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시대Home >  소통시대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네덜란드 반호이츠 부대내 한국전 참전비 참배를 한 박 장관은 “이번 독일,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방문은 6·25전쟁으로 맺어진 소중한 인연을 국제보훈으로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또한, 국내 상이군경 재활체계를 비롯한 기반 시설과 관련한 정책을 점검하고 구상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특히, 해리왕자를 만나 세계상이군인 체육대회인 인빅터스게임의 대한민국 유치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고, 우크라이나 보훈부 장관과 향후 긴밀한 업무 협의를 통해 대한민국의 보훈정책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박 장관은 “국가보훈부는 기존 22개 유엔참전국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유엔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알리는 다양한 국제보훈 정책과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또한 네덜란드군과 삼일공고와의 특별한 인연도 새롭게 소개됐다. 삼일공고는 6·25남침전쟁 당시인 1950년 말 강추위 속에 수원에 도착한 네덜란드 부대에 학교 안 아담스기념관을 숙소로 제공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1982년부터 삼일공고 졸업식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가 참석,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삼일공고 교사와 학생들은 매년 횡성전투 기념비 앞에서 열리는 참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이어 박 장관은 네덜란드 참전용사와 참전협회장, 네덜란드 국방부 감찰부국장, 반호이츠 부대원과 삼일공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감사 오찬 간담회를 갖고 ‘평화의 사도’ 메달을 전달했다. 간담회에서는 삼일공고 학생대표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한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낭독했으며,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협회는 삼일공고에 아담스기념관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전달했다. 한편, 반호이츠 부대는 네덜란드에서 한국전 참전을 위해 창설된 보병부대로 강원도 일대의 횡성지구·원주·인제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네덜란드는 미국, 영국, 호주에 이어 4번째로 병력을 파견했으며, 전투 중 120명이 산화하고 부상 645명, 3명이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다음편 계속)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받을 때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박 선배가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던 결과였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0)]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징표(하) 참조) 허나 이미 동국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지 5년이 다 되어 이번 학기가 석사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급해졌다. 그때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떠올랐다. 김 장군은 흔쾌히 귀국보고서를 필자에게 제공했다. 그때까지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다리에 통증은 있었으나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거의 석달 가까이 자료를 정리해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란 제목에 ‘남북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란 부제목의 논문 초안을 정용길 지도교수에게 보고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렸지만 절실하게 학구열에 불타는 필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논문을 검토하던 정 교수는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사영어반 교육이 논문준비에 유리한 여건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마운 김영식 동기가 제공한 귀국보고서를 기초로 국방백서 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남북한 통일시에 어떤 군사력을 보유할지를 분석한 논문 작성은 육군대학에서 박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석사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야전만을 전전하며 실무에 찌들렸던 필자는 재활치료 위기로 오히려 군사영어반에 다닐 수 있었고 석사학위도 받았다.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선태사해(蟬蛻蛇解)’의 호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생은 1903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8세의 나이이자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1일 전남 나주군에서 일본인의 성지(聖地)로 간주되는 나주 신사의 외곽 화표(華表)에 40여 개의 돌을 던지고, 신사 본 건물에 ‘대한독립 만세’와 태극 무늬 등 독립 의지를 알리는 낙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표는 신사 입구에 세워지는 돌기둥을 가리킨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사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죄를 받았고,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시점인 1920년 3월1일 거사를 일으킴으로써 3.1운동 정신의 확산에 기여하고, 3.1운동 1주년으로 경비가 삼엄하던 시기 일본인의 성지인 신사를 과감히 훼손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알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이번에 대통령 표창으로 추서됐다. ■ 고(故) 박재선, 1960년 퇴학 30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9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 고(故) 박재선 선생(여)은 졸업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인 1930년 1월 부산에서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격렬한 내용의 진정서 준비와 동맹휴교 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허나 사전 발각되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겪고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이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약 한 달 후인 어느 날 전교생이 전 공회당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가는 전차에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학생대표로부터 “우리들도 일어서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전기 두 조여사와 의논한 끝에 그날 밤 졸업반 동료 47명 전원을 영도(影島)의 박씨 언니 집에서 모이도록 하고 이곳에서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타협을 갖게 되었다. 