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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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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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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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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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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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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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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상황판 지도에서의 설명을 잠시 멈추고 학생장교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벌어졌던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김일성의 북한군은 처음부터 다부동을 노렸다. 불과 22km 떨어진 대구를 바로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 ■ 북한군의 수암산, 유학산 선점에 당황, 또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 돌파 위기 8월12일 하달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던 왜관 북쪽 6.5km지점부터 각연대를 5~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 장군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방어선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병력은 70%가 보충되어 90~100%정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T-34전차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북한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했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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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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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호주 국립대학교 존 블랙스랜드 교수는 AISAC(국제안보교류협회)가 지난해 개최한 6·25전쟁 7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6·25참전 의의 재조명과 한국-참전국 간 안보교류협력 발전 방안’을 주제로 가장 먼저 화상으로 발표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에는 호주의 육해공군이 한반도로 갈 것 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나 6·25전쟁 발발하자 유엔의 파병 요청에 바로 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 김일성을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소련의 애완견으로 인식 1946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호주의 해군 구축함과 공군 전투기 및 수송기는 6·25전쟁 발발하자 즉각 한국의 상공과 영해 작전에 투입되었고, 육군은 새롭게 모병해서 왕립호주연대의 3개대대를 창설했는데 그들 중에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일본에서 훈련을 마치고 1950년 9월27일 부산항에 도착해서 10월10일 개성 화장산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인 후, 정주, 박천, 이천, 마량산, 가평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두 번째로 화상발표한 뉴질랜드 이안 맥기본 역사학자는 “정부의 소형 구축함 지원 결정은 야당인 노동당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유엔이 대표하는 집단안보체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였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노동당은 북한의 침략을 소련의 움직임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김일성을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소련의 애완견으로 인식했다. 헌데 뉴질랜드 공산당은 유일하게 한국전쟁 개입을 반대했는데 이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로 김일성이 침략한 것이라고 굳게 믿게 만들었다. 당시 뉴질랜드는 파병 가능한 정규군 부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18세가 된 모든 남성은 3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아야만 했고 한국군을 지원할 병력은 급조해서 창설해야 했다. 이렇게 창설된 16야전포병연대는 1950년 12월 월링톤을 출발해 한국에 도착한 후 영연방 27여단에 배속되어 가평, 마량산, 제임스타운 전투 등에서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하여 중공군 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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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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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1)]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10월,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오성산을 점령하기보다는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따른 저격능선 전투는 개시 42일만인 11월24일에 끝났다.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공격한 미9군단 예하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의 고지 셋(A·Y·돌바위) 중 두 곳(80%)을 확보했고, 중공군은 삼각고지를 방어했지만 저격능선에서 패퇴했다. 故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나를 쏴라’에서 “저격능선에서 중공군은 패배했고 희생도 아군의 2배로 막대했다. 