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소통시대
Home >  소통시대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25)]유일 퇴로인 오마치고개 차단되자, 제3군단 전의 상실해 치욕적 최악의 패전
    중공군 제 5차 5월공세가 만든 최악의 패전 '현리전투', 3군단 해체 초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2달 동안 북으로 축차후퇴를 진행했고, 유엔군이 1951년 3월 말 캔사스선(문산∼ 연천∼화천저수지∼양구∼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마오쩌둥의 추가적인 대규모 지원을 받은 펑더화이의 중공군은 전선 분할과 양익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951년 4월 22일부터 29일까지 약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부와 중서부전선에서 제 5차 4월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은 무제한 화력 투입과 효과적인 사투(死鬪)를 통해 중공군의 서부전선 대공세를 4월 29일 서울 북방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고 전력의 집중 방향을 전환하여 중동부전선의 돌출되고 특히 약한 국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작전계획에 따라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 작전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제 3군단과 미 제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국군 5사단, 7사단이었다.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제 19병단 예하 12, 20, 27군이 미 제 10군단 휘하 5사단과 7사단을 돌파해 깊숙이 파고들고, 동해안 쪽에선 인민군 제 2군단, 5군단이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해 한국군 네 개 사단을 삼중으로 포위하여 완전히 섬멸시킴으로서 동부전선에 거대한 돌파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5월16일 16시경부터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1시간여의 포격에 뒤이어 보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국군 제 7사단 정면에 집중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이 지역은 중공군의 종심기동 부대가 빠른 시간 내에 국군 제 3군단의 후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기동로로 계획한 곳이었다. 국군 제 7사단 지역에는 중공군 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제 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군 3군단이 배치된 인제와 후방지역인 홍천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인 오마치(오미재)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중공군 제20군 예하의 60사단 178연대 2대대가 국군이 배치된 진지를 우회해 신속하게 국군 후방으로 진출해 갔다. 그 결과 중공군 첨병중대가 17일 04시에, 대대가 07시에 국군 제 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오마치고개 일대를 점령하였다. 당시 국군 제 3군단도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문제는 이 고개가 미 제 10군단 예하 국군 7사단의 관할구역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3군단에서 오마치 고개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려고 했는데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무슨 깡으로 남의 책임구역을 침범하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오마치 고개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다. 참고로 이 실책이 치욕적 패배 참상의 원인 중 하나가 됐기에, 현재 육군사관학교나 육군보병학교에서 전투지경선(각 부대의 담당구역을 가르는 선)을 가르칠 때 이 사례를 들어 정말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고 있다. 오마치 고개를 중국군에 빼앗기면서 제 7사단의 오른쪽 지역을 방어하던 제 9사단과 3사단은 퇴로를 차단당한 채 중국군에게 앞뒤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제9사단과 3사단은 방어선을 포기하고 물러나 5월 17일 오후에 현리로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제 9사단과 3사단은 오마치 고개를 돌파할 작전을 실시하기는 커녕 거기에 모여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거기다 인접 미 제 10군단 예하 국군 7사단의 일부 패잔병까지 이곳으로 몰리면서 현리 일대엔 대혼잡이 벌어졌다. 또한 좁은 지역에 부대가 대거 집중되는 바람에 무전기 전파도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지휘망까지 더 엉망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선통신망조차 매설을 깊게 하지 않아 전투 개시전 중공군의 그야말로 모든 탄을 쏟아부은 공격준비사격에 거의 끊어져 버렸다. 뒤늦게 제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연락기를 타고 현리로 와서 9사단장 최석 장군과 3사단장 김종오 장군을 불러모아 작전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 오마치를 돌파한다는 작전이 세워졌다. 군단 병력과 장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오마치 돌파는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한 유재흥 장군은 연락기를 타고 다시 군단 본부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 현리에 모여든 부대원들 사이에선 이렇다 할 작전도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접 7사단지역 피탈에 이어 유일한 퇴로인 오마치도 차단당했다는 입소문까지 돌자 불안감이 높아졌다. 또한 많은 부대들이 혼재된 상황이어서 전파 장애로 인한 지휘망 혼란이 이런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거기다 유재흥 장군이 연락기를 타고 군단 본부로 돌아가자 이를 본 장병들 사이엔 3군단장이 도망쳤다는 소문까지 돌자,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현리에 모여든 병력에 대한 중공군의 큰 공격은 없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 사단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최악의 패전으로 3군단 해체,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당하는 비운 맞아 국군 제 3군단은 17일 17시 30분경부터 포위망 돌파를 위한 오마치 고개 탈환 작전을 시작했다. 원래 계획은 제 9사단 30연대가 먼저 공격에 나서 736고지와 785고지를 확보하면, 제 3사단 18연대가 후속 공격에 나서 오마치 고개를 탈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먼저 공격에 나섰던 제 9사단의 병력은 전의를 상실하여 지휘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혼란에 빠져 동쪽 방태산으로 퇴각했다. 마찬가지로 현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 3사단도 다음날 새벽 방태산으로 퇴각을 시작했고, 계방산을 넘어 결국 평창의 하진부리까지 물러나야 했다. 국군 제 9사단과 3사단이 우왕좌왕하면서 포위망 돌파 공격을 지연 시작한 탓에 이때는 이미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와 침교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군 제 3군단은 전방의 압력과 후방의 위협에 압도되어 전의를 상실하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부대가 분산됨으로써 산악지대를 따라 70㎞를 후퇴한 뒤 하진부리 부근에 집결하여 부대를 재편성하게 되었다. 5월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 9사단이 40%, 3사단이 34.2%에 불과하였다. 대포 등의 중화기도 그대로 버려둔 채 퇴각했기 때문에 화기 및 장비의 손실이 매우 컸다. 미 제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제 3군단장 유재흥 장군에게 하진부리에서는 더 이상 철수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지만, 제 3군단은 5월21일 다시 제 3사단이 송계리로, 제 9사단이 대화로, 군단사령부가 영월로 각각 퇴각하였다. 결국 이 상황에 격분한 밴 플리트 장군은 국군 3군단 해체를 명령하게 되었다. 현리에서의 패배가 3군단 해체의 원인이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리에서의 패배로 인해 바로 군단이 해체된 건 아니다. 하진부리 일대에서 또 다시 어이 없이 붕괴되는 3군단의 상황을 목도하고 밴 플리트 장군이 3군단 해체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미 제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라는 질문에 국군 제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잘 모르겠습니다."라며 답을 했다. 이어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라는 재차 질문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답을 하자, 밴 플리트 장군은 화를 내면서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라고 나눈 대화는 지금도 치욕적으로 회자된다. 