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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안중근, 천안함 트리플 추모(상)
[시큐리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3월26일은 ‘이승만 건국 정신 계승 국민대회’가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신일이며, ‘안중근 장군 순국 114주기 추모제’와 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리는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이었다.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 나흘 앞선 지난 22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렸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동시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에 잘 맞서서 대응해야 한다”며 “어떠한 위협도 응징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화를 나눴고 “이렇게 명백하게 도발과 공격을 받았는데도 자폭이라느니 왜곡, 조작, 선동해서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영웅들을 이렇게 모욕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이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반드시 막아 내야겠다”며 “저희가 잘하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차에 탑승하기 전 한 위원장과 악수하며 한 위원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이날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았는데, 내달 총선을 앞두고 당과 대통령실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4·10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 같은 시기에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만나면서 갈등이 봉합 국면에 접어든 상징적 장면으로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정 간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 ‘부활한’ 천안함에 오른 영웅들…“이제 피격당하지 않을 것” ‘제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린 26일 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생존장병들과 전사자의 유가족 등은 신형 호위함으로 다시 태어난 ‘천안함(FFG-Ⅱ, 2800톤급)’에 오르며 “많이 좋아졌어. 이 배라면 서해 나가서 두 번 다시 피격당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야”라며 반겼다. 또 다른 유가족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천안함 사건과 내 아들을 잊은 날이 없다"라며 "이름을 이어간 천안함 장병은 물론이고 국군 모두가 다시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고, 또한 유족회장은 “새 국회에선 천안함 괴담 방지 특별법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호위함 천안함은 '천안'을 함명으로 사용한 해군의 세 번째 함정이다. 천안함은 초계함(PCC, 1000톤급)보다 크기와 무장, 방어능력을 대폭 증가했다. 천안함은 길이 122m, 폭 14m, 높이 35m 크기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55㎞)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할 수 있다. 주요 무장으론 5인치 함포와 함대함유도탄, 한국형 수직발사체계(KVLS)로 발사하는 함대지유도탄·장거리 대잠어뢰(홍상어)·유도탄방어유도탄 등이 탑재돼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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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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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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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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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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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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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1)]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을 격파한 전투로 6·25남침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역시 ‘항미원조 전쟁경험 총결’이라는 기록물에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한 전투이다. 9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개전초기 6사단장으로 춘천지구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5일동안 지연시켜 북한군의 남침계획을 무력화시켰고, 낙동강전선에서 반격 작전에 나서 그해 10월 최초로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김 장군은 6·25남침전쟁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 1951년 5월 현리전투에서 3사단장으로 중공군에게 불명예스런 패배를 당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차였다. ■ 훈련으로 흘린 땀은 전장에서 흘릴 피를 줄이고 승리의 영광을 안겨… 1952년 10월6일 시작된 백마고지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고지 쟁탈전으로 피아간 12차례 공방전을 벌여 7번이나 주인이 바뀐 대혈전으로 중공군 1만여 명, 국군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27만5000여 발의 포탄으로 황폐해진 고지의 모습이 하얀 말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라 불렸다. 한편 밴플리트 장군은 1951년 5월,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의 패배와 현리 전투에서 3군단의 붕괴는 한국군에게 치명타를 가져온 결과였고 이로 인해 한국군에 필요한 것은 인력과 장비가 아닌, 지휘력과 훈련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는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은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며 9주 훈련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제안했고 이에 따라 전선에 무조건 48시간 내로 복귀할 수 있는 위치마다 ‘야전훈련사령부(FTC)’를 4곳에 개설하였다. 부평리는 미 1군단이, 양양에는 한국군 1군단이, 양구는 미 10군단이, 마지막으로 사창리에는 미 9군단이 책임지고 훈련시켜 한국군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또한 FTC의 구성 인원들을 한국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들로 메웠으며, 이들의 노력 덕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가 제작됐다. 사실상 이들 모두가 ‘한국군의 아버지들’인 격이다. 