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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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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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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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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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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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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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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0]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2500년전에 20장 1만1,500글자로 작성된 고전이 지금은 중국을 넘어 전 세계인의 교양 필독서가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인간들의 표상을 정위치에서 잡아주는 것이 논어(論語)의 위력이고 존재 이유이다. 논어에서 107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단어가 군자(君子)이다. 여기서 군자라 함은 삶의 표본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인간상을 말한다. 의지만 있으면 온갖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며 새로운 가치와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학습자이다. 따라서 이 시대가 원하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추구해야 할 유형별 군자의 인간상을 정리했는데 그중에 두 번째는, 동지형(同志型) 인간으로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하면, 불역락호(不亦樂乎)아라’했다. 뜻을 같이하고 지향점이 같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쁨이 아니겠는가? 즉,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행간의 숨은 의미이다. 필자의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에는 생도대가 지금과 달리 16개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매년 소속 중대가 바뀌었다. 하지만 3, 4학년은 같은 중대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2년간 함께한 졸업 당시 중대의 동기들은 타 중대의 동기들보다도 유난히 돈독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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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0]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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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1968년 박정희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경제개발 계획을 밝히면서 경제개발 계획은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민들의 의식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은 당시 문교부장관 권오범에게 “국민교육의 장기적이고 건전한 방향의 정립과 시민생활의 건전한 윤리 및 가치관의 확립”을 위해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 망라하여 교육장전(敎育章典)을 제정할 것을 지시했다. 문교부는 헌장 제정을 위해 26명의 헌정 기초위원과 48명의 심의위원을 위촉하여 3회에 걸친 초안작성 준비회를 개최하였고, 7월엔 제 1차 심의위원회를 마련한 뒤, 박종홍, 이인기, 우형진 등이 헌장 초안을 다듬었다. 이후 국무총리가 주관한 소위원회를 4회, 대통령이 직접 주관한 전체회의를 4회 개최한 후, 11월 정기 국회 본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드디어 1968년 1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교육헌정을 선포했다. 이 헌장의 제정 소식을 들은 대만의 총통 장제스는 “기선을 빼앗겼다”고 부러워하며 김 신 주한국대사에게 자료수집을 당부했으며, 독일의 볼노브도 “독일 청년의 정신적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헌장 제정에 고심하던차”라면서 찬사를 보내왔다. 국민교육헌장은 민족의 주체성 확립,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창조, 개인과 국가의 일체감을 통한 복지국가 확립을 내용으로 해 총 393자로 쓰여졌다. 첫 문단은 우리 국민이 한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높은 긍지와 그에 따른 투철한 신명의식을 밝혔다. 가운데 문단은 국민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개인윤리, 사회윤리, 국민윤리 순으로 국민 개개인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규범과 덕목을 명시했다. 마지막 문단에서는 반공민주주의정신으로 조국통일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철학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 내용은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국민교육에 초점을 맞춰 자주독립과 창조와 개혁, 협동정신, 애국애족, 통일 등 우리나라 교육의 핵심 요소를 기본이념 속에 강조해 왔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이후 정부에서는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그 실현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교육헌장은 국가 및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반드시 봉독하게 됐다. 