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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6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고(故) 최규봉 KLO(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 유엔군에 제공한 민간인 조직)부대장의 전공에 대한 진위 여부(월간조선 2003년 9월호 기사 참조)의 논란이 있었지만, 2012년 6월22일 서울 해군호텔에서 최 KLO 부대장의 전공을 인정했던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따르면 “최규봉 KLO 부대장은 인천상륙작전 당일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적을 교란시키라는 UN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적 2개 분대와 싸워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9월 15일 0시 12분, 인천 진입의 중요한 교두보인 팔미도 등대 점화에 성공함으로써 UN군 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의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해군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에서 전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이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이면서도 서훈이 누락된 최규봉(당시 89세, 前 KLO부대기념회 명예회장)씨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작금의 언론과 세간에 떠도는 코로나19 감염위험을 무시한 모 목사와 모장관 등의 언행을 볼때 몰상식한 책임 전가 및 회피성 행태가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시 국가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정신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임무를 다한 클라크 대위, 최규봉, 장사리 상륙작전의 772명의 학도병,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전쟁 영웅들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교훈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며 조용한 파장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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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 88서울올림픽 포스터와 육군대학 시절 모습 [사진=연합뉴스/육군대학 45기 졸업앨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GOP 부대에서는 불시의 적 도발 및 부대내의 불미스런 사고 발생의 우려 때문에 휴일에도 항상 비상 소집하는 전화 벨소리에 대기하며 긴장을 하고 지내야 했다. 실제로 1987년 7월, 필자가 사단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을 때,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병사가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와 같이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직업군인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휴일보장 없이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교육과정에 입교해서는 비록 교육 성적에 신경은 쓰이지만 휴일에 찾는 사람 없이 완전한 휴무 시간을 보장 받는다. 덕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 초기 소양시험이 끝나고 모처럼의 휴일에 서울 처가집에 들렸다가 88서울올림픽 미국과 러시아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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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30
  • [김희철의 전쟁사(64)]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 해군 첩보대 고(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이 영흥도에서 치열한 교전을 하는 동안 팔미도에서는 또다른 영웅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팔미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기념비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 작전의 최고 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클라크(Eugene Clark) 미 해군대위였다. 그는 한국인 전우 연정 해군소령이나 계인주 육군대령 등과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간의 작전기간 동안 기록한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발견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뒤에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The Secrets of Inchon)으로 발간되어 겨우 햇볕을 보게 되었다.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진짜 영웅 클라크 대위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대위, F. 클락혼 미 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 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였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 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 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 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 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 부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라고 되어있다. 헌데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월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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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7)]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부대 전출시에 사단장으로부터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의 애대심(愛隊心) 고취 위한 격려회식 임무를 부여받은 필자는 본인의 미래 발전을 위한 성적 관리도 중요했지만 바빠졌다. 인접 동료들에게 물어 물어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장교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승리부대 출신장교들의 시간 계획을 확인하여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위의 사진과 같이 알림장과 동문 주소록도 만들었다. ■ 출신 학교와 고향 및 조별, 줄・오・대각선별 등의 모임으로 인향만리(人香萬里)를 풍겨… 육군대학 정규과정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수료시 까지 계속되었다. 한 개 반은 약 50~60명씩으로 구성되었고 또 각반은 4개 조로 세부 편성되어 주로 조별 토의와 발표 등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마치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육군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드디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이 개최되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모임을 많이 한다는 육군대학의 특성을 이미 경험했던 사단장의 의도대로 시행된 ‘승리부대 동문 모임’은 100% 성공이었다. 사단장의 배려로 모임이 주선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대상자는 거의 참석했고 타부대로 부임해가는 동료들 마저도 승리부대만 사단 모임을 한다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특히 승리부대에서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우의 정을 만끽했고, 승리부대로 새로이 부임하는 장교들은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특히 필자를 통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을 하라고 지시한 사단장에게 감사함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육군대학 교육기간 동안 교실내의 분임조·줄·오·대각선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좋은 인연을 만들며 만난 학생장교들은 교육수료 후 다시 전후방 각 부대로 배치된다. 