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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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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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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시상식과 북콘서트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을 마치고 대상을 받은 최지효 학생은 소감 발표에서 “이책을 통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라사랑 마음이 깊어졌으며,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라를 빛내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초등부 금상인 김세진 학생은 심사위원 및 참석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본인을 뽑아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해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며, “저의 꿈도 장차 국방과학연구원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당선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1부는 국민의례에 이어 김병관 한미안보연구회 회장의 환영사,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과 김재창 명예회장의 축사에 이어 공모전 시상식으로 축제분위기가 이어졌고, 2부에서는 테너 지명훈과 싱어송라이터 이유진의 축가와 ‘할들육(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관련 퀴즈로 시작된 작가 장삼열 박사의 북콘서트가 진행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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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 시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27일 “국가안보를 위해 오랜 기간 군에서 복무한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와 취업 촉진을 위해 이날부터 오는 7월26일까지 ‘2024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을 위한 신청·접수를 진행한다”라고 밝혔다.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일자리 창출은 물론 확보된 일자리에 지속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기업이 제대군인 채용에 적극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지난 201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특히, 국가보훈부는 2021년 ‘제대군인 고용우수기업 인증제’를 법률로 명문화한 뒤, 인증제에 대한 기업의 관심 유도를 위해 행정·재정·법률적 혜택(인센티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제대군인 고용우수 인증기업은 시중은행의 여신지원 시 금리 우대를 비롯해 관세 조사유예, 방위사업청 및 지방자치단체 우수기업 선정 평가 시 가점 부여 등의 우대지원을 받을 수 있다. 신청 희망 기업은 오는 7월26일까지 신청서류(국가보훈부 홈페이지 공지)를 준비하여 한국경영인증원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사무국에 전자우편으로 제출하면 된다. 이미 국가보훈부는 6월20일 ‘인증설명회’를 온라인(ZOOM)으로 개최하며,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제도와 인증기준 등 세부 사항을 추가로 안내할 예정이다. 또한, 신청기업을 대상으로 한국경영인증원에서 서류심사와 현장실사를 통해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여부를 심사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보훈부 ‘제대군인 고용 우수기업 인증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9월 인증기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서류심사와 현장실사의 평가지표는 중장기복무 제대군인 고용인 수와 우대채용 현황, 제대군인지원센터 협력 정도, 근속 기간, 근로 만족도, 기업 재무 건전성 등이다. 최종 인증기업에 대해서는 제대군인주간인 10월 둘째 주 국가보훈부 장관 인증패와 인증 현판을 수여할 계획이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대군인에 대한 사회복귀 지원은 제복근무자로서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지금도 국가수호 일선에서 땀 흘리고 있는 현역 군인들이 맡은 바 임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국가보훈부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제대군인들의 원활한 취업을 위한 고용환경 조성을 위해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통해 고용 우수 인증기업에 대한 우대지원제도를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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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9]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병자년 새해가 되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목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 취임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대로 취임하면 ‘절름발이 대대장 또는 DJ 대대장’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 붙을 것 같았다. 또한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불편하게 만드는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통합병원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진단에 따라 새해 초부터 재차 병원에 입원했다. 통합병원 도착 다음날 바로 2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상단핀을 제거하고 다시 2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미 3개월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기 때문인지 만나는 간호장교와 군의관들도 모두 반기며(?) 인사를 해와 병원 생활을 불편없이 익숙하게 할 수 있었고, 짧은 입원 기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선후배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도 면회오지 않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회복 및 재활치료의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를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름간의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 수술치료, 입원 기간에 병실에 앉아 필자는 동국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에서 예비군분야를 발췌하여 정리한 ‘조국통일을 대비한 예비군제도 비전’이라는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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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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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태사해(蟬蛻蛇解)’란 매미가 껍질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것을 뜻하며, 해탈하여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비유한다. 