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0(월)

소통시대
Home >  소통시대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5)]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영삼 대통령이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중 가장 중심에 있던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필자는 그 사조직의 정확한 실체를 알게 되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의 면모를 살펴볼 때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한 면도 일부 있었다. 한편 육군대학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사적모임을 만들었다. 따라서 육군대학 교육과정에서도 상호 교류하며 새로운 사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1989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만나는 모임들을 볼 때 서울에서 들려온 선후배들의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던 소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생도시절 사관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며 동기회에 포함시켜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꼭 이렇게 제명까지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체 동기회를 열기 전에 일부 동기들과 상의하며 의견도 수렴한 결과로 우리 동기회에서는 다른 선후배 기수처럼 제명까지는 안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당시 동기회 간부직을 수행했던 필자에게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며 제명을 강조했던 일부 동기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절한 논리는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의 모임도 어떻게 보면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고, 게다가 모두가 알고 있는 럭비, 축구부 출신들의 모임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고 이해를 시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조직 명단을 확보하여 사조직에 포함된 동기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후배기수에서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격앙된 논쟁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던 동기생부터 각개 격파식으로 이해를 시키자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전체 동기회도 개최할 필요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상태를 돌이켜보면 격앙된 논쟁을 통해 사조직 동기생들을 제명시켰던 선후배 기수에서는 사조직에 해당된 사람이 4성 장군까지 진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당시의 제명 소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필자의 동기들은 아직도 상호 교류를 친밀하게 나누며 각종 애경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40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결국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의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25
  • [김희철의 전쟁사(118)]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⑤미국, 휴전 반대하는 이승만 제거도 검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말리크의 휴전협상 제의가 있기 전인 6월11일 변영태 외무장관의 국회연설을 통해 ‘38선 휴전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양유찬 주미대사도 휴전이라는 타협은 유엔의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이후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7월10일부터 15일 간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고 자국 내에서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던 미국은 휴전을 강행해야겠지만, 그럴 경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이승만이 큰 걸림돌이었다. 만일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한다면, 당연히 휴전은 깨지고, 미국은 다시 전쟁에 끌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고차원적인 여러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이렇듯 미국의 입장에서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있는 이승만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미국은 한 때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했다. 휴전후 20여년이 지난뒤인 1975년 8월3일 ‘뉴욕 타임스’는 새로 분류된 기밀문서에 근거를 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각 군 참모총장들이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군정 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미국은 다른 정책으로 선회한다. 그 이유는 반공주의의 상징인 이승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열전과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도 상당한 손실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이 택한 다른 정책이란 선거를 통해 미국에 유리하게 행동할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을 패퇴시키고 미국 측 의견을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장면은 38도선을 분단선으로 재설정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승만의 국내에서의 입지, 특히 국회 내에서의 입지도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평소 그의 소신이기도 했다. 1948년 제헌헌법 당시 국회의 대통령 선출 방식인 간선제에 그는 마지못해 찬성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국회 간선제에 동의했지만 ‘한국 국민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면 반드시 선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6.25남침전쟁 발발 이후 한국인들은 공산침략에 대항해 불굴의 저항정신을 발휘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국민들이 국가 원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와 능력의 충분한 증거라고 보았으며, 이를 근거로 개헌을 추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독재자’라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분단 상태의 존속은 기정사실화된 결론이었고, 이에 대해 약소국 대통령인 이승만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8-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4)]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나무위키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알자회를 설명하고 있다. 