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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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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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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시상식과 북콘서트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을 마치고 대상을 받은 최지효 학생은 소감 발표에서 “이책을 통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라사랑 마음이 깊어졌으며,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라를 빛내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초등부 금상인 김세진 학생은 심사위원 및 참석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본인을 뽑아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해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며, “저의 꿈도 장차 국방과학연구원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당선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1부는 국민의례에 이어 김병관 한미안보연구회 회장의 환영사,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과 김재창 명예회장의 축사에 이어 공모전 시상식으로 축제분위기가 이어졌고, 2부에서는 테너 지명훈과 싱어송라이터 이유진의 축가와 ‘할들육(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관련 퀴즈로 시작된 작가 장삼열 박사의 북콘서트가 진행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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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 시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27일 “국가안보를 위해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한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와 취업 촉진을 위해 이날부터 오는 7월26일까지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을 위한 신청·접수를 진행한다”라고 밝혔다.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확보된 일자리에 지속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기업이 제대군인 채용에 적극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특히, 국가보훈부는 2021년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를 법률로 명문화한 뒤, 인증제에 대한 기업의 관심 유도를 위해 행정·재정·법률적 혜택(인센티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제대군인 고용우수 인증기업은 시중은행의 여신지원 시 금리 우대를 비롯해 관세 조사유예, 방위사업청 및 지방자치단체 우수기업 선정 평가 시 가점 부여 등의 우대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신청 희망 기업은 오는 7월26일까지 신청서류(국가보훈부 홈페이지 공지)를 준비하여 한국경영인증원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사무국에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이미 국가보훈부는 6월20일 ‘인증설명회’를 온라인(ZOOM)으로 개최하며,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제도와 인증기준 등 세부 사항을 추가로 안내할 예정이다. 또한, 신청기업을 대상으로 한국경영인증원에서 서류심사와 현장실사를 통해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여부를 심사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보훈부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9월 인증기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서류심사와 현장실사의 평가지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 고용인 수와 우대채용 현황, 제대군인지원센터 협력 정도, 근속 기간, 근로 만족도, 기업 재무 건전성 등이다. 최종 인증기업에 대해서는 제대군인주간인 10월 둘째 주 국가보훈부 장관 인증패와 인증 현판을 수여할 계획이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복귀 지원은 제복근무자로서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지금도 국가수호 일선에서 땀 흘리고 있는 현역 군인들이 맡은 바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국가보훈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제대군인들의 원활한 취업을 위한 고용환경 조성을 위해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고용 우수 인증기업에 대한 우대지원제도를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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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9]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병자년 새해가 되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목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 취임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대로 취임하면 ‘절름발이 대대장 또는 DJ 대대장’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 붙을 것 같았다. 또한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불편하게 만드는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통합병원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진단에 따라 새해 초부터 재차 병원에 입원했다. 