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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109)]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노리고지 전투 당시 11연대 3대대장이 수립한 공격작전의 목표는 소노리와 대노리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증강된 1개 중대 규모를 투입하되 양개 목표에 최초 1개 소대씩 배당하고 상황 진전에 따라 예비소대를 후속 투입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 대기하도록 계획했다. 대대장은 협소한 공간에 과다한 부대투입은 회피해야 한다는 점과 방어에 발판이 되고 있는 노리고지 확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사단장의승인을 얻어냈다. ■ 불사신 곡예를 보여준 초인적인 전사 최종인 소위와 박관욱 일병 첫 번째로 불사신 곡예를 보여준 전사는 무서운 정신력을 지닌 1소대 소대장 최종인 소위였다. 적의 집중포화와 수류탄 세례에 직면하여 공격이 좌절될 즈음 최종인 소위를 비롯한 1소대는 소노리를 우회하여 쏜살같이 대노리 고지에 전진하여 돌격선에 도달했다. 당시 중공군은 소노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 1소대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대는 1시간 만에 경미한 적의 저항밖에 받지않고 대노리 고지에 대공포판을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은 9중대의 활약이었다. 12월 13일 동이 트자 목표에 돌진해 들어간 9중대는 백병전 끝에 적병 3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면서 드디어 소노리 탈취에 성공했다. 그런데 최고의 결정적 상황으로 10중대의 중앙 1소대에서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노리를 향해 공격 중이던 10중대는 능선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기세 따위가 갑자기 꺽임)되고 말았다. 이렇게 좌절하려는 그 순간 7부능선에 엎드려 있던 한 명의 병사가 불현듯 일어나 재빨리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가 고지 너머에 대고 사격을 퍼붓고 나서, 뒤의 아군을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좌측방 닉키고지의 적이 기관총 사격을 가해오자 그 병사는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병사는 다시 일어나 원위치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엎드려있던 그 병사는 재차 일어나 전과 동일한 행동을 되풀이하며 고지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적은 측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집중사격을 가해왔는데, 병사는 또 쓰러졌다. 대대장은 "이번에는 정말 죽었구나"하고 체념했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병사는 다시 일어나 제자리에 돌아왔다. '불사신의 곡예'라고 할 정도로 당돌하고 대담무쌍한 용맹스러운 병사의 행동은 피아불문 숨을 죽이고 관람하는 이른바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당시 연대 관측소( OP)인 264고지에 있던 미 제1군단장 켄덜(John W. Kendall)중장은 그 병사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안절부절 하다가 "나의 군대생활 30여년에 저렇게 용감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저 병사는 초인이다. 한국 군인은 강하다."라고 감탄했다고도 전해진다. 그 불사신의 전사는 11연대 10중대 1소대 2분대의 자동소총수 박관욱 일병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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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김희철의 전쟁사(108)]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노리고지 전투를 지휘했던 1사단장 박림항 준장(예비역 육군중장)을 비롯한 한국군들은 ‘52년 말 6·25남침전쟁의 휴전협정이 머지않아 성립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도는 가운데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이를 위해 적정을 파악하려고 포로 잡기 경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노리고지 같은 전초에서는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서로 포로를 잡기 위한 경미한 수색전이 늘 벌어졌다. 포로 잡기 탐색전이 항상 전개되고 있던 소노리고지는 적의 전초인 대노리고지와 한 능선에 붙어 있었는데 1사단은 이 고지에서 언젠가는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한 보·전·포 협동작전을 미군들과 계속 익히고 있었다. 특히 박 사단장은 사단예비대인 최주종 11연대장에게 백병전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지금처럼 태권도가 널리 보급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는 몰랐기에 개머리 판치기, 수류탄 ·연막탄 사용법, 유도 등의 갖가지 훈련을 후방에서 맹렬히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한마디로 우리 1사단의 보병과 미군의 탱크와 포병 부대가 삼위일체가 돼 전개한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 및 한미 연합작전이었다. 8부 능선에 올라 붙은 우리 돌격 장병들은 포판을 등에 지고 미군 직사포의 근접포격 지원을 받으며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돌격 대원들은 백병전이 벌어지면 호가 좁아서 개머리 판치기가 잘 안되니까 M-1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고도의 훈련과 정확한 관측이 요구되는 이 같은 작전을 우리 장병들과 미군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멋있게 해냈다. 따라서 노리고지 전투는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당시 미국 보병학교의 교지에도소개됐다.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 고위장성들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고 또 신뢰하게 됐으며, 한국군은 이제 포와 전차 지원만 해주면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사병들의 용맹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전우애 이상의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8부 능선에서 적의 수류탄 반격에 막혀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사병들에게 돌격의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전우의 죽음을 호소해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최고였다. 