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소통시대
Home >  소통시대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75)]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은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모두 격파하고, 9월19일부터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인천에 상륙한지 9일째인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미 1해병연대 등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한편 김일성은 서울방어를 위해 철원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과 김천의 9사단 87연대 등 정예부대 2만 여명을 전환 배치했다. 이에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시행한 언론플레이와 군사작전의 달성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 1해병사단 및 국군 해병대는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대대원의 90%가 넘는 희생을 감수하며 감행한 연희고지전투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후 한미 해병대는 부천, 영등포, 안양, 수원을 차례로 점령하고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연희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연희고지가 북한군의 최후의 요새였다. 그렇기에 이를 점령하는 것이 서울 수복의 최대 관건이었다. 연희고지는 서대문구에 있는 산으로 104고지 · 연희산 · 염산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9월21일 미 5 해병연대에서 하달된 공격 명령으로 시작되어 23일에 끝났다. 행주나루로 도하에 성공한 후 수색지역을 무혈 점령하고 연희고지 앞까지 도달한 첫날 미 5해병연대장 머리 중령은 동쪽 끝에 위치한 10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미 3해병대대는 좌측에서, 미 1해병대대는 우측에서, 국군 1해병대대장 고길훈 해병소령에게는 중앙에서 근접한 연희능선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국군 1해병대대는 104(연희)고지의 양쪽으로 1중대와 2중대가 공격했고 이들이 개활지에 도달하자 바로 적의 기습사격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22일에는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600명의 역습도 있었으나 격멸했고, 적들의 완강한 저항을 타개하기 위해 포병 및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전차부대와 함께 104고지 근처의 철로를 따라 전진했다. 하지만 적의 집중포화로 막혔고 결국 이날 전사자 11명과 부상자 45명을 냈다. 이때 적의 병력은 약40%의 손실을 입었다. 한편 104고지 오른쪽에 있는 터널 속에서 피아 정찰대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미 우리 해병은 북한군 병사들이 삭발하고 있다는 알고 있었던 까닭에 해병들은 상대의 머리를 만져보고 적임을 확인하여 이들을 모조리 포로로 생포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인 23일 국군 1해병대대는 공격력을 증대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으로 적의 진영을 정면 돌파하는 공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적의 거센 저항에 신양수 소위, 김한수 중위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1해병연대장 신현주 대령은 약 62명의 병력을 1대대에 추가로 증원했다. 이러한 전투들이 계속 되던 중 일부 소대가 개천을 넘어 약진하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그동안 상급부대의 작전기간을 단축하라는 독촉때문에 무모한 정면돌파 위주의 공격으로 각 중대 모두 전술적 소대 운영은 사실상 어려웠다. 특히 이날은 대대와 각 중대가 모두 전혀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 다가온 성공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이틀째의 공격에서도 국군 1해병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계속된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최후의 전투가 종료되고 1해병대대의 남은 병력은 26명에 불과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국군 1해병대대가 희생을 무릅쓴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며 104(연희)고지를 점령했고, 미 3해병대대는 안산까지 진출했으며 미 1해병대대가 와우산을 점령을 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결국 예비인 미 2해병대대까지 투입한 한미 해병대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9.28 서울 수복이 가능했으며 기적같은 인천 상륙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8)]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육군대학 전술학 교육시간에 모든 토의의 중심이 되었던 윤용남 장군이 저술한 ‘기동전’과 더불어 미 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한 개념들이 모든 공격 및 방어전술의 핵심이었다 3명의 전술담임교관이 책임지고 교육시키는 각반은 다시 4개의 분임조로 구분하여 토의를 진행했다. 각 분임조에는 중・소령급 전술교관의 개별 지도아래 좌상단의 사진과 같이 조원들은 정보, 작전, 인사, 군수, 공병, 통신 등 참모직을 분담해서 맡았고 조장은 사단장 역할을 했다. 부여된 작전지역에 대한 조별 작전계획이 완료되면 각 분임조의 작전참모 또는 사단장이 전술담임교관에게 발표를 했고 4개조에서 가장 우수하게 수립한 작전계획은 다시 3개반 전체가 모인 가운데 발표를 하고 신랄한 토의를 했다. 