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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벌거숭이 인생은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나그네길이지만 필자는 일벌레(Workaholic)처럼 정신없이 사단작전보좌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대대장반 교육에 입소하여 겪은 교통사고로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재활의 시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골수정이 박혀있는 좌측 대태부의 뼈가 분쇄 골절된 탓인지 잘 붙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12월 보험사가 소개해준 신림동 모정형외과에 다시 입원하여 분쇄골절 부위에 골 이식수술을 했다. 살을 째고 골반의 뼈를 일부 떼어내 갈아서 골절부위에 뿌려 채우는 이식수술이었지만 이미 4개월 넘는 을지병원 입원생활을 통해 익숙해져있는 덕택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헌데 보험사가 알려준 병원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꾀병 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었다. 아마도 보험금을 타기위해 입원기록을 남기기 위한 그들은 눈을 피해 잦은 외출 외박을 나갔고 밤이 되면 빈 침대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진짜 환자는 필자뿐인 것 같았고, 가짜 환자들과는 말도 섞기 싫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술을 마치고 3일 뒤부터 걷기 시작했고 재활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2주만에 정확히 퇴원했다. 이런 모습을 의사, 간호사, 타 환자들은 별종으로 보는 눈치였다. 부대에 돌아오자 성탄절을 앞두고 세례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부를 선정해야 하는데 마침 행정부사단장 김부명(육사27기)이 신자였고 집안에 수녀님도 계셔서 대부를 부탁했다. 두손을 저으며 거부했던 그는 명목상 신자였는데 가족의 권유로 마지못해 성당을 다녔으나 결국 허락을 했고 필자가 그의 첫 대자가 되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다.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택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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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9-04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故)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는 1883년 8월 4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1908년 7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사립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조선인 교육에 진력했으며 한국 이름으로 우리암(禹利岩)이라고 불리웠다. 1967년 10월 16일에 공주사립영명실수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는 동시에 동교 동창에서 동교장 우리암씨에 근속 30주년 기념동상을 동교정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후 동상 제작에 노력하여 동교 창립기념일에 동상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그런데 우리암 교장에 약력과 공헌을 들어보면 1907년 가을에 멀리 태평양을 건너와 당시 공주에 교육기관이 미약함을 보고 동읍 대화정 위에 명칭 명설학교(明設學校)라는 수동초막의 미약한 이 학교를 인수하여 영명학교로 명의를 변경하는 동시에 벽돌제 3층 양옥으로 훌륭한 교사를 신축하고 학급을 증설하여 수많은 청년 자질을 교육했다. 또한 1932년에 영명실수학교로 승격이 되어 이래 31년 간 세파에 난곡을 거듭하여 가며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직전까지 다수한 인재를 양성한 우리암씨의 공헌은 실로 막대하다. 또한 우리암 선생은 1943년 9월 인도 델리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의 영어를 가르쳐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측면 지원했다. 당시 인도에서 활약하는 조선용사들은 인도에 도착한(1943년 8월) 후 9월15일 인도군 총사령부에서 ‘피터하스’ 소교를 만나 상의한 결과 전체 동지들은 우선 영문과 방송 기술을 학습하기로 하고 ‘델리’에서 약 17공리 되는 곳에 있는 인도 학교에 가서 그 학교 교장 ‘웰리암’씨에게서 영문을 학습하였다. 학교장 웰리암씨가 예전에 미국 선교사로 조선 공주에서 35년 동안이나 있었던 우리암 선생으로, 조선어가 매우 유창하다. 인도의 조선인들은 오후에는 영문을 배우고 오전에는 총사령부에 가서 방송을 연습하며 광복군과 영국군의 연합작전을 지원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우리암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은 물론 1943년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투입된 것은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국제정세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감안된 것으로 보이며 이번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그는 1962년 6월9일 충남 공주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영명학교 출신 독립유공자로 유관순(2019, 대한민국장), 유우석(1990, 애국장), 김현경(1998, 건국포장) 등이 있으며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영국군 연락장교로 1945년 전사 순국한 로널드 클린턴 베이컨이 2020년 애국장에 추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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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09-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⑯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18년 8월24일 국민가수 고(故) 최희준씨가 향년 82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벌써 5주기를 맞이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고 특히 ’하숙생‘의 가사는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 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 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가 인생의 본질이자 진리임을 모르는 바 아님에도 인간세상에 무의미한 교만과 시기 그리고 탐욕 등 일곱가지 죄악은 인생을 힘들고 슬프게 한다. 또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하지만 특히 군생활은 잦은 부대 이동으로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가사처럼 정붙일 시간없이 떠돌며 흘러가는 진짜 나그네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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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31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 난징에서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친일파 거두를 처단하였다가 장기간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형무소 재소 중 옥중 투쟁을 이끈 김현수 선생에게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현수 선생은 1933년 5월 상해로 도항했다. 그해 12월 중국 난징에서 한국 독립군의 산실인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 및 조선독립을 위한 훈련을 받았으며 1935년 4월 동교 졸업 후는 실천운동에 들어갔다. 1936년 2월 상하이에서 김구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자금획득을 위해 동지 이하유(李何有), 김성청(金聖靑)과 함께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한규영(韓奎永) 집에 침입하여 현금 및 해로인을 강탈했다.(단도 및 권총이용). 1937년 11월11일 상해 카페에서 식사중 상해거류민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적 일본 주구자라고 인정하여 민족혁명당원 최지삼(崔之三)과 함께 권총으로 저격하여 처단했다가 체포됐다. . 당시 김 선생은 독립군 양성 기관 및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한 이력 때문인듯 본명 외에도 김정안, 김정환, 주신화, 호영 등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938년 5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인해 징역 10년에 처해졌는데 동년 7월27일부터 경성형무소에 수용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루고 있었다. 이때에도 형무소에서 1939년 7월25일에는 변기통 위에서 혹은 식기 구멍으로부터 머리를 빼고 “이번 사건은 종국 대우문제에 귀착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의 대우문제를 요구하라. 좋은 식사를 제공하고 수인(囚人)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라. 