중국이 최고 승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체 선전일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1957년 7월 김종오 5군단장이 철원 쉬리공원 옆 동산에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오만한 적 중공군과 용감히 싸운 불멸의 투혼’이라고 단호하게 새겨져 있다. 참전했던 한 노병은 "중공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깔보았고 저격능선에서 오만함이 드디어 분쇄됐다”고 말했지만 그의 낯빛이 씁쓸해진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을 역임한 김국헌 장군(육사28기)도 ‘다시쓰는 6·25’에서 미9군단의 저격능선 전투는 무모한 공격으로 실패로 끝났으며, 국군 9사단의 백마고지전투가 필사의 방어로 성공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 오성산 방어에 맞추었다. 지하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로 “동굴진지는 물이 적어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고,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며 ‘상감령 전투’를 고전 영화로도 제작하며 최대 승리라고 주장한다. 한편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는 ‘화웨이 사태가 점화한 '상감령' 역사기억의 전쟁··· 승자는?’라는 칼럼에서 “중국은 한국군 전과를 깔아뭉갠다. 2사단의 저격능선 공략은 미완성이다. 하지만 중국의 상감령 신화도 절반의 진실이다”라고 분석했다. 또한 “한반도는 기억의 전쟁터이지만 한국은 그런 문화전투에서 부실하다. 보수우파의 그런 기량은 미흡하다. 그 전투에서 밀리면 치명적이다. 가짜 평화론이 득세한다. ‘정의로운 평화’의 요소는 군사력과 안보 의지이다. 그것 없는 평화는 비굴하고 수세적이다”라고 언급했다. ‘상감령’은 역사의 시위이고 북·중 결속의 원동력이다. 한·미동맹의 기억은 소홀해졌고 그로 인한 손실은 결정적이다. 중국은 한국을 얕잡아보며 북한도 한국을 무시한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의 시대는 혼돈이 됐고, 조 바이든이 미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새로운 선택의 전환점이다. 결론적으로 박 대기자는 “역사 기억은 리더십에 지혜와 투지를 넣는다. 국민적 단합을 투사한다. 저격능선의 기억은 당당하고 상감령의 위세는 그 앞에서 주춤한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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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1)]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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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0)]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서 미 9군단 예하 미 7사단은 고전했다. 갱도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10월25일 미 7사단은 삼각고지 공략을 포기하고 그 임무를 한국군에 넘겼다. 그 직후 부임한 2사단장은 강문봉 장군은 고지의 가치는 낮은데 비해 희생이 많았기에 11월5일 삼각고지 작전을 중단했다. 한편 1952년 10월14일 시작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갑종장교 5기생인 백낙수 소위(예비역 대위)는 2사단 32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 박격포(81밀리) 소대장으로 쉴 새없이 포를 쐈다. ■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 속에서 “백 소위만 살았군!” 얼마나 박격포를 많이 쏘았는지 탄피가 동산을 이루고 포신이 열을 받아 포탄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부근에 떨어질 정도여서 할 수 없이 물통을 옆에 놓고 물을 부어가며 포신을 냉각시켰다고 했다. 포진지의 땅이 젖어 포판이 땅속으로 들어가 포를 옮겨가며 사격을 했는데, 결국 많은 사격으로 공이가 부러졌고 부속품이 바로 보충이 안 돼 나머지 4문으로만 사격해야 했다. 백 소위는 “많은 폭음과 섬광으로 고막이 터져 불러도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이 늘어갔고 눈이 멀어버린 병사도 있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적의 반격이 주춤하자 박격포 소대는 전투 임무가 아니라 보급품 수집이나 전사자를 후송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당시 판초우의에 쌓인 사체 조각들과 터진 군화 속의 발가락들이 처절한 참상을 말해주었다. 1952년 10월 29일에는 날아오는 적 포탄이 OP 부근이나 포진지 주위에 떨어졌는데 그는 “그때 1개 포반 4명이 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전사하여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었다. 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놓고 포사격을 위해 달려가던 병사가 적의 저격병에게 총탄을 맞아 ‘어~머~니~’를 외치며 쓰러지던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저격능선 전투의 마지막 날인 11월24일에도 백 소위의 32연대가 저격능선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을 확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중공군도 피해가 컸다. 그는 “갑종 동기생 3명 중 1명(박완섭 소위)이 전사하고 1명(강순형 소위)은 부상으로 후송돼 나 혼자 남게 되었어요. 17연대 동기생 3명도 그날 함께 전사하고 말았어요”라며 슬픔을 달랬다. 전투가 종결되고 9사단 28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집결지에 도착했을 때 부상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던 대대장이 다가와 “백 소위만 살았군!”하고 건넨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저격능선 전투를 마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던 백낙수씨는 “아직도 못 잊는 장면은 병사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면 대개 옷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전사자의 80~90%는 신병이야. 인간의 이성으로 죽음을 대하면 감당 못 해. 당시 이성이 마비되었다고 할까. 죽음을 의식 안 하고… 죽으면 죽었나 보다 그러는 거지. 