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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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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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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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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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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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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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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2)마타크 수상과 군종 목사의 용기 있는 죽음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75년 4월 12일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가 마타크 수상에게 헬기를 보내 국외로 탈출할 것을 권유했을 때 그는 유언장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가 나에게 보여 준 관심과 자유세계로 탈출시켜 주겠다는 제의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난 비겁한 방법으로 조국을 떠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귀하는 물론 귀하의 위대한 조국인 미국이 이런 고통을 겪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우리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러나 내가 당신들 미국을 믿은 단 한 가지 과오를 저지른 죄로 내가 사랑하는 이 곳 산하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다. 이 편지는 프놈펜의 멸망이 있은 지 1년 뒤 미국 대사의 서류뭉치 속에서 발견되며 알려졌다. 6.25남침전쟁 때의 일이다. 전쟁발발 직후 미국의 종군 목사가 수원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모두 지체 없이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후퇴를 거절했다. 장병들은 군종목사에게 후퇴를 간청했다. 그는 완강히 거절하며 덧붙여 말했다. “부상병을 두고는 갈 수가 없다.” 장병들은 후퇴했고, 군종목사와 부상병들만이 벌판에 남게 되었다. 적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후퇴한 어느 장교가 능선 위에서 쌍안경으로 살펴보았다. 군종목사는 기도하며 숨져 갔다. 목숨을 바쳐 가며 양심의 명령대로 숨져 간 한 군종장교의 최후. 그 사람인들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 앞서가는 나라. 앞서가는 민족은 비겁한 삶보다 용기 있는 죽음을 택할 줄 안다. 여러분은 비겁한 삶과 용기 있는 죽음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군종장교가 현장에 남아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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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2)마타크 수상과 군종 목사의 용기 있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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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9)]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전쟁중이던 1951년 어느 날, 공군창설 7인 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되었다.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1948년 공군에 입대한 김영환은 전쟁 초기에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후 김 대령은 1951년 9월28일에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했다. 또한 그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기총소사로만 공격하여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도 있으며, 이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휴전후인 1954년 3월5일, 김 공군장군은 10전투비행단 창설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애석하게 순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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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9)]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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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0)]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방사에서 근무를 했던 장교들은 전후방 교류의 인사 방침에 따라 대부분 최전방 야전부대로 차기 보직을 받는다. 작전과 선임장교를 성공리에 마치며 중령으로 진급한 임형빈 선배(육사33기)는 강원도 화천의 7사단에서도 가장 격오지의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곳에 부임한 임 중령은 사단의 선봉 대대장으로 자리를 굳히며 각종 시범 및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소문은 수천리 떨어진 수방사까지 알려졌다. 당시 사무실에는 디자인과 차트 글씨를 잘 쓰는 서기임무를 수행하는 군무원과 타자를 전문으로 하는 여직원도 있었다. 필자가 작전과 업무에 적응하던 어느날, 전방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임 중령이 모처럼의 휴가를 얻어 필동 수방사 근처의 처가에 들렸다가 후배들을 격려하러 사무실을 방문했다. 전 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고 특히 사무실 터줏대감인 차트 담당 군무원과 여직원은 최전방 취임식까지 참석하며 축하를 해주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작전과 전원에게 “모두 필동 00 중국집으로 모여라. 점심은 내가 쏜다”하며 반기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전우애와 선배의 여유를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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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0)]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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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위한 나라사랑(1)]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하)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통일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강하고 튼튼한 안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신문인 Die Zeit의 부국장 겸 정치부장이었던 마티아스 나스는 “독일 통일의 원동력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헬무트 콜의 외교력보다 군사적 승리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은 통일에 있어 국방력의 중요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1990년 10월 독일이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통일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국민들이 서독으로 편입하는 방식의 흡수통일을 이루었다. 그들이 평화적으로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수상 브란트에 의한 동서독 방문과 교류협력을 꾸준하게 강화해 온 것과,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유엔동시 가입과 같은 통일이전에 긴장해소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독이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방력 이외에도 월등히 앞섰던 경제력 등 서독의 막강한 국력이 국제사회에서 서독의 외교력에 힘을 실어주었고 평화적인 통일로 가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두 나라가 냉전 중이던 1985년 통일직전의 1989년까지의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서독은 언제나 동독보다 월등히 강한 국방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동독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통일로 이끌 수 있었다. 결국 확실한 경제적 기반위에 훌륭한 외교가 있었고 그리고 통일과정에서 국가를 튼튼하게 받쳐 줄 수 있는 국방력, 즉 나토(NATO)라는 군사동맹조직의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다. 더불어 예비전력은 한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고 사회에서는 사회의 분위기와 여론을 주도하는 혈기왕성한 계층이다. 예비전력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는 세대로서 이 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통일조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강해야 한다. 