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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 M] '北핵'의 끝은 김정은 체제 붕괴시킬 백두산 폭발?
    ▲ 국립방재연구원이 지난 2011년 실시한 백두산 화산폭발 모의실험 자료 화면. 당시 국립방재연구원은 백두산의 화산폭발 가능성에 대비해 모의실험을 통해 한반도 및 주변국가 영향에 대해 분석했다. [사진출처=ytn 뉴스 화면 캡쳐] ⓒ뉴스투데이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에서 두 차례의 지진 관측돼 한미 정보당국 긴장 해외과학자들 “지난 3일 북핵실험의 여파로 발생” 분석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요란스러웠던 휴일이었다.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오후 1시 43분과 5시 24분에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인근 6km지점에서 각각 2.6과 3.2진도의 지진이 관측되었다. 다음날 새벽에는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미국 전략 폭격기 B-1B 랜서가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발진한 F-15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동해 NLL을 넘어 북한 동해상 국제 공역까지 올라가 무력시위를 펼쳤다. 같은 날인 24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유엔연설을 통해 “참수·군사공격 기미 보이면 선제 행동으로 예방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국제 사회를 향한 전례 없는 협박과 위협을 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선 “과대망상이 겹친 정신병자, 거짓말 왕초, 악의 대통령”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냈다. ▲ 백두산 화산 폭발을 가속화 시키는 북한 핵실험 장소인 풍계리와 백두산간의 '지표면상' 거리는 불과 113km이다. 더욱이 지하의 마그마층 간의 거리로 따지면 고작 8km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출처=YTN싸이언스 캡처] 풍계리 핵실험장 위치는 백두산 마그마 본층 간의 실제 거리는 불과 8km내외? 해동성국 발해의 926년 멸망도 백두산의 대폭발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23일 풍계리 인근 자연지진을 분석한 해외 과학자들은 지난 9월 3일 북한의 핵실험 도발의 여파로 발생한 지진이라고 했다. 이번 핵실험 위치에서 백두산 마그마 본층과 연결된 위치와의 거리가 113km인 것을 감안하면 더 큰 대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그 이유로 풍계리와 백두산 마그마층의 실제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짧다는 사실을 꼽는다. 풍계리 지표면에서 지하로 2km를 굴토하여 핵실험을 하면 그 아래 백두산 마그마 층과 연결된 마그마 층이 지하10km 지점에 있고 다시 그 아래 2층 마그마 층이 20km 내외에 존재하고 있어 결과적으로 불과 8km 내외의 거리에 백두산과 연결된 마그마 층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 이유가 백두산의 대폭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폭발 당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일본까지 날아갈 정도로 엄청났으므로 농경지 등에 피해를 입은 발해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망명길에 올라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세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발해가 멸망한 이후인 938년과 939년 그리고 946년과 947년에 백두산 화산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엔 백두산은 1403년, 1654년, 1668년, 1702년에 중국 기록에 따르면 1903년에도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중 1702년에는 함경도 부령과 경성지역에서 “연기와 안개 같은 기운이 서북쪽으로부터 갑자기 밀려오면서 하늘과 땅이 캄캄해지고… 흩날리는 재는 마치 눈 같이 사방으로 떨어졌는데, 그 높이가 한 치(약 3cm)쯤 되었다.”는 일이 벌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약 1000년 전 즈음에는 백두산 폭발로 뿜어져 나온 화산재 높이가 25km이상 솟구쳤으며, 상층기류에 따라 이동해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에 비처럼 내렸고 이곳에는 화산재가 5cm이상 쌓인 곳이 지금도 남아있다. ▲ 백두산 화산 폭발의 위력은? [사진출처=YTN싸이언스 캡처] 영국의 지진학자 제임스 해먼드, 2013년 백두산 용암의 활동성 주장 위험한 북핵 놀음 고집하는 김정은 체제, 선제공격 이전에 백두산 폭발로 붕괴할 수도 2013년 영국의 지진학자 제임스 해먼드를 비롯한 조사팀이 백두산에서 60km에 이르는 거리에 총 6기의 지진관측기를 설치하고 구체적으로 관측한 결과가 있다. 백두산 아래에는 부분적으로 녹은(부분용암) 암석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액체, 가스, 크리스털, 바위가 섞인 상태로 부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데이터는 백두산 용암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조사에 참여한 미국의 지질조사국 이아코비노씨가 말했다. 김정일 정권 아래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명의 아사자를 양산시켰고,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과 형 김정남을 살해하는 등 정권유지를 위해 인명존중 정신을 완전 말살시킨 북정권의 말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대재앙’의 발생 징후를 설명하는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300번의 사소한 징후, 29번의 작은 사고 발생 끝에 1번의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백두산에서는 이미 사소한 징후 끝에 이번 연속된 자연지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로켓맨 김정은의 인명무시 정책의 끝은 참수 및 Kill-chain작전의 선제공격에 의한 북정권 소멸이 아니라 그러한 만행에 분노한 하늘이 직접 분노의 지팡이를 휘둘러 그것은 막지 못한 김정은 일가와 하수인까지도 일거에 처벌할 ‘백두산 폭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로켓맨’ 김정은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평화와 인류번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아닌가?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외교안보정책
    • 외교통일
    2017-09-29
  • 북핵실험, 개미 놀음 구경에 도끼자루 썩은 격
    ▲ 그래픽=뉴스투데이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북한의 제 6차 핵실험 도발은 김정은의 내부통제 및 대미협상 카드용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9월 3일 13시 30분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당일 12시 29분에 북한의 6차 핵실험 도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NSC 전체회의에는 정의용 안보실장, 이낙연 국무총리, 송영무 국방부장관, 강경화 외교부장관 등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이 전부 참석했다. 그 와중인 15시30분에 북한 <조선중앙TV>에서 오랜만에 재등장한 고령의 이춘희 인민방송원이 “6차 핵실험은 대륙간탄도로켓(ICBM)장착용 수소탄 시험이다.”라고 발표했다. 74세의 이춘희 북한 간판 앵커는 김정은 일가의 입으로 불리면서 노동당 간부와 불륜도 있었지만 김일성·김정일의 연이은 신뢰를 받아 각종 도발 등 중요 이슈에 꼭 등장한 인물이다. 9.9절(인민군 창건일)을 맞이하여 중요 도발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김정은은 6차 핵실험을 통해 트럼프를 위시한 국제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대미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다. 또한 북한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춘희 인민방송원의 발표로 전 인민들을 단합시키는 내부 통제용 목적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상단 그래픽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한은 2005년에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선언했다. 6.25남침전쟁이 끝난 후 1970년대부터 김일성은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였고 실제로 김정일 정권에서 핵실험은 시작되었으며 김정은 시대에 와서는 완성단계에 돌입했다. 미온적 대처가 더 큰 화(禍)를 불러...역대 정부의 천문학적인 '대북 송금액' 용처 불투명 북한의 대륙간 탄도로켓(ICBM)과 6차례 핵실험은 주민들의 생활상은 최악의 상태에서 모든 자금을 끌어 모아도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자금을 만들기는 어려운 경제환경이다. 그런데 과거자료를 검사하다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우리나라 역대 정부별 대북 지원 금액이었다. 국회 외교통상부에서 통일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북송금액은 김영삼정부 12억2,027만달러(12%), 김대중정부 24억7,065만달러(24%), 노무현정부 43억5,632만달러(42%), 이명박정부 19억7,645만달러(19%), 박근혜정부 3억3,727만 달러(3%)로 집계되었다. 또한 핵개발 포기목적의 경수로 차관으로는 김대중정부 9,271억원, 노무현정부 4,473억원등 총 1조 400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대북지원금에는 식량과 물품이 포함되어 핵개발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원된 현금들의 사용출처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우리 돈으로 북한이 핵과 수소폭탄을 개발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일이다. 1955년 6.25남침전쟁 휴전 후 64년 동안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북의 2,3차 핵실험 당시 자료를 보면 핵무기 개발에 쏟아 보은 돈은 66억 달러라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10기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이를 중국산 옥수수 구매가격으로 환산할 경우 1,940만t을 구입할 수 있고, 북한 주민의 약 8년치 배급량에 해당된다고 한다. 북한의 핵개발 비용은 채광·정련시설·농축시설 등을 포함한 핵시설 건립에 약 20억1천만달러, 핵기술 연구개발에 3억1천만달러, 핵시설(원지로, 재처리농축시설)가동에 27억2천만달러, 핵무기 개발에 13억4천만달러, 핵실험에 2억달러 정도가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내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과 이이제이(以夷制夷) 이제 휴전 이후 64년 동안의 대북 관계 경험을 통해 우리는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북한의 전략은 분명하다. 화전양면(和戰兩面)과 피실격허(避實擊虛)전술 및 전략이 기본이면서 이제는 미국에는 “경고”, 일본엔 “과시”, 한국과 중국에 “무시”하는 전략으로 발전했다. 