이날 밤 36명이 모였으나 불참한 동료 1명이 배신, 학교에 내통한 탓으로 박씨와 조씨 등 4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고 약 2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자 약 2개월간을 경찰에 끌려다니면서 무진 고초를 당하고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도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3학년생 47명 중 34명이 지난 11일(토요일) 오후에 부산 목도(牧島) 동교 생도 모(某)의 집에 모여 그중에 여덟이 수모(首謀)가 되어 내용이 자못 격렬한 열두 가지의 조항을 갖춘 진정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13일(월요일) 조회시간 전에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일제히 동맹휴교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그 진성서를 초안까지 하여 정서(淨書)할 사람 한 명과 진성서 제출 책임자 두 명까지 선정하여 모든 협의를 진행하던 중에 그중 한 명의 학생이 그것을 자기 부모들에게 밀고(密告)를 하게 되어 그것이 드디어 학교 당국에게까지 알게 되어 거사하기 전에 발각되었다”고 보도됐다. 선생의 활동은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부산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 준비를 지휘한 선생은 퇴학 30년 만인 1960년 2월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경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1929년 광주에 머물지 않고 해를 넘겨 1930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 사례이며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학교 측에 대한 진정서 전달과 동맹휴교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CRISIS M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상)
-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들에게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100명을 발굴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했다. 그중 고(故) 함복련 선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임에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했는데 1919년 4월2일 경남 통영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조선총독부 검사국 수형기록인 ‘형사사건부’에는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한 함복련 선생이 1919년 4월 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되고, 4월14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경남 통영은 3.1운동 당시 기생을 포함해 상인・어민 등 사회적 소외층이 시위를 주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경 부도정 장터의 모습으로 장터 중심부가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빽빽하다. 1919년 4월2일 함복련 선생 등 통영 기생 7인이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였던 1919년 만세시위 당시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함복련 선생의 포상으로,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검사국에 송치된 기생 7명 중 총 5명(함복련 및 정막래・이소선・김진한・김영산홍)이 포상했고, 나머지 2명도 다음 계기 공적심사 예정이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CRISIS M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상)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⑭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군사영어반(당시 장교영어반으로 호칭)’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다. 그때부터 11월 종합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군사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과거 수방사 근무시에 유학반 시험 준비를 하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고배를 마시지 않겠다는 각오로 준비를 했고 재활치료를 하다보니 야전에서 근무하던 타장교들보다는 공부할 여유도 더 있었다. 그 와중에 육군대학 대대장반에서 모 장교가 교통사고를 당해 광대뼈가 부서지는 등 심한 상처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도 교통사고로 입원하여 진료를 받던 그동안의 많은 일들이 떠오르며 그 장교도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원복하기를 기원했다. 또한 지난 8월3일 오후 성남 서현역에서 묻지마 칼부림 사건이 발생해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처럼 당시에도 지존파의 부녀자 38명 살해 계획 실행, 군에서도 총기난동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는 현대 젊은이와 사회의 무책임한 자유와 방종 그리고 이기주의가 양상시킨 비극이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건들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재활치료로 부대에 부담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장교영어반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그해 11월초에 종합행정학교에서 시험을 치뤘지만 그 결과는 부족한 내 자신의 재확인이었다. 합격할 자신이 없어지자 눈앞이 깜깜해지며 필자가 서있을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5대1 경쟁율의 시험에 응시한 많은 장교들이 필자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헌데 열흘이 지나서 육군본부 인사처에서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천운이 따른 덕택이었다. 그리고 잠시 잃어버렸던 내 자신과 목표를 다시 찾았다. 합격자가 발표되자 몇 명의 지인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축하에 앞서 어떻게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냐는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교통사고로 대퇴부가 분쇄골절된 경험을 한 필자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필자는 그들에게 “시험 준비도 중요하지만 다리를 뿌러뜨려 막다른 길에 접어들게 만드는 것이 확실하게 합격할 수 있는 비법이다”라며 미소로 답했다. 비록 시험 결과는 자신이 없었지만 다른 응시자들과 비교해 다른 것이 다리골절이었기 때문에 표현했는데, 그들은 재미있다며 바로 본인도 다리를 뿌러뜨리겠다는 우스개 소리를 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⑭
