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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1)] 작전장교 일과는 사소함의 연속이지만 쌓이고 쌓여 알찬 성과 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위나라 사마의가 대치하고 있는 제갈량이 보낸 사신에게서 “제갈량이 음식은 지나치게 적게 먹고, 일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일이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사마의는, “식소사번(食少事煩),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라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사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끌어내어 빨리 승패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사마의는 지구전으로 제갈량이 지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신이 돌아오자 제갈량은, “사마의가 무슨 하는 말이 없던가?” 하고 물었다. 사신은 들은 그대로 전하자 제갈량도, “중달의 말이 맞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가 않다”고 말했고, 제갈량은 곧 병이 깊어져 진중에서 죽어 촉나라 군대는 철수했고 사마의는 장안성을 지켜냈다. ■ 식소사번(食少事煩)처럼 눈에 띄게 보이는 성과없이 바쁘기만 한 작전장교의 일과 “따르릉 딴따라 딴딴단…...” 요란하게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 잠결에 손을 뻗어 자명종을 끄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이미 30분이 지났고 와이프가 흔들며 늦었다고 재촉을 했다.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주섬주섬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며 현관을 나서는데 와이프가 손을 잡으며 아침을 먹고 가라고 했다. 두 수저정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아직 새벽 출근길은 깜깜했다. 급하게 상황실 벙커로 들어서자 작전보좌관 김영득 소령(육사32기)이 먼저 나와 보고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늦게 출근한 필자에게 꾸짖는 눈치를 보냈다. 작전처 요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분야들을 확인하느라 분주한 시간이 절정에 이를 즈음 스피커에서 아침 체조 집합 군가가 흘러 나왔다. 또 바빠졌다. 미처 확인 못한 부분은 당직 근무자에게 강조하고 상의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본청 앞 광장에 모였다. 참모장 박영일 대령(육사25기 예비역 소장, 전 한국민속촌 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집합 인원들을 확인했다. 아침체조가 끝나고 사단장이 집무실로 들어가자 참모장은 모인 참모부 간부들에게 강조사항을 지시하며 아침체조에 지각한 자와 불참자를 정확하게 찍어냈다. 그들은 예외없이 참모장실에 불려가 불호령을 듣게 될 것이다. 잠시 후 참모부 주요직위자들은 다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전일 당직근무자의 상황브리핑을 듣기 위해서 상황실 벙커에 모였다. 전일 작전결과와 당일 작전과 주요 부대운용 상황을 보고 받은 사단장이 추가 지침과 기타 강조사항을 지시하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를 떴다. 이어 참모장이 사단장 지침에 대한 세부적인 지시와 잘못된 사항에 대한 질책을 했다.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던 아침 상황보고 시간이 지나자 창밖으로 완전군장의 간부들이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체조 불참자와 상황회의시에 지적 받은 자들이 참모장실로 불려가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들은 일장 훈시를 듣고 사단 연병장에서 벌로 완전군장 보행을 할 것이 틀림 없었다. 야간에 특별히 지시 받은 업무가 있는 장교는 보고서를 챙겨 본청 참모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상황회의가 끝난 오전시간은 작전처 요원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 콩나물 시루에 주는 물은 빠져 나가도 콩나물은 잘 자란다. 마침 그날은 참모부 회의가 없는 날이라 새벽잠을 설치고 아침 상황회의 준비에 바삐 뛰어다닌 피로가 밀려와 책상에서 깜빡 졸 수 있는 오전시간이 되었다. 물론 회의시 사단장의 지시사항을 조치해야 하지만 단순한 지시는 작전보좌관 전결로 처리했고, 심도 깊고 중요한 사항은 참모의 추가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루 중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상급부대 실무자였다. 인접 작전장교의 전화 통에서 쌍소리가 들려왔다. “현황을 파악해 신속히 보고 못하냐”는 질책이었다. 결국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빼앗긴 채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 받고 상급부대로 발송했다. 사실은 결재없이 비공식적으로 보고해달라는 업무가 더 많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간부 식당에서도 참모들 자리와 실무장교들 자리는 구분되어 있다. 참모들은 식사를 하면서 사단장과의 대화를 통해 지침을 받고 구두 결재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참모들의 식사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실무자들은 식사를 빨리 끝내고 사무실로 왔다. 선배 작전장교가 건강이 중요하니 족구를 하자고 한다. 상황실 벙커의 좁은 통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야간 업무시에 간식내기 게임이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자 끝났다. 또 바빠졌다. 오후에 예하부대 작전장교 소집회의가 있었다. 4개월 뒤인 10월에 사단장 재임 기간에 한번 실시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지휘검열과 곧 시행될 을지연습 준비 때문이었다. 이미 준비해 놓은 회의록에 전투지휘검열과 을지연습 일정, 주요 착안점들에 따른 각 부대별 준비사항들이 포함되었다. 예하부대의 건의 사항을 토론한 뒤 작전참모의 강조사항을 끝으로 소집회의는 성공적인 마무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 타 작전장교는 타 참모실을 순회하며 또다른 업무를 위해 작성된 보고서의 협조서명을 받아왔고 소집회의를 마친 작전참모는 그 보고서를 들고 사단장실로 갔다.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하기식 나팔소리가 부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단장실을 나온 참모는 보좌관을 통해 또 내일 아침에 보고할 업무를 지시했다. 역시 이날도 밤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켜야 할 것 같다. 자정이 다될 무렵, 낮의 족구게임으로 마련한 간식 라면을 둘러서서 먹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작전처 모토..! 오늘일을 과감히 내일로 미룬다…ㅋ”라고 이야기하자 즉각적으로 “오케이”하고 답이 나왔다. 작전장교들은 부대 정문 앞 독립가옥의 구멍가게 일명 ‘진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빨리 들어가 자고 내일 아니 오늘 새벽에 출근해야 하므로, 짧은 시간동안 두부김치에 소주를 벌컥 벌컥 마셨다. 그러면서 상급자들을 안주삼아 푸념하면서 잠시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관사로 향하며 흥얼거렸다. “보람참 하루일 끝마치고서 ….”라는 군가였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와 같은 일과(job)였지만, 작전처 요원들은 제갈량처럼 되지않고, 콩나물 시루에 주는 물은 빠져 나가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잘 자라듯이 바쁜 하루를 통해 알찬 성과를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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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김희철의 전쟁사(34)]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가칠봉은 치열한 혈전과 사투의 역사 현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원도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1,241m고지)은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비로소 금강산이 1만 2천봉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칠봉에서 '가' 자가 '더할 加'를 쓰는 만큼 가칠봉은 아름다운 산이지만 6.25남침전쟁 때에는 처절했던 격전장이자 혈전 사투의 현장이었다. 가칠봉은 제 4땅굴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이웃에 있는 도솔산, 가리봉과 함께 태백산맥 중앙부를 이루는 산으로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가칠봉 동쪽에서는 침식분지로 유명한 펀치볼(해안분지)이 펼쳐져 있다. 현재 군사분계선은 가칠봉 북쪽을 지나가고 있으며 능선상에 을지전망대가 위치해 사전 신청하면 민간인의 제한된 방문도 가능하다. 백골 3사단 투입 열흘만에 가칠봉 점령, 이승만 대통령 휘호 ‘지려충순(志慮忠純)’으로 격려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시작한 일명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이었다. 이 공세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3군단은 해체되었다. 국군 3사단은 현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피의 능선’을 점령한 후 펀치볼 북방의 1052·가칠봉·1211·1320고지 등에서 격전을 거듭하던 5사단과 ‘51년10월 중순 진지를 교대하여 북한군과 이들 고지들을 확보키 위한 혈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펀치볼 일대의 요새를 계속 빼앗기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들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아군의 공격에 안감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이러한 가칠봉·1052·1211·1252고지 등은 5사단이 한달 동안 맹공을 가했으나 적의 최후 발악적인 방어와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완전한 점령에는 실패한 곳이었다. 1052고지, 가칠봉, 1211고지 등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은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북한군 최정예 부대임을 자처하는 최현 중장(종전후 북한 민족보위상 역임)이 지휘하는 2군단의 예하 사단들이 필사적으로 아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의 ‘안강·기계전투’시 기갑연대장이었던 3사단장 백남권 장군은 진지를 교대한 후 22연대와 23연대로 하여금 1052고지와 가칠봉을 공격케 하고 18연대를 사단 예비로 운용했다. 