그들은 한국군이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기대했다. 고 백선엽 장군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받았던 훈련이 오늘날 육군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19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야전훈련사령부(FTC)’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마지막 9주차에는 지금까지 진행한 훈련에 대해 검토한 후 연대 및 사단 참모들이 사단급 지휘소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한국군 사단들의 전투력 재건이라는 화려한 부활로 화답했다. 또한 모든 사단들이 물자와 병력을 제대로 보충받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후 ‘가칠봉 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다. 공산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한국군은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중공군과 북한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이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 유엔군의 확전 방지 위한 현전선 고수 명령으로 출혈만 강요된 고지전 계속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유엔군은 확전 방지를 위해 현재의 선에서 더 이상 공격하지 말고 전선을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 명령을 교묘히 이용해 주요고지를 기습해서 탈취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한국군이 장악한 고지를 골라서 노렸다. 우리 국군의 전투력과 화력이 미군에 비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952년 철원은 인근의 평강,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면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대치해 있는 곳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중공군은 작은 목표물로 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요충지를 찾아 공격하고자 했고, 철원 서쪽의 395고지(백마고지)와 281고지(화살머리고지)는 그들이 노리기 딱 적격인 장소였다. 당시 유엔군이 철원평야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위의 상황도처럼 철의 삼각지대 중앙에 있는 395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395고지 하나만 차지하면 철원 일대를 통과하는 유엔군 보급선을 전부 위협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남쪽 평야에서 보면 여긴 고지가 맞지만 주변, 특히 북쪽이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 산들이라 그 산들과 함께 보면 동네 야산 수준이라 감제당할 수 밖에 없는 형상으로 아군이 불리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종오 사단장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계획에 따라 초급간부와 병사들에 대한 교육을 마친 상태였다. 특히 155mm포는 갖추지 못했지만 9사단은 이전보다 잘 훈련된 3개 포병대대와 전차중대도 보유했고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위한 화력지원통제소를 한국군 최초로 설치하여 운용 준비를 끝냈다. 이런 상황에서 펼쳐진 중공군 38군의 공세를 맞이한 게 395고지 일대에 주둔해 있던 국군 9사단이었고, 마침내 후일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는 395고지의 전투가 시작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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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1)]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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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0)]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시 777린치 특임부대 말고도 또 다른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처럼 북한군 6사단도 낙동강 전선에서 호남지역으로 우회하여 미8군 방어선의 측방인 진주 및 마산 방향으로 공격하며 부산 교두보를 위협했다. 이에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상주 남쪽에 있던 미 25사단에게 마산 방면으로 이동하여 적을 분쇄하고 대구 일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도록 진주-사천선까지 공격하는 명령을 내렸다. 미 25사단장 킨(Kean) 소장은 8월3일 36시간 동안 야간 행군까지 강행하며 240km를 이동해 마산에 집결했고 배속부대를 포함한 킨(Kean)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작전에 투입했다. 예하 35연대는 격전을 치르면서 10일 목표인 진주고개에 도달했으나 미 5연대는 봉암리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전진이 부진했으며, 미 5해병연대는 11일 고성을 점령하고 12일 사천 입구까지 진출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저지되었다. 따라서 워커 장군은 기동 예비대 부족을 인식하고 각 부대를 진동리-남지선까지 후퇴시켜 방어선을 축소하고 미 5해병연대를 8군 예비로 돌렸다. ■ 킨(KEAN) 특수임무부대는 적 기도 분쇄 등 소방차 역할 및 777린치 특임부대 운용에 교훈 제공 이 작전은 개전 이래 최초로 실시한 아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지만 적정 판단의 부정확성, 적의 침투 및 후방 교란과 산악지역의 매복에 대한 대비책 결여 등 미비점으로 인해 예상외의 큰 피해를 입고 성과마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마산 지역을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적의 기도를 분쇄했다. 또 상주지역 방어부대를 마산지역에서 반격 작전으로 운용하다가 예비로 전환하여 타지역에 재투입하는 등 소방차 역할을 충실히 하여 추후 반격 여건 조성에 기여하였다. 특히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 작전시 이를 참고로 한 777린치 특임부대 운용 등 차기 작전에 많은 교훈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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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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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0)]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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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2)]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식한 전법으로 웅덩이의 위와 아래를 막고 물을 퍼내어 물고기를 잡는 낚시 방법이었던 ‘막고 푸는 방법’을 택하자 몹시 바빠졌다. 그 날 교관이 강의하며 강조했던 교리는 조사까지 그리고 농담까지도 모두 기록하며 모두 암기하기로 했다. 선배들의 고추가루(참고자료)를 기초해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된 것만 쌓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꽉꽉 눌러서 마구 쑤셔 넣기식” 학습으로 전환했다. 