알자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92년 11월13일의 신문기사들이다. 그때 군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알자회는 1983년 당시 대위였던 육사 34기생들이 결성하여 육사 44기생까지 기수별로 10여 명씩 모두 120여 명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알자회가 외부에 드러나게 된 계기는 1992년 당시 육사39기생들이 알자회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하고 상부에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이다. 이어서 동월 16일에는 육사 40기생들이 알자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지 11일째인 1993년 3월8일부터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중에 가장 중심에 있던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당시에 ‘알자회’도 거론되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 국방부의 공식적 입장은, “알자회는 이미 해체되었으며, 비선에 대한 인사개입은 존재하지도 않고, 일부 인원이 잔존하였으나 현재로선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내 사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심각한 위헌행위이며, 하나회가 어떤 병폐를 저질렀고, 어떤 과정을 통해 혁파되었는지를 본다면 알자회 역시 그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나회 관련 내용은 다음편에서...) 결국, 이 사건의 파문으로 인해 1993년육군이 최초로 진급심사과정을 공개하였고 군 차원에서 잔존 알자회 회원을 전원 숙청하기로 결정하여, 알자회 관련 장교들의 진급을 영구누락시키고 해당 계급에서 전역 조치 또는 진급이 어려운한직으로 배치하는 강수를 두었다. 허나 필자가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알자회‘같은 군내의 사조직 문제로 고민했던 시기는 이미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숙청 4년 전인 1989년 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20
  • 봉오동 전투 승리와 독립군 궤멸 책임의 딜레마에 빠진 홍범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15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됐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그의 유해는 8월18일 대전국립현충원에 정식으로 안장됐다. 헌데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발생시,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여 독립군을 유인·학살했던 홍범도 장군이 묻히는 대전 현충원에는 마찬가지로 북한군의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들이 안장돼 있다. 따라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한국 독립군을 몰살에 이르게 한 '자유시 참변'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문제 등 냉정한 평가가 요구되면서 현충원 안장과 대한민국장 추서 자격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제기된다. ■ 홍범도, 한국 독립군 대학살 '자유시 참변' 가담, 이후 대한 무장독립운동도 막 내려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적군(赤軍)이 대한독립군을 포위해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대한독립군은 한인사회당 이동휘의 선전·유도에 따라 자유시에 집결했다. 모인 사람은 4500여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집요하게 공산화하려 했던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은 소련으로부터 천문학적 자금을 지원받은 뒤 한인 무장독립군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1919년11월~1921년)로 있는 동안 소련으로부터 20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자유시에 집결한 대한독립군은 민족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성향의 조직이 혼재된 상태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적군 산하로 편입돼야 한다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 등으로 분열돼 반목현상이 심화됐다. 이중 청산리대첩에 참전했던 사할린 출신 부대에서 소련군 편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소련군은 기관총과 대포, 장갑차 등을 앞세워 이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홍범도는 사할린 부대 편에 섰다가 이르쿠츠크파 자유대대 편으로 돌아서서 사할린 부대를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이르쿠츠크파 배후에는 소련 정부가 있었다.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은 전사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등 상당수가 희생 당했다. 이밖에도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에 끌려간 인원수는 1000여 명이 넘어 3500명에 달했던 대한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되었다.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부대는 청산리대첩에 참가했던 부대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행히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 장군은 당시 러시아행을 탐탁해 하지 않아 이들과 함께 가지 않고 국내로 되돌아와 참변을 면했다. 그러나 김좌진 역시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항일 무장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체포당하거나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이로써 한국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1920년 이후 봉오동·청산리대첩과 같은 항일 무장독립운동 역사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홍범도는 그 뒤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 등을 선물로 받은 사실도 확인됐다. 