-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독립유공자 100명 발굴 예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로 한국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을 도운 미국인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건국포장)과 만세시위에 앞장선 통영 기생 함복련 선생(대통령표창) 등 100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윌리엄스 선생은 한일합방 직전이었던 1908년 미국 선교사로 입국해 충남 공주군에서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1943년 인도 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印緬)전구공작대 대원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 독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애썼다. 함복련 선생은 1919년 4월 경남 통영군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에도 동료 기생들과 함께 통영의 중심부인 부도정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열기가 통영 전역에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일본 신사를 훼손한 남상홍 선생(대통령표창),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한 박재선 선생(대통령표창),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민족 차별적 편파 판정을 일삼은 일본인 장교 노다이 겐지를 응징한 김영조 선생(애족장),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파 수괴인 상해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을 처단한 김현수 선생(애국장) 등 광복절을 계기로 모두 100명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했다. 이번에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0명(애국장 8, 애족장 22), 건국포장 5명, 대통령표창 65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고, 여성은 13명이다. 건국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8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됐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 독립은 물론 ‘자유’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들께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국권 상실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을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선양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 소통시대
- CRISIS M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독립유공자 100명 발굴 예우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태사해(蟬蛻蛇解)’란 매미가 껍질을 벗고 뱀이 허물을 벗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이다.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것을 뜻하며, 해탈하여 더 높은 경지에 들어서는 것을 비유한다. 또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나타내어 변화와 혁신을 강조할 때 쓰인다. 이와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로는 사람이 보다 발전한 방향으로 변하여 전혀 딴사람처럼 된다는 뜻의 ‘환골탈태(換骨奪胎)’, 군자는 표범처럼 빠르게 잘못을 고쳐 혁신한다는 뜻의 ‘군자표변(君子豹變)’, 날로 진보하는 것을 뜻하는 ‘일취월장(日就月將)’ 등이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암울했던 1994년이지만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했던 당시의 상태는 필자에게 ‘선태사해(蟬蛻蛇解)’와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기회를 부여했다. 재활치료 때문에 차기 보직 발령에 다소 늦은 횡보를 보이면서 그동안 미뤄 왔던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할 시간과 여유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듯이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 더 발전된 상태로 변화하기 위한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⑬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마침 교통사고 당시에 필자를 부대대장 보직으로 조치해 치료받으며 계속 근무할 수 있도록 혜택을 준 80연대장 정형진 대령(육사30기, 소장예편)이 사단 참모장으로 영전했는데 천주교 신자로 매주 성당에서 만나 위로와 격려를 해주어 너무도 감사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고,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이라 여겨졌다. 한편 퇴원한 지 한달이 지난 뒤에 중령 진급 신고를 사단장에게 했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대대장으로 취임해 열심히 근무중이었고 필자만이 목발을 짚고 간신히 서서 행사에 임했는데 이때 사단장은 대대장으로 취임하기에는 아직 재활이 더 필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사단 평가실에 보직을 두고 예하부대 점검을 한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는 몸이 불편한 현실에 이미 취임하여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동기생들보다 자꾸 뒤떨어지는 느낌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에 사단작전장교 시절의 참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 짜리 ‘장교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11월 행정학교에서 치뤄야할 ‘장교영어반’ 입교 시험준비에 돌입했다. ‘장교영어반’ 교육과 필자의 재활치료 때문에 대대장 취임이 연기됨에 따라 전방 근무 기간이 길어져서 계획인사에 적용되어 다음 보직이 후방 2작전사령부 예하 대대장으로 조정되었다. 따라서 2작전사령부 인사처의 보임장교인 동기생이 순찰 등 이동이 많은 해안부대보다는 내륙위주인 37사단으로 검토한다는 전달을 받았다. 게다가 군근무 기간 및 계급정년이 늘어나는 군인력관리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중령근무 기간이 연장되어 재활치료 후에 어떻게 근무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진로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보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처럼 ‘천붕우출(天崩牛出)’란 고사성어가 뇌리를 때렸다.(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⑫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가을인 9월초이지만 그해 여름에 괴롭혔던 100년 만의 폭염은 아직도 남아있어 아파트 4층은 뜨거웠다. 하지만 무적태풍부대 정면옆에 위치한 아파트에서는 주변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서 퍼져나오는 냄새와 파리떼들의 습격으로 창문을 열기가 어려워 더위는 더욱 심했다. 그래도 죽음의 끝자락까지 다가갔던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병원 생활을 벗어났고, 그동안 자주 볼 수 없었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 아파트 주변 축사의 불쾌한 냄새마저도 감사했다. 목발을 짚은 필자는 그때까지도 거동이 완전하지 못해 부대로 출근은 못한 채, 아침 저녁에 사단 사령부 연병장과 주변을 열심히 걸으며 재활운동을 계속했다. 간혹 길에서 만나는 간부들과 인사를 할 때에도 걱정해주는 그들이 감사했고 덕분에 사단 참모부에는 필자가 복귀해 재활치료 중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빨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겠다는 것은 필자의 의지뿐이었고, 정상인처럼 빠른 속도로 걷고나면 핀이 박혀있는 다리의 근육과 목발을 이용하기 위해 끼웠던 겨드랑이와 팔까지에도 통증을 느꼈다. 대퇴부 분쇄골절로 인해 아직도 뼈가 완전히 붙지는 않은 탓이었으나 근육이 없는 다리는 변함없이 새다리처럼 가늘었다. 단지 병원생활 동안에 동기의 권고로 개종하여 성당을 찾아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 신자들을 만나는 회동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위안의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76]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⑪