물론 이방법은 학습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음 시험부터 달라졌다. 단지 혼자서 교범을 읽고 숙지하는 것은 나름의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으나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막고 푸는 식으로 강의 및 토의시 한마디씩 던지는 교관의 모든 발언에 초점을 맞추자 교범의 행간에 숨어있는 교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수업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농담은 당시 교리를 암기하는 중요한 연상도구가 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시험장에서 강의시 교관이 이야기했던 토시까지도 기억하여 적어낼 수 있었다. 시험평가가 끝나 시험장 밖을 나오면 상단의 사진처럼 모범답안이 복도에 게시되어 그날 시험의 성패를 바로 짐작할 수 있었고,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면 교실 입구에 비치되 모자함에 각 개인의 성적표가 꽂혀있어 그날은 진해 시내 술집엔 학생장교들이 모여 시험 후 회포를 푸는 시간이 되곤 했다. 교육 역시 인간이 가르치고 그 사람이 평가하는 법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에 맞춰서 공부하고 작성한 시험 답안지는 해당 교관이 요구한 정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실은 참모학 과정 시험결과부터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종합평가 후에는 우등은 아니었지만 미소를 띄울 수는 있었다. 특히 시험을 앞둔 취준생이나 직업인들을 위해 한가지 추가로 팁을 제공한다면 각종 업무 및 방안에 대한 발표시에는 그동안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의성 있는 의견 제시가 높은 평가를 받지만, 시험평가는 기발한 창의성 보다는 교관의 의도를 고려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전술학과정에서 공격시에 곧장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과 우회나 포위기동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법 등이 있는데 각자의 의견 발표시 어느 방법을 택하던 그 방법에 부합된 여건을 제시하면 오히려 창의적이라고 칭찬 및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험에 임할 때는 시험 문제에 제시된 조건들을 면밀히 분석하면 교관의 의도가 세가지 방법 중에 어느 것에 해당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 교관의 의도에 맞게 그 기동 방법으로 답안을 작성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바른 정의길을 가야하는 것은 진리이지만, 당시에 처한 상황과 조건이나 상급자의 의도 및 요구를 고려하여 결정하고 수행할 때 성공하는 직업인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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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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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2)]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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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9)]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의미이다. 6·25남침전쟁시 낙동강에서 교착 상태를 맞게 되자 유엔군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새벽,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그리고 26일 밤 12시에 낙동강에서 북진한 미 1기병사단의 선발부대인 777린치 특임부대와 오산에서 연결에 성공함으로써 크로마이트 작전을 완결 시켰다. ■ 777린치 특임부대는 하루 동안 160km이상의 초고속으로 진격해 연결에 성공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인천에 상륙한 국군 2해병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때를 맞춰 낙동강 전선의 미 8군도 9월16일 09시를 기해 총반격을 개시했다. 위의 상황도처럼 미 1군단은 대구-김천-대전-수원의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미 10군단과 연결함으로써 북한군을 양분시켜 차단 고립시키고, 미 9군단은 호남 일대를, 국군 1, 2군단은 중동부 및 동부 축선을 담당하여 적을 분쇄하는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특히 중앙의 1기병사단은 총반격 작전의 주공부대였다. 선봉은 7기병연대 1,3대대를 주축으로 이룬 777린치 특임부대가 맡았다. 한편 인천으로 후속 상륙한 미 7사단 32연대가 해병의 우측방을 방호하며 연결 작전을 위해 안양으로 진출했다. 21일 밤 32연대는 야간전투를 불사하고 작전지도를 나온 작전참모까지 전사하는 격전을 치룬 끝에 수원 비행장을 탈취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수원비행장은 유엔군의 전진 기지뿐만 아니라 초과된 인천의 보급 수요를 대체할 보급기지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망치와 모루’의 작전개념에 의한 모루의 역할 분담이었다. 결정적 타격을 가할 망치의 역할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한 미 8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모루의 역할을 맡은 미 10군단은 단지 2개 사단에 불과했다. 수원 일대에서 미 8군과 연결하고 서울을 탈취하는 것으로 작전을 제한하고 원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도 위험 부담 때문에 자제했다. 망치역할의 미 1기병사단 최선두 777린치 특임부대(3대대)는 9월22일 08시 다부동 서쪽에서 출발하여 낙동리-상주-보은-청주-천안-오산으로 고속 돌파했다. 드디어 26일 하루 동안에 보은으로부터 무려 160km이상을 초고속으로 진격한 당일 22시26분경 미 7사단 31연대와 오산 북방 6km 지점에서 합류 및 연결에 성공하여 크로마이트 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었다.(일설엔 32연대와 연결했다는 기록도 있음) 28일에는 31연대가 오산 부근의 92와 117고지에서 북한군 방어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즈음 미 1기병사단의 주력도 오산에 도달해 있었으나 31연대장은 미 1기병사단과 협공을 거부하며 독단 전투를 수행하다가 전진 속도를 지연시켰다. 이에 알몬드 군단장은 10월5일 31연대장을 전격 경질했다. 그만큼 협공과 작전 속도를 중시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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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9)]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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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8)]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시점에서 퇴로를 차단당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산악지대의 소로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때 패잔병이 되어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병력은 10여만명 중 2~3만명으로 추정됐다. 