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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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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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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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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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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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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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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보훈부, 대국민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 전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보훈부 승격에 따른 박민식 장관 취임식과 현판식 및 제1회 국가보훈위원회가 세종시 보훈부 청사에서 지난 6월5일 개최됐다. 이어 국가보훈부는 19일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올해까지도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 전사자 12만1879명을 기억하는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 태극기’ 대국민 배지 달기 캠페인의 사전신청을 20일부터 전개한다”고 밝혔다. 끝까지 ‘기억’하는 국민, 끝까지 ‘책임’지는 나라 부제의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 태극기’배지는 6·25 참전 전사자를 모신 함을 도포한 태극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호국영웅에 대한 국가의 역할·책임을 표명하고, 동시에 국민과의 굳건한 약속을 다짐하는 보훈의 참 의미를 담고 있다. 호국영웅을 상징하는 태극기 배지는 고유번호가 부여돼 총 12만1879개가 제작되었으며 20일부터 NH농협은행의 NH올원뱅크 앱과 GS리테일 우리동네GS 앱을 통해 선착순 접수해 무료로 증정한다. NH농협은행은 20일 오전 9시부터 앱을 통해 신청인이 수령을 원하는 영업점을 직접 지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GS리테일은 같은 날 오후 2시부터 배지 수령을 원하는 점포를 지정·신청하거나 23일부터 전국 GS25 거점 점포를 방문해 현장 접수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호국영웅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정부가 이들을 끝까지 찾겠다는 다짐과 각오로 이번 캠페인을 준비했다”며 “국가를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웅 한 분 한 분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우리 사회에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많은 분이 캠페인에 동참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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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보훈부, 대국민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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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1)]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훗날 필자의 교통사고 뒤처리를 위해 애를 썼던 육사 동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커브길 중앙선을 넘어 진해로 내려가던 우리들이 탄 티코승용차를 정면충돌한 차는 다행히도 대형이 아닌 엑셀이라는 소형차였다. 운전을 했던 필자는 충돌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찌그러진 차속에 끼여 갖혀있었고, 조수석의 이재준 동기는 갈비에 손상을 입었으나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사고발생 후 급하게 달려온 레카차와 구급차는 차속에 갇혀있는 필자를 문짝을 띁어내고야 빼어낼 수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재준 동기는 사고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던 경찰에게 뒷좌석에 또 한명이 타고 있었다고 전했고, 충돌의 충격으로 뒷좌석 차문이 열리면서 우측 팔달천변으로 떨어졌던 김종완 동기를 찾았는데 그는 허리와 갈비 등에 손상을 입었으나 강한 정신력으로 팔달천변 가드레일 밑으로 기어나오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날 새벽 군부대의 헌병속보에는 진해 육군대학 대대장반 교육중인 중령진급자 예정자 3명이 대구 팔달천변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1명은 뇌사, 2명 중상이라는 내용으로 전파됐으며, 뇌사상태는 필자를 지칭하는 상황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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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1)]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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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0)]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잠시 쉬었던 충북 영동 금강 휴게소를 벗어나자 고속도로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휴일을 마무리하는 심야이기 때문인지 얼마되지 않는 차량의 불빛만이 서로 교차하며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이재준 동기는 운전하는 필자가 장거리 운전으로 졸까봐 계속 말을 걸어오며 도로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뒷좌석의 김종완 동기는 그때까지도 술이 덜 깨어 골아떨어져 있었다. 사실 동두천에서 진해 육군대학까지는 지도상으로 4시간 51분이 소요되었으나 중간에 휴식도 취하며 이동하면 5시간이 훌쩍 넘어버린다. 