박 사단장은 관측소에서 쌍안경으로 능선의 사병들이 적의 수류탄에 팔·다리가 날아가는 게 보일 때마다 다른 사병들에겐 전우의 전사를 호소하며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돌격케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중대·대대 단위의 소규모 작전이었는데 박 장군은 늘 사단 단위의 대규모작전을 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상급 부대에서는 희생자가 많이 나서는 안 된다면서 그런 전투는 무리한 작전이라고 못하게 했다며 아쉬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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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1
  • [김희철의 전쟁사(107)]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말의 6·25남침전쟁 상황은 78만의 유엔군(이중 한국군 12만명)과 1백20만의 공산군이 팽팽히 대치한 가운데 군사분계선 책정에서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데 혈안이었다. 물론 미국의 ‘명예로운 휴전협상’정책에 따라 전선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게 사실이지만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의 백마고지와 저격능선에서 치열한 교전 중에 있었고, 임진강을 낀 서부전선의 국군 1사단지역에서도 군사분계선 확정에서의 요지확보를 위한 전초진지 ‘노리’고지 등에서 중공군과의 격렬한 접전이 전개됐다. ■ 국군 1사단,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 계속 1952년 9월경 국군 1사단은 미3사단의 작전권을 인수해 임진강과 역곡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지역은 미 1군단과 중공군 46, 47, 56군의 도합 3개 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4개 사단으로 편성된 미 1군단 내의 유일한 한국군인 1사단은 미 2·해병 1사단, 영 연방 1사단에 뒤질 수 없다는 각오였다. 또한 수도 서울로 이르는 관문을 꼭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임진강변의 제 전초 고지들을 사수하겠다는 강한 전투의지로 임했다. 북진 때부터 계속 서부 전선에서 싸워 온 국군 1사단은 이 지역 지리에 익숙한 데다 막강한 미군 화력과 탱크의 지원을 받는 연합작전으로 중공군과의 고지전에서 개가를 올렸다. 미군 측에서는 강 건너의 조그만 진지들을 가지고 많은 전사·상자를 내면서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을 할 것이 아니라 임진강 이남의 주 저항선을 안전하게 방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2년7월 지리산 공비 토벌에서 돌아온 1사단은 박림항 준장의 지휘아래 그간 미군들이 잃은 전초 진지들을 모두 탈환하면서 휴전까지 임진강 일대의 노리·퀸·베티·171 고지 등에서 공방전을 계속했다. 당시 1사단 정면에는 대치 중인 중공군 47 군은 국민당군의 투항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산악전에 능숙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보급이 끊기면서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10월6일, 중공군이 맹렬한 포격을 가해왔다. 국군은 텟시고지외 닛키고지에 방어병력을 배치했고 중공군은 2개중대 규모로 나누어 이 두고지를 공격했다. 국군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고지가 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국군은 두 고지가 점령된 것으로 판단하고 이 두 고지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지만 중공군의 저항에 좌절됐다. 몇 시간후 국군은 박격포와 항공지원을 받아가며 고지를 공격했지만 중공군은 이번에도 격렬하게 저항해왔다. 또 공격이 실패하자 다음날, 항공 및 전차의 지원을 받아가며 닛키고지를 공격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국군은 총 6번의 공격을 감행했는데 모두 실패하고 군단장은 손실만 커진다고 판단하여 역습을 중지하고 재편에 들어갔다. 이에 국군 1사단은 105고지-베티고지-소노리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12월11일에 또 중공군이 선공을 해왔다. 중공군은 소노리고지와 베티고지를 향해 공격해왔고 소노리고지는 중공군에게 점령되지만 베티고지는 방어에 성공했다. 국군은 소노리고지에 역습을 개시했는데 격퇴당했고, 다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고지를 점령하지만 중공군의 역습에 고지를 빼았꼈다. 1사단장 박림항 준장은 소노리고지 점령의 발판인 대노리고지 점령의 필요성을 느꼈다. 국군 1사단은 유엔군의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대노리고지를 일시적으로 확보했다. 다음날도 소노리고지와 대노리고지에 공격을 다시 시작했는데, 소노리고지를 공격하던 11중대는 약간 주춤했지만 13일에 소노리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역습으로 대노리고지 확보는 다시 실패했고. 국군 1사단은 소노리 고지에서 계속 방어하게 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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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0
  • [김희철의 전쟁사(106)]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6년 9월22일은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 6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왔던 친지와 단체들이 성금을 모아 녹번리(현 은평구 녹번동) 그가 전사한 자리에 전사기념비를 건립했다. 당시 비 건립 제막식은 국내외의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대한뉴스 제91호로 제작,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도시계획에 밀려 백낙준 등 61명의 기념비 건립위원들이 1956년 9월22일 전사지에 세운 추모비를 서울 은평구 응암1동 85-41번지 '응암어린이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비문에 요한복음 15:13(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나니)이 새겨져 있다. ■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은평평화공원 조성과 동상 건립 은평구는 지난 2008년 5월 안병태(제20대 해군참모총장) 해군전략연구소장의 건의에 따라 2008년 9월22일에 고인의 숭고한 대한민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노재동 은평구청장, 박세직 재향군인회장, 이성호 제5대 해군참모총장을 공동추진위원장으로 한 추모공원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했다. 