자유시 참변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홍범도는 한인 대표로 참석했고, 여기서 레닌과 단독면담도 가졌다. 학계에서는 "레닌의 선물은 사실상 소련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나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군복은 1923년에 벗었다. 홍범도는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됐으며,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삶을 초라하게 마감했다. ■ 북한군에 의해 전사한 많은 국군들이 영면하는 곳에 친소 괴뢰 홍범도의 안장은 잘못 일본군 1000여명 이상을 괴멸시킨 ‘청산리 대첩’은 중대 규모를 패퇴시킨 홍범도의 봉오동 전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작전술적 기동을 통해 일본군 주력을 괴멸시킨 것은 김좌진, 이범석 등의 탁월한 전술적 혜안 때문이었다. 전 육사교장 박남수 장군(육사35기, 육군중장 예편)이 저술한 책 ‘군인 이범석을 말한다’에 따르면 “홍범도는 조선말에 하층계급에서 일어선 ‘의병장’으로서 애국심과 전술적 투쟁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이 홍범도의 한계였다”는 이 장군의 의견이 적혀있다. 또한 철기 이범석 장군은 그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홍범도 부대가 연합을 이탈한 며칠 후에 안도현 입구인 우도양창 계곡에서 일제의 포위망에 걸려 거의 괴멸 수준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라고도 했다. 이것은 1990년 소개된 ‘홍범도일지’에 실제 그런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편 뉴데일리 기사에 따르면 강규형 명지대 역사학과 교수는 "홍범도는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는데,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홍범도 나이가 만 53세였다"고 의견을 밝히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어 강교수는 "홍범도가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결국 ‘자유시 참변’에서 민족운동사에 '궤멸적 타격'을 입힌 반민족행위를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고, 이 공로로 레닌한테 돈도 받고 대우도 받지 않았나"라고 지적했다. 홍범도의 공과에 관심을 가져온 한 예비역 장군은 동전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보훈 조치를 해야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동족상잔 비극인 6.25남침전쟁과 제2연평해전·천안함·연평도 포격 등 북한군의 불법 도발에 의해 전사한 분들이 영면하시는 장소에 홍범도를 안장하는 것을 비판하며, “친소 괴뢰 논란에 빠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하나만 봐서도 용서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외교안보정책
    • 외교통일
    2021-08-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3)]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든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 문제는 서울에서 개최된 사관학교 후배기의 동기회 전체 모임에서 발단이 되었다. 당시에 필자도 생소했던 ’알자회‘가 후배기의 동기회 모임에서 최초 거론되었다. 그 모임의 회원들이 주요 요직에 보직되어서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격앙된 논쟁을 통해 그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동기생들이 모인 육군대학의 한 학생장교에게 연락하여 필자의 동기회에서도 같이 제명하자고 제의했다. 전달을 받은 그 동기생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며 필자에게 동기회에서 사적모임인 ’알자회‘ 회원들의 제명을 강요했다. 그의 흥분된 항의를 들은 필자는 동기회 간부직을 맡고 있어 제명수용과 거부의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동기중에 누가 ’알자회‘ 회원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전체 동기회를 열기 전에 일부 동기들과 상의하며 의견도 수렴했다. 그런데 필자가 사조직 명단을 확보하여 사조직에 포함된 동기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후배 기수에서처럼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격앙된 논쟁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동기애로 똘똘 뭉쳐 사조직 뿐만 아니라 모든 동기들에게 잘 처신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대부분 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선배와 다른 후배 기수에서 관련자들을 또 제명한다는 소식이 들려와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됐다. 그러나 군내 사조직을 돌이켜 볼 때 ’알자회‘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앞서 설명한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의 모임도 어떻게 보면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모두가 알고 있는 사관학교 럭비, 축구부 출신들의 모임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었다. 헌데 당시 육군대학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모임을 만들어 상호 교류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조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만나는 모임들을 볼 때 서울에서 들려온 선후배들이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던 소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생도시절 사관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며 동기회에 포함시켜 운우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꼭 이렇게 제명까지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2)]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장교 양성과정의 출신 구분을 떠나 육군대학에 입교한 학생장교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소위로 임관하여 전후방 각지에서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며 나름대로 신화를 만들었다. 더불어 그동안의 피눈물나는 노력과 고생으로 이룩한 성과와 능력을 인정받아 소령으로 진급했고, 그들은 1년 동안의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을 받으며 비록 성적관리는 힘들지만 꿈같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행복은 4년간의 생도생활을 통해 전우애로 다져진 동기들을 8년여 만에 다시 만나 해후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사실 40년 가까운 군생활 동안 가장 많은 동기생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경우는 2개기가 중복되어 있는 육군대학 교육과정이 유일한 기간이기도 했다. 또한 육사, 삼사, 학군 등 장교 양성과정의 출신을 떠나 전화로만 안부를 묻던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과도 출신별 체육대회, 회식 등을 통해 사적인 인연의 정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모임을 만들어 교류하며 새로운 인연을 쌓아갔다. 이것은 육군대학 졸업 후에 각자의 임지로 보직돼서도 상호 원활한 업무 협조로 시너지 효과를 만들 수 있는 소중한 만남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에 분주했던 그때, 대부분의 학생장교들이 전혀 몰랐던 군내의 사조직 문제가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특히 육사출신 학생장교들 사이에서 더욱 심각한 논쟁으로 가시화되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17