또한 모든 국정교과서의 첫 장에는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게재했으며, 각 급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는 무조건 암기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한 때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닐때였으니 헌장의 전문을 모두 외운 것은 당연지사이다.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고 뒤이어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국민교육헌장은 새마을 교육의 정신적인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국민교육헌장의 이념은 곧 새마을 정신의 밑바탕이 됐다. 즉 새마을 교육은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아래 국민들에게 새마을 정신을 함양시킴으로써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실천적 인간을 육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마을 운동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면 국민교육헌장은 새마을 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는 데 있어 정신적인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포일은 1973년 3월30일에 대통령령으로 정부주관 기념일이 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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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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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2025년 달력으로 6·25남침전쟁을 상기시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사실 요즈음 많은 신세대 시민들과 어린이들은 74년 전에 발발한 6‧25남침전쟁을 학교 및 가정교육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아직까지 일부 생존한 90세가 넘어가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들만이 그때를 회상하며 몸서리 칠뿐이다. 로마의 전략가 베제티우스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이는 전쟁을 원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굴복하기보다는 전쟁에 맞서 방어하라는 의미이다. 굴종은 평화가 아니다. 전쟁은 평화주의자를 노린다. 강력한 군사대비 없이 입으로만 평화를 떠드는 사람은 무책임하다. 전쟁이 발발하여 침략을 당하면 평화고 뭐고 생존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처절하고 비참하게 피 흘리는 전쟁보다는 비겁한 평화가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따라서 남녀노소 모든 국민, 특히 미래의 희망인 어린이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남침전쟁 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전쟁에 대비하여 평화를 지키려는 국민적 안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래야 비참하게 피 흘리는 전쟁 발발의 비극을 사전에 막아내 평화를 지키며 행복한 나라를 영위할 수 있다. ■ 백선엽기념재단의 2025년 달력은 국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와 촉매제가 될 것으로 확신 지난 정권에서 육군사관학교에서 조차도 전쟁사 교육이 약화되어 6‧25남침전쟁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바닥까지 떨어지며 안보의식이 희박한 안타까운 상태가 됐다. 하지만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북한군의 불법 남침부터 낙동강 방어작전, 유엔군 북진, 중공군 불법 개입 및 휴전에 이르는 6‧25남침전쟁 경과와 백선엽 장군의 애민 사상에 따른 활동과 육군재건 및 현대화를 위한 노력 등을 해당 월별로 표현한 2025년 달력을 제작하여 국민 안보교육에 기여했다. 지난 14일 전쟁기념관 429호실(생전에 백선엽 장군이 사용했던 곳)에 위치한 기념재단 사무실에서 이사회가 열렸다. 김관진 이사장(전 국가안보실장)과 백남희 여사(백선엽 장군의 장녀), 방기봉 회장 등 이사회에 참석자들은 팽준호 사무총장의 2025년 달력 설명을 듣고, 한결같이 6‧25남침전쟁에 대한 충분한 교육자료가 될 수 있는 잘 제작된 교육자료 달력이라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때마침 방위산업공제조합에서 조합 홍보용으로 대량 구매를 결정했고, 방기봉 회장의 협조로 어린이들 교육을 위해 색동회와 한화그룹의 방위산업체에서도 홍보 및 국민 교육용으로 구매해 분배할 것을 검토중이다. 백선엽기념재단의 2025년 달력은 편협된 측면에서 친일논란에 소용돌이에 잘못 전해진 6‧25남침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잊혀져가는 6‧25남침전쟁의 동족상잔 비극이 이 나라에서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국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와 촉매제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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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2025년 달력으로 6·25남침전쟁을 상기시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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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2025년 