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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 M] 군인들의 유별난 지휘책임에 의한 국가위기관리의 위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월 16일 오전 4시 20분경 강원도 고성으로 ‘오리발 헤엄 귀순’한 북한 남성 A 씨를 GOP민간인통제선 감시 폐쇄회로(CCTV)로 최초 인지했다. 하지만 이후 8km씩이나 남쪽으로 더 내려오도록 허용해 경계작전은 실패했고, 이번 사건으로 경계시스템 뿐만 아니라 군 지휘보고 체계에도 허점이 드러났다. 강원도 고성지역 일대의 최전방 및 해안 경계 임무를 맡는 22사단은 ‘별들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바람 잘 날이 없는 부대이다. 지난 1984년 병사가 GP에 수류탄을 투척해 20명 가까운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월북한 사건을 비롯하여 2005년 황만호 월북, 2009년엔 민간인이 철책을 절단하고 월북하는 사건 등으로 당시 사단장이 문책을 당했다. 2012년에도 ‘노크 귀순’사건이 있었고, 2014년엔 임 모 병장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단장과 참모들이 줄줄이 지휘 및 참모 책임을 지고 보직 해임됐다. 지난해 11월엔 이 지역에서 북한 민간인이 철책을 뛰어 넘어 귀순하기도 했다. 경계가 뚫릴 때마다 문책과 대책 발표가 있었지만 개선이 되지 않자 22사단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방부는 22사단에 대해 이르면 이달 초부터 현재 병력 및 부대구조와 작전 책임구역 범위의 적정성, 과학화 경계·감시장비 성능 등의 진단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3월1일 밝혔다. 군 일각에선 22사단을 ‘재창설’ 수준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작업이 본격화 될 예정이라고 말한다. ■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없어...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에게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 사령관인 맥아더(~1951년 4월) 원수는 1.4후퇴의 책임과 만주 폭격 등 워싱턴과 반대되는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지휘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그 후임이었던 리지웨이(1951년 4~12월)와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대장은 지휘책임과 무관하게 6~8개월 동안 단기간 지휘했고, 4번째인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미 8군사령관 직책도 계속 교체 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이 부임했다. 하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는 등의 사유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 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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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1-03-15
  • [김희철의 전쟁사(86)]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하-2)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한국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 후 축차 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플리트가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전황을 유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1951년 7월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잠시 공석이 된 유엔군사령관직도 겸임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는 ‘맹조의 발톱 작전’을 하고 싶어했으나, 이미 6.25남침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미군 수뇌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밴플리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한다. 이 작전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의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돼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승리하게 된다. 이외에도 밴플리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으나, 1951년 10월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된다. 하지만 밴플리트의 공세적 작전으로 당황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미군이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 2015년 미국에서 공개된 니덤보고서는 당시 중공군 자료를 바탕으로 미군이 세균전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며, 옛 소련 문건에서도 '미군 세균전' 주장은 "잘못된 정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 6·25 남침전쟁에서 맹활약한 유엔군사령관을 포함한 미군 현역장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1952년 5월에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4번째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밴플리트는 8군 사령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또한 야전훈련사령부 (FTC : Field Training Command)를 운용했고, FTC 구성 인원들의 열정 덕택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를 제작하는 등의 노력으로 정예화된 12, 15, 20사단을 비롯한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재건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와 그가 만든 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인 밴플리트 대장은 1953년 1월 말 미 8군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에게 넘겨주고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4번째 유엔군 총사령관인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은 6·25 남침전쟁 중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유엔군을 지휘했으며 최종적으로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한편 필자는 6·25 남침전쟁사를 집필하면서 전쟁에서 맹활약한 유엔군사령관을 포함한 미군 현역장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존경심을 갖게 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소령은 미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대위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65년 7월19일)했을 때 유해를 모시고 한국에 올만큼 한국을 사랑했던 밴플리트 대장의 외아들 지미 대위도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됐다 또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했다. 