동료가 죽어도 슬픔을 발산할 겨를이 없었어요”라고 쓸쓸히 덧붙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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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0)]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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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김정은, “K-팝은 악성 암'이고, 北여성들이 '오빠' 부르면 추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병법(兵法)을 적은 책인 ‘황석공소서’에 ‘부드러운 것이 능히 단단한 것을 이기고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柔能制强 弱能勝强)’라는 글이 있다. 이 말은 이미 노자의 ‘도덕경’에도 수록되어 있다. 노자가 말한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세상에 부드럽고 약하기로는 물보다 더한 것이 없다. 더구나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중략) 약한 것은 강한 것에 이기고, 부드러운 것은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천하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지만 능히 이를 행하지는 못한다”라며 “사람도 태어날 때에는 부드럽고 약하나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굳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도 생겨날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르고 굳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또한 군대가 강하면 멸망하고 나무는 강하면 꺾인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위치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자리잡는다”라고 했다. ■ 남한의 방송을 보다가 적발되면 최고 15년형으로 강화 지난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김정은이 K-팝을 북한 젊은이들의 복장, 헤어스타일, 말, 행동을 타락시키는 ‘악성 암’으로 규정했다”면서 “국영 매체를 통해 이를 내버려 두면 북한이 ‘축축하게 젖은 벽처럼 무너져내릴 것’이라고 경고하며 강력한 대책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지역 간 이동을 통제하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북한 주민들 사이에 한국 음악, 드라마 등에 대한 수요가 덩달아 높아졌다는 관측이다. 특히 북한 젊은층인 MZ세대들은 그동안 '반사회적'이라는 탄압에도 영화, 드라마, K-팝 등을 꾸준히 소비하고 있어 한국 대중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K-팝을 ‘악성 암(vicious cancer)’이라고 부르며 북한 내 한류의 확장을 우려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K-팝을 밀반입 했던 한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요즘 북한 젊은이들은 김정은에게 아무런 빚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정은이 가족 통치의 기반을 잃지 않으려면 젊은층에 대한 이념 통제를 더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북한은 지난해 연말부터 청년 세대들의 '변화'를 통제하기 위한 각종 조치들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12월 제정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남한 영상물 유포자에 대한 형량을 최고 사형까지 끌어올렸다. 북한전문매체 데일리NK에 따르면 과거엔 남한의 방송을 보다가 적발되면 최고 징역 5년 형이 선고됐지만, 이 법 제정 후에는 최고 15년으로 강화했다. 해당 매체가 입수한 북한 정권 문서에 따르면, 북한 청년들은 한국 콘텐츠와 한국식 말투를 검색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들어 북한 여성들은 그동안 데이트 중인 남성을 ‘동지’라고 칭했으나,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오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이런 언어들을 ‘변태적(perverted)'이라고 비판했으며, 남한 사투리를 모방하다 붙잡힌 사람들의 가족들은 경고의 의미로 도시에서 추방될 수 있다는 내용도 문서에 담겼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한국의 문화적 침공은 김정은과 북한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이긴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이란 사자성어처럼 북한 정권에 새로운 위협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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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김정은, “K-팝은 악성 암'이고, 北여성들이 '오빠' 부르면 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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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9)]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전쟁사’에는 저격능선 전투는 승리했으나,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상황이 재역전되어 “중공군의 최후 공세에 국군은 저격능선에서 전술적으로 후퇴, 싸워보지도 않은 채 적에게 넘겨줬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격능선에서 아군과 대치하던 중공군 15군단의 45사단은 엄청난 지하갱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은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250여km에 걸쳐 땅굴 진지를 구축했다. 하나의 진지는 20~30km의 종심을 가진 거대한 거미집 같았다고 한다. ■ 삼각고지 전투에서 동굴진지 폭파시킨 부하의 공을 가로채려는 상관들의 추악한 모습 국군 2사단 31연대 5중대 2소대장으로 저격능선의 삼각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이상옥 예비역 중령은 “갑종장교 25기 동기 12명이 교육을 마치고 신임 소위로 부임했는데…”라며, “당시 2사단장 정일권 장군은 신임 소위들에게 낮에는 국군 진지를 둘러보라고 시켰고 복귀했을 때 소감을 물었는데, 우리는 보병학교 전술학 시간에 배운 대로 이야기하자 정 장군은 ‘내일 너희가 가서 고쳐주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전투상황이 급해서 바로 배치됐다”고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당시 철원 평야 삼각 고지의 제인러셀 고지에 미 7사단 소속 2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공격하고 밤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쉬었는데, 어느 날 심야에 중공군이 기습해 2개 소대 미군 80명이 모두 전사했다. 