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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2)마타크 수상과 군종 목사의 용기 있는 죽음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75년 4월 12일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가 마타크 수상에게 헬기를 보내 국외로 탈출할 것을 권유했을 때 그는 유언장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하가 나에게 보여 준 관심과 자유세계로 탈출시켜 주겠다는 제의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난 비겁한 방법으로 조국을 떠날 수는 없다. 나는 지금 자유를 선택한 사람들을 버려야 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 귀하는 물론 귀하의 위대한 조국인 미국이 이런 고통을 겪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우리 어떻게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사람이 태어나 언젠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러나 내가 당신들 미국을 믿은 단 한 가지 과오를 저지른 죄로 내가 사랑하는 이 곳 산하에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다. 이 편지는 프놈펜의 멸망이 있은 지 1년 뒤 미국 대사의 서류뭉치 속에서 발견되며 알려졌다. 6.25남침전쟁 때의 일이다. 전쟁발발 직후 미국의 종군 목사가 수원에서 적에게 포위되었다.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모두 지체 없이 후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후퇴를 거절했다. 장병들은 군종목사에게 후퇴를 간청했다. 그는 완강히 거절하며 덧붙여 말했다. “부상병을 두고는 갈 수가 없다.” 장병들은 후퇴했고, 군종목사와 부상병들만이 벌판에 남게 되었다. 적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후퇴한 어느 장교가 능선 위에서 쌍안경으로 살펴보았다. 군종목사는 기도하며 숨져 갔다. 목숨을 바쳐 가며 양심의 명령대로 숨져 간 한 군종장교의 최후. 그 사람인들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 앞서가는 나라. 앞서가는 민족은 비겁한 삶보다 용기 있는 죽음을 택할 줄 안다. 여러분은 비겁한 삶과 용기 있는 죽음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군종장교가 현장에 남아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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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1-14
  • [김희철의 전쟁사(139)]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전쟁중이던 1951년 어느 날, 공군창설 7인 이었던 김영환 대령은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의 유래가 되었다.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했으나 1948년 공군에 입대한 김영환은 전쟁 초기에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후 김 대령은 1951년 9월28일에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했다. 또한 그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기총소사로만 공격하여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일화도 있으며, 이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휴전후인 1954년 3월5일, 김 공군장군은 10전투비행단 창설행사 참석차 비행기를 몰고 가던 중 악천후로 동해시 인근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애석하게 순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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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1-1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60)]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방사에서 근무를 했던 장교들은 전후방 교류의 인사 방침에 따라 대부분 최전방 야전부대로 차기 보직을 받는다. 작전과 선임장교를 성공리에 마치며 중령으로 진급한 임형빈 선배(육사33기)는 강원도 화천의 7사단에서도 가장 격오지의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곳에 부임한 임 중령은 사단의 선봉 대대장으로 자리를 굳히며 각종 시범 및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소문은 수천리 떨어진 수방사까지 알려졌다. 당시 사무실에는 디자인과 차트 글씨를 잘 쓰는 서기임무를 수행하는 군무원과 타자를 전문으로 하는 여직원도 있었다. 필자가 작전과 업무에 적응하던 어느날, 전방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임 중령이 모처럼의 휴가를 얻어 필동 수방사 근처의 처가에 들렸다가 후배들을 격려하러 사무실을 방문했다. 전 직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고 특히 사무실 터줏대감인 차트 담당 군무원과 여직원은 최전방 취임식까지 참석하며 축하를 해주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작전과 전원에게 “모두 필동 00 중국집으로 모여라. 점심은 내가 쏜다”하며 반기는 후배들을 격려하는 전우애와 선배의 여유를 보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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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1-12
  • [평화위한 나라사랑(1)]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하)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통일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강하고 튼튼한 안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독일의 유명한 신문인 Die Zeit의 부국장 겸 정치부장이었던 마티아스 나스는 “독일 통일의 원동력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나 헬무트 콜의 외교력보다 군사적 승리에 있다”고 했다. 이 말은 통일에 있어 국방력의 중요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1990년 10월 독일이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통일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국민들이 서독으로 편입하는 방식의 흡수통일을 이루었다. 그들이 평화적으로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독수상 브란트에 의한 동서독 방문과 교류협력을 꾸준하게 강화해 온 것과,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유엔동시 가입과 같은 통일이전에 긴장해소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독이 강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국방력 이외에도 월등히 앞섰던 경제력 등 서독의 막강한 국력이 국제사회에서 서독의 외교력에 힘을 실어주었고 평화적인 통일로 가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두 나라가 냉전 중이던 1985년 통일직전의 1989년까지의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서독은 언제나 동독보다 월등히 강한 국방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동독과의 대화와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 통일로 이끌 수 있었다. 결국 확실한 경제적 기반위에 훌륭한 외교가 있었고 그리고 통일과정에서 국가를 튼튼하게 받쳐 줄 수 있는 국방력, 즉 나토(NATO)라는 군사동맹조직의 군사적 뒷받침이 있었다. 더불어 예비전력은 한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직장에서는 생산성 향상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고 사회에서는 사회의 분위기와 여론을 주도하는 혈기왕성한 계층이다. 예비전력은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는 세대로서 이 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우리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통일조국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강해야 한다. 우리 예비전력은 국가의 핵심적인 세대로서 국가의 위기시에 분연히 일어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각자 맡은바 역할을 다함으로써 통일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전 국민이 통일의 의지를 불사를 수 있는 촉매역할을 함으로써 젊은이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국방력에 있음을 알아야 하며 힘이 없이는 결코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날 주변정세와 상황이 변화무쌍하지만 절대적인 대북 힘의 우위전력 유지로 확고한 대북경계와 경각심을 분명히 해야 함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강한 국방력과 대비태세만이 북한으로 하여금 모험주의적인 군사도발을 포기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점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통해 우리의 평화적인 통일 노력에도 응해 올 것이다. 