달력으로 6‧25남침전쟁을 상기시켜(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불법 기습남침이 있자, 그해 4월22일 취임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문산축선에서 3일간 방어하다가 철수하여 수원, 충북 음성, 경북 함창 일대를 거치며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했고, 결국에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인 다부동지역까지 이동했다. 8월부터 치루어진 한반도 방어의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 격멸하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38도선을 넘어 10월19일 대동강교 동측에 최초 진입하며 평양 탈환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이미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불법 진입한 중공군이 10월26일 운산전투에서 유엔군과 최초 교전한 이후 인해전술에 밀려 남북통일할 수 있었던 북진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듬해 1월까지 수원 ~원주~삼척에 이르는 선까지 축차적으로 철수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중공군 9병단 7개 사단 12만명의 포위섬멸전에 맞서 미 10군단 1해병사단 약 3만명이 1만7천여명의 희생을 감수하며 치룬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4만8천여명을 사살하며 포위망을 돌파했고, 중공군의 공격을 지연시킨 덕분에 약 20만명이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피난할 수 있는 흥남철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는 사회적 환경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6‧25남침전쟁은 많은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이런 이유중에 하나는 문재인 정부시절에 국민 안보교육이 위축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쟁사 교육이 선택 과목으로 전환되어 졸업생 30% 정도만이 6‧25남침전쟁사 교육을 받는 상태까지 되자 당시의 신원식(현 국가안보실장) 등 여러 국회의원들과 많은 안보전문가들의 맹렬한 비판과 질타가 이어졌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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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백선엽장군기념재단, 2025년 달력으로 6‧25남침전쟁을 상기시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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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7]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대대장 근무시에 담당했던 충청북도 청원군은 현재 청주시와 통합되었고 청원대대는 해체되었지만 당시에 필자의 청원대대는 14개 면대와 1개 기동대 그리고 8개 직장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때에는 각 면사무소의 지파출소에 설치된 예비군 무기고에 해당 면대의 상근예비역들이 24시간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고 생활 및 근무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물론 상급부대는 대대장이 지파출소에 설치된 예비군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규정하거나 특별히 지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전방의 GOP철책에서 근무하는 대대장들은 매일 야간순찰을 다니는 것처럼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대대장 취임 후에 야간 지파출소 무기고 순찰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계속 감행했었다. 그러던 중 폭설이 내리며 혹한이 기습했던 겨울 어느날,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3시에 관사앞에서 대기하던 짚차에 올라 지역 면대 지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야간순찰을 위해 출발했다. 운전병의 빙판길 운행도 걱정이었지만 혹한 속에 24시간 경계근무에 임하는 상근예비역들의 열악한 환경과 동계 초병근무에 동상이나 난방에 대한 대비는 잘되어 있는지를 일일이 확인해서 다음날 지역 면대장에게 시정 지시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병원관리였다. 이렇게 매번 순찰한 덕분에 낭성면대의 예비군 무기고를 새롭게 신축하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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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7]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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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6]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동계 혹한기훈련이 끝나고 3월로 접어들자 군단장이 연대장들을 비교 평가하는 연대전투단 훈련이 바로 다가왔다. 당시 연대장의 임기중 가장 중요한 훈련이기 때문에 필자는 부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그동안 소개장, 중대장 등의 군생활에서 네 번에 걸친 연대전투단 훈련 경험을 통해 쌓아온 노하우와 진수를 모두 보일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볼 각오를 다졌다. 훈련에 임하는 신현정 연대장의 작전 마인드는 대단히 탁월했다. 