그는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끝내 사망했다. 미 해병 1항공 사단장인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 소령도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미군 현역 장성 아들 142명이 6·25 남침전쟁에 참전하여, 이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헌데 이렇게 피를 흘리며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은 최근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군대 특혜 또는 회피와 대학 부정입학 등을 비롯해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일부 공무원들이 LH투기 파동에 연류된 의혹이 있어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6·25 남침전쟁 시 미국 현역 장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보였던 것과 비교되는 우리사회 일부 지도층의 잘못된 행태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 앞선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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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5
  • [김희철의 전쟁사(85)]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하-1)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육군 참모차장으로 재임 중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선에서 맹활약을 했다.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제2대 유엔군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GHQ(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 연합군을 지휘하게 됐다. 정전협상에서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개성을 대한민국이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개성을 되찾을 군사 활동 또한 계획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질려 있던 미 정부와 언론에게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반응만 나와 개성 되찾기를 결국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휴전선이 형성됨으로써 서울이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위협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등 대남 도발사를 볼 때에도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에 대한 코리안 리스크가 한국의 고질이 된 상황을 미리 식별한 리지웨이의 당시 판단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 후보에 오르게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한편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및 유엔군사령관 자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인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중장이 대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이어받았다. ■ 적군 시체나 포로를 와서 보지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포격'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 6·25 남침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플리트는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시 유명한 ‘발지 전투’를 지휘했던 밴플리트는 대전 후인 1948년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중공군의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했다. 이것은 ‘밴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밴플리트 포격’ 방식은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어 화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덕분에 사상율이 높아져 피해가 폭증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됐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무력화 되었다. 게다가 이 '밴플리트 포격'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 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한편 밴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키자고 주장했다. 한편 밴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2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3)]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 난사 및 무장탈영 사건(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전자 치인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은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적에게 조정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형인이아무형 즉아전이적분 (形人而我無形, 則我專而敵分)’이란 “적은 형체를 드러내 보이나 우리가 실제로 형체가 보이지 않게 하면, 우리는 집중할 수 있고 적은 분산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 심야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불길한 소식의 신호탄 1987년 7월 어느날, 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잠이든지 몇시간도 안되는 시점이라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수화기를 들자 당직 근무자의 전달에 눈이 번쩍 뜨여지며 토끼 눈이 됨과 동시에 주섬주섬 군복을 입으며 통화를 했다. 잠시 후 사단 상황실에는 사단장을 위시하여 모든 참모들이 모였다. 당직 근무자가 GOP 철책에서 초병근무 후 복귀하던 이진수 일병이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장 탈영한 후 도주하여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고를 했고 이미 강화된 대침투작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상태였다. 