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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①아이젠하워 대장의 멋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가을 아이젠하워(Eisenhower)대장은 29사단을 방문하였다. 진흙투성이의 미끄러운 언덕에서 병사들과 이야기를 마친 후 군용차가 있는 곳으로 뒤돌아가던 아이젠하워는 진흙길에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막상 장군이 일어나 그들을 바라보자 병사들은 행여 야단이라도 맞을까 보아 입을 다물고 일순 긴장했다. 진흙투성이의 아이젠하워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쟁 중에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하고, 또 이렇게 여러분을 웃겨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오늘 방문이야말로 대만족일세!” 연합군이 라인 강을 건너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몹시 침울해 보이는 한 병사를 만났다.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하고 아이젠하워가 묻자, 병사는 “장군님, 겁이 나서 그렀습니다. 저는 두 달 전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내내 입원해 있다가 어제 퇴원했는데 또 전투에 나선다니 별로 기분이 좋질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이젠하워는 병사의 소심함을 꾸짖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와 나는 좋은 짝이군. 사실 나도 겁이 난다네.” 장군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공격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우리에게는 독일군을 격퇴할 항공기와 막강한 공수부대도 있다네. 우리가 함께 강을 따라 걷다 보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걸세.” 1945년 1월 연합군이 파리를 통과할 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는 전방에서 필요한 O형의 피를 급히 요청했다. 곧이어 많은 지원자들이 진료소에 줄을 이었다. 그 속에는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사령관도 끼어 있었다. 아무도 그가 최고사령관인 줄을 몰라보았지만 헌혈을 하고 나오자 줄을 서고 있던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가 뒤에 있는 다른 병사에게 말했다. “저 피를 내가 수혈 받는다면, 내 몸에 장군의 피가 흐르는 건데.”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 나쁜 성격은 닮지 않았으면 좋겠네.” 예화에서 보여주는 아이젠하워 대장의 멋은 병사들을 위해 걱정하고 보살피는 부하 사랑과 더불어 급박한 전황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삶의 여유에 있다. 우리는 부하들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풀었으며 진정으로 하급자를 사랑하고 있는지요...? ◀유철상 프로필▶ 現 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학군23기/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10-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9)] 수방사 장병들이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특별한 복장(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1연구소장] 육군대학에서 차후 근무지인 수방사 명령을 받을 때 주변 동료들의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잔디는 푹신한 침대같이 편해 보이지만 실제 잔디에 앉아 있으면 벌레와 오물이 득실거리는 불편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수방사 작전과의 근무는 특이한 카키색 복장으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같이 멋있어 보였지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대통령을 경호하고 수도서울을 방호하는 임무는 대단히 중요하고 자긍심이 넘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견 간부인 소령이라는 계급은 단지 생도생활 시절의 1학년 생도처럼 최하급자로서 선배들의 매서운 군기와 질타 속에 근무하는 위치로 하향 보직된 기분이었다. 지난 8년간의 GOP 전방부대 생활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보람차게 근무하여 자신감이 넘쳤었다. 하지만 기존에 근무하는 많은 장교들이 위관 시절 그곳에서의 근무 경험이 있어 그들만의 기득권을 뛰어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필자의 성공적인 야전부대 작전분야 경력이 고려되어 수방사령부로 보직을 받았는데, 이곳의 임무는 북쪽의 적에 대응하며 전투준비를 하는 것에 추가하여 소요진압 및 시가지 전투준비 등 야전부대 근무와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대침투작전 및 소요진압 관련 임무를 수행하는 필자에게는 다른 장교들과 달리 추가로 휴대하는 장비가 있었다. 서울 시내의 시위 및 소요발생시 경찰력이 부족할 때 소요진압부대로 출동할 것에 대비하여 경찰의 출동 사항을 항상 감지하는 경찰 무전기였다. 아마도 지금은 이러한 시스템이 군부대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정권 당시에는 “충성은 금석을 뚫는다”는 수방사 영내에 있는 비석의 문구처럼 5공 시절의 잔재가 지속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경찰 무전기는 24시간 동안 개의 목줄같은 역할을 하며 필자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새벽에 출근해서 아침 상황회의 준비로 하루를 시작해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에 퇴근할 때까지 시내의 시위 상황과 경찰 출동 현황을 확인하고 대응하는 것이 추가로 부여된 임무였다. 그래도 개인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24시간 대기하며 바쁘게 달리는 직책이었지만 대통령의 근위부대로 자긍심을 심어주는 특이한 카키색 및 고동색 유니폼을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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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0-07