고(故) 유재흥 장군은 전쟁초기 의정부 축선의 7사단장으로 방어에 실패해 서울이 함락되었고, 2군단장 재직시에는 평남 덕천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위 전멸되어 군단이 해체되었다. 또한 현리전투에서도 3군단이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으나 전후에는 참모차장, 1군사령관을 끝으로 중장 제대 후, 제 3공화국에 등용되어 이태리 대사, 국방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던 영욕의 삶을 살았다. 철수과정에서 국군 제 3군단은 전의를 상실하여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반면에 국군을 추격한 북한군과 중공군은 속사리와 강릉지역으로 남하하여 유엔군 전선에 큰 돌파구를 만들었다. 이에 미 제8군에서는 예비대인 미 제 3사단을 투입하여 5월 23일부터 전선을 수습하고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전세는 곧 만회되었다. 이때 퇴각하던 도중에 산속에 낙오되어 있던 병력들 상당수도 구조되었다고 했다. 그나마 국군 제 1군단이 대관령 방어에 성공한 덕분에 겨우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다. 국군 제 3군단이 버리고 간 막대한 장비는 중공군이 그대로 이용할 상황이었고, 이것을 막고자 미 공군은 현리 일대에서 3군단 포와 수송장비를 폭격하는 어이 없는 작전도 했다. 또한 훗날 탈북하여 귀환한 조창호 포병소위(귀환 후 중위 진급 및 퇴역)도 이때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국군 제 3군단은 방어작전에 실패함은 물론, 인접 부대와의 협조나 부대의 통제 및 후방 방호대책 등에 큰 실책을 범하여 6·25남침전쟁사상 가장 큰 최악의 패전 기록을 남겼다. 이에 따라 1951년 5월21일 담당 지역을 미 제 10군단과 국군 제 1군단에 인계하고, 5월26일 국군 제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로써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 소통시대
    2021-01-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9)] 유사시 싸워 이기는 전투준비는 진지공사부터 / 무성의한 진지 구축은 단호하게 '불합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성묘는 추석 같은 명절이나 한식에 조상의 묘를 찾아 손질하고 살피는 일이다. 조선 후기까지 4대 명절에 묘제를 지내는 풍속이 계속되었다. 한식인 음력 3월에는 개사초(改莎草)라고하여 겨울부터 봄 사이에 생긴 구덩이를 비롯하여 조상의 묘에 생긴 손상을 손질하여 바로잡는다. 이때 부족한 떼(잔디)를 다시 입혀준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한식 이후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과 작은 나무 등을 베거나 깎아주어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한다. ■ 성묘처럼 삶과 죽음의 교차로 되는 진지공사, 일종의 돈내기식 방식으로 경쟁 붙여 싸워 이기는 전투 준비는 한식이나 추석 성묘(省墓)처럼 봄가을에 진지공사부터 시작된다. 진지는 어떻게 준비하는가에 따라 유사시 삶과 죽음의 교차로가 되어 그곳이 나의 묘자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지공사는 성묘와 같다. 춘계에는 겨울과 봄 사이에 생긴 구덩이를 메우고 무너진 떼(잔디)를 다시 입혀주고, 추계에는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풀과 작은 나무 등을 베거나 깎아주고 동계작전 준비도 같이 한다. 유사시 북한이 보유한 1만5000여문의 방사포 및 야포가 불을 뿜으면서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 군은 준비된 진지에서 초전 생존성도 보장받으며 남침해오는 적군을 격멸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부대는 약 3~4주 동안 거점에서 야영하면서 진지공사를 한다. 그래서 진지공사는 1년 중 중요한 업무였고, 통상 연말 성과분석 회의시 부대표창에도 진지공사우수부대를 포함하여 선정한다. 매년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상급부대는 당시 적상황을 분석하여 진지공사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하달하고 야전부대는 그 지침에 따라 우선적으로 진지공사를 한다. 그때 강조한 공사지침은 점진적으로 진지를 전환하며 전투를 할 수 있는 오리발식 진지 구축과 야간 전투를 위한 화목단으로 조명목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상급지침과 노후된 상태의 진지를 보강하는 것만으로는 배가 고팠다. 상단의 사진과 같이 미비된 진지도 정비하면서 과거 독도 수비대가 일본의 점유 시도를 거부할 때 사용했던 기만용 위장포처럼 기만 진지도 구축하기로 했다. 당시 중대 진지의 총길이는 약 2~3km로 80년대 초 삼청교육대 인원들이 동원되어 나무를 잘라 이어 진지를 만들어 비교적 견고한 상태였으나 일부 지역이 무너지고 나무가 썩어서 기존 진지를 보수하는 공사만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부족한 시간과 인원 속에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돈내기(할당받은 일을 끝내면 그 일에 대해 무조건 일당을 지급하거나 마친다는 뜻의 경상도식 표현)’ 방법 뿐이었다. 또한 소대내에서도 떼(잔디) 운반조, 진지 구축조 등으로 조편성을 하여 노동 집약적으로 공사하도록 코치를 했다. 주차별로 소대별 목표를 정하고 먼저 자기 소대진지 공사를 하면서 화목단 야간 조명목과 위장 진지에 필요한 나무와 돌들을 채집하도록 했다. 그날 해당 소대가 목표를 달성하면 필자가 상태를 확인하여 합격여부를 판명후 휴식을 보장하는 돈내기식 방법을 적용했다. 산 능선에 구축된 진지에서 호가 너무 깊으면 앞쪽 하단에서 올라오는 적들을 관측할 수 없다. 엄폐와 관측이 가능한 깊이도 중요하지만 진지 앞의 사대 방향도 자신의 몸을 보호 받으면서도 사격이 가능하도록 위치를 잘 선정하는 것도 착안했다. 또한 진지 전방에 설치된 철조망과 기관총 사격방향이 연계된 사계청소와 크레모아 설치대도 적방향에 맞게 구축되도록 확인했다. 돈내기식 방법으로 시간에 쫒기어 생각없이 구축된 진지는 불합격 시키고 다시 공사를 시켰으며, 당일 공사량을 완벽히 끝낸 소대는 소대장 통제하에 쉴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하자 점차 경쟁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피로와 권태감에 대원들은 지치고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필자에게는 88오토바이가 있었다. 이동시 소리가 거의 없어 기습적으로 중대장이 불시에 공사 현장에 나타나 독려를 했다. 훗날 중대장의 전령이 하소연 했는데 “현장 지도시 방심해 기습을 당했던 소대장이 중대장 이동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아 질책을 했다”고 하여 미소도 지었다. 소대별 담당진지 공사가 끝나자 사전 준비한 나무와 돌들로 진지 전방에 적들이 은거하기 용이한 장소에 조명목도 설치하고 적방향에서 쉽게 관측되는 도로 교차로에 기만용 위장전차도 만들었다. 한편 추계진지 공사시에는 동계 결빙을 고려한 사전 지뢰공 설치(지뢰를 설치할 장소에 땅을 미리 파고 짚과 병으로 메우는 작업)와 동상을 대비한 깔판 그리고 풀이 마르면 노출되는 총안구에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을 한다. 또한 동계 혹한시 숙영이 가능한 분침호를 구축하고 도로 급경사에 적사장을 설치하는 작업 등을 추가로 준비한다. ■ 사단장의 격려방식, “진짜로 앞에 오는 적을 모두 격멸할 수 있겠나..?” 공사가 어느덧 종반에 접어들자 사단장이 현장 지도를 나왔다. 연대에서는 전방 부대도 있는데 예비 부대인 필자의 중대로 사단장의 현장 지도를 유도했다. 사단장 민찬기 장군(육사16기)은 중대 OP(관측소)인 A고개 헬기장으로 도착했다. 중대 진지였지만 연대장과 대대장이 사단장을 영접했고 작업복 차림의 필자는 진지공사 현황을 설명했다. 마침 그 곳은 필자가 소대장 시절에도 담당했던 지역으로 진지공사를 수차 했던 장소였다. 전방 훼바(FEBA) 지역을 통과한 적들이 책임지역까지 접근하는 정보판단을 먼저 보고하고 그 양상에 따라 오리발식 진지 첨단에서 점진적으로 주 진지까지 전환하며 적전차와 보병을 격멸하기 위한 진지와 조명목 구축 등을 자신있게 설명했다. 추가로 기존 진지공사시 착안했던 사항들과 적 기만을 위한 위장진지 구축까지 일사천리로 설명을 마치자, 사단장은 주변 진지공사 현장을 둘러보고는 “이렇게 준비하면 진짜로 앞에 오는 적을 모두 격멸할 수 있겠나..?”라며 격려가 담긴 질문과 미소를 남기고 복귀했다. 상급 지휘관의 지도 방문이 만족스럽게 끝나자 배석했던 연대장은 격려와 함께 앞으로 군생활을 위한 차후 보직까지 조언을 해주었고, 대대장(소장 양치규 육사29기)도 자신있게 설명한 필자에게 “야, 너는 따발총이다..ㅋㅋ”하며 기분 좋은 농담을 건넸다. 내 묘자리를 설치하는 마음으로 임한 진지공사로 유사시 초전 생존성도 보장받으며 공격해오는 적 전차 등 북한군들을 격멸할 수 있는 전투준비가 완료되어 자신감을 얻었다. 또한 사단장 등 상급지휘관들에게 유비무환(有備無患)과 선승구전(先勝求戰)을 확신시켜주는 자리도 되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1-11
  • [김희철의 전쟁사 (23)] 윈스턴 처칠,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면 세상을 지배"로 극찬