그리고 기념비가 있는 은평구 응암어린이공원에서 '윌리엄 해밀턴 쇼 추모 및 추모공원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드디어 6.25남침전쟁 60주년이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 60주년을 맞는 2010년을 맞아 그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계승·발전시켜 후세에 널리 알리고 역사적 참배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은평구 녹번동에 추모공원(은평평화공원)을 조성하고 그 자리에 고인의 동상을 세웠고 6월22일을 기해 제막식 행사를 했다. 당시 노재동 은평구청장은 “은평평화공원은 인근 주택이나 지하철역을 나온 구민들이 마땅히 쉴 곳이 없어 녹색 휴게공간을 조성하게 됐다"면서 "쇼 대위의 호국정신과 3대에 걸쳐 한국에 대한 애정을 쏟고 있는 일가를 생각하면 그를 추모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기리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은평평화공원'은 총 5700㎡로서 간선도로 결절점과 지하철역이 위치한 도심중심부 역세권내 조성된 공원으로 사업비는 총 511억원이 소요됐으며 이 중 토지보상비가 414억원, 시공비가 97억원이 투입됐다.이 공원조성 사업은 수도서울을 상징하는 북한산과 한강을 잇는 녹지축 중심공원으로, 향후 북한산~은평평화공원~불광천~한강을 잇는 녹지벨트 구축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복합기능을 수행할 은평평화공원 조성은 매우 큰 의미가 있으며 후세들에게 호국보훈의 상징적 공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때 노재동 은평구청장은 이 행사를 고인의 유가족이 참석한 뜻 깊은 행사로 만들기 위해 유가족 초청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통일부장관을 만나는 등 정부차원에서 적극 지원을 건의한 결과 통일부 및 국가보훈처로부터 유가족 초청비용 등 정부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행사에는 고인의 큰며느리인 Mrs. Carole Cameron Shaw를 비롯한 손자 William과 David, 그리고 둘째아들 부부 Stephen Richard Shaw and Mrs. Shaw 등 유가족 7명과 참전용사 Jesus Rodriquez와 그의 보호자 등 총 9명이 참석했다. 당초 이 행사에는 고인의 유가족 뿐 아니라 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속으로 쇼 대위 구조대원으로 활동했던 A.A.Lenth, R.C.Jenkins 등 생존자 4명도 함께 초청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윌리엄 해밀턴 쇼가 조선 해양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교관을 지내던 시절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은 제자이자 친구로 각별하게 지냈다. 왜냐면 그는 민간인 교관으로 헌신하며 유창한 한국말과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육중에 해군사관학교 2기생은 진해만 서도(쥐섬)에서 훈련중에 암약하던 공산당 요원들의 습격으로 몰살당했다. 그중 생존자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은 2001년 10월20일 제자이자 친구로 각별했던 쇼의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여 좌대석을 추가로 설치했다. 그들의 비석 받침대에는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 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라는 헌사를 새겨 넣었다. 지금도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9월 22일 이곳을 찾고 있으며, 그의 동상 앞에 오래 고개를 숙이고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김희철 프로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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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4)]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⑫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과 UN군의 피와 죽음, 희생으로 결국 승리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며 무력화 시킴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국군에겐 계속 밀리던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준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도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이 용전한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연합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현재는 고인이 되신 고 백선엽, 김점곤 장군을 비롯한 무명용사 등 전쟁영웅들에게 추모와 존경심을 표하며 의미있는 전적지답사 교육을 끝내고 학교로 복귀했다. 그들은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따사로운 봄볕의 나른함 보다는 깊은 감동에 젖어 있었다. 헌데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요즈음 부각되는 MZ세대를 비롯한 청년 및 국민들도 우리 선열들이 피로써 사수한 대한민국을 사명감과 애국심을 갖고 반드시 지켜내는 전통을 이어 나가길 간절이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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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6