육군대학 3대 전술학파의 혈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때 필자는 사단작전 장교의 경험이 있어 분임조 작전참모를 맡아 토의를 거쳐 반 토의시에 발표를 했으나 타 분임조가 보다 잘 준비하여 전체 3대 전술학파의 혈전시에는 타 분임조가 2반 대표로 발표를 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전체 3대 전술학파의 혈전시에는 동료들의 매너 등 인간미 뿐만 아니라 언제 이렇게 뛰어난 기동, 화력, 장애물 운용 및 기만작전에 대한 전술지식을 습득했는지 놀랄 정도였다. 기갑부대 운용에 정통한 1반이나 화력운용에 탁월한 3반 등 각반의 발표자들은 참관한 학생장교 중의 숨은 진주들의 예리한 질문에 당황했고 또 능숙하게 답변을 하여 임석한 교관들 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혈전 토의가 진행됐다. 심지어는 퇴근 시간을 지나 저녁을 거르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 다가온 것도 잊은 채, ‘기동전’과 미 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한 전술학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지속되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7)]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용남 장군(육사19기, 전 합참의장 및 육군참모총장)이 준장시절인 1987년에 저술한 "기동전 : 어떻게 싸울 것인가"란 책은 한반도 전장환경을 고려하여 기술한 최초의 군사서적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 육군의 공지전투 교리에 입각한 논문을 한국육군 장교들이 다수 발표했었다. 서적 ‘기동전’은 윤 장군이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거치면서 육군의 모든 장교가 필독했다. 더욱이 합참의장이 되면서 한국군의 미래 군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상기 책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육군의 군 구조와 교리를 대폭 수정하면서 육군 장교들의 의식구조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윤용남 장군에 대한 육군 장교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혹자는 윤 장군의 ‘도로견부위주 종심방어작전’에 입각하여 사계가 좋은 장소에 위치해 있던 진지를 2부 능선 이하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육군 교리를 대거 바꾸는 등 육군을 일대 변모시킨 반면, 윤 장군이 군을 떠난 즉시 이들 대부분이 원위치 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한국육군을 대거 후퇴시켰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문제에 관해 연구하며 전문성이 있는 육군 장교들은 공통적으로 윤 장군이 한국 육군에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육군 장교의 경우 당시까지 만해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혜택 받았다고 취급하며 진급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던 반면, 윤 장군을 기점으로 교육이 잠재역량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미군 교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한반도 전장환경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군 장군 가운데 윤용남 장군처럼 전쟁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장군은 많지 않았다. 당시 한국육군 장교들에게 창의적으로 전쟁의 문제를 연구했던 ‘기동전’이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책자는 지상군 중심 사고에 입각한 단일 서적에 불과한데, 공지전투 또는 입체고속기동전 교리에만 입각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4세대 전쟁과 비대칭전력 등 신개념을 고려하지 않고 국방개혁을 추진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4
  • [김희철의 전쟁사(74)]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해병사단이 영등포를 점령하고 한강에 도달할 즈음에 미 7사단도 인천항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뒤늦게 18일과 19일 상륙하여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수원 쪽으로 남하하여 미 1해병사단의 남쪽 측면을 보호함과 동시에 서울로 후퇴할 북한군을 차단하고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미 8군 및 한국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 7사단의 32연대는 별도로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했는데 이것은 해병대 뿐만 아니라 미 육군과 한국 육군(17연대)도 서울 탈환 작전에 참가시키려는 ‘정치적 배려’ 때문이었다. 한편, 낙동강 전선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김일성 역시 사태가 심각해지자 서울 방어를 위해 병력을 끌어모아 전환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철원지역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 70, 78연대와 9사단 87연대 등 2만 여명을 투입했는데, 상당수는 정예 부대였다. 이렇게 된 이상, 최초 5일 이내의 서울 탈환 계획은 물 건너 간 일이 되었지만,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 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언론 플레이와 군사작전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미 1해병사단 등 작전부대들은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6)]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제 2세계대전시 독일이 프랑스와 폴란드를 침공할 때 구사했던 전격전(電擊戰 , Blitzkrieg)은 공군의 지원 하에 기갑 및 기계화 부대로 적의 제1선을 신속히 돌파하여 후방으로 깊숙이 진격함으로서 적을 양단시키고, 양단된 적 부대를 후속하는 보병부대로 하여금 각개격파 하도록 하는 전술방법이다. 