이번과 같은 불상사건을 단절시켜라. 실임자인 소장, 계호과장, 교무과장을 배격하라. 우리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하자.”고 외치는 등 수형자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타인에 솔선하여, 옥중 투쟁을 이끌어 1941년에는 징역 1년이 추가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점령지인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으로 친일파 거두 처단에 그치지 않고, ‘생지옥’으로 불리는 형무소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음에도 수형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옥중시위를 이끈 점은 강한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보여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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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08-30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본의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표적 민족운동 중 하나인 일명 ‘노다이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혹독한 처벌을 받은 고(故) 김영조 선생에게 애족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영조 선생은 1940년 11월 경남 동래군(현 부산 동래구)에서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직후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인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노다이 겐지[內台兼治]를 구타하고 관저를 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퇴학을 당했을 뿐 아니라 징역 8월을 받는 등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는 총동원체제기에 일본이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개최한 기형적 운동경기 대회이다. 당시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 노다이 겐지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된 ‘노다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대표적 학생운동으로 손꼽히는데,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과 민족 차별에 대한 울분이 폭발된 사건은 부산의 대표적인 민족으로 알려졌다. 어린 학생들이 일본군 장교를 강력히 응징할 정도의 과감한 행동은 당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민족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와 전시 동원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활동에 참여한 고(故) 김선갑(옥고 여독 순국)이 애국장, 이병도‧이세기‧김인규‧이달희‧이도윤‧안장원‧ 정두열 선생도 애족장에 서훈된 바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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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08-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받을 때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박 선배가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던 결과였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0)]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징표(하) 참조) 허나 이미 동국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지 5년이 다 되어 이번 학기가 석사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급해졌다. 그때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떠올랐다. 김 장군은 흔쾌히 귀국보고서를 필자에게 제공했다. 그때까지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다리에 통증은 있었으나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거의 석달 가까이 자료를 정리해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란 제목에 ‘남북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란 부제목의 논문 초안을 정용길 지도교수에게 보고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렸지만 절실하게 학구열에 불타는 필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논문을 검토하던 정 교수는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사영어반 교육이 논문준비에 유리한 여건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마운 김영식 동기가 제공한 귀국보고서를 기초로 국방백서 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남북한 통일시에 어떤 군사력을 보유할지를 분석한 논문 작성은 육군대학에서 박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석사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야전만을 전전하며 실무에 찌들렸던 필자는 재활치료 위기로 오히려 군사영어반에 다닐 수 있었고 석사학위도 받았다.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선태사해(蟬蛻蛇解)’의 호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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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8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생은 1903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8세의 나이이자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1일 전남 나주군에서 일본인의 성지(聖地)로 간주되는 나주 신사의 외곽 화표(華表)에 40여 개의 돌을 던지고, 신사 본 건물에 ‘대한독립 만세’와 태극 무늬 등 독립 의지를 알리는 낙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표는 신사 입구에 세워지는 돌기둥을 가리킨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사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죄를 받았고,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시점인 1920년 3월1일 거사를 일으킴으로써 3.1운동 정신의 확산에 기여하고, 3.1운동 1주년으로 경비가 삼엄하던 시기 일본인의 성지인 신사를 과감히 훼손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알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이번에 대통령 표창으로 추서됐다. ■ 고(故) 박재선, 1960년 퇴학 30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9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 고(故) 박재선 선생(여)은 졸업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인 1930년 1월 부산에서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격렬한 내용의 진정서 준비와 동맹휴교 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허나 사전 발각되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겪고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이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약 한 달 후인 어느 날 전교생이 전 공회당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가는 전차에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학생대표로부터 “우리들도 일어서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전기 두 조여사와 의논한 끝에 그날 밤 졸업반 동료 47명 전원을 영도(影島)의 박씨 언니 집에서 모이도록 하고 이곳에서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타협을 갖게 되었다. 이날 밤 36명이 모였으나 불참한 동료 1명이 배신, 학교에 내통한 탓으로 박씨와 조씨 등 4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고 약 2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자 약 2개월간을 경찰에 끌려다니면서 무진 고초를 당하고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도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3학년생 47명 중 34명이 지난 11일(토요일) 오후에 부산 목도(牧島) 동교 생도 모(某)의 집에 모여 그중에 여덟이 수모(首謀)가 되어 내용이 자못 격렬한 열두 가지의 조항을 갖춘 진정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13일(월요일) 조회시간 전에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일제히 동맹휴교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그 진성서를 초안까지 하여 정서(淨書)할 사람 한 명과 진성서 제출 책임자 두 명까지 선정하여 모든 협의를 진행하던 중에 그중 한 명의 학생이 그것을 자기 부모들에게 밀고(密告)를 하게 되어 그것이 드디어 학교 당국에게까지 알게 되어 거사하기 전에 발각되었다”고 보도됐다. 