    중공군, 철수하는 국군 6사단을 추격하며 가평을 점령 영연방 제27여단, 중공군 저지 위해 가평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이 제 5차공세의 시작인 사창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해오자 영연방 제 27여단은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중공군이 가평을 점령해서 서울과 춘천을 잇는 46번 국도를 따라 남하해오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측면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연방 제 27여단은 사창리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75번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했으며, 가평천과 화악천이 합류하는 도로 북동쪽 목동리의 504고지에 호주 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전차 제72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였고,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로 구성된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했다.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20군 예하 제118사단이 4월 23일 야간공격을 재개하자, 국군 제6사단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와 함께 철수하여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호주대대의 배치 상황을 모르고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 왔다. 우전방 75번 도로 북동쪽의 북면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대대는 대대의 화력은 물론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4월 24일 01:00경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반면 호주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중대와 연락은 물론 포병의 화력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의 대대지휘소와 박격포진지마저 피탈되어 최악의 상황에서 근접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대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부 진지가 피탈되면 즉시 역습으로 회복하면서 새벽까지 목동리 504고지의 방어진지를 사수(死守)하였다. 날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영연방 제 27여단 수색대는 죽둔리 부근에서 중공군 40명을 생포도 하였다.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영연방 여단장은 적이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오히려 피해만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호주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오전에 연료 보충과 장비 점검을 완료한 미 전차 소대가 복귀하여 화력으로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였고, 제16포병연대도 연막탄과 고폭탄을 사격하여 적의 시계를 차장하고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호주대대가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하자, 75번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배치된 캐나다 대대도 비록 고지위에 있었지만 인해전술로 밀고 올라오는 13배가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말도 안되는 전투를 했다. 당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참호까지 밀고 들어오며 고전하게 되자,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에게 자신들의 머리 위로 곧바로 포격하는 ‘진내사격’을 할 것을 요청했다. 참호 안에서 싸우는 자신들보다 엄폐물 없이 노출된 중공군의 피해가 더 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무전을 받은 뉴질랜드군 포병대대도 처음엔 놀라 선뜻 포격하지 못하다가 결국 아군 진지 머리 위로 진내사격을 해줬고 캐나다군의 의도대로 방어에 성공했다. 4월 25일 전투 후에 미군과 한 대화는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미군은 아예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가정하고는 들어온 통신이 적군의 것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은 미군이 캐나다대대와 ANZAC군(호주군 뉴질랜드군)이 패배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이유는 캐나다대대와 함께 가평을 사수하던 호주대대가 병력의 40%를 잃은 뒤 이미 후퇴를 해 실질적으로 전선을 지키던 보병 병력은 캐나다군 1개 대대의 450명이 전부였던 반해 중공군은 1개 사단 6000명이 밀고 내려오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대대는 방어에 성공했고, 10명 전사자에 23명 부상자를 낸 반면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 이하가 사상 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가평전투에서 중공군 제 20군 예하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75번 도로와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진출하여 서울∼춘천 46번 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영연방 제 27여단의 강력한 저지작전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자 25일 새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의 유엔군 전선 분할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유엔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25일 밤에 양평으로 철수하였고, 부대명칭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유엔군은 국군 6사단의 사창리가 돌파되면서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연방 제 27여단 예하 호주 및 캐나다대대가 진내사격 등의 선전으로 가평을 사수(死守)하였고 중공군 제 5차공세의 전선분할 기도는 백지화 되었다. 7000여명 파병한 호주군, 코만도작전 등 특수작전에 능해 3번째 규모인 2만 7000명 파병한 캐나다, 자국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리는 가평전투 호주는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자 그 즉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다. 1950년 6월29일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파병을 결정한 호주군은 1950년 7월 공군 제 77전투비행중대와 9월에는 호주 육군이 부산에 도착하여 참전했다. 육군, 해군, 공군 모든 분야에서 파병한 호주군은 총 1만 7천여명을 파견했다.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 규모였다. 육군은 3개대대와 지원부대를 포함한 총 1만 657명(육군만 놓고 본다면 미국-영국-캐나다-터키에 이어 5번째 규모이지만 전체규모는 네번째임), 해군은 항공모함 1척, 호위함 4청 구축함 4척등 총 4500명, 공군은 1개 전투비행대대와 2개의 정비대대를 포함한 2000여명이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였다. 호주군은 연천 마량산전투, 평안남도 숙천 영유리전투, 평안북도 박천전투, 가평 목동리(죽둔리)전투를 용맹하게 치루었다. 이 중에서도 철수하는 국군 제 6사단을 엄호하면서 끝까지 목동리(죽둔리)를 사수(死守)하면서32명이 전사하고 3명 실종, 59명이 부상당했던 일명 ‘가평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코만도작전이라는 특수작전에 능했던 호주군은 1950년~1957년까지 약 7년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였으며, 1만7000명의 병력 중 사망 339명 부상 1216명으로 1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한편, 캐나다 인구는 3600만명, 미국 인구는 3억2300만명, 한국 인구는 5000만명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한국전쟁때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캐나다 전체 군대 2분의 1을 한국으로 보낸 것이다. 1950년 6월30일, 캐나다 하원은 한국파병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청소년부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예비역까지 포함된 2만 7천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캐나다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리는 ‘51년 4월23일 캐나다군 약 700명과 중국군 5,000여명이 싸운 가평 전투라고 한다. 가평 전투의 공로로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는데 이것은 캐나다군이 최초로 미국으로부터 수여 받은 표창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캐나다를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하였고 1963년에 수교를 맺었다. 현재 캐나다에 있는 모든 전쟁 기념물과 주 의사당에는 한국 전쟁 기록이 반드시 있다. 캐나다인들은 가평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캐나다군의 위니펙 주둔지를 가평(Kapyeong Barrack)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놀랍게도 캐나다 도로이름에도 가평(Kapyong Rd)이 들어가는 곳들이 다수 있기도 하다. 가평전투 후,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캐나다군이 맹활약을 한 분야도 저격, 강습, 게릴라전 등의 소수의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버텨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동계전투는 전세계 최고라고 전해진다.