또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내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할 때 쓰인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로는 사람이 보다 발전한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처럼 된다는 뜻의 ‘환골탈태(換骨奪胎)’, 군자는 표범처럼 빠르게 잘못을 고쳐 혁신한다는 뜻의 ‘군자표변(君子豹變)’, 날로 진보하는 것을 뜻하는 ‘일취월장(日就月將)’ 등이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암울했던 1994년이지만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태는 필자에게 ‘선태사해(蟬蛻蛇解)’와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기회를 부여했다. 재활치료 때문에 차기 보직 발령에 다소 늦은 횡보를 보이면서 그동안 미뤄 왔던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할 시간과 여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듯이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발전된 상태로 변화하기 위한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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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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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마침 교통사고 당시에 필자를 부대대장 보직으로 조치해 치료받으며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혜택을 준 80연대장 정형진 대령(육사30기, 소장예편)이 사단 참모장으로 영전했는데 천주교 신자로 매주 성당에서 만나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고,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이라 여겨졌다. 한편 퇴원한 지 한달이 지난 뒤에 중령 진급 신고를 사단장에게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중이었고 필자만이 목발을 짚고 간신히 서서 행사에 임했는데 이때 사단장은 대대장으로 취임하기에는 아직 재활이 더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사단 평가실에 보직을 두고 예하부대 점검을 한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현실에 이미 취임하여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동기생들보다 자꾸 뒤떨어지는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사단작전장교 시절의 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장교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11월 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장교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장교영어반’ 교육과 필자의 재활치료 때문에 대대장 취임이 연기됨에 따라 전방 근무 기간이 길어져서 계획인사에 적용되어 다음 보직이 후방 2작전사령부 예하 대대장으로 조정되었다. 따라서 2작전사령부 인사처의 보임장교인 동기생이 순찰 등 이동이 많은 해안부대보다는 내륙위주인 37사단으로 검토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게다가 군근무 기간 및 계급정년이 늘어나는 군인력관리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중령근무 기간이 연장되어 재활치료 후에 어떻게 근무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진로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처럼 ‘천붕우출(天崩牛出)’란 고사성어가 뇌리를 때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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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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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가을인 9월초이지만 그해 여름에 괴롭혔던 100년 만의 폭염은 아직도 남아있어 아파트 4층은 뜨거웠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정면옆에 위치한 아파트에서는 주변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서 퍼져나오는 냄새와 파리떼들의 습격으로 창문을 열기가 어려워 더위는 더욱 심했다. 그래도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병원 생활을 벗어났고, 그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아파트 주변 축사의 불쾌한 냄새마저도 감사했다. 목발을 짚은 필자는 그때까지도 거동이 완전하지 못해 부대로 출근은 못한 채, 아침 저녁에 사단 사령부 연병장과 주변을 열심히 걸으며 재활운동을 계속했다. 간혹 길에서 만나는 간부들과 인사를 할 때에도 걱정해주는 그들이 감사했고 덕분에 사단 참모부에는 필자가 복귀해 재활치료 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은 필자의 의지뿐이었고, 정상인처럼 빠른 속도로 걷고나면 핀이 박혀있는 다리의 근육과 목발을 이용하기 위해 끼웠던 겨드랑이와 팔까지에도 통증을 느꼈다. 대퇴부 분쇄골절로 인해 아직도 뼈가 완전히 붙지는 않은 탓이었으나 근육이 없는 다리는 변함없이 새다리처럼 가늘었다. 단지 병원생활 동안에 동기의 권고로 개종하여 성당을 찾아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 신자들을 만나는 회동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의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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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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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11일~13일 2박 3일 일정으로 정부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내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자 광복군인 오성규 애국지사를 영주 귀국의 목적으로 13일 국내로 모셨다. 11일 일본으로 넘어간 정부대표단은 바로 도쿄로 이동해 조국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 오성규 애국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를 위문하고 자녀들과 면담을 통해 국내로 모시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번 정부대표단의 방일은 2018년 배우자의 사망 이후 아파트에 홀로 거주 중인 오성규 지사가 본인 생의 마지막은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국가보훈부에 밝히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성규 지사는 일제 강점기 ‘주태석’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만주 봉천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이영순, 조승회 등과 비밀조직망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탈출해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오 지사는 1945년 5월 한미합작특수훈련(O.S.S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오 지사는 교민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군 군사 특파단의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하였다. 정부대표단은 현지에서 먼저 오성규 지사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귀국에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되어 13일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 지사를 국내로 모셔와 가장 먼저 국립묘지를 찾아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를 하며 참배했다. 