군의 전신)에 입대하여 임관 후 인천기지 갑판사관, 진해기지 인사관, 1948년 11월부터 김해정장으로 복무 중 1950년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8월 6∼7일 서해안 봉쇄작전에 참전하여 적 발동선 2척, 화물선 2척, 다수의 범선을 격침함으로써 서해안을 통한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는데 기여했고, 이후 금강산함장으로 해상 일선에서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7월 15일, 적 300여 명의 기습공격으로 창린도가 점령당하자 금강산함, 영국 순양함(벨파스트함), 호위함(PF-116함), 아군 유격대는 연합작전회의를 열고 미 해군 전투기의 지원을 받아 창린도 재탈환을 결정했다. 한문식 대령은 아군 함정들과 전투기들의 피아식별(彼我識別)을 위해 상륙군인 유격대에게 흰 천 한 장씩을 소유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백포작전(白布作戰)’을 제안, 1952년 7월 16일 새벽 140여 명의 유격대가 탑승한 범선, 발동선을 창린도 남단으로 호송하여 성공적으로 상륙시켰다. 이후 영국 순양함, 호위함, 미 해군 전투기 4대와 연합작전으로 포격 및 폭격을 개시했으며, 이에 힘입은 유격대는 적의 반격이 가장 치열했던 창린도 81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적군 70명 사살, 27명 생포, 무기 다수 노획 등 큰 전과를 거두었다. ‘백포작전’을 통해 창린도 탈환에 기여한 한문식 대령은 휴전회담을 이용하여 서해안 일대에 포대를 구축하고 해안경비요원을 증강시켜 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정부는 한문식 대령의 이러한 공훈에 따라 충무무공훈장(1951, 1953), 을지무공훈장(1952)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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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4-03-04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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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11-15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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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11-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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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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