게다가 경차인 티코는 옆으로 대형차가 지나가면 따라서 요동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차가 아담하게 이쁘고 연비가 좋아 운영비도 적게 들어 당시에는 많이 선호했다. 어느덧 대구로 접어들었는데 운전을 하던 필자는 구마고속도로 교차로에서 마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쳐버렸다.할 수 없이 북대구 톨게이트로 들어가 팔달천변 국도를 타고 서대구 IC에서 구마고속도로로 진입해서 진해로 가야했다. 옆에 탔던 동기생의 핀잔을 들으며 톨게이트를 통과해 팔달천변 도로로 들어갔는데 심야라서 그런지 왕복 차량이 거의 없었다. 팔달천변 도로는 1방향 1차선으로서 왕복 교통이 분리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2방향 도로였고, 우측 차단 가드레일 밑의 하천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좌로굽은 도로가 나오자 상대편에서 다가오는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헌데 앞에서 다가오던 차량불빛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때 필자는 옆에 있던 동기에게 “재준아, 저 앞에 오는 차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꽝...!’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춰섰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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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0)]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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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70주년 맞이하여 미 핵 잠수함 미시간함 부산기지 입항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국 해군의 오하이오급 핵추진 순항유도탄 잠수함(SSGN) 미시건함이 지난 6월16일 금요일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하였다. 이번 미국 핵추진 순항유도탄 잠수함(SSGN) 방한은 2017년 10월 이후 6년여 만에 이루어졌으며, 이는 연이어 도발을 자행하는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시건함은 오하이오급 핵추진 탄도유도탄 잠수함(SSBN)으로 지난 1982년에 취역하였으며, 2007년에 핵추진 순항유도탄 잠수함(SSGN)으로 개조된 4척의 핵추진 잠수함 중 하나이다. 동 잠수함은 특수 통신체계와 은밀기동능력을 기반으로 가공할 수준의 기습타격능력과 특수전작전능력을 제공하는 미국 해군의 대표적인 전력이다. 미시건함은 길이 170.6m, 너비 12.8m, 수중배수량 18,000톤급 이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 중 하나이며, 사정거리 2,500km에 달하는 150여발의 토마호크 미사일로 무장 가능하며, 특수전요원을 편승하여 특수작전임무도 수행 가능하다. 한미 해군은 오는 22일까지 이어지는 미국 핵추진 순항유도탄 잠수함(SSGN) 방한을 계기로 연합 특수전훈련을 전개한다. 이를 토대로 고도화하는 북한 위협에 대응하는 특수전 수행능력과 상호운용성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친선교류 활동을 병행할 예정이다. 해군작전사령관 김명수 중장은 “미국 핵추진 순항유도탄 잠수함(SSGN)의 방한은 금년 4월 워싱턴선언에 담긴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제고한다는 합의사항을 실질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것이며, ‘힘에 의한 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한미동맹의 압도적인 능력과 태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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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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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70주년 맞이하여 미 핵 잠수함 미시간함 부산기지 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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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9)]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동두천 아파트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저물어 깊은 밤이 되었고,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유치원생 아들 성화에 못 이겨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가 얼굴까지 뛰어오르며 반겨주었다. 그 소리에 모두 일어나 아직 마지막 주가 남았지만 3개월간의 교육에 수고 많았다며 환영했다.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에는 카풀제 동기들은 월요일 수업을 위해 다시 진해로 내려가야 한다. 헌데 그동안 필자를 많이 아껴주고 믿어주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과 새로 부임하는 박기준 (학군5기) 장군의 사단장 이취임식이 다음날인 월요일에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임식을 앞둔 사단장의 일요일 일정이 너무 많아 인사도 못하고 저녁해가 저물 즈음에 그냥 진해로 출발했다. 이번 이동은 이재준 동기의 티코 승용차를 이용할 차례였는데 김종완 동기는 일요일 낮에 처부 요원들과 회식을 하여 음주 상태라 필자와 차주만이 운전을 도맡아야 했다. 석양 노을이 물들 때에 출발한 차는 충북 영동 금강 휴게소에서 잠시 멈추며 휴식을 취했고, 장거리를 달려왔던 차주와 필자는 운전을 교대했다. 김종완 동기는 과음한 탓에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었다. 한때 세상에서 제일 빠른 차는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던 벤츠였고 그다음에 빠른 차는 티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티코가 작고 너무 가벼워 껌으로 벤츠에 붙여 놓으면 그대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운전대를 잡아보니 좌우 폭도 좁고 마치 종이로 만든 모형 장난감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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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9)]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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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8)]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세월은 가속도가 있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한다. 