부여된 상황에 대한 적시적인 작전 지침은 명쾌했고 단지 예하 부대들이 그 지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실천하여 구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지만 대대원들은 이미 지난 전투지휘검열시에 후방지역 작전 훈련(‘[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225)] 전투지휘검열도 끝나자 더 바빠진 청원대대(하)’ 참조)을 통해 숙달된 상태라 별로 어렵지 않았고, 훈련 결과는 또 대성공이었다. 특히 이번 훈련을 통해서 손자병법의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 뜻과 의미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미 군단장과 군단 참모들은 신현정 연대장의 팬이었다. 게다가 평가의 주무를 맡은 군단 작전참모는 필자의 교통사고가 아니였으면 무적태풍부대 군자산 대대장으로 취임해 직속상관인 연대장으로 모셨을 유대우 대령(육사30기)이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90~192)] 잔인한 4월도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참조) 무적태풍부대의 군자산에서 상하급자 관계로 맺을 뻔했던 인연 때문에 유 대령이 필자를 아껴주는 모습이 확연하게 표출되는 연대전투단 훈련이었다. 물론 호국충절의 고장답게 연대 책임지역내의 괴산·음성·진천군수와 청주시장이 훈련을 격려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그 중에 청원군수의 위문이 가장 눈에 띄었다. 또한 정답도 비밀도 공짜도 없다는 말처럼 성공적인 연대전투단 훈련종료 후 필자는 훈련 유공으로 군단장 표창을 받았고, 더불어 이번 호국충절의 고향에서 치룬 동계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 훈련을 통해 전임 사단장에 이어 신임 사단장에게도 확실하게 신임을 받는 계기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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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6]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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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4]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조영호 사단장(학군7기)은 예비군 교육훈련과 정신교육강화 분야의 동시 시범 때 만난지 2주일도 안되었지만, 동계 혹한기훈련을 잘하고 있는지 현장지도를 하기 위해 00비행장 주변에 배치된 대대의 숙영지와 훈련장을 또 방문했다. 사실 대부분의 병력이 전시에 동원자원으로 구성된 향토사단은 임무 백브리핑이 매우 중요하다. 현역 병사들이 자신의 개인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동원되는 소대장 등 간부에게 전투 임무를 전달 및 교육시키는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브리핑’이 반드시 필요한 전투준비이기도 하다. 훈련장을 방문한 사단장에게 필자가 훈련 진행 전반을 보고한 뒤에 동원되는 소대장에게 백브리핑을 하는 소총병이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브리핑’을 했고, 이어 비행장 외곽을 방어하는 현역 중대장이 자신의 임무를 발표했다. 사단장 앞에서 긴장할 것으로 예상되어 연습을 많이 시켰으나 병 1인 다역화로 소대장에게 전투 임무를 전달 및 교육시키는 역할을 할 병사는 소대 방어지역의 배치와 전투준비 그리고 우발상황 발생시 대처하는 요령까지 자신있게 또박또박 발표를 하자 사단장은 놀란 듯 박수까지 치며 잘한다고 칭찬을 했다. 오히려 중대장이 더 긴장하여 더듬거렸으나 바로 전에 탁월하게 발표한 병사의 백브리핑에 감탄의 여운이 남아있던 사단장은 중대장에게도 칭찬을 가미했다. 그때 변종석 청원군수가 상황실 텐트로 불쑥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단장의 훈련장 현장지도 시간에 맞추어 바쁜 일정의 군수가 사단장을 영접하기 위해 훈련장을 또 찾은 것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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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4]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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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3]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둔지에서 비상을 발령해 출동준비태세 훈련을 하고, 각 개인을 군장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30km행군으로 이동하여 숙영지를 편성하고 첫날밤을 보냈다. 이튿날, 2월 초이지만 깜깜한 새벽 기온은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져 혹한 속에 텐트에서 취침하는 대대원들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매우 걱정되어 상황실 텐트에서 현장확인차 밖으로 나갈려고 일어섰다. 바로 그때, 불쑥 텐트 출입구 거적을 젖히며 변종석 청원군수가 들어왔다. 변 군수는 대뜸, “대대장님, 민관군 통합작전을 강조하면서, 대대가 이 혹한에 훈련하는 것을 왜 군청에 알리지 않았습니까?”하며 힐책하였다. 그리고는 수행자에게 “여기 담당 면장이 누구냐?”며 “면장은 자기 지역에 우리 대대가 훈련하는 것도 파악 못하고 뭐하는 것이냐?”고 정색을 하며 야단쳤다. 텐트 밖은 새벽별이 초롱초롱한 아직도 어두운 밤인데 갑자기 떨어진 기온에 책임지역 농가들의 피해가 없는지 현장 확인차 다니다가 부대 훈련 간판이 있는 것을 보고 차를 돌려 대대 훈련장으로 기습 방문한 변종석 군수의 목민관적인 자세와 군을 사랑하는 마음에 존경심이 깊어졌다. 필자는 성토하는 변 군수를 간신히 달래며 감사함을 표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변 군수가 훈련장을 떠나고 얼마 안되어 해당 면장이 위문품으로 떡국을 끓여와 중식에는 혹한에 떨던 대대원들이 포식을 했고, “사전에 알려주시지..., 군수님에게 야단을 맞았다”며 넉두리 했다. 역시 호국충절의 고향다운 청원군임을 확인했다. 그날 밤에도 사진처럼 변종석 청원군수와 군의회 의장이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가져와 야전 현장에서 전달식을 했다. 