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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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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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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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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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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내 한국전 참전비 참배를 한 박 장관은 “이번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방문은 6·25전쟁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국제보훈으로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또한, 국내 상이군경 재활체계를 비롯한 기반 시설과 관련한 정책을 점검하고 구상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해리왕자를 만나 세계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게임의 대한민국 유치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고, 우크라이나 보훈부 장관과 향후 긴밀한 업무 협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박 장관은 “국가보훈부는 기존 22개 유엔참전국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알리는 다양한 국제보훈 정책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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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또한 네덜란드군과 삼일공고와의 특별한 인연도 새롭게 소개됐다. 삼일공고는 6·25남침전쟁 당시인 1950년 말 강추위 속에 수원에 도착한 네덜란드 부대에 학교 안 아담스기념관을 숙소로 제공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2년부터 삼일공고 졸업식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참석,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삼일공고 교사와 학생들은 매년 횡성전투 기념비 앞에서 열리는 참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어 박 장관은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참전협회장, 네덜란드 국방부 감찰부국장, 반호이츠 부대원과 삼일공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 오찬 간담회를 갖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달했다. 간담회에서는 삼일공고 학생대표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낭독했으며,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협회는 삼일공고에 아담스기념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했다. 한편, 반호이츠 부대는 네덜란드에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창설된 보병부대로 강원도 일대의 횡성지구·원주·인제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네덜란드는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4번째로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투 중 120명이 산화하고 부상 645명, 3명이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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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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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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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국민성금으로 세운 백선엽장군 동상 제막식과 추모식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6·25남침전쟁 영웅 故 백선엽 장군의 3주기 추모행사가 5일 오후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거행됐다. 조국수호와 굳건한 한미동맹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백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는 동상 제막식과 통합 추모식으로 나뉘어 이뤄졌다. 먼저,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은 국가보훈부 주관으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백선엽 장군의 장녀 백남희 여사, 이철우 경북도지사, 백선엽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 관계관, 이종섭 국방부장관 및 육군참모총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해 개최됐다. 제막식은 국민의례, 여는 영상, 경과보고 및 인사말(동상건립추진위원회), 기념사(보훈부장관, 경북도지사), 축사(국민의 힘 원내대표, 백선엽 장군 기념재단 이사장), 감사말씀(백남희 여사), 영상 인사말(백선엽 장군 생전 영상), 제막식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때 축사를 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을 초대 이사장으로 지난 6월30일 출범한 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그동안의 많은 추모단체 중 처음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 재단으로 앞으로 한층 격상되고 체계적인 활약이 기대됐다. ■ 박민식 보훈부장관, 6‧25남침전쟁 최대의 격전지 낙동강 방어선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성지로... 백선엽 장군 동상은 장군의 서거 3주기를 맞아 민간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건립을 추진했다. 장군의 동상은 민간 동상건립추진위원회의 국민성금모금, 국가보훈부 예산 1억 5천만원 등 총 5억원을 들여 높이 4.2m, 너비 1.56m 크기로 제작되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아 동상이 360도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국민성금은 모금 2개월 만에 목표액을 달성할 정도로 동상 제작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열기가 높았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기념사를 통해 “대한민국을 구한 호국의 별인 백선엽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많은 분들이 기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6‧25남침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성지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우경 동상건립추진위원장(한국자유총연맹 경북도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 번영은 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의 위대한 헌신과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영웅들이 다시는 홀대받지 않고, 잊혀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우 경상북도지사는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은 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호국영령과 6·25전쟁 시 참전용사와 지게부대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칠곡 다부동 일대에 호국메모리얼 공간 등을 조성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의 호국·안보 교육 장소로 