통합병원 도착 다음날 바로 2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상단핀을 제거하고 다시 2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미 3개월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기 때문인지 만나는 간호장교와 군의관들도 모두 반기며(?) 인사를 해와 병원 생활을 불편없이 익숙하게 할 수 있었고, 짧은 입원 기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선후배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도 면회오지 않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회복 및 재활치료의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를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름간의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 수술치료, 입원 기간에 병실에 앉아 필자는 동국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에서 예비군분야를 발췌하여 정리한 ‘조국통일을 대비한 예비군제도 비전’이라는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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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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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0]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원·장비 식별, 화생방, 대공사격술, 환자응급처치 등 병기본훈련과 공용화기, 주특기 및 수색정찰, 전술훈련 과목들을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바쁘게 진행하자 어느덧 마지막 3일차 훈련을 하게 되었다. 마무리 훈련이 끝나고 퇴소할 때 예비군들을 심한 통제로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수고했다고 인사하며 복귀하는 모습에 보람도 느꼈다. 한편 힘들었지만 아무런 사고 없이 첫 동원훈련이 종료되자 필자는 예비군 통제를 위해 간부들에게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악한 모습으로 언성을 높이며 호되게 질책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여운으로 남아 후회를 했다. 훈련이 종료되면 다음 훈련을 대비하여 총기 반납 및 막사 청소 등 연대 동원훈련장을 정리해야 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각 내무반을 돌며 2박3일 동안 고생한 간부들과 병사들을 격려하려고 사무실을 나와 마무리 정리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훈련 조교로서 예비군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기거하며 교장에서도 예비군들을 통제했던 대대 병사들이 빨리 부대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인지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며 총기를 옮기고 청소 및 정리정돈을 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감사해 일일이 수고했다며 어깨도 두드려주고 격려했다. 각 중대를 현장을 모두 돌며 격려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대대 간부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병사들만 마무리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여운으로 남아 후회했던 감정이 모두 사라지고 화(禍)가 치솟아 오르며 15년전 소대장 시절에 대대장에게 간부들이 불려가 기합받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도 대대전술훈련이 끝나자 지쳐서 마지막까지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휴식을 취하던 간부들을 모두 소집해 화가 난 대대장이 직접 엉덩이를 때리며 끝까지 확인과 감독을 못하는 간부들의 불성실한 행동에 대해 엄청나게 혼을 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필자도 전 간부를 집합시켰다. 다음주 2차 동원훈련도 남아있고 전시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전장정리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동원훈련을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최종 마무리를 병사들에게만 맡기며 지쳐서 퍼져있는 간부들에게 대대장 취임 후에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며 심하게 화를 냈다. 예비군을 통제하기 위한 쇼가 아니라, 솔선수범(率先垂範)은 커녕 병사들과 마지막까지도 동거동락(同居同樂)도 못하는 간부들의 나태한 지휘·감독에 실망하며 감정이 폭발해 자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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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0]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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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제59주기 추모식’ 개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김남수)는 지난 7월19일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대한민국 건국과 6·25남침전쟁에서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로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제59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날 추모식에는 강정애·박민식 전현직 국가보훈부 장관과 김황식·정운찬 전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등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상시청, 추모사, 추모의 노래, 헌화·분향 및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1875년 황해도 출생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를 조직하고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을 발행하여 주필로 