삼각(제인러셀) 고지는 철원 평야를 감제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지였다. 저격능선 전투 2단계가 시작된 10월25일, 국군 2사단은 미군이 전멸했던 삼각 고지를 인수하게 되었고, 철수하는 흑인 병사 2명이 기관총과 실탄, 엄청난 양의 수류탄을 인계해주어 든든했다. 또 가슴 높이의 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여 적 포격에 대비했다. 아침 안개를 이용해 삼각 고지 꼭대기에 자리 잡은 우리 진지에서 밑으로 150m쯤 내려가 적의 움직임을 정찰했을 때, 중공군 셋이 식수를 들고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제일 앞선 자를 향해 ‘추항(투항)!’이라 외쳤는데 중공군 병사 둘이 도망치기에 사살했고 군관 1명을 생포했다. 그를 통해 알아낸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속에 1개 중대(100여 명)가 있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연대본부에서 장교 1명과 사병 9명으로 편성된 특공부대를 투입하였으나 땅굴 속에서 전원 몰살당하고 말았다. 2소대장 이상옥 소위는 “그때 우리 소대가 위치한 곳에 땅굴이 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보병학교에서 배운 대로 땅굴 폭파에 필요한 TNT를 계산해서 5~7kg 정도를 연대에 요청했는데 무려 15kg을 보내왔어. 그 무거운 것을 나 혼자 들고 갈 수 없어서 소대원 한 명과 7kg씩 나눠 짊어지고 우리 진지에서 내려와 중공군 땅굴 입구로 갔어”라며 전투담을 시작했다. 삼각 고지 8부 능선의 땅굴 입구는 적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소위는 먼저 중공군을 속이려고 진지 구축을 위한 호 파기 공사를 많이 해서 중공군 땅굴 쪽으로 토사와 바위 등을 많이 흘려보냈고 그때마다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해왔다. 그러나 호 파기 공사 때문인 것을 알고 이후 토사가 내려와도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이 기관총 사격을 안 하는 틈을 이용해 땅굴 입구까지 접근하였다.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중공군 보초병이 곤히 자고 있었다. 동행한 소대원에게 대검을 주며 “지키고 있다가, 만약 깨면 총은 절대 쏘지 마라”고 지시하고 혼자서 TNT 15kg을 지고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중공군들은 동굴속에서 똥과 오줌도 싸고, 송장도 동굴 안에 있어 썩는 악취 냄새가 심하게 진동해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다. 그때 갑종 동기생인 진찬호 소위가 동굴 작전을 한다니까 어렵게 구해줬던 방독면이 도움이 되었다. 땅굴 높이는 120cm, 좌우폭은 60cm 정도였고 한 5~6m 안으로 들어가니 땅굴이 좌우 두 갈래로 갈라졌다. TNT 두 뭉치에 기폭 장치를 한 후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자고있던 중공군 보초병을 그냥 두고 진지로 되돌아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이 폭발로 산 정상의 지형이 조금 바뀔 정도로 온 땅이 흔들리고 큰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격로에 적의 사체가 엄청나게 쌓여 있어 땅굴 폭파로 최소 100명에서 최대 150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날 저녁 화가 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2소대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적의 공격로는 급경사로 방어에 유리했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포탄이 날아왔으나 호를 깊게 파서 엄폐가 되었다. 낮에는 아군이 공중 폭격을 하니까 못 오지만 밤이 되면 중공군이 수를 세지 못할 정도로 올라왔는데, 미군에게서 인수한 기관총과 충분한 실탄 및 수류탄이 유용했다. 그날 이 소위는 전투에 임하며 부대원에게 “다쳐도, 죽어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면 후송하려면 최소 3명은 있어야 하는데 싸울 병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생존자를 확인하니 43명의 대원 중 7명이 생존했고, 나머지 병사는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로 이 소위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상옥 예비역중령은 “이 작전은 상급부대의 계획이나 지침도 없었어요. 오직 나 혼자 생각과 소대원들의 생사를 같이한 용전분투가 만들어낸 결과야. 그런데 전투후에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마치 자신이 계획입안자, 작전지휘자, 작전유공자인 양 자처하고 수훈 신청을 했어요. 부하들의 공을 가로채는 상관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라며 분노를 삼켰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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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9)]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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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스페인도 인정한 우리 영토 독도에서 올해 첫 방어훈련 실시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오후(현지시간) 스페인 상·하원 합동연설 직후 필라르 요프 상원의장, 메리첼 바텟 라마냐 하원의장 등과 함께 상원의사당 도서관을 찾아 '조선왕국전도'를 본 뒤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지도와 자위대 홍보 영상에 독도를 일본 영토처럼 표기한 데 이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직접 '독도는 한국 땅'임을 강조한 것이다. ■ 스페인,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를 제공 이 지도는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어식 발음으로 지명을 표시했는데, 당시 독도를 칭하는 우산도(于山島)를 천산도(千山島)로 혼동해 '챤찬타오'(Tchian Chan Tao)로 표기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안헬 곤잘레스 도서관장은 문 대통령에게 '조선왕국전도'에 대해 설명하고 "1730년대 대한민국 한반도의 지도인데, 한국인들에게 가장 와닿은 기록이 아닐까 싶다"고 강조했다. 안경을 벗고 꼼꼼히 지도를 살펴본 문 대통령은 "아주 소중한 자료를 보여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스페인 상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국전도'는 18세기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장 밥티스트 부르기뇽 당빌이 발간한 '신중국지도첩'에 포함된 지도다. 