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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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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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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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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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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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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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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6)]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는 “적이 방어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가라”는 의미이다. 6·25남침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새벽,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 지형의 불리점을 역이용한 맥아더의 기적 같은 인천상륙작전 1950년8월말 북한군은 거의 모든 전투 역량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으로부터의 전면공격으로 인해 예상되는 10만명의 피해를 줄이고 작전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적의 병참선 중심부인 서울을 타격하여 북한군을 한꺼번에 포위, 격멸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 따라서 최초 7월4일 작전명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을 수립했으나 초전의 연이은 패배와 빠른 북한군의 남진 때문에 취소했다. 미 합동전략기획단(JSPOG)은 인천, 군산, 주문진 상륙의 세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맥아더는 8월12일에 계획100-B인 인천을 선정하여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으로 명명하고,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하는 계획으로 수립했다. 이를 위해 D-day를 9월 중순으로 잡고 일본에서 상륙부대인 미 10군단을 창설했다. 8월 23일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긴급 회의를 개최하여 최종 토의를 했는데, 미 합동참모본부(JSC)의 강력한 반대를 맥아더 사령관이 45분간에 걸친 연설로 설득했다, 사실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상륙이 적합한 만조시 수면이 높은 날은 15~18일 뿐이었고 인천 외항은 대규모 함정이 정박하기에는 협소하였으며 상륙해안은 대부분이 4~5m의 해벽을 이루고 있어 사다리와 쇠갈고리가 필요했다. 또한 상륙후에는 시가지의 건물을 방벽으로 삼는 적과 교전하는 불리점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인천에 경비여단과 31여단예하 1개대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북한군 18사단 등으로 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가 적용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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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6)]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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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규모인 159개국 8,397명이 참가해 9월17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올림픽은 통상 오후 3시에 시작되었는데 국가 이미지 모토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췄 오전에 개최했다고 설명했으나, 미국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마침 토요일이 반공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성화대도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식이 아닌 엘리베이터(보이지 않게 피아노 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림)방식을 도입했다. 이후 새로운 점화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반면에 외국 언론들이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문화를 앞다퉈 보도하며 엄청나게 지탄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림픽 기간 전부터 개고기 음식점을 강력하게 단속했는데 이때부터 ‘사철탕’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판매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88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양대 진영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격전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증언이 얼마전에 공개된 1988년 외교문서에 나왔다. 당시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사흘 전 주 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경유하여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으나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특히 4년 전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안전'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88서울올림픽 개최 5년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등으로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88서울 올림픽을 최대의 축전으로 만들기 위해 소련 등 동구권도 참가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더 이상 보도하지 못했다.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노력으로 결국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면서 소련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됐고 동구권들의 참가로 역대 최대규모의 올림픽 제전이 되었다. 반면에 88서울올림픽에 불참한 북한은 한국에 뒤지는 것을 만회하고자 이듬해인 1989년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면서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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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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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고(故) 최규봉 KLO(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 유엔군에 제공한 민간인 조직)부대장의 전공에 대한 진위 여부(월간조선 2003년 9월호 기사 참조)의 논란이 있었지만, 2012년 6월22일 서울 해군호텔에서 최 KLO 부대장의 전공을 인정했던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따르면 “최규봉 KLO 부대장은 인천상륙작전 당일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적을 교란시키라는 UN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적 2개 분대와 싸워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9월 15일 0시 12분, 인천 진입의 중요한 교두보인 팔미도 등대 점화에 성공함으로써 UN군 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의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해군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에서 전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이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이면서도 서훈이 누락된 최규봉(당시 89세, 前 KLO부대기념회 명예회장)씨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작금의 언론과 세간에 떠도는 코로나19 감염위험을 무시한 모 목사와 모장관 등의 언행을 볼때 몰상식한 책임 전가 및 회피성 행태가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시 국가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정신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임무를 다한 클라크 대위, 최규봉, 장사리 상륙작전의 772명의 학도병,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전쟁 영웅들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교훈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며 조용한 파장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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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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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 ▲ 88서울올림픽 포스터와 육군대학 시절 모습 [사진=연합뉴스/육군대학 45기 졸업앨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GOP 부대에서는 불시의 적 도발 및 부대내의 불미스런 사고 발생의 우려 때문에 휴일에도 항상 비상 소집하는 전화 벨소리에 대기하며 긴장을 하고 지내야 했다. 실제로 1987년 7월, 필자가 사단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을 때,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병사가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와 같이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직업군인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휴일보장 없이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교육과정에 입교해서는 비록 교육 성적에 신경은 쓰이지만 휴일에 찾는 사람 없이 완전한 휴무 시간을 보장 받는다. 