1차 세계대전 후 퓰러(T.F.C. Fuller)와 리델하트(B.H. Liddel Hart)에 의해 화력소모전 위주의 후티어 전술의 문제점을 분쇄하기 위한 기습적인 기동으로써 공격을 실시하며 적을 격파하는 경이적인 급속작전으로 이는 속전속결의 근본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동과 기습을 최대로 이용한 기동전이기도 했다. 당시 육군대학 전술학처장을 겸임하며 1반 전술담임교관이었던 윤천득 대령은 기갑병과장교라 그 특징이 십분 발휘되어 모든 전술교육 중에 속도와 충격력이 강점인 전차 운용에 대해 강조를 많이 했다. 따라서 윤 대령의 기갑 및 기계화 부대 운용을 중요시한 강의는 1반 학생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육사 28기로 야전 사단 작전참모를 역임하고 보병작전의 대가였던 2반 전술담임교관 엄항석 대령은 당시 학생장교들이 향후 직접적으로 접해야 하는 사단급의 실무자로서 필요한 실질적인 전술적 운용을 강조하며 지도 하였다. 엄 대령도 마찬가지로 기동과 기습을 최대로 이용해 적을 격파하는 기동전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6·25 남침전쟁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가 구사한 보병에 의한 기동전을 참고한 용병술 등 우리군의 여건에 부합된 기동전 구사를 강조했다.. 엄대령과 육사동기이자 육사를 수석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던 3반 전술담임교관 김병관 대령은 포병병과 장교답게 당시 육군대학에서 강조되던 미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하여 모든 작전에서 화력을 포함한 모든 가용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작전 여건이 조성된 후에 전격적인 기동전을 수행하는 등 보다 과학적인 전술운용을 교육시켰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3
  • [김희철의 전쟁사(73)]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9월17일 오전,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지금의 송내 일대에서 민가를 은폐물로 삼아 포탑만 내놓고 있는 T-34 전차 한 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목표인 영등포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중간에 있는 부천 소사에서 낮은 언덕에 매복한 북한군 18사단 22연대가 공격을 시작하면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미 1해병연대 2대대의 월터 모네건(Walter Monegan, 19세)일병의 바추카포팀이 맹활약 하면서 전차대와 함께 T-34/85 전차 4대를 격파하여 진격로를 열었다. 하지만 대가는 치러야 했다. 아군 M26전차 2대가 대전차 지뢰를 밟아 파괴되었고, 공병대가 지뢰를 제거해야 했기에 진격은 지체되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19일에 연대는 영등포 입구인 안양천 부근까지 진입했다. 당시 영등포는 한강 남쪽에서는 서울의 유일한 구로서 당당한 서울의 일부였기에 많은 북한군이 결의를 가지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20일 새벽 4시 30분, T-34/85 전차 5대를 앞장세운 대대병력의 북한군이 자살폭탄 트럭까지 준비하여 미 해병대의 진지를 기습했다. 트럭이 폭발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때 모네건 일병은 포복으로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적 전차에 접근하여 물탱크 뒤에서 정확한 바추카포 사격으로 2대를 격파하고 3번째 전차를 조준하다가 다른 전차에서 쏜 기관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에게는 명예훈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60년대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미 해병들은 치열한 백병전을 치르면서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모네건 일병이 소속된 미 1해병연대의 선봉 M26전차대는 4대의 전차를 격파하고, 1대를 노획했으며, 300여 명을 사살했다. 치열한 전투로 시신과 파괴된 전차의 잔해가 도로를 메웠기에 이를 치운 다음 다시 공격을 시작하기도 했다. 미 1해병연대는 그 날 오전 알몬드 10군단장으로부터 영등포 시가지를 폭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포병 사격과 항공 폭격을 시가에 퍼부었다. 21일 아침 영등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80고지와 85고지를 격전 끝에 장악하고 눈앞에 한강과 서울 시내를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22일, 미 1해병연대는 영등포를 점령했고 끊어져 있는 한강 인도교까지 수색정찰대를 내보냈다. 포로 신문 결과 영등포를 치열하게 방어하던 북한군은 9사단 87연대로 김천에서 16일 기차로 출발하여 낮에는 터널 속에 숨고 밤에만 움직여 20일 영등포에 도착했는데 이 전투에서 80%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3
  • [김희철의 전쟁사(72)]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0여년 전인 1950년 9월15일,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그리고 육군 17연대는 서울로 진격했다.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연합군은 모두 격파하고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상륙한지 9일째인 9월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해병1연대를 마지막으로 UN군은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 신속히 진격한 미 5해병연대의 김포공항 탈환으로 공중보급로 확보 9월15일 미 해병상륙단이 인천 동쪽 외곽에 설정된 교두보로 진격하는 동안 한국 해병대는 인천시내의 잔적 섬멸작전을 담당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상륙군은 곧이어 미 1해병연대가 경인가도의 우측지역을, 5해병연대는 좌측지역을 담당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이어 16일 정오즈음 미1해병사단은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했는데, 일본 코베에서 정비를 마친 미 7해병연대가 21일에는 인천에 도착한다는 희소식을 전달받았다. 