    • 소통시대
    • 종합
    2021-01-04
  • [김희철의 전쟁사 (22)] 유엔군 사령관에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에 밴 플리트 장군이 취임하자 중공군은 5차 공세 시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전력을 보충한 뒤 제 4차 2월공세(’51.2.11~18)를 시작했으나, 중공군의 약점을 파악한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참조)에서 사주방어 및 기동전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성공적으로 저지·격퇴시켰다. 그리고 계속 공격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 22일 리지웨이 사령관의 재반격작전의 목표를 달성하였다. ■ 베이징으로 간 펑더하이, 마오쩌둥과 독대해 대규모 병력 증원 결정 이때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제 4차 2월공세가 끝나자 마자 부리나케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평소에 타지않던 비행기를 이용해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펑더하이는 베이징에 도착해서 바로 마오쩌둥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때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야행성인 마오쩌둥은 자고 있었다. 펑더하이는 보초의 제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마오쩌둥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다 일어난 마오쩌둥에게 “속결로 승리를 거두기에는 어렵다”며 전선의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보고했다. 이어 “한국전선의 중국인민지원군 병사들은 잠도 식사도 제대로 못 자고 탄약도 없으며 동상자들이 속출하고 있고 채소는 구경도 못해 야간전투가 많은 병사들로서는 야맹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더욱이 조선 청년들은 모두 달아나 동원하기 어렵고 겨울에는 동서의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이 겹쳐 무척이나 춥고 피해가 늘어 인원보충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상태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다”며 부대의 어려운 현상황을 솔직히 보고 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마오쩌둥은 즉시 대책을 강구했다. 대규모의 중공군을 보충하였고 포병부대와 대공포 부대도 증원하였다. 식량 및 탄약도 부족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도 포함 시켰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주도권 장악은 물론이고 수도 서울을 다시 무력으로 빼앗아 전세를 만회하겠다며 펑더하이와 마오쩌둥은 다짐을 했다. 이것이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27)였다. 이는 전열을 가다듬은 중공군과 재반격작전으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한편 유엔군 상황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한 후부터 맥아더의 입지는 무척 좁아졌고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 해임된 맥아더 장군, 하원 연설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아마도 하원에서의 연설이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이 맡았다. 밴 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5차 공세(춘계공세)가 시작되었다. ■ 설마리 전투,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가 중공군 제 5차 공세 저지에 기여 유엔군이 4월에는 기존의 38선 지역까지 진출했었다. 이에 중공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7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켰다. 중공군은 제19병단으로 국군 제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이 지키는 문산-파주 방면을 공격하고, 제3병단은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이 지키는 연천-동두천 방면을 공격해서 서울을 포위하고 점령한다는 5차 공세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제19병단이 문산-파주 지역을 공격함으로서 제 5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군 제29여단은 임진강 하류인 파주 적성면 일대의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특히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의 제1대대가 지키는 감악산 북서쪽인 마지리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마지리일대의 235고지에서 이틀 동안 분전을 하며 중공군 제63군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결국 감악산 기슭인 설마리 일대의 고지로 물러났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가 설마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자 미 제1군단 사령부는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 등의 병력을 보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구출 작전은 실패했다. 4월 25일, 대대가 전멸할 위기에 놓이자 진지를 포기하고 탈출하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60여 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5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은 1개 대대 병력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고, 여단 전체로는 1,3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3일 동안 중공군의 진격을 처절한 피로써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훗날,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가 중공군과 맞서 싸운 235고지를 '글로스터(Gloster Hill)'고지라고 명명하고 인접 도로가에 추모공원과 전적비를 세워 영혼을 달래고있다.
    • 소통시대
    • 종합
    2020-12-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8)] 선승구전(先勝求戰),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 전쟁을 해야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의 왕 도공(悼公)에게는 사마위강(司馬魏絳)이라는 유능한 신하가 있었다. 사마위강은 "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십시오(居安思危). 그러면 대비를 하게 되며(思則有備), 대비태세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有備則無患)"라고 왕인 도공에게 건의하여 강한 나라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서경(書經)’과 ‘좌씨전(左氏傳)’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명언으로 회자된다. 또한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의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은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한다”는 의미이다. ■ 편안할 때 위기 생각하고(居安思危). 대비태세 되어 있으면 근심 사라진다(有備則無患) 군대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이다. 항상 승패나 성공 및 실패가 붙어 다닌다. 특히 쌍방 훈련에서는 대부분 판결이 난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해 각 부대는 자체 훈련도 강화하고 장비 손질 정비에도 최선을 다하여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당시 필자의 연대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 중에 행군과 태권도를 매우 강조했다. 연대장 지침에 의해 매주 50km정도씩 주야행군을 계속했다. 그 결과 우리 중대 뿐만 아니라 전 연대원들의 행군 능력은 어느 타부대와 비교해도 월등히 우수했다. 그러나 강한 행군능력을 보유하는 대신 중대행정보급관의 고민과 애로는 반대로 늘어만 갔다. 많은 행군으로 병사들의 전투화(군화)가 빨리 닳아 구멍난 신발을 신고 행군하니 물도 들어오고 또 군화못도 튀어 나와 중대원들의 발은 상처투성이었다. 그래서 각 중대는 군화 정비공을 임명하여 군화의 바닥도 교체하고 헤져 구멍난 곳을 꿰매어 다시 신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태권도 교육을 강조함에 따라 전 중대원을 유단자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려면 보급되는 태권도복과 급수에 따른 색깔별의 띠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중대행정보급관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헌데 필자에게는 소위로 임관하여 한 개 연대에서 5년에 걸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이 있었다. 연대에 근무하는 부사관 및 장교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특히 연대 군수분야를 담당한 간부들과는 각별히 지낸 탓에 연대 보급창고를 수시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원래 정상적인 보급절차는 대대에서 각 중대를 종합하여 연대에 보고하면 연대에서 각 대대를 고려하여 분배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에 열악한 환경의 중대원들을 위해서는 필자는 이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안면을 이용하여 절차 준수를 잠깐 뒤로하고 연대와 직접 상대하였다. 연대창고에 남아있거나 새롭게 보급되는 태권도복이나 군화를 우리 중대가 우선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보급품 수불에 따른 문서 처리는 나중에 정리하였다. 그리고 중대원들의 사격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사격용 표적(E, F)이 필요했다. 사격연습을 많이 하면 표적에 총탄 구멍이 많아져 다시 종이를 잘라 표적구멍을 메우고 사격을 할 정도로 표적이 부족했다. 이 또한 사단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을 이용했다. 연대 교보재 창고에 표적이 없으면 대대에 5분의 4톤차를 신청하여 사단본부로 갔다. 마침 사단 교육장교가 잘 알고 있는 후배라 사단 교보재 창고에 들려 사격용 표적(E, F)과 목재, 시멘트 등을 확보하여 대대에 일부 제공하고 중대에서 활용했다. 그래도 중대원들에게 넉넉한 보급품을 제공하기에는 부족했다. 마침 육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생도들이 사용하고 남은 태권도복도 얻어서 분배도 했다. 고교 축구부에 연락해서 선수들이 사용하다 낡아서 바꿔 신은 축구화도 협조하여 가져와 나눠주니 대원들은 훨훨 날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 중대원들에게 제공한 정성은 곧 상급부대 검열, 측정 및 평가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 사단 전투지휘검열시 사격 측정은 중대가 대표선수가 되었고, 각종 행군에서도 보수 정비한 군화를 신고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었다. 