  • [김희철의 전쟁사(127)] 김만술소위의 신화, 베티고지 전투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 베티고지는 현재 비무장지대(DMZ) 안에 위치해 있어서 직접 방문은 어렵지만 태풍전망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국가보훈처는 베티고지 전투에서 기적의 36대800신화를 만들며 맹활약했던 故 김만술 육군대위를 5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 임진강 주변의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 때문에 치열해진 베티고지 전투 베티고지(Betty) 전투는 이승만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휴전회담이 결렬되면서 전개된 1953년도 중서부전선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 이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목전에 두고 전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티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쪽에 위치한 고지로서 그 주위에는 임진강이 허리띠처럼 둘러 흐르고 있는 서부전선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만일 베티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휴전이 성립될 경우, 주 저항선에서 남쪽으로 2㎞ 이상이 비무장지대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국군은 그만큼 임진강 남쪽으로 물러나야만 되었다. 베티고지 전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국군과 중공군간에는 이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극도에 달았다. 결국 베티고지는 소대장 김만술 소위와 2소대원의 임전무퇴의 감투정신에 의해 10배 넘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키고 사수하였다. 6ㆍ25전쟁영웅 故 김만술 대위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인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다. 이후 부산에 주둔하던 5연대에 소속으로 1948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여의 기간을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 및 전투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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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10-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8)] 수방사 장병들이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특별한 복장(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재의 얼룩무늬 복장으로 바뀌기 전인 민밋한 국방색의 전투복 차림으로 사무실에 첫 출근을 하자 필자는 외톨이가 되는 기분이었다. 당시 수방사는 아래의 사진과 같이 하계에는 카키색의 복장을, 동계에는 어두운 갈색인 고동색의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육군 전부대원들이 착용하고 있던 민밋한 국방색의 전투복장에 수방사 마크를 달고 있는 필자가 새로 전입온 장교임을 기존에 근무하고 있는 수방사 장교·부사관들은 한눈에 알아보고 지나칠 때마다 환영한다는 말들을 해주었다. 일부 병사들이 휴가를 출발할 때 사회 친구들을 만나면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부대에서 나오면 군장점에 들려 공수마크, 특수전 마크 등을 민밋한 국방색의 전투복장에 추가로 붙이고 고향으로 향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물론 복장 규정을 위반했던 그들이 휴가 복귀시에는 추가로 붙인 마크들을 모두 떼어내고 부대로 돌아왔지만 군인들은 유니폼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특히 수방사에서 복무했던 장병들은 카키색 및 고동색 복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심지어 인터넷의 각종 동호회 사이트를 검색하면 수방사에 복무했던 전역병들이 특별한 수방사 복장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었는지 금방 알수 있다. ■ “아주 좋은 부대로 발령받으셨네요”하며 출세길이 열린다고 한 수방사 근무가 시작돼 육군대학 교육을 마치고 부임한 수방사에서 첫 근무를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필자가 근무할 작전과에는 육군사관학교 시절 같은 중대에서 생활했던 선배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다행이었다. 필자가 육군사관학교 1학년 시절에 선임부분대장 생도로 근무했던 이윤배 소령(육사35기, 예비역 소장)은 작전과의 최선임 장교로, 분대 2학년이었던 김영주 소령(육사36기)도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여 안심되며 든든했다. 또한 고향 후배인 최병로 대위(육사38기, 예비역 중장)는 이미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대학 입교를 앞두고 잠시동안 함께 근무하게 되어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이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그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았던 1989년 7월, 육군대학에서 서울 필동을 거쳐 육사에 있는 아파트 모델하우스까지 애환의 이사할 때(‘[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5)]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 참조) 운전기사가 “아주 좋은 부대로 발령받으셨네요..”하며 출세길이 열린다고 덕담을 한 수방사에서의 근무가 시작됐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10-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7)]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던 필동에서 출발하여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진 자정이 다되어서야 잠실에 있는 처가에 도착하자 장모님도 어쩔줄을 모르며 당황했다. 일단 처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고, 사정을 들은 운전기사는 본인은 차에서 잘 수 있다며 아침에 짐을 보관할 곳으로 이동하자고 배려를 해주었다. 군인에게 시집와 잦은 부대이동에 따른 많은 이사의 애환을 겪는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그 보다도 처가 식구들에게 창피했다. 장모님도 아내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난감한 표정으로 필자의 얼굴만 쳐다보는 상황이었다. 우선 이사짐을 임시로 보관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전방 생활만 줄곳 해온 터라 서울에 연고도 없었다. 혹시 주변 부대에 빈 창고가 있나 물색하기 시작했다. 위급한 상황이 되자 우선 상의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동기생들이었다. 그중 불연듯 모교인 육군사관학교가 생각에 떠올랐다. 