덕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 초기 소양시험이 끝나고 모처럼의 휴일에 서울 처가집에 들렸다가 88서울올림픽 미국과 러시아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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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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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4)]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 해군 첩보대 고(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이 영흥도에서 치열한 교전을 하는 동안 팔미도에서는 또다른 영웅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팔미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기념비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 작전의 최고 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클라크(Eugene Clark) 미 해군대위였다. 그는 한국인 전우 연정 해군소령이나 계인주 육군대령 등과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간의 작전기간 동안 기록한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발견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뒤에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The Secrets of Inchon)으로 발간되어 겨우 햇볕을 보게 되었다.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진짜 영웅 클라크 대위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대위, F. 클락혼 미 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 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였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 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 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 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 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 부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라고 되어있다. 헌데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월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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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4)]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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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7)]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부대 전출시에 사단장으로부터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의 애대심(愛隊心) 고취 위한 격려회식 임무를 부여받은 필자는 본인의 미래 발전을 위한 성적 관리도 중요했지만 바빠졌다. 인접 동료들에게 물어 물어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장교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승리부대 출신장교들의 시간 계획을 확인하여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위의 사진과 같이 알림장과 동문 주소록도 만들었다. ■ 출신 학교와 고향 및 조별, 줄・오・대각선별 등의 모임으로 인향만리(人香萬里)를 풍겨… 육군대학 정규과정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수료시 까지 계속되었다. 한 개 반은 약 50~60명씩으로 구성되었고 또 각반은 4개 조로 세부 편성되어 주로 조별 토의와 발표 등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마치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육군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드디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이 개최되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모임을 많이 한다는 육군대학의 특성을 이미 경험했던 사단장의 의도대로 시행된 ‘승리부대 동문 모임’은 100% 성공이었다. 사단장의 배려로 모임이 주선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대상자는 거의 참석했고 타부대로 부임해가는 동료들 마저도 승리부대만 사단 모임을 한다고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특히 승리부대에서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우의 정을 만끽했고, 승리부대로 새로이 부임하는 장교들은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특히 필자를 통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을 하라고 지시한 사단장에게 감사함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육군대학 교육기간 동안 교실내의 분임조·줄·오·대각선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좋은 인연을 만들며 만난 학생장교들은 교육수료 후 다시 전후방 각 부대로 배치된다. 육군대학 교육과정에는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등을 비롯한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이들이 전후방 각 부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인접부대 간의 업무 협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보병인 필자 같은 경우에도 부대에 리스크가 발생해 상급 및 인접부대를 방문했을 대 그 부대에 육군대학 동기가 있으면 일단 그 리스크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군대학에서 같이 보낸 인연이 모든 문제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원할하게 소통하며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병병과로서 제한되는 업무에 문제가 있을 때에 헌병이나 법무 및 병참, 의무 병과의 육군대학 동기들은 엄청난 힘이 되어 주었다. 전술 지식을 포함한 군사적 식견을 배양함은 물론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 부대끼면서 좋은 인연이 쌓여 군생활하는 동안 시너지 효과가 있었고, 제대 후인 지금도 좋은 인연으로 만난 육대 동기 모임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육군대학 과정을 통해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사자성어가 진리임이 증명되었다. 또한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자산이고 능력이며, 끈끈한 인간관계가 직업인들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육군대학 수료 후 기나긴 군생활을 하면서 체험을 통해 깨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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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7)]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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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3)]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이 지루한 고지전이 계속되면서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밴플리트와 사관학교 동기인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전쟁을 모양새 있게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 밴플리트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대상이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였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했기에 곧 분위기를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 밴플리트는 승리 위해 싸웠던 군인이자 한미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그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전쟁 끝내기’를 공약했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 구도를 구상했던 워싱턴 미군 수뇌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1953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하여 그해 2월 한국을 떠나는 밴플리트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되어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 대위를 잃었던 전선으로부터 이제 떠나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군인으로써 못내 이루지 못한 전선에서의 온전한 승리가 아쉽다는 정한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런 그는 당시의 고별 기자회견에서 1951년 10월과 11월 벌인 공세의 좌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 미국에 도착한 밴플리트는 각종 환영행사 등에 참석하면서도 아이젠하워 등 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전선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맥아더와 같은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사려 깊은 외교적 시야’를 우습게 본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전쟁을 벌였다면 상대의 수도까지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장군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밴플리트를 의심하고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그런 언행을 두고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한다”고 발언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밴플리트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밴플리트가 고향인 플로리다에 막 정착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에 올랐던 월터 스미스가 플로리다 목장의 밴플리트를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까지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장군께서 주한 미 대사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는 취지로 주한 미 대사를 맡아 주기를 제안했다. 밴플리트는 즉석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당신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정전 자체에 반대하는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월터 스미스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장군의 의견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설득했다. 군인의 순수한 입장으로 ‘한국 전선에서의 승리’를 주장했던 밴플리트는 확고했다. 