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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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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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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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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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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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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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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5)]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졸업 전에 이미 수방사 인사처에서 연락받기를 이사짐차가 부대에 도착과 동시에 바로 아파트 입주가 가능하다고 하였고, 새롭게 부임하는 작전과에서는 1분이라도 빨리 와서 업무를 인수 받으라는 독촉이 심해서 다른 동료보다 먼저 출발하게 되었다. 1년동안 정들었던 진해 육군대학 아파트에서 다음 근무지인 서울로 향하는 이사짐차에 짐을 모두 싣고 출발할 때, 그때까지 이사를 못간 동기 및 선배들과 정규과정의 후배기수들이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가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진해로 내려올 때는 가족이 둘이었는데, 떠날 때는 필자와 새로 태어난 아들을 꼬옥 안고있는 아내와 함께 세명이 운전석 옆자리에 좁게 앉았다. 차창밖에서 환송하는 지인들에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그들 중 후배기수들에게는 육군대학 과정에서 많은 교류와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기를 기원했다. 학교 정문을 나서자 항상 등산하며 동료들과 친목을 나누었던 장복산이 보였다. 장복산에도 작별을 고하면서 이사짐차가 어두컴컴한 장복터널로 들어가자 이제부터 또 바쁜 일과의 전쟁이 시작됨을 실감했다. 이후 창원시내를 거쳐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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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5)] 직업군인들의 잦은 이동에 따른 웃픈 애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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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4)]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정규 제45기 졸업식이 끝나자 하나 둘씩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이사짐차가 아파트를 메웠다. 필자는 36년 9개월의 군생활 동안에 총 27번의 이사를 했다. 초급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부대는 GOP 부대 임무 교대가 통상 1년 단위로 시행됐다. 따라서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2년마다 이사를 했다. 당시에 군용트럭을 이용한 몇번의 이사를 통해 신혼시에 장만했던 장롱을 비롯한 가구들과 거울, 유리그릇 등은 거의 깨지고 망가져 폐품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도 진해에서 새로운 임지인 수방사로 이사를 하기 위해 이사짐을 꾸렸다. 종이박스를 구해와 그 속에 유리 및 사기 그릇은 신문지로 둘둘 말아 깨지지 않도록 넣었다. 장농이나 밥상 및 책상의 모서리도 흠이생기지 않도록 보조대를 붙이는 등 이사 준비하는 동안 집안 전체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방 GOP 부대에서 근무할 때에는 그때마다 필자는 뜻하지 않게 당직 근무를 했고, 짐을 꾸리어 군용트럭에 싣고 이사하는 것은 가족의 몫이었다. 육군대학 입교시에는 사정상 필자가 홀로 전담해 이사짐을 꾸리고 정리했는데 가족이 첫아들을 안고 돌보아야하는 상황 때문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사짐을 꾸리다가 방송으로 동기생 및 동료들이 출발할 때에는 밖에 나가 환송을 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몇시간 뒤에는 이사짐차가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분주하게 정리를 하는데 동기생 김용호 소령이 찾아왔다. 그는 이미 이사짐을 모두 꾸리고 타 동기들의 방을 돌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 필자의 이사짐 꾸리는 모습을 보고있던 가족은 서투른 내 모습에 못마땅해 하던 차였다. 김 소령은 필자가 꾸린 짐의 매듭을 보고 “이렇게 꾸리면 다 망가져...”하며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동안 필자가 정리한 것 보다 오히려 이사짐을 더 많이 더 잘 정리해주어 고마웠다. 드디어 이사짐차가 도착했다. 짐정리를 도와준 김용호 동기생을 깊게 포옹해 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의미와 같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출발했다. 그리고 1년간의 육군대학 과정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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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4)]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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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과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했는데(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미국에 협력하느니 차라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특사로 한국에 급파되어 이승만과 단판을 벌였던 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서에 썼다. ■ 반공포로 석방으로 협상에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며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북진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울에 찾아 온 닉슨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이 대통령은 이어서 닉슨에게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 훗날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being unpredictabl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던 이승만, 또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게 심어줌으로써 공산세력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편은 무언가에 쫓기듯 위축된 입장에서 협상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슨과의 2주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다음과 같은 안건들을 제안하고 동의했다. “1.