이번 9월3일 6차 핵실험처럼 7차례의 UN안보리결의와 트럼프의 강성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계획대로 계속 진행하였다. 6차 핵실험을 통해 핵개발 소형화가 거의 완성된 작금에 북한의 다음 단계는 하와이와 미 본토 사이의 태평양에 실거리에 준하는 대륙간탄도로켓(ICBM)을 발사 실험하는 것만 남았다. 북한의 2016년 4차 핵실험 후속조치로 “한미 공조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한미 맞춤형 억제 전략으로 탐지(Detect), 방어(Defense), 교란(Disturb), 파괴(Destroy)의 4D작전 개념과 KAMD체제, 30분 내에 선제타격 할 수 있는 강력한 대응을 강조하였다. 사기(史記)에는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이라는 명언이 있다. 즉 당연히 처단해야 할 것을 주저하여 처단하지 않으면 훗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재화를 입게 된다는 말이다. 그 동안의 5차에 걸친 핵실험과 연평도 포격도발 천안함폭침, 무인기 영공침공 등에도 엄벌보다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개념으로 대북 경제지원 9조원이라는 당근을 제공함으로써 이번에 6차 핵실험으로 도리어 우리와 전 세계를 위협하게 되었다. 마치 중국 역사상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슈퍼부국 송나라가 자기의 100분의 1도 안되는 금나라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화친에만 몰두하였던 상황과 비슷하다. 심지어 재상 진회는 금나라와 전투만 하면 승리하는 명장 악비를 전투 중에 소환하여 죽이는 등 비겁한 평화를 구걸하다가 결국 금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결의안 채택이나 비난성명 약발 없어...외교채널 동원한 '레짐 체인지' 등 검토할 시점 개미 노는 것 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어버린 격이다. 결의안 채택, 비난, 무력시위 등 구경만 하면서 말로만 위협하는 것보다는 이제는 도끼자루 썩기 전에 개미를 잡는 따끔한 채찍이 필요한 시기이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9.11테러의 주역인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제로니모 G 제지작전”과 이란의 후세인, 시리아의 카다피를 처리했던 참수작전(Decapitation strike) 을 통해 레짐체인지(Regime Change)하는 방법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섣불리 시도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방법을 제시해 본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세력 견제를 위해 북한을 내치지 못하고 있다. 현 정부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중·러와 협상을 하여 참수작전을 중국 또는 러시아의 힘으로 시행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확장억제전력이 전개하여 전쟁 발발 일보 직전에 우리는 중·러와 긴밀한 협상으로 북한의 레짐체인지(Regime Change)가 달성되면 그들의 정치 목적에 부합되게 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안이 채택될 때에는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런 방책이 시행되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유사시 외부 도움 없이도 우리 스스로가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전술핵 배치 등 자주국방 구현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북한을 정확하게 인지하여 전 국민을 한뜻으로 일치단결시키고, 전술핵 배치 등 한미공조 방안을 실행하는 가운데 더욱 강화시킨 우리의 자주국방력이 바탕이 된다면 조국통일의 길은 한걸음 빨라지지 않을까? 위기(危機)는 기회 (機會)이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 현역군인
    • 안보·국방교육
    2017-09-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육사생도의 휴가 여행, 그 추억의 위력
    ▲ 필자(왼쪽)가 육사 생도 1학년 때 동기생과 함께 했던 설악산 여행모습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로버트 테일러의 ‘애수(哀愁)’, 전쟁 중 휴가로 만난 비비안 리와의 아픈 추억(哀愁) 6·25전쟁 중에 피난지인 부산과 대구에서 개봉되어 많은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영화 애수(哀愁)에서는 25세의 로이(로버트 테일러) 대위가 제1차 세계대전 이 진행 중일 때 런던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연인 마리아(비비안 리)를 만나 사랑의 꽃을 피웠다는 줄거리로 시작된다. 로이 대위는 다시 전쟁터로 나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얼마 뒤에 전사자 명단에서 로이의 이름을 발견하고 좌절한다. 그녀는 전쟁 중 어려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1년 뒤 거리에서 로이 대위를 다시 만났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 마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만다. 훗날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년이 된 로이 대령이 마리아를 처음 만난 워털루 다리 위에서 슬픈 과거를 회상한다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와 같이 전쟁 중에도 휴가는 시행되고 그 여행 중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평소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힐링과 에너지 충전을 위한 휴가 여행은 꼭 필요하다.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지만 함께 여행을 하면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여름) 정복’을 입은 하룻강아지의 단순·무모한 도전, 설악산 등반 필자는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생도 1학년 때의 설악산 여행이다. 화랑대에서 하계군사훈련을 받는 1학년 생도들의 수영교육시간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갔다. 중·고교시절 적십자에서 운용하는 수영교실을 다녔지만 당시 수영실력은 맥주병이었다. 그래서 학급 편성은 테스트를 통해 수준별로 구분한다. 그 때 유난히도 힘들게 교육을 받으면서 한 동기생과 친해져 불현 듯 하계휴가기간에 설악산 등반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첫 휴가를 출발하기 전에 2학년 상급생도에게 휴가교육을 받았다. 휴가도 생도대 생활의 연장이기 때문에 생도 명예에 손상되는 언행을 철저히 금하라는 교육이었다. 삼금(금연, 금주, 금혼)제도를 철저히 지키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 집밖을 나와 외출 할 때는 생도신분임을 잊지 않도록 하얀 '하(여름)정복'을 입어야 한다는 강조사항엔 마음이 걸렸다. 상급생도의 강조사항은 학교정문을 나오자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갔지만 하정복을 입으라는 상급생의 지시는 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집 밖을 나올 때부터 한여름에 정복을 입는다는 것은 참으로 제약이 많았다. 며칠 뒤 설악산 등반을 위해 약속장소인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물론 새하얀 하정복을 입고 있었다. 수영장에서 친해진 귄oo 동기와 춘천행 열차에 올랐다. ▲ 선배의 조언을 받고 간편한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필자(왼쪽)[사진=김희철]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양구 선착장에 내렸다. 원통행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에 갔을 때 타 중대 소속 2학년 생도를 만났다. 경례를 하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당황하는 상급 생도의 눈빛을 느꼈다. 그 때 그 상급 생도는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는 “아니, 하정복을 입고 설악산을 넘겠다고?”라고 어이없다는 듯 질문을 하였다. 필자는 분대 2학년 선임에게 집 밖을 나올 때에는 반드시 정복을 착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하자 그 선배는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자신의 여행길로 떠났다. 백담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등산복을 입은 키가 큰 청년이 “어이, 두 생도”하고 불렀다. 만나보니 타 중대 4학년 생도였다. 그 선배도 마찬가지로 혀를 끌끌 차면서 “2학년 상급생도가 강조를 했어도 어떻게 하정복을 입고 설악산을 넘느냐?”하고 한심한 듯 나무라며 따라오라고 했다. 하룻강아지 '리스크'를 해결하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연륜 전쟁 중에 휴가도 꿀맛이지만 그 선배의 4년 생도생활 마무리를 앞두고 떠나는 휴가여행의 의미와 소중함은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헌데, 골칫덩이 미꾸라지가 끼였다. 그것도 산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정복차림으로 설악산을 넘겠다고 한다. 사계절 무수한 조난자가 발생하고 심지어 사망사고도 일어나는데... ▲ 가운데 키 큰 생도가 서길원 전 6군단장(육군중장) 맨 앞이 필자[사진=김희철] 4학년 선배인 서길원 생도(훗날 6군단장(중장)역임)의 얼굴에서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모한 1학년 두더지 두 명을 무사히 설악산을 넘게 도와줘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야가 확보될 때 우선 수렴동 대피소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등산화였지만 필자는 하얀 정복에 단화를 신고 있어 산길 오르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 드디어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필자는 007백 안에 운동화와 편히 입을 수 있는 생도셔츠 그리고 양말, 세면도구를 담아왔기에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정모와 하얀 정복 상의를 곱게 접어 백에 넣었다. 우린 음료수나 간식거리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는데 4학년 선배는 등산백 안에 준비한 것이 꽤 있었다. 결국 1학년 후배는 4학년 선배의 간식을 얻어먹는 웃지 못 할 역전현상이 벌어졌다. 창문 밖의 수많은 별들은 유난히도 빛을 발하고 있었고 떠오른 밝은 달은 설악산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무모한 도전에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선배 생도들과의 짧은 만남에서 얻은 강렬한 추억 생도대 교육장이 아니라 설악산 수렴대피소 주변의 밤새와 벌레 그리고 요란한 계곡 물소리의 화음이 배경이 된 가운데 아스라한 별빛과 달빛 아래에서 선배의 생도생활과 앞으로의 군 생활에 대한 비전을 들으니 또 다른 깊은 감동이 와 닿았다. 밤은 깊어간 것 같은데 아침 태양빛이 창문을 두드렸다. 우린 휴대를 못했는데 선배의 배낭에는 간이 취사도구가 있었고 선배들이 조리한 아침을 얻어먹고 간편한 생도셔츠와 운동화 차림으로 007백을 들고 드디어 마등령으로 출발했다. 산 속에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가 된다. 약 6시간의 산행 길에 반대쪽에서 오는 등산인을 만나면 반갑게 안부를 묻고 화이팅을 외치며 교행한다. 체력이 좋은 생도들이라 빠른 걸음으로 추월할 때에도 인사를 나눈다. 수렴동 대피소에서 만경대·오세암을 지나 마등령 기점에 도달하니 벌써 2시간 가까이 지났다. 