이어 정보참모가 도주 가능 거리를 분석해 보고했고, 현장에는 연대의 정보분석조와 헌병 및 군의관 등이 이미 도착하여 사고 조사와 응급 조치를 하고 있었다. 또한 연대 자체 병력으로 차단선을 형성했다는 연대장의 상황조치 보고도 있었다.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김관진(육사 28기) 작전참모는 참모장과 상의 후, 신속하게 GOP 전초대대 상황실에 사단 전술지휘소를 설치 운용할 것을 민찬기(육사 16기) 사단장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각 연대장들에게 전화하여 기상과 동시에 가용 병력을 직접지원 포병부대의 포차를 활용하여 GOP 작전지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 GOP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 차단 가장 크게 우려되는 최악의 상황은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이 GOP 철책을 넘어 월북하는 것과 도심으로 빠져나가 일반 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전방의 사단전술지휘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작전참모는 단편명령 작성을 지시했다. 필자는 그동안에 작전참모가 각 부대에 지시했던 사항들을 되씹으며 단편명령서 초안을 구상했다. 전초대대 상황실에 도착해서 바로 책상에 앉아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모의 독촉이 심해졌다. 결국 참모는 필자에게 다가와 작성 중인 초안을 보더니, 본인이 필자의 자리에 앉아 GOP 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라는 단편명령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필자에게 전해주며 신속하게 타자를 쳐서 사단장 결재 후 전문으로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창피했다. 사단작전장교이면서 단편명령서도 신속하게 제대로 작성 못해 참모가 직접 초안을 작성하게 만들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모가 직접 작성한 덕분에 시간이 단축되어 아침에 각 연대 병력들이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단편명령은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포병부대 차량을 활용해 이동한 부대들을 신속하게 GOP 철책 무명고지 총기난동 원점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연대 자체 병력이 이미 운용된 차단선을 기준으로 1봉쇄선을 선정 배치하였다. 또한 원점을 중심으로 식별이 용이한 도로를 따라 2봉쇄선을, 민간인 통제선을 연하는 지역에 3봉쇄선까지 작전배치를 완료했다. 그리고 인접 및 후방부대에도 차단선 형성과 함께 검문 검색 및 주민신고를 강화하도록 협조했다. 이것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허실편(虛實篇)에 나오는 ‘선전자 치인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처럼 무장 탈영한 이진수 일병이 마음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작전부대가 그에게 조정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의도였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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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11
  • [김희철의 전쟁사(84)]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70만명의 약 절반 병력이 전선에 투입된 4월22일 춘계공세를 감행했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서울 북방 임진강-의정부-가평-인제를 연하는 선까지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1주일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지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분석한 유엔군은 29일에 전 전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반격하여 문산과 의정부를 재탈환하며 북상했다. 이때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3일 동안 설마리 전투에서 5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는 등 처절한 피로써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국군 6사단이 졸전으로 패퇴하며 사창리가 돌파되어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연방 27여단 예하 호주 및 캐나다 대대가 진내사격 등의 선전으로 가평을 사수하였고 중공군 5차 공세의 전선분할 기도는 백지화 되었다. ■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 불구, 6사단의 용문산/파로호 대승으로 UN군 반격작전 계기 마련 이후 5차 4월 춘계 공세에 실패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고 전력의 집중 방향을 전환하여 중동부전선의 돌출되고 특히 약한 국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과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국군 5사단, 7사단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국군 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군 3군단이 배치된 현리 및 인제와 후방지역인 홍천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유일 퇴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자 3군단은 전의 상실해 6·25남침전쟁사상 가장 큰 최악의 치욕적인 패전 기록을 남겼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 대장의 뒤를 이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중장은 5월21일 3군단이 담당했던 지역을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에게 인계시키고, 5월26일 유재흥 장군이 지휘했던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로써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6사단도 중공군 4월 공세 시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 및 도주로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6사단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용문산에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방어 준비를 했고, ‘결사(決死)’ 맹세 띠를 두르고 공격해 온 중공군19병단 63군의 3개 사단을 격멸하며 ‘용문산 대첩’의 쾌거를 달성했다. 중공군 6차(5월) 공세의 한 축인 용문산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 63군은 5월 21일 새벽에 서둘러 퇴각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을 확보한 국군 6사단은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하였고 ‘파로호 전투 대승’의 신화를 남기며 UN군 반격작전 계기를 마련했다.(하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09