공격개시 1주일만에 장춘권 대령이 지휘한 22연대가 적의 방어 벽을 뚫고 큰 피해 없이 1052고지를 점령해 버림으로써 3사단의 용명을 떨쳤다. 당시 장춘권 22연대장(예비역 육군 소장)은 5사단이 한달 동안 공격을 했어도 점령 못한 난공의 작전지역에 대해 사전 충분한 정찰과 분석을 했다. 공격을 위한 전술적인 계획 등을 치밀히 짜 놓은 후, 16개 대대의 사단 전 포대 약 80문의 포와 3만여 발의 포탄을 지원 받도록 협조도 했다. 연대의 공격 목표는 1052고지가 있는 능선을 따라 약4km에 걸쳐 솟아 있는 5개의 산봉우리들이었는데, 20초 사이에 봉우리마다 7천여발씩의 집중 포격을 가했다. 새벽 6시쯤 포격이 멈추는 순간 공격을 개시했는데 정오도 안돼서 5개 고지를 모두 점령해 버렸다. 어느 고지에서는 몇 번씩 육박전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큰 피해 없이 비교적 쉽게 점령했다. 공격 개시 전 1개 중대 병력의 특공대를 적 후방에 은밀히 침투시켜 보급로를 차단하고 교란시켰던 작전도 아주 주효했었고 돌격해 올라가 보니 고지의 호들은 우리 포격에 모두 부서졌고 박살이 나 버린 적병 시체만 나뒹굴어 포로를 한 명도 못 잡았다. 그러나 목표를 점령한 날밤 적의 기습적인 역습을 받아 가운데 고지를 빼앗겼었는데 밤새 전투를 벌여 새벽엔 다시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는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가 더 많았다. 그 이유는 적 진지들이 포격으로 다 파괴돼 버려 고지 점령 후 새로이 진지 구축하는 동안의 적 기습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김종순 대령의 23연대가 가칠봉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 두 고지 전투는 점령한 후의 영예에 앞서 눈물겨운 고투와 쓰라린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김덕준 대령(예비역 육군준장, 한국제강협회 부회장 역임)이 지휘한 진백골18연대는 예비대로 있다가 23연대와 교대해서 가칠봉 일대의 무명 고지들을 방어했는데 북한군은 매일 밤 나팔을 불며 공격을 했다. 진지 구축전에 기습을 해오자 급한 나머지 북한군이 도주할 때 미처 수습치 못한 적의 시체들을 끌어다 참호 앞에 쌓아 방탄벽을 만들며 적 공격을 방어했다. 18연대장도 훗날 증언시 “사실,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를 더 많이 보았다”고 토로했다. 역전의 백골 3사단은 10여일 만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해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1211·1320고지 등은 천연의 지형적 조건과 북한군의 결사적인 방어 때문에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임무가 끝나고 말았다. 난공불락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가칠봉 일대에 3사단이 투입되어 이 같은 전승을 올리자, 유엔군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지려충순(志慮忠純)’이란 휘호를 써 보내 격려를 했다. 유엔군사령부서는 미국 은성 훈장 3개와 동성 훈장 6개를 보내 왔다. 하루 500명 사상 낸 최악의 사투, 탄우 맞으며 육박전…적 시체로 방탄벽 쌓기도 북한군들은 휴전이 되자 “6·25전쟁 중 이 1211 고지 등과 철의 삼각 지대의 오성산은 자기들이 끝까지 사수를 했다”고 호언하며 그 감투정신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가칠봉과 1211 고지일대의 전투는 문자 그대로 악전 고투였으며 처참한 산악전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아군은 벼랑 아래에서 노무자들이 로프를 타고 올라와 보급해 주는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육박전을 계속했고, 때로는 처리치 못하고 도주한 북한군의 시체들을 주워 모아 벙커 앞의 방탄벽을 쌓기도 했다. 백골 3사단은 이 일대에서 1개 중대 병력이 40여명밖에 안 남고 하루에도 3∼5백 명의 전 사상자가 나올 때가 있었다. 가칠봉 공격시에는 전방 23연대와 방어하는 적과의 거리가 불과100야드로 대치하고 있었다. 산봉우리 위에서 감제하는 적병들은 아군이 움직이기만 하면 총격을 내리퍼부었다. 인력이 모자라 사단 본부 요원과 군악대까지 총동원해 노무자들과 함께 탄약과 보급품을 지어 나르는 데 5시간 이상 걸렸다. 따라서 사단장은 어려운 도보 보급 해결을 위해 공병대대로 펀치볼에서 가칠봉 밑의 능선까지 올라가는 도로도 개설 했다. 미군 항공 지원을 받아 가칠봉에 네이팜탄을 일주일 동안 물 붓듯 퍼붓고 공격해 올라가는데도 여전히 북한군의 사격은 계속되었다.사단장은 특공대가 고지로 돌격해 올라갈 때는 무반동총과 기관총 진지로 나가 망원경으로 확인하여 목표를 조준해주며 진두 지휘를 했다. 그리고 고지들을 점령한 후에는 적의 야간 역습에 대비하여 반듯이 해가 지기 전까지 완전 사주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다. ‘한국의 리지웨이’ 백남권 3사단장, 자결하고 싶다며 통한의 속죄 난공불락의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하자 유엔군 방송 종군기자가 3사단장 백장군을 직접 찾아와 생방송 인터뷰도 했다. 적병과 아군의 시체가 깔려 있고 구더기가 들끓는 산꼭대기에서 사단장은 제일성으로 “남의 귀한 자식들을 이렇게 죽인 것에 죄스럽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혈전 끝에 막 점령한 고지의 정상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니 그처럼 감회가 깊을 수가 없다. 계속 진격해서 백두산 꼭대기에 대한민국 태극기를 꽂은 후 나는 내 앞가슴에 차고 다니는 이 두개의 수류탄을 뽑아 그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내 부하들의 죽음을 속죄하는 뜻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①지휘관의 공명심 ②지휘관의 무지 ③지휘관의 태만에 의한 훈련 부족 등으로 인한 사병들의 희생을 항상 경계했다. 나는 오늘 많은 부하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딛고 영광스러운 지휘관이 됐지만 죽어 넘어진 영령들을 바라볼 때 가슴이 메어지고 속죄의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가 없다”고 고지점령 소감을 술회했다. 이때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백남권 3사단장에게 항상 수류탄을 앞가슴 양쪽에 차고 다닌다고 ‘한국의 리지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는”우리 3사단이 단시일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한 것은 현리 패전 후 양양 FTC에서의 철저했던 훈련과 미군의 화력 및 항공 지원에 큰 힘을 입었던 겁니다”라고 승리의 원인을 사전 교육훈련과 화력지원 등 유엔군의 공로로 돌렸다. 또한 “1211고지는 여러 번 공격을 했으나 끝내 점령을 못했어요. 이 고지는 너무 가파른 절벽이라 우리 사병들이 가까스로 9부 능선까지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던지면 도로 굴러 내려와 버리더군요.이 같은 불가항력의 지형에다 적의 발악적인 저항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어요”라며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역전의 3사단은 혈전의 ‘가칠봉전투’를 치루다가 미7사단과 진지를 교대하고 11월말 양구로 나왔는데 인명 피해가 1개 연대 병력에 가까운 전사3백여 명, 부상1천5백여 명이나 되었다. 백남권 3사단장은 휴전 후 1957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직시 화랑의 후예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 육사를 ‘화랑대’라고 명명한 것이 유래가 되어 현재까지도 이 별칭이 불리우고있고, 육사와 인접한 ‘태릉정류소’라고 불리던 경춘선 역을 ‘화랑대역’으로 변경하게도 만들었다. 부하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백장군은 육군보병학교장, 21사단장, 논산훈련소장, 6관구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전역 후 인천제철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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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3-0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0)] 사관특채(유신사무관), 선후배 등까지도 일(jop)을 위한 든든한 자산이자 잠재능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생(Life)은 B(탄생, Birth)과 D(죽음, Death) 사이에 있는 C(선택, Choice)의 연속이라고 한다.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복을 입은 지 어언 10년이 되자 동료들의 진로가 확연하게 차이나는 시비 쌍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동기생 40명이 사관특채(유신사무관)으로 지원하여 군복을 벗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산 것은 반드시 죽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법화경의 글귀처럼 청운의 꿈을 향한 각자의 길을 선택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 자신의 운명(運命)에 따라 사회 각층의 직업(jop)분야에서 그 꿈을 실현 세상에 태어난 것도 선택이다. 수만개의 정자 중에서 발탁되어 엄마의 뱃속에서 꿈을 키워 우렁차게 울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런데 그 선택의 결과로 어떤 이는 재벌의 2세가 되어, 또 어떤 자는 가난한 가정 등에서 나름대로 성장했다. 결국 자신의 운명(運命)에 따라 사회 각층의 직업(jop)분야에서 그 꿈을 실현해 간다. 당시 중대장을 마치고 사단작전장교가 되어 정신없이 밀려오는 업무의 파도 속에 허부적거리다 보니 태릉골(육사)에서 군복을 처음 입어본 지 10년이 지났고, 약 290명의 동기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첨단 실무자들이 되어있었다. 돌이켜보니 좌우 인접 사단에도 동기들이 작전장교 및 인사장교 보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약 40명이 사관특채(유신사무관)로 지원하였다. 사실 이 사관특채(유신사무관)제도는 필자가 사관학교 입교 시험을 볼 때 최초로 생긴 제도로 당시 육사 25기가 최초로 사무관으로 임용되어 각 분야의 공무원 활동을 시작했다. 사관특채(유신사무관) 1기인 권경석 전 의원(17·18대 국회의원)은 "관료조직이 타성과 부패에 빠지는 여느 개발도상국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의중이 담긴 제도라면서 지원자를 모집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수단의 하나"라는 것이 권 전 의원의 평가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점점 심해지는 군의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1977년 1기부터 1988년 11기로 폐지될 때까지 배출된 인원은 총 784명. 