험하다는 마등령을 타고 금강문과 금강굴을 통과해 비선대 계곡에 도달하니 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 생도 1학년 때 강원도 망상 해수욕장에서 수영교육 증 촬영한 사진. 맨 앞이 필자. [사진=김희철] 신흥사 입구를 지나 설악동 주차장에 도착하자 허기도 지고 매우 지쳐있었다. 그 때 4학년 선배들은 버스비까지 챙기며 우리를 쫒아내듯 버스에 태우고 그들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아마도 골칫덩어리 막무가내 아우들을 무사히 데리고 험한 설악산을 넘었다는 안도감과 책임감에서 해방되는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인간관계의 친밀도는 만난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 1차 대령 진급심사에서 낙방한 필자, 25년만에 '설악산의 추억'을 만나 소중한 조언 얻어 최근 유행하는 건배사 중 하나가 “짧은 만남, 긴 인연...!” 이다. 양구 소양강 선착장에서 만난 2학년 선배생도나 백담사 입구에서 만난 4학년 선배 생도와는 휴가를 마치고 화랑대에 복귀했을 때에 다시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런데 25년 지나 필자가 용산 합동참모부에 근무할 때 짧은 만남, 긴 인연 사건이 발생했다. 필자는 능력과 인품이 부족하여 당시 대령 1차 진급 심사에서 낙방하여 실망해있을 때, 설악산 등산길에 만났던 2학년 선배를 다시 만났다. 마침 그 선배는 국방부에 파견 나온 기무부대에 있었고 그해 진급을 해서 진급 축하 회식을 하다가 같은 식당 화장실에서 만났다. “김 중령, 오랜만이야. 그 때 그 설악산 등반길에 하정복을 입고...” 그 선배는 산행길 짧은 만남에 가졌던 첫인상을 25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내년 진급 가능성을 고려할 때 현 보직에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고는 본인이 직접 가능성이 있는 자리에 추천을 해주었다. 그 선배의 결정적 도움으로 다음해 대령 진급할 수 있는 고생하지만 진급희망이 있는 보직을 얻을 수 있었다. 하룻강아지의 단순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선배들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연륜으로 리스크를 해소할 수 있었고, 휴가 출발 전 직속 선배의 강조사항을 지키기 위해 새하얀 하정복을 입고 설악산을 넘으려고 했던 필자의 원칙을 준수하려는 무모한 모자람을 좋게 읽어준 덕택이었다. ▲ 생도시절 필자가 그린 백두산 천지 ⓒ김희철 상무정신(常武精神)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이다. 일단 목표를 정하면 현재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계 수영훈련장에서 만난 친구와의 설악산 등반 약속을 지켜야했지만, 외출 시 정복을 반드시 입고 다니라고 강조했던 선배의 지시사항도 어길 수 없어 원칙을 지킬려고 감행했던 그 무모한 순수함이 25년 뒤 효과를 발생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안보에 대해서는 바뀔 수가 없다. 현 문재인대통령은 합참의장 이취임식을 직접 주관하는 등 잘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율로 얻고 있다. 안보(安保)에는 여야, 보수·진보가 없다. 최근 군 수뇌부가 모두 교체되었다. 그들에게도 임전무퇴의 상무정신으로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도발의 위기에 현명하고도 강력하게 대응하기를 당부하면서 국가와 군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기길 기대해본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 소통시대
    2017-08-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 ‘노예 공관병’ 논란의 해법, 남재준과 이기식
    ▲ (위쪽)지난 9일 오전 군 장성 진급 및 보직 신고식이 열린 청와대 충무실에서 진급 장성들이 신고식을 위해 자리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군 장성 진급자들과 환담장으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문재인 정부의 첫 군 수뇌부 인사는 군대문화 혁신의 신호탄 정부는 지난 8일 국무회의를 열고 첫 군 인사에서 8개자리 중 7개가 바뀌는 대장급 인사를 의결했다. 합참의장을 제외한 여섯 자리 모두는 진급인사였다. 정경두 40대 합참의장(前공군총장)은 이양호 의장(25대, 공군), 최윤희(38대, 해군)에 이어 세 번째 비 육군 합참의장이 되어 해군장관, 공군의장 군 지휘부 라인업은 1948년 창군 이후 6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또 육사 37기와 38기는 이번 인사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이는 전 제2작전사령관 박찬주 대장의 공관병 사건과 38기 진급 대상자에 대한 갖은 투서 남발에 대한 후유증이라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아무튼 해·공군의 진급에 비해 적체되어 있던 육군 장성 진급이 해소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동아일보 이철희 논설위원은 “8.8육치일”이라고 사설에 게재했다.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문재인 대통령은 진급 보직 신고식에서 “軍중심은 육군, 육사가 근간이란 것을 국민이 안다”며 “육군·육사 섭섭해 하지 말라”고 말하며 군 인권 침해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군대 문화 혁신을 기대했다. ▲ 그래픽=뉴스투데이 노무현 정부 시절 남재준 총장의 실질적인 군대문화 혁신이 귀감돼야 생일선물도 되돌려 보내는 '청렴결백'을 실천한 남재준식 솔선수범이 필요할 때 군 개혁, 군대문화 혁신은 창군 이래 70년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장 잘 써먹는 정책기조였다. 김영삼 정부가 군 개혁이란 미명으로 “하나회”를 척결하면서 국민과 군의 호응을 얻어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도 군 개혁을 위해 유임시켜 임명한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은 전 국정원장인 남재준 대장이었다. 필자도 40년 가까이 군 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체감한 군 개혁을 손꼽으라면 남재준 총장이 솔선수범하면서 시행한 군대 문화 개선이었다. 남 총장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원칙주의자」로 소문이 난 선비였다. “군 장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신적, 도덕적 용기이지 요령 있는 처세를 의미하는 융통성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전형적인 야전군인으로서 자신의 생일날 부하 장교가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선물을 준비해오자 그는 그것을 돌려보냈다. 청렴결백한 그는 현재까지도 단 한 칸의 아파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대대급 이상 주둔지에 간부체력단련을 위해 설치된 테니스장에 근무하는 사병을 없앴다. “볼을 전투를 위한 사병들이 주우면 안 되고 간부들이 직접 주어라, 심판도 간부들이 봐라.”라고 했으며, 전출입하는 간부들이 지휘관 숙소를 방문하는 것과 본부대장과 군인 가족이 공관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것을 어길 시에는 사단장이라도 보직해임을 공헌하여 군내 잘못된 관행을 일소 시키고 군 본연의 임무수행에 전념토록 기풍을 조성하였다. 필자가 참모로 근무할 시절, 인사참모가 지휘관에게 전입 인사 갈 것을 충고할 때 몹시 당황했었다. 지휘관 공관으로 인사갈 때 선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재준 총장은 인사 청탁하는 자에게는 불이익을 부여하도록 강조했고 군대 내의 학연·지연·혈연 등을 없애는데 주력하였다. 그런 그에게 2004년 국방부 앞에는 ‘남재준 총장이 자기 사조직 인사들을 지난 10월 인사 때 대거 장성으로 진급시켰다’는 괴문서가 뿌려졌다. 군 검찰은 진급심사를 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를 사상 처음으로 압수수색했다. 이에 반발한 남 총장은 전역 지원서를 냈으나 반려됐다. 괴문서 사건은 결국 그가 개입한 정황이 없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군 내부에서는 당시 군 인사, 군 사법개혁 정도를 걷던 남 총장에 대해 일부 세력이 그를 흔들기 위한 공작을 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 당시 윤광웅 국방장관이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한 문구를 완전히 삭제할 방침을 세웠을 때도 남 총장은 ‘북한 주적론’을 고수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런 그가 참모총장 시절 남긴 이 말은 지금까지도 유명하게 회자되고 있다. “나는 군에 복무하는 사람이다. 나는 조국에 대한 헌신과 봉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나는 조국에 대한 헌신과 봉사가 나의 최고의 가치가 아닌 순간, 조국을 위해 과감히 군복을 벗겠다.” 또한 2003년 육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장교의 도’를 강연하며 다음 같이 강조한 바 있다. “장교는 절대적 자유혼을 지닌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선택한 장교의 책무를 다해야 하며, 이것이 장교가 갖추어야 할 가치관이다.” 남재준 대장은 2005년 4월 육군참모총장 이임식을 마치고 전직 총장에게 관행적으로 제공되는 관용차를 마다하고, 본인이 직접 20년된 소형 승용차를 운전하여 떠났던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뜻은 이러했다. “국가예산을 한 푼도 허투루 사용할 수 없다.” 총장 재직 시절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과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의 삶을 실천하여 '참군인'으로 후배장교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부하들과 동거동락을 위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골프를 배우지 않고 달리기로 체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회식 때에는 군가를 즐겨 부르며 군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군을 떠났지만 강직하고 소신껏 참 군인의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해 얽힌 에피소드들은 과거 “한신”, “채명신”장군과 함께 참군인의 표상으로 후배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 (왼쪽)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과 이기식 전 25대 해군작전사령관 [사진-해군작전사] ‘천안함 최후의 종결자’ 이기식 제독을 휴일 방문했던 추억이 남긴 교훈 지휘관 승용차 반납하고 소형 개인 승용차 사용 … 공사(公私) 구분으로 해군 전투력 강화 이기식 前해군작전사령관(중장)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직후부터 약 두 달간 천안함 브리핑을 맡았다. 당시 합참 정보작전처장(준장)으로 재직 중 대잠수함 작전 전문가였기에 가장 적임자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천안함 브리핑 당시 그는 많은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천안함이 침몰돼 바닷속에 있는 것만 확인 됐을 뿐 원인을 규명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는 40년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좌초설, 기뢰 충돌설, 미군 잠수함 충돌설부터 자작극이라는 말까지 천안함 괴담이 확산됐을 때라고 고백한다. 가짜뉴스가 언론에 도배돼 괴담이 확산되고 남남갈등이 초래된 때문이다. 