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1954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2400만 달러였다) 3.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4.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경우 이 회담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5.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공동목적에 관하여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런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 3년 넘게 진행됐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전쟁 없이 경제강국 기반 만든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리더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로 왔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했다. 덜레스는 가조인 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끔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1일 변영태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했으며, 1954년 1월15일 한국 국회가, 1월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에서 70여 년 간 전쟁이 없이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던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70여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남침전쟁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 장기적인 평화 덕분에 제일 먼저 일본이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일어섰고,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들어 전개된 동북아의 눈부신 성장은 70여년 전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한국에 주둔케 한 이승만의 심모원려(深謀遠慮) 덕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인들의 진정한 리더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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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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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3]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과정의 시험평가 이외에도 훈육점수가 졸업 성적에 영향을 주었다. 훈육점수에는 사격측정과 체력검정 결과도 반영되었고 그밖에 지각, 결석, 조기청소 및 초빙강연 불참도 벌점이 되었기에 학교 방침을 준수하고 행사에 적극 참여하여 학교생활 소홀로 인해 불필요한 감점을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헌데 그 중 6.25남침전쟁을 경험했던 한신, 유재흥, 김한룡, 백선엽. 김정곤 장군 등의 초빙강연과 현지 토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있는 듯 서투르면서도 촌티 흐르는 말투 속에 숨어있는 실전감 넘치는 노장군(老將軍)들의 경험담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군인인 내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더 다지는 기회였다. 한편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속담처럼 훈육점수에서의 1~2점이 최종 종합성적에서 상중하 평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냐면 우등생으로 수료하면 제일 좋지만 졸업 성적이 최소 1/3수준인 ‘상층’에 포함되어야 차후 진급 심사 시에 피해없이 선발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 각박한 경쟁사회의 서글픔 속에 각종 모임을 통해 친목을 도모하는 즐거운 시간도... 육군대학에서도 진급을 고려해 좋은 성적을 취득해야 하는 각박한 상황이 학생장교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이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임을 절감했다. 이로 인해 서글픈 경쟁사회의 단면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각박하고 서글픈 실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 및 동기회별 체육대회를 분기별로 시행하였고 가족들을 위한 주부대학 등 각종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지는 즐거운 시간도 많았다. 또한 육군대학에서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그밖에 과거 함께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후의 정을 만끽했고, 새로운 부대로 부임하는 장교들은 인접 학생 장교들을 통해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필자는 육군대학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선배는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다. 