이 제작자는 당시 중국 실측지도인 '황여전람도'를 참고해 중국과 주변 지역을 나타낸 지도첩을 발간했다. '조선왕국전도'는 서양인이 만든 조선지도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 있다. ■ 코로나19를 고려하여 해상·비접촉 훈련 위주로 독도상륙 훈련은 안해 우리 군은 문 대통령이 스페인 상원의사당 도서관에서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료인 '조선왕국전도'를 확인한 전날인 15일 올해 첫 독도방어훈련인 '동해 영토수호훈련'을 실시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상반기 독도방어훈련에는 해군과 해경 함정 및 항공기를 비롯한 공군 전력이 투입했고 상륙부대인 해병대는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작년 하반기 훈련에는 기상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등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적은 전력이 참여했지만, 올해는 예년 수준으로 정상 시행됐다고 정부 소식통은 전했다. 다만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해상 훈련 및 비접촉 훈련 위주로 실시됐으며, 해병대의 독도 상륙 훈련은 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 방위성은 이번 훈련과 관련해 주일 한국대사관 무관을 불러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한국군이 독도방어훈련을 할 때마다 반발해왔다. 이에 한국 무관은 일본 방위성 측에 독도가 대한민국 고유영토라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정부 소식통이 전했다. 국방부는 "우리 군이 우리의 영토와 국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실시하는 주권적인 훈련을 일본 당국이 항의하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도 "해군은 매년 정례인 동해 영토수호훈련을 시행해왔다"며 "이번 동해훈련도 우리 영토, 국민, 재산에 대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시행했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1986년부터 매년 상·하반기로 나눠 정례적으로 독도방어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 군과 해경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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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스페인도 인정한 우리 영토 독도에서 올해 첫 방어훈련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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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8)]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문관혁 소위(예비역 대령, 갑종장교 25기)는 이후 저격능선 전투가 끝나는 42일 동안 고지공격과 방어전에 10여 차례 투입되었다. 문 소위는 저격능선 전투 중 11월 24일 전투를 잊을 수 없는데, 당시엔 그 전투가 마지막 전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날 저녁에 대대장이 ‘오늘 저녁은 죽더라도 A고지를 빼앗기지 마라’는 지시를 받고 소대원 30여 명을 인솔해서 A고지로 올라갔다. 자정이 되자 중공군 2개 중대가 70~80도 되는 가파른 비탈을 올라오며 공격했고 낮에 조준해 놓은 듯 포격을 쏟아내 진지에서 고개를 내밀고 소총을 쏘기 어려워 수류탄을 계속 던졌다. 임무를 교대할 때 가져온 수류탄 80발을 차례로 던졌고 7부 능선까지 올라오던 중공군들은 끝내 A고지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날이 훤히 밝자 중공군이 철수했고, 오전 9시쯤 되어 한 소대가 교대하러 오는데 2사단이 아닌 9사단 병력이었다. 문소위의 갑종 동기생인 9사단 28연대 백성기 소위가 보여 반가웠는데, 그때 대대장이 왜 그날만은 A고지를 반드시 사수하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문 소위는 A고지 사수 전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그리고 11월 25일 저격능선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해 12월 중순께 전개된 일부 탐색전을 제외하고 양측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문관혁 소위는 훗날 저격능선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군(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길 것 같으니까 중공군 전투력을 분산시키면서 저격능선을 확보할 생각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에요. 그러나 적은 유엔군이 오성산을 빼앗으려 공격하는 것으로 오해했어요. 오성산은 1069m 고지입니다. 김일성이 왔다고 해서 ‘김일성 고지’로 불렀을 정도예요”라며 “중공군은 오성산을 잃으면 중공군이 평강 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해 오성산 앞 상감령(저격능선)을 사수하려 죽기 살기로 싸웠던 겁니다. 사실 그렇게 희생할 가치가 없는 전투였는데…. 국군(유엔군)이 적 1명을 사상시키는데 실탄이 33만 발이 소모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효율성만으로 따질 수 없지만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그만큼 치열했어요. 그러나 이 전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휴전할 때 우리 땅으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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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8)]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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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7)]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반도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등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일명 다부동 볼링장전투는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리고 있다. 1989년 4월,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의 날씨는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하지만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치열했던 전쟁 역사의 현장에서 강의하는 백선엽 장군의 매서운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고, 경청하는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엄동설한의 혹한을 느끼게 했다. 