훗날 중앙일보의 천안함 폭침사건 7주기 대담 취재에서 그는 “북한이 어뢰로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은 기존처럼 수상전을 반복해서는 한국 해군을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며 “잠수정 어뢰로 은밀하게 공격해 물증을 남기지 않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 이 제독은 두 차례의 연평해전(1999년·2002년)과 대청해전(2009년)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기습 공격을 했지만 한국보다 더 큰 피해를 보고 패전했다”며 “그 때부터 복수를 다짐하고 다양하게 준비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제독은 “천안함 폭침사건의 경우도 끈질긴 수색작전을 통해 우리가 어뢰를 찾아내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며 “북한은 우리가 어뢰를 찾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천안함 희생 장병과 유족을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하고 또한 감사하다”며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순직한 한주호 준위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이들의 투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러곤 눈물을 쏟아 급히 손으로 닦았다. “천안함 생존자들이 아직도 심리적 충격으로 고통 받고 있다. 국가는 희생자 유족과 생존 장병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안함 폭침사건 발생 2년 뒤인 2012년 천안함이 소속된 2함대사령관(해군소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한 일간지에서는 그의 2함대 발령을 두고 “천안함 최후의 종결자 부임”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2함대사령관 재직 시 필자는 사관학교 동기생인 이 제독을 격려하기 위해 2함대사령부를 방문했었다. 사적인 방문이라 휴일을 택해 이 제독과 고교동창인 학군장교출신 친구와 함께 그를 찾았다. 부대 정문앞에 도착하여 초병에게 사령관을 만나러 왔다하자 초병은 연락을 받았다며 정문 밖에 있는 사령관 공관 방향을 안내해 주었다. 공관에 도착하자 이 제독 부부는 반갑게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조그마한 소형차가 서있었고, 이 제독은 그 차를 타라는 것이었다. 당시는 휴일이기 때문에 운전병도 휴식을 취해야 하고 사적 방문이기 때문에 부대 지휘관 승용차를 쓸 수 없다며 양해를 구해왔다. 필자와 같이 방문한 친구들은 몽둥이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공관병의 노예사병 사건은 이런 군인이 있는데 왜 발생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령관이 직접 운전을 해서 전시된 천안함을 관람하고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추모비에서 묵념도 했다. 부대 소개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정문 옆에 있는 복지회관에 도착했다. 그 때 복지회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비서실장과 부관에게 이 제독은 점잖게 타이르는 것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매우 화난 표정이었다. 공식행사가 아닌데 휴일 날 비서실장과 부관이 왜 나왔냐고 질책을 하며 바로 복귀하여 가족과 함께 휴무를 즐기라는 엄명이었다. 잘 준비하기 위해 성의를 표한 비서실장을 질책하는 이 제독이 얄미웠지만(?)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이제독이 한편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 제독은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쳐 1차로 3성장군이 되어 해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도 공사(公私)를 명확히 구분하며 부하를 한결같이 아꼈다고 한다. 그리고 “천안함 최후의 종결자” 역할을 위해 25대 해군작전사령관으로 보직을 옮겨 “상비필승”의 기치아래 최고도의 전투태세 확립을 추진하고 엄정한 작전기강 유지 및 원칙에 입각한 합리적인 부대운영을 통해 해군 전투력 강화에 기여했다.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 명예롭게…지휘관은 ‘어항속의 금붕어’임을 깨달아야 지난 11일엔 육군 및 공군참모총장 이·취임식이 계룡대에서 거행됐고 그 전날까지 신임 1·2·3군사령관이 취임을 하였다. 노예사병 논란으로 4성 장군이 전역도 연기된 채 군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고 매스컴에서는 계속적으로 기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 간부들은 한신, 채명신, 남재준 장군과 이기식 제독처럼 참군인으로 군 명예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국가와 군을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15년 계룡대 해군간부들을 대상으로 ‘군인의 길’이란 강연을 했던 남재준 장군은 41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세 가지를 소개했다. “첫째, 나 자신이 두려웠다. 사소한 이익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했다. 둘째, 내가 부하들도 믿고 따를 수 있는 상관인지 성찰했다. 끝으로 내 자식들이 두려웠다.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내 자식이 손가락질을 받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에 대한 이런 일화를 보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군 지휘관을 위한 것이 아닐까 미소 짓게 한다. 특히, 모든 조직사회에서 상관은 속일 수 있어도 부하를 속일 수는 없다. 가장 측근에 있는 공관병 같은 부하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래서 지휘관은 ‘어항속의 금붕어’에 비유되기도 한다. 손자병법에도 ‘시졸여애자 고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可與之俱死)’ 라며 병사보기를 사랑하는 자식같이 해야 한다. 그러면 함께 죽을 수 있다. 라고 장수의 지휘통솔기법을 알려주었다. 이를 실천한 많은 지휘관들은 이런 자세로 근무한 결과 현직 및 전역한 후에도 부하 장병의 결혼 주례를 도맡아 하기도 한다. 그렇다. 사관생도들은 4년 동안 귀가 따갑도록 국가관과 리더십을 교육받고 체험한다. 그래서 많은 장군 및 군 간부들은 “화랑대에서 동작동까지 명예롭게…” 라는 구호를 마음속에 다지며 군 생활이 끝나고 전역 후에도 애국하는 자세로 살아간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 소통시대
    2017-08-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육사 37기 ‘박지만 특혜’ 오해 산 ‘꽃향수’ 공수훈련의 추억
    ▲ 훈련 도중의 휴식 시간에 박지만 생도(왼 쪽에서 다섯 번째) 등 동기들과 필자(왼쪽에서 두 번째)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희철]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과 동기인 육사 37기, 이런 저런 비애와 구설수 많아 언젠가 어느 월간지에 “박지만의 육사37기, 비운의 황태자 기수인가, 특혜 받은 기수인가?”라는 집중해부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었다. 기사 내용 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박지만 생도와 그의 동기인 육사37기에 대한 특별대우는 없었을까?” 동기생들은 입을 모아 ‘특혜는커녕 대통령 아들과 동기생이라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경우가 더 많았다’고 했다. 1년 후배인 육사38기의 한 대령은 ‘당시 37기의 선배기수들은 박지만 선배가 포함된 37기에 편견을 갖고, 다른 기수라면 그냥 넘어갈 일도 더 엄격하게 얼차려를 줬다’며 ‘특히 시골에서 올라온 선배들은 정의감에 불타 유명인사 자제들의 잘못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영웅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안되면 되게하라!” 구호를 즐기차게 외치는 특전사 공수훈련 기간에도 또 한번 37기 특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 특전사 공수훈련을 받고 있는 육사37기 생도들. [사진=김희철] ‘안되면 되게 하는’ 특전 공수훈련 기간 중 문제의 사건 발생 그 웃지못할 특혜 오해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공수훈련 기간 중에 발생했다. 특전사로 배치되면 이병부터 장군까지는 누구나 공수훈련 4주를 받아야 한다. 1주차에는 매일 아침 5~7km 구보로 시작되는 체력강화훈련과 착지훈련, 모형기체 내에서 수신호와 수신호에 따른 행동요령과 주의사항을 교육받고 각 항공기별 이탈 자세를 취하면서 비행기를 묘사한 콘크리트 모형문에서 실제로 뛰어 내리는 훈련 등을 한다. 2~3주차에는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고 기체탑승에서 실제 강하까지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한 종합평가와 최종숙달 훈련 및 야간강하를 대비한 야간 모형탑훈련을 한다. 모형탑(막타워)훈련은 실제 낙하 전 훈련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공포심을 많이 느끼는 약 11m높이의 모형탑에서 손으로 예비 낙하산을 꼭잡아 고정시키고 얼굴과 허리를 숙이며 다리를 모으고 L자형으로 하여 실제 강하 시와 동일한 자세로 최대한 멀리 뛰어 내리면서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훈련이다. 막타워훈련 시에는 ‘자격강하’를 위한 최종종합평가를 하게 된다. ▲ 완전군장을 한 채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공수 낙하훈련을 받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37기 생도들. [사진=김희철] 구령부터 비상낙하산을 펴는 시늉까지의 동작을 평균 10~15회 중 3회 이상 완벽하게 소화해야 한다. 막타워 밑에서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자들이 앞서 뛰어내린 동기생의 자세를 보면서 파안대소를 짓기도 했다. 만약 고소공포증으로 인해 뛰어내리지 못하거나 자세나 동작이 불량한 경우 퇴교조치를 받을 수 있지만 통상 5~8회 정도에서 대부분 합격한다. 마지막으로 착륙 시 강풍으로 인해 낙하산이 끌려갈 때 신속히 몸을 뒤집고 일어나 자세를 전환하여 바람 부는 방향으로 뛰어가 낙하산을 수거해야 하는 송풍 및 낙하산 수거 훈련을 받게 된다. 종합숙달훈련이 끝난 4주차에는 실제 낙하훈련을 받게 된다. 처음엔 단독군장, 완전군장, 야간강하 등 총 4회를 점프해야 수료증과 자격증이 주어진다. ▲ 1980년 세계 미스유니버스선발대회에 참가한 각국의 미인들이 육군사관학교를 찾아 37기 생도80명이 동원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사진=김희철] 신군부 세력의 문화정치 '미스유니버스 본선'에 공수훈련 중인 37기 생도 80명 동원돼 훈련장에 남은 37기 생도들은 더욱 혹독한 훈련 받으면서 '특혜' 구설수로 가슴앓이 40년 가까이 지난 요즈음도 육사37기생들은 모이면 어김없이 1980년 세계 미스유니버스대회 이야기를 꺼낸다. 1980년 7월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미스유니버스 본선 대회가 열렸다. 본선은 이 날 하루였지만 사전 행사와 예선은 6월 말부터 시작돼 3주에 걸쳐 열렸다. 본선은 美 CBS방송을 통해 위성중계 됐다. 69개국에서 온 ‘미(美)의 사절’은 신군부 세력의 ‘문화정치’, ‘스펙터클 정치’에 소도구로 동원됐다. 미녀들은 말 그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경복궁, 불국사 같은 관광지를 찾고, 육군사관학교도 찾았다. 한 예비역 장성(37기)은 “37기 생도들은 제식훈련과 분열 시범을 보였다”며 “당시 언론은 ‘미녀들이 원더풀을 연호했다’고 보도했다”고 했다. 