청원군은 과거 임진왜란 때 부모산 및 상당산성 전투와 일제 강점기 의병대장 한봉구 활약 등 애국심이 불타는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번 동계 혹한기 훈련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됐고, 변 군수의 기습적인 이벤트에 대대원 전체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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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3]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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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2]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신년 초 대대를 들썩거리게 만들며 바쁘게 준비하여 사단장을 비롯한 300여명에게 예비군 교육훈련과 정신교육강화 분야의 동시 시범을 마치자 늦겨울 혹한 속에 동계 혹한기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년전 대대장 취임식에서도 혹한과 폭설속에 행사를 치루고 격려차 참석한 하객들이 빙판길을 안전하게 이동해서 무사히 복귀했는지가 걱정이 되어 일일이 전화로 확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부하들은 상관의 신뢰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그 결과는 하루아침에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으로 치룬 연초 시범 덕분인지 혹한기 훈련은 사전 준비부터 숙달된 참모들이 철저하게 준비하여 혹한 속에서도 내실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사시에 대대의 주임무는 비행장 방어이기 때문에 전면 방어가 가능하도록 각 중대의 진지는 울타리를 연하여 구축되었다. 하지만 병력 통제와 원활한 훈련 진행을 위해 한곳을 정하여 대대 전체가 모여 숙영하고 있었다. 민가가 많은 향토사단 후방지역 특성을 고려해 과거 전방 GOP부대 근무시 훈련처럼 분침호까지 구축하는 무리였고, 대신에 텐트안의 보온을 위해 핫패드를 많이 준비했다. 특히 비행장을 주타격 목표로 저공침투하는 북한 저격여단을 격퇴하기 위해 야간에 낙하하는 적들을 공중에서 격멸하도록 탐조등을 중대별로 준비해 훈련에 임했으나 전시에 대대전체가 동원되어 실전에 임할 때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필자가 대대장 취임후 바로 시행했던 군사령부 주관 공군기지방어 전술토의에서 대통령 훈령까지 변경시키도록 획기적으로 발전 방안을 제시해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하지만 야간에 침투하는 적들을 격퇴하기 위한 탐조등 구입 예산이 턱었이 부족한 상태였고, 군청에서 지원이 가능한지 은근히 부탁도 했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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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2]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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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1] 눈물의 사단선봉대대와 정비공의 의미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조영호 사단장은 예비군 교육훈련과 정신교육강화 분야의 동시 시범을 마치며 참관자들 앞에서 시범 준비를 한 청원대대를 극찬했다. 동시에 2개의 시범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사단에 건의하자는 의견을 강하게 필자에게 어필했던 대대 참모들은 성공적으로 행사가 끝나자 희열을 느끼며 보람과 성취감을 만끽했다. 그리고 대대원을 비롯한 사단의 전부대에 청원대대가 확고부동한 최고 수준의 선봉부대임을 재확인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사단장이 복귀하자 신현정 연대장은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시범의 대성공 때문에 인접 연대장이 농담처럼 “청원대대장을 업어주라....ㅋ”라는 말을 하였다며, 경쟁의식 속에 몹시도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느꼈다고 즐거운 불평도 했다. 헌데 그 불평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움찔하며 긴장했다. 인접 연대장의 농담이 어떻게 변화되어 필자에게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긴 재활치료의 아픔을 이겨내며 성공해도 불안한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인가? 확실히 정답은 없었지만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은 진리였다. 고(故) 이완목 부대대장과 참모들 그리고 23명의 예비군 중대장과 현역 대대원들이 긴 재활치료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쩔뚝거리며 노력하는 부족한 DJ대대장을 믿고 따라와준 열성에 감사할 뿐이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2개 분야의 동시 시범은 사단의 많은 인원이 분야별 시범을 위해 반복해서 타지역으로 이동해서 소집하는 노력을 감소시켰고, 대대원들의 불평을 감안해서 배려해준 해당 참모의 토의 진행으로 동시에 사단의 지침을 명확하게 전파하는 기회도 되었다. 세월은 쏜 살같이 날아간다. 시범이 끝나자 벌써 대대장 취임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대대장 근무도 ‘정비공’ 건배사처럼 정답도 비밀도 공짜도 없는 이 세상에서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으로 자랑스럽고 충성스러운 대대원들과 함께 또다시 헤쳐나갈 것이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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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1] 눈물의 사단선봉대대와 정비공의 의미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