태권도 유단자는 제일 많았고, 체육대회에서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중대원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다. 평시에 모든 것을 앉아서 기다리면 늦어진다. 쫓아다니면서 중대원들의 보급품과 교보재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확보했고, 그것이 안될 때는 군화 정비소 등을 만들어 보수 및 정비를 했다.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하여 훈련하면서 대비하고 있으니 각종 검열, 평가 및 측정에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손자가 강조한 ‘선승구전(先勝求戰)’을 실천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허실(虛實)’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 (無所不備 無所不寡)’는 “준비가 부족한 곳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풀이된다. 즉 “전부를 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부가 부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피실격허 (避實擊虛)’는 “적의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뜻으로 선택과 집중,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전투를 할 때 전략 및 전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허나 평시에는 사단 책임지역내 심심산골에 인적이 드문 지역이 산재되어 있어 그곳에서 침투한 간첩들이 은거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취약지로 분류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의미와 상충되는 전 지역을 커버하는 취약지 관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취약지역에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상주하면서 주변 수색정찰도 하고 매복 및 전술훈련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준도 배양하고 침투한 간첩 및 불순세력의 은거도 거부하는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했다. 통상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할 때에는 부대의 지휘권을 벗어난 타지역에서 해당 소·중대장의 독단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어 반드시 차상급 지휘관에게 훈련계획을 사전에 보고했다. 필자도 사전 토의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주일간의 취약지 훈련계획을 준비하여 보고하자 연대장은 해당 지역이 격오지로 도로도 불량하여 이동 및 소통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적 접촉시 작전조치와 폭우 피해 및 환자 발생 등 우발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며 병력관리를 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 장거리 행군에 따른 허기 심해, 설익은 밥도 꿀맛 훈련출발 당일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취사장 설치와 통신선 개설을 위해 중대 행정보급관(인사계)가 취사병, 통신병들을 대동하여 4분의 5톤 통신차를 타고 화천군 백적산(883.5m) 북방 구운리 만산동 계곡으로 출발했다. 군장검사를 마친 중대원들은 취약지역인 만산동 계곡까지 30km행군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규환 연대장님이 평소 행군과 태권도를 강조하여 매주 행군 훈련을 했던 덕분에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전방 GOP연대 소속이었으나 이번 ‘취약지 상주훈련’ 장소는 사단 후방 인접사단과 근접한 지역으로 최전방 부대가 사단 책임지역의 최후방으로 이동하여 훈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대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불령을 넘어 신월동과 삼거리라고 불리는 봉오리를 통과해 다시 덕고개를 힘차게 넘었다. 필자가 근무한 지역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산악지역이라 조금만 이동해도 길옆에 절벽과 벼랑 등 아찔하게 만드는 고개들이 산재해 있다. 행군 간에는 통상 50분 걷고 10분 휴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아찔한 벼랑 옆에서는 휴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여 그나마 비교적 평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쉬고 있다가 자칫 계곡 및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취사병들이 선발대로 투입된 탓에 점심은 주먹밥으로 대체했다. 행군 간에는 배가 든든해야 잘 걸을 수 있는데 허기가 지면 낙오할 수도 있어 건빵을 추가로 휴대했지만 20대 청년들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오후 늦게 만산동 골짜기에 도착했다. 군장을 풀고 바로 주변 능선에 소대별로 개인 텐트를 설치하며 숙영준비를 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준비한 저녁식사가 분배되었다. 야전에서의 취사에 숙달되지 않은 취사병들이라 설익은 밥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미식별 천연동굴서 은거흔적 발견, 불온전단 회수하고 독립가옥 신원확인 박영일 중령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내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의기에 차 정열을 불태웠던 시절 중대 상황실 텐트에 당직 소대장을 근무시키고 야간 야외점호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조 점호 후에 계획된 주변 취약지역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대장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각자의 수색 책임지역에서 미식별된 은거가능한 천연동굴이나 은거 흔적을 찾으라고 했으며 북에서 뿌려진 불온전단을 가능한 많이 회수하고, 심신 산골에 홀로 있는 독립가옥은 필히 방문해서 신원을 확인하도록 강조했다. 각 소대를 수색정찰에 투입시키고 숙영지 텐트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짚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사단 작전참모 박영일 중령(육사25기, 소장 예편)이었다. 필자는 취약지 상주훈련 계획과 현재 각 소대가 수색정찰 중임을 설명하면서 숙영지를 안내했다. 그런데 사단 작전참모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훈련 계획은 잘 수립했으나 취사장 위치가 잘못 되었다며(상단의 만산동계곡 사진을 참고로) “숙영지와 분리하여 계곡 건너에 취사장을 설치하면 만약 집중 호우 발생시에 계곡물이 불어나 식사추진 및 철수시 위험할 수 있으니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각 텐트는 능선쪽으로 올려 있어 안전하지만 취사를 위해 급수가 용이한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에 설치된 취사장의 안전 취약점을 지적하며 추가로 사단에서 만산동으로 이동하는 도로가 부실하니 도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현장을 떠났다. 작전참모는 그해 가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참모장을 거친 뒤 훗날 인접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필자보다 선배로서 지내온 많은 군생활 경험이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사자성어처럼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필자는 유선으로 대대장에게 작전참모의 방문과 지적 및 추가 지시사항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즉시 시정 후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오후가 되자 소대별로 복귀를 했다. 역시 결과 위주의 훈련을 강조한 탓에 수개의 은거 가능한 천연동굴을 찾아냈고, 많은 불온전단들을 수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시간인 자유시간에는 아직 유단증을 못 받은 중대원들을 모아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주둔지가 아닌 야외라는 것이 오히려 저조자들에게 개별지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차후 심사를 대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야간 분·소대 전술훈련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작전참모 지시대로 사단본부까지 도로 보수도 병행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중대와 함께 대대장의 통제를 받는 것을 벗어나 중대 단독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상급 및 인접 부대의 눈치를 안보게 되어 더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훈련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점호 후 전 중대원이 텐트로 들어가 취침을 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당직 소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상황실 텐트로 나갔다. 소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책상에는 약간의 더덕이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행보관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으나 모처럼의 자리라 합석을 하였다. 소대별 수색활동시 전단과 함께 수거한 자연산 더덕 안주에 들이키는 막걸리가 너무도 좋았다. 더불어 그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과 애로점들을 서로 나누며 한마음으로 단결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칼럼을 쓰는 지금, 중대장시절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소대장 김태정, 우광호, 변상훈, 이동호들의 의기에 찼던 그때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구호 아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신나고 즐겁게 정열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15
  • [김희철의 전쟁사 (21)] 중공군의 허를 찌른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