우리 예비전력은 국가의 핵심적인 세대로서 국가의 위기시에 분연히 일어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각자 맡은바 역할을 다함으로써 통일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전 국민이 통일의 의지를 불사를 수 있는 촉매역할을 함으로써 젊은이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국방력에 있음을 알아야 하며 힘이 없이는 결코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주변정세와 상황이 변화무쌍하지만 절대적인 대북 힘의 우위전력 유지로 확고한 대북경계와 경각심을 분명히 해야 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강한 국방력과 대비태세만이 북한으로 하여금 모험주의적인 군사도발을 포기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통해 우리의 평화적인 통일 노력에도 응해 올 것이다. 우리민족이 함께 자랑스러운 선진국가로 또 세계의 지도국으로 우뚝 설 그날을 대비하자. 예비전력은 미래통일의 주역!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이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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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위한 나라사랑(1)]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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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9)]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왕족 평원군이 있었는데 그 밑에 왕래하는 손님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때 당시 초나라와 외교 문제가 생겨서 초나라에 동행할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모수라는 사람이 자기도 가겠다(毛遂自薦)고 나섰다. 따라서 주변에 수소문해보니 모수라는 사람은 평원군 손님으로 3년이나 들락날락했으면서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그러자 평원군이 좋은 말로 돌려보내려고 “현명한 사람은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 실력이 절로 드러나기 마련이지요(囊中之錐)”라고 말했다. 모수는 “그러니까 그 주머니에 저를 넣어보세요. 예전부터 넣었다면 송곳이 이미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겁니다”라고 했다. 평원군과 동행한 모수는 초나라와 외교 협상에서 초나라왕을 위협도 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설득에 성공하였다. 결국 평원군과 모수는 초나라의 구원병을 지원받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잘 해결했다는 일화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유래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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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9)]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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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제독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해군의 주역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척의 함정과 항공기 그리고 수백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한 명의 지휘관이 담당한 것 가운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니미츠는 초급 장교 시절에 함정을 잘못 몰아 진흙 벌에 좌초시킨 일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진주만에 잠수함기지를 건설하였으며 그 뒤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군에서 디젤기관의 일인자가 되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최초로 NROTC(해군 학군단)를 창설했으며, 해군대학에서는 항공모함의 효과적인 호위진형인 원형진을 창안하였다. 그 뒤 아시아 함대의 함장과 제1전함부대 사령관을 역임한 뒤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해군본부에서 인사문제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의 자리에 있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전쟁 도중 원수로 진급한 니미츠는 종전 후에 해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전역했으며, 미국의 유엔 대표로 활동하며 카슈미르 문제를 담당하기도 했다 . 은퇴 이후에도 니미츠에게 대학총장, 산업체나 사업계에서도 높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해 왔으나 그 제안들을 거절했다. 아들인 체스터 2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안 하시렵니까?”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세요. 아버지에게 돈이 필요 없다면 자식들에게 주세요.” 나중에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아버지 니미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태평양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군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 만약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상급자로 모셨던 해군사령관이 해군사령관 이외의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해군에 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군인의 명예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니미츠의 삶은 진정 멋있고 위대한 삶이었다. 군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비록 퇴역 후에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는 행동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군에 있을 때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일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례들을 상기해 볼 때 체스터 니미츠의 삶은 너무나도 부럽고 멋있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의 실수로 좌절한 적은 없습니까? 전역(퇴역)후에도 군인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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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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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훨씬 경험 많고 능력있는 미군조차 실패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던 상황을 신출내기 한국 공군이 해내면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작전 성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평양 대폭격 작전,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쾌거로 늘 회자(膾炙)되고 있다. 배우 신영균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빨간 마후라’는 김신 공군대령과 유치곤 공군대위의 활약이 돋보인 이 승호리 철교 폭파적전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2월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가 있었는데 이날의 전과를 설명한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엔 공군의 출격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가 다가와서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유엔 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약 500회(소티)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게 넘겼다. 폭파임무 인계 당시에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었고, 이날 김신 대령에게 반갑게 축하 인사를 던진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승호리 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 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내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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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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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위한 나라사랑(1)]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중)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분단의 비극을 실감하지 못하는 오늘의 세대들에게 통일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조금 멀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기필코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역사를 갖게 되는 것일까? 첫째, 통일은 남북한이 과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을 가티 해온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남북한은 동일언어를 사용하고 동일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동일문화를 이루어 살아왔던 민족이기에 통일은 민족지상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둘째,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격고 있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염원은 통일을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한다. 