국군과 UN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다음 단계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훗날 박정모 소위는 금곡전투,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여 받았고 해병 대령으로 전역한 뒤 2010년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양병수 이등병도 미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14년 ‘9월의 현충인물’에 6·25남침전쟁간 서울 탈환작전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영웅 박정모 대령이 선정되어 그 소중한 정신과 실천을 가슴 깊이 기리고 있다. 최근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장군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 무릎수술에도 불구하고 군생활을 한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다”라는 구두 논평을 냈다가 논란이 커지자 유감을 표명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박 의원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안중근 장군의 말을 제대로 실천한 진짜 군인은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 아니라 6·25남침전쟁시 태극기를 게양한 박정모 해병소위, 연희고지 전투의 고길훈 해병소령, 영등포 전투의 탱크킬러 모네건 일병, 백선엽 장군 등과 같은 전쟁영웅들임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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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8)]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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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1)]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에 입교했을 때 사관학교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이어 계속된 일반학과 참모학 과정에서도 사단작전장교로 경험한 야전실무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준비하고 발표하며 시험을 치루었지만 결과는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공부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어린 시절에 시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상류쪽에 흙을 쌓아 물을 막고 하류 쪽마저 막은 후에 물을 모두 퍼내면 물이 빠진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을 참고하여 실천하기로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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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1)]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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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0)]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경찰의 경우에는 최초 순경으로 임용된 후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경장에서 경감까지 일부 인원을 시험으로 진급시킨다. 직업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육군소위로 임관하면 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OBC), 대위로 진급하면 고등군사반(OAC), 영관장교가 되면 각군 대학에서 보수 교육을 받고 그 수료 성적이 차후 진급심사에서 결정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병학교나 육군대학에 입교한 학생장교들은 대입시험시 ‘4당 5락’이라는 유행어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별 보기식 학습을 했다. 우등생으로 수료하면 제일 좋지만 졸업 성적이 최소 1/3수준인 ‘상층’에 포함되어야 차후 진급 심사시에 피해없이 선발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된다.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첫 소양평가를 치루고 기본적인 참모 및 지휘학을 배우면 다음 과정으로 전환될 때 다시 시험을 봤다. 전술과목에 들어서면 전술담임교관의 지도아래 공격 및 방어 전술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전략 과목과 종합시험까지 치루었다. 육대 정규과정의 1년 간 교육기간 중에 거의 매달에 한번씩 시험에 응해야 했고 강의 도중에 요약 및 중간 평가도 있었으며, 교육에 임하는 학생장교들의 자세까지 교관들이 평가하여 점수화 하기 때문에 발표시간이 되면 사전에 준비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여 교관의 눈에 띄도록 노력도 했다. 이러한 실상을 돌이켜 볼때, 30~40세의 나이가 된 학생장교들은 시험・평가가 직업인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이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임을 절감했다. 또한 서글픈 경쟁사회의 단면을 느끼게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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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0)]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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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7)]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5해병연대가 고전하자 뒤늦게 합류한 미 7해병연대를 미 5해병연대 좌측방에 배치하였다. 25일에는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포위하는 형태를 갖추고 일거에 서울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했다. 서울 탈환작전은 주공인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로 연희 고지와 와우산을 점령했고 일부부대는 서울시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북쪽은 미 7해병연대와 국군 5해병대대가, 남쪽은 미1해병연대와 국군 2해병대대가 배치된 반원 모양의 궁형(弓形)태세를 형성하였다. ■ 북한군 점령 89일 만에 박정모 해병소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게 하다 9월25일 밤, 서빙고 쪽으로 도하했던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 탈환의 막바지 전투가 개시됐다. 주요 공격목표는 중앙청과 서울시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주공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며칠동안 서울 연희 고지 전투 등 격렬한 전투로 병력 손실도 많고, 인원도 부족해서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으나 북한군의 최후 발악적인 저항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이 불가해 26일 새벽까지 고착되었다. 다만 서울 남쪽을 담당한 국군 2해병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26일 서울 진입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북한군의 지연 전술을 분쇄하는 것으로 ‘바리게이트 전투’로도 불린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서울 시민을 동원해 주요 도로 요충지에 200~300m 간격으로 전진을 방해하는 바리게이트 장애물을 설치했고 북한군 병사들은 빌딩의 지붕이나 창문마다 득실거렸다. 