사단 작전보좌관으로 3년 근무하는 동안 업무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찾은 여유있는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영국 시인 T.S. 엘리엇은 시집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그의 시처럼 호된 겨울동안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되자 12주간의 교육을 마무리하는 종합시험이 있었다. 6년전, 소령으로 진급하여 진해의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했을 때에는 교육 성적이 차후 진급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생들은 불을 켜고 1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중령으로 진급해서 받는 대대장반 교육은 차후 보직과 근무에 필요한 내용이었지만 대령 진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는 않아 모두들 여유있고 편하게 교육에 임할 수 있었다. 마지막 주의 종합시험은 3개월간 교육의 결실이기 때문에 그동안 배운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준비했다. 더불어 교육수료 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면 상호 협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타병과 장교들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에 저녁 술자리의 만남도 소중했다. 그래도 마지막 주말은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카풀제 맴버인 김종완과 이재준 동기는 함께 진해의 여유있던 추억을 회상하며 동두천으로 향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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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8)]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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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정년 45→50세로 연장되어 장교 복무의욕 고취
- 소령 계급장(해군 수장과 견장)과 필자의 소령시절 모습[사진=김희철]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부는 “현재 45세인 소령의 정년을 단계적으로 50세까지 연장하는 '군인사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이날 국무회의를 통과,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고 13일 밝혔다. 군인의 정년 연장은 지난 1993년 이후 31년 만이다. 소령 정년은 다른 계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아 정년연장의 필요성이 제기돼 연장한다고 국방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기존 소령의 정년은 45세로 중령으로 진급하지 못한 소령은 자녀양육 등을 위한 생활비가 최대로 지출되는 40대 중반의 시기에 전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법 개정에 따라 소령의 정년이 연장돼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일부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아울러 “소령 정년연장에 따라 20년 이상 군에서 복무한 영관급 장교의 전문지식과 경험을 장기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개정된 군인사법에 따라 장교의 안정적인 인력 운영을 위해 소령 정년을 단계적으로 연장할 예정이다. 우선 2024년도 정년에 도달하는 소령부터 법 시행에 따라 정년이 일부 연장된다. 단계적 정년연장 등 세부사항은 대통령령을 통해 구체화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소령의 정년 연장 과정에서 우려되는 대위에서 소령으로의 진급 공석 문제는 진급기회 추가부여 등 인력운영을 통해 해결할 방침이다. 소령 장기근속자 증가에 따른 인사관리는 법 개정에 맞춰 세부 시행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향후 소령 정년연장이 실질적으로 장교의 복무 의욕을 고취함은 물론 부대 전투력 향상에 기여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개정·보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참고로 국회는 지난 5월25일 본회의를 열어 이런 내용을 담은 군인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직업군인의 직업 안정성을 높이고, 이를 통해 초급 간부 지원율도 높이기 위해 소령 계급정년 연장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추진됐다. 현재 소령 정원은 약 1만2천명으로 알려졌고 이와 함께 이 개정안에는 장교 및 부사관의 임용 최고 연령을 각각 2년씩 연장하는 내용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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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정년 45→50세로 연장되어 장교 복무의욕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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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7)]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휘기법을 전수받기 위해 찾아간 청송 대대와 이어진 주왕산 관광으로 힐링이 된 우리는 다음날 포항 인접 청하에 위치한 정수완 동기의 본가를 방문했다. 정 동기 부모님께 인사드리자 대구의 명품 사과를 한보따리 주셨다. 복귀길에는 영천에 근무하던 조춘원 동기의 집도 들렸다. 의미있고 반가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대대장반 교육 기간의 마지막 달인 4월이 다가왔다. 