또한 어떤 동기생에게 홀딱 빠져버린 미녀가 호텔키를 넘겨주기까지 하여 국제결혼 사례가 될 뻔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37기생들은 거여동 공수훈련장에서 점프훈련을 받다가 ‘신장173cm이상 생도 열외하라’는 지시를 받고 80명의 생도들이 화랑대 예복을 입고 7월 8일 열린 본선(세종문화회관)에 직접 나가 참가자들을 에스코트했다”고 했다. 그는 “화랑대 예복을 입고 롯데호텔 파티장까지 가서 미녀들과 즉석 댄스도 추었다”며 “행사가 끝나자마자 점프훈련장인 거여동으로 복귀해 철모를 쓰고 다시 공수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공수훈련장에서는 25%동기생이 세종문화회관으로 빠져나가자 훈련 교관들과 조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공수훈련 역사상 중간에 열외하여 다른 임무를 수행하고도 수료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녀선발대회에 참석한 동기생들은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 하지만 생도교육 일정상 불가능 했고 국책사업이다 보니 상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훈련장에 남아있는 동기생들은 오히려 더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했지만, 꽃향기 나는 미의 제전에 차출된 80명의 동기생들로 인해 특별대우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사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37기 생도들은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다. ▲ 훈련장에 남은 37기 생도들은 더욱 혹독한 훈련 받으면서 '특혜' 구설수로 가슴앓이를 하여야 했다. [사진=김희철] 하계훈련을 마친 4학년 생도들이 다는 공수휘장(Wing)의 각별한 의미 하계군사훈련이 끝나고 생도대에 복귀할 때의 각 학년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4학년 생도는 가슴과 전투모에 공수휘장을 달고 3학년 생도는 가슴에 유격(Ranger)휘장을 달고 후배들의 어깨를 한 번 툭 쳐본다. 공수휘장은 5개 종류가 있다. 공수훈련 4회를 이수하면 기본공수휘장을, 20회 이상 또는 강하조장훈련 이수 시에는 은성, 40회 이상 또는 고공기본훈련 이수 시에는 월계공수휘장을 단다. 100회 이상 시에는 휘장 안에 100회에 1개씩 금별이 추가되고, 1000회 이상 휘장은 금색(골드윙)으로 금성공수휘장이라 칭한다. 필자는 4회 기본 점프 시 특별한 추억이 있다. 당시 점프를 위해 탑승한 C-123수송기는 소음이 심하기 때문에 강하조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점등신호 불빛과 조장의 수하에 의해 행동이 이루어진다. 막상 1200피트 상공에서 문이 열리고 조장의 낙하 신호를 보면 몇 초 안에 탑승자 전원은 모두 뛰어내린다. 만약 앞선 대기자가 머뭇거리면 낙하지점을 지나 엉뚱한 곳에 떨어져 위험해 질 수도 있다. ▲ c-123 수송기에서 뛰어내려 낙하산을 펼친 채 강하하고 있는 37기 생도들. [사진=김희철] 그래서 공포에 의해 문 앞에서 머뭇거리면 조장이 강제로 떠밀어 버린다. 심지어는 발로 차기도 한다. 그래야 나머지 인원들도 안전하게 강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이불착(樂而不着)이라 했던가? 집착을 버리고 즐기기로 마음을 다지자 고소공포증은 사라졌다.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내가 머뭇거리면 뒤에 따라오는 동기가 어려워진다. 살신성인(殺身成仁)까지는 아니지만 조직과 단체를 위해 몸을 창공으로 던졌다. L자로 굽어진 채 수직낙하하고 있었고 무릎 사이 전투복이 바람에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았다. “덜컥” 낙하산이 펴지는 충격에 출렁거렸다. 이제부터는 방향을 잘 잡아 인접 동료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착지 지점을 찾았다. 마침 배수로 공사장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골도 파여 있고 배관도 있고 그곳으로 떨어지면 최소 발목 골절을 각오해야 했다. 힘차게 낙하산을 당기며 방향을 조정하다보니 그만 발끝이 배수로 바로 옆 땅에 닿았다. 교관이 가르쳐 준대로 구를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서 버렸다. 교관이 위험하니 압력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지면에 가능하면 많이 닿게 낙법을 하라고 했는데... 마침 방향조정을 위해 낙하산을 당기고 놓고 하다 보니 월계공수휘장 받은 고공낙하 이수자가 하는 방법을 나도 모르게 한 것이었고 덕분에 난 말짱했다. 강풍이라도 불었으면 발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 공수훈련을 마친 생도들이 특전사 교관을 행거래를 치고있다. [사진=김희철]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마지막 점프가 끝나자 낙하지점에서 파티가 이루어졌다. 철모에 받아먹는 막걸리는 처음 마셔보지만 꿀맛이었고 새보다 자유로운 특전사 교관과 강하조장은 존경스럽게 보여 졌다. 훗날 졸업 무렵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우리를 가르쳤던 강하조장이 고공낙하 중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순직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의 정신으로 청춘을 붙태우는 특전사 요원들에게 한없는 존경과 ‘받들어 총’을 보낸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7-07-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 미소를 머금게 하는 육사생도 ‘하계군사훈련’의 추억
    ▲ 3학년 생도시절 하계 유격훈련 중에 기념촬영을 한 필자(앞 줄 맨 오른쪽)와 동기생들. ⓒ김희철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4년 동안 '이열치열(以熱治熱)' 선택, 여름 더위를 뜨거운 훈련으로 극복 사관학교 생도들은 4년동안 매해 여름이 되면 작렬하는 태양과 몰아치는 소나기와 친구가 되는 하계군사훈련으로 더위를 잊는다. 보통사람들이 찌는 듯한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오히려 뜨거운 민어탕이나 보신탕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사관생도들을 포함한 군인들도 '이열치열(以熱治熱)'을 선택한다. 가장 더운 한 여름에 치열하고 강하게 훈련을 함으로써 전투력을 강화시킨다. 1학년 '두더지'생도들은 태릉골 육군사관학교에서 동급생으로 지휘부를 편성하여 자치제도를 숙달하며 기초적 훈련을 받고, 2학년 '빈대'생도들은 부사관 학교로 훈련장을 옮겨 부사관 교육과정을 숙달한다. 3학년 'DDT'생도들은 전남 상무대 보병학교로 내려가 소대장 교육과정을 밟으며 동북유격장에서 유격훈련(Ranger)코스를 체험한다. 4학년 '놀부'생도들도 특전사 교육대에 입소하여 정식으로 4주간의 공수훈련을 받는다. 1학년 '두더지'들, 호랑이선배들이 떠난 공백 속에서 '지옥훈련'거듭하며 동기애 쌓아 지금은 없어져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경춘선 화랑대역에서 초여름이 되면 상급생도 환송행사가 열린다. 4학년 생도들은 버스를 타고 특전사로 이동하지만, 2~3학년 생도들은 기차를 타고 원주 부사관학교와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출발한다. 후배들 앞에서 폼은 잡고 있지만 사실은 호랑이 선배들도 부사관과정 교육과·보병학교의 유격훈련 그리고 특전사 공수훈련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 3학년 생도시절 지옥의 유격훈련 와중에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 필자. ⓒ김희철 상급 생도들을 떠나보내고 난 뒤 두더지 1학년 생도들은 지난 반년(6개월)동안 선배들의 친절하고 정성스런 지도교육과 이별하는 아쉬움 보다는 빈대·DDT·놀부들에게 시달렸던 구속감에서 해방된 즐거움을 훨씬 더 크게 느낀다. 하지만 동기생들로 편성된 자치지휘제도에 의해 편성된 조직은 오히려 선배들보다도 더 까다롭게 지휘통솔하는 바람에 해방감은 곧 사라진다. 편지·보고서 작성 시 직각으로 BOX화하지 못하면 간부로 편성된 동기들이 검열하여 퇴짜를 놓는 바람에 재작성하게 되고, 시간을 못 지키거나 열외 등 잘못을 저지르면 선배들보다 더 심하게 벌점을 부여하여 자체 얼차려를 받는 상황도 발생하였다. 기초적인 병교육을 받으면서 장차 국가 간성으로 커 나가기 위해 전쟁사, 군법, 제식훈련, 각개전투, 기본전술 등의 교육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동기생들에 의한 통제가 느슨해질 때에는 훈육관·교관들이 곧바로 제재로 들어와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동기생들만 남아있는 해방감은 좋았고 동기애(同期愛)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하계군사훈련의 꽃은 3학년 'DDT'생도 시절 유격훈련 훈련 직전 식중독 걸려 탈진... 빨간모자에 선글라스 낀 교관, 입맛 다시며 불호령 하계군사훈련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3학년 'DDT'생도들이 경험하는 유격훈련(Ranger)이다. 보병학교에서 소대장 교육과정을 임할 때 소대전술과 화기학, 리더십 등을 배우고, 마지막 2주는 전남 화순에 있는 동복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는다. ▲ 3학년 생도시절 성공적인 유격훈련을 다짐하기 위해 전남 영광의 해수욕장을 찾았던 필자. ⓒ김희철 선배 생도들이 하도 겁을 주어 두려움도 있었지만 동기생들이 함께 한다는 것에 많은 의지가 되었다. 그래서 유격훈련 떠나기 전 몇몇 친한 동기들과 토·일요일을 이용하여 전남 영광에 있는 가마미 해수욕장을 찾았다. 갯벌에서 회를 곁들이며 성공적 유격훈련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필자는 식중독에 걸려 복통과 설사, 구토만 했던 기억이 난다. 식사도 못하고 탈진한 상태에서 월요일 유격훈련은 시작되었다. 동북유격장 PT교관은 빨간모자에 진한 선글라스를 쓰고 회초리 지휘봉을 들고 사열대에 버티고 서있었고 똑같은 복장의 유격조교들은 모자를 눌러써 눈동자는 보일랑 말랑하지만 사관생도 훈련생이라는 먹이감에 입맛을 다지는 듯 '썩소'를 짓고 있었다. 유난히 자극적인 호각소리에 따르지 못하는 훈련생들의 자세도 지적했지만, 빨간 모자에 진한 선글라스 교관의 불호령은 구령소리가 작다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피(P)가 나고 터(T)지는 PT체조로 시작된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길 첫날 PT체조는 말 그대로 피(P)가 나고 터(T)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가입교 시절 기초군사훈련, 2학년 부사관학교 훈련 등을 겪은 몸이라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체력엔 자신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세불량시 지적하는 교관조교에게 불려나와 별도로 얼차려를 받는 등 정말 지옥이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텐트마다 신음소리였고 온몸은 알이 배기고 쑤셔왔다. 첫째 주 PT체조는 기본이고 기초 장애물 코스와 산악 코스의 로프와 레펠... 수직낙하, 하지만 만경대 호수위로 로프를 타고 내려올 때 두려움보다는 상쾌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매 코스를 시작하기 전 두려움을 잊게 하기 위해 조교가 “어머니”를 외치라고 할 때는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첫째 주 교육을 마치고 도피 및 탈출 교육으로 이어졌다. 2주차 교육은 한 장의 지도와 나침반으로 다음 집결지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그것도 선착순으로 서열을 부여했다. 일부 동기는 걷기가 힘들고 빨리 도착하기 위해 교관의 눈을 피해 민간 트럭을 탑승하여 이동하다가 발각되어 곤욕을 치루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지도정치를 잘못하면 열심히 힘들게 올라간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다시 인접 산봉우리로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독도법 교육도 숙달하게 되었다. ▲ 3학년 생도시절 유격훈련을 받는 필자와 동기생들. ⓒ김희철 주야로 계속된 훈련 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에는 가장 좋은 장소가 무덤이었다, 평평하고 푹신한 잔디에 숲이 없어 벌레도 적고 가장 효과적인 휴식 장소였다. 어릴 적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모든 일이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군대 생활을 마친 예비역 병장과 학군(ROTC)장교들에게 군생활의 가장 기억나는 추억을 물어보면 대부분이 유격훈련 이야기를 한다. 어떤 학군장교는 유격훈련을 마치고 동기생끼리 서로 끌어안고서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절대로 아들은 낳지 말자...” 극한 속에서 여유를 느끼며 인간의 한계까지 악과 깡으로 버티었던 유격훈련(Ranger)과정을 마쳤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했던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듯이 훈련을 끝낸 보람과 성취감은 그 무엇보다도 크고 기뻤다. (2부 공수훈련은 다음에 계속)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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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7-06-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 구보는 생도들에게 잊지 못할 ‘휴식’