육사 기수로는 25∼37기에 해당한다. 시행 초기 5년간 100명 안팎을 선발했지만 전두환 정권 3년차인 1982년부터 50명 내외로 인원이 줄었다. ■ 미꾸라지 어항에 천적 메기를 넣어두면 미꾸라지들이 더 생기 있다는 '메기효과' 유신사무관들은 사관학교에서 배운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라는 ‘사관생도신조’로 무장을 하고, 전후방 각지에서 소·중대장직을 체험하여 조직관리능력과 리더십을 배양한 상태라 각종 비리와 불합리와 맞서 싸워 많은 신화를 창조했었다. 헌데 '유신사무관 폐지'를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약속대로 이 제도를 없애 버렸다. 민주화 열망이 분출하던 1987년, 안타깝게도 유신사무관은 군사독재의 주요 상징으로 척결대상에 꼽혔기 때문이다. 군이라는 특정 집단에서만 사무관을 한 해 100명 넘게 선발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였다. 반대로 공직사회와 민간에는 커다란 압박으로 다가왔다. 유신사무관 106명을 임용한 1977년 당시 행정고시(21회) 선발인원이 134명이었으니, 당시 공직사회 안팎에서 느꼈을 경계심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필자의 육사입교 시험시 입시요강에 최초 공고됐었는데, 결국 육사입교시 첫 대상이었던 필자 동기들을 끝으로 1989년에 폐지되어 1978년에 입교한 육사 38기부터는 유신사무관 선발이 없어졌고, 40여년이 지난 작금에는 공무원 조직중에 유신사무관들은 모두 퇴직하여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수단으로 시작된 제도였지만 시행 후, 행정고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획일적·폐쇄적인 관료사회에 다양성을 더하는 자극제였다고도 볼 수 있다. “미꾸라지 어항에 천적 메기를 넣어두면 미꾸라지들이 더 생기 있다”는 '메기효과'와 비슷한 논리이다. 마지막 사관특채(유신사무관) 11기인 한문철(육사37기) 전 서울시의회 사무처장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특혜 논란과 유신사무관이라며 평가절하하고 견제하는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사관특채(유신사무관)의 존재가치는 일부가 주장했던 부정적인 측면도 보다는 소속된 조직을 정화시키고 확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공무원 사회를 변화시킨 신화로 남아있다. ■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의미처럼 떠나간 자들까지도 인맥형성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법화경의 의미처럼, 4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교로 임관했고, 야전에 배치되어 5년이란 시간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동기들의 일부가 사회로 환원됐다. 그 와중에 필자보다 늦게 전입 왔던 선후배와 동료 등도 차기 보직을 위해 먼저 전출갔다. 하지만 현실은 이것들을 아쉬워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나머지 250명의 동기생들은 또다시 경주마가 되어 군생활이라는 트랙을 질주해야만 했다. 한편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의미처럼, 생도시절 훈육관 이었던 선영제 대령(육사25기)이 연대장으로 전입 왔으며 친 동생처럼 가르쳤던 한설, 신경철, 김상철(육사40기) 후배들도 휴가를 이용해 방문해 해후의 정도 나누었다. 인생(Life)은 C(선택, Choice)의 연속이다. 물론 그 선택 속에서 일부 악연도 있었으나, 대부분 새로운 만남을 통해 서로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또다른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먼저 사회로 환원된 사관특채(유신사무관)까지도 포함한 좋은 관계의 인맥은 필자의 군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산 것은 반드시 죽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법화경 한 구절의 의미가 새삼 가슴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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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03
  • [김희철의 전쟁사(33)] 펀치볼 전투 승리 영광과 환희의 색깔보다는 남겨진 상처와 고통을 성찰해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실제로 6·25남침 전쟁사는 양구 펀치볼(해안분지)의 고지들에서 약 221일 동안 벌어졌던 주요 전투를 9개, 사상자 수를 약 25만 여명으로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석산, 도솔산, 단장 및 피의 능선, 펀치볼, 가칠봉 등 핵심 전투들이 벌어진 고지들의 이름을 딴 양구군 월운리의 ‘펀치볼지구전적비’, 만대리의 ‘가칠봉전투전적비’ 등 많은 ‘전적비’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전쟁기념물은 선별되고 구성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이 전제돼 있어 종종 전쟁이 남긴 상처와 고통에 대한 성찰적 기억보다는, 전쟁 승리의 영광과 환희를 채색하는 방식과 가깝게 세워졌다. 미 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중장은 7월21일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에 양구의 펀치볼(해안분지) 일대를 공격하게 했다. 그곳은 지난 6월19일 ‘도솔산 전투’에서 국군 1해병연대에게 패한 북한군들이 도주한 대우산이 포함된 지역이었다. 미 2사단이 7월27일 펀치볼(해안분지) 서쪽의 대우산(1179m)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으나, 장마 때문에 공격은 중단되었다. 8월 중순이 되어 장마가 끝나자 미 10군단의 군단장인 바이어스 소장은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을 연결한 선에 작전통제선 헤이스(Hays)라인을 설정하고 다시 각 사단에 공격을 명령했다. 8월18일부터 서측엔 국군 7사단이 백석산(1142m) 기슭인 양구 방산면 송현리의 554고지·901고지 공격에 나섰으며, 중앙 미 2사단과 국군 5사단은 이른바 ‘피의 능선’이라고 불리는 983고지·940고지·773고지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국군 8사단은 해안분지 동북쪽인 인제군 서화면 노전평의 1031고지·965고지 공격에 나섰다. 서측 국군 7사단은 8월26일 554고지를 점령했고, 국군 8사단도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노전평전투에서 승리해 1031고지와 965고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미 2사단과 국군 5사단 병력이 투입된 피의 능선전투는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미 10군단은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8월29일 예비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미 해병 1사단을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 공격에 새롭게 투입했다. ■ ‘헬기공중기동 작전’ 최초 시도로 격찬 받은 미 해병 1사단의 ‘펀치볼전투’ 화채그릇처럼 움푹 파인 모양을 하고 있어서 펀치볼(Punch Bowl)이라고도 불리는 해안분지는 1천m가 넘는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당시 북한군은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북한군 3군단이 2군단 지역을 인수하고 3군단 예하1사단이 해안분지 북쪽의 924고지와 1026고지를 각각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라고 부르면서 방어진지를 공고히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고지들에 대한 공격 임무를 맡은 미 해병 1사단장 토마스 소장은 당시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해병 1연대로 하여금 김일성(924m)고지와 모택동(1026m)고지를, 미 해병 7연대에게는 해안분지 동북쪽의 702고지와 660고지를 공격하게 했다. 8월 31일 공격을 시작한 국군 해병 1연대는 산악의 특징상 기동로가 제한됨을 고려하여 정면보다는 측방으로 우회, 좁은 공간에서 목표를 공격하여 9월 2일 김일성(924m)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3일에는 모택동(1026m)고지도 점령했다. 미 해병 7연대도 9월 1일 702고지를 점령했으며, 9월 2일에는 660고지도 확보했다. 미 해병 1사단은 9월 8일 다시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월 20일까지 격전 끝에 749고지와 해안분지 북쪽 5km 812고지까지 추가로 점령했다. 이로써 미 10군단은 작전의 목표를 이루어 펀치볼(해안분지)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단은 885고지에 224명의 수색중대와 36톤의 보급품을 헬기를 이용하여 공중 투입하는 ‘헬기공중기동 작전’을 최초로 시도하여 미국 신문에 보도됐고 격찬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400여 명의 전사자와 1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북한군 2,700여 명을 사살하고 5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군 해병 1연대도 100여 명의 전사자와 3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380여 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4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 국군 5사단의 혈전으로 고지 주인이 6번이나 바뀐 가칠봉전투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의 김일성(924m)고지와 모택동(1026m)고지 등이 미 해병 1사단에 의해 점령되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그러자 미 10군단 군단장인 바이어스 소장은 미 2사단에게 좌측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게 했으며([김희철의 전쟁사](30) ‘스타크래프트 게임’ 인기맵 제목이 된 ‘단장의 능선’ 전투 참조), 국군 5사단에게는 우측에서 해안분지 북서쪽의 가칠봉(1,242m)을 병행공격하게 했다. 가칠봉 지구는 해안분지 북쪽의 분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곽에는 높은 산들이 솟아 있다. 이러한 지형때문에 6.25 당시에는 군 작전상 대단히 어려운 지점이었다. 