  • [김희철의 전쟁사(83)]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중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은 맥아더(~1951년 4월)원수를 시작으로 리지웨이(~1951년 12월)와 밴플리트(~1952년 5월) 대장이 6~8개월 동안 지휘하다가 4번째인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싸우며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 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 8군사령관들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면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중공군은 계속된 공세 감행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1950년 8월12일 미 공군은 두만강 연안 나진 일대를 폭격했다. 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던 9월11일경 중국은 북한과 미국 양측에 중재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재탈환하자 중국은 9월30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고 유엔에 경고했다. 10월3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서 중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워싱턴에 통보했다.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5차 공세(춘계공세)를 시작했다.(중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0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2)] 군인들은 잔칫날 위해 살찌우는 돼지처럼, 전쟁 등의 국가위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훈련에 전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구지(九地)편에 나오는 ‘선용병자 비여솔연, 솔연자 상산지사(善用兵者 譬如率然, 率然者 常山之蛇)’는 용병을 잘하는 자는 솔연에 비유함과 같으니, 솔연이란 상산에 사는 뱀이라고 직역이 된다. 이는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그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드는 솔연이라는 뱀처럼 몸이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적을 무찔러야함을 강조한 병법의 한가지이다. ■ 잔칫날 위해 살찌우는 돼지처럼 전쟁 등 국가위기 대비해 훈련하는 군인들 일부 전략가들은 군인들을 평소 잘 먹여 키워서 잔칫날 가족들과 손님들이 맛있게 즐기며 먹을 수 있는 돼지에 비유한다. 이는 군인들이 잔칫날 위해 살찌우는 돼지처럼 평시에 끊임없이 교육훈련을 하고 무기체계를 발전시켜 전쟁 등의 국가위기가 도래하면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겨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단급 부대에서도 동계 혹한기훈련이 끝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3~4월이면 현재의 키리졸브훈련과 비슷한 ‘비호훈련’이 시작되고, 전방을 포함한 야전부대에서 예비군들까지 동원되어 현역군인들과 함께 훈련을 했다. 더불어 4주간 진지에서 숙영하며 춘계 진지보수 공사도 진행됐다. 7~8월 즈음에 민관군 전체가 을지연습을 한다. 이를 위해 각급 제대는 사전에 부대별로 전술토의 등의 훈련 준비를 했고 상급 지휘관은 전술토의 시 각 부대의 발표 내용을 통해 얼마나 개념 있는 훈련 준비를 하는지 평가했다. ■ 전술토의는 융통성이 발휘된 창의력 싸움 “타타탁 드루룩~ 타탁 ……” 이처럼 심야에 상황실에서 들려오는 김덕수의 사물놀이 같은 연타음은 상급 및 예하부대에서 날라오는 전문을 타자로 찍어내는 소리이다. 이 소리에 반주를 맞춰가며 작전병 김병진(현재 한남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상병은 전술토의 시 슬라이드 유리판에 붙일 아스테지에 글씨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상황실 야간 당직근무자는 전화기 옆에 앉아 졸린 눈을 비비며 대기하고 있으나, 김상병의 두 눈은 반짝이며 손놀림은 학이 춤추는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에 사단장의 전술토의 발표내용 점검이 있었다. 각 연대의 발표내용을 참고했으나 종국에는 독일 군사학교에서 전술지식을 배웠고 보병학교에서 교관을 역임한 김관진 작전참모(육사28기, 전 국방부 장관)의 아이디어 위주로 착안되어 작성됐다. 발표내용은 인접부대 협조점을 통해 아군 진지로 유입되는 적 주력의 첨단을 장애물과 공격헬기로 저지하고 주변에 배치된 부대들이 진입하는 적의 옆구리를 치는 촌단 공격이 핵심이었다. 이에 더해 지평리 전투에서 크롬베즈 TF(특수임무부대)가 충격적인 돌진으로 중공군들을 완전히 제압했던 것처럼 최종적으로 전차를 동반한 TF(특수임무부대)가 스와핑 작전을 통해 적을 완전히 격멸하는 계획으로 전술토의를 준비했다. ([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 참조) 이러한 발표내용은 김 상병의 미적 감각이 더해져 빔프로젝터로 화면에 비출 때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상황판 뒤에서 작전참모의 발표에 맞추어 슬라이드를 집어주던 교육장교가 슬라이드를 꺼꾸로 넣어 화면이 뒤집혀버렸다. 순간 모두 당황했으나 작전참모는 “교육장교가 어젯밤 밤을 새워 준비하느라 피곤해서 실수한 것 같다”며 보고하자 사단장은 지금은 예행연습이니 실제 발표할 때 실수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미소 지으며 내용이 잘 됐다는 칭찬을 보내 실수가 오히려 사기 고양이 되었다. 결국 군단장을 모시고 시행된 전술토의에서는 우리 사단 발표가 단연 돋보였다. 우선 내용이 창의적으로 신선했고 김 상병의 미적 감각으로 화면이 멋있게 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 을지연습에서도 ‘솔연자 상산지사(率然者 常山之蛇)’ 개념을 실천한 작전참모 전술토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실제 을지연습이 시작되었다. 사단 예비지휘소 벙커에서 숙영을 하며 훈련에 임했는데 환기가 잘 안되어 벽에 물방울이 생기는 결로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고 습기로 인해 보고하는 차트도 축축히 젖어 있었다. 한 여름이지만 벙커 안에서는 침낭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 가능했고 눈을 뜨면 침낭은 습기로 젖어 있었다. 군대에서는 “업무를 보고로 시작해서 보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시 하루에 두 번씩 사단장에게 그동안 훈련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참모부 훈련의 중요한 일과였다. 적이 공격을 개시해 GOP가 돌파되고 FEBA전단에서 방어를 지속하다가 상급부대 훈련 유도에따라 방어 종심까지 돌파되는 상황이 되면 각 참모부는 매우 바빠진다. 전투로 피해를 입은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기 위해 상급부대에 추가 지원도 요청하고 역습계획 등 우발계획을 수립해 보고해야 했다. 오전 상황회의에 야간 상황을 종합해서 보고하는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미처 작전참모의 검토도 못 받아 참모의 질책을 받았으나, 회의시간이 되어 초안 그대로 사단장 주관 상황회의에 임하게 되었다. 