    ▲ 서울대 미대 지망생이었던 필자가 생도시절이었던 40여년 전에 그렸던 육사생도들의 구보 모습. ⓒ 그림=김희철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5월 '생도의 날' 축제 앞두고 벌어지는 파트너 조달작전은 아련한 추억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다. 그런데 생도시절 5월은 “생도의 날” 축제가 있어 더 더욱 여왕의 계절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자 친구가 없는 생도들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다. 게다가 더 피곤한 것은 같은 조(분대)의 상급 생도이다. 주로 조(분대)별로 행동을 하게 되는데 4학년 선배들이 1학년 후배의 파트너가 없으면 2,3학년 생도들에게 후배 관리 면에서 선배 노릇도 못한다며 심한 핀잔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 한두 달 전부터 상급 생도들은 외출을 통제 받는 1학년의 파트너를 구해주기 위해 미팅 주선으로 바빠진다. 물론 자신의 파트너도 구해야 하기도 하다. ‘생도의 날’을 앞두고 ‘파트너 조달 작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훗날 임관한 육사출신 장교의 부인들이 서울여대 출신이 많은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태릉골 육사의 길 건너편에 있는 서울여대생들과 급하게 미팅을 주선 하다가 눈이 맞아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필자가 1학년 생도였던 그해 5월 어느 토요일에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2학년 이상 선배들은 생도의 날 축제를 앞두고 모두 외출 외박을 나갔고 1학년 생도들만이 생활관에 남아 육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홀로 남아있는 생활관 창밖의 빗방울 소리는 더 처량하고 외롭게 들려 왔다. 그때 문뜩 몇 일전 화랑대를 떠난 친구들이 생각났다. ‘구보’와 ‘시험’이 쉴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사관학교의 교육일정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요구한다. 버티지 못하고 어렵게 들어온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입교생 중에 통상 20~30%가 졸업을 못하고 퇴교 당한다. 특히 생도생활은 구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전투복을 입고 단체로 구보를 한다. 물론 매일 아침 점호 후에도 운동복 복장으로 뛴다. 사관생도에게 구보는 생활의 일부, 어떤 시련도 이겨낼 극기 정신 키워 단체 구보는 처음엔 비무장으로, 다음엔 단독군장으로, 그 다음엔 완전군장으로 복장을 바꿔하며, 뛰는 거리도 3km, 5km, 10km씩 계속 변경 반복된다. 20kg에 달하는 완전군장을 메고 10km를 뛸 때에는 거의 반주검 상태가 된다. 그런데 더 힘든 것은 뛰고 난 후이다. 간혹 체력 미달로 또는 배탈이 났거나 등의 이유로 낙오를 한 사람이 생기면 단체 얼차려 기합을 먼저 받고 당사자의 개별 기합도 또 받는다. 게다가 더 더욱 힘든 것은 체력 고갈로 지쳐있지만, 마냥 퍼져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될 때이다. 만약 그 다음날 정기 시험이 있으면 시험 공부도 해야 된다. 매년 전반 학기가 끝나기 전이라 아직 적응이 덜된 1학년들에게는 5월이 계절의 여왕이 아니라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그때 즈음이 되면 벌써 10여명의 동기생들이 퇴교를 당한다. 시험에서 한 과목이라도 낙제를 하면 재시험을 치루고 거기에서도 점수가 미달이면 다른 과목을 아무리 잘하더라도 바로 퇴교이다. 중간에 퇴교 당한 친구들은 소위 SKY대학에 바로 합격하기도 한다. 혹독한 육사 생도교육과정을 경험한 사람은 사회에 나가 시련과 도전을 이겨낼 역량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 필자는 고된 훈련을 마치고 땀에 절은 생도들이 서로 찬물을 부어주며 즐거워하는 광경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 그림=김희철 '외로운' 1학년 생도들, 구보할 때 받는 시민들의 박수에 힘얻어 외출 나갔다가 일요일에 복귀하면 바로 옆자리가 비어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재시험을 통과 못해 퇴교 당한 것이다. 간혹 특이한 경우도 있다. 화려하게만 보이던 생도생활이 뛰고 또 뛰고 얼차려 받고 늘 긴장해야하는 생활이 힘들어 스스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고 퇴교한 친구도 있다. 본인이 자퇴를 신청하면 제대로 후배 교육을 못 시켰다고 상급생도가 질책을 받고, 동기생들은 동기애가 없다고 얼차려 받는 경우가 종종 생기니까 이런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퇴교하는 순간에도 전우애를 발휘한 친구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도 대부분의 생도들은 구보를 즐긴다. 왜냐면 육사 정문을 통과해 시내 도로길에서 군가를 부르면서 뛰고 있을 때, 시민들의 박수도 받고, 민간 버스와 택시도 볼 수 있고, 입교 전 각오와 생활을 회상하며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든 구보를 하기 전에 선배들은 말한다. “뛰면서 생각해라. 구보는 군인에게 있어서 휴식이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7-05-2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 잔인한 달 4월의 노래
    ▲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5일 인민군 창건일 85주년을 맞아 열린 군종합동 타격시위를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타격시위에는 황병서 총정치국장, 리명수 총참모장, 박영식 인민무력상과 리영길, 조남진, 렴철설, 조경철 등 인민군당위원회 집행위원들이 참석했다. [출처=노동신문]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던 '4월 위기설'도 역사의 뒤안길로... 4월 25일 북한군 창건일 관련 북의 도발을 대비해서 미국 오하이오급(1만8천톤) 핵잠수함 미시간호가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날 한·미 해군은 서해에서 연합해상 훈련을 실시했다. 최강의 전투력을 과시하는 미 핵추진 항공모함 캘빈슨함(CVN-70) 항공모함전단은 일본 근해에서 미·일 연합훈련을 해왔다. 한·미 해군은 이번 주말에 갤빈슨함 전단과 동해에서 항모강습단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북한은 지난 해에도 북한군 창건일 이틀 전에 미국을 압박하고 북한 내부를 통제하기 위해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연례행사처럼 호전적 태도를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의례적인 도발로 보기 어렵다. 의도가 다른 것 같다. 박영식 인민무력부장은 조선중앙TV가 녹화 방송한 북한군 창건 경축 중앙보고대회에서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팰 우리 식의 초정밀화되고 지능화된 위대한 타격수단들이 이미 실전 배치됐다”고 밝히면서 미 캘빈슨 항공모함과 주·일 미군기지를 타격할 핵공격 수단들이 발사대기 상태에 있으며 6차 핵실험도 감행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추가 도발 시 원유 공급 중단’과 중국관영매체의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용인’보도 등 전례 없이 강력한 경고 메시지 영향탓인지 노골적인 도발 대신 강원도 원산에서 화력훈련을 하는 것으로 창건일 행사를 마쳤다. 자신들이 호언해 왔던 전략 무기 도발을 주춤했다고, 북한이 도발 카드를 완전히 접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미·중의 압박이 다소 완화되길 기다렸다가 기습 도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트럼프의 선제타격설과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이후 대선 기간 중 유발되었던 4월 위기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잠복하였다. 아무튼 4월은 잔인한 달이다. ▲ [사진=김희철] 사관학교 생도들, 5월 생도의 날 기대하며 ‘잔인한 4월’이겨내 직업군인에게는 왼어깨가 올라가는 고질병이 있다. 각군 사관생도들은 매일 4번의 퍼레이드를 한다. 오전 오후 학과 출장 및 복귀 행진 때문이다. 4시간 분량의 책을 가방에 넣고 왼쪽 팔에 끼우고 오른손을 힘차게 90도씩 올리며 중대별로 대오를 맞추어 15분 정도 퍼레이드를 하며 공부하러 교수부에 간다. 4년 동안 계속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왼어깨가 올라가는 기이한 체형으로 바뀐다. 졸업 후 내 체형이 비뚤어졌구나 하고 돌이켜 생각하니 이 고질병은 바로 책가방을 왼팔에 끼우고 행진했던 것도 원인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하급생도 입장에서 퍼레이드는 기이 체형 형성을 걱정할 틈조차 없는 지옥 같은 시간이다. 4학년인 분대장 생도가 맨 앞에 그 뒤로 1학년, 2학년, 3학년 순으로 대열을 갖추다 보면 뒤에 따라오는 상급 생도가 “팔다리 높이가 틀리다.”, “열, 오, 대각선이 안맞는다.”며 행진간 잔소리를 계속 듣게 된다. 심지어는 휴식 또는 자유 시간에 상급생도 방으로 호출당하여 심한 질책과 얼차려를 받기도 했다. 특히 5월 생도의 날 축제 시 예복을 입고 퍼레이드 하는 행사인 화랑의식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습한다는 미명하에 상급생도의 지적 강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 [사진=김희철] 키는 작지만 땅달하고 다부졌던 어떤 상급생도가 “군인은 천당과 지옥도 인솔하여 간다. 하물며 사관생도들이 단체의식 없이 발도 틀리고 열도 못 맞추는가?”하며 정신을 차리라고 호되게 교육시키던 일이 기억난다. 그래도 퍼레이드를 하면서 부르던 “4월의 노래(박목월 작사)”는 봄을 느끼게 하며 스트레스를 날려주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차기 대통령, 불임의 4월 딛고 주도적으로 한반도 평화 잉태하길 잔인한 4월은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1922년작)에 나오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이하생략)”라는 구절에서 인용된 말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부정의 의미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을 불임의 숙명에 처한 어부왕의 심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는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죽은 목숨만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 시를 모두 읽고 나면 ‘4월이 잔인하다.’