우리민족이 함께 자랑스러운 선진국가로 또 세계의 지도국으로 우뚝 설 그날을 대비하자. 예비전력은 미래통일의 주역!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이다.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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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1-11-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9)] 내리 사랑을 실천하는 멋있는 선배들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왕족 평원군이 있었는데 그 밑에 왕래하는 손님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때 당시 초나라와 외교 문제가 생겨서 초나라에 동행할 사람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모수라는 사람이 자기도 가겠다(毛遂自薦)고 나섰다. 따라서 주변에 수소문해보니 모수라는 사람은 평원군 손님으로 3년이나 들락날락했으면서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그러자 평원군이 좋은 말로 돌려보내려고 “현명한 사람은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 실력이 절로 드러나기 마련이지요(囊中之錐)”라고 말했다. 모수는 “그러니까 그 주머니에 저를 넣어보세요. 예전부터 넣었다면 송곳이 이미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겁니다”라고 했다. 평원군과 동행한 모수는 초나라와 외교 협상에서 초나라왕을 위협도 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설득에 성공하였다. 결국 평원군과 모수는 초나라의 구원병을 지원받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잘 해결했다는 일화에서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유래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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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1-11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제독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해군의 주역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척의 함정과 항공기 그리고 수백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한 명의 지휘관이 담당한 것 가운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니미츠는 초급 장교 시절에 함정을 잘못 몰아 진흙 벌에 좌초시킨 일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진주만에 잠수함기지를 건설하였으며 그 뒤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군에서 디젤기관의 일인자가 되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최초로 NROTC(해군 학군단)를 창설했으며, 해군대학에서는 항공모함의 효과적인 호위진형인 원형진을 창안하였다. 그 뒤 아시아 함대의 함장과 제1전함부대 사령관을 역임한 뒤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해군본부에서 인사문제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의 자리에 있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전쟁 도중 원수로 진급한 니미츠는 종전 후에 해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전역했으며, 미국의 유엔 대표로 활동하며 카슈미르 문제를 담당하기도 했다 . 은퇴 이후에도 니미츠에게 대학총장, 산업체나 사업계에서도 높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해 왔으나 그 제안들을 거절했다. 아들인 체스터 2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안 하시렵니까?”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세요. 아버지에게 돈이 필요 없다면 자식들에게 주세요.” 나중에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아버지 니미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태평양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군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 만약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상급자로 모셨던 해군사령관이 해군사령관 이외의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해군에 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군인의 명예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니미츠의 삶은 진정 멋있고 위대한 삶이었다. 군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비록 퇴역 후에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는 행동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군에 있을 때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일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례들을 상기해 볼 때 체스터 니미츠의 삶은 너무나도 부럽고 멋있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의 실수로 좌절한 적은 없습니까? 전역(퇴역)후에도 군인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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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1-11
  • [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훨씬 경험 많고 능력있는 미군조차 실패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던 상황을 신출내기 한국 공군이 해내면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작전 성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평양 대폭격 작전,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쾌거로 늘 회자(膾炙)되고 있다. 배우 신영균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빨간 마후라’는 김신 공군대령과 유치곤 공군대위의 활약이 돋보인 이 승호리 철교 폭파적전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2월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가 있었는데 이날의 전과를 설명한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엔 공군의 출격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가 다가와서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유엔 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약 500회(소티)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게 넘겼다. 폭파임무 인계 당시에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었고, 이날 김신 대령에게 반갑게 축하 인사를 던진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승호리 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 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내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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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0