결국 훈육점수 벌점을 맞을 각오로 하루 결석을 하고 선배와 함께 동국대 석사과정 입학 면접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당시 비록 벌점은 받았지만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훗날 석사 학위를 갖게 한 소중한 조언이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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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3]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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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2]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법화경에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返), 회자정리(會者定離)’ 즉 “산 것은 반드시 죽고,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라는 의미의 명언이 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장교로 임관하여 각자의 근무지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어느덧 중견 장교가 되었고, 보수교육 과정인 육군대학에 입교한지도 1년이 되어가자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게 되었다. ■ 막고 푸는 방법으로 준비하여 교관의 의도에 부합된 답안을 작성하는 시험평가 육군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생장교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대부분의 학생장교들은 입교를 전후해서 소령으로 진급했고, 앞으로 4~5년 뒤에는 중령 진급 심사 대상이 된다. 또한 전원이 장기근무 자원으로 중령이 아니라 대령, 장군의 꿈을 품고 사명감과 의욕이 넘치는 전도양양(前途洋洋)한 인재들이었다. 피라밋 구조인 군(軍)은 상위 계급으로 진출할 수록 인원이 적어 진다. 따라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진급심사는 통상 매년 시행되는 근무평정의 종합, 대상자의 학위와 군사교육 과정의 성적 등의 잠재역량 평가, 그리고 해당 부대장의 지휘추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학생 위치에서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진급 심사시에 고려되는 잠재역량 평가중에 하나인 육군대학 과정의 졸업 성적이었다. 육대 정규과정의 1년 간 교육기간 중에 거의 매달에 한번씩 시험에 응해야 했고 강의 도중에 요약 및 중간 평가도 있었다. 따라서 무식한 전법으로 웅덩이의 위와 아래를 막고 물을 퍼내어 물고기를 잡는 낚시 방법이었던 ‘막고 푸는 방법’을 택했다. 그 날 교관이 강의하며 강조했던 교리는 조사까지 그리고 농담까지도 모두 기록하며 모두 암기했다. 선배들의 고추가루(참고자료)를 기초해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된 것만 쌓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꽉꽉 눌러서 마구 쑤셔 넣기식” 학습으로 전환했다. 물론 이 방법은 학습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막고 푸는 방법’을 택한 후의 시험부터 달라졌다. 단지 혼자서 교범을 읽고 숙지하는 것은 나름의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으나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막고 푸는 식으로 강의 및 토의시 한마디씩 던지는 교관의 모든 발언에 초점을 맞추자 교범의 행간에 숨어있는 교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교육 역시 인간이 가르치고 그 사람이 평가하는 법이다. 토의 및 발표 시에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제시하여 인정을 받을 수 있으나 시험평가 시에는 정답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에 맞춰서 공부하여 작성한 시험 답안지는 해당 교관이 요구한 정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전술학 과정에서 공격 시에 곧장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과 우회나 포위기동으로 적을 공격하는 방법 등이 있는데, 각자의 의견 발표 시에는 어느 방법을 택하던 그 방법에 부합된 여건을 제시하면 오히려 창의적이라고 칭찬 및 평가를 받을 수 있엇다. 그러나 시험평가에 임할 때는 시험 문제에 제시된 조건들을 면밀히 분석하면 교관의 의도가 세가지 방법 중에 어느 것에 해당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 교관의 의도에 맞게 그 기동 방법으로 답안을 작성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 결실은 참모학 과정 시험 결과부터 달라지기 시작했고 마지막 종합평가 후에는 우등은 아니었지만 미소를 띄울 수는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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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2] 육대졸업을 앞두고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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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전쟁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영상 콘텐츠 공모전 개최
-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전쟁기념관은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 유엔평화유지군 활동 등을 주제로 대학생(외국인 포함) 대상 영상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공모전은 6·25전쟁 발발 71주년과 우리나라의 유엔가입 30주년을 기념하는 ‘제 1회 전쟁기념관 유엔문화주간(10월 19일~23일)’과 연계하여 대학생들의 참신한 콘텐츠 발굴을 목적으로 진행된다. 참가 희망자는 팀 또는 개인단위로 참여 가능하며, 5분 이내의 영상을 개인 유튜브에 업로드 후 주소(URL)를 참가신청서에 기재하여 9월 14일~10월 15일 안에 제출하면 된다. 출품작은 주제적합성·창의성·활용성 등을 심사해 6개 당선작을 선정하며, 발표 및 시상식은 10월 19일 진행될 예정이다. 당선자에게는 전쟁기념사업회장 표창장과 대상(1작품, 300만원), 최우수상(2작품, 100만원), 우수상(3작품, 50만원)등 총 650만원의 부상이 주어진다. 당선작은 유엔문화주간 동안 전쟁기념관 중앙홀에서 관람객을 대상으로 상영한다. 