활동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며,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 후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를 발간하였으며,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였다. 1941년 12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예언한 논문과 같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해방후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적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특히 스탈린이 사주하고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한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신속히 유엔군이 투입하도록 외교적역량을 발휘하여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냈으며, 정전을 앞두고는 이 대통령의 혜안과 배짱 덕택에 ‘반공포로 석방’과 “한국과 미국 어느 한쪽이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자동개입한다”는 조건을 넣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한미동맹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방위보장에 힘입어 한국은 최근까지 GNP의 4% 이내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 쓰면서 경제개발 우선정책으로써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강한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신 분”이라며 “정부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신명을 바쳐 희생·헌신하신 모든분들이 제대로 예우받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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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제59주기 추모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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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9]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실 대대는 예비군 교육을 연중 지속적으로 하지만 훈련에 입소하는 예비군들은 일년에 한 번 뿐이다. 따라서 대대는 항상 새롭고 정성스럽게 일년 내내 계속해서 훈련장과 편의 시설을 보강한다. 양지에서 운용되는 훈련장의 강의장과 실습장에는 그늘을 만들기 위해 차양막을 설치했고 합판과 목제로 된 간판은 회전식 철제 간판으로 교체했다. 강의장 좌석도 가능한 블록과 폐타이어를 이용해 계단식으로 설치하고, 평지에는 사진처럼 목욕용 의자나 장판을 이용해 깔판도 만들었으며 모든 실습장과 이동로에는 모래와 석분을 깔고 경사지 계단에는 안전로프도 설치해 불필요한 고통을 방지와 편의를 제공하며 우발적인 사고를 예방하도록 조치했다. 훈련 첫날 오후에 중대별로 상이한 교육내용으로 훈련이 진행됐다. 그런데 대대원들이 정성스럽게 교장을 준비한 것에 비해 예비군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약 3분의 1정도의 예비군들은 전역후에 첫 훈련이라 아마도 전에 교장과 비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일부 예비군들만이 정성스레 보완한 훈련장을 체험하며 호평을 해주었다. 주간교육이 끝나고 저녁식사 후에 강당에 소집시켜 만화식 제작된 괘도와 VCR을 활용해 필자가 직접 안보교육을 두시간씩 진행하여 취침시간이 되면 모두 피곤해서 바로 잠이 들 수 있도록 유도하자 예비군들은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줄에 대해 하소연하며 좀 더 자유시간을 부여해주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물론 취침 이후에도 간부들의 순찰을 계속 돌려 다른 예비군들의 취침을 방해하지 않도록 감독했다. 그러나 그와중에도 입소시에 몰래 감추어 드려온 것으로 술판을 벌릴려고 준비하던 내무반도 사전에 적발하여 모두 압수하고 다시 적발시에는 퇴소 조치하여 재교육에 입소하거나 불참시에는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경고도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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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9]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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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8]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대에서 운용하는 예비군 훈련장은 일반 및 향방훈련 위주로 수용인원이 200명 정도이기 때문에 500명 가깝게 소집되는 동원훈련은 연대의 동원훈련장을 활용한다. 따라서 대대의 예비군 훈련장처럼 만들기에는 연대의 동원훈련장이 너무 광활하여 전체를 보완 할 수 없었고, 가능한 일부분을 대대에서 보유한 훈련장처럼 정성을 다해 준비하여 소집되는 예비군들을 맞이했다. 입소할 때부터 시간에 늦게 도착한 자들을 바로 돌려보내고, 식당 입장시에도 복장 점검과 오와 열을 맞춰 단체로 이동하는 등 강력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자 동원된 예비군들은 “다시 신병으로 입대했냐?”며 불평을 하면서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조교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2박3일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그동안 잊혀졌던 많은 훈련 과제들을 숙지시키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그래서 소규모 단위로 실습조 편성을 다시해서 간단없는 순환제 실습을 할 수 있도록 하여 무료하게 대기하거나 놀리는 결과를 방지했다. 특히 인접부대에서 사격훈련간에 오발사고로 피해를 입은 사례도 있어 대비를 했다. 먼저 우천시를 고려해 표적지 설치대에 지붕 설치와 깔판도 준비해 지면 습기로 인한 실습 기피 방지했다. 또한 탄피받이를 제작해 탄피회수도 용이하게 만들며 경고용 수기와 총구이탈방지틀을 설치해 안전사고도 예방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훈련을 통해 느슨하게 쉬어가는 시간이라는 인식을 배제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예비군들의 요구에 따라 편의를 한없이 제공하다 보면 퇴소 후에 예비군 교육이 너무 허술하고 효과도 없다고 오히려 역으로 이의를 제기했다는 선배들의 하소연을 들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타이트한 시간이 되도록 노력했다. 