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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21)참군인 미 해군 제독 체스터 니미츠의 명예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체스터 니미츠 미 해군 제독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해군의 주역이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 척의 함정과 항공기 그리고 수백만 명의 병력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한 명의 지휘관이 담당한 것 가운데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막강한 군사력이었다. 니미츠는 초급 장교 시절에 함정을 잘못 몰아 진흙 벌에 좌초시킨 일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진주만에 잠수함기지를 건설하였으며 그 뒤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군에서 디젤기관의 일인자가 되었다.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최초로 NROTC(해군 학군단)를 창설했으며, 해군대학에서는 항공모함의 효과적인 호위진형인 원형진을 창안하였다. 그 뒤 아시아 함대의 함장과 제1전함부대 사령관을 역임한 뒤 진주만 기습 당시에는 해군본부에서 인사문제를 담당하는 항해국장의 자리에 있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니미츠를 태평양함대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전쟁 도중 원수로 진급한 니미츠는 종전 후에 해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다가 전역했으며, 미국의 유엔 대표로 활동하며 카슈미르 문제를 담당하기도 했다 . 은퇴 이후에도 니미츠에게 대학총장, 산업체나 사업계에서도 높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해 왔으나 그 제안들을 거절했다. 아들인 체스터 2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안 하시렵니까?”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의무를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하세요. 아버지에게 돈이 필요 없다면 자식들에게 주세요.” 나중에 아들은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아버지 니미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마음을 늘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태평양전쟁에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해군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 만약에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상급자로 모셨던 해군사령관이 해군사령관 이외의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해군에 대한 감정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군인의 명예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니미츠의 삶은 진정 멋있고 위대한 삶이었다. 군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은 비록 퇴역 후에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는 행동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군에 있을 때의 지위와 명성을 이용하여 일반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관례들을 상기해 볼 때 체스터 니미츠의 삶은 너무나도 부럽고 멋있는 삶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은 한 번의 실수로 좌절한 적은 없습니까? 전역(퇴역)후에도 군인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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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김희철의 전쟁사(138)]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은 훨씬 경험 많고 능력있는 미군조차 실패하여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던 상황을 신출내기 한국 공군이 해내면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고, 작전 성공 이후 오늘날까지도 평양 대폭격 작전,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과 더불어 대한민국 공군의 쾌거로 늘 회자(膾炙)되고 있다. 배우 신영균이 주연한 추억의 영화 ‘빨간 마후라’는 김신 공군대령과 유치곤 공군대위의 활약이 돋보인 이 승호리 철교 폭파적전을 각색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2월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가 있었는데 이날의 전과를 설명한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다. 이때 유엔 공군의 출격에 참가했던 한 미군 장교가 다가와서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유엔 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약 500회(소티)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게 넘겼다. 폭파임무 인계 당시에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었고, 이날 김신 대령에게 반갑게 축하 인사를 던진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고 전해졌다. 승호리 철교 폭파ㆍ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 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내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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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0