역시 작전의 대가답게 김관진 작전참모는 사전 검토는 못했지만 능숙하게 지도판과 차트를 활용하여 야간 상황을 보고했다. 그런데 다음 상황 차트를 넘기자 당시 상황에 부합되지 않는 오자가 눈에 들어와 아찔한 순간을 접하게 되었다. 참모의 표정은 속으로 “이놈들 사전에 검토 받으라고 했는데 시기도 놓쳐 미리 확인도 못해서…”하며 실무자들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때 참모는 오자가 있는 차트판을 몸으로 가린 후 자연스럽게 옆 지도판을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보고를 이어갔고 재빨리 다음 차트로 넘겼다. 참모의 순발력으로 위기를 넘기고 상황회의는 무사히 끝났다. 전술토의에서 발표했던 상산의 솔연(率然者 常山之蛇)이란 뱀처럼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그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들어 공격하듯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촌단 공격 및 스와핑 작전이 훈련간 시도된 것을 보고했다. 또한 상황회의에서도 순발력으로 부하들의 실수를 커버하며 순간의 위기를 넘기는 위기 극복 및 용병을 잘하는 솔연(率然)같은 리더가 작전참모였고 이러한 그의 업무 스타일은 작전처 후배 장교들에게 산 교육이 되었다. 마치 전쟁 등의 국가위기가 발생하면 잔칫날 목숨을 바치는 돼지가 평소 살을 찌우는 것처럼 전쟁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융통성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솔연 같은 군인이 되기 위해 평소 교육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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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09
  • [김희철의 전쟁사 (35)] 밴플리트 장군과 FTC의 구성원들은 '한국군의 아버지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한창일 때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가칠봉전투에서 승리한 백남권 3사단장에게 항상 수류탄을 앞가슴 양쪽에 차고 다닌다고 ‘한국의 리지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백남권 사단장은 당시 “우리 3사단이 단시일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한 것은 현리전투 패전 후 유엔군이 주도한 FTC에서의 철저했던 훈련과 미군의 화력 및 항공 지원에 큰 힘을 입었던 겁니다”라고 승리의 원인을 사전 교육훈련과 화력지원 등 유엔군의 공로로 돌렸다. ■ 국군의 문제, 능력 있는 장교진의 부재와 훈련이 부족한 보충병 그리고 떨어진 사기 야전훈련사령부 (FTC : Field Training Command)는 백남권 사단장이 ‘가칠봉전투’ 승리 소감에서 말했던 것처럼 6.25남침전쟁 와중에 국군의 전투수행 능력을 월등하게 향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4.30)시 사창리전투에서 치욕적인 도주를 했고, 국군 3사단이 포함된 3군단은 현리전투의 패배로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UN군 전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한국군 사단들은 6사단이나 3군단처럼 중공군의 공세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전 전선에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서라면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각 부대들이 전선에서 계속적으로 훈련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방어를 위한 훈련이 강화되어야 하고 특히 대대, 중대, 소대, 분대와 같은 부대단위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군의 진정한 문제는 능력 있는 장교진의 부재와 부족한 훈련을 받은 보충병, 그리고 전반적으로 떨어진 한국군의 사기라고 판단하고 ‘51년 7월에 들면서 전선이 소강상태로 변하자 야전훈련사령부를 설치 운용하여 한국군의 재건을 시작했다. 목표는 정전 협정 체결을 위한 시간을 버는 것과 중국군의 제한적인 공격에 대해 대비하고 전력이 약해진 부대들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밴플리트를 포함한 한국과 미국의 군 관계자들은 한국군이 인력, 장비, 물자, 전투 효율성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미흡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6사단의 패배와 3군단의 붕괴는 한국군에게 치명타를 가져온 결과였고 이들은 한국군에 필요한 것은 인력과 장비가 아닌, 지휘력과 훈련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와는 달리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군의 문제를 장교단의 리더십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밴플리트 장군은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였으나 해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전선이 유동적으로 언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한국군의 자신감 회복과 사기 고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은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며 9주 훈련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제안했고 이에 따라 전선에 무조건 48시간 내로 복귀할 수 있는 위치마다 야전훈련사령부(FTC)를 4곳 개설하였다. 부평리는 미 제1군단이, 양양에는 한국군 제1군단이, 양구는 미 제10군단이, 마지막으로 사창리에는 미 제9군단이 책임지고 훈련시켜 한국군의 문제점을 해결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한국군 보충병에 대한 훈련 강화 및 교육훈련체계 재구성 2. 한국군 교육 훈련 기관의 지휘통제 일원화 3. 리더십 프로그램의 강화 4. 미군 병과학교에서 한국군 장교에 대한 교육 훈련 진행 5. 모든 한국군 보병사단에 대한 부대 훈련 프로그램 진행 또한 FTC의 구성 인원들을 한국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이들로 메웠으며 이들의 노력 덕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가 제작됐다. 사실상 이들 모두가 ‘한국군의 아버지들’인 격이다. 그들은 한국군이 다시 한 번 부활하여 전장에서 명성을 떨치기를 기대했다. 백선엽 장군은 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야전훈련사령부에서 받았던 훈련이 오늘날 육군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기초가 되었다’ 고 기술했다. 52년 6월을 기해 수도사단을 제외한 9개 한국군 사단들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밴플리트는 FTC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한국군 사단에 대한 훈련 임무를 중지하고 이들을 각 군단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FTC는 부대훈련소인 UTC로 전환되어 차후 신설될 한국군 2개 사단 및 한국군 보충병 연대에 대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하면서 한국군의 기반 재건을 확실하게 지원했다. 