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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안중근, 천안함 트리플 추모(상)
[시큐리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3월26일은 ‘이승만 건국 정신 계승 국민대회’가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신일이며, ‘안중근 장군 순국 114주기 추모제’와 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리는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이었다.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 나흘 앞선 지난 22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렸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동시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에 잘 맞서서 대응해야 한다”며 “어떠한 위협도 응징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화를 나눴고 “이렇게 명백하게 도발과 공격을 받았는데도 자폭이라느니 왜곡, 조작, 선동해서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영웅들을 이렇게 모욕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이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반드시 막아 내야겠다”며 “저희가 잘하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차에 탑승하기 전 한 위원장과 악수하며 한 위원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이날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았는데, 내달 총선을 앞두고 당과 대통령실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4·10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 같은 시기에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만나면서 갈등이 봉합 국면에 접어든 상징적 장면으로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정 간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 ‘부활한’ 천안함에 오른 영웅들…“이제 피격당하지 않을 것” ‘제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린 26일 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생존장병들과 전사자의 유가족 등은 신형 호위함으로 다시 태어난 ‘천안함(FFG-Ⅱ, 2800톤급)’에 오르며 “많이 좋아졌어. 이 배라면 서해 나가서 두 번 다시 피격당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야”라며 반겼다. 또 다른 유가족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천안함 사건과 내 아들을 잊은 날이 없다"라며 "이름을 이어간 천안함 장병은 물론이고 국군 모두가 다시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고, 또한 유족회장은 “새 국회에선 천안함 괴담 방지 특별법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호위함 천안함은 '천안'을 함명으로 사용한 해군의 세 번째 함정이다. 천안함은 초계함(PCC, 1000톤급)보다 크기와 무장, 방어능력을 대폭 증가했다. 천안함은 길이 122m, 폭 14m, 높이 35m 크기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55㎞)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할 수 있다. 주요 무장으론 5인치 함포와 함대함유도탄, 한국형 수직발사체계(KVLS)로 발사하는 함대지유도탄·장거리 대잠어뢰(홍상어)·유도탄방어유도탄 등이 탑재돼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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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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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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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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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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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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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마침 교통사고 당시에 필자를 부대대장 보직으로 조치해 치료받으며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혜택을 준 80연대장 정형진 대령(육사30기, 소장예편)이 사단 참모장으로 영전했는데 천주교 신자로 매주 성당에서 만나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고,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이라 여겨졌다. 한편 퇴원한 지 한달이 지난 뒤에 중령 진급 신고를 사단장에게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중이었고 필자만이 목발을 짚고 간신히 서서 행사에 임했는데 이때 사단장은 대대장으로 취임하기에는 아직 재활이 더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사단 평가실에 보직을 두고 예하부대 점검을 한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현실에 이미 취임하여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동기생들보다 자꾸 뒤떨어지는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사단작전장교 시절의 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장교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11월 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장교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장교영어반’ 교육과 필자의 재활치료 때문에 대대장 취임이 연기됨에 따라 전방 근무 기간이 길어져서 계획인사에 적용되어 다음 보직이 후방 2작전사령부 예하 대대장으로 조정되었다. 따라서 2작전사령부 인사처의 보임장교인 동기생이 순찰 등 이동이 많은 해안부대보다는 내륙위주인 37사단으로 검토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게다가 군근무 기간 및 계급정년이 늘어나는 군인력관리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중령근무 기간이 연장되어 재활치료 후에 어떻게 근무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진로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처럼 ‘천붕우출(天崩牛出)’란 고사성어가 뇌리를 때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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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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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가을인 9월초이지만 그해 여름에 괴롭혔던 100년 만의 폭염은 아직도 남아있어 아파트 4층은 뜨거웠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정면옆에 위치한 아파트에서는 주변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서 퍼져나오는 냄새와 파리떼들의 습격으로 창문을 열기가 어려워 더위는 더욱 심했다. 