  • [김희철의 전쟁사(105)]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윌리엄 해밀턴 쇼(서위렴 2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와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윌리엄 얼 쇼(William E. Shaw, 한국명 서위렴(徐偉廉) 1세)의 외아들로 1922년 6월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자라났지만 그를 포함한 온 가족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게 된다.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아버지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였다. 윌리엄 해밀튼 쇼는 1943년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역에서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 그는 유럽 대륙의 해방을 가져다 준 사상 최대의 사건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아이젠하워 장군을 도와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역한 그는 그리워하던 한국의 품으로 1947년에 돌아와 미군정청(美軍政廳) 소속으로 진해 조선 해양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 교관을 하면서 생도들에게 함정운용술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유창한 한국말과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갔다. 특히 교관 시절에 해군사관학교 2기들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더불어 한국해안경비대 등 한국 해군과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며 대한민국 국군 태동기를 이끌어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 창설에 이바지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며 한국 선교사를 목표로 다시 하버드대학교에 입학, 철학박사 과정을 수학하고 있었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한국 해안지역의 취약한 방위 상황을 깊이 우려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하여 싸우고자 해군 대위로 재입대하였다. 그는 1950년 6월에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러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고 부모님께 편지를 보냈다. 또한 주변 친구들에게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이 내가 태어난 제2의 조국이라면서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국 해군에 재입대한 윌리엄 해밀튼 쇼 대위는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선발대로 상륙해 인천상륙 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맥아더 장군의 옆에는 항상 윌리엄 쇼가 있었고 한국 지리와 언어에 능통한 그는 맥아더의 눈과 귀가 되었다. 그는 서울 수복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치열해지는 전투를 보며 자신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윌리엄 쇼는 다시 한 번 해병대에 자원하여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나서 진두 지휘한다. 그뒤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까지 진출했고 한강을 도하해 수색조가 녹번리 쪽으로 향하던 그때, 쇼는 한국인들을 향해 매복하고 있는 북한군을 발견하고 그들의 공격을 경고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녹번리 고개에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매복하고 있었던 북한군의 총구는 길 위에서 북한군 공격을 경고하는 쇼 대위의 머리를 겨누었고, 결국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장렬히 전사했다. 그리고 불과 5일 뒤 서울이 탈환된다. 이후 평소 그의 한국사랑의 정신을 기리던 전우 및 지인들은 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를 마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했다. 그의 나이 29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윌리엄 해밀턴 쇼의 묘비에는 이런 구절이 남아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7-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3)]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⑪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의 체험담이 끝나자 당시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장군의 강의가 계속되었다. 그는 “장맛비가 내리던 1950년 9월의 어느 날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졌다. 내가 지휘하던 12연대가 최초로 북한군의 혈로를 뚫고 대구 북방 팔공산 자락에서 경북 의성까지 12㎞를 북상했기 때문이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1사단이 경북 의성까지 12㎞를 북상하자, 백선엽 장군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뚫었단 말이냐? 정말 대단하다"는 찬사였다.이는 지략을 겸비한 용장 김점곤 장군의 지휘아래 미 8군이 유일하게 보유한 고사포 여단의 화력과 국군 1사단 12연대의 보병 전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연합작전 덕분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연대에 속한 대대는 3개가 기본인데 12연대는 추가로 2개 대대를 더 가지고 있었다. 연대장이 주변의 낙오병들과 학도병 500명 등을 끌어모아서 예비대대를 편성했고 추가로 150명의 여고생들까지도 후방요원으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김점곤 장군은 옆에 강의를 마친 백선엽 장군을 바라보면서 “만약 사단장님이 아셨으면 병력을 다 내놓으라고 할까봐, 보고도 안했지…”하고 너스레를 떨며 미소를 짓자, 강의를 듣던 학생장교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는 사단장도 모르는 '끝없이 샘솟는' 충분한 예비대를 활용하여 워커장군이 감탄한 적진 돌파로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은 이 어려운 상황을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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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4