마침 육사에 근무하는 동기를 찾다 보니 육사 동기이자 고등학교 1년 선배인 김인수 소령이 육사본부에 근무하는 것을 알았다. 공수훈련시 창공에서 낙하산이 펴질 때에 불안했던 마음을 날려 보내거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처갓집 전화는 몇시간 째 필자가 사용하고 있었다. 다행이 전화가 통화가 되었다. 육사에 다닐 때 타동기들과 같이 있으면 존대말도 못하고 반말도 잘 못하던 어정쩡한 관계였는데 그 때 상황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충성, 형님 김희철입니다...”라고 첫 대화부터 완전하게 고교 선후배 관계로 돌아갔다. 사정을 들은 김 선배는 “확인하고 연락해줄게”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통하고 걱정하고 있던 아내에게 안심을 시켰다. 잠시 후 김 선배의 전화가 왔다. 육군사관학교에 아파트 신축 관계로 모델하우스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을 안하고 있어서 내일 아침 연락해서 한 채를 비워 놓을 터이니 그곳에 이사짐을 임시로 보관하라는 전달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차에서 자던 운전기사와 함께 처갓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태릉 육군사관학교 아파트 모델하우스로 이사짐차는 출발했고, 한달 뒤에야 정상적으로 필동 군인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군인이기 떼문에 겪어야 하는 잦은 부대이동에 따른 많은 이사의 애환을 다시 한번 더 즐기는 웃픈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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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6)]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의 도로 상태로는 진해에서 서울까지 최대한 빨리 달려도 6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특히 서울로 진입하여 수방사가 위치한 필동까지 시내를 통과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에서 점심을 같이했던 운전기사 아저씨는 군인들의 이사를 많이 해봤는지 필동으로 향하는 서울 시내에 접어들자 필자부부를 향해 “군인아저씨 부부는 아주 좋은 부대로 발령받으셨네요..”하며 수방사로 부임하는 필자에게 덕담을 보내왔다. 위병소에 도착하자 절차가 복잡했다. 요란한 카키색의 군복에 덩치가 산만한 헌병은 일일이 이사짐차를 점검하며 작전과에 전화로 확인하고 통과시켰다. 위병근무를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왠지... 수도방위사령부의 권위를 과시하듯 위병소 헌병이 취하는 언행은 군인들의 이사를 많이 해본 운전기사를 잠깐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이사짐차를 대기시키고 아파트 관리실과 작전과 사무실을 들렸을 때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육군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사무실에 근무하던 선배가 그렇게도 빨리 오라고 재촉하며 아파트 등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했는데, 확인 결과 필자가 입주하도록 배정된 아파트 호수에 전출자는 이미 출발했는데 그 가족들은 아직도 이사를 안가고 남아있었다. 아마도 타부대로 전출간 그 장교도 해당 부대에서 필자와 같은 상황을 겪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남아있는 가족에게 항의를 하거나 핀잔을 줄 수도 없었다. 장시간을 운전해 피곤했지만 수방사 부임을 축하주었던 운전기사와 어린 아들을 안고 힘들게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수방사 아파트에 빈집이 없었고 이사짐을 잠시 보관할 여유있는 창고도 없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난감해하는 아파트 관리인과 사무실 선임장교에게는 필자가 일단 임시 조치를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이사짐차에 올랐다. 우선 잠실에 있던 처가로 연락하여 잠깐 신세를 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29
  • [김희철의 전쟁사(12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⑬ 한미동맹으로 적은 국방비 쓰며 경이적인 경제 성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5월부터 8월말까지 숨 막힐 듯한 폭염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4차 대유행 속에서도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이 열렸던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하루 관람객이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역시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파 창시자이자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답게 그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특히 관람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전시물 중의 하나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다. 이는 피카소가 1951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6·25남침전쟁을 소재로 2m에 달하는 화폭에 그린 작품으로 오른편엔 투구와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총칼을 겨누고 있고, 그 반대편에선 임신부와 아이들이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다. 피카소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일으킨 “6·25남침전쟁이 공포와 희생을 강요하고 애꿏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비극적인 참상을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 천신만고 끝에 마무리한 포로 송환, 그러나 88명은 중립국 선택 1953년 7월17일 휴전협상이 조인되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8월5일부터 한달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별 무리없이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송환을 원치 않는 한국인과 중국인 포로 2만 2000여 명은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졌다.이들은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고. 남북한과 중공 대표들이 3달간 설득 작업을 벌였다. 이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중공군 1만 4,227명, 인민군 7,582명이었다. 특이하게 88명이 제3국행(인도행)을 택했다. 이 중 12명은 중공군, 76명(한국군 2명, 인민군 74명)은 한국인 포로였다.