입소 첫날 오전은 편성과 물자분배 및 입소 신고로 모두 소요됐고 오후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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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8]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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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7]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아보협업연구소장] 대대 전병력들이 사전에 동원훈련장으로 이동해 훈련장과 막사들을 정비하여 동원된 예비군들이 도착시에 정말로 정성스럽게 훈련 준비를 했다는 인상이 들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물론 훈련전에 연대장의 준비 사열이 있어 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연대장은 동원된 예비군들이 무질서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제하여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라는 당부를 추가하면서 동원훈련 준비사열은 잘 끝났고, 드디어 동원훈련이 시작되었다. 통상 예비군들은 동원훈련을 휴식 기간으로 생각하며 참석한다. 바쁜 직장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공인된 휴가 기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일탈 행동이 발생한다. 하지만 예비군들은 입소시 차량 주차 및 신고 준비부터 간부와 조교들의 행동이 매우 엄격하여 예전에 참가했던 훈련보다는 좀더 까다롭게 통제하는 인식이 들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특히 식당에 출입시에 정상적인 복장 점검을 하고 열과 오를 맞추어 이동하도록 통제하여 직장생활의 휴가 기간이 아니라 군에 다시 입대한 기분이 들도록 했다. 역시 인간의 본성 고려시에 의식주가 중요하기 때문에 정성어린 막사 준비를 하여 작은 감동으로 기분 좋게 했지만 복장이 불량하거나 식당 출입시를 포함해 이동시에 무질서한 모습이 보일때에는 통제를 소홀히 하는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대대장인 필자가 악역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난히도 예비군들이 보는 앞에서 대대 간부들에게 엄격하게 힐책하며 지시하고 언성을 높혀 통제하는 모습을 통해 대대원들이 대대장 핑개를 대면서 협조를 부탁하여 예비군들이 지시에 순응하며 따라오도록 유도했다. 효과가 바로 발휘되었다. 대대장이 눈에 보이면 예비군들은 급하게 자신의 복장부터 챙기는 모습으로 바뀌었고 덕분에 간부 및 조교들의 예비군 통제는 수월해졌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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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7]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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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국립괴산호국원 제2묘역 준공식’ 개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2일 오전 10시, 중부권 국가유공자 등의 마지막 예우를 위해 운영하고 있는 국립괴산호국원의 현충관에서 국가보훈부 강정애 장관을 비롯한 각급 기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안시설 제2묘역 확충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2019년 10월 개원한 국립괴산호국원(제1묘역)은 그동안 전체 2만 3,700여 기 중 2만 1,300여 기가 안장되어 지난 6월 말 현재 2,400여 기의 안장 여력이 남아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괴산호국원의 안장 능력 확충을 위해 지난 2022년 4월, 제2묘역 조성에 들어가 최근 공사를 완료했다. 국립괴산호국원 제2묘역은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산83-1번지 일원 45,000제곱미터(㎡, 약 1.4만 평)에 총사업비 160억 원을 투입해 약 2만 3,000여 기 규모의 봉안시설로 조성했다. 제2묘역 완공으로 국립괴산호국원은 제1묘역과 함께 총 4만 7,000여 기의 안장 능력을 갖추고 원활하게 국가유공자 등을 모실 수 있게 됐다. 국립괴산호국원 제2묘역은 제1묘역이 만장되면 안장에 들어갈 예정이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권 국가유공자분들의 안식처가 될 국립괴산호국원 제2묘역 조성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국가보훈부는 국립괴산호국원이 안장 공간을 넘어 호국영령의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는 교육 공간이자 유족과 국민이 일상에서 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국립연천현충원과 횡성·장흥호국원을 비롯한 다른 국립묘지 조성과 확충 등 추가 안장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장·차관이 주재하는 국가보훈 개혁TF를 통해 추진상황을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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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국립괴산호국원 제2묘역 준공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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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6]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평시 향토사단에 편성된 대대는 간편이라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지만 동원훈련을 하면 전시에 편제된 예비군들이 동원되어 대대원 전원이 모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동시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훈련하면서 호흡을 함께하며 응집하여 온전한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훈련이다. 