이때 진해는 벚꽃이 만개한 군항제로 많은 시민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된다. 육군대학 뒤의 장복산도 봄꽃과 더불어 적절한 트레킹 코스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필자도 수시로 산에 오르며 그동안 소령급 실무장교로 정신없이 시달리며 약해진 체력을 보다 강화시켰다. 교육 막바지에 이르러 필자는 타지역에 근무하면서 일부러 찾아올 필요없이 효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어머니를 진해로 초청했다. 공부하는 아들에게 방해될까봐 부담주기 싫다며 안오시겠다는 어머니께 강요하여 결국 먼길을 찾아오셨는데, 모시고 부곡하와이, 진영 갈비집 그리고 진해 군항제를 두루 관광하자 너무도 좋아하셨다. 중령으로 진급하면 시행되는 대대장반 교육은 군사지식도 향상시키기 위한 수업도 중요하지만 인접 지역에 위치한 선배 대대장들을 만나 지휘기법을 벤치마킹하며 선후배 관계를 돈독히 하는 기회이자,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들과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게다가 교육 시기가 좋아 부모님까지 모시고 군항제 등을 관광하며 효도까지도 할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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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7)]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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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6)]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주중 수업을 끝내고 토요일이 되면 동두천으로 카풀제로 함께 복귀했지만 이번에도 포기하고 지휘기법을 전수받기 위해 룸메이트 정수완 동기와 함께 청송 대대를 찾았다. 청송 대대장 차철이(육사32기) 선배는 진급이 최우선적으로 보장되던 수도방위사령부 작전과장으로 근무를 할 때 사조직 관련 사건이 문제화되었고, 그후로 진급심사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며 한직을 전전하다가 결국 향토사단 청송 대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그는 비록 진급이 어려운 향토사단 대대장을 하고 있었지만 지역 방위협의회를 비롯한 기관장 및 주민들과 긴밀한 협조 관계로 민·관·군 통합방위태세를 견고하게 만들었고, 과거 수도권의 핵심 보직에서 근무할 때의 화려함을 잊은 채 격오지 부대의 외로움을 씹으며 나름대로 칼을 갈고 있었다. 차 선배는 고참 대대장으로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소리보다는 오히려 선배로서 모범적이라는 평을 받는 참군인 이었다. 그는 한참 후배들인 당시의 대대장보다 몇배 더 열심히 현장을 확인하고 상급부대의 검열 및 점검시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수검에 임하는 등으로 좋은 결과를 얻는 성과도 있었다. 특히 차 선배는 어린 대대장들보다 연륜이 많다보니 지역 주민들과 소통 및 협조가 너무도 잘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아 수여받은 우수부대 표창들이 사무실 벽을 채우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여전히 여유를 갖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자세로 민·관·군 통합방위태세를 견고하게 만드는 등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우리는 부대 방문을 마치고 주왕산 계곡으로 향했다. 역시 위의 사진과 같이 수려한 계곡과 산의 모습은 감탄사가 절로 터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주왕산 입구 길옆 민속 식당에서 산채비빔밥과 동동주를 곁들일 때는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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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6)]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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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5)]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어느덧 짧은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이 절반을 넘어 한달정도 남겨둘 때인 3월말이 되었다. 교육기간 두달동안 각별하게 가까워진 룸메이트 정수완 동기는 교육종료 후에 다시 만나기가 힘드니 포항과 영덕 사이에 위치한 청하의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곳 인접에는 청송 주왕산이 있고 마침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상관으로 근무했던 차철이 선배가 대대장을 하고 있어 함께 찾아가기로 했다. 해발 721m인 청송 주왕산은 바위, 폭포, 계곡 등의 산세가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아름다운 절경이어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되었다. 중생대의 마지막 지질 시대인 백악기에 주왕산 일대는 거대한 호수였다. 약 7천만년전 이 호수의 퇴적암층을 뚫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이 최소 9차례 이상 있었는데,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응집하면서 거대한 암벽이 형성됐고 이후 침식과 풍화를 거쳐 오늘날의 수려한 모습이 되었다. '주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석병(주왕)산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했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이했다고도 하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외에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제1폭포에 있는 급수대의 안내판에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고 적혀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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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5)] 잊혀져가는 추억의 진해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교육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