-
-
[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11일~13일 2박 3일 일정으로 정부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내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자 광복군인 오성규 애국지사를 영주 귀국의 목적으로 13일 국내로 모셨다. 11일 일본으로 넘어간 정부대표단은 바로 도쿄로 이동해 조국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 오성규 애국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를 위문하고 자녀들과 면담을 통해 국내로 모시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번 정부대표단의 방일은 2018년 배우자의 사망 이후 아파트에 홀로 거주 중인 오성규 지사가 본인 생의 마지막은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국가보훈부에 밝히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성규 지사는 일제 강점기 ‘주태석’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만주 봉천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이영순, 조승회 등과 비밀조직망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탈출해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오 지사는 1945년 5월 한미합작특수훈련(O.S.S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오 지사는 교민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군 군사 특파단의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하였다. 정부대표단은 현지에서 먼저 오성규 지사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귀국에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되어 13일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 지사를 국내로 모셔와 가장 먼저 국립묘지를 찾아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를 하며 참배했다. 이후에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오 지사의 건강상태를 정밀 검진해 건강 정도에 따라 보훈요양병원 등에서 건강과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예우하고, 건강상 특이점이 없다면 오는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오성규 지사가 국내로 영주 귀국하여, 국내 독립유공자는 김영관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는 미국에 이하전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만 남게 된다. 한편, 정부대표단은, 오성규 지사의 영주 귀국 지원 외에도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순국지인 이치카야형무소 터와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를 참배하고, 재일본 YMCA 회관 내 기념자료실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踏査)했다.. 또한 박열 의사(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변론을 맡은 후세다쓰지(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의 후손과 재일한국유학생 대표 등과 면담도 진행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일본에 계신 마지막 생존 독립유공자이신 오성규 지사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지사님께 무한히 감사드리고 대한민국에서 본인의 소원대로 마지막 여생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출국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국립묘지 참배시에 직접 휠체어를 끌며 오 지사를 모셨다.
-
- 소통시대
- CRISIS M
-
[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
-
[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에 “백년만의 해후,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 표어(슬로건)의 부부 합장식이 거행된다. 또한 광복회 등 독립 관련 보훈단체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8월 12~13일간 서울현충원 현충관에 국민추모공간을 마련하고 다양한 추모·참배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1860년 0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1908년 4월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총재로서 한인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그해 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대동공보’의 사장으로서,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활동과 안중근 장군 등 독립군의 지원 활동도 했다. 이후 1911년 12월에 러시아 연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 독립을 위해 조직된 한인단체 권업회의 회장으로, 1918년 6월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도 선출됐다. 다음해인 1919년 3월에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어 그해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으며, 일제는 유해를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매장장소조차 숨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가보훈부가 최재형 선생 순국 100여년만에 순국 추정지의 흙과 배우자이신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와 서울현충원에 부부합장묘를 만들게 되어 너무나 뜻깊다”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유해마저 찾을 수 없었던 순국선열을 단 한분도 소홀함 없이 예우하는 일류보훈을 실현하는 첫걸음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순국선열을 예우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 소통시대
- CRISIS M
-
[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