그래도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병원 생활을 벗어났고, 그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아파트 주변 축사의 불쾌한 냄새마저도 감사했다. 목발을 짚은 필자는 그때까지도 거동이 완전하지 못해 부대로 출근은 못한 채, 아침 저녁에 사단 사령부 연병장과 주변을 열심히 걸으며 재활운동을 계속했다. 간혹 길에서 만나는 간부들과 인사를 할 때에도 걱정해주는 그들이 감사했고 덕분에 사단 참모부에는 필자가 복귀해 재활치료 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은 필자의 의지뿐이었고, 정상인처럼 빠른 속도로 걷고나면 핀이 박혀있는 다리의 근육과 목발을 이용하기 위해 끼웠던 겨드랑이와 팔까지에도 통증을 느꼈다. 대퇴부 분쇄골절로 인해 아직도 뼈가 완전히 붙지는 않은 탓이었으나 근육이 없는 다리는 변함없이 새다리처럼 가늘었다. 단지 병원생활 동안에 동기의 권고로 개종하여 성당을 찾아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 신자들을 만나는 회동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의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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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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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11일~13일 2박 3일 일정으로 정부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내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자 광복군인 오성규 애국지사를 영주 귀국의 목적으로 13일 국내로 모셨다. 11일 일본으로 넘어간 정부대표단은 바로 도쿄로 이동해 조국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 오성규 애국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를 위문하고 자녀들과 면담을 통해 국내로 모시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번 정부대표단의 방일은 2018년 배우자의 사망 이후 아파트에 홀로 거주 중인 오성규 지사가 본인 생의 마지막은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국가보훈부에 밝히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성규 지사는 일제 강점기 ‘주태석’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만주 봉천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이영순, 조승회 등과 비밀조직망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탈출해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오 지사는 1945년 5월 한미합작특수훈련(O.S.S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오 지사는 교민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군 군사 특파단의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하였다. 정부대표단은 현지에서 먼저 오성규 지사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귀국에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되어 13일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 지사를 국내로 모셔와 가장 먼저 국립묘지를 찾아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를 하며 참배했다. 이후에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오 지사의 건강상태를 정밀 검진해 건강 정도에 따라 보훈요양병원 등에서 건강과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예우하고, 건강상 특이점이 없다면 오는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오성규 지사가 국내로 영주 귀국하여, 국내 독립유공자는 김영관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는 미국에 이하전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만 남게 된다. 한편, 정부대표단은, 오성규 지사의 영주 귀국 지원 외에도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순국지인 이치카야형무소 터와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를 참배하고, 재일본 YMCA 회관 내 기념자료실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踏査)했다.. 또한 박열 의사(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변론을 맡은 후세다쓰지(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의 후손과 재일한국유학생 대표 등과 면담도 진행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일본에 계신 마지막 생존 독립유공자이신 오성규 지사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지사님께 무한히 감사드리고 대한민국에서 본인의 소원대로 마지막 여생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출국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국립묘지 참배시에 직접 휠체어를 끌며 오 지사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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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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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에 “백년만의 해후,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 표어(슬로건)의 부부 합장식이 거행된다. 또한 광복회 등 독립 관련 보훈단체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8월 12~13일간 서울현충원 현충관에 국민추모공간을 마련하고 다양한 추모·참배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1860년 0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1908년 4월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총재로서 한인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그해 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대동공보’의 사장으로서,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활동과 안중근 장군 등 독립군의 지원 활동도 했다. 이후 1911년 12월에 러시아 연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 독립을 위해 조직된 한인단체 권업회의 회장으로, 1918년 6월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도 선출됐다. 