  • [김희철의 전쟁사(117)]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④미국 언론, 이승만을 ‘칼을 품고 춤추는 늙은 고집쟁이’로 비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엔군과 공산군측 간에는 포로교환 협상 등 휴전회담 신경전도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자 분단의 고착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휴전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로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바라보기도 했었으나, 중공군의 불법 참전으로 다시 밀려 1.4후퇴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한 번 내주었다. 한때 유엔군은 평택과 안성을 잇는 37도선까지 밀렸고,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제주도나 사모아로 옮길 것까지도 검토했었다. 허나 이 대통령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에 감격하여 “나는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그 후 38도선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인명피해만 계속될 뿐 어느 누구도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하면 명분 있는 휴전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이 좋지 않게 형성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내 여론의 악화는 정치인들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크나큰 압력이다. 이러한 미국내 여론의 악화에 따른 휴전을 반대하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이승만 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전미 시장(市長) 회의에서의 녹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 침략은 우리가 그것을 패퇴시키거나 우리가 패퇴하던가 둘 중 하나이지 그 사이에 타협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90만이나 되는 공산군이 북한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공산 측의 승리”리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 유엔군이 빠지더라도 한국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미국 언론은 이승만을 ‘칼을 품고 춤추는 늙은 고집쟁이’라는 등의 말로 비난했다. 휴전을 원하는 것은 유엔군 측만은 아니었고, 대한민국을 제외한 모든 관련 당사국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은 우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대해 “자유와 공산주의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둘은 결합될 수 없고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물과 기름을 혼합하려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판문점에서 시도되고 있는 휴전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휴전은 세계를 양립할 수 없는 지역으로 갈라놓은 깊은 구조적 균열을 땜질하려는 시도이므로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8-1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1)]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현지실습 마지막 날 조성태 사단장 및 참모들을 대상으로 새롭게 연구한 작전계획을 브리핑을 했다. 더불어 부첨인 화력, 장애물 및 전투근무지원계획도 각 참모로 임명받은 학생장교에 의해 설명했다. 그리고 애써 준비한 발표안들은 모두 사단에 제출했다. 발표를 맡은 학생장교들은 전날 사단장의 환송회식에서 마신 술냄새가 풀풀 나는 상태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브리핑을 했다. 비록 사단장 이하 참모들이 대만족일지는 모르지만 수고했다는 격려 박수에 보람과 감사함을 느끼며 그들의 환송을 뒤로 한 채 진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 육대 현지실습 때에 연구했던 작전계획 검토안을 참고로 사단이 발전되어 보람을 느껴... 나무위키 백과사전에 따르면 육군대학 현지실습 때에 작전계획을 연구했던 60사단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60사단은 1990년에 보병사단으로 승격되어 현재는 육군동원전력사령부 소속의 육군동원전력사령부 예하 동원사단이다. 1975년에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60훈련단으로 창설되어 2018년 4월5일까지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이었으며, 정확한 창설지는 현재 포병연대 및 1개 보병연대가 머물고 있는 화전동 주둔지다. 참고로 서울의 향토사단인 56사단과 뿌리가 같다. 56사단 창설과 관련된 비석이 60사단 사단장실 앞에 있는 것은 56사단과 뿌리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편전 56사단에 8개 정도의 연대가 있었는데, 그중 외곽에 위치한 4개의 연대를 60사단으로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부대마크가 방패 모양인 것도 수방사 예하부대 시절의 흔적이다. 현재 서오릉쪽 60사단 사령부가 개편전의 56사단 사령부였다. 90년도에 56사단이 북한산 북쪽 진관동 건너편 고양시 지축동으로 신축부지에 부대시설을 짓고 이전하였는데 그 때문에 전병력이 부대주변 환경 조성공사 작업에 투입되었다. 지금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60사단 병력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식사도 부대에서 추진해서 먹으며 대대별로 담당지역을 나누어 절개지 녹화작업인 조립식 사방블럭 설치에 투입되어 장비도 없이 막노동을 했다. 국방비 절감 차원이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들의 노고 덕택에 오늘의 부대 모습이 되었다. 창설 당시의 명칭인 60훈련단 시절에는 비호부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1990년 사단승격 이후에도 그 명칭은 유지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 모 휘하연대에서 주창한 ’권율부대‘라는 명칭을 활용하여 사단명을 바꾸었다. 60사단은 서울특별시지역의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며, 유사시 완편되어 작전에 들어가게 된다. 2011년에 73사단에 이어서 두 번째로 차기동원사단으로 지정되었다. 