  • [평화위한 나라사랑(1)]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중)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분단의 비극을 실감하지 못하는 오늘의 세대들에게 통일은 남의 나라 얘기처럼 조금 멀거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기필코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역사를 갖게 되는 것일까? 첫째, 통일은 남북한이 과거 오랜 세월동안 하나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삶을 가티 해온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남북한은 동일언어를 사용하고 동일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동일문화를 이루어 살아왔던 민족이기에 통일은 민족지상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둘째,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격고 있는 이산가족의 간절한 염원은 통일을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한다. 남북통일은 일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소시켜주며 우리의 민족자긍심도 높여주는 최대의 과업이라 하겠다. 셋째, 효율적인 국민경제 달성을 위해서도 통일은 긴요하다. 군사력 대치로 인한 남북간의 경제발전상의 손실은 실도 막대하다. 더욱이 쌍방이 군사력유지와 확충에 쏟고 있는 비용은 국민들로 하여금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민족 모두가 보다 발전된 선진국가의 국민으로서 자유와 풍요를 한껏 누리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군사적 대결구도는 극복되어야 한다. 넷째, 한반도의 통일은 냉전대결 구도의 마지막 유물을 청산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의 평화구축은 동북아의 화약고로 불려온 이 지역에서의 안녕은 물론 나아가 세계평화와 안정을 달성하는 데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국제무대에서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구가 약 칠팔천에서 1억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본다. 그 정도의 인구는 되어야 국제무대에서 제법 큰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이 통일이 되어야 만이 선진국들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는 수준이다. 현재의 5천여만 인구와 분단된 국토로는 대한민국이 세계무대로의 진출과 세계역사의 견인차 역할에 다소간의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국토가 넓어지는 것은 물론 우리의 국력이 대륙으로, 대양으로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분단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방지하여 막강한 국력배양의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이산가족의 슬픔은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의 아픈 역사도 청산이 될 수도 있다. 특히 타고난 민족적 우수성을 발판으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한다면 로마가 세계제국을 건설하였듯 세계를 리드하는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음편 계속)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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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1-11-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8)] 필동 도로길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방사의 추가과업이라 볼 수 있는 다음날 새벽에 집단축구가 기다리고 있고 또 작전과 임무특성상 야간에도 대기를 해야한다는 책무감 때문에 모처럼의 회식이었지만 대취할 수는 없었다. 11시가 넘어가자 특정인이 먼저가 아니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쉽지만 다음 업무를 위해 귀가를 빨리하기 위해서이다. 전방 및 육군대학에 근무할 때 보다는 턱없이 적은 양의 술잔을 기울였지만 오랜만에 음주를 한 탓에 얼큰하게 취기도 올랐다. 식당을 나서 충무로 거리로 들어서자 사람들로 붐비었던 인도가 한산해지기 시작하며 일부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필동 부대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등 앞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앞에서 다가오던 취객 중에 일부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급하게 퇴근하다보니 사복으로 갈아입지 못하고 군복 차림이었다. 그리고는 취객 두세명이 필자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필자를 보던 선배들과 후배는 황당한 상황 속에 잠시 멈칮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필자의 복부와 등짝을 패대기치던 정체불명의 취객은 “야..!희철이 이새끼야..연락도 않하고... ”하며 필자를 꽈악 껴안았다. 그 취객들은 10여년전 고교 졸업과 동시에 헤어진 뒤 연락이 끊어졌던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들이었다. 거자필반(去者必返) 즉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법화경의 진리가 실현되는 해후(邂逅) 순간이었지만 당시 당황했던 수방사 작전과 선배와 후배 장교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였던 필자는 그 황당한 사건 후,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들과 돈독한 만남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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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1-09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 함흥 동쪽 흥남부두에는 1백 만 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아우성과 통곡으로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이 진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탈출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인원 58명과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선이었다. 12월 22일 항구엔 혹독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 무어 매코맥 선사의 화물선 빅토리호는 함포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선체를 선창에 댔다. 사방은 황혼에 잠기고 시가는 죽음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해군 신호등은 37세인 선장 레오나두 P. 