공모전 참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전쟁기념관 홈페이지 공지사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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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전쟁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영상 콘텐츠 공모전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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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1]숨통을 조이는 학업 중에 군항제로 찾은 잠깐의 여유(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중대원들은 근무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며 부딪히는 소주잔에 전우애를 듬뿍 담아 들이켰다. 특히 필자가 중대장 시절의 언행을 흉내내며 익살을 부릴 때에는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비록 다음날 시험이나 숙제로 부담은 됐으나 전국각지에서 어렵게 시간을 마련해 중대장을 보러 함께 온 전우들이 고맙기만 했다. 또한 승리부대 전출시에 사단장으로부터 그동안 고생했다며 격려금을 받고, 승리부대 동문 장교들의 애대심(愛隊心) 고취 위한 격려회식 임무를 부여받았었다. 필자는 승리부대 출신장교들의 시간 계획을 확인하여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동문 주소록도 만들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을 개최했다.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모임을 많이 한다는 육군대학의 특성을 이미 경험했던 사단장의 의도대로 시행된 ‘승리부대 동문 모임’은 100% 성공이었다. 사단장의 배려로 모임이 주선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대상자는 거의 참석했고 타부대로 부임해가는 동료들마저도 승리부대만 사단 모임을 한다며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특히 승리부대에서 근무했던 선후배들은 한잔 술을 나누면서 해후의 정을 만끽했고, 승리부대로 새로이 부임하는 장교들은 사전에 부대의 근무여건을 확인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유익했다. 필자를 통해 ‘승리부대 동문 모임’을 하라고 지시한 사단장에게 감사함도 느끼기도 했다. 그밖에 교실내의 각자 자리를 기준으로 조별, 줄·오·대각선별로 모임도 있었다. 물론 출신학교, 고향, 기타 연관된 사람 간의 별도 모임은 필수였다. 마치 새로운 인연을 쌓기 위해 육군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자산이고 능력이며, 끈끈한 인간관계가 직업인들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육군대학 수료 후 기나긴 군생활을 하면서 체험을 통해 깨닫았다. “화향백리(花香百里)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주향천리(酒香千里)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가지만,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라며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옛 시가 절실하게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벚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진해의 군항제에 부모님과 친지들을 모처럼 초청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육군대학 교육과정은 그분들이 영관장교로 진급한 자식에 대한 보람을 느끼며, 활짝핀 벚꽃의 풍광속에서 미소를 머금는 흐뭇한 효도의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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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1]숨통을 조이는 학업 중에 군항제로 찾은 잠깐의 여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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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⑪헌병 보호하에 3만여명의 반공포로 대탈주 감행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은 이미 1953년 6월6일 미국에 휴전협정을 체결하려거든 먼저 한국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당시에 미국같은 초강대국에 한국같은 신생독립국이 먼저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통상적인 외교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여기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도박같은 초강수를 두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불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휴전협정을 언제라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도박 감행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는 1953년 6월18일 새벽 1~2시경 북한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의 7개 포로수용소 하늘에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3만5457명의 반공포로들이 우리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주를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1시 미국을 상대로 이번 조치가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덕분에 2만6930명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미군이 감시하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다쳤다. 탈주한 반공포로중 8293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에 갇혔다. 이들은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져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거쳤으나 대부분 석방됐다. 미국은 물론 세계는 이승만의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의 충격은 정말 컸다.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각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브리그스 주한 미대사는 대통령에게 항의하면서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했다. 