육군대학 교육과정에는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등을 비롯한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이들이 전후방 각 부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인접부대 간의 업무 협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보병인 필자 같은 경우에도 부대에 리스크가 발생해 상급 및 인접부대를 방문했을 대 그 부대에 육군대학 동기가 있으면 일단 그 리스크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군대학에서 같이 보낸 인연이 모든 문제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원할하게 소통하며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병병과로서 제한되는 업무에 문제가 있을 때에 헌병이나 법무 및 병참, 의무 병과의 육군대학 동기들은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전술 지식을 포함한 군사적 식견을 배양함은 물론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부대끼면서 좋은 인연이 쌓여 군생활하는 동안 시너지 효과가 있었고, 제대 후인 지금도 좋은 인연으로 만난 육대 동기 모임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육군대학 과정을 통해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사자성어가 진리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자산이고 능력이며, 끈끈한 인간관계가 직업인들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육군대학 수료 후 기나긴 군생활을 하면서 체험을 통해 깨닫았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9
  • [김희철의 전쟁사(63)]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이 지루한 고지전이 계속되면서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밴플리트와 사관학교 동기인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전쟁을 모양새 있게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 밴플리트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대상이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였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했기에 곧 분위기를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 밴플리트는 승리 위해 싸웠던 군인이자 한미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그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전쟁 끝내기’를 공약했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 구도를 구상했던 워싱턴 미군 수뇌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1953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하여 그해 2월 한국을 떠나는 밴플리트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되어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 대위를 잃었던 전선으로부터 이제 떠나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군인으로써 못내 이루지 못한 전선에서의 온전한 승리가 아쉽다는 정한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런 그는 당시의 고별 기자회견에서 1951년 10월과 11월 벌인 공세의 좌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 미국에 도착한 밴플리트는 각종 환영행사 등에 참석하면서도 아이젠하워 등 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전선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맥아더와 같은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사려 깊은 외교적 시야’를 우습게 본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전쟁을 벌였다면 상대의 수도까지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장군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밴플리트를 의심하고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그런 언행을 두고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한다”고 발언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밴플리트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밴플리트가 고향인 플로리다에 막 정착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에 올랐던 월터 스미스가 플로리다 목장의 밴플리트를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까지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장군께서 주한 미 대사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는 취지로 주한 미 대사를 맡아 주기를 제안했다. 밴플리트는 즉석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당신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정전 자체에 반대하는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월터 스미스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장군의 의견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설득했다. 군인의 순수한 입장으로 ‘한국 전선에서의 승리’를 주장했던 밴플리트는 확고했다. 그는 “결코 안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사표를 내야 할 것”이라며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한 밴플리트의 입장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는 결국 대사 임명 계획을 철회했다. ■ 저돌적인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의리의 사나이 돌쇠’ 제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서 성공적 임무수행에 이어 한국 전선에서 이름을 높였던 밴플리트는 고향 플로리다의 유명인사 대접을 받으며 목장과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플로리다의 많은 유지들에게서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 당신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퉁명스럽게 되받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밴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계속 키웠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발족과 발전을 주도했다. 아울러 한국의 전후 지원 문제를 두고 미 행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는가 하면 실제 집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순회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후임 미 8군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사실 그 점이 매우 거북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자신의 임지에 자주 나타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0마일로 차를 모는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그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 그대로 한국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에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의가 아주 깊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망명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밴플리트는 주저 없이 이 대통령의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유해를 직접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의리의 사나이 돌쇠’이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6)]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또한 중령 진급자는 대대장반, 대령 진급자는 연대장반 교육을 받는 등 모든 영관장교들의 보수교육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군생활 동안에 시간 및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소중하며 또 오래간다.