사단장 초도 업무보고를 끝내자 바로 몇주일 뒤인 6월3일부터 동원훈련이 계획되어 있어 시간에 쫒기며 바쁘게 준비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연대직할대도 포함되어 인원이 많다보니 두 번에 나누어 18일까지 훈련하기 때문에 각별히 더 확인하고 준비할 것이 많았다. 각 중대장들은 평소 10명도 않되는 인원들을 데리고 운용하다가 동원훈련이 시작되면 예비군들을 포함한 100명이 넘는 중대원을 지휘한다. 따라서 중대장들이 철저한 사전 교육받아 예비군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며 훈련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또한 현역병들은 전 중대원이 모여 함께 훈련한다는 전우애보다는 이미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고참인 예비군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더구나 현역 근무가 아닌 상근예비역이나 해·공군 예비군이 참가할 때는 박격포나 기관총 등 육군 관련 전시 훈련이 부족하여 더 어려운 상황이 될까봐 걱정도 했다. 반면에 필자는 대대장으로 취임했지만 전방에서 중대장 근무시보다도 적은 인원을 지휘하다가 동원훈련을 통해 완편된 대대원을 지휘하며 훈련시킨다는 것에 약간은 흥분에 빠지며 기대감도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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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6] 대대장의 악역으로 예비군 통제 유도한 동원훈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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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5] 강력한 교육·훈련과 부하복지는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어...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신 장군의 본명은 원극(元極)으로 함경남도 영흥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될 뜻을 품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학병제도를 만들어 학생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시작하자 학병을 기피할 생각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일제 당국의 강압에 못이겨 1944년에 사병으로 입대했으며, 곧 간부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중에 광복을 맞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북한 김일성의 공산당 독재정권에 실망하여 1946년 함경남도 영흥에서부터 단신으로 월남한 뒤, 이름을 신(信)으로 바꾸고 국군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육군사관학교(경비사관학교) 제2기(박정희 대통령 동기)로 입교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강원도 춘천에 있는 제8연대에서 소대장 및 중대장 겸무로 군대생활을 시작하여 조선경비대 군기사령부의 행정관을 지냈으며, 대대장으로 옹진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수도사단 1연대장을 맡아 의정부전투를 시작으로 한강 방어선, 진천, 안강, 기계, 대관령전투를 비롯해 38선 북진작전 등 수많은 격전지를 누비며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승리하는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낙동강 최후 방어선의 요충지였던 안강,기계 지역에서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반격작전 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공도 세웠다. 1·4후퇴이후 중공군 춘계공세시 대관령전투에서는 연대 단독으로 이틀간의 사투끝에 중공군 1개 사단의 남하를 저지해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남지구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고, 1953년 말에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1954년에는 첩보부대장을 시작으로 육본 수송감, 수도사단장, 감찰감을 역임하던 중에 육군소장으로 승진하였고, 1960년에 제2훈련 소장이 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으로서 내무부장관이 되었으며, 1963년에 잠시 감사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그해 군대로 복귀하여 6군단장에 보임되었으며, 1966년에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전투병과 사령관, 1968년 육군참모장과 제2군사령관을 1969년에는 제1군사령관직을 맡았다. 1970년 제1군사령관 재직시 육군대장으로 승진했고, 1972년 합동참모본부 의장으로 부임했으며 오늘 죽어도 책임을 다한다는 의미의 "일일 일생"을 좌우명으로 국가와 군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그는 1975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합참의장 재직시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자주국방의 기초를 세우는 업적도 남겼다. 또한 솔직 담백한 성품을 지닌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군대의 제반 여건이 좋지 않던 시절에 강조했던 “부하들을 잘 먹여라(食). 잘 입혀라(衣). 잘 재워라(住). 교육훈련을 철저히 하라. 근심걱정을 해결해 주라”는 유명한 지휘방침처럼 군의 교육·훈련과 부하복지에 많은 신경을 써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며 존경도 받았다. 전역 후에는 아세아자동차주식회사와 대한중석광업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생전에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등 많은 상훈을 받았으며 1996년 5월6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당시 청렴하며 솔직 담백한 성품으로 자주국방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한신 장군을 존경했던 대부분 후배장교들이 한 장군의 영면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특히 필자의 장인은 한신 장군처럼 이북에서 김일성의 공산당 독재정권에 실망하여 단신으로 월남해 6.25남침전쟁을 겪으며 군생활을 했는데 그동안에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다며 눈물을 적셨다.