훗날, 필자는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수도방위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할 때 부대 개편 작업이 있었는데 1989년 3월 육군대학 현지실습 때에 연구했던 작전계획 검토안을 참고로 시행되어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1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0)]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음날 아침 전날의 만찬회식에서 과음한 탓으로 숙취가 해소되지 않았지만 작전계획 연구가 조별로 재개되었다. 발표를 위한 모든 연구는 전날 마신 과음 탓인지, 결국 수방사 및 향토사단으로 보직을 받은 학생장교들이 중심이 되었고, 육군대학 전술학 수업시간에 부대배치, 화력 및 장애물 운용을 토의했던 것이 재연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학생장교들의 의견이 상충되는 상황이 벌어져 격렬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향토사단의 작전계획에 동원사단 즉 정상적인 사단의 방어계획을 병행하여 발전시키는 조건이라 순수하게 전술적인 판단에 의한 기동계획과 기존 외곽연대의 여건을 고려해서 적용하는 안이 충돌했다. 하지만 적이 접근할 수 있는 거점 전방의 광활한 평야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고 4차선 이상의 도로들이 신설되는 것을 고려한 신규 도시계획에 따르는 새로운 정보판단을 적용하자는 의견은 일치되었다. 상충된 의견을 서로 뒤로한 채 조별로 작전계획 연구를 계속했다. 물론 전날 저녁 만찬에서 참모선배들의 격려와 기대를 의식한 탓인지 그날도 해가 저무는 것도 모르고 지도판 위에서 토의를 계속했다. 결국 육군대학 현지실습을 지원하고 안내하는 작전장교에게 자문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육군대학생들의 발표안이 사단에서 이미 구상한 복안과 너무 상이할 때, 현지실습 부대의 실무자들에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도심에서는 부대위치를 군 의견대로 정할 수는 없는 실정이어서 기존 부대 막사 위치도 고려하고 내곽연대의 작전과도 연계를 해야 실현 가능한 계획을 만들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단의 방어 정면과 종심보다는 지역에 따라 넓기도 하고 좁기도한 기형적인 부대배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조별 토의안을 놓고 피 튀기는 논쟁을 통해 발표안이 결정되었다. 또한 발표안에 따라 화력, 장애물, 전투근무지원 계획 등까지 모두 작성을 했다. 결국에는 사단장 및 참모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작전계획을 브리핑할 준비에 마지막 날 밤에도 역시 꼬박 새웠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11
  • [김희철의 전쟁사(11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③전세 불리해진 중공군 요구로 휴전 예비회담 개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 6차 공세를 사투로 막아낸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함에 따라 중공군은 병법의 기본인 속전속결(速戰速決)원칙을 포기하고 신속한 승리보다는 천천히 승리를 쟁취한다는 전략으로 변경하였고, 휴전협정에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미국 또한 한반도의 정책 목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전선을 유지하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휴전 이후 유엔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국가 수립을 최종적으로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은 스스로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련 및 중국정부와 막후 접촉을 시작했다. 유엔군이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에서 압승함에 따라 중공군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 휴전까지 지루하고 치열한 ‘고지 쟁탈전’과 포로 교환 등 휴전회담 신경전 지속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만인 1951년 6월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야코브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에서 '평화의 대가'란 연설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말리크는 휴전회담 개최와 양군의 38도선으로부터 철수도 제의했다. 공식적으로 나온 첫 제의였지만, 이러한 식의 휴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꽤나 나돌고 있었다.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안하자 미국은 이에 일단 동의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유엔군이 강력한 공세로 전환하자 계속된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져 전투력 복원에 시간이 필요했던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요구로 개성에서 1차 예비회담이 열려 본회담을 위한 준비사항을 협의했다. 드디어 7월10일 첫 본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양측간의 신경전속에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군측에서는 회담이 한 달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치적 선전에 급급한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파행적 진행으로 7월26일에야 토의할 의제를 가까스로 합의했다. 그러나 첫 휴전회담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측은 15일간의 고의적 지연을 통해 그 동안 형편없이 붕괴된 군사력을 재편했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이 전투력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헌데 문제는 휴전회담의 장소가 개성이므로 서부전선에서의 전면적인 공세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중공군과 인민군측도 반격할 경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을 감안하여 주 전장을 중동부전선의 산악지역으로 집중했다. 따라서 휴전이 되는 1953년까지 2년간 ‘고착된 전선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쟁이 전환됐다.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은 이렇게 고착된 전선에서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한 ‘수도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전투’ 등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을 지루하게 지속하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8-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