다음해인 1919년 3월에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어 그해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으며, 일제는 유해를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매장장소조차 숨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가보훈부가 최재형 선생 순국 100여년만에 순국 추정지의 흙과 배우자이신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와 서울현충원에 부부합장묘를 만들게 되어 너무나 뜻깊다”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유해마저 찾을 수 없었던 순국선열을 단 한분도 소홀함 없이 예우하는 일류보훈을 실현하는 첫걸음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순국선열을 예우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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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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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다가 일제 만행에 의해 불의의 객이되어 유해도 못 찾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1일 “최재형 선생(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순국장소로 추정되는 러 우수리스크의 흙과 70여 년간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모셔와, 원래 최재형 선생의 묘가 있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 합장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묘는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조성되었으나, 이른바‘가짜 유족 사건’으로 멸실되어 현재까지도 해당 묘역은 빈터로 남아있다. 이후 유족들은 멸실된 묘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희망해왔으나,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이후, 현재까지 유해를 찾을 수 없어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하도록 규정한 국립묘지법에 따라 묘를 복원할 수 없었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와 배우자의 유골을 함께 묘에 합장할 수 있도록 올해 1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6월30일 국회 통과, 7월1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18일 시행되었다. 이로써,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해 유해를 찾지 못한 최재형 선생을 부인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 선생은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국외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어 항일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해 재창간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대한 기여로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大恩人)’으로 추앙받았다.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는 3남 최 발렌틴과 5녀 최 올가의 회고에 따르면 1897년경 최재형 선생과 결혼한 이후 8명의 자녀를 낳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으며,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남은 가족들을 보살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편인 최재형 선생의 순국 이후에는 자녀들과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 1952년 사망했고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부는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함께 키르기스스탄 현지에서 유해 수습 등 준비 절차에 돌입해, 오는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셨다. 또한, 최재형 선생이 순국하신 장소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기념관(구 최재형 선생 고택) 뒤편 언덕에서 채취한 흙을 11일 국내로 반입해 부부를 최고의 예우로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시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7월 중순 키르기스스탄 현지에 의회 외교차 방문한 정우택 국회부의장의 협조 요청과 주키르기즈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의 도움, 기념사업회의 대국민 모금운동과 엘지(LG)유플러스의 후원 등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 적기에 가능해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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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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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울 을지병원에서 침대생활 2개월, 재활 2개월 등 4개월 10일만에 드디어 퇴원하는 날을 열흘 앞둔 8월26일 저녁에 같은 병실에 입원해 함께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의 고교 절친인 박준영 을지병원 이사장이 그동안 고생을 위로하는 식사을 함께하며 술 한잔도 겸했다. 특히 대퇴부 분쇄골절, 골반 천골·치골 전위골절, 늑골 8·9번 골절, 횡경막·비장 파열, 뇌진탕, 혈흉, 좌5족지 탈골 등 병명만 11가지로 몸속에 쇠붙이를 부착한 로보캅 같은 중환자 필자에게 각별한 정성과 완벽한 진료로 희망의 불을 지펴준 박 이사장이 퇴원 축하 식사까지 마련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8월 마지막 날에는 무적태풍부대에서 또하나의 희소식이 전달됐다. 필자의 후임으로 사단작전보좌관에 보직되어 고생을 했던 후배 김완경(38기) 소령이 중령 진급심사에서 선발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사 상태의 중환자에서 회복되어 목발을 짚고 퇴원하는 필자와 함께 자축행사 이벤트가 되었다. 헌데 9월6일 퇴원할 때에 작은 문제가 있었는데 숙소인 동두천까지 이동하는 승용차 운전이었다. 당시에 가족이 운전이 서툴러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여 비록 다리에 힘은 없지만 그동안 부지런히 재활치료한 덕분에 필자가 과감하게 운전을 했다.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로 차량 운전대를 못 잡을 줄 알았는데 안전하게 복귀하여 다행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본인이 없으면 큰 이변이 생길 것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4개월 보름만의 퇴원 후 동두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변은 전혀 변화가 없이 늘상의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교통사고 등의 충격 속에서 변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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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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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이었던 정일화 박사는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와 포병 장교인 테리 중위의 리더십 고찰과 죽미령에 최초 투입한 스미스부대와 미24사단의 고군분투를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정 박사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2차대전의 영웅이었지만 미 현장체크단이 경질까지 검토했던 워커 장군의 오판과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이런 약점들을 미 제8군의 예비로서 낙동강전선의 소방대 역할을 한 제27연대에 의해 극복했다고 분석했다. 