이들이 제3국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제각각이었다. "북녘에 부모님이 있어 지척의 거리인 남한에 살면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 땅에서 반공포로로 불리며 살기 싫어서, 공산당이 싫어 남한에 남아야 하는데 20살이기 때문에 다시 군대에 끌려갈 게 뻔해서"와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이 별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멕시코를 통해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들 76명의 한국인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으로 떠났다. 이들 포로에 대한 뒷이야기는 ‘광장’과 ‘시간의 저편’ 등의 소설과 영화 ‘공동경비구역’의 중립국감독위원회 책임수사관(배우 이영애 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조국을 버린 이들이나 아직도 남북간에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국군포로 문제를 접할 때마다 다시 한번 분단의 아픔,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절감하게 된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부속합의서인 "한미합의 의사록"으로 미군 자동개입 전략 구현 한편 반공포로 석방에 자극을 받은 미국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다른 인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휴전협정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승인한다고 통보하였으며, 양국 대표 및 실무자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한미간에 작성된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받아 보니, 조약 3조에 "한미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라는 문구는 강제가 아니어서 불안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 어느 한쪽이 외부의 침략을 받으면 자동개입한다”는 조건을 넣으라고 압박했다. 이것 때문에 한국과 미국은 다시 1년간 줄다리기를 했다. 이 대통령의 명을 받은 외교부와 국방부는 손발이 닳도록 미국을 부지런히 다녔지만 그 문구를 수정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다시 "당신들이 상호방위조약 전문을 수정해 줄 수 없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보완책으로 ‘한미합의 의사록’이라는 부속합의서를 만들어서 그 안에 다음과 같이 명시하자“라고 제안했다. ”1. 한국 육군 20개 사단을 무장화시켜주고, 해군과 공군 전력을 대폭 강화시켜 명실공히 북한의 침략을 억제할 수 있는 70만 대군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한다. 2. 미군 2개 사단을 한국 전방 지역에 고정 배치한다“는 내용을 넣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에 의한 이 요구안은 미국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합의해 주었다. 따라서 미 2사단과 7사단이 문산과 동두천에 주둔하게 됐다. 그런데 문산과 동두천 축선은 북괴군의 주 공격로이다.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서울로 진입할 수가 없는 요충지에 미군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북괴군이 남침하면 미군이 자동 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절묘한 전략이었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 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요구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이 대통령의 혜안과 배짱 덕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서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장기적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로써 한미동맹에 따른 미국의 확고한 방위보장에 힘입어 한국은 최근까지 GNP의 4% 이내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 쓰면서 경제개발 우선정책으로써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보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정치외교력과 애국심에 자연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여건을 만들어준 그분께 감사드리며 명복을 빈다.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9-2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5)]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졸업 전에 이미 수방사 인사처에서 연락받기를 이사짐차가 부대에 도착과 동시에 바로 아파트 입주가 가능하다고 하였고, 새롭게 부임하는 작전과에서는 1분이라도 빨리 와서 업무를 인수 받으라는 독촉이 심해서 다른 동료보다 먼저 출발하게 되었다. 1년동안 정들었던 진해 육군대학 아파트에서 다음 근무지인 서울로 향하는 이사짐차에 짐을 모두 싣고 출발할 때, 그때까지 이사를 못간 동기 및 선배들과 정규과정의 후배기수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가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진해로 내려올 때는 가족이 둘이었는데, 떠날 때는 필자와 새로 태어난 아들을 꼬옥 안고있는 아내와 함께 세명이 운전석 옆자리에 좁게 앉았다. 차창밖에서 환송하는 지인들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그들 중 후배기수들에게는 육군대학 과정에서 많은 교류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기를 기원했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 항상 등산하며 동료들과 친목을 나누었던 장복산이 보였다. 장복산에도 작별을 고하면서 이사짐차가 어두컴컴한 장복터널로 들어가자 이제부터 또 바쁜 일과의 전쟁이 시작됨을 실감했다. 이후 창원시내를 거쳐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4)]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정규 제45기 졸업식이 끝나자 하나 둘씩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이사짐차가 아파트를 메웠다. 필자는 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7번의 이사를 했다. 초급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부대는 GOP 부대 임무 교대가 통상 1년 단위로 시행됐다. 