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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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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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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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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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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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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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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⑰타이타닉호의 선원들, 죽음을 앞두고도 헌신적인 구조활동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14일 23시40분 북대서양 해상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영국의 호화 여객선이다. 4만6328톤의 여객선은 당시 세계 최고속의 여객선으로서 불침(不沈)이라고 믿어졌지만 어이없게도 첫 항해에서 조난을 당하여 1513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은 죽음을 앞둔 선원들의 헌신적인 구조장면이다. 선원들은 빙산과 충돌한 직후에, 배는 침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16척의 구명보트, 4척의 접는 보트의 수용능력에 비추어 승객 중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는 배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절대 절명의 현실로 다가섰는데도 선원들은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구조작업을 진행하였다. 승객에 앞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선원은 한 명도 없었다. 죽음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 그 절망의 순간에도 선원으로서의 임무수행에 사력을 다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것은, 책임과 의무는 죽음 앞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원들은 선원의 의무와 책임 때문에 비겁하지 않게 자기희생을 택했다. 승객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 군인의 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저수지의 뚝 방도 조그만 구멍에 의해서 무너지고 건물의 벽도 별 돌 몇 장이 빠지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군인 개개인의 책임은 준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자기 신념화되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은 타이타닉호의 영화를 감상하고 무엇을 느꼈습니까? 여러분의 책임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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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⑰타이타닉호의 선원들, 죽음을 앞두고도 헌신적인 구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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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5)]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에 전투기가 한 대도 없던 우리 공군은 미군이 제공하는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 고(故) 이근석 대령을 포함한 10명의 인수요원을 선발했다. 김신 중령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의 인솔하에장성환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김영환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 등 선발된 인수요원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김신 중령은 일본에서 인수받은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해 귀국한 다음날인 7월 3일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백범의 아들이기 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 걸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첫 비행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단장이었던 이근석 대령은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를 맞았다. 그는대공포에 엔진이 명중되자 탈출하기는 커녕 적군 전차부대 한 복판으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했다. 이때 이 대령은 “3번기 왼쪽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이같은 희생적 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로 기록됐다. 이근석 대령은 나중에태극무공훈장 수훈과 함께 장군으로 추서됐으며, 공군은 58년이 지난 2008년에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비행한지 몇 일만에 최고참 이근석 장군의 전사로 한국공군은단독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도 쫓겨났다. 사천비행장의 부족한 활주로로 인한이착륙의 어려움은 감수하더라도, 한때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오면서 위태롭기도 했었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들이 대량 육성되어 F-51 무스탕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공군의 단독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 토벌을 통해작전능력 향상과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김신 중령도 1951년 10월까지 공중전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회 출격하며 지리산 공비 토벌 항공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김신은 고참이 되면서 직접비행을 통한 전투 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으나 전투 의지는 매우 강했다. 특히 1952년 1월, 김신 대령이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 유엔군이 500회 넘게 출격하면서도실패한평양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을 지휘해 한국공군 단독으로 성공함으로써 우리 공군의 위상을 높힘과 동시에 전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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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5)]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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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⑯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 발굴시 발견된 파수병의 상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이탈리아 나폴리만에 있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를 발굴하던 때의 일이다. 발굴 작업 중에 용암으로 응고된 창을 든 파수병의 상이 나타났다. 뜨거운 용암이 사방에서 덮쳐 오는 죽음의 순간에도 파수병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명령받은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회의장 앞에서 꼿꼿이 선채 용암에 묻혀 버렸다. 당시 함께 발굴된 많은 사람들의 화석은 하나같이 그 모습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발버둥 치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파수병의 모습은 어찌나 의젓한지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부여된 책임은 기필코 완수하고,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는 엄정한 군기를 가진 군대만이 전쟁에서 필승할 수 있다. 군기가 확립된 군대는 전쟁에 임했을 때 어떤 화기 보다도 막대한 힘을 발휘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반대로 군기가 문란한 군대는 전시에는 패하고 평시에는 국민에게 지탄받는 대상이 되고 만다. 군기가 확립된 군대에서는 부하는 상관을 존경하고 상관은 부하를 믿으며, 상하가 스스로 일심동체가 되어 일정한 방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게 된다. 