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필자도 강직한 참군인 한 장군의 삶을 보면서 롤모델로 삼아 한신 장군처럼 교육·훈련과 부하복지에 많은 신경을 써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며 군생활을 바르게 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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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5] 강력한 교육·훈련과 부하복지는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어...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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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4] 강력한 교육·훈련과 부하복지는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어...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생활 동안에 많은 선후배 등의 동료들을 만난다. 그중 전우애를 느끼며 존경과 신뢰할 정도의 지인은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이 하늘의 뜻이라 존경과 신뢰를 떠나 그 끈이 계속이어져 지금까지도 자주 만나는 선후배 전우들도 있다. 그중에 진심으로 아껴주며 멘토링을 해주고 위기에 빠져 극복하기 어려운 중요시기에 앞장서서 대변해 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특히 임관후 야전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 만나 좋은 인연을 쌓은 사람은 지금도 연락하며 서로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더욱 더 소중한 전우들이다. 필자가 임관하여 첫 근무지인 승리부대는 사단 지역내의 최고로 높은 기관장이 마을 이장이며 사단 사령부 앞에도 비포장 도로였던 심심산골이었다. 그곳에서 같이 울고 웃었던 전우들은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헌데 많은 지인들이 대대장으로 취임한 필자를 만나러 오던 5월경에 옛 전우의 소식을 들었다. 승리부대에서 동기생중에 1차로 소령 진급했고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의 작전보좌관 시절에 인접 청성부대에서 대대전술훈련 평가도 1등을 하며 대대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군선배인 한00 중령(3사14기)이 7군단에서 민심과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필자는 군사령부 전술토의, 예비군 교장 사열, 사단장 초도 업무보고 등이 성공적으로 끝내자 사단참모들과 소통이 잘되고 있었다. 곧 군사령부의 전투지휘검열이 계획되어 있는데 동원참모 공석이 생겨 고민하는 인사참모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필자는 급하게 선배인 한 중령에게 참모보직 첩보를 제공했다. 작전참모를 해야될 상황이지만 보직할 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차였던 한 중령은 우선 동원참모를 먼저 한 뒤에 작전참모로 보직을 옮길 수있는 좋은 기회를 포착하고 바로 신청해 사단에서 보직검토에 들어갔다. 결국 승리부대의 소중한 전우애를 갖고 있으며 작전직능의 탁월한 한 중령이 동원참모로 보직되었고, 두달 뒤에 계획된 전투지휘검열에서 한 중령의 탁월한 조언과 지원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얻었고 필자의 대대는 계속적인 신화를 만들어 냈다. 훗날 한 중령은 사단작전참모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도 승승장구하여 장군으로 진급하며 사단장, 육본실장, 3군단장을 역임하는 등 군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무렵인 5월6일, 탁월했던 사단동원참모와 같은 청주 한 씨이면서도 겨레 가슴에 참군인상을 남긴 6·25남침전쟁 영웅 한신 장군이 향년 76세로 운명했다. 한신 장군은 전역후에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해 간부교육을 했는데 그때 아주 작은 프라이드를 직접 몰고 와 위병소에서 병사들이 다른 분으로 착각해 신원을 확인하는 약간의 소동이 있었을 정도로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참군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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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4] 강력한 교육·훈련과 부하복지는 전우애를 돈독하게 만들어...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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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전쟁철학과 한미동맹’ 국제학술회의 개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이날 김관진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이사장은 기조사에서 백 장군님은 사단장으로 6·25남침전쟁을 시작했고 정전시까지 1,129일 동안의 모든 전쟁과정을 온 몸으로 겪으며 보여준 지휘통솔 및 리더십 모습에서 다음과 같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백선엽 장군의 전쟁철학 요소들을 도출하는 계기로 만들자. 둘째, 6·25남침전쟁 이전부터 뿌려진 상호신뢰의 한미동맹 씨앗이 훗날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큰 나무가 된 것임을 주목하자. 셋째, 세계 5위의 군사강국으로 발돋움하게된 국군의 근간을 잘 살펴보자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백선엽 장군은 한미동맹에 기여한 것뿐만 아니라 20개 사단 및 2, 3, 5, 6군단과 동양 최초의 야전군인 제1군을 창설해 현재 육군의 근간을 이루는 대부분의 골격을 만드는 많은 업적을 남긴 전쟁영웅으로 재확인됐다. 또한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백 장군의 숨겨진 사실이 많이 발굴되었고 단편적으로만 알고있던 백 장군의 새로운 면모를 모두가 공감하는 자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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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전쟁철학과 한미동맹’ 국제학술회의 개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