만드는 등 경북을 대한민국 호국의 성지로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이어서 박정환(대장)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열린 통합 추모식에는 유가족과 이종섭 국방부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 폴 러캐머라 한미연합사령관, 역대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유관기관 및 보훈단체 관계관, 장병, 지역주민, 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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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국민성금으로 세운 백선엽장군 동상 제막식과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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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6)]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나자 함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 교육을 받던 동기들은 수료후 각자의 임지로 출발하여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중 일부는 취임 일정에 여유가 있어 치료를 받던 병원으로 찾아와 위문과 격려를 하는 동기애도 보여주어 감사했다. 하지만 카풀제 세명의 동기들은 교통사고에 따른 부상으로 집에서 장거리인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골반이 골절되어 침대에서 꼼짝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던 필자의 머리속에는 만감이 교차됐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던 동기가 조언했던 것처럼 “바로 전역을 하게 될지? 또는 회복이 되더라도 정상적인 근무보다는 전문분야에서 군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군생활을 할지?”라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긴급수술을 집도했던 담당 의사가 병실을 찾았다. 앞으로의 진로 고민에 빠져있던 필자는 담당 의사에게 “선생님, 제 몸이 이런 상태인데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론입니다. 하지만 재활치료에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힘을 내세요...”라며 희망적인 위로의 대답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입원한지 2주차가 끝나갈 무렵 옆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던 김종완 동기에게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연락이 왔다. 그의 용산고등학교 시절에 절친이었던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이 서울로 올라와서 자기 병원에서 치료를 해주겠다고 제안하며 앰뷸런스를 보내겠다고 했다. 박 이사장의 제안에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중인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며 너무도 감사했다. 아무 인척도 없는 대구보다는 근무하던 부대와 가깝고 친척들과 지인들이 있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훨씬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재준 동기는 보행이 가능한 상태이라 이동시에 가족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었다. 우리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구 을지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다시 태어나 덤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신과 물심양면으로 전우애를 보여준 동기들께 감사드렸고 더불어 또하나의 생일을 정했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1994년 4월24일을 세명의 재탄생일로 정하고, 잔인한 4월도 우리에게는 축복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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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6)]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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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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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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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5)]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를 포함한 세명의 부상 동기들은 뜻하지않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며 군생활에도 먹구름이 끼였으나 기대 이상의 관심과 배려 덕택에 군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너무도 감사한 상관 및 지인들도 있었다. 사고발생 당일인 4월25일은 무적태풍부대 사단장 이취임식이었는데, 이임하는 이영대 사단장(학군 4기)은 아침에 출근해서 필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고 한다. 故 이영대 사단장은 3년간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필자를 아껴주고 믿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전에 근무했던 부대인 수방사령부에서도 참모장과 작전장교로 수방사가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시에 현장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뜻이 서로 통했었다. 그는 청천벽력같은 교통사고 소식을 접하고 후임 사단장 박기준 장군(학군 5기)에게 뒤처리를 잘해줄 것은 신신당부했다. 그 덕분에 같은 부대에서 사단참모부 보좌관을 했던 김종완 동기와 필자는 그 두 사단장의 따뜻한 배려로 많은 혜택을 받으며 군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필자와 김종완 동기의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군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자 무사히 건강하게 회복되어 돌아오면 바로 대대장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입원 기간을 예하부대의 부대대장으로 보직을 조정하여 휴가처리가 되도록 조치를 해주었고, 해당 연대장이었던 정형진 장군도 흔쾌히 동의하여 안심하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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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5)]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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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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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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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져가는 창공의 호국영웅에게 제복과 영상헌정(하)