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주향천리(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옛 시가 절실하게 공감되는 이유이다. 필자가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승리부대에서 7번(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4번 이사)째 이사를 하며 육군대학으로 내려올 때 전출신고를 받은 사단장 최권영 소장(육사19기)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격려금을 주었다. 그러나 이 격려금은 필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위 사진의 ‘승리부대 동문 주소록’에서와 같이 육군대학 교육을 마치고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학생장교들을 포함한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에게 애대심(愛隊心)을 고취시키기 위한 격려회식을 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8
  • [김희철의 전쟁사(62)]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많은 미군이 이 땅에 왔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70여 년 전 연인원으로 따지면 1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지휘관도 아주 많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워커, 리지웨이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한국군 육성에 가장 공을 들이고 한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사람은 단연코 밴플리트였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미 장성들이 전쟁 전후에 한국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인 한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각별하다. 밴플리트는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 돈을 모아 육사 도서관 건립 지금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밴플리트의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동상이 섰던 육사 도서관 옆에서 구석진 자리로 옮겨지긴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뜻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현대화의 가장 절실한 과제를 능력 있는 ‘초급 장교의 육성’이라고 본 인물이다. 그래서 벌인 일이 육군사관학교 설립이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전투에 관한 지원은 미 8군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권유할 수 있을 뿐이지, 지원을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과 발전에 골몰했다. 하루 빨리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들을 길러내야 한국군이 발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1952년 들어서면서 그는 결국 일을 벌인다.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짓던 서울 태릉의 연병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재들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밴플리트의 열정은 그러나 곧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미 의회에서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짓는데 왜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8군의 한국군 지원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합당한 지적이었다. 그는 부득불 그 엄청난 양의 건설 자재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행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쯤되면 웬만한 장성이라면 아마 민망함과 무안함 때문에 같은 일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달랐다.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놓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에게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어야 하니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기부해라”고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마침내 육사내에 빨간 벽돌의 도서관을 지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2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5)]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진해로 내려와서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운 감정을 숨기며 때마침 태어난 큰아들을 업은 채 불편한 몸으로 묵묵히 짐정리를 함께했다. 필자가 1년동안 교육받은 육군대학 정규45기는 약 160명의 학생장교들로 구성됐고 그중에 사관학교 동기생은 88명이었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차기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160명중에 적어도 53명 안에 포함되는 성적을 얻어야 향후 진로에 유리해진다. 이것을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도 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성적이 필자보다 우수한 동기들이 80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우수한 선배 및 동료인 학생장교들이 즐비하고 사관학교 졸업 성적만 고려할 때 상층 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한편 당해년도 봄에 입교한 앞의 기수에는 주로 1년 선배들이 많았고 마침 사관학교의 같은 중대 출신별로 후배들을 위한 후견인이 정해져 있었다. 필자 담당 후견인은 생도시절에 같은 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던1년 선배인 이문보 소령(육사36기)이었다. 그는 앞서 공부하면서 꼭 필요했던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마치 4년전에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선배들이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총장에게 입교 신고를 할 때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 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1/3선에는 미달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6
  • [김희철의 전쟁사(6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밴플리트 장군이 1951년 4월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의 국부(國父) 이승만 대통령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는 숨겨진 일화가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책에 공개돼 감동을 더하고 있다. 그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으로 6·25 남침전쟁 중인 1951년 7월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1653년 조선에 표류해 13년을 이 땅에서 머물렀던 하멜과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네덜란드인이다. 밴플리트는 장교 생활 초기에 이름 때문에 손해를 봤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미 참모총장과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마셜이 기억하는 미군 지휘관 중에 밴플리트 장군과 이름이 흡사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마셜이 기억하는 자는 술주정뱅이로 미군에서 소문이 자자해 마셜의 귀에도 그 이름이 들어갔다. 이 동명이인 때문에 밴플리트는 장군 진급에 여러 번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밴플리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와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다.