보병 뿐만이 아니라 포병, 공병 등 지원부대에 대한 훈련도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훈련은 유동적으로 진행되었으며 훈련에 참여하는 장병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발생하면 인력을 순환식으로 운용하여 전체 훈련과정에서 장병들이 열외되는 상황을 최소화시켰다. 또한 훈련 기간 중 경계병을 최소화시켜 최대한 많은 병사들이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지막 9주차에는 지금까지 진행한 훈련에 대해 검토한 후 연대 및 사단 참모들이 사단급 지휘소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한국군 사단들의 전투력 재건이라는 화려한 부활로 화답했다. 모든 사단들이 물자와 병력을 제대로 보충받아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특히 1사단은 전투 효율성이 70%까지 증가했고, 6사단의 경우는 85%까지 상승했다. 11사단의 경우는 100% 완편 체제를 갖췄으며 대대급 이하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 같이 사기가 고양된 한국군 9개 사단은 순차적으로 전선에 복귀했으며 ‘51년 후반기부터 실시된 고지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백남권 3사단장의 ‘가칠봉전투’ 승리는 물론, 영웅적인 ‘백마고지 전투’나 ‘베티고지’의 혈전 등은 FTC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한국군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으로 이룩해낸 승전이었으며 공산군에게 힘없이 밀리던 ‘51년 초와는 달리 ‘52년부터 한국군은 UN군 전선 주축을 담당하며 공산군의 맹렬한 파도 같은 공격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방벽처럼 버티었다. 특히 ‘52년 8~10월 사이에 이뤄진 ‘중공군의 7차’ 맹공세를 한국군이 스스로 버텨냈고 끝내 격퇴시켰다는 점은 확실히 FTC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말없이 반증하는 증거이다. ■ FTC에서 시작된 재충전과 교육훈련은 성공하는 인생과 승리하는 전쟁의 필요충분 조건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에 대해 높게 평가를 했고, 이들이 현대 기계화 전장에 대한 인식도 늘려가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지지부진하던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FTC가 운용된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중 8사단만이 1949년 6월20일 강릉에서 전쟁 발발 전에 창설됐다. 전쟁 중에는 12·15사단(1952년 11월8일)이 양양 전진리에서 창설됐고 21사단(1953년 1월15일)은 양양 조산리, 20사단(1953년 2월9일)은 양양 주청리에서 각각 창설됐다. 22·25사단(1953년 4월21일)은 현재 102기갑여단이 위치한 장산리에서 창설됐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27사단(1953년 9월18일)이 양양 송암리에서 창설됐다. 7군단(1969년 1월18일)과 23사단(1975년 8월1일), 8군단(1987년 4월1일)은 모두 양양 장산리에서 창설됐다. 102보병여단(1988년 6월1일)은 삼척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재건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밴플리트 장군과 FTC의 구성 인원들은 궁극적으로 '한국군의 아버지들' 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닌 성과를 내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0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1)] 작전장교 일과는 사소함의 연속이지만 쌓이고 쌓여 알찬 성과 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로 위나라 사마의가 대치하고 있는 제갈량이 보낸 사신에게서 “제갈량이 음식은 지나치게 적게 먹고, 일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일이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사마의는, “식소사번(食少事煩),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거로우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라며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사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끌어내어 빨리 승패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사마의는 지구전으로 제갈량이 지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신이 돌아오자 제갈량은, “사마의가 무슨 하는 말이 없던가?” 하고 물었다. 사신은 들은 그대로 전하자 제갈량도, “중달의 말이 맞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가 않다”고 말했고, 제갈량은 곧 병이 깊어져 진중에서 죽어 촉나라 군대는 철수했고 사마의는 장안성을 지켜냈다. ■ 식소사번(食少事煩)처럼 눈에 띄게 보이는 성과없이 바쁘기만 한 작전장교의 일과 “따르릉 딴따라 딴딴단…...” 요란하게 자명종이 울리는 새벽, 잠결에 손을 뻗어 자명종을 끄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이미 30분이 지났고 와이프가 흔들며 늦었다고 재촉을 했다.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주섬주섬 전투복으로 갈아입으며 현관을 나서는데 와이프가 손을 잡으며 아침을 먹고 가라고 했다. 두 수저정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아직 새벽 출근길은 깜깜했다. 급하게 상황실 벙커로 들어서자 작전보좌관 김영득 소령(육사32기)이 먼저 나와 보고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늦게 출근한 필자에게 꾸짖는 눈치를 보냈다. 작전처 요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분야들을 확인하느라 분주한 시간이 절정에 이를 즈음 스피커에서 아침 체조 집합 군가가 흘러 나왔다. 또 바빠졌다. 미처 확인 못한 부분은 당직 근무자에게 강조하고 상의를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본청 앞 광장에 모였다. 참모장 박영일 대령(육사25기 예비역 소장, 전 한국민속촌 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집합 인원들을 확인했다. 아침체조가 끝나고 사단장이 집무실로 들어가자 참모장은 모인 참모부 간부들에게 강조사항을 지시하며 아침체조에 지각한 자와 불참자를 정확하게 찍어냈다. 그들은 예외없이 참모장실에 불려가 불호령을 듣게 될 것이다. 잠시 후 참모부 주요직위자들은 다시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전일 당직근무자의 상황브리핑을 듣기 위해서 상황실 벙커에 모였다. 전일 작전결과와 당일 작전과 주요 부대운용 상황을 보고 받은 사단장이 추가 지침과 기타 강조사항을 지시하고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를 떴다. 이어 참모장이 사단장 지침에 대한 세부적인 지시와 잘못된 사항에 대한 질책을 했다.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던 아침 상황보고 시간이 지나자 창밖으로 완전군장의 간부들이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체조 불참자와 상황회의시에 지적 받은 자들이 참모장실로 불려가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들은 일장 훈시를 듣고 사단 연병장에서 벌로 완전군장 보행을 할 것이 틀림 없었다. 