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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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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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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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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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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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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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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1)]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⑧유엔군, 준동하는 친공포로들을 강경진압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 대장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수용소의 질서를 잡기 위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1952년 5월 신임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한 헤이든 보트너 준장은 총검을 장착한 보병과 탱크를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10일 만에 포로들을 진압했다. 기가 꺾인 포로들은 작은 규모의 새 수용 막사로 분산 수용되었다. 먼저 분산 수용을 시도한 곳은 가장 저항이 심하고 친공포로들의 본부 역할을 했던 76수용소였다. 6월10일 새벽 경비병들이 기관총과 박격포를 조준한 가운데 대부분의 포로는 새 막사로 이동했으나, 1,500여명이 불을 지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30여 명이 죽고, 130여 명이 다쳤다. 결국 76수용소의 포로 6,500명은 500명 단위로 나뉘어 새 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포로들이 떠난 막사에서는 창 3,000여 개, 가솔린 수류탄 1,000여 개, 칼 4,500여 자루가 발견되었다. 거제도 부근의 봉남도에 설치한 새 막사에서도 12월14일 폭동이 발생해 85명이 죽고 113명이 다쳤다. 압수된 비밀문서에는 1952년 6월20일을 기해 모든 수용소에서 동시다발로 탈출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보트너 소장은 이어 반공과 친공포로들을 심사를 통해 분리하여 반공포로들은 영천, 부평, 마산, 논산, 가야 등지로 옮겨 친공포로들의 테러에서 보호했다. ■ 어렵게 시작한 휴전회담, '뜨거운 감자'인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겪다 한편 전선이 휴전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했다. 양측은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시작해 보름만에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포로 송환'을 둘러싸고 암초에 부딪쳤다. 이 문제는 10월에 처음 의제에 올랐으나 회의 벽두부터 공산측이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를 석방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와 공전을 거듭했다.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공산측 주장이 옳았다.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 최초 공산 측의 자랑과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 1년 후인 다음 해인 1952년 5월,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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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1)]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⑧유엔군, 준동하는 친공포로들을 강경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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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7)]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시행한 하나회 출신 주요 장성들의 기습적인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이 모두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하나회 출신은 군 승진인사에서 계속 배격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 중에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하나회 명단 살포 건으로 인해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간혹 돌았으나,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이미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이러한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최초 사례를 낳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 당시 ‘알자회’도 발각되었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졌다. 알자회 34~36기 중에는 하나회와 중복되는 일부도 있었는데 7월에는 하나회 영관·위관급 장교들까지 색출해 예편시키거나 좌천시켰다. 가히 전격전을 방불케 하는 숙군 행보였다. 당시 주요 군부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24시간 비상대기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훗날 알려졌다. 하나회 자체가 군대를 실제로 동원할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물거품이 될수도 있었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동안 철야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 설이 돌기도 했다. 특히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말았다. 하나회의 주요 맴버들은 10ㆍ26 직후의 12·12 구테타 그리고 5·18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 세월을 누구 못지않게 험하게 보낸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벼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의 분노는 명료하고 집요했으며, 숙청작업은 쿠데타 가능성에도 상관없이 앞뒤 안가리고 잘라 버려 무모해보일 정도로 무대포스러운 위엄을 과시했다. 이러한 과감한 숙청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평도 나돌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前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前 수방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던 일화들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 중 우수한 인물들은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했다. 그래서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非하나회 출신 비영남권 군인들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렇기에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4년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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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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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7)]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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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0)]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⑦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한 포로수용소 도드 소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포로수용소에서의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고,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났다. 이로인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갈등은 1952년 5월7일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 도드(Francis. Townsend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 발생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갑자기 공산포로들이 밥에 독을 넣었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단식투쟁을 하면서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포로 대표단의 요청이 있으면 면담을 자주 가졌던 도드 소장은 아무 생각없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를 나눴다.포로들이 슬그머니 수용소 문을 열고 나와 도드를 둘러싸는데도 경비병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 '똥통'을 비우러 나왔다가 들어오는 포로들과 뒤엉켜 도드는 철조망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문은 닫혀버렸다. 세계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포로수용소장이 '포로들의 포로'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도드를 포로로 잡은 친공포로들은 곧바로 현수막을 걸었다."우리는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된다. 