고 말한 것은 역설적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봄의 생명력을 찬양한 문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번 4월 위기설은 미·중·일이 합심하여 북한을 압박한 결과이고 TV의 대선토론회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대북 제제의 성공은 완벽한 경제제재(economic sanctions)로 만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중국의 원유공급 중단 발표로 알 수 있었다. 손자병법 6편 허실(虛實)의 고선전자 치인이 불치어인(故善戰者 致人而 不致於人)처럼 ‘잘 싸우는 자는 적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지 적에게 조정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이하면서 화랑대의 사관생도들은 생도의 날 축제를 기대하면서 잔인한 4월을 극복한다. 5월 9일 선출될 19대 대통령 당선자는 북한이나 주변 열강에 휘둘리지 말고 위기의 잔인한 4월을 겪으며 북한의 도발을 억지한 미국과 중국처럼 주도권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북한에 조정 당하지 말고 우리가 북한을 조정할 수 있는 외교안보 정책을 구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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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7-05-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화랑대에 낯선 ‘미군장군’ 동상이 서있는 이유는?
    ▲ 2015년 3월 20일, ‘한국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밴플리트 장군의 후손인 콜린 패트릭 맥클로이(Collin Patrick McCloy)가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콜린은 밴플리트 장군의 고손자(4대손)로 현재 미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3학년 사관생도이다. 육사를 방문한 콜린이 밴플리트 장군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대통령 탄핵인용 뒤 재점화된 사드배치 논쟁이 놓친 사실은? 중국은 6년전부터 사드보다 3,4배 강력한 레이더로 한국·일본 등 감시 중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의 입에서 박근혜 전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하는 발표가 나오자 헤드라인뉴스(Headline News)로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대통령 탄핵인용 하루 전인 3월 9일 용산 국방컨벤션 충무홀에서는 한국안보협업연구소(KSCI) 창립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제1세션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과 한미동맹’, 제2세션 ‘김정은 체제전망과 차기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대학교수들과 국방전문기자들의 토론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특히 세미나 진행 중에 진보성향의 양무진, 김용현 박사와 극우성향의 김태우, 남성욱 박사의 논쟁은 플로어 자리를 끝까지 꽉 채운 350명의 참가자들의 박수와 탄성이 어우러져 의미있고 가치있는 세미나로 한국안보협업연구소의 새 출발을 알렸다. 최근 라디오와 TV를 통해 대선후보들의 토론회에서도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한국의 안보전략에 대해 각자의 정책방향에 대해 뜨거운 열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중에도 가장 뜨거운 전투현장은 사드배치의 ‘찬반양론’이다. 중국은 한국 내 사드 배치를 반대하면서 비관세장벽(통관, 위생검사 등)을 강화하고 중국인의 한국관광을 통제하며, 롯데 등 한국기업 이미지를 깎아내리면서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을 표적삼아 집중적 단속을 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금융시장에 진출한 중국자본을 철수시키는 등 경제 제재를 통한 보복을 하고 있다. 중국은 웃기는 나라이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처럼 중국은 이미 한반도와 일본전역까지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를 설치해놓고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9일 동북 흑룡강성 솽야산시에 미국의 레이더를 본뜬 초대형 레이더 건물이 TV로 방송되었다. 이 레이더는 5,500km까지 감시할 수 있는 초대형 최신 레이더로 2011년부터 운용해 왔다고 한다. 또한 이곳뿐만 아니고 내몽고에도 초지평선(OTH.Over The Horizon) 레이더를 설치했는데 이 레이더가 쏘는 전파(파장 10-6m)는 높이 100-450km의 전리층에서 꺾이기 때문에 둥근 지표면을 따라가면서 지평선 너머 3,000km 밖의 목표물도 탐지할 수 있다. 사드의 탐지거리보다 3-4배 강력한 레이더인 셈이다. 3월 중에 실시되는 키리졸브훈련에 따라 이미 미국 사드발사기 2기와 X-밴드 레이더 2대가 오산에 전개되었다. 그런데도 자주국방을 외치는 대선주자 중 일부가 사드배치 연기와 반대를 주장한다는 것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라고 여겨진다. ▲ 1952년 4월 14일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육군 3군에서 기증한 옷가지와 먹을거리를 6.25전쟁 고아들에게 나눠주는 모습. ⓒ월드피스자유연합 화랑대에 있는 낯선 밴플리트 장군 동상, 국군의 성장역사를 상징 6.25남침 전쟁 당시 중공군과의 혈전을 통해 국군의 전투력 강화돼 대부분의 대선주자들은 공고한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동맹을 해치려는 주장을 서슴없이 뱉어낸다. '뜨거운 얼음'이자 '차가운 온돌'같은 모순이다. 6.25 남침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11일 압록강 이북 중공군의 거점타격을 주장했던 맥아더 장군이 美극동군 및 유엔군 사령관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은 밴플리트 장군에게 美 8군사령부 지휘권을 물려주고 ‘한국내의 국지적 군사행동’이라는 제한 목표를 재강조하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중국이 문제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소수의 병력으로 중공군과 어려운 전투를 계속하면서도 한국군 사단을 9주간씩 교대로 재훈련시킬 만큼 한국군의 전력향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한국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신병훈련소 설립을 지시했다. 훈련소는 51년 8월에 설립된 후 확대·개편되고 나중에 보병학교·포병학교, 그리고 통신학교로 재편됨에 따라 점점 증가하고 있던 美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이런 교육훈련기관으로 발령됐다. 특히 한국군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편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계획은 당시 미국 내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밴플리트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으로 1952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에게 간곡히 건의해 이 대통령의 계획을 관철시켰다. 한국군이 20개 사단으로 증편되자 그는 한국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장교단을 양성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를 모델 삼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4년제 육사 설립 및 지원을 추진해 허가를 얻어낸 후 美 육사가 한국 육사를 위해 교육과정을 제공하도록 끈질기게 요청, 美 육사에 재직 중인 사위 조지프 매크리스천 중령을 통해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52년 1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 진해에서 열린 육사 개교식에 참석, 따뜻한 박수를 받은 그는 전역 후에도 모금활동을 전개해 육사 도서관을 지어 기증할 정도로 한국군 발전에 끝없는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군은 밴플리트 장군을 기념해 그의 동상을 육사 교정에 세우고 ‘대한민국 육사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필자가 육사 1학년 시절 화랑연병장 앞 사열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강재구 소령 동상’ 아래에 맥아더나 아이젠하워 같은 유명한 인물도 아닌 낯선 미군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면회온 고교동창생들은 젊은 대학생답게 “어떻게 미군의 동상을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육사에 들 수 있느냐?” 하고 호되게 따질 때에는 대답을 못하고 당황하기도 했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미군 장군이 초창기 한국군과 육사 창설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정도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Freedom is not free 한국전쟁 당시 미군 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을 했다. 그들 중 35명이 전사, 실종 혹은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참전한 일반 병사들의 전사·실종 부상자 비율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었다.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장군들은 “군인으로서의 명예도 중요했지만, 지도자로서의 사회적, 정치적 판단과 책임이 더 중요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당연한 조치라고 했다. 한국전쟁을 총 지휘했던 밴플리트 美 8군사령관의 외아들 지미플리터 중위도 공군조종사로 B-26폭격기를 몰고 북한 순천지역에서 실종되어 시신마저 찾지 못하고 전사했다. 자신의 아들을 찾기 위해 수색 및 구출 작전을 시도하는 예하부하들에게 “내 아들을 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아들들을 그 위험한 곳에 보낼 수 없다. ‘지미플리트’ 공군 조종사에 대한 수색은 여기서 중단한다”고 말했다. ▲ 밴플리트 장군이 100세로 별세하기 2개월 전(1992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보낸 편지 ⓒ육군사관학교 미국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은 90%의 일반국민들을 비교하면 한국이 미국보다 결코 뒤떨어지지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한국계 미국인들의 말처럼 “여기는 한국처럼 일확천금은 불가능해도 한국사람처럼 머리 좋은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국 땅이다. 하지만 상위 10% 지도층들의 실력 국가관 도덕관을 비교해보면 딱 두 나라간의 그 엄청난 국력차이만큼 벌어져있다는 생각을 떨칠 길이 없다. 미국 워싱턴에는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비와 조형물이 있다. 그곳에서 4개의 영어단어가 주제로 제시되어 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져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으로 피를 흘려야 자유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밴플리트 장군이 100세로 별세하기 2개월 전(1992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육사기념관에 보관되어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려고 하는 대선후보들에게 밴플리트 장군의 편지를 제시하니, 반드시 읽고 정책에 반영하여 국가안보가 더 튼튼해지길 기대해본다. “인내심과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자유란 소중한 것이지만 또한 소멸되기 쉬운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자유’를 수호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군대가 필요하며 그 군대는 국민의 의사에 응해야 하고 그 군대의 전문성과 모범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미 육군대장 밴플리트)”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현)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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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1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미생들은 자신의 ‘특기·강점’을 최대 활용하라