이후에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오 지사의 건강상태를 정밀 검진해 건강 정도에 따라 보훈요양병원 등에서 건강과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예우하고, 건강상 특이점이 없다면 오는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오성규 지사가 국내로 영주 귀국하여, 국내 독립유공자는 김영관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는 미국에 이하전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만 남게 된다. 한편, 정부대표단은, 오성규 지사의 영주 귀국 지원 외에도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순국지인 이치카야형무소 터와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를 참배하고, 재일본 YMCA 회관 내 기념자료실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踏査)했다.. 또한 박열 의사(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변론을 맡은 후세다쓰지(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의 후손과 재일한국유학생 대표 등과 면담도 진행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일본에 계신 마지막 생존 독립유공자이신 오성규 지사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지사님께 무한히 감사드리고 대한민국에서 본인의 소원대로 마지막 여생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출국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국립묘지 참배시에 직접 휠체어를 끌며 오 지사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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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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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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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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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다가 일제 만행에 의해 불의의 객이되어 유해도 못 찾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1일 “최재형 선생(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순국장소로 추정되는 러 우수리스크의 흙과 70여 년간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모셔와, 원래 최재형 선생의 묘가 있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 합장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묘는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조성되었으나, 이른바‘가짜 유족 사건’으로 멸실되어 현재까지도 해당 묘역은 빈터로 남아있다. 이후 유족들은 멸실된 묘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희망해왔으나,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이후, 현재까지 유해를 찾을 수 없어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하도록 규정한 국립묘지법에 따라 묘를 복원할 수 없었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와 배우자의 유골을 함께 묘에 합장할 수 있도록 올해 1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6월30일 국회 통과, 7월1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18일 시행되었다. 이로써,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해 유해를 찾지 못한 최재형 선생을 부인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 선생은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국외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어 항일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해 재창간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대한 기여로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大恩人)’으로 추앙받았다.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는 3남 최 발렌틴과 5녀 최 올가의 회고에 따르면 1897년경 최재형 선생과 결혼한 이후 8명의 자녀를 낳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으며,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남은 가족들을 보살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편인 최재형 선생의 순국 이후에는 자녀들과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 1952년 사망했고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부는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함께 키르기스스탄 현지에서 유해 수습 등 준비 절차에 돌입해, 오는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셨다. 또한, 최재형 선생이 순국하신 장소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기념관(구 최재형 선생 고택) 뒤편 언덕에서 채취한 흙을 11일 국내로 반입해 부부를 최고의 예우로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시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7월 중순 키르기스스탄 현지에 의회 외교차 방문한 정우택 국회부의장의 협조 요청과 주키르기즈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의 도움, 기념사업회의 대국민 모금운동과 엘지(LG)유플러스의 후원 등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 적기에 가능해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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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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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울 을지병원에서 침대생활 2개월, 재활 2개월 등 4개월 10일만에 드디어 퇴원하는 날을 열흘 앞둔 8월26일 저녁에 같은 병실에 입원해 함께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의 고교 절친인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이 그동안 고생을 위로하는 식사을 함께하며 술 한잔도 겸했다. 특히 대퇴부 분쇄골절, 골반 천골·치골 전위골절, 늑골 8·9번 골절, 횡경막·비장 파열, 뇌진탕, 혈흉, 좌5족지 탈골 등 병명만 11가지로 몸속에 쇠붙이를 부착한 로보캅 같은 중환자 필자에게 각별한 정성과 완벽한 진료로 희망의 불을 지펴준 박 이사장이 퇴원 축하 식사까지 마련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8월 마지막 날에는 무적태풍부대에서 또하나의 희소식이 전달됐다. 필자의 후임으로 사단작전보좌관에 보직되어 고생을 했던 후배 김완경(38기) 소령이 중령 진급심사에서 선발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사 상태의 중환자에서 회복되어 목발을 짚고 퇴원하는 필자와 함께 자축행사 이벤트가 되었다. 헌데 9월6일 퇴원할 때에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숙소인 동두천까지 이동하는 승용차 운전이었다. 