그 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던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에 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기차가 지나갈 부평과 부천을 확보하고 영등포로 진격할 미1해병연대는 경인가도의 좌측지역을 담당한 미5해병연대보다는 휠씬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한편 미5해병연대는 진격로상에 있는 100m 남짓 되는 고지들을 연이어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공격을 계속했다. 드디어 17일 오전 7시, 김포공항에 도달해서는 전차를 앞장세우면서 곧장 비행장 내부로 진입을 시작했다. 그 중 전차 한 대는 격납고 문을 밀고 들어가 멀쩡한 야크 전투기 한 대를 노획하기도 했다. 급조된 북한군 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방어에 최선을 다하며 18일 새벽 3시에는 야습까지 시도했지만 화력 부족과 미해병대의 분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활주로 사이의 무성한 수풀 속에 숨어 저항하던 적들도 거의 사살되었다. 처절하게 대항했던 북한군 1항공사단의 지휘관 왕연(40세) 준장은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전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북한군 고위 간부였다. 결국 1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은 미 해병대는 김포공항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북한군은 1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0명의 포로를 남기고 퇴각했다. 탈환 당일인 18일에는 주활주로를 쓸 수 없었지만, 14시 45분 첫 번째 C-54수송기가 지상요원들을 태우고 비행장에 내렸고 오후에만 무려 36대의 수송기가 착륙해 차량과 물자를 쏟아 내었다. 오후 4시부터는 해병 항공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 미10군단이 김포공항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코르세어기를 주력으로 하는 3개 항공대대가 일본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부대들이 내륙 깊숙히 진격하면 원거리로 바다에 떠있는 해군 함포의 지원을 받을 수 없으므로 포병과 항모 항공대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의 가치는 매우 컸다. 이로써 공중 보급이 아주 유리해졌다. 다음 날에는 주활주로도 복구되었다. 이어 김포공항 확보에 성공한 미 5해병연대는 바로 한강 도하 준비에 착수하면서 1해병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5)]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은 전술학처, 전략학처, 참모학처, 이념학처, 지휘학처와 전투발전부 및 교무처로 편성되어 있었다. 교육과정은 전술 및 전략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참모학과 지휘학부터 배웠다. 또한 당시에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을 비판하고 이념무장을 강화하기위한 이념학처의 교육도 가미되었다. 더불어 모든 전술교범에는 그때까지도 일본식 용어가 남아있어 ‘작전요무령’이 가장 근간이 되는 교범이었다. 작전 뿐만 아니라 인사, 정보, 군수, 동원 업무도 배웠지만 사단작전 장교를 경험하면서 각종 훈련을 치루며 종합업무를 해온 필자는 타 병과 및 타 참모 직능보다 학습에 좀더 수월하게 임할 수 있었다. 특히 새로 접하는 동원 업무는 교육을 마치고 필자가 향토사단들로 구성된 수도방위사령부로 보직될 예정이라 더욱 관심을 갖는 과목이었다. 참모학 수업을 마치고 공격 및 방어의 전술학 시간이 되자 드디어 전술담임교관들의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빛나며 학생장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당시 학생장교들의 꿈 같은 희망 보직이 육군 대학 교관이었다. 이미 교육 종료후 차기 보직이 교관으로 내정된 동료 학생들은 더욱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였고 분임조 토의시 지도하는 교관들도 더욱 정성을 쏟는 모습이 눈에 띠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4)]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교식을 마치고 학생조직을 편성 할 때 사관학교 1년 선배들이 학생장 및 각 반의 반장직을 맡았고 미국, 터키, 대만에서 한국으로 위탁교육온 장교들도 포함하여 1년간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 등을 비롯한 전투병과와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특히 육군대학에서는 학생장교들의 전술지식 함양을 위해 타장교들에 그동안의 야전 근무를 통해 식견이 높고 탁월하다고 인정되며 대령으로 1차 진급한 3명을 전술담임교관으로 운용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당시 3개반으로 구분하여 각반에는 약 60명의 학생장교들을 책임지고 교육하도록 편성된 전술담임교관들이 공지전투[空地戰鬪, Airland Battle] 및 가용 전투력을 최대로 통합하여 조기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승전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공세적 기동전 등의 전술 및 전략지식 함양에 큰 도움을 주었다. 1반의 전술담임교관 윤천득 대령은 갑종200기로 임관한 기갑병과 장교였고, 2반 엄항석 대령은 육사28기로 야전 사단 작전참모를 역임한 보병작전의 대가였다. 3반 김병관 대령은 엄대령과 육사동기이자 육사를 수석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이들은 육군대학에서 전술담임교관을 마치고 다시 야전으로 부임하여서도 역시 근무를 잘하며 군발전에 기여하였고, 훗날 모두 장군으로 진급되어 학생장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1