남북통일은 일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시켜주며 우리의 민족자긍심도 높여주는 최대의 과업이라 하겠다. 셋째, 효율적인 국민경제 달성을 위해서도 통일은 긴요하다. 군사력 대치로 인한 남북간의 경제발전상의 손실은 실도 막대하다. 더욱이 쌍방이 군사력유지와 확충에 쏟고 있는 비용은 국민들로 하여금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민족 모두가 보다 발전된 선진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유와 풍요를 한껏 누리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군사적 대결구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넷째, 한반도의 통일은 냉전대결 구도의 마지막 유물을 청산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은 동북아의 화약고로 불려온 이 지역에서의 안녕은 물론 나아가 세계평화와 안정을 달성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국제무대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구가 약 칠팔천에서 1억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본다. 그 정도의 인구는 되어야 국제무대에서 제법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야 만이 선진국들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현재의 5천여만 인구와 분단된 국토로는 대한민국이 세계무대로의 진출과 세계역사의 견인차 역할에 다소간의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국토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우리의 국력이 대륙으로, 대양으로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분단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여 막강한 국력배양의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슬픔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아픈 역사도 청산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타고난 민족적 우수성을 발판으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한다면 로마가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듯 세계를 리드하는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음편 계속)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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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위한 나라사랑(1)]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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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8)] 필동 도로길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방사의 추가과업이라 볼 수 있는 다음날 새벽에 집단축구가 기다리고 있고 또 작전과 임무특성상 야간에도 대기를 해야한다는 책무감 때문에 모처럼의 회식이었지만 대취할 수는 없었다. 11시가 넘어가자 특정인이 먼저가 아니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쉽지만 다음 업무를 위해 귀가를 빨리하기 위해서이다. 전방 및 육군대학에 근무할 때 보다는 턱없이 적은 양의 술잔을 기울였지만 오랜만에 음주를 한 탓에 얼큰하게 취기도 올랐다. 식당을 나서 충무로 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붐비었던 인도가 한산해지기 시작하며 일부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필동 부대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등 앞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앞에서 다가오던 취객 중에 일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급하게 퇴근하다보니 사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군복 차림이었다. 그리고는 취객 두세명이 필자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필자를 보던 선배들과 후배는 황당한 상황 속에 잠시 멈칮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필자의 복부와 등짝을 패대기치던 정체불명의 취객은 “야..!희철이 이새끼야..연락도 않하고... ”하며 필자를 꽈악 껴안았다. 그 취객들은 10여년전 고교 졸업과 동시에 헤어진 뒤 연락이 끊어졌던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들이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법화경의 진리가 실현되는 해후(邂逅) 순간이었지만 당시 당황했던 수방사 작전과 선배와 후배 장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였던 필자는 그 황당한 사건 후,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들과 돈독한 만남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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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8)] 필동 도로길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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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 함흥 동쪽 흥남부두에는 1백 만 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아우성과 통곡으로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이 진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탈출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인원 58명과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선이었다. 12월 22일 항구엔 혹독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 무어 매코맥 선사의 화물선 빅토리호는 함포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선체를 선창에 댔다. 사방은 황혼에 잠기고 시가는 죽음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해군 신호등은 37세인 선장 레오나두 P. 라루에게 출발을 위해 엔진을 끄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선장은 사실 흥남 항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이틀이나 추위를 견디며 부두에 앉아 있던 수많은 피란민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제는 몇 명을 태우느냐에 있다. 이 배는 겨우 승무원 46명과 승객 12명 58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도 저 많은 군중 속에서 공산정권의 지령을 받은 프락치가 끼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또 그들의 보따리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배 바닥에는 3천 드럼의 연료용 기름이 깔려 있다. 성냥 한 개비면 이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라루 선장은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는 별안간 용기라도 얻은 듯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했다. “1만 명의 피란민을 태우시오.” 일등항해사는 그 순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정원 58명의 배에 1만 명을 태우라니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노인, 아낙네, 아기, 할아버지, 할머니.......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꼬리를 몰고 배 위로 밀려들었다. 배는 삽시간에 콩 나물 시루처럼 되었다. 선장 라루는 피란민의 승선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일등항해사는 1만 2백 명까지 세고는 더 이상 헤아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빅토리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오후였다. 그 무렵 1백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있던 부산항은 이들을 맞아들일 곳이 없었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먹밥을 배위에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선장 라루도 그 일을 거들었다. 피란민들에겐 흥남 출발 이래 첫 요깃거리였다. 빅토리호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미 육군에서 운영하는 거제도의 수용소로 향했다. 12월 26일 피란민들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두 대의 LST에 옮겨 탔다. 한 배에 7천 5백 명씩, 그 수는 1만 5천 명에 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세운 믿기 어려운 기록은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독자 여러분이 라루 선장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념이 기적을 낳는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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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