당시에 가족이 운전이 서툴러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여 비록 다리에 힘은 없지만 그동안 부지런히 재활치료한 덕분에 필자가 과감하게 운전을 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차량 운전대를 못 잡을 줄 알았는데 안전하게 복귀하여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본인이 없으면 큰 이변이 생길 것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4개월 보름만의 퇴원 후 동두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변은 전혀 변화가 없이 늘상의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교통사고 등의 충격 속에서 변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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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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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이었던 정일화 박사는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와 포병 장교인 테리 중위의 리더십 고찰과 죽미령에 최초 투입한 스미스부대와 미24사단의 고군분투를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정 박사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2차대전의 영웅이었지만 미 현장체크단이 경질까지 검토했던 워커 장군의 오판과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이런 약점들을 미 제8군의 예비로서 낙동강전선의 소방대 역할을 한 제27연대에 의해 극복했다고 분석했다. 아이젠하워의 부관이었던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한 27연대는 7월말 옥천, 왜관지역에서 방어를 하다가 8월2일 마산 진동리, 6일에는 창원, 12일에는 영산, 14일에 경산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북한군에 타격을 주었고, 18일에는 다부동에 급파되어 백선엽 장군을 지원하며 최초 탱크전에서 압승한 뒤에 다시 25일 마산으로 복귀했다가 9월1일 함안 전투에 가담하는 등 전승의 신화를 달성한 낙동강방어선의 소방대로 탄생했다. 정 박사는 특히 다부동 전선이 안정화 된 요소중에 하나는 당시에 귀순한 정봉욱 중좌(육군훈련소장 역임, 소장 예편)의 북한군 포대 및 탄약고 위치 정보 제공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27연대가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효과적으로 표적을 제압하는 긴밀한 화력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포병 관측장교인 테리 중위 덕택이라며 그의 리더십과 활약을 언급하며 발표를 마쳤다. 토의 시간에는 박정기 회장의 스미스부대에 대한 보훈 활동으로 감동을 주었고 자리를 옮겨 점심을 하면서도 그동안 간과되었지만 이번 포럼으로 재조명된 마산전투와 국가존립을 위한 안보의 중요성 및 기타 애피소드로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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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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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상)
- 지난 20일 오전 한미안보연구회(COKUSS)는 미27연대를 중심으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안보포럼을 개최했다.[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0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 4층에서 한미안보연구회(COKUSS) 김병관(육사28기) 회장, 박정기(육사24기)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비롯한 안보전문가 및 예비역 장성 등 50여 명이 참석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2023년 3차 안보포럼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6‧25남침전쟁 중에 다부동‧영천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에 가려 소홀하게 평가되었던 낙동강 전선의 마산지구 전투에 대해 미 제27연대의 소방대 역할을 중심으로 한반도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숨겨진 팩트를 발굴해 소개하는 성과가 있었다. 1부 발표를 한 허남성(육사26기) 국방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에서 전개된 6‧25남침전쟁을 4댠계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기록 사진들을 제시하여 감동을 주었다. 허 박사는 전쟁사 전문가답게 “팔로군 출신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6사단이 개전초기 신속하게 전주-광주-목포-보성을 점령하며 압박을 가해 워커장군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는데, 이에 미8군은 미 25사단을 마산 정면으로 36시간 동안 240Km 긴급히 이동시켜 44Km밖에 남지않은 부산을 향한 우회로를 차단 방어했다”고 말했다. 이때 Kean특수임무부대와 미 27연대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북한군 7사단까지 포함해 추가로 전개한 9월 공세를 막아냄으로 대한민국 존망의 갈림길인 부산교두보를 지켜냈다며 이 마산지구 전투로 전승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 대반격의 불꽃을 피웠다고 강조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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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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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5]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지 4개월즈음 지나갈 무렵 오랜만에 희소식이 전달되었다. 무적태풍부대의 작전참모부에서 몇 년을 함께 고생했던 작전장교 정승범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에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100년만의 폭염이 날라가는 시원한 소식이었고, 그동안 필자를 믿고 열심히 근무한 부하 장교의 좋은 결실에 비록 병원이었지만 마치 내가 진급한 것처럼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더불어 필자의 회복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마치 쇠로 온몸을 감싼 로보캅처럼 배앞에 불쑥 튀어나와 불편하게 만들던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제거했다. 이제는 분쇄골절된 좌측 대퇴부의 골수에 박혀있는 골수정 만이 몸속에 남게 되었다. 가늘어진 다리에 근육을 붙이는 재활치료를 위해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고 덕분에 김일 선수를 만나 눈인사를 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다. 드디어 이동식 보조기에서 목발로 교체하면서 운동량도 늘었는데 그때의 가장 고충이 목발을 짚기 위해 겨드랑이에 끼우고 계속 걷자 겨드랑이의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록 목발을 짚고 다녀도 이동이 가능하자, 그동안 교통사고로 병실에서 함께 지냈지만 거동이 가능해 외출까지 다녀왔던 김종완 동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간호사에게 허락을 받고 김 동기와 가족과 함께 입원 후 처음으로 병원 밖의 자그마한 일반 식당에 들어가 칼국수로 식사를 했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맛이었다. 외식을 제안한 동기도 고마웠고 매일 간병과 동시에 틈틈이 성당에서 필자를 위해 기도하며, 교통사고로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위기에서 필자를 건져준 가족이 진심으로 고마웠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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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5]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