  • [김희철의 전쟁사(7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 후보가 된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자 그 후임으로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부임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해당 전선을 지휘했던 것이 아니라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옮겨가자 대타로 지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한때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격전을 치루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전선이 평온한 상태였는데, 이는 우선순위에 따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태평양보다 유럽쪽에 우선순위가 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전선은 2부 리그 취급이었다. 그래서 물자와 병력이 노르망디에 비해 많이 뒤쳐져 적극적인 공세에 임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건 책임을 진 지휘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그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로마에 가장 먼저 입성하기 위해 적군의 후퇴를 방치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등으로 연합군 내에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계의 미군 영웅이었던 김영옥이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을 때, 당시 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는 로마 점령 이후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 것에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이에 전쟁영웅 김영옥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클라크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는 일화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던 클라크는 6.25남침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 여름, 나토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역대 유엔군사령관 중에 가장 장기간인 18개월 동안 한국 전선을 지휘하였다.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 후 고착된 전선에서 출혈만 강요되는 고지전이 지리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클라크 또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클라크는 휴전협정 막바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대규모 공세를 위해 원산지역에 기습 상류작전을 펴겠다고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당시, 서울 동숭동 미 8군사령부에서 재차 상륙작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또 거부당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으로 수차례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클라크는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및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했던 것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했던 지도자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고 자신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 존경하는 마음의 글을 남겼다. 휴전협정이 난항을 거듭하던 1953년 3월, 6.25남침전쟁을 뒤에서 조종했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던 클라크는 눈물을 흘리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그해 7월27일 휴전 협정 당시의 유엔군 대표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때 휴전 회담장으로 가기 직전에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이 대통령이 견장에 달린 별 4개 계급장을 보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라고 달아준 거냐?"며 비꼬았다고 한다. 아무튼 6.25남침전쟁 중에 유엔군 및 미군을 지휘했던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들은 전략 및 전술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던 전형적인 군인들이었다. 또한 워커,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들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여 노블리스 오빌리제를 실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 중에 워커는 불의 사고로 순직했고 밴플리트와 클라크의 아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순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군생활동안 이탈리아 전선 및 6.25남침전쟁을 지휘하면서 어쩔 수없이 책임만을 감수했던 클라크 장군은 비록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조롱까지 당했다. 하지만 워싱턴과 6.25남침전쟁 현장에서의 상충되고 까다로운(delicate) 상황속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참군인이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