    ▲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봄에 “생도의 날”, 가을에는 “화랑제”가 열린다. 이 때 생도들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성친구 또는 여자친구를 축제의 꽃인 쌍쌍파티에 초청한다. 위 사진은 “생도의 날”을 맞이해 쌍쌍파티에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과 파트너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김희철 (안보팩트=김희철 기자) 미생이 알아야 할 무능함·유능함·탁월함의 차이점 갓 입사한 ‘미생’이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당면하는 업무들이 그동안 학업을 통해 쌓아온 스펙(학력, 자격증 등)이 활용될 수 있는 기회를 늘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입사 초기에는 보편타당한 상식을 적용하는 것이 용이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달, 6개월, 1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신입동기들은 상급자와 동료들에 의해 무능·유능·탁월한 직원으로 구분되면서 그 결과가 앞으로의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그럼, 유·무능을 구별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필자는 4가지 특성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그 첫 번째는 ‘전문성’이다. 신입직원은 아무리 정신없고 바쁘더라도 그 회사조직에 관한 법규를 숙지해야 한다. 법규를 숙지하지 않고 선배의 관례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본인에게 화(禍)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회사의 정관과 규정 규칙을 빠른 시일 내 숙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본인의 스펙은 그 다음 순서이다. 두 번째는 ‘적시성’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으로 법규를 숙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든 리포트(Report)를 작성한다고 해도 그 업무가 필요한 시기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 기획서와 보고서가 다소 미흡하더라도 적시적으로 방안을 제시할 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창의성’이다. 전문성과 적시성을 갖고 있는 직원은 단지 유능한 직원일 뿐이다. 탁월한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창의란 모방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발명가 에디슨과 같은 세계를 놀라게 할 발명품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타회사나 타부서에서 적용되고 있는 방안을 벤치마킹해서 본인 것으로 재창조하는 것이 더 용이하게 창의성을 인정받아 탁월한 직원으로 평가될 수 있다. 네 번째는 ‘현장성’이다. 아무리 전문성, 적시성, 창의성을 갖추었어도 실제 현장에서 적용이 안 되면 탁상공론(卓上空論)이 되고 만다. 따라서 실제상황에 꾸준히 적용·시행할 수 있는 업무를 위해서는 현장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보편타당한 기본상식과 도덕성을 견지한 가운데 전문·적시·창의·현장성 등을 견지한 직원은 탁월성을 인정받고 승승장구 할 것이다. 워크샵·축제 등은 미생들의 자기 PR 기회 새로운 조직에서 신입사원의 존재는 극히 미미하다. 그래서 한동안 인기 방영된 “미생”이라는 드라마에서 비정규직과 인턴 등 초보사원들의 처지를 대마의 삶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인 바둑용어 “미생”에 빗대어 표현하며 2014년에 돌풍을 일으키는 드라마가 되었다. 회사별로 임원·부서·직책별·신입사원 등 다양한 워크숍을 개회한다. 사관학교도 유사하지만 특별히 춘·추계 축제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행사들은 조직원들 간의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지만 사기양양과 그 조직이 한뜻으로 지향하여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도 만들 수 있다. ▲ 생도시절 필자(김희철)의 작품들 ⓒ김희철 육군사관학교에서는 봄에 “생도의 날”, 가을에는 “화랑제”가 열린다. 학술세미나와 미술작품전시회, 음악발표회, 웅변대회, 육체미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운동을 좋아하는 생도들은 중대별 대항 축구, 배구, 농구, 격투기, 마라톤 등에 도전하고 또 예술에 재능 있는 생도들은 색소폰, 기타 연주회 등에 참가한다. 그래도 각 축제의 꽃은 쌍쌍파티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친교를 갖던 이성 친구를 초청할 수도 있고 싱글인 생도는 쌍쌍파티를 위해 사전에 미팅에서 짝을 만나 초청한다. 개중에는 졸업 후 결혼까지 성공한 생도들도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여 많은 상도 받아보았다. 그래서 육사입교 전에는 미대를 지원할 생각도 잠시 했었다. 덕분에 이러한 봄가을 축제를 통해 필자의 특기를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림을 단시간 내에 완성하는 것은 몹시 제한된다. 설사 완성했다 하더라도 수준이 떨어지면 전시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필자는 생도 4년 생활동안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축제기간 전시회를 통해 상도 받았다. 이렇게 4년을 미술실에서 살다보니 선후배 동료들에게는 그림을 잘 그리는 생도로 알려졌고 종국에는 그림실력도 늘었지만 그 덕도 톡톡히 보았다. 축제를 앞두고는 자유시간, 과외활동시간 등 모든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나의 특기도 살리고 인정도 받으면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미생들은 워크샵을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워크샵 기간 중 회사발전을 위한 창의적인 건의사항을 준비하거나 본인의 예능적 장기를 발표함으로써 상하동료들에게 본인을 알리면 워크샵 이후 업무추진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음지 속 인재 발탁”은 이상...“Ount of sight, out of mind”가 현실 반영 물론 많은 CEO와 임원들이 “음지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승진시키겠다.”라는 말을 한다. 이 같은 성과위주의 인사제도는 당연한 진리이고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결코 그렇지는 않다. “Out of sight, out of mind(안보면 잊혀진다)”는 격언이 더 현실적이다. 묵묵히 일하는 숨은 인재는 끝내 '잊혀진 보석'이 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 역사에 길이 남는 이순신 장군(1545~1598)도 늦깎이로 32세 나이에 무과 급제하여 군관이 되었고, 미관말직으로 지내다 쉰살이 다되어 정읍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일곱 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로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그것도 어린 시절 서울 한양에서 이웃에 살던 유성룡이 임진왜란 총지휘를 맡았고 그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도 함경 녹둔도에서 여진오랑캐를 무찌르는 공도 많이 세웠지만 쉰살이 다되도록 미관말직에서 능력을 인정 못 받다가 유성룡에 의해 발탁되어 23전 23승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 시대는 자기 PR시대이다. 음지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승진을 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려야 한다. CEO와의 친분에 따라 또는 학·혈·지(學․血․地)연에 의해 승진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축제, 워크숍, 위원회, 각종회의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려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한 4가지 특성을 바탕으로 전문화된 지식을 통해 업무를 분석하고 창의성과 현장성을 견지한 가운데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표명하거나 워크숍 축제를 통해 예능을 발휘하여 적시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려야한다. 이때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자신의 특기와 강점을 최대 활용하여 준비하고 적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손자병법 허실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처럼 모든 것을 지키려 할 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때 버릴 것은 과감히 내려놓고 나의 특기와 강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성공하는 “미생”이 되길 기원한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1981년)- 동국대학원 외교국방(석사)- 한남대학교 정책학 (박사과정)- 5군단사령부 작전참모- 3군사령부 감찰참모- 8군단사령부 참모장- 육군훈련소 참모장- 육군대학 교수부장- 육군본부 정책실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 (현)군인공제회 관리부문부이사장 주요 저서 및 연구 - ‘충북지역전사’, 우리문화사, 2000.2월(1500부 발간)-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동국대, 1995.6월- ‘지고도 이긴 전쟁’, 합참지, 2002. 1월- ‘ATCIS는 이 시대 영관장교의 개인화기’, 육군지, 2010.9월- ‘소통과 창의는 전승의 지름길’, 국방저널, 2010.11월-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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