따라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마다 이사를 했다. 당시에 군용트럭을 이용한 몇번의 이사를 통해 신혼시에 장만했던 장롱을 비롯한 가구들과 거울, 유리그릇 등은 거의 깨지고 망가져 폐품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도 진해에서 새로운 임지인 수방사로 이사를 하기 위해 이사짐을 꾸렸다. 종이박스를 구해와 그 속에 유리 및 사기 그릇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깨지지 않도록 넣었다. 장농이나 밥상 및 책상의 모서리도 흠이생기지 않도록 보조대를 붙이는 등 이사 준비하는 동안 집안 전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방 GOP 부대에서 근무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자는 뜻하지 않게 당직 근무를 했고, 짐을 꾸리어 군용트럭에 싣고 이사하는 것은 가족의 몫이었다. 육군대학 입교시에는 사정상 필자가 홀로 전담해 이사짐을 꾸리고 정리했는데 가족이 첫아들을 안고 돌보아야하는 상황 때문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짐을 꾸리다가 방송으로 동기생 및 동료들이 출발할 때에는 밖에 나가 환송을 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몇시간 뒤에는 이사짐차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분주하게 정리를 하는데 동기생 김용호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이미 이사짐을 모두 꾸리고 타 동기들의 방을 돌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필자의 이사짐 꾸리는 모습을 보고있던 가족은 서투른 내 모습에 못마땅해 하던 차였다. 김 소령은 필자가 꾸린 짐의 매듭을 보고 “이렇게 꾸리면 다 망가져...”하며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동안 필자가 정리한 것 보다 오히려 이사짐을 더 많이 더 잘 정리해주어 고마웠다. 드디어 이사짐차가 도착했다. 짐정리를 도와준 김용호 동기생을 깊게 포옹해 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의미와 같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출발했다. 그리고 1년간의 육군대학 과정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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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27
  • [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과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했는데(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미국에 협력하느니 차라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특사로 한국에 급파되어 이승만과 단판을 벌였던 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서에 썼다. ■ 반공포로 석방으로 협상에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며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북진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울에 찾아 온 닉슨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이 대통령은 이어서 닉슨에게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 훗날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being unpredictabl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던 이승만, 또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게 심어줌으로써 공산세력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편은 무언가에 쫓기듯 위축된 입장에서 협상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슨과의 2주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다음과 같은 안건들을 제안하고 동의했다. “1.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1954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2400만 달러였다) 3.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4.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경우 이 회담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5.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공동목적에 관하여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런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 3년 넘게 진행됐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전쟁 없이 경제강국 기반 만든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리더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로 왔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했다. 덜레스는 가조인 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끔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1일 변영태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했으며, 1954년 1월15일 한국 국회가, 1월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에서 70여 년 간 전쟁이 없이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던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70여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남침전쟁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 장기적인 평화 덕분에 제일 먼저 일본이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일어섰고,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들어 전개된 동북아의 눈부신 성장은 70여년 전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한국에 주둔케 한 이승만의 심모원려(深謀遠慮) 덕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인들의 진정한 리더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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