    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 재반격 작전 발판 마련…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의 1차공세(’50.10.26~11.8)와 2차공세(’50.11.25~12.24)에서 호된 희생을 치룬 유엔군과 국군은 결국 ‘50년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철수했다. ‘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에 나서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뒤이어 압록강 유역의 초산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김일성 정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 공산당 정부는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10월19일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병했다.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 산줄기를 타고 은밀히 이동해 10월26일부터 본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을 건너 X-mas총공세에 나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을 받았다. 특히 11월26일 국군 제 2군단이 담당하던 대동강 상류의 덕천·영원 지역이 중국군에 돌파되면서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서부전선의 지휘를 담당한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모든 부대를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철수시켜 평안남도 숙천과 순천을 잇는 지역에 새롭게 방어선을 편성했다. 그러나 미 제 2사단이 군우리에서 중국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는 등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평양 방어를 고수하다가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유엔군 주력이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평양 방어를 포기하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2월4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미 제 8군은 평양의 산업시설과 군수물자 등을 모두 파괴했으며, 부상병이나 포로 등은 진남포에서 선박으로 38선 이남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38선까지의 도로에 국군 제 2사단과 5사단을 배치해 경비를 맡게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함께 남하했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 10군단도 흥남에 집결해서 12월 15일부터 배를 타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제2차공세가 끝난 12월24일경, 유엔군과 공산군은 다시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임진강-춘천-양양’을 잇는 38선 지역에서 1방어선을 구축하여 대치하게 되었다. ■ 워커 미 8군 사령관 교통사고로 순직,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 다시 12월31일 중공군의 제3차 신정공세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번 공세부터 전력을 회복한 북한군 2사단과 5사단이 화천 방면에서 공격에 가담했다. 중공군은 언제나 약체로 평가받은 국군을 공격하여 돌파한 다음 우회기동, 포위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고 이번에도 최소 3배의 병력으로 한국군만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그 방법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과 6사단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6사단 옆에 배치된 미 24사단도 곤경에 빠지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20만명 이상의 중공군들이 골짜기와 들판을 가득 메웠고, 이러한 강력한 인해전술 공세로 1월4일 겨우 되찾은 서울이 다시 내어주었다. 일부 공산군은 수원 일대까지 남하하기도 했다. 결국 유엔군은 2방어선인 수원-양평-주문진선에서도 밀려, 평택-제천-삼척에 이르는 선까지 철수하여 3방어선을 형성함으로 1월24일 중공군의 3차 공세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위의 ‘중공군 제 3차공세(’50.12.24~’51.1.8)상황도’처럼, 전력을 보충한 북한군 10사단은 단양을 돌파해 안동까지 위협을 가한 후 다시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태롭던 낙동강 전선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던 미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중공군 3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12월23일 의정부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제 2차 세계대전시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전율케했던 공수여단 및 사단장으로 앞가슴에 2개의 수류탄을 매단 채 한국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중공군의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기세를 멈추는 것 보다 아군의 전투력 보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옅보고 있었다. 위의 ‘중공군 공세기간과 주요전투 현황’표 처럼, 중공군의 공격이 1~2주 계속된 후에는 더 이상의 지속적인 공격을 못하는 것은 신장된 보급선으로 미흡한 화력과 부족한 탄약과 식량 등 전투근무지원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인 터어키군, 군우리·금량장 전투에서 용맹성 과시 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다음해인 1월24일, 평택-제천 -삼척의 3방어선까지 철수하여 전투력을 보존했고 재편성과 휴식 그리고 실전 같은 훈련을 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취약점을 분석하고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 제공 및 제해권 확보를 배경으로 협조된 기동전을 수행할 훈련까지 완료하였다. 이러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하고 전투훈련까지 한 결과, 제대로 싸울 준비가 다되었다고 판단한 리지웨이 중장은 취임한지 한달 째이며 중공군의 3차공세가 멈춘 다음날인 1월25일부터 유엔군의 재반격을 위한 위력수색 작전을 시작하였다. 먼저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서측에서 미 1, 9군단의 25사단과 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1월30일 반월-수원-금량장-이천선까지 전진하였는데 예상대로 적의 저항은 비교적 경미했다. 특히 미국,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로 많은 1만5천명의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 전사800여명, 부상 2,200여명의 큰 희생을 치룬 터어키군(한국인을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른다)이 중공군 2차공세시 군우리 전투와 이번 금량장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용맹성을 과시했다. 결국 미 1,9군단은 2월10일 인천-김포일대와 남한산성-양평일대까지 진출했다. 또 라운드엎(Round Up)작전은 중앙지역에서 흥남철수의 알몬드장군이 지휘하는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홍천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2월5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악착 같은 지연전을 기도했고, 10일 항공정찰 결과 미 10군단 정면으로 대규모 중공군이 집결하는 것을 식별하고 진출을 중지하였다. 이후 중공군은 전력을 보충한 뒤 제 4차공세(’51.2.11~18)를 시작했으나, 유엔군은 지평리전투(“[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참조)에서 효과적인 사주방어 및 기동전 등 성공적으로 저지·격퇴시켰다. 그리고 계속 공격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22일 재반격작전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 소통시대
    • 종합
    2020-12-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6)] 정호용 육군참모총장 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 정예화에 주력
    전술토의, 지식/지휘능력을 배양 등 간부교육 강화로 창군이래 가장 높은 전투력 보유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필자가 중대장 근무시 육군참모총장은 정호용 대장(육사11기)이었다. 정총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창끝 전투력 강화’를 강조했다. 창끝 전투력의 핵심인 소대장과 분대장들의 전투의지가 상실되고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장비와 많은 병력이 있더라도 그 부대는 일거에 와해된다. 좋은 사례가 있다. 6.25남침전쟁중인 ‘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중공군의 포위전술에 겁을 먹고 창끝 부대 분대장, 소대장들의 전선 이탈이 확산되어 결국 치욕스런 패배를 맛보았다. 따라서 정총장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을 정예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신병교육대에서 똑똑하고 체력이 좋은 신병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대 배치했다. 그 신병을 받은 중대장은 면밀히 관찰하여 골목대장감이라고 판단되면 조기 진급을 시킨다. 그가 상병이 되면 사단 분대장교육대에 입소시켜 교육 후 하사 계급장을 달아 분대장으로 1년~6개월을 운용하는 제도이다. 지금은 지상군사령부가 용인에 창설되어 단일 지휘체제이나 당시에는 전방을 1,3군사령부가 동서로 나누어 지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험한 산악지역이 많은 동부의 1군 사령부는 신교리와 과학화 된 장비가 서부의 3군 보다는 다소 늦게 전파되는 실정이었다. 필자는 ‘분대장 정예화’지시를 완수하기 위해 골목대장 분대장 시스템을 먼저 운용하는 3군 예하인 인접 8사단으로 자료수집 및 견학을 갔다. 그쪽에서 중대장근무를 하는 동기생을 만나 자료를 수집해서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운용할 준비를 했다. 역시 창조적 일을 할 때에는 벤치마킹 후 좀더 새로운 것을 가미해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8사단 시스템을 참고로 먼저 현재원 중에 후보로 가능한 병사들을 선발해 관리를 시작했고 간단한 운용판을 만들어 각 소대 현재 분대장들의 전역 시기를 고려해 사전에 후보들을 조기 진급시켜 분대장교육대로 보내는 현황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총장이 강조한 시스템은 성공적이었다.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체력, 훈련, 지휘 능력에서 탁월했고 심지어 소대장 보다도 더 많이 알고 숙달되어 병사들 교육도 일부 소대장들 보다 더 잘했다. 따라서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각종 훈련, 검열 및 평가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대별로 간부교육이 강화되어 소대장과 참모들은 대대 교육상황실에 모여 전술토의 및 작전을 수행하는 지식과 지휘 능력을 배양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시스템의 육군은 창군이래 가장 수준 높은 전투력을 보유한 시기였다. 