-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수송하는 경의선과 만포선 철도위의 기차들을 폭격하는 모습(좌측)과 ‘제복의 영웅들’ 사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제복을 전달식에 참석한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인 ‘최순선 대령’(우측) [사진=전쟁기념관/국가보훈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한화 에어로스페이스의 후원으로 최순선 대령의 일대기를 영상자서전으로 제작해 이날롯데시네마에서 최순선 대령께 헌정하고 학생 등 미래세대와 함께 관람했다. 영상자서전은 이후 학교, 공공기관, 군부대 등에 보훈교육 자료로 활용되도록 배포할 계획이다. 또한 영상자서전 헌정과 함께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 계기 ‘제복의 영웅들’ 사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제복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직접 최순선 대령께 수여해 입혀드렸다. 더불어 미래세대인 학생들이 호국영웅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대령께 증정했다. 국가보훈부 박 장관은 “조국 수호의 사명으로 일생을 창공에 바친 영웅께 제복과 영상을 헌정하게 되어 영광”이라며 “국가보훈부는 보훈을 매개로 호국영웅들의 숭고한 정신이 미래세대에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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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져가는 창공의 호국영웅에게 제복과 영상헌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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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져가는 창공의 호국영웅에게 제복과 영상 헌정(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지난 23일 오후 3시 대전 괴정동 롯데시네마에서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인 ‘최순선 대령’에게 ‘창공의 호국영웅, 제복 수여 및 영상자서전 헌정식’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최순선 대령과 가족, 이상학 공군참모차장, 롯데백화점 관계자, 학생 등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국가보훈부가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참전유공자에게 특별한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추진한 ‘제복의 영웅들’ 사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제복을 전달하고, 호국영웅이 걸어온 인생의 여정을 ‘영상자서전’으로 제작해헌정한다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이에 영상 제작 대상자로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절대 위기였던 6·25남침전쟁 당시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최순선 대령(92세)을 선정했다. 최순선 대령은 1950년 항공병으로 입대했고,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돼최일선에서 활약했다. 특히 공군의 3대 전승 작전인 ‘평양 승호리 철교폭파 작전’ 등 6·25남침전쟁 기간 124회 출격해 공군의주요 작전을 수행한공로로 을지무공 등 4개의 무공훈장을 수상했다. 정전 이후에도 공군에서 후배 조종사 양성에 힘쓰며 조국의 영공을 수호한 최순선 대령은 1970년 20년간 몸담은 공군을 떠났으나 하늘에 대한 그리움으로 민간 여객기 조종사로 전직해 20년간 활동하며 총 2만 6,500시간의 비행기록을 남겼다. 최순선 대령이 집필한 자서전에 따르면 이는 당시 전 세계 7위의 대기록이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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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져가는 창공의 호국영웅에게 제복과 영상 헌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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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4)]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구 가야기독병원에 헌병 수사관이 파견되어 사고조사를 하면서 무장한 복장의 헌병근무자가 중환자실 앞에 배치되자 병원 관계자들은 신기하면서도 놀라며 대단한 사람들이 입원한 것으로 생각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정성어린 진료에 임하게 됐다. 또한 청와대에서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통보를 하자 경찰 출신 가해자를 옹호하려던 담당 경찰은 태도를 바꾸어 정확하게 사고 처리를 하였고, 우려했던 것처럼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뀔 수 있는 상황도 방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육군대학 숙소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동기는 사고발생 전화를 받고 학교본부에 보고한 뒤에 종합시험을 앞둔 수업도 마다한 채 현장까지 달려와 사고처리를 완벽하게 도와주었다. 사고로 부상을 당한 동기들의 가족에게는 동두천 부대의 인접에서 근무하던 팽준호와 양종수 동기가 소식을 전하며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불안에 떨던 가족들을 직접 태워 대구까지 내려오는 수고를 해주었다. 이렇듯 많은 동기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 모두를 포함한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덕분에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세명의 동기들은 하나 둘씩 회복되며, 뜨거운 동기애에 감사함을 느끼게 만드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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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4)]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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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보훈부, 14번째 ‘유엔참전용사 후손 교류 캠프’ 개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한반도의 절체절명(絶體絶命) 위기였던 6・25남침전쟁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미래세대로 계승하고, 유엔참전국과 자유의 연대를 이어가기 위한 ‘유엔참전용사 후손 교류 캠프’를 22일부터 28일까지 진행했다. 정전협정 70주년인 올해는 ‘후손 교류 캠프’가 14년째를 맞이하는 해이며, “자유를 향해 걸어온 여정, 미래를 향한 발걸음(Journey Towards the Freedom, Step Towards the Future)”을 주제로 국내외 대학교에 재학 중인 유엔참전국 후손과 한국 대학생 등 18개국 140여 명이 참여했다. 캠프 발대식은 22일 오후 5시 용인 케이비(KB)증권 연수원에서 개최되며, 환영사, 참가자 대표 선서, 조 구성 등으로 진행됐다. 발대식 이후에 한국가요(K-POP) 춤 체험 등 참가자 친목 도모, 조별 활동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발대식 다음날인 23일에는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하고 유엔사령부의 안내에 따라 공동경비구역(JSA)을 견학해 북한과 대치한 분단의 현장을 후손들이 직접 돌아봄으로써 자유의 소중함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또한 24일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헌화·참배, 참전용사의 사진과 유품을 후손들이 들고 국가별로 사진을 촬영하며, 25일에는 6·25전쟁 제73주년 정부 주관 행사에 참석했다. 이후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서 국제형사재판소장을 역임한 송상현 정전70주년 고문위원(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새로운 국제정세와 국제형사재판소>란 내용으로 이야기공연(토크콘서트)과 토론 프로그램을 함께 했다. 이어 26일에는 부산 유엔기념공원 참배, 유엔평화기념관을 관람하며, 전쟁기념관에서 촬영한 국가별 사진과 유품을 기념관에 기증했다. 마지막으로 27일 오후 3시 케이비(KB)증권 연수원에서 해단식을 진행한다. 18개국의 후손들이 자국의 전통의상을 입고 펼치는 국제 의상 전시회(글로벌 패션쇼)와 장기자랑 등 화합의 장을 끝으로 모든 일정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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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보훈부, 14번째 ‘유엔참전용사 후손 교류 캠프’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