북한군은 이러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고 각종 포화의 지원 하에 반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아군은 저지대에 있어 지형상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5사단장 민기식 준장, 27연대장 유의준 대령 등의 지휘하에 전투에 임했다. 8월30일까지 각 부대 배치와 수색 작전을 통해 정찰을 완료하고 배치된 위치에서 진지를 구축한 후, 8월31일 작전상 유리한 지점까지 북한군을 유인하여 막대한 희생을 입히고 총공격을 개시하여 가칠봉(1241고지)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역습하는 북한군의 저항을 격퇴하면서 2일간의 부대 방어에 간신히 임했으나 다시 빼앗겼다. 9월4일 민기식 5사단장은 27연대를 선두로 가칠봉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국군은 가칠봉을 점령하는데 또 성공했으나, 북한군이 27사단·12사단의 4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 대규모 역습이 가해져 고지에서 부득이 퇴각한 후, 재차 육박전을 전개하는 등 여러 차례 진퇴를 반복하였다. 그 뒤 가칠봉에서는 10월 14일까지 40여 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여섯 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은 가칠봉과 인근의 고지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칠봉전투’에서 패하면서 북한군은 사태리 방면의 쌍두령(雙頭嶺)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5사단은 600여 명이 전사하고 4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어 ‘51년10월 중순에 국군 3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반면 북한군은 1천여 명이 사살 당하고 250여 명이 생포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군 7, 8사단은 북한군 5군단이 방어하던 백석산을 공격해 10월1일 점령했고, 또한 5사단은 가칠봉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미 10군단은 북한군을 패퇴시키고 양구 북방의 고지를 확보해 취약했던 이 지역의 방어선을 효율적으로 구축했다. 그리고 유엔군은 중동부전선에서 전력의 우위를 입증하면서 공산군에 협상을 압박하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9)]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법,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자의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옛 학문을 되풀이하여 연구하고, 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근무지에서 시작하는 신입이나 전입직원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해 쩔쩔매거나, 간혹 그동안 자신의 커리어만을 믿고 앞서가다가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도 중대장 근무를 잘 마무리하여 자신만만하게 사단 작전처 근무를 시작했는데 실상은 매사에 실수투성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격언이 머리를 때렸다. ■ 새로운 환경인 로마의 법을 따르기 위해 친절한 스승을 만나다 초급간부와 병사들을 눈·입·발로 보고 지시하며 앞서 나아가 따라오게 하는 중대장보다 지시를 받거나 미리 예측하여 문서로 작성해 층층의 상급자(작전보좌관→작전참모→인접 참모들 협조서명→참모장→사단장)에게 각각 검토를 받고 결재 후 예하부대에 근거있게 지시하고 확인하는 상급부대의 실무장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중대장 시절에는 업무가 부여되면 고민하여 착안한 사항들을 소대장들과 병사들에게 말로 지시하고 확인하면 됐는데 상급부대로 갈수록 구두 지시 보다는 문서로 지시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심지어는 사단장과 군단장이 구두로 지시를 했더라도 다시 정리하여 문서로 지시하는 것은 당연한 실무자의 몫이었다. 말만으로 명령하다가 매사를 문서로 지시를 하기 위해서는 문서 작성 능력이 필요했는데, 대대 교육장교를 경험했던 필자였지만 체계적인 문서작성 요령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때 작전처의 선임장교인 염철한 대위(삼사15기)의 친절한 가르침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은 사기진작을 위한 허언(虛言) 작전장교의 일상은 새벽 상황보고 준비를 해서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일일작전 상황보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야간 작전 상황보고와 아침 상황보고 준비를 확인함으로써 끝난다. 그러다 보니 새벽별빛 아래에서 오솔길을 따라 출근하여 주간에 상급부대 현황 파악 보고와 수시 보고 준비를 하는 등 바쁘게 달리다가 자정이 다 되어야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숙소로 향한다. 전입 얼마 안되어 상급자나 선임장교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지만 곧 다음 일을 위해 펜대를 잡으면 앞이 망막해졌다. 얼마나 모르는 것이 이렇게도 많은 대도 “무슨 열을 아는 신입장교인가..?”하고 반성했다. 돌이켜 보면 지쳐서 사기 떨어지지 말라고 격려하는 허언(虛言)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펜을 들고 다음 작전보고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폰이 울리며 작전참모가 호출을 했다. 수첩을 챙겨 상황실 벙커에서 부리나케 본청 참모실로 갔다. 김관진 작전참모(육사28기, 전 국방부장관/국가안보실장)는 메모지에 읽기 힘든 글자 모양과 선을 그리며 지침을 주었다. “제목은 000작전인데 사단장 의도가 ~ XX ~이니까 너는 박스를 그려 현황을 넣고 다음에 실태를 제시하고, 앞으로는 ~ ~~이렇게 되도록 작성해서 가지고 와라”라며 승천하는 용 같은 지렁이 모양과 글씨 그리고 동그라미가 그려진 메모지 6장을 주고는 필자의 얼굴을 보면서 “알겠냐…?”라고 지시를 하였다. “예, 네~”하고 쉽게 대답은 했으나 상황실 벙커로 올라오며 메모지의 지렁이 기어가는 선들과 알 수 없는 글자 모양에 혼돈 만 가중되었다. 그나마 지침 없이 000작전 지시문 만들어 와라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본인이 직접 메모지에 요약하며 방향을 제시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무실 자리에 도착해서 한숨을 쉬고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고민하는 필자를 지켜보던 선임장교 진종면 대위(삼사14기)가 다가왔다. 어깨 너머로 제목과 내용을 보던 그는 “잠시 기다려봐”라는 말과 함께 후송을 다녀온 뒤라 목발을 집고 절뚝거리며 이동해 캐비넷을 뒤적이더니 문서 한뭉치를 꺼냈다. “김대위, 이것은 작년에 비슷한 내용으로 작성했던 것이야. 참고가 될꺼야…!” ■ ‘온고지신(溫故知新)’, 스펀지처럼 옛 것을 빨아드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것보다 기존 멤버인 선임작전장교들의 지식과 자료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여야 한다. 밤새 준비를 하여 새벽 상황보고 전에 작전보좌관 검토를 받고 참모실에 들어갔다. 작전참모는 보고서를 넘겨보더니 서명을 하고 인접 참모 협조서명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바빠졌다. 상황보고 전에 끝내야 한다. 인접 참모실에 갔으나 이미 다른 실무자가 들어가 보고 중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할 수 없이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보고 중이던 해당 참모부의 다른 실무자를 제끼고 필자의 보고서를 내밀면서 사단장 지시로 급하게 들어왔으니 협조서명을 부탁드린다고 얘기했다. 이렇게 협조서명을 무사히 마치고 작전참모에게 보고서를 가져갔다. 작전참모는 아침 일일작전 상황보고가 끝나자 곧바로 사단장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작전처의 오전은 그나마 휴식 시간이다. 밤새 보고서와 씨름해 피로가 밀려오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때 버릇이 생겨 지금도 의자에 앉으면 졸음이 몰려온다. 특히 버스 등 차를 타면 그 진동에 바로 잠이 드는 습관이 생겼다. 깜빡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또 인터폰이 울렸다. 원래 다정했던 작전참모의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는 느낌을 받고 긴장하여 참모실로 내려갔다. 다행이도 보고서에 사단장 서명이 되어 있었다. 작전참모는 전날 사단장을 수행하며 이미 소통을 하였기에 사단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시 받은 다음날 아침에 바로 결재를 할 수 있었고 그 작전은 정상적으로 신속하게 시행되었다. 허나, 보고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빨간 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었고 그 체크는 세 군데나 더 있었다. 김관진 작전참모는 “야, 김희철..! 사단장님이 오자를 체크했는데 앞으로도 난 오자 체크는 안하고 개념만 맞으면 바로 결재 들어갈꺼다. 그러니 앞으로 오자가 또 나오면 니가 책임져…!”하고 미소띤 질책과 함께 수고했다는 말을 던졌다. 옥에 티인 그 오자가 한계였지만 오후에 지시를 받고 준비해서 다음날 아침에 결재가 나올 때의 성취감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새로운 근무지에서 전입·신입직원의 노하우는 스펀지처럼 기존 멤버들의 지식을 흡수해서 업무를 해야한다. 더불어 탁월한 직원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마음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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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1
  • [김희철의 전쟁사(32)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의 진짜영웅 이근식 소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철수는 했지만 당시의 전투지역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식사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2일째 식사를 못하고 건빵과 물만 먹고 마시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2일간 밀렸던 식사가 노무자들의 지게로 운반되어 도착했다. 소대원들은 소금과 함께 주먹만한 삶은 쇠고기 덩어리를 반찬으로 철모에 수북히 담겨있는 밥 2일분을 다 한끼로 먹어 치웠다. 대원들의 얼굴에 희색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우리는 5시간 정도 푹 쉬고 잤다. 재 공격을 위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대 통신병이 SCR-300 무전기를 가지고 3소대장 이소위에게 왔다. 1대대 작전장교(서정남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렸다. ■ "국가를 위한 희생은 사치품 같은 소리…,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3소대장, 공격하느라 수고가 많지? 대대장님(공정식소령 해사1기, 훗날 해병대 사령관 역임)께서 이번 공격에서는 반드시 '무명고지'를 점령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으니 필히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격려하는 교신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긴박했으면 대대 작전장교가 중대장을 제치고 공격소대장에게 직접 목표점령을 지시했을까? 