총격이나 그밖의 폭행이 가해진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줄 알아라"현수막이 납치 직후 곧장 내걸린 것으로 보아 도드 납치 계획은 미리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포로들은 이어 친공포로에 대한 학대 중지, 송환 강제 심사 철회, 자유 송환 중지, 포로 대표단 인정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후임 소장으로 임명된 찰스 콜슨 준장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포로들의 송환 강제 심사나 개인 심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콜슨이 무릎을 꿇자 도드 장군은 감금 78시간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도드가 살해되더라도 무력으로 수용소 질서를 바로잡으려던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뜻에 완전히 배치되는 조치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도드와 후임 소장 콜슨 장군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했다. 미군은 수용소 내에서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결국 포로들을 광주, 논산, 부산 등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 프로필 ▶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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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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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0)]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⑦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한 포로수용소 도드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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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6)]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알자회‘와 같은 군내의 사조직 문제는 4년 뒤인 199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이 ’하나회‘ 출신인 서남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부장관을 통해 보고하라"라고 지시하면서 표면화됐다. 나무위키 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 값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실추된 군과 육군의 명예를 바로잡고(…)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김 대통령이 취임한지 11일째인 3월8일 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는데, 몇몇 최측근들과 의논하다 이날 아침에 권영해 국방부장관을 불러 독대를 했다. "장군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느냐?"라고 일단 김 대통령이 운을 뜨자, 권영해 장관은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는다"라고 답했고, 김 대통령이 "그럼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고 말하자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부로 바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비 하나회 출신인 김동진과 김도윤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이러한 과정이 단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전격적인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이고 그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군은 물론 청와대 내에도 드물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를 이어받아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은 대선 후보가 됐고,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즐비했던 당시 민주정의당의 지원으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과 며칠 단위로 각군 사령관과 사단장급까지 교체하는 일이 4월에 전개되었다. 4월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19기) 전역조치, 4월8일 1군사령관, 3군사령관, 2작전사령관 보직해임, 4월15일 하나회 출신 군단장과 사단장 거의 전원을 강제로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뇌부에 대한 숙청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나회 출신이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하나회 회원이던 이충석(당시 소장)이 술자리에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술잔을 던지며 소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하나회 숙청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에 의해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아예 조기 전역까지 당하며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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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6)]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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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한 신경전이 전개되는 답답한 양상이었다. 그러던 중, 1951년 12월18일에 최초로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포로 명단을 교환했다. 이때 공산측 포로는 북한군 11만2000명과 중공군 2만명으로 도합 13만 2000명이었고, 반면에 연합군은 미군 3200명, 남한군 7000명, 유엔군 1600명으로 총 1만1800명이었다. 당시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다. 이에 따라 포로 교환 원칙에 대해 이견이 생기고 상호 갈등도 심화되며 회담도 장기화 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유엔군과 국군은 포로들의 1대1 교환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강조했다. 특히 남한은 북한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군으로 끌려갔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던 것은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급속한 유엔군의 북진과정에서 11만명이 넘는 많은 수의 북한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포로로 잡혔고, 반대로 중공군 개입후 1·4후퇴과정에서 1만명에 이르는 유엔군이 북한군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되여 미군이 관리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한국군에게 수용소의 통제와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포로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용소 내에 다양한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포로 교환이 논의되면서 다툼은 더욱 격해졌다.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포로들은 남한에 남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미군은 1952년에 포로 심사 과정 중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민간인으로 구분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 확인을 방해하면서 전원 북송을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다. 후에 이 기독교인들은 반공포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한에서 억지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 체제에 실망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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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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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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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5)]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영삼 대통령이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중 가장 중심에 있던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필자는 그 사조직의 정확한 실체를 알게 되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의 면모를 살펴볼 때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한 면도 일부 있었다. 한편 육군대학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사적모임을 만들었다. 