라루에게 출발을 위해 엔진을 끄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선장은 사실 흥남 항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이틀이나 추위를 견디며 부두에 앉아 있던 수많은 피란민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제는 몇 명을 태우느냐에 있다. 이 배는 겨우 승무원 46명과 승객 12명 58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도 저 많은 군중 속에서 공산정권의 지령을 받은 프락치가 끼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또 그들의 보따리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배 바닥에는 3천 드럼의 연료용 기름이 깔려 있다. 성냥 한 개비면 이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라루 선장은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는 별안간 용기라도 얻은 듯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했다. “1만 명의 피란민을 태우시오.” 일등항해사는 그 순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정원 58명의 배에 1만 명을 태우라니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노인, 아낙네, 아기, 할아버지, 할머니.......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꼬리를 몰고 배 위로 밀려들었다. 배는 삽시간에 콩 나물 시루처럼 되었다. 선장 라루는 피란민의 승선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일등항해사는 1만 2백 명까지 세고는 더 이상 헤아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빅토리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오후였다. 그 무렵 1백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있던 부산항은 이들을 맞아들일 곳이 없었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먹밥을 배위에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선장 라루도 그 일을 거들었다. 피란민들에겐 흥남 출발 이래 첫 요깃거리였다. 빅토리호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미 육군에서 운영하는 거제도의 수용소로 향했다. 12월 26일 피란민들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두 대의 LST에 옮겨 탔다. 한 배에 7천 5백 명씩, 그 수는 1만 5천 명에 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세운 믿기 어려운 기록은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독자 여러분이 라루 선장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념이 기적을 낳는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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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1-09
  • [평화위한 나라사랑 (1)] 민족번영으로 가는 또 하나의 힘(상)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대륙을 질주하던 말발굽 소리 대양을 누비던 웅장한 민족혼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지켜온 반만년 역사 그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자랑스러운 그 이름 우리 한민족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분단의 아픔 속에 살아야만 하나? 잘린 국토의 허리를 잇고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한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민족정기를 이어나가야 한다. 더 이상 갈라진 남과 북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통일로 가야만 한다. 한-민-족...! 자랑스러운 그 이름으로 21세기 세계 속에 우뚝 솟을 위대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분단 비극 시작 반만년 유구한 우리의 역사, 한민족은 항상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자 세계 최고의 문화를 갖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이다. 서구에서도 가장 오랜 단일 민족국가라는 영국의 역사도 900년에 불과한 반면 한민족은 반만년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민족이자 통일신라 이후 1300여년을 단일민족국가로서 역사를 이어온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민족이다. 특히, 반만년의 긴 역사를 불굴의 저항정신과 진취적 기상으로 올곧게 지켜온 민족이기도하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내부혼란으로 세계사의 흐름, 주변국의 정세를 알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조선의 국운은 자꾸만 쇄락의 나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구의 열강들이 세계무대로 진출하고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문호를 개방하며 국력을 비축할 때 계속되는 당파싸움과 60여년에 이르는 세도 정치로 조선의 국가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중앙정치의 문란과 함께 부패한 지방관과 탐관오리의 득세,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부정부패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이어지며 당시 민중의 고통은 극에 달했는데 역사는 당시의 상황을 “흉년과 전염병, 도처에 도적떼가 출몰했다.”는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1910년 구한말, 나라를 지킬 힘이 없었던 우리민족에게 일제치하 35년간의 고통과 비참함은 물론 자랑스러운 우리민족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만다. 그리고 1945년 8월 마침내 꿈에서도 그리던 조국광복이 찾아왔지만 한민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35년에 이르는 일제의 만행 속에 자주적 국방력과 힘을 갖지 못한 우리민족은 외부의 상황에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과 5년 후, 공산진영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은 동족 간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새기고 만다. 그렇게 조각난 상태로 살아온 세월 70여년의 분단 상황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단절시킨 채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민족과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참담하고 부끄러운 역사가 되고 있다.(다음편 계속)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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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1-11-08