그 특별지시는 소대원들에게 큰 격려가 됐고 이번 공격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임무인가를 다시 깨우쳐 주었고,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17:00시, 2차 공격준비를 위해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켰다. 총원 40여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소대장을 포함하여 2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번쩍이고 있었다. 그속에는 살기가 있었다.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각오였다. 이소위는 살아남은 소대원들에게 "자, 아침 공격에서 우리는 많은 동료 해병을 잃었다. 그러나 목표는 점령 못했다. 이번에는 필히 목표를 점령하여 전우의 원수를 갚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다. 나를 봤지? 적탄에 맞았어도 나는 살아있지 않나…"라며 분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대원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지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그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이제 공격을 개시하면 소대원 중 누군가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것이고 그것이 운을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제 곧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이 때 무엇을 생각 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는 사치품과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전해졌다. 오전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이소위는 산악 지형의 특성으로 총보다 수류탄이 더 효과적인 공격임을 깨닫고 수류탄을 4개씩 분배했다. 소대원들의 손을 잡으며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점령 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손을 굳게 잡은 대원들의 얼굴은 무표정 했다 17:55분, 미 해병대의 항공기 와 155mm야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지원받고 5분 뒤에 그들은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공격대기지점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이소위는 목표 정상에 우선 뛰어 올라가 수류탄 돌격공격을 하기위해 3명의 특공대를 편성했고 중대장에게 연막차장 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멀리 후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105mm 연막탄이 "쉬"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목표 너머 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3탄과 제4탄이 날아와 정확히 목표상에 다시 명중했다. 이소위는 무턱대고 일어서서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연막 속으로 목표 정상에 뛰어 올랐다. 연막으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적이 파 놓은 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왼쪽에서 폭발했다. 나는 다시 나의 왼쪽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때마침 옆을 보니 특공대로 자원한 자동화기사수 고호선해병이 바로 오른쪽 호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호 속에는 적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체온을 느낄 정도였다. 정상에 소대장과 함께 둘이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이 들어있는 호 앞 너머에서부터 그 지긋지긋한 소련제 수류탄이 역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마치 까마귀 떼가 죽음의 사신으로 그들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부 그 둘의 머리 위로 지나쳐 뒤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그 중의 1발이 고해병이 있는 호 속으로 떨어졌다. "앗" 하며 놀라는 순간 고해병은 적의 수류탄을 주워 적진으로 되던졌다. 적진에서 "쾅"하고 터졌다. 계속 20~30발 정도의 수류탄이 날아오더니 뜸해졌고 잠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하고 둘의 것을 모으니 수류탄이 8발이다. 이소위는 오전 공격을 통해 적이 바로 앞 너머 10m정도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격발한 후 멀리. 가까이 그리고 좌우로 고루고루 적진에 던졌다. 자동화기사수 고해병은 적의 역습에 대비해 경계했다. "쾅,쾅…"하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오른쪽.왼쪽에서. 그리고 멀리서 들렸다. 8발의 수류탄 폭발 소리를 세었다. 조용해졌다. 이제 육박전을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무아지경으로 무명고지 정상에 우뚝 올라섰다. 고해병도 뒤따랐다. 앞에 도망가는 적들이 보였다. 그는 "돌격 앞으로!"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의 "돌격명령"은 적 격멸과 동시에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방어중에 있던 적을 소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보다 더 컸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승리의 소리였다. 그러나 "와" 하는 해병들의 돌격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와서 고지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소대원들은 굴러오는 적의 수류탄을 피해 정상에서 30~40m 아래쪽으로 물러서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이소위는 다시 소대원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았다. 대원들이 쫓아오건 말건 좀 무모했지만 그리고 쫓아가 적을 잡아서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적 1명을 뒤에서 덮쳐서 잡았다.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포로는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했다. 그 절망에 찬 애절한 표정의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부하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총구를 치우고 "일어섯" 했을 때, "살았다"하는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보이던 그 포로의 얼굴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자비를 베푸는 자의 희열을 맛본 것 같았으며 결국 그 포로를 사살하지 않고 후송시켰다. 그리고 이소위는 목표를 점령할 때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의해 몸의 왼쪽 부분, 겨드랑이, 왼쪽 다리 특히 무릎 관절 속으로 파편창을 입은 것을 잊고 있다가 목표 점령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왼쪽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쓰러졌다. 이근식 소위는 어두운 밤길 고지 능선을 따라 덩치 큰 3.5인치 로켓포 사수의 등에 엎혀 밤새 10시간 동안 넘어지고 뒹굴면서 동이 틀 무렵에 구호소에 도착했다. 그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원주를 거쳐 미군 수송기편으로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1개월간 입원치료 후 퇴원하여 다시 전투에 임했다. ■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한 대승리 그러나 계속된 교전으로 피해만 늘어나자, 2중대 3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수류탄을 이용하는 맹활약으로 중간 목표를 일몰 이후에 점령했던 사례를 참고로 해병대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정상적인 주간 공격보다는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1해병연대는 6월11일 02시에 무지원, 무조명하 야간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3시간 만에 방심했던 적들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전과확대로 전환하여 대암산(1,314고지, 목표15)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국군 해병의 공격기세를 유지한 계속 공격으로 전투력이 저하된 인민군들은 6월19일 도솔산(목표24)을 포기하고 대우산으로 도주함으로써 ‘도솔산전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투 중 적들이 노획한 아군 무전기로 감청을 잘하자 해병 1연대 장병들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에게 당시 잘알려지지 않은 제주 사투리로 무전 교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4.3사건’으로 자신 및 가족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위해 입대한 제주도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26일, 국군 해병 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 이라는 휘호와 함께 부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연대장과 이근식, 오정근, 김의태 소위는 미 은성무공훈장, 대대장들과 고호선해병 등에게는 미 동성무공훈장, 2중대장에게는 "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6