독자여러분은 상관이 지시를 하고, 취소나 종료를 얘기하지 않고 떠났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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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⑯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 발굴시 발견된 파수병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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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5)] 새로운 환경에서의 색다른 추가 과업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원들을 태우고 복귀하는 버스가 매산리 읍내를 벗어나 서울시내 필동의 수방사령부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잠시 공수훈련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즐거웠던 시간은 흘러가고 또다시 바쁜 업무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인지하게 했다. 공수훈련, 소요진압 및 경호업무와 부가적인 집단축구 등을 비롯한 수방사의 색다른 추가 과업들은 업무 시간을 빼앗는 불편은 있었지만 부대원들에게 추가적인 혜택도 병행되었다. 분기별로 공수낙하(점프)를 하면 특전부대원들이 수령하는 점프수당이 훈련에 참여한 대원들에게 지급된다. 또한 경호업무를 수행하다보니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야전부대원들이 못 받는 약간의 경호 수당도 매월 받았다. 하지만 액수가 적다보니 간부들 사이에는 ’쥐꼬리 수당‘이라고 불렸다. 공수훈련 후 처음 받아보는 특전사 점프수당과 경호부대 특별수당(쥐꼬리)의 단 맛, 이것이 야전에서 동경하던 수방사 근위부대 혹은 아스팔트 군인의 진면목인지 모르겠으나 이 수당들은 간간히 동료들과 소주 한잔 정도는 할 수 있어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물론 가족에게는 비밀로 한 채 당분간 사용했는데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대부분의 간부들이 군인 아파트에 같이 살다보니 필자의 가족도 다른 동료의 가족을 통해 ’쥐꼬리 수당‘에 대해 알아버렸다. 그날 ”수당을 받고 왜 감추었냐?“고 추궁했지만 결국 수당을 필자의 용돈으로 인정을 해주어 다행히 해결되었다. 아뭏든 근위부대인 수방사의 추가과업은 웃고 우는 많은 애피소드를 남긴 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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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5)] 새로운 환경에서의 색다른 추가 과업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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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4)]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시절에 이미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 혜안의 영향을 받은 차남 김신은 1937년 일본 공군이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공군 조종사가 돼 조국 독립에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인 김구 주석과 함께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비밀연락 임무 등을 수행하면서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은 1944년 중국 공군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47년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하며 조종사의 꿈을 이뤘다. 귀국 이후엔 육군항공대에서 활동하며 1949년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으로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인물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 6·25남침전쟁 때 한국 공군으로 첫 출격한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중령 아버지인 김구 선생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김신은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하고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됐다. 비록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한 뒤에도 조모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하여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면서 군사 교육 및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를 했는데, 당시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 항공사령관 이영무 대령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 그들은 대한민국 공군 발전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의해서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 10인의 요원으로 선발된다. 당시그는 중국군-미군 유학과정에서 무스탕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러 갔을 때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공부했던 무스탕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고 한다. 그는 공군 조종사로 6·25 남침전쟁 초기에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문제를 생각한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로여겼을 수도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도 참가했다. 영화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이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 대통령입장에서 볼 때도 김 장군은 정치관이확고해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기술관료의 자질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공군총장까지 역임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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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4)]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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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지휘관 또는 장교간의 불화나 분쟁은 부대 군기에 커다한 악영향을 끼친다. 지휘부나 장교단에 대한 갈등과 마찰은 부대 전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키며 군기를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한 예를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호의 침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유명한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북대서양을 단독으로 순항하고 있을 동안 그 전함 내의 승무원 사이에 군기가 이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생존자들을 통해서 밝혀졌다. 처음 승무원들은 그들의 함이 불침함이라는 신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출항하였다. 또한 첫 해전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호를 격퇴시키고 후드(Hood)호를 격침함으로써 사기충천하여 승리감이 최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후 루에트엔스(Luetjens) 제독과 비스마르크호 함장 린데만(Lindeman)대령 사이에 있었던 의견충돌은 장병들 사기를 급작스럽게 저하시키고 불안한 정신 상태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투 중 포수가 자기 위치를 떠나 살길을 찾으려고 도망치고, 장교들은 포탑 위에서 포수들이 지정된 정 위치에 붙어 있도록 위협사격을 하는 등 함 내의 전투군기가 엉망이 되었다.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 또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구박했던 사람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사고가 장병들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 호는 전력이 훨씬 약한 로드니(Rodney)호와 킹 조지(King Geroge)5세 호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비스마르크 호의 침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군대 병영 내에 군기가 이완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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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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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4)] 새로운 환경에서의 색다른 추가 과업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관생도 시절에 특전사 공수교육시 4회의 기본 공수낙하(점프)를 해보고 거의 9년 만에 다시 하늘에서 낙하산을 펼쳐며 뛰어내렸다. 