  • [평화위한 나라사랑(1)]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중)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분단의 비극을 실감하지 못하는 오늘의 세대들에게 통일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조금 멀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기필코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역사를 갖게 되는 것일까? 첫째, 통일은 남북한이 과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을 가티 해온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남북한은 동일언어를 사용하고 동일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동일문화를 이루어 살아왔던 민족이기에 통일은 민족지상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둘째,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격고 있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염원은 통일을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한다. 남북통일은 일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시켜주며 우리의 민족자긍심도 높여주는 최대의 과업이라 하겠다. 셋째, 효율적인 국민경제 달성을 위해서도 통일은 긴요하다. 군사력 대치로 인한 남북간의 경제발전상의 손실은 실도 막대하다. 더욱이 쌍방이 군사력유지와 확충에 쏟고 있는 비용은 국민들로 하여금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민족 모두가 보다 발전된 선진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유와 풍요를 한껏 누리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군사적 대결구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넷째, 한반도의 통일은 냉전대결 구도의 마지막 유물을 청산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은 동북아의 화약고로 불려온 이 지역에서의 안녕은 물론 나아가 세계평화와 안정을 달성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국제무대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구가 약 칠팔천에서 1억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본다. 그 정도의 인구는 되어야 국제무대에서 제법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야 만이 선진국들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현재의 5천여만 인구와 분단된 국토로는 대한민국이 세계무대로의 진출과 세계역사의 견인차 역할에 다소간의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국토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우리의 국력이 대륙으로, 대양으로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분단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여 막강한 국력배양의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슬픔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아픈 역사도 청산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타고난 민족적 우수성을 발판으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한다면 로마가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듯 세계를 리드하는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음편 계속)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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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8)] 필동 도로길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방사의 추가과업이라 볼 수 있는 다음날 새벽에 집단축구가 기다리고 있고 또 작전과 임무특성상 야간에도 대기를 해야한다는 책무감 때문에 모처럼의 회식이었지만 대취할 수는 없었다. 11시가 넘어가자 특정인이 먼저가 아니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쉽지만 다음 업무를 위해 귀가를 빨리하기 위해서이다. 전방 및 육군대학에 근무할 때 보다는 턱없이 적은 양의 술잔을 기울였지만 오랜만에 음주를 한 탓에 얼큰하게 취기도 올랐다. 식당을 나서 충무로 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붐비었던 인도가 한산해지기 시작하며 일부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필동 부대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등 앞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앞에서 다가오던 취객 중에 일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급하게 퇴근하다보니 사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군복 차림이었다. 그리고는 취객 두세명이 필자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필자를 보던 선배들과 후배는 황당한 상황 속에 잠시 멈칮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필자의 복부와 등짝을 패대기치던 정체불명의 취객은 “야..!희철이 이새끼야..연락도 않하고... ”하며 필자를 꽈악 껴안았다. 그 취객들은 10여년전 고교 졸업과 동시에 헤어진 뒤 연락이 끊어졌던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들이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법화경의 진리가 실현되는 해후(邂逅) 순간이었지만 당시 당황했던 수방사 작전과 선배와 후배 장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였던 필자는 그 황당한 사건 후,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들과 돈독한 만남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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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1-09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 함흥 동쪽 흥남부두에는 1백 만 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아우성과 통곡으로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이 진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탈출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인원 58명과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선이었다. 12월 22일 항구엔 혹독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 무어 매코맥 선사의 화물선 빅토리호는 함포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선체를 선창에 댔다. 사방은 황혼에 잠기고 시가는 죽음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해군 신호등은 37세인 선장 레오나두 P. 라루에게 출발을 위해 엔진을 끄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선장은 사실 흥남 항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이틀이나 추위를 견디며 부두에 앉아 있던 수많은 피란민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제는 몇 명을 태우느냐에 있다. 이 배는 겨우 승무원 46명과 승객 12명 58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도 저 많은 군중 속에서 공산정권의 지령을 받은 프락치가 끼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또 그들의 보따리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배 바닥에는 3천 드럼의 연료용 기름이 깔려 있다. 성냥 한 개비면 이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라루 선장은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는 별안간 용기라도 얻은 듯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했다. “1만 명의 피란민을 태우시오.” 일등항해사는 그 순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정원 58명의 배에 1만 명을 태우라니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노인, 아낙네, 아기, 할아버지, 할머니.......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꼬리를 몰고 배 위로 밀려들었다. 배는 삽시간에 콩 나물 시루처럼 되었다. 선장 라루는 피란민의 승선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일등항해사는 1만 2백 명까지 세고는 더 이상 헤아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빅토리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오후였다. 그 무렵 1백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있던 부산항은 이들을 맞아들일 곳이 없었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먹밥을 배위에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선장 라루도 그 일을 거들었다. 피란민들에겐 흥남 출발 이래 첫 요깃거리였다. 빅토리호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미 육군에서 운영하는 거제도의 수용소로 향했다. 12월 26일 피란민들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두 대의 LST에 옮겨 탔다. 한 배에 7천 5백 명씩, 그 수는 1만 5천 명에 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세운 믿기 어려운 기록은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독자 여러분이 라루 선장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념이 기적을 낳는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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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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