야간에 특별히 지시 받은 업무가 있는 장교는 보고서를 챙겨 본청 참모실로 내려갔다. 하지만 상황회의가 끝난 오전시간은 작전처 요원들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 콩나물 시루에 주는 물은 빠져 나가도 콩나물은 잘 자란다. 마침 그날은 참모부 회의가 없는 날이라 새벽잠을 설치고 아침 상황회의 준비에 바삐 뛰어다닌 피로가 밀려와 책상에서 깜빡 졸 수 있는 오전시간이 되었다. 물론 회의시 사단장의 지시사항을 조치해야 하지만 단순한 지시는 작전보좌관 전결로 처리했고, 심도 깊고 중요한 사항은 참모의 추가 지침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루 중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상급부대 실무자였다. 인접 작전장교의 전화 통에서 쌍소리가 들려왔다. “현황을 파악해 신속히 보고 못하냐”는 질책이었다. 결국 모처럼의 휴식 시간을 빼앗긴 채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 받고 상급부대로 발송했다. 사실은 결재없이 비공식적으로 보고해달라는 업무가 더 많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간부 식당에서도 참모들 자리와 실무장교들 자리는 구분되어 있다. 참모들은 식사를 하면서 사단장과의 대화를 통해 지침을 받고 구두 결재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참모들의 식사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실무자들은 식사를 빨리 끝내고 사무실로 왔다. 선배 작전장교가 건강이 중요하니 족구를 하자고 한다. 상황실 벙커의 좁은 통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야간 업무시에 간식내기 게임이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자 끝났다. 또 바빠졌다. 오후에 예하부대 작전장교 소집회의가 있었다. 4개월 뒤인 10월에 사단장 재임 기간에 한번 실시하는 가장 중요한 전투지휘검열과 곧 시행될 을지연습 준비 때문이었다. 이미 준비해 놓은 회의록에 전투지휘검열과 을지연습 일정, 주요 착안점들에 따른 각 부대별 준비사항들이 포함되었다. 예하부대의 건의 사항을 토론한 뒤 작전참모의 강조사항을 끝으로 소집회의는 성공적인 마무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 타 작전장교는 타 참모실을 순회하며 또다른 업무를 위해 작성된 보고서의 협조서명을 받아왔고 소집회의를 마친 작전참모는 그 보고서를 들고 사단장실로 갔다.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하기식 나팔소리가 부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단장실을 나온 참모는 보좌관을 통해 또 내일 아침에 보고할 업무를 지시했다. 역시 이날도 밤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켜야 할 것 같다. 자정이 다될 무렵, 낮의 족구게임으로 마련한 간식 라면을 둘러서서 먹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작전처 모토..! 오늘일을 과감히 내일로 미룬다…ㅋ”라고 이야기하자 즉각적으로 “오케이”하고 답이 나왔다. 작전장교들은 부대 정문 앞 독립가옥의 구멍가게 일명 ‘진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빨리 들어가 자고 내일 아니 오늘 새벽에 출근해야 하므로, 짧은 시간동안 두부김치에 소주를 벌컥 벌컥 마셨다. 그러면서 상급자들을 안주삼아 푸념하면서 잠시 피로를 풀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관사로 향하며 흥얼거렸다. “보람참 하루일 끝마치고서 ….”라는 군가였다. 식소사번(食少事煩)이라는 사자성어의 의미와 같은 일과(job)였지만, 작전처 요원들은 제갈량처럼 되지않고, 콩나물 시루에 주는 물은 빠져 나가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잘 자라듯이 바쁜 하루를 통해 알찬 성과를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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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김희철의 전쟁사(34)]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가칠봉은 치열한 혈전과 사투의 역사 현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원도 해안면에 위치한 가칠봉(1,241m고지)은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칠봉이 들어가야 비로소 금강산이 1만 2천봉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칠봉에서 '가' 자가 '더할 加'를 쓰는 만큼 가칠봉은 아름다운 산이지만 6.25남침전쟁 때에는 처절했던 격전장이자 혈전 사투의 현장이었다. 가칠봉은 제 4땅굴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이웃에 있는 도솔산, 가리봉과 함께 태백산맥 중앙부를 이루는 산으로 북한강의 지류인 소양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가칠봉 동쪽에서는 침식분지로 유명한 펀치볼(해안분지)이 펼쳐져 있다. 현재 군사분계선은 가칠봉 북쪽을 지나가고 있으며 능선상에 을지전망대가 위치해 사전 신청하면 민간인의 제한된 방문도 가능하다. 백골 3사단 투입 열흘만에 가칠봉 점령, 이승만 대통령 휘호 ‘지려충순(志慮忠純)’으로 격려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시작한 일명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이었다. 이 공세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3군단은 해체되었다. 국군 3사단은 현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피의 능선’을 점령한 후 펀치볼 북방의 1052·가칠봉·1211·1320고지 등에서 격전을 거듭하던 5사단과 ‘51년10월 중순 진지를 교대하여 북한군과 이들 고지들을 확보키 위한 혈전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펀치볼 일대의 요새를 계속 빼앗기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지들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아군의 공격에 안감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이러한 가칠봉·1052·1211·1252고지 등은 5사단이 한달 동안 맹공을 가했으나 적의 최후 발악적인 방어와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완전한 점령에는 실패한 곳이었다. 1052고지, 가칠봉, 1211고지 등에는 김일성 훈장을 받은 병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북한군 최정예 부대임을 자처하는 최현 중장(종전후 북한 민족보위상 역임)이 지휘하는 2군단의 예하 사단들이 필사적으로 아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의 ‘안강·기계전투’시 기갑연대장이었던 3사단장 백남권 장군은 진지를 교대한 후 22연대와 23연대로 하여금 1052고지와 가칠봉을 공격케 하고 18연대를 사단 예비로 운용했다. 공격개시 1주일만에 장춘권 대령이 지휘한 22연대가 적의 방어 벽을 뚫고 큰 피해 없이 1052고지를 점령해 버림으로써 3사단의 용명을 떨쳤다. 당시 장춘권 22연대장(예비역 육군 소장)은 5사단이 한달 동안 공격을 했어도 점령 못한 난공의 작전지역에 대해 사전 충분한 정찰과 분석을 했다. 공격을 위한 전술적인 계획 등을 치밀히 짜 놓은 후, 16개 대대의 사단 전 포대 약 80문의 포와 3만여 발의 포탄을 지원 받도록 협조도 했다. 