그는 “결코 안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사표를 내야 할 것”이라며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한 밴플리트의 입장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는 결국 대사 임명 계획을 철회했다. ■ 저돌적인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의리의 사나이 돌쇠’ 제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서 성공적 임무수행에 이어 한국 전선에서 이름을 높였던 밴플리트는 고향 플로리다의 유명인사 대접을 받으며 목장과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플로리다의 많은 유지들에게서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 당신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퉁명스럽게 되받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밴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계속 키웠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발족과 발전을 주도했다. 아울러 한국의 전후 지원 문제를 두고 미 행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는가 하면 실제 집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순회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후임 미 8군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사실 그 점이 매우 거북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자신의 임지에 자주 나타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0마일로 차를 모는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그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 그대로 한국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에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의가 아주 깊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망명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밴플리트는 주저 없이 이 대통령의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유해를 직접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의리의 사나이 돌쇠’이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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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3)]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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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6)]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또한 중령 진급자는 대대장반, 대령 진급자는 연대장반 교육을 받는 등 모든 영관장교들의 보수교육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군생활 동안에 시간 및 장소를 불문하고 가장 소중하며 또 오래간다.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주향천리(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옛 시가 절실하게 공감되는 이유이다. 필자가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승리부대에서 7번(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4번 이사)째 이사를 하며 육군대학으로 내려올 때 전출신고를 받은 사단장 최권영 소장(육사19기)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격려금을 주었다. 그러나 이 격려금은 필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위 사진의 ‘승리부대 동문 주소록’에서와 같이 육군대학 교육을 마치고 승리부대로 부임하는 학생장교들을 포함한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에게 애대심(愛隊心)을 고취시키기 위한 격려회식을 하라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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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6)] 육군대학,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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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2)]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많은 미군이 이 땅에 왔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70여 년 전 연인원으로 따지면 150만 명이 넘을 것이다. 지휘관도 아주 많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 워커, 리지웨이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찬란하게 떠올랐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한국군 육성에 가장 공을 들이고 한국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사람은 단연코 밴플리트였고 이는 이승만 대통령과 부자(父子) 이상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미 장성들이 전쟁 전후에 한국에 머물렀지만 그가 보인 한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각별하다. 밴플리트는 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뒤에도 한국과 미국의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다. ■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 돈을 모아 육사 도서관 건립 지금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밴플리트의 동상이 서 있다. 원래 동상이 섰던 육사 도서관 옆에서 구석진 자리로 옮겨지긴 했으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그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 들어섰다는 사실은 뜻깊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현대화의 가장 절실한 과제를 능력 있는 ‘초급 장교의 육성’이라고 본 인물이다. 그래서 벌인 일이 육군사관학교 설립이다. 전쟁 중에 벌어지는 전투에 관한 지원은 미 8군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설립은 권유할 수 있을 뿐이지, 지원을 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설립과 발전에 골몰했다. 하루 빨리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만들어 유능한 장교들을 길러내야 한국군이 발전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1952년 들어서면서 그는 결국 일을 벌인다.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짓던 서울 태릉의 연병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자재들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밴플리트의 열정은 그러나 곧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미 의회에서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짓는데 왜 미 8군의 건설 자재를 사용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미 8군의 한국군 지원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에 합당한 지적이었다. 그는 부득불 그 엄청난 양의 건설 자재들을 다시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그는 위대한 군인이기는 했으나 행정에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쯤되면 웬만한 장성이라면 아마 민망함과 무안함 때문에 같은 일에 다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달랐다. 밴플리트는 자신의 사재부터 털었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놓고 휘하의 각 지휘관들에게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어야 하니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기부해라”고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마침내 육사내에 빨간 벽돌의 도서관을 지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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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2)]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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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5)]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진해로 내려와서는 비교되는 사관학교 졸업성적 때문에 비좁고 낡으면서도 제일 높은 층의 육군대학 아파트를 배당받게 되자 아내는 연예 및 신혼시절에 느꼈던 필자에 대한 화려한 기대감이 허상이 되는 것 같은 생각에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쉬운 감정을 숨기며 때마침 태어난 큰아들을 업은 채 불편한 몸으로 묵묵히 짐정리를 함께했다. 필자가 1년동안 교육받은 육군대학 정규45기는 약 160명의 학생장교들로 구성됐고 그중에 사관학교 동기생은 88명이었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차기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에 따라 160명중에 적어도 53명 안에 포함되는 성적을 얻어야 향후 진로에 유리해진다. 이것을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도 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 성적이 필자보다 우수한 동기들이 80여명이나 되었다. 또한 우수한 선배 및 동료인 학생장교들이 즐비하고 사관학교 졸업 성적만 고려할 때 상층 성적을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한편 당해년도 봄에 입교한 앞의 기수에는 주로 1년 선배들이 많았고 마침 사관학교의 같은 중대 출신별로 후배들을 위한 후견인이 정해져 있었다. 필자 담당 후견인은 생도시절에 같은 중대에서 함께 생활했던1년 선배인 이문보 소령(육사36기)이었다. 그는 앞서 공부하면서 꼭 필요했던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마치 4년전에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선배들이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전쟁을 치루었던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총장에게 입교 신고를 할 때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 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전체 평균보다는 높았지만 1/3선에는 미달되는 것 같았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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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5)] 최전방 격오지였던 동토의 왕국에서 따뜻한 남쪽나라로(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