특히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간과 장소, 해당 지휘관 및 장병들의 이름을 정확히 제시할 때에는 소름까지 돋았다. ■ 낙동리 부근에서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으로 북한군의 전차 대부분을 파괴 백발의 백선엽 장군은 꼿꼿하게 서서 상황판의 지도와 전투 현장을 연이어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1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전하며 낙동강을 도하하여15연대를 인동에, 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1사단을 추격해온 북한군13사단이 낙동리로, 15사단이 구미시로, 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시에 북한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6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가 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북한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날 22시에 강정 나루터로 북한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북한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시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전차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전차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전차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북한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12일,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전쟁역사에 기록된 혈전의 현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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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7)]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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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7)]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32연대 11중대에서 참전했던 문관혁 소위(예비역 대령, 갑종장교 25기)는 “저격능선 전투가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에 시작됐지만, 공격 명령은 일주일 전에 내려왔어요”라며 “연대 작전과장(변일현 대위), 대대 정보장교와 같이 저격능선과 유사한 지형을 선정했죠. 거기다 적 진지를 그대로 만들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지형을 찾아 닷새간 공격 연습을 했습니다”고 체험담을 말했다. 당시 첫 작전은 32연대 9중대가 저격능선 오른쪽, 10중대가 왼쪽, 문관혁 소위가 있던 11중대는 예비로 하는 대형으로 공격했다. 2시간쯤 지나니 9중대와 10중대가 전멸한 상황이 됐는데 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니까 아군 쪽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예비였던 11중대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문관혁 소위도 소대원을 이끌고 고지로 공격했다. 자동화기 사격과 수류탄에 의한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7부 능선까진 무난히 올라갔다. 전진 중에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폭풍 퍼붓듯이 날아오며 자동화기에 피해가 늘어나고 3.5인치 로켓포 사수마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문소위는 직접 로켓포를 메고 적 화기진지를 조준해 발사했고 자동화기 사격이 가격을 멈췄을 때 세 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한 후 그날 오후 5시쯤 점령했다. 문소위가 A고지에 올라가니, 앞서 공격했던 10중대장인 홍경태 대위가 중대원들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무전기로 계속 대대장을 호출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던 그는 “야! 이 고지는 내가 점령했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며 제정신이 아니였다. 문 소위가 A고지 위쪽의 Y고지 방향으로 전진하는데 바로 10m 전방 땅굴에서 적의 자동화기 사격이 다시 작열했다. 그곳에 2.5파운드(1.1kg)짜리 폭약에 뇌관을 꽂아 도폭선에 불을 붙여 던졌고 폭약이 터진 땅굴에 가보니 체코식 기관총 사수의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던 처절한 아비규환이었다. 그날 문 소위의 2소대는 30명을 데리고 공격했는데 8명만 살아남았고, 그들이 위치한 곳은 A고지 인근 돌바위 능선과 Y고지가 갈라지는 지점의 작은 돌출부였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밤 8시쯤 되어 무전기로 중대본부를 불렀는데 응답이 없어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적이 역습해 아군 중대는 벌써 철수했고 낙오된 상태였는데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다행히 캄캄한 밤이라 그들의 존재를 중공군이 모르고 있었다. 이튿날(15일) 새벽 2시가 되니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소위는 전투 중 명령 없이 철수하면 총살이었지만 통신이 두절돼 철수 명령을 못 받았고, 명령 불복종으로 총살당하는 한이 있어도 소대원은 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분대장 2명을 조용히 불러 ‘총소리가 나면 각자 무기를 들고 어제 아침 우리가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던 골짜기로 철수해서 집결한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생존한 소대원 8명이 기습적으로 진지를 박차고 초인적인 힘으로 경사가 70~80도의 산비탈 500~600m를 뛰어 내려가자 포위했던 중공군들도 당황해 아무 조치도 못했고 낙오자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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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7)]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