하지만 역작용은 어디에나 있는 법, 기존의 고참 병사 보다도 먼저 진급하고 교육 후 하사로 복귀한 분대장들은 탁월했지만 군대의 고참 서열의 벽이 문제였다. 분대장 보다도 현재 자기 분대원인 병장이 군생활을 더 많이 했고 먼저 전역했기에 고참 병장의 견제가 분대 지휘의 걸림돌이 되어 항상 갈등이 야기되었다. 첨단 과학 시스템과 태고의 원시적 활동이 병행되어야 전장에서 승리 효과적 분대장관리와 태권도 유단자화로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중대표창 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받은 태권도 유단증은 제대병에게 주는 중대장의 전역 선물 간부교육이 강화되고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이 정예화 되자 창끝 전투력은 강해졌고 각개병사들도 개인훈련 만 잘하면 군생활에 걱정이 없었다. 헌데 헛고생하는 교육훈련이 일부 발견되었다. 야간 전투를 위해 안면 위장을 하고 정숙보행 연습을 했으나 첨단 과학화된 야간 투시경과 열상 장비가 개발되어 운용하자 그대로 노출되어 그동안의 야간훈련이 무색하게 되었다. 하물며 중대장 당시에 생각도 못했던 드론이 개발되어 적지역의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래도 전투가 지속되어 악조건이 되면 가장 원시적인 상황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훈련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악의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기존 훈련으로는 필자가 무엇인가가 부족하고 배가 고픈 느낌이 들었다. 중대원들이 군생활 동안 무언가 얻어 가야하는 데,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대에 골목대장형 분대장 중에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가 있었다. 그를 활용하여 전 중대원들에게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도 숙달하고, 제대할 때 태권도 유단증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중대원들은 시간만 있으면 태권도 연습을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비유단자는 훈련 및 작업간 휴식 시간도 쉬지 못하고 발차기 품세 연습을 하도록 독려했다. 개인적 결함이 있는 병사들은 해당 분대장이 개인 지도를 했고 분대장 선발시에도 유단자를 우선했다. 태양분대 선발로 분대원 전원이 유단자가 될 때에는 포상휴가 등 혜택의 우선권을 부여했다. 결국 중대는 연대에서 가장 유단자가 많은 중대로 선정되어 전반기 태권도 우수중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분대장 관리도 우수로 평가를 받아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던 것은 제대병들이 그렇게 귀찮아 했던 태권도 훈련이었지만 제대 신고할 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태권도 유단증’이었고 그것은 그동안 필자의 피로를 날려버렸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간부들의 일년 365일 중 퇴근 날은 약 150일,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잔인한 4월에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 훈련병을 데리고 떠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GOP연대였지만 필자가 소속된 예비대대는 후방의 훼바(FEBA)부대와 동일하게 교육훈련 및 근무 일정이 진행된다. 대략 분기별로 3~4주 종합훈련, 독단훈련, 반기별로 4주 진지공사, 연중 통상 1회 정도인 중대 및 대대전술시험, 공지합동훈련, 연대전투단훈련, 전투지휘검열, 유격 및 특공훈련 등의 야외 활동과 당직근무를 포함하면 중대장급 이하의 초급장교가 일년 365일 중 퇴근할 수 있는 날은 약 150일도 안된다. 이런 일상은 간부들이 퇴근도 못하는GOP투입 부대와 별반 차이 없는 마찬가지로 부대원들과 24시간 생활하여 사명감 넘치는 초급장교들의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이다. 부대교대 후 꽃피는 4월이되자 어김없이 중대는 첫 3주 종합전술훈련을 하게 됐다. 개인훈련은 평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대전투부터 시작했다. 분대장들의 지휘 능력과 분대원들의 전투기술을 숙달한 뒤 다시 소대와 중대전술훈련으로 종합전술훈련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주에는 5개월전에 중대장 근무를 시작했던 대성산 대대에 있는 유격장으로 이동했다. 통상 전투 및 전술훈련시 중화기 중대는 소대별로 각 소총중대를 직접 지원한다. 그 개념으로 유격조도 12중대의 1개 소대가 필자의 중대에 배속되어 편성됐다. 1일차는 체력단련훈련으로 PT체조는 15개 동작(높이뛰기-굽혀닿기-쪼그려 뻐치기 -엉덩이 올리기-구부리기-발 벌려 뛰기-옆구리운동-온몸 비틀기-뒤로 젖히기-쪼그려 돌기-팔 들어 다리닿기-몸통 비틀기-쪼그려 뛰기-팔동작 몸통 받쳐 -노젖기)으로 이루어져 반복하여 숙달하며 피튀기는 단련을 했다. 2일차부터는 가장 먼저 첫날 숙달한 PT훈련으로 뭉친 근육과 몸을 푼 후, 기초-복합-산악 장애물코스순으로 각 중대별로 조편성하어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4일차 되던 날 산악 장애물코스 중 ‘수직드롭코스’가 있었다. 인간이 공포심을 가장 느끼게 한다는 약 10m 높이를 사다리 타고 올라가 위의 좌상단의 사진처럼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로 뛰어내려 대담성과 자신감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훈련전에 웅덩이의 물을 만져보니 4월의 봄 날씨 이었지만 대성산 북향의 물을 받은 탓으로 몹시 차가웠다. 마침 현장에 연대에서 감독관도 나와 있었고 필자는 고민을 하다가 차갑다는 이유로 코스를 생략하면 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좀더 강한 PT로 체온을 올린 후 입수하기로 판단했다. 그래도 왠지 걱정이 됐다. 그때 ‘수직드롭코스’코스를 담당한 선임하사관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뛰어 내려 입수했고 이어서 소대장도 뒤이어 뛰어 내렸다. 그래도 중대원들의 긴장하는 눈초리가 남아있어 필자도 사다리로 올라가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였는데 역시 수온이 몹시 차가웠다. 중대장까지 시범을 보이자 중대원들은 한 명씩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 끝나고 대기하던 중대원들은 물 속에서 허부적대는 일부 요원들을 바라보면서 깔깔대고 웃기까지도 했었다. 필자 중대원들의 훈련이 모두 끝나고 배속된 12중대 지원소대의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 몇 명만 남아있어 그 코스훈련이 끝나가는 무렵 지원소대의 지공열 상병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하강 준비를 끝내고 교관의 ‘뛰어’ 구령소리에 멈짓 하다가 물로 뛰어내렸다. 지상병은 입수 후 바로 물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데 그는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갔다. 순간 선임하사 교관이 바로 물로 뛰어 들었으나 못 찾고 나오자 옆의 병사들이 그를 구하러 뛰어들었다. 필자는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지만 마구잡이로 뛰어들어서는 모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모두 나오라고 하고 수영 잘하는 요원들을 4방면에서 입수하게 했고 곧 그를 건져 내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군의관은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군의관은 구토물이 있는 지상병의 입가를 손으로 쓰윽 문질러 딱아내고 바로 입을 맞추어 인공호흡하고 이어 흉부 압박을 번갈아 반복해서 약 40분 정도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잔인한 4월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공열 상병을 데리고 떠났다. 전출을 앞두고 옆에서 함께했던 대대 정훈장교 김종오 중위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순직자의 직속 상관인 12중대장 박성규 대위는 故 지공열 상병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모들에게 엄청 시달렸다고 했다. 비록 필자 중대의 소속은 아니지만 필자의 눈앞에서 훈련중에 운명을 달리한 故 지공열 상병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평소에 군인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게만 여겼던 군의관의 순간적인 응급조치를 보면서 프로는 프로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최선을 다한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하지만 의욕에 찼던 중대종합훈련은 그렇게 막을 내리며 엉망이 되었다. 연대의 감독관이 그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덕택에 상급부대에서는 먼저 시범을 보이는 등의 조치를 한 필자를 그 사고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경고조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 삶의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옆에서 축복과 기원 해주는 분들 때문에 공직에서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이겨내… 어느덧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명동 성당에서 의아하게도 신부님 복장을 하고 있는 김종오 정훈장교를 너무도 반갑게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정훈 장교로 의무 복무를 마치고 신학교로 들어가 교육과 수련을 받고 신부가 되어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소속으로 해외 봉사 사목을 하다가 귀국해서 성모 병원 등에서 병원 사목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다시 중대장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엄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다. 그 당시 국회의원 부재자 투표시에도 못 마땅한 표정으로 관망했고, 그때 유격장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 사건시에도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금은 남태평양 오지(奧地)인 피지에서 피부색이 다른 착한 이들을 위해 사목 및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생에는 많은 불청객들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 필자가 37년의 군생활과 이후 3년간 준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배신, 직무수행에 대한 오해, 교통사고 등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만나도 이렇게 살아 남은 이유는 필자의 옆에서 축복과 기원을 해주는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오 신부는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로서 살겠다는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생각을 실천하여 지금은 보람차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도 故 지공열 순직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동안의 공직 생활에서도 불쑥 찾아오는 어떤 불청객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김종오 신부와 지금도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보내주시는 분들 덕택에 지금의 내가 있어 단지 그들께 감사할 뿐이다. 