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명성을 얻은 뒤 후에 각각 미국 대통령과 5성 장군(원수)의 자리에 올랐으나 밴플리트는 마셜의 오해 덕택에 그들보다 훨씬 뒤처졌다. 그러나 군인, 전쟁터의 지휘관으로 지닌 자질과 역량은 그 둘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적과 싸우려는 투지는 그들을 오히려 넘어선다는 평가가 많다. 밴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술주정뱅이로 오해 받은 것을 일소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8개월 만에 부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까지 고속 승진한 인물이다. 또한 1~2차 세계대전을 거쳐 6.25남침전쟁까지의 프랑스 유타 비치 상륙작전, 벌지전투,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 등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각종 전투에서 수차례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6·25 남침전쟁 중에 3군단의 치욕스런 ‘현리전투’의 패배를 겪고,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한국군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라면 각 부대들이 전선에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따라 ‘야전훈련사령부(FTC)’를 창설하여 운용했다. ‘야전훈련사령부(FTC)’가 운용된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19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야전훈련사령부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 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가칠봉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야전훈련사령부(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다. 특히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중공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이에 따라 미군 수뇌부는 변화된 한국군에 대해 높게 평가를 했고, 이들이 현대 기계화 전장에 대한 인식도 늘려가고 있었으며, 그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재건에서 부터 우리의 육군이 오늘날의 현대화한 군대로 성장한 것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밴플리트 장군은 궁극적으로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성과를 올렸다. 또한 그는 다른 미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매우 단호했다. 1951년 말, 대한민국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던 공산 빨치산들을 일거에 토벌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밤의 인민 공화국'으로 불리던 그 지역의 치안을 회복하고 후방지역을 조기에 안정시킨 성과를 내기도 했다. ■ 밴플리트, ‘강철같은 사나이’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북진정책 뜻을 같이해… 6.25남침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군 장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들을 자식처럼 대하며 각별히 챙겼다. 특히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추운 겨울 날씨에 밴플리트가 있는 전선을 방문했다. 이른 아침 지프를 타야 할 때 밴플리트가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자, 이 대통령은 미소로 답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밴플리트는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밝은 얼굴과 외투 밖으로 보이는 백발은 마치 검은 구름 위에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빛났다”라고 회고했다. 밴플리트는 "2년간인 재임 기간 동안에 이승만 대통령은 얼어붙은 전방과 훈련 지역을 수시로 시찰하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였다"며 "그런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서양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부르는지도 이해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워싱턴의 휴전정책으로 북진작전에 제한이 가해져 사실상 군사적 승리가 가로막히자, 북진작전'이란 같은 뜻을 갖고 있었던 밴플리트와 이승만 대통령 두 사람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두 사람은 전쟁을 보는 눈도 같아서 전쟁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있었다. 거기에다 밴플리트는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겼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쟁 중 워싱턴과 서울 간에 전쟁의 해법을 놓고 의견이 대립할 때면,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 같은 사나이, 그리고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라며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은 밴플리트 장군의 작전에 그대로 투영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빼앗기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런 마음을 밴플리트가 알고, 그가 부임한 이후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되지 않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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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4)]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전방 험지이자 전국 최저 기온을 기록하던 동토의 왕국에서 장장 7시간 넘는 이동을 하여 당시 따뜻한 남쪽나라 진해에 있던 육군대학에 도착했다.(현재는 육군대학이 대전시에 위치) 그곳에는 먼저 도착한 육사 동기 및 선배들이 환영을 해주었다. 그들의 설명을 듣고 아파트 관리실에 들려 필자의 숙소 열쇠를 받아 배정된 아파트를 확인했다. 위의 사진 속에 아파트는 선배들과 군번이 빠른 동기들이 입주하는 비교적 양호한 18평형 아파트였다. 필자에게 배정된 곳은 사진속의 비교적 양호한 아파트 뒤쪽에 위치했고 1960년대에 연탄 보일러식으로 건축한 매우 낡은 9평짜리 구형 아파트 였다. 그것도 제일 높은 4층이었다. 육군대학에서는 매년 4~6백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켜 학생장교들의 숙소 관리도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 육군대학의 아파트와 관사는 구형과 신형으로 구분되어 있고 크기도 상이하여 입주자 선정시 공평하게 군번순으로 좋은 아파트부터 배정했다. 사관학교 졸업시 부여된 군번은 최종 졸업성적 순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군번이 빠른 사람들이 사관학교 공부도 잘했다는 것이고 학생장교들이 배정받은 아파트의 위치로 최종 졸업성적도 식별이 가능했다. ■ 흙먼지 없는 아스팔트 도로와 네온싸인 불빛으로 대낮 같은 도심의 첫날 밤이 좋아 ‘밤을 낮같이, 산악을 평지같이’라는 구호에 익숙해 있던 필자 부부는 전방 격오지의 동토에서의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가 아닌 아스팔트 도로와 야간에는 네온싸인 불빛으로 대낮 같은 따뜻한 도심의 첫날이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군번순으로 아파트를 배정함에 따라 들통난 사관학교 졸업성적에 필자는 가족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배정받은 숙소가 제일 오래됐고 좁은 아파트인데 그것도 제일 높은 층이었다. 반면에 졸업성적이 월등하여 넓고 좋은 아파트의 로얄층에 입주한 사관학교 동기생의 가족과는 너무도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4년전인 1983년 대위급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위해 전라남도 광주의 상무대로 첫 이사를 했을 때, 교육생 부부들을 위해 준비된 ‘백일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그때에도 9평밖에 안되는 연탄 아궁이 아파트였지만 쥐가 왔다갔다했던 산간벽지의 낡은 관사 보다는 너무도 좋았고 아내는 “시집 잘 왔네”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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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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