  • [김희철의 전쟁사(137)]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④
    [시튜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북한과 중공군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경의선과 만포선을 통해 평양으로 수송했고, 이를 다시 평양에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기존 승호리 철교의 폭파ㆍ차단작전을 시행했으나 북한은 기존 철교 위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미터 지점을 우회해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10개의 교각은 침목을 우물 정자(井) 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공간에는 모래주머니를 채워 폭격이나 기총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건설됐다. 미 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미 전폭기 B-29까지 동원하여 500회(소티)에 달하는 폭격을 퍼부었음에도 파괴에 실패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이 작전임무를 한국 공군에 이양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 대령은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이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12일 아침 7시 40분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했다. 드디어 편대는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승호리철교 표적의 상공에 도착했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 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윤응렬 대위가 지휘하는 3기 편대(2번기 주영복 대위, 3번기 정주량 대위)가 재차 폭격을 시도했으나 교각 위의 철로만 손상을 입혔을 뿐 교량 폭파에는 또 실패했다. 첫날 임무에 실패한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당시의 미군 전술로는 철교 폭파가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결국 조종사에게는 적 대공포에 피격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명중률을 크게 높일 수 있도록 저고도 폭격 방안인 4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월15일 오전 8시 25분 엄동설한으로 살을 에는듯한 한파 속에 투철한 감투정신으로 무장한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2번기 정주량 대위, 3번기 장성태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2번기 유치곤 대위, 3번기 박재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는 승호리철교 표적 상공에 도착했다. 먼저 제1편대가 적의 심한 대공 포화를 피해가며 편대장기를 선두로 기수를 목표에 맞춰 진입해 로켓탄을 발사하자 철교의 경간 2개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어 제2편대가 표적을 향해 진입하자 1편대는 2편대를 엄호하기 위해 잔여 로켓탄과 기총을 적의 대공포 진지를 향해 발사했고 유치곤 대위가 포함된 2편대는대공포화의 위협을 무릅쓰고정확한 조준 하에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했다. 이때 명중한 2개의 교각 경간이 파괴되면서 철편이 허공에 솟아올라 떨어지고철교의 중앙에는 2개의 큰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우리 공군은 출격한 지 14회(소티) 만에 승호리 철교를 파괴시키는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날 F-51기 6대는 폭탄 12발, 로켓탄 20발, 50밀리 기총 4700발을 사용해 승호리 철교 폭파 외에도 포진지 6개소, 보급품 집적소 1개소, 벙커 3개소, 건물 1개 동을 파괴하는 성과도 거뒀다.(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11-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7)] 필동 도로길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대부분 부대의 작전분야 보직자들은 정상 출퇴근이 어렵다. 주변 상황이 유동적이기 때문에 항상 대기하고 전방이나 후방에서 불미스런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상황실에 위치하여 긴급 초동조치를 한다. 당시 수방사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불법 도발뿐만 아니라 도심에서 발생하는 우발사태를 항상 관찰하고 부대운용을 검토하여 지휘관에게 건의하여 결심을 받은 후 예하부대의 시행을 확인하며 통제까지 해야한다. 특히 수방사의 소요진압 임무를 담당했던 필자는 경찰과도 긴밀하게 협조하며 적시적인 상황조치를 할 수 있도록 24시간 대기 상태로 생활했다. 부대 전입한지 수개월째 지날 즈음, 작전과 선임 장교가 그동안 고생했다며 후배장교의 육군대학 입교 축하 및 전출 회식을 겸해서 격려 자리를 주선했다. 퇴근 시간이 다되어 하루 일과를 정리한 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당직 근무자들에게 비상 연락체계를 재차 확인한 다음에 모처럼의 회포를 풀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작전과의 근무 여건상 오후 9시가 넘어서 사무실을 나왔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지만 정치는 시끄러웠고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는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었다. 그래도 충무로와 명동은 여유를 즐기는 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경제 발전으로 인해 윤택해지는 국민들의 삶은 눈에 띄게 선진화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충무로의 구석의 비교적 조용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하며 조촐한 술자리가 펼쳐졌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1-05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⑲배짱있고 냉엄한 장왕의 배려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 년쯤 전인 춘추시대, 초나라에 장왕(莊王)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나타나 후진국이었던 초나라를 최강의 나라로 끌어올렸다. 