그들은 전진하는 유엔군 부대원들을 저격하거나 휘발유로 만든 사제 폭탄을 던졌다. 바리게이트 장애물 극복은 매우 느리고 위험했지만 보병들이 바리게이트 주변의 저격수나 기관총수들을 사살하거나 패주시키면, 공병들이 뛰어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후에 전차가 바리게이트를 깔아 뭉개면서 진격로를 열었다. 바리게이트 한 개를 돌파하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려 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음날 조선호텔까지 진출해 대대본부를 배치시킨 미 1해병연대에 소속된 국군 2해병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중소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 기자가 “중앙청은 미 5해병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고 이승만대통령께서 말씀하셨고, 상금 3000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띔해줬다. 이 말을 들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 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 허가를 상신했다. 허락을 받은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하며 중앙청 장소로 접근했다. 세종로 일대에서 북한군이 구축한 마대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했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제압한 후에, 2개 분대를 중앙동 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로 근접에서 방호하도록 운용하며 2미터 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이등병을 대동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고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해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9사단과 18사단 등 2만여명 병력을 추가 동원해 서울을 끝까지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 시가지 교차로 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지 전투를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 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용감한 한미 해병대에 의해 무산됐고, 이어서 9월28일 유엔군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 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서울은 완전히 수복됐다. 3개월 동안 적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은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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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7)]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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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9)]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21년 3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KOSIS,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전체 실업자가 121만 5000명이고 그중 청년은 42만 6000명에 이르고 있다. 청년실업율은 실업율은 10%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최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6년을 학교에서 각종 시험들과 씨름하며 희비가 엇갈린다. 좋은 성적을 올려 각자가 원하는 대학을 들어갈 때는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또다시 취업시험에 고민이 앞선다. 121만 5000명의 실업자 중에 많은 취준생들이 법관, 경찰, 군인 등의 공무원이 되기 위해 강남과 노량진 등지에 즐비한 일명 고시학원들을 다니고 낡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기숙하면서 청춘을 다 모두 소모하며 당락에 목숨을 건다. 허나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시험에 합격하며 취업하여 실업자 신세를 탈출하더라도 또 취업한 직장에서 진급시험, 보수교육 평가 등을 치루어야 한다. 또한 퇴직후에는 공인중계사, 복지사 등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하는 경우도 있어 직업인들은 시험·평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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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9)]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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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6)]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기념관은 해병대 창설에 참여하고 6·25남침전쟁 때 공을 세운 고길훈 해병 소장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020년 7월2일에 밝혔다. 함남 영흥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도쿄 메이지대 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참여해 초기 해병대의 체제 정립에 기여했다. 1950년 북한군이 호남지역까지 남하하자 해군본부는 제주도에서 대기하던 해병 300여 명을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호남지역 사수를 명령했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지역에 상륙해 사흘 동안 군산 일대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군산항에 적재된 정부 재산을 지켜냈다. 이후 고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1해병대대장으로 참여해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병학교장과 1해병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한 고장군은 휴전 후에는 해병1여단장과 1상륙사단장 등을 맡았다. 1963년 12월 해병 소장으로 예편했고, 1981년 2월 61세로 별세해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52년과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이 연희고지 전투는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감행하는 불굴의 해병대 정신을 알려주는 전례로 널리 알려졌다. 이에 해병대는 이 104(연희)고지에 전적비를 세우고 매년 9월 서울 수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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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76)]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