선생의 활동은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부산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 준비를 지휘한 선생은 퇴학 30년 만인 1960년 2월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경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1929년 광주에 머물지 않고 해를 넘겨 1930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 사례이며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학교 측에 대한 진정서 전달과 동맹휴교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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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08-26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들에게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100명을 발굴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했다. 그중 고(故) 함복련 선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임에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했는데 1919년 4월2일 경남 통영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조선총독부 검사국 수형기록인 ‘형사사건부’에는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한 함복련 선생이 1919년 4월 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되고, 4월14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경남 통영은 3.1운동 당시 기생을 포함해 상인・어민 등 사회적 소외층이 시위를 주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경 부도정 장터의 모습으로 장터 중심부가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빽빽하다. 1919년 4월2일 함복련 선생 등 통영 기생 7인이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였던 1919년 만세시위 당시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함복련 선생의 포상으로,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검사국에 송치된 기생 7명 중 총 5명(함복련 및 정막래・이소선・김진한・김영산홍)이 포상했고, 나머지 2명도 다음 계기 공적심사 예정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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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군사영어반(당시 장교영어반으로 호칭)’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때부터 11월 종합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군사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과거 수방사 근무시에 유학반 시험 준비를 하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고배를 마시지 않겠다는 각오로 준비를 했고 재활치료를 하다보니 야전에서 근무하던 타장교들보다는 공부할 여유도 더 있었다. 그 와중에 육군대학 대대장반에서 모 장교가 교통사고를 당해 광대뼈가 부서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도 교통사고로 입원하여 진료를 받던 그동안의 많은 일들이 떠오르며 그 장교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원복하기를 기원했다. 또한 지난 8월3일 오후 성남 서현역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발생해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처럼 당시에도 지존파의 부녀자 38명 살해 계획 실행, 군에서도 총기난동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는 현대 젊은이와 사회의 무책임한 자유와 방종 그리고 이기주의가 양상시킨 비극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건들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재활치료로 부대에 부담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장교영어반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그해 11월초에 종합행정학교에서 시험을 치뤘지만 그 결과는 부족한 내 자신의 재확인이었다. 합격할 자신이 없어지자 눈앞이 깜깜해지며 필자가 서있을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5대1 경쟁율의 시험에 응시한 많은 장교들이 필자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헌데 열흘이 지나서 육군본부 인사처에서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천운이 따른 덕택이었다. 그리고 잠시 잃어버렸던 내 자신과 목표를 다시 찾았다. 합격자가 발표되자 몇 명의 지인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에 앞서 어떻게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교통사고로 대퇴부가 분쇄골절된 경험을 한 필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들에게 “시험 준비도 중요하지만 다리를 뿌러뜨려 막다른 길에 접어들게 만드는 것이 확실하게 합격할 수 있는 비법이다”라며 미소로 답했다. 비록 시험 결과는 자신이 없었지만 다른 응시자들과 비교해 다른 것이 다리골절이었기 때문에 표현했는데, 그들은 재미있다며 바로 본인도 다리를 뿌러뜨리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3-08-23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독립유공자 100명 발굴 예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로 한국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을 도운 미국인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건국포장)과 만세시위에 앞장선 통영 기생 함복련 선생(대통령표창) 등 100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윌리엄스 선생은 한일합방 직전이었던 1908년 미국 선교사로 입국해 충남 공주군에서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1943년 인도 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印緬)전구공작대 대원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 독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애썼다. 함복련 선생은 1919년 4월 경남 통영군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에도 동료 기생들과 함께 통영의 중심부인 부도정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열기가 통영 전역에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일본 신사를 훼손한 남상홍 선생(대통령표창),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한 박재선 선생(대통령표창),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민족 차별적 편파 판정을 일삼은 일본인 장교 노다이 겐지를 응징한 김영조 선생(애족장),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파 수괴인 상해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을 처단한 김현수 선생(애국장) 등 광복절을 계기로 모두 100명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했다. 이번에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0명(애국장 8, 애족장 22), 건국포장 5명, 대통령표창 65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고, 여성은 13명이다. 건국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8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됐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 독립은 물론 ‘자유’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들께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국권 상실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을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선양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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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3-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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