  • 메디온 불시착 사고로 수리온 계열 170여대 헬기 운항 중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2일 10시35분경 경기 포천시 이동면 육군항공대대 활주로에서 응급 의무수송헬기의 불시착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헬기 탑승자 5명이 다쳐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군 당국은 12일 응급 의무후송 헬기 ‘메디온’이 착륙 도중 사고가 발생함에 따라 오전 11시10분부로 사고 헬기와 같은 수리온(SURION·KUH-1) 계열 전 기종에 대해 운항중지 조치를 하며 원인 규명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운항중지 대상은 육군과 해병대에서 운용 중인 수리온, 메디온, 마린온 헬기 등 수리온 게열 전체가 해당되며 총 170여대로 알려졌다. 일단 군이 사고 원인 조사를 위해 운항을 전면 중단하기로 한 만큼 해경과 소방청, 산림청 등 다른 기관에서 운용 중인 수리온 계열의 다른 파생형 헬기 운항도 중단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육군은 항공작전사령관을 위원장으로 육군본부와 군수사, 항작사, 국군 의무사,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중앙항공기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비행 과정과 장비정비 분야 등 전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 불시착한 메디온은 최대 6명까지 동시 후송할 수 있으며 기상 레이더와 지상 충돌 경보장치 등을 탑재해 악천후 기상이나 야간 임무 수행 능력이 향상된 것으로 알려졌다. 메디온은 제자리 비행 능력이 뛰어난 국산 기동헬기 수리온에 외부장착용 환자인양 장치인 ‘호이스트(hoist)를 추가 장착해 응급환자 후송 전담용으로 개발한 의무수송헬기로 착륙이 어려운 산악지형과 도서 지역에서도 원활한 의무후송을 할 수 있도록 현재 7대가 개조돼 운용되고 있다. 이날 오전 경기 포천시 이동면 육군항공대대 활주로에서 환자를 태우기 위해 착륙을 시도하던 중 사고가 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헬기가 불시착하면서 꼬리 부분이 일부 파손됐다고 밝혔으나, 현장 사진을 보면 꼬리날개가 달린 부분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지상과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간 것인지 애초 제작상 결함으로 공중에 있을 때 파손된 것인지는 규명해야 할 부분이다. 육군은 현재 메디온이 착륙 도중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비행 과정 및 장비정비 분야 등 전반에 대해 조사할 계획”이라고만 설명했다. 현재 원형 헬기인 수리온은 소방과 경찰, 해양경찰에도 납품돼 있다. 군은 메디온 헬기를 추가 확보할 계획이다. 제작사인 KAI는 의무후송 헬기를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수리온은 에어버스헬리콥터스(옛 유로콥터)의 쿠거와 슈퍼 퓨마의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재설계됐다. 핵심 부품도 유럽산, 미국산, 국산 등으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메디온과 마린온의 원형인 수리온은 여러 국가의 제품을 복합적으로 사용해 구조적 결함에 취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돼 왔고, 수리온과 이를 토대로 만든 헬기들의 사고는 간간이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2018년 7월 경북 포항공항에서 수리온을 개조한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이 시험비행 중 프랑스 제조업체가 만든 ‘로터마스터’라는 부품의 결함으로 추락했다. 로터마스터는 엔진에서 동력을 받아 헬기 프로펠러를 돌게 하는 중심축인데 이를 제조한 프랑스의 오베르듀발사가 열처리를 제대로 안 해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5년 12월에도 훈련 중이던 수리온 4호기가 전북 익산 인근에서 추락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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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2)]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지역에서 피아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수시로 치루어졌다고 말했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졌으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전투가 끝난 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고지전에서만 아군은 2300명, 적군은 5690명의 전사자가 났고,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전체로 종합하면 유엔군은 1만명, 북한국은 2만4000여명이나 전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선엽 장군은 강의를 끝내며 “우리는 당시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라 말해 당황했었다”라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또한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 승리에 대한 자긍심에 차 있었지만, 그때 운명을 달리한 우리 전쟁영웅들의 명복을 빌며 체험담 강의를 마무리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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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1)]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의 요청으로 증원된 마이캘리스 대령의 미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전차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북한군 105땅크사단의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 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투항한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훗날 논산훈련소장, 초대 3사관학교장, 7사단장 역임, 소장예편)가 적부대의 위치를 알려준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미 8포병대대도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날 목숨을 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치열한 저지전을 펴며 전차전을 볼 수 있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전차 및 SU-76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켜 '볼링장 전투'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피아 혼재되었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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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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