연대의 공격 목표는 1052고지가 있는 능선을 따라 약4km에 걸쳐 솟아 있는 5개의 산봉우리들이었는데, 20초 사이에 봉우리마다 7천여발씩의 집중 포격을 가했다. 새벽 6시쯤 포격이 멈추는 순간 공격을 개시했는데 정오도 안돼서 5개 고지를 모두 점령해 버렸다. 어느 고지에서는 몇 번씩 육박전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큰 피해 없이 비교적 쉽게 점령했다. 공격 개시 전 1개 중대 병력의 특공대를 적 후방에 은밀히 침투시켜 보급로를 차단하고 교란시켰던 작전도 아주 주효했었고 돌격해 올라가 보니 고지의 호들은 우리 포격에 모두 부서졌고 박살이 나 버린 적병 시체만 나뒹굴어 포로를 한 명도 못 잡았다. 그러나 목표를 점령한 날밤 적의 기습적인 역습을 받아 가운데 고지를 빼앗겼었는데 밤새 전투를 벌여 새벽엔 다시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는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가 더 많았다. 그 이유는 적 진지들이 포격으로 다 파괴돼 버려 고지 점령 후 새로이 진지 구축하는 동안의 적 기습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김종순 대령의 23연대가 가칠봉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 두 고지 전투는 점령한 후의 영예에 앞서 눈물겨운 고투와 쓰라린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김덕준 대령(예비역 육군준장, 한국제강협회 부회장 역임)이 지휘한 진백골18연대는 예비대로 있다가 23연대와 교대해서 가칠봉 일대의 무명 고지들을 방어했는데 북한군은 매일 밤 나팔을 불며 공격을 했다. 진지 구축전에 기습을 해오자 급한 나머지 북한군이 도주할 때 미처 수습치 못한 적의 시체들을 끌어다 참호 앞에 쌓아 방탄벽을 만들며 적 공격을 방어했다. 18연대장도 훗날 증언시 “사실, 공격 때보다 고지들을 방어할 때 피해를 더 많이 보았다”고 토로했다. 역전의 백골 3사단은 10여일 만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해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1211·1320고지 등은 천연의 지형적 조건과 북한군의 결사적인 방어 때문에 점령하지 못하고 작전임무가 끝나고 말았다. 난공불락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가칠봉 일대에 3사단이 투입되어 이 같은 전승을 올리자, 유엔군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지려충순(志慮忠純)’이란 휘호를 써 보내 격려를 했다. 유엔군사령부서는 미국 은성 훈장 3개와 동성 훈장 6개를 보내 왔다. 하루 500명 사상 낸 최악의 사투, 탄우 맞으며 육박전…적 시체로 방탄벽 쌓기도 북한군들은 휴전이 되자 “6·25전쟁 중 이 1211 고지 등과 철의 삼각 지대의 오성산은 자기들이 끝까지 사수를 했다”고 호언하며 그 감투정신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가칠봉과 1211 고지일대의 전투는 문자 그대로 악전 고투였으며 처참한 산악전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아군은 벼랑 아래에서 노무자들이 로프를 타고 올라와 보급해 주는 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육박전을 계속했고, 때로는 처리치 못하고 도주한 북한군의 시체들을 주워 모아 벙커 앞의 방탄벽을 쌓기도 했다. 백골 3사단은 이 일대에서 1개 중대 병력이 40여명밖에 안 남고 하루에도 3∼5백 명의 전 사상자가 나올 때가 있었다. 가칠봉 공격시에는 전방 23연대와 방어하는 적과의 거리가 불과100야드로 대치하고 있었다. 산봉우리 위에서 감제하는 적병들은 아군이 움직이기만 하면 총격을 내리퍼부었다. 인력이 모자라 사단 본부 요원과 군악대까지 총동원해 노무자들과 함께 탄약과 보급품을 지어 나르는 데 5시간 이상 걸렸다. 따라서 사단장은 어려운 도보 보급 해결을 위해 공병대대로 펀치볼에서 가칠봉 밑의 능선까지 올라가는 도로도 개설 했다. 미군 항공 지원을 받아 가칠봉에 네이팜탄을 일주일 동안 물 붓듯 퍼붓고 공격해 올라가는데도 여전히 북한군의 사격은 계속되었다.사단장은 특공대가 고지로 돌격해 올라갈 때는 무반동총과 기관총 진지로 나가 망원경으로 확인하여 목표를 조준해주며 진두 지휘를 했다. 그리고 고지들을 점령한 후에는 적의 야간 역습에 대비하여 반듯이 해가 지기 전까지 완전 사주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다. ‘한국의 리지웨이’ 백남권 3사단장, 자결하고 싶다며 통한의 속죄 난공불락의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하자 유엔군 방송 종군기자가 3사단장 백장군을 직접 찾아와 생방송 인터뷰도 했다. 적병과 아군의 시체가 깔려 있고 구더기가 들끓는 산꼭대기에서 사단장은 제일성으로 “남의 귀한 자식들을 이렇게 죽인 것에 죄스럽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혈전 끝에 막 점령한 고지의 정상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우니 그처럼 감회가 깊을 수가 없다. 계속 진격해서 백두산 꼭대기에 대한민국 태극기를 꽂은 후 나는 내 앞가슴에 차고 다니는 이 두개의 수류탄을 뽑아 그 동안 전장에서 죽어간 내 부하들의 죽음을 속죄하는 뜻으로 자결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①지휘관의 공명심 ②지휘관의 무지 ③지휘관의 태만에 의한 훈련 부족 등으로 인한 사병들의 희생을 항상 경계했다. 나는 오늘 많은 부하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딛고 영광스러운 지휘관이 됐지만 죽어 넘어진 영령들을 바라볼 때 가슴이 메어지고 속죄의 눈물이 흐름을 금할 수 가 없다”고 고지점령 소감을 술회했다. 이때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백남권 3사단장에게 항상 수류탄을 앞가슴 양쪽에 차고 다닌다고 ‘한국의 리지웨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는”우리 3사단이 단시일에 1052고지와 가칠봉을 점령한 것은 현리 패전 후 양양 FTC에서의 철저했던 훈련과 미군의 화력 및 항공 지원에 큰 힘을 입었던 겁니다”라고 승리의 원인을 사전 교육훈련과 화력지원 등 유엔군의 공로로 돌렸다. 또한 “1211고지는 여러 번 공격을 했으나 끝내 점령을 못했어요. 이 고지는 너무 가파른 절벽이라 우리 사병들이 가까스로 9부 능선까지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던지면 도로 굴러 내려와 버리더군요.이 같은 불가항력의 지형에다 적의 발악적인 저항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어요”라며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역전의 3사단은 혈전의 ‘가칠봉전투’를 치루다가 미7사단과 진지를 교대하고 11월말 양구로 나왔는데 인명 피해가 1개 연대 병력에 가까운 전사3백여 명, 부상1천5백여 명이나 되었다. 백남권 3사단장은 휴전 후 1957년 육군사관학교 교장 재직시 화랑의 후예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 육사를 ‘화랑대’라고 명명한 것이 유래가 되어 현재까지도 이 별칭이 불리우고있고, 육사와 인접한 ‘태릉정류소’라고 불리던 경춘선 역을 ‘화랑대역’으로 변경하게도 만들었다. 부하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백장군은 육군보병학교장, 21사단장, 논산훈련소장, 6관구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전역 후 인천제철 부사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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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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