  • [김희철의 전쟁사(31)] 도솔산 전투 승리를 축하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기념비, ‘무적해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 3군단은 ‘51년 중공군의 기습적인 제 6차공세(5월공세)로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이후, ‘용문산대첩’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쾌승한 장도영장군의 6사단은 5월 21일부터 양평에서 양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했다. 이때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며 대승을 올리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한편 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 1연대 수색중대가 대관령에 도착하여 선점했다. 이후 한신 대령의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의 1군단은 계속 북진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5월 말이 되자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5차공세인 4월 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의 전선이었던 캔사스(KANSAS)선까지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도솔산전투’는 처음에 캔사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미 해병대 1사단의 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했다. 따라서 파로호 전투에서 혁혁하게 공을 세운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가 6월3일 도솔산 공격 임무를 인수하여 6월4일 첫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지역은 38선 이북으로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유엔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캔사스선으로 철수한 공산군은 북한강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중공군 9병단이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점령 중이었고, 북한강 우측인 이지역에는 북한 인민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펀치볼과 도솔산 일대의 전술적인 이점과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난공불락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도솔산 일대에 배치된 북한 인민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므로 국군 해병대는 한 걸음도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군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인민군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의 발판이 되었다. ■ 도솔산 전투의 진짜 영웅, ‘수류탄 돌격 소대장’ 이근식 소위(예비역 대령)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차 목표를 대암산(1,314고지, 목표15)로 정하고 최초 2개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첫 공격이 좌절되자 6월5일에는 위 상황도와 같이 3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대의 공격 4일째 되는 날인 6월7일 05:00시에 이근식 소위(해간 3기)는 해병 1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장으로서 "도솔산"공격 중간목표 중의 제 4목표인 "무명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중대장 이응덕 중위(해간1기)으로 부터 받았다. 앞서 최초공격을 하던 1소대장 최영남 소위(해간.3기)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선임하사관이 소대를 지휘했으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철수했다. 다시 2개소대로 재공격했으나 역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적의 소련제 수류탄 투척을 수반한 완강한 저항에 또 실패했다. 3소대장 이근식 소위는 소대원들을 공격대기 지점으로 인솔하던 중 상공에서 포탄의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낙하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왼쪽 어깨등에 파편을 맞아 피가 흘렀으나 경상이었다. 다행히 소대원들의 피해는 없었다. 09:00시 소대는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정상의 적 진지가 희미하게 보이는 돌격선에서 착검을 하고 돌격준비를 완료했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50~60m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수류탄 투척 거리 밖이다. 적의 진지는 산 정상에 있고 소대는 밑에서 돌과 흙으로 구성된 경사진 능선을 중심으로 기어올라가는 자세로 공격해야 했다. 2,3소대장의 "돌격 앞으로!"의 명령으로 호각소리와 함께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그 때 돌격 함성과 함께 정상의 적 진지로부터 소련제 수류탄이 위로부터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굴러내려와 폭발하였고 동시에 우측의 암벽진지로부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불리한 여건이었으므로 앞으로 나가는 해병의 수보다 쓰러지는 해병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적의 목전에서 공격은 돈좌되었다. 이소위는 수차에 걸친 공격 중에 많은 부하 해병들이 전사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책감과 강박감에 솟구쳐 오르는 통분을 억누르기 힘들었고 사기가 떨어진 대원들은 소대장의 얼굴 만 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마비되어 어떤 결심을 한 표정으로 2소대장에게 "김 소위! 내가 저 정상의 적 진지를 분쇄할테니 뒤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2소대장은 "않돼. 올라가면 죽는 거야!" 하며 극구 그를 말렸다. 그러나 이소위는 “단지 나의 책임을 다할뿐이다" 라는 무언의 항변을 하면서 뒤쪽에 엎드려 있는 소대원들에게 "산 위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면 쏴!"라고 지시하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 2발을 양손에 쥐고 허리에 수류탄 2발을 차고 포복으로 정상의 적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바로 머리위에서 적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철모가 아닌 전투모를 쓰고 있었지만 무아 중에 벌떡 일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적을 2~3m 거리에서 내려다 보는 위치 였다. 적들은 방심한 채 옆과 앞뒤로 판 호안에서 수류탄을 모아놓고 아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적이 주어서 다시 던지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양손에 쥐고있던 안전핀을 뺀 수류탄 2발을 미리 격발시켰다. "딱,딱"하고 수류탄의 격발 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리는 순간 수그려져 있던 적의 머리가 들렸다. 적의 눈과 그의 눈이 소리 없는 불꽃으로 부딪쳤다. 순간 쌍방은 놀란 나머지 꼼짝도 않했다. 그는 바로 그들 속으로 수류탄 2발을 던지고 엎드렸다. "쾅,쾅"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도 뽑아 격발시키고 좀 멀리 던졌다. 그리고 해병들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마치 수영선수가 다이빙하듯이 붕 떠서 40~50m의 거리를 곤두박질하면서 돌아올 때 2개의 수류탄 폭음이 뒤에서 들렸다. 순간 함성이 들렸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우리 소대장님이 제일이다!" 순식간에 대원들의 두려움이 소멸된 듯 했다. 사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후 그에게는 "수류탄 돌격 소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느정도 사기를 회복한 소대원들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이 다시 공격을 계속했다. 그때 이소위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그 충격으로 몇바퀴 뒤로 뒹굴었고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권총 탄띠의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탄창(칼빈 소총탄 15발) 2개의 주머니가 그의 복부쪽으로 돌아와 있어서 그 탄창의 맨 위 쪽에 있던 총알탄피 2개를 관통하고 관통력이 약해져서 총알이 회전하면서 그의 전투복을 뚫고 속내의를 뚫고 복부 위에서 기적적으로 멈췄다. 소대장이 적탄에 맞은 것을 보고 심통한 표정에 잠겨있던 대원들도 그가 "안 죽었어!"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니 다시 함성이 일어났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정말 천우신조였다. 그는 "이제 나는 죽지 않는다'라며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상황보고를 하고 중대본부 지역으로 전원이 재공격준비를 위해 철수 하였다. 중대장도 그들의 전투상황을 70~80m정도 뒤에 있는 고지에서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질책도 없었다.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8)] 직업군인이란 ‘침과대적(枕戈待敵)’속에서도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줄 알아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침과대적(枕戈待敵)’이란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항상 전투태세(戰鬪態勢)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따라서 군인은 어느 직책이든지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시간이 제한된다. 즉, 휴일이나 휴가중에도 부대에 비상이 걸리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망서리지 않고 부대로 복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 처음으로 마음 놓고 망중한(忙中閑)의 휴가 즐기다 육군소위로 임관해서부터 GP장과 대대작전항공장교, 중대장 근무를 하면서도 마음 놓고 즐기는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낸 적이 없었다. 친구를 만나거나 집안 행사에 참석하더라도 ‘침과대적(枕戈待敵)’의 마음으로 잠시 눈 도장만 찍고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심지어 결혼 휴가 때에도 부대 일정이 조정되어 결혼식을 마치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복귀해 훈련 평가에 참여했다.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스탭 꼬인 결혼식 날짜와 지휘관의 줄탁동시(啐啄同時)’ 참조)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휴가를 만끽했다. 