또한 훈련 중 아깝게 순직한 故 지공열 상병의 영전에 다시 한번 더 명복을 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3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생자필멸(生者必滅),거자필반(去者必返),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사의 진리 사단 구원투수로 칭찬받았지만 전출간 친구의 빈자리는 허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재자 투표가 끝나고 정상적인 부대운용으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GOP교대 준비 지시가 하달되었고 연대는 GOP투입전 교육을 시작했다. 필자가 속한 대대는 예비로 지원임무가 하달되었고, 신원조회가 통과된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은 GOP투입부대의 인원보충을 위해 전출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접 10중대장으로 근무하던 동기 고(故) 한황진 대위([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 참조)는 GOP투입 대대로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고),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라는 명언처럼 “모든 것이 무상함을 뜻한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재자 투표로 늦어진 GOP투입준비 때문에 공식적인 환송회식도 못하고 그를 아쉽게 떠나 보내야 했다. 승리부대 전입동기로 2년전 GP장 시절부터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적과 대치하는 GOP중대에서 건강하게 근무 잘하고 기회가 되면 침투하는 간첩을 잡아 영웅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이 되자 다른 대대는 GOP투입 준비에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필자가 속한 대대도 전투준비 및 부대관리에 대한 사단 감찰검열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도 새롭게 보강된 대대작전장교 지동수 소령(전 사단교육장교)이 치밀하고 깐깐하게 준비했고, 대대장의 명확한 지도가 있어 수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찰참모가 검열결과 강평시 구원투수로 부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작전장교와 보직 해임된 중대에서 몸부림을 쳤던 필자를 칭찬해주어서 보람을 느꼈으나, 왠지 GOP투입부대로 전출 가버린 인접 중대장 동기생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상호 현상태보존' 원칙을 안지킨 막사는 폐허 수준 문제병사 전입 많아 180명으로 늘어난 중대원 관리에 난감 드디어 GOP부대 교대가 이루어졌다. 중대는 대성산 전방에 위치해 유격장을 담당했던 부대에서 예비임무인 적근산 후사면의 좁고 깊은 골짜기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교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는다. 상급 부대에서는 부대교대 원칙인 ‘상호 현상태 보존 후 인원만 이동’을 강조했다. 이것은 노후 된 막사 생활을 위해 시설을 보강하고 소소하게 설치했던 편의시설과 부착물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방지하자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교대전에 지휘관들은 사전 협조회의에서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상호 약속하지만 부대원들은 새롭게 이전한 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두 떼어갔다. 따라서 상호교대 후에 지휘관들은 교대전 좋은 관계에서 교대후에는 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에도 부대 이동후 인수한 막사에 들어서니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이른 봄의 문턱에서 기온은 약간 올라 낮 양지녁에는 따사하지만 밤이 되면 전방 골짜기의 삭풍은 막사안에서도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중대원들은 1~2년 뒤에 또 이동할 막사이지만 내 집으로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마치 신축 건물에 입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강해야 했다. 전방의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다. 그래서 창문에 바람 막는 문풍지도 붙이고 당시 유일한 보온 수단이었던 페치카도 보수하는 등 분주하게 편의시설을 보강했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하나 둘 씩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GOP투입은 하였지만 추후 신원조회가 불분명하거나 사고뭉치로 판단된 병사들이 GOP에 적응을 못하고 예비인 필자의 중대로 전입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단의 감찰검열 이후 연대에서는 부적격이나 GOP근무에 회의를 품은 병사들까지 타 중대도 있는데 모두 필자의 중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들은 전입 면담부터 이러한 문제사병 관리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연대에서 중대장인 필자를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전입자를 포함한 중대원이 180명까지 늘어나자 시설도 부족하고 신상 등의 부대관리에도 부담감이 늘어나 난감할 지경이었다. 폭우로 전방 GOP철책 150m가 전도되어 경계에 취약점 발생 GOP근무 '부적격 병사'가 맹활약해 공사기간 단축에 기여 부적격 병사는 '구르는 재주' 가진 굼벵이 어느덧 여름이 되어 폭우가 일주일 동안 쏟아지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퇴근 후 관사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던 일요일 밤에 군용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중대 막사는 관사에서 약 3분 거리로 인접해 있어 전화가 뜸했는데 그것도 밤에 걸려온 전화라 급박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 연대장인데, 9중대장 지금 쉬고 있지?”하며 연대장이 대대장도 아닌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동안의 폭우로 전방 GOP철책이 대규모로 전도되어 다음날 아침에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GOP 철책복구를 위해 투입하라는 지시였다. 필자는 연대장 통화가 끝나고 바로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대장도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소대장들을 비상소집 시키고 중대로 들어갔다. GOP 철책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이었다. 중대원의 3분의 1이 새로이 전입 온 GOP 근무 부적격자로 실제 투입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보안부대 담당관은 부적격자들을 모두 제외한 인원들만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투입지역에서 근무하다 전입 온 병사와 면담을 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의 이야기처럼 그가 변심해서 월북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지만 이 병사를 제외하고 투입할 때에는 그는 중대원들에게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신을 꼭 데리고 가달라고 건의했다. 그 지형도 잘 알고 있으며 동기들도 많이 있어 이번 공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청했다. 소대장들도 그 병사가 중대 전입 후 생활을 잘했다며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중대장이 직접 관리하면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보안부대 담당관을 강력히 설득하여 투입인원에 포함시켰다. 밤새 공사도구를 점검하여 부족분은 연대에 건의하고 GOP 지역에서는 3인조 행동을 하는 원칙준수를 위해 조편성도 마쳤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연대에서 지원 나온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공사지역에 도착에서 숙영준비부터 했다. 마침 그 지역은 필자가 DMZ 에서GP 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작전시 늘 다니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위의 좌측 사진 같이 경사진 곳으로 GOP 철책 150미터 정도가 폭우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고, GOP중대에서 경계병을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숙영지 편성 중에 공사용 철책들이 도착했다. 현장지도 나온 연대장은 “최대한 빨리 철책을 설치하는데, 2주내에 완료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전도된 GOP철책 지역으로 간첩이 침투하거나 변심한 인원들이 월북하기에 용이하다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다. 중대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고 철책설치조, 시멘트비빔조, 운반조, 기타 지원조로 편성했다. 물론 GOP중대의 경계병 외에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탄을 휴대한 상태로 자체 경계조도 배치했다. 쏜 화살처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소대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야간 작업을 건의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이 "야간 작업은 병력관리에 특히 위험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간작업만 하는 것은 연대장의 조기 공사완료 지침을 해소하기에는 안일한 조치 같아 야간 작업을 감행했다. 곳곳에 횃불을 만들어 대낮같이 밝힌 상태에서 중대원들은 참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고 필자는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GOP근무 부적격자로 낙인찍혀 중대에 전입왔던 그 병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GOP 소대에서 근무용 간식인 라면과 빵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도구 등을 확보해 중대원들에게 나눠주며 그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녀 중대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 연대장이 2주로 공사 기간을 한정했던 것 보다 4일을 단축시킨 10일 만에 완료되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처럼 굼벵이(?)까지 포함된 중대원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정확히 129m, 43칸의 철책설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