따라서 육군대학 교육과정에서도 상호 교류하며 새로운 사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1989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만나는 모임들을 볼 때 서울에서 들려온 선후배들의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던 소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생도시절 사관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며 동기회에 포함시켜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꼭 이렇게 제명까지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체 동기회를 열기 전에 일부 동기들과 상의하며 의견도 수렴한 결과로 우리 동기회에서는 다른 선후배 기수처럼 제명까지는 안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당시 동기회 간부직을 수행했던 필자에게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며 제명을 강조했던 일부 동기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절한 논리는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의 모임도 어떻게 보면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고, 게다가 모두가 알고 있는 럭비, 축구부 출신들의 모임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고 이해를 시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조직 명단을 확보하여 사조직에 포함된 동기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후배기수에서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격앙된 논쟁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던 동기생부터 각개 격파식으로 이해를 시키자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전체 동기회도 개최할 필요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상태를 돌이켜보면 격앙된 논쟁을 통해 사조직 동기생들을 제명시켰던 선후배 기수에서는 사조직에 해당된 사람이 4성 장군까지 진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당시의 제명 소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필자의 동기들은 아직도 상호 교류를 친밀하게 나누며 각종 애경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40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결국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의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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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5)]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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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8)]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⑤미국, 휴전 반대하는 이승만 제거도 검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말리크의 휴전협상 제의가 있기 전인 6월11일 변영태 외무장관의 국회연설을 통해 ‘38선 휴전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양유찬 주미대사도 휴전이라는 타협은 유엔의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이후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7월10일부터 15일 간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고 자국 내에서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던 미국은 휴전을 강행해야겠지만, 그럴 경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이승만이 큰 걸림돌이었다. 만일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한다면, 당연히 휴전은 깨지고, 미국은 다시 전쟁에 끌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고차원적인 여러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이렇듯 미국의 입장에서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있는 이승만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미국은 한 때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했다. 휴전후 20여년이 지난뒤인 1975년 8월3일 ‘뉴욕 타임스’는 새로 분류된 기밀문서에 근거를 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각 군 참모총장들이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군정 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미국은 다른 정책으로 선회한다. 그 이유는 반공주의의 상징인 이승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열전과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도 상당한 손실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이 택한 다른 정책이란 선거를 통해 미국에 유리하게 행동할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을 패퇴시키고 미국 측 의견을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장면은 38도선을 분단선으로 재설정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승만의 국내에서의 입지, 특히 국회 내에서의 입지도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평소 그의 소신이기도 했다. 1948년 제헌헌법 당시 국회의 대통령 선출 방식인 간선제에 그는 마지못해 찬성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국회 간선제에 동의했지만 ‘한국 국민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면 반드시 선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6.25남침전쟁 발발 이후 한국인들은 공산침략에 대항해 불굴의 저항정신을 발휘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국민들이 국가 원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와 능력의 충분한 증거라고 보았으며, 이를 근거로 개헌을 추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독재자’라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분단 상태의 존속은 기정사실화된 결론이었고, 이에 대해 약소국 대통령인 이승만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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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8)]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⑤미국, 휴전 반대하는 이승만 제거도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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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4)]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나무위키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알자회를 설명하고 있다. 알자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92년 11월13일의 신문기사들이다. 그때 군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알자회는 1983년 당시 대위였던 육사 34기생들이 결성하여 육사 44기생까지 기수별로 10여 명씩 모두 120여 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알자회가 외부에 드러나게 된 계기는 1992년 당시 육사39기생들이 알자회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하고 상부에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이다. 이어서 동월 16일에는 육사 40기생들이 알자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지 11일째인 1993년 3월8일부터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중에 가장 중심에 있던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당시에 ‘알자회’도 거론되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국방부의 공식적 입장은, “알자회는 이미 해체되었으며, 비선에 대한 인사개입은 존재하지도 않고, 일부 인원이 잔존하였으나 현재로선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내 사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심각한 위헌행위이며, 하나회가 어떤 병폐를 저질렀고, 어떤 과정을 통해 혁파되었는지를 본다면 알자회 역시 그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나회 관련 내용은 다음편에서...) 결국, 이 사건의 파문으로 인해 1993년육군이 최초로 진급심사과정을 공개하였고 군 차원에서 잔존 알자회 회원을 전원 숙청하기로 결정하여, 알자회 관련 장교들의 진급을 영구누락시키고 해당 계급에서 전역 조치 또는 진급이 어려운한직으로 배치하는 강수를 두었다. 허나 필자가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알자회‘같은 군내의 사조직 문제로 고민했던 시기는 이미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숙청 4년 전인 1989년 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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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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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4)]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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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승리와 독립군 궤멸 책임의 딜레마에 빠진 홍범도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15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됐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그의 유해는 8월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정식으로 안장됐다. 헌데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발생시,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여 독립군을 유인·학살했던 홍범도 장군이 묻히는 대전 현충원에는 마찬가지로 북한군의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들이 안장돼 있다. 