사단에서는 이취임식을 하고 바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강호갑 대대장(육사31기)의 배려로 연대장 신고 일주일전에 중대장 이취임식을 하도록 조치하여 모처럼 여유있는 휴가를 출발했다. 전방 근무를 시작하면서 친척 어른들과 친구들도 여유를 갖고 만날 수 있는 휴가를 보낸 적이 별로 없어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따라서 이취임식을 마치자 바로 서울로 출발해 처가도 들려 중대장을 무사히 마친 인사도 드렸다. 이어서 이미 서울로 이동하여 근무하는 옛 선배와 동기들을 만나 소주잔도 기울였다. 또 작은 할아버지, 고모님들, 외삼촌….. 가능한 모든 친척을 찾아 뵙고,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제대로 못간 신혼여행을 보상하는 의미로 따뜻한 남쪽지방 여행도 갈 수 있었다. 연애시절 추억이 담긴 창원, 마산과 논개의 한이 서린 진주 진양호 등을 거치며 부부만의 알콩달콩한 시간도 가졌다. 이 모두는 당시 필자의 소속이 이임한 부대로 되어있으나 이미 임무를 교대했기에 부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후임자가 처리를 하고 본인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에서 망중한(忙中閑)의 휴가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임무 교대후 전출 시와 전역할 때 뿐인 것 같다. ■ 마음 놓고 즐기는 휴가를 당분간 포기한 사단작전장교 근무 시작 휴가 복귀해서는 바빴다. 연대장에게 전출신고를 하고 아파트에 돌아와 이사짐을 싸기 시작했다. 결혼식 이후 3년4개월동안 벌써 6번째 이사이다. 최초 육단리 관사의 신혼 살림을 시작으로, 6개월간의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기 위해 광주상무대 백일아파트로, 교육 수료후 다시 육단리 셋방에서 중대장을 시작하고, 당시 6개월주기의 GOP부대 교대에 따라 적근동 관사, 또 다시 삼거리 아파트로 이동했다가 이번엔 중대장을 마치고 사단본부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했다. 1987년 3월말 사단본부 첫 출근을 위해 새벽에 오토바이를 운전하여 삼거리 아파트를 나서자 늦겨울이자 이른 봄의 폭설이 내렸다. 약 1시간 거리의 사단본부를 향해 출발했지만 눈길은 미끄러웠고 눈발은 점점 더 강해져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결국 사단본부 앞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간신히 사무실에 출근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때마침 작전처 선임 대침투장교인 진종면 대위(삼사14기)가 축구경기 중 다리가 탈골되어 춘천으로 후송을 떠나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 공백을 메우느라 고생하던 정규작전장교 염철한 대위(삼사15기)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느라 손발이 얼고 눈사람같이 변한 모습의 필자를 너무도 반겨주었다. 다음날 가족이 직접 군 트럭에 이사짐을 챙겨 사단본부 아파트 503호로 이사를 했고, 그렇게 마음 놓고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휴가를 당분간 포기한 사단작전장교 근무는 시작됐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24
  • [김희철의 전쟁사](30) 미군, 한국전에서 2주간의 공방에도 점령 못한 최초의 사례로 희생자만 낳은 ‘단장의 능선’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치열했던 고지전이 일어난 곳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전투지역은 ‘단장의 능선’이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중에서도 ‘단장의 능선’이라는 맵이 있었을 정도이다. ‘단장의 능선’은 강원 양구와 인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중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를 연결하는 5km 정도의 능선을 말하며, 지금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Stan Carter)가 전투상황을 취재하면서 어느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한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데에서 암시를 받아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여 이후부터 931고지 일대를 ‘단장의 능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한 프랑스 감독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1955년에 발표했고 1956년 오스카상 다큐멘터리 부분에 출품도 했는데 영화제목은 'Cr?vecœur'였다. 영어로 하면 'Heartbreak' 이며 한국어로 번역하면 '단장(斷腸 -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이라는 의미이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1951년 7월 10일 개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피의 능선 전투’와 바로 이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1951년 9월13일 ~ 10월13일 동안의 이 전투에서는 미2사단이 예하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와 미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하여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6, 12사단 및 중공군 204사단과의 일진일퇴를 벌이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역사, 2만5000명의 젊음을 앗아간 치열했던 전투 피의 능선 전투(8월18일~9월5일)에서 인민군을 몰아낸 미 2사단 정보참모는 적의저항이 경미할 것으로 예상하며 공격 기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포병사령관 워커 대령 등 연대급 지휘관들은 피의 능선처럼 단장의 능선도 저항이 완강할 것이라 고 건의했다.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1개 연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만으로 9월 13일부터 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단장의 능선 931고지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소모를 자초하게 되었다. 5개 포병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은 미 23연대는 18일 야간 공격까지 감행하여 중간 목표인 850고지를 점령하였고 병행 공격하던 좌인접 미 9연대 2대대가 894고지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이 9월20일 귀국하고 후임으로 로버트 염 소장이 부임했는데, 23일 미 23연대 1대대가 931고지를 점령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9월 26일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다시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늘어나 27일 공격작전을 중단시키고 재편성하였다. 미 2사단 23연대에 의해 시행된 이 ‘1차 공격 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을 통틀어 2주간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점령을 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의1차 공격에서 실패를 교훈삼아 사단장 로버트 염 소장은 3개연대를 동시에 투입시키는 ‘터치다운 작전’을 시행하였다. 위의 상황도와 같이 2차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72전차대대가 좌측 문등리 계곡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10월1일~5일 간에 사단공병대대로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스터만 특수임무부대(전차1개중대)는 우측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을 교란시켰다. 2차 공격은 10월5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미 23연대 1대대는 851고지를 공격하여 931고지에 대한 적의 증원을 견제하고 2대대와 프랑스대대는 6일 아침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좌측 미 38연대도 단장의 능선 서측방 490고지와 728고지를 점령하였지만 미 9연대는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867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7일 미 23연대는 2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851고지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기일전한 미 9연대가 단장의 능선 서측방 작전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미 38연대는 8일에 636고지를, 9일에는 네덜란드대대와 협조하여 610고지를 점령하였을 뿐 더 이상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2구간 도로를 개통하여 10일에 2차 공격의 마지막 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제72전차대대가 충격을 가하면서 단장의 능선 서측 문등리 계곡으로 돌입하여 북괴군을 유린함으로써 진지 교대차 남진하던 중공군 204사단을 분산시키고 적 후방을 교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능선의 동측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전 협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제9연대는 문등리 계곡 서측에서 병행공격을 실시하였다. 11일 미 23연대는 520고지를, 미 38연대는 905고지를 탈취하면서 미 2사단은 대부분 작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 23연대 3대대가 서쪽에서 851고지를 공격하고 1대대와 프랑스대대가 남쪽에서 주 능선을 따라 진출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13일 ‘단장의 능선 전투’ 최종 목표인 851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성공리에 작전을 종료하게 되었다. 적군 2만1000여 명, 아군 3700여명의 피로 ‘단장의 능선’ 확보...휴전회담 재개 약 1개월 동안 일진일퇴의 백병전을 거듭한 끝에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함으로써 전투가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탄약 69만 7000발, 항공기 출격 842회, 폭탄 투하 250톤이라는 엄청난 화력지원을 하였다. 