장왕은 수완 있고 냉엄한 인물이었다. 냉엄한 인물이란 일반적으로 그 날카로운 기백에 의해 부하를 벌벌 떨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으로 복종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장왕은 그 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날카로운 사람이면서 느긋한 배짱도 있었기 때문이다. 장왕이 어느 날 밤, 신하들을 모아놓고 술을 대접하면서 “오늘 밤은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즐기려 하니 마음 놓고 마시도록 하라.”고 했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방안의 모든 불이 갑자기 꺼져 버렸다. 바로 이 때다 하고 왕의 애첩을 희롱한 사내가 있었다. 애첩 또한 대담한 여성으로 그 남자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장왕에게 아뢰었다.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옵니다. 체포하십시오.”그러자 장왕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주연을 베푼 탓으로 일어난 것이니, 여자의 정조를 중히 여겨 부하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애첩을 타이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밤은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즐기는 주연이다. 모두 갓끈을 잘라 버려라!” 불이 켜진 뒤 보니, 신하들 중에 누구하나 갓끈이 붙어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 후, 장왕은 진(晋)이라는 강대국과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아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장수가 있었다. 그 장수의 활약으로 결국 진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장왕은 그를 불렀다. “그대 같은 용사가 있었음을 미처 몰랐다는 것은 내가 부덕한 탓이야. 그런 나를 원망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워 준 것은 무슨 연유인가?” 묻자 그는 엎드려 대답하였다. “저는 한 번 죽었던 몸입니다. 술에 취해 무례를 저질렀을 때, 임금님의 배려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때부터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날 밤, 갓끈을 뜯긴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작은 일까지 하나하나 들추어내어 허물을 잡는다면 부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을 얻을 수 없다.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어야만 부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장왕의 일화는 말해 주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부하들의 실수를 한 번쯤 용서해 준 적이 있습니까? 부하들로부터 신뢰받고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11-05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⑱워털루 전투의 웰링턴 공작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한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다. 그는 1815년 6월 18일, 원군을 데리고 달려온 프로이센의 장군 게프하르트 폰블뤼허 후작과 힘을 합쳐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워털루 전투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겼다.” 이튼이란 웰링턴 공작이 수학한 학교를 말하는데, 상류계급을 위한 예비학교로서 럭비가 유명하다. 즉 그 학교 재학 중에 국기(國技)인 크리킷(cricket)이나 럭비로 다진 정신과 육체가 워털루의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는 뜻이다. 영국인의 명예존중 정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루한 참호전이었다. 개량된 독일군의 화력 앞에 영국의 구식 대포와 소총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초기에 치솟던 사기도 형편없이 떨어져 참호 속에서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 지휘관들은 국면을 전환시킬 묘책을 궁리했지만 적의 막강한 화력을 뚫고 돌격을 명령하는 것은 무리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한 젊은 장교가 일어서더니 군장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케임브리지 출신들은 모두 나와라! 겁쟁이는 케임브리지 동창이 아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장교가 있는 곳으로 장교와 병사가 모여들었다. “옥스퍼드의 제군들이여!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다. 옥스퍼드의 명예를 우리가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삽시간에 두 대학 출신 장교와 병사가 두 패로 모여들었고 남은 병사들도 모두 참호 속으로 나와 있었다. 럭비선수였던 고급장교가 입을 열었다. “옥스퍼드의 이름을 걸고 함께 돌격한다. 비열했다는 오명을 남기지 말자. 우리는 오늘 피로써 옥스퍼드의 명예를 지킨다.” 저쪽에선 축구선수였던 젊은 장교가 목청을 높였다. “케임브리지의 명예를 걸고 적진을 돌파한다. 후세에 손가락 받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라. 쓰러지더라도 놈들의 저지선에서 쓰러져야 한다. 알았나!” 그리하여 영국의 병사들은 이색대열을 형성하고 돌격선의 앞에 섰다. 소대도 분대도 아닌 출신학교끼리 모여 대열을 형성한 것이다. 이윽고 명령이 떨어졌다. “케임브리지, 돌격! 앞으로 돌격!” “옥스퍼드, 돌격! 앞으로 돌격!” 명예를 소중히 하는 정신은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1차 대전 당시 보여 준 영국군의 이 일화는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대의 명예를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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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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