면도를 하고 있던 영국의 처칠 총리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포로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포로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집에 숨긴 채 숙식을 제공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미국이 가장 놀란 것은 이승만이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하도록 한 양국의 합의 위반을 넘어, 이를 무시하고 포로들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휴전협상을 앞두고 한미 관계에는 균열의 징후가 보였다는 점이다. 클라크 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 겸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해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지휘할 경우에 대비한 비밀계획까지 수립했다. 일명 에버레디(Everready)계획이라고 불린 이 계획은 1953년 5월22일 작성되어 워싱턴에 보내졌다. 이 계획에는 필요한 경우 유엔의 이름으로 군정을 실시하거나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철수까지 포함한 아주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미국 정부는 한때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을 실각시키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국군의 충성심이 높고 마땅한 대안이 없어 접어버렸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정말 이승만 대통령은 항간의 소문대로 '내치는 등신, 외교는 귀재'라는 말이 실감난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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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⑪헌병 보호하에 3만여명의 반공포로 대탈주 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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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방일보 보도사진전' 내달 10일까지 전쟁기념관에서 개막
-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제73주년 국군의 날을 앞두고 2021년 국방일보 보도사진전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軍人)입니다'가 10일 전쟁기념관 야외 수변공원에서 개막한다. 국방홍보원과 전쟁기념관이 공동 주최하는 이 사진전은 내달 10일까지 열리며, 전·후방 각지에서 촬영한 인물사진 50점과 그들의 이야기로 구성됐다. 전시 내용은 ‘나는 자랑스러운 군인입니다’, ‘나는 행복한 군인입니다’, ‘나는 유능한 군인입니다’, ‘우리는 국민과 함께합니다’ 등 4가지 대주제로 구분된다. 전시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국민과 함께 하는 강한 국군의 모습을 장병 개개인의 인물사진으로 담아 장병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동시에 대군 신뢰도와 대국민 안보 공감대 향상에 이바지하기 위해 계획됐다”고 밝혔다. 전시 내용은 국방홍보원과 국방일보 홈페이지 및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도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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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국방일보 보도사진전' 내달 10일까지 전쟁기념관에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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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0]숨통을 조이는 학업 중에 군항제로 찾은 잠깐의 여유(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년 4월이 되면 진해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바로 군항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육군대학의 숨통을 조이는 학업 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만개한 벚꽃의 모습은 잠깐의 여유를 찾게 한다. 특히 위의 사진처럼 해군사관학교 내의 벚꽃길은 선남선녀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게다가 진해의 한가운데 방사형 도로길을 따라 걷다가 탑산의 365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이는 벚꽃이 만개한 진해의 풍광은 장관이었다. ■ 긴머리의 민간인 된 중대원들이 ‘승리’ 구호를 외치며 단체경례...! 사관생도 생활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 격오지의 동토로 부임했을 때 낯설었던 ‘밤을 낮같이, 산악을 평지같이’라는 구호를 접하며 장교 생활을 시작했었다. 전방 격오지 야전근무가 8년 가까이 되자, 민가와 1시간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던 부대에서 인적도 들물고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와 산짐승 우글거리는 산속 생활에 익숙해져 완전히 자연인이 되었다. 소대장, 교육장교, 중대장, 사단작전장교를 거치며 소령으로 진급하여 보수교육 과정인 육군대학에 입교하자 번듯한 아스팔트 도로의 편리함과 야간에는 네온싸인 불빛으로 대낮같이 화려한 도심에서 평안을 누리는 천국이었다. 헌데 육대 성적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1년 가까운 교육과정에서 모처럼의 여유있고 행복하기만 했던 도심 생활의 연속이 오히려 지루함을 갖게 했다. 또한 지난 8년간의 야전근무 중에 극한 속에 여유를 느끼며 짧게 조각 조각 즐겼던 시간들이 간혹 그리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미소가 번지는 회상과 그리움이 모락모락 피어날 때 즈음, 옛 전우들이 진해로 찾아와 모처럼 즐거운 해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30개월간의 중대장 시절 같이 울고 웃으며 고락을 함께하다가 제대한 중대원 조진희, 조은근, 박승현, 김경군, 진은근 등이 어느 토요일 불쑥 진해의 비좁은 아파트로 쳐들어왔고, 긴머리의 민간인 된 녀석들이 단체로 필자에게 ‘승리’ 구호를 외치며 경례를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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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40]숨통을 조이는 학업 중에 군항제로 찾은 잠깐의 여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