아이젠하워의 부관이었던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한 27연대는 7월말 옥천, 왜관지역에서 방어를 하다가 8월2일 마산 진동리, 6일에는 창원, 12일에는 영산, 14일에 경산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북한군에 타격을 주었고, 18일에는 다부동에 급파되어 백선엽 장군을 지원하며 최초 탱크전에서 압승한 뒤에 다시 25일 마산으로 복귀했다가 9월1일 함안 전투에 가담하는 등 전승의 신화를 달성한 낙동강방어선의 소방대로 탄생했다. 정 박사는 특히 다부동 전선이 안정화 된 요소중에 하나는 당시에 귀순한 정봉욱 중좌(육군훈련소장 역임, 소장 예편)의 북한군 포대 및 탄약고 위치 정보 제공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27연대가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효과적으로 표적을 제압하는 긴밀한 화력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포병 관측장교인 테리 중위 덕택이라며 그의 리더십과 활약을 언급하며 발표를 마쳤다. 토의 시간에는 박정기 회장의 스미스부대에 대한 보훈 활동으로 감동을 주었고 자리를 옮겨 점심을 하면서도 그동안 간과되었지만 이번 포럼으로 재조명된 마산전투와 국가존립을 위한 안보의 중요성 및 기타 애피소드로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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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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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상)
- 지난 20일 오전 한미안보연구회(COKUSS)는 미27연대를 중심으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안보포럼을 개최했다.[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0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 4층에서 한미안보연구회(COKUSS) 김병관(육사28기) 회장, 박정기(육사24기)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비롯한 안보전문가 및 예비역 장성 등 50여 명이 참석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2023년 3차 안보포럼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6‧25남침전쟁 중에 다부동‧영천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에 가려 소홀하게 평가되었던 낙동강 전선의 마산지구 전투에 대해 미 제27연대의 소방대 역할을 중심으로 한반도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숨겨진 팩트를 발굴해 소개하는 성과가 있었다. 1부 발표를 한 허남성(육사26기) 국방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에서 전개된 6‧25남침전쟁을 4댠계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기록 사진들을 제시하여 감동을 주었다. 허 박사는 전쟁사 전문가답게 “팔로군 출신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6사단이 개전초기 신속하게 전주-광주-목포-보성을 점령하며 압박을 가해 워커장군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는데, 이에 미8군은 미 25사단을 마산 정면으로 36시간 동안 240Km 긴급히 이동시켜 44Km밖에 남지않은 부산을 향한 우회로를 차단 방어했다”고 말했다. 이때 Kean특수임무부대와 미 27연대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북한군 7사단까지 포함해 추가로 전개한 9월 공세를 막아냄으로 대한민국 존망의 갈림길인 부산교두보를 지켜냈다며 이 마산지구 전투로 전승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 대반격의 불꽃을 피웠다고 강조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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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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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5]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지 4개월즈음 지나갈 무렵 오랜만에 희소식이 전달되었다. 무적태풍부대의 작전참모부에서 몇 년을 함께 고생했던 작전장교 정승범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에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100년만의 폭염이 날라가는 시원한 소식이었고, 그동안 필자를 믿고 열심히 근무한 부하 장교의 좋은 결실에 비록 병원이었지만 마치 내가 진급한 것처럼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더불어 필자의 회복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마치 쇠로 온몸을 감싼 로보캅처럼 배앞에 불쑥 튀어나와 불편하게 만들던 골반뼈에서 연결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제거했다. 이제는 분쇄골절된 좌측 대퇴부의 골수에 박혀있는 골수정 만이 몸속에 남게 되었다. 가늘어진 다리에 근육을 붙이는 재활치료를 위해 이동식 보조기를 사용해 병원 복도를 쉴새 없이 누비고 다녔고 덕분에 김일 선수를 만나 눈인사를 하는 횟수도 늘어만 갔다. 드디어 이동식 보조기에서 목발로 교체하면서 운동량도 늘었는데 그때의 가장 고충이 목발을 짚기 위해 겨드랑이에 끼우고 계속 걷자 겨드랑이의 통증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록 목발을 짚고 다녀도 이동이 가능하자, 그동안 교통사고로 병실에서 함께 지냈지만 거동이 가능해 외출까지 다녀왔던 김종완 동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간호사에게 허락을 받고 김 동기와 가족과 함께 입원 후 처음으로 병원 밖의 자그마한 일반 식당에 들어가 칼국수로 식사를 했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맛이었다. 외식을 제안한 동기도 고마웠고 매일 간병과 동시에 틈틈이 성당에서 필자를 위해 기도하며, 교통사고로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위기에서 필자를 건져준 가족이 진심으로 고마웠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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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5]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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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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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