또한 탱크를 이용해 충격을 가하는 기동전과 육박전에 이어 헬리콥터 작전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날에는 견고한 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사단은 사상자가 2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단장의 능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미 2보병사단 또한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단장의 능선’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생긴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지 9일 후,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여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을 재개했지만, 결국 다른 의제들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휴전회담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서 격전의 현장에 세워진 ‘비목(碑木) 비석’의 내용처럼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아까운 젊음들의 피만 부르는 고지쟁탈전은 1953년 7월까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7)] 삶이란 우주생명에 기여하고 사라지는 것/흔적을 남기지 않고 후임 중대장에게 길을 열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 연구소장] 하늘아래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가? 그것을 생사를 걸고 찾아라! 그리고 때와 장소를 알아 찾은 것을 아낌없이 태워라! 주변을 밝히려 자신을 태우는 태우는 촛불과 같이…….세상사 마무리 또한 중요한 것이니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고 증발해 버린 물과 같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져라! 남을 살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대인(大人)의 도(道)이다. 사나이여! “대인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 연속된 훈련, 평가, 검열이라는 '극한' 속에서 여유를 찾아… 인접 사단 지뢰 사고로 긴장된 가운데 6월20일에 시작된 한달간의 GOP철책을 이중화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작전지역의 급경사도로인 중고개 도로 포장공사에 투입되었다. 바로 이어 8월이 되자 4주간의 대대전술종합훈련이 있었다. 먼저 공지합동훈련으로 장거리 행군을 하여 장군산 훈련장에 도착한 후 작전항공장교의 유도로 공군 전투기가 표적에 폭격을 하고 우리 중대가 대대의 주공을 맡아 공격하여 목표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마침 현장지도를 나온 정성호 연대장(육사22기)은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을 모아 격려를 하면서 지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연대장은 월남전이 치열할 때 소대장으로 참전했는데 그때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상급 명령으로 어느 마을을 수색하라는 작전 지시를 받고 그 마을 입구에 도착했는데 너무 조용하여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껴 전진을 중단시키고 적정을 다시한번 더 살피고 있었다”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병행 수색을 하던 인접 소대는 정지 없이 그대로 마을로 진입하다가 베트공 매복조의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상황을 확인한 연대장의 소대는 측방 공격으로 베트공을 타격하여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정 연대장은 지휘자의 직감과 통찰력은 부대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강조하고 훈련장을 떠났다. 4주간의 대대전술종합훈련이 끝나자 타부대 경계지원, 유격훈련, 추계진지공사, 사단 전투지휘검열 등이 계속 이어졌다. 연속된 훈련, 평가, 공사, 검열 속에서 어느덧 중대장 시절 막바지에 이르렀다. 생도시절 훈육관이자 대대 교육장교 시절 지휘관으로 모셨던 송영근(육사27기, 기무사령관,19대 국회의원 역임)장군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실천하여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겸손하게 임하되, 자기일에 정통하라!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는 이 세 가지의 근무자세를 이후 어느 보직을 부여 받아도 변함없이 적용함으로써 극한 속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 상급 지휘관 교체 시 생존 방법은 중용지도(中庸之道) 1984년 12월부터 근 2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부대를 멋있게 지휘했던 양치규 대대장(육사29기, 32사단장, 방사청장 역임)이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3군 사령부로 영전하게 되었다. 추계진지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86년 10월 고별순시를 하시던 대대장 부부 앞에서 중대원들은 부모님과 이별하듯 아쉬워 했고 사모님은 눈가에 이슬을 감추며 그렇게 떠났다.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던 필자도 그동안 존경했고 정들었던 대대장을 떠나보내기 싫었지만 아쉬움을 달래는 마음이 식기도 전에 신임 지휘관인 강호갑 대대장(육사31기)의 지휘방침을 따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급 지휘관이 바뀌었는데도 과거에 안주하면 절대 안된다. 그동안의 절차, 예절, 근무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운 상급자에게 맞추어야 한다. 일단은 새로 부임한 상급자의 방침을 따라서 전환하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과 관습에 익숙해 있더라도 잘 아는 것처럼 너무 나서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마침 육사 2년 선배들의 유신사무관 모집이 있었는데 사단의 7명 선배중에 6명이 동시에 응시하는 상황이 벌어져 사단이 발칵 뒤집혔다. 필자가 근무하는 사단에서 유별나게도 사무관 지원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전환한 선배들 중에는 아마도 대부분이 상급 지휘관 교체 시 적응이 어려웠던 것이 그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상급 지휘관 교체시 생존 방법은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정답이다. ■ 유종지미(有終之美) 얻으려면 흔적도 남기지 말도 아낌없이 비워라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조직사회의 당연한 흐름이다. 대대장이 교체되자 참모들도 바뀌었다. 대대 지원장교로 보병학교에서 본부대장을 헸던 3사관사관학교 출신 지원장교가 부임했다. 군으로 따지면 3년선배인 그는 소령 진급을 못하고 전방으로 부임된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또한 직전에 근무했던 보병학교에는 전역을 앞둔 대령급 장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진급을 미끼로 부하들에게 뇌물을 요구했고 본인도 더 많이 상납한 동기에게 밀렸다며 만연된 부정부패를 한탄했다. 임관 후 계속 5년 넘게 최전방생활을 한 필자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다. 한편은 그런 비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최전방 오지에서 열심히 하는 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방부대가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자 그의 논리비약이 심했다는 것을 그의 근무자세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일부의 부정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군 전체에 만연된 것은 아니라는 게 사실이었다. 부패 체험을 못하고도 정상적으로 진급하고 전역한 필자가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도 존경하고 배울 것이 많았던 송영근 대대장님이 6사단 작전참모로 근무 중인대도 대령 심사에서 낙선을 했고, 수도권과 육군본부 등지에서 날개를 달고 실력발휘를 하는 동기생들을 비교해볼 때 최전방 좁은 영역에서 우물안의 개구리(井中之蛙)처럼 항상 우월감에 빠져있는 필자의 초라하고도 뒤쳐진 자아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한편 대대에서는 후반기 체육대회가 있었다. 전반기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해([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66)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GOP철책 이중화공사’ 참조) 양보하고도 싶었지만 중대장 근무 마지막 기회이고 중대원들의 사기고양과 애대심(愛隊心)을 공고하게 만들고 싶어 철저히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계주와 줄다리기에서 우승하여 종합우승 2연패를 했다. 선승구전(先勝求戰)이었다. 송영근 장군이 강조했던 “자기일에 정통하라!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는 이 세가지의 근무자세를 실천한 결과였다. 계주는 함재명 소위 등 잘 뛰는 인재를 확보한 결과였고, 줄다리기는 불량한 운동화 상태가 미끄러짐을 유발시켜 힘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축구화로 미리 준비해 연습하는 등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중대장 마지막 겨울에 3사 및 학사 초임장교 집체교육과 육사생도 전방실습 및 동계 야외종합훈련 등으로 혹한과 씨름하다보니 중대장 보직을 마칠 때가 3개월 남게 되었다. 마침 사단 작전장교로 근무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27개월 동안 중대장으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생사를 걸고 찾아서 마치 주변을 밝히려 자신을 태우는 촛불과 같이 청춘을 아낌없이 태웠다. 또한 1987년 3월16일 성공적인 중대장 이취임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를 믿고 따랐던 사랑스런 부하들과 신뢰해준 상급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중대장 마무리 또한 중요한 것이기에 필자도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고 증발해 버린 물과 같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져 후임 중대장의 길을 열어 놓았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대인(大人)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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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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