선배들의 손에 끌려 교육대장실에서 환담을 하는 바람에 사전 준비운동도 안전교육도 없이 공수낙하(점프)를 하게 되어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창공을 박차고 뛰어내리자 잠시 후 낙하산이 펼쳐지고 아래를 내려볼 때의 쾌감은 24시간 대기하며 근무하는 수방사 작전장교의 스트레스를 한번에 날려보내고 심기일전하여 다시 힘차게 일을 시작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게다가 착지할 때 골절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9년 전 수료한 공수교육시에 조교들이 혹독하게 훈련을 시킨 덕택으로 동작을 잊지 않고 땅에 닿자마자 몸을 굴리며 다친 곳 하나도 없이 공수낙하(점프)를 종료했다. 헌데 육대에 입교 예정인 한 장교가 지상으로 착지 중에 발목 골절 부상을 당해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하는 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부들은 성공적으로 공수낙하(점프)를 종료하고 복귀하기 위해 대기하는 차량에 올라타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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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54)] 새로운 환경에서의 색다른 추가 과업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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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러시아 표트르(Pyotr) 대제의 황태자 알렉세이(Aleksei) 대공이 해군사관학교 생도로서 군함을 타고 있었을 때 그의 군함이 덴마크 근해를 항해하다 암초에 걸렸다. 이 때 함장은 우선 대공을 구하려고 먼저 내린 보트에 타도록 권했으나 대공이 듣지 않으므로 함장은 “대공이라 할지라도 본관의 지휘하에 있는 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알렉세이 후보생! 보트에 타십시오!”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대공은 “귀관은 상관이다. 다른 일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복종하겠지만 이것은 제왕의 의무로서 복종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군함은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병과 사관들 모두가 군함에서 내린 후 대공은 마지막까지 남은 함장과 함께 보트를 탔다. 상륙하자마자 함장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죄로 대공에게 일주일간의 금고를 명했다. 표트르 대제는 이 사실을 듣고 “나는 불복종의 죄인인 대공에게 금고를 명한 함장의 공정한 처벌을 기뻐하고, 또 내 아들이 불복종한 행위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두 사람에게 상을 내렸다. 여기에서 만약 함장이 알렉세이 대공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처벌을 하지 않았다면 후에도 함장은 다른 사람을 처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벌은 언제나 공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강이 확립되고 규율이 선다. 규정과 법률은 누가 먼저 지켜야 한다고 봅니까?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때 어떠한 조치를 취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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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⑭표트르(Pyotr)대제의 공정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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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3)] 안정화 작전중이던 군사경찰,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9년 7월, 33년전 아버지가 지휘했던 중동부 최전선 보병연대에 아들이 다시 연대장으로 지휘봉을 잡게 돼 화제가 되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화제의 주인공은 육군산악부대 예하 연대의 37대 연대장으로 7월20일 취임했던 김봉환(육사34기) 대령이었다. 김대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시절 축구 골키퍼로 지금은 없어진 ’3군사관학교체전‘에서 맹활약하여 선후배에게 신화로 각인된 만능 스포츠맨으로 경호실 등 전후방 각지에서 작전전문가로 근무했다. 지난 1966년 아버지 김촌성(육사8기.예비역준장)씨가 14대 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초등학교 5년생으로 장병들과 함께 생활하던 바로 그 부대에 다시 연대장이 되어 33년만에 돌아왔다. 또한 김대령이 1997년 2월 육군대학 공격학처 교관으로 부임할 당시에도 사상 첫 육군대학 2대 교관 탄생 기록을 남겼던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 및 본인 3대가 육군 장교로 근무한 전형적인 무관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김촌성장군은 1948년 육사에 입학해 ’49년 1월 육군 기병소위로 임관, 다음해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 등 많은 훈.표창을 받았으며 전후방 주요 직책을 거쳐 아들이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79년에 준장으로 예편했다. 지난 1944년 조선 신궁체육대회 중장애물 승마경기에서 일본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하기도 한 김장군은 예편후 LA올림픽 한국승마선수단 감독, 서울올림픽 승마경기 국제심판으로 활동했으며 국제승마협회 공인국제심판도 역임했다. 조부인 故 김인영 예비역 헌병중령(헌병3기)은 아들보다 늦게 1950년 1월, 47세의 나이에 헌병대위로 임관, 치안경비와 포로 후송을 위해 창설된 헌병사령부 예하 2대대 9중대장으로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당해년도 10월21일 강원도 철원군 금화읍 읍내리에서 치안경비와 포로후송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김봉환 장군은 37연대장 취임시 "어릴 적 뛰놀던, 아버지의 땀과 열정이 배어있는 부대를 지휘하게 돼 기쁘다"면서 "최강의 전투부대를 만들기 위해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김 장군의 보이지 않는 노력으로 매년 ’금화지구 희생 헌우(군사경찰 전우) 추도식‘이 매년 지속되어 잊혀지기 쉬운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후배 장병들에게 군인으로써 호국정신과 애국심 및 희생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으며 3대를 잇는 육군장교 가문으로 작금의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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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이스라엘이 아랍권의 13개국과 전쟁을 할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었던 다얀 장관은 전 세계를 향해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막강한 최신무기로 무장하였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연합군을 수 시간 내에 물리칠 것이다.” 이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에 퍼지자 미국과 구소련 등 강대국까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핵무기 또는 그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무기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이스라엘이 개발한 신무기를 알아내려고 노력을 했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신무기를 사용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후 다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단 세 시간 만에 승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최신무기 덕분이다. 이스라엘 전군의 가슴 속에 비장되어 있던 그 무기는 바로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결국 불타는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심은 몇 십 배나 되는 적군을 단 시일 내에 무찌를 수 있었던 가장 강한 무기였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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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⑬이스라엘 다얀 국방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