따라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한국 독립군을 몰살에 이르게 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문제 등 냉정한 평가가 요구되면서 현충원 안장과 대한민국장 추서 자격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제기된다. ■ 홍범도, 한국 독립군 대학살 '자유시 참변' 가담, 이후 대한 무장독립운동도 막 내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적군(赤軍)이 대한독립군을 포위해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대한독립군은 한인사회당 이동휘의 선전·유도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은 4500여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하려 했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련으로부터 천문학적 자금을 지원받은 뒤 한인 무장독립군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년11월~1921년)로 있는 동안 소련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은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혼재된 상태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적군 산하로 편입돼야 한다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 등으로 분열돼 반목현상이 심화됐다. 이중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사할린 출신 부대에서 소련군 편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소련군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 등을 앞세워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는 사할린 부대 편에 섰다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편으로 돌아서서 사할린 부대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이르쿠츠크파 배후에는 소련 정부가 있었다.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은 전사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등 상당수가 희생 당했다. 이밖에도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에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어 3500명에 달했던 대한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가했던 부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은 당시 러시아행을 탐탁해 하지 않아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국내로 되돌아와 참변을 면했다. 그러나 김좌진 역시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항일 무장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체포당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이로써 한국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1920년 이후 봉오동·청산리대첩과 같은 항일 무장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홍범도는 그 뒤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자유시 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는 한인 대표로 참석했고, 여기서 레닌과 단독면담도 가졌다. 학계에서는 "레닌의 선물은 사실상 소련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나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군복은 1923년에 벗었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됐으며,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삶을 초라하게 마감했다. ■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많은 국군들이 영면하는 곳에 친소 괴뢰 홍범도의 안장은 잘못 일본군 1000여명 이상을 괴멸시킨 ‘청산리 대첩’은 중대 규모를 패퇴시킨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작전술적 기동을 통해 일본군 주력을 괴멸시킨 것은 김좌진, 이범석 등의 탁월한 전술적 혜안 때문이었다. 전 육사교장 박남수 장군(육사35기, 육군중장 예편)이 저술한 책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에 따르면 “홍범도는 조선말에 하층계급에서 일어선 ‘의병장’으로서 애국심과 전술적 투쟁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홍범도의 한계였다”는 이 장군의 의견이 적혀있다. 또한 철기 이범석 장군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홍범도 부대가 연합을 이탈한 며칠 후에 안도현 입구인 우도양창 계곡에서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거의 괴멸 수준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라고도 했다. 이것은 1990년 소개된 ‘홍범도일지’에 실제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뉴데일리 기사에 따르면 강규형 명지대 역사학과 교수는 "홍범도는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는데,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홍범도 나이가 만 53세였다"고 의견을 밝히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어 강교수는 "홍범도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자유시 참변’에서 민족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반민족행위를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고,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홍범도의 공과에 관심을 가져온 한 예비역 장군은 동전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보훈 조치를 해야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동족상잔 비극인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천안함·연평도 포격 등 북한군의 불법 도발에 의해 전사한 분들이 영면하시는 장소에 홍범도를 안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친소 괴뢰 논란에 빠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하나만 봐서도 용서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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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승리와 독립군 궤멸 책임의 딜레마에 빠진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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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3)]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든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 문제는 서울에서 개최된 사관학교 후배기의 동기회 전체 모임에서 발단이 되었다. 당시에 필자도 생소했던 ’알자회‘가 후배기의 동기회 모임에서 최초 거론되었다. 그 모임의 회원들이 주요 요직에 보직되어서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격앙된 논쟁을 통해 그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동기생들이 모인 육군대학의 한 학생장교에게 연락하여 필자의 동기회에서도 같이 제명하자고 제의했다. 전달을 받은 그 동기생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며 필자에게 동기회에서 사적모임인 ’알자회‘ 회원들의 제명을 강요했다. 그의 흥분된 항의를 들은 필자는 동기회 간부직을 맡고 있어 제명수용과 거부의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동기중에 누가 ’알자회‘ 회원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체 동기회를 열기 전에 일부 동기들과 상의하며 의견도 수렴했다. 그런데 필자가 사조직 명단을 확보하여 사조직에 포함된 동기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후배 기수에서처럼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격앙된 논쟁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동기애로 똘똘 뭉쳐 사조직 뿐만 아니라 모든 동기들에게 잘 처신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선배와 다른 후배 기수에서 관련자들을 또 제명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됐다. 그러나 군내 사조직을 돌이켜 볼 때 ’알자회‘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앞서 설명한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의 모임도 어떻게 보면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모두가 알고 있는 사관학교 럭비, 축구부 출신들의 모임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었다. 헌데 당시 육군대학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모임을 만들어 상호 교류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조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만나는 모임들을 볼 때 서울에서 들려온 선후배들이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던 소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생도시절 사관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며 동기회에 포함시켜 운우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꼭 이렇게 제명까지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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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3)]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