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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9)]연합 및 합동작전 3군대학 통합교육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때마침 지금은 해체된 육군 11군단에서 ’지·해·공 합동작전“ 전술토의가 있었다. 육군대학에서 육·해·공군 대학 학생장교들이 함께 모여 받는 연합 및 합동작전 통합교육 기간중이어서 모두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전술토의에 참석했다. 학생장교들은 진해 육군대학에서 동해 바닷가의 전술토의장까지 긴 시간을 버스로 이동했다. 지루한 버스 이동을 끝내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행사를 위해 대형 차트와 그 많은 참가자들의 좌석 등을 준비한 부대원들의 고생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임석상관인 11군단장이 입장하자 시범식 교육 및 토의가 시작되었는데, 대항군 역할을 하는 팀들이 선박을 타고 이동하자 먼바다 한가운데에서는 공군기와 해군함정에서 격침시키는 사격을 했고, 해안으로 근접 침투하는 적을 육군 경계부대가 사격으로 제압하는 행동 시범도 있었다. 말그대로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이 효과적으로 진행된 시범이었다. 주최측의 발표는 이러한 합동작전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육·해·공군간의 긴밀한 협조유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한 세부 조치할 사항들을 제시하는 내용이었으며 참가자들의 열띤 토론도 있었다. 비록 ’지·해·공 합동작전“ 전술토의는 대침투작전 위주로 진행되어 아쉬웠지만, 당시의 ‘연합 및 합동작전 육·해·공군대학 통합교육’은 앞으로 유사시 합동작전이 전개될 때를 대비해 육·해·공군 중견 장교들이 타군의 운용 및 전술 등을 익히며 상호 정신적 교감과 정신적 단결을 견고하게 다지는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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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06
  • [김희철의 전쟁사(122]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⑨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방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가을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노리, 백마, 화살머리, 저격능선전투 등의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승전보와 패배의 비보가 교차되며 국민들을 안타깝게 만들 때,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12월3일 방한했다. 광릉 수도사단에서 대기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방한한 아이젠하워는 수도사단을 함께 시찰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수행원들만 대동해서 곧장 경기도 북부에 주둔 중인 미 3사단과 미 9군단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장관들과 많은 시민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앙청 광장의 환영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미국 대통령 당선자 환영행사는 무산됐고, 이 대통령은 약소국의 설움을 뼈져리게 느꼈다. 한편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들을 후보에 올려놓고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측 의견에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려 했다. 이렇게 되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이었다. 즉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행사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추진과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부산 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국내외로부터 ‘독재자’라는 비난을 듣게 되었다. ■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방문은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의 서막 알리는 신호탄 미국의 이러한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오기가 발동해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떠나기로 예정했던 날 오전부터 사람들을 경무대에 모이도록 했다. 전날 미국 대통령 당선자 환영 행사식장에 있다가 그냥 귀가했던 3부 요인들과 장관들이 다시 모두 경무대의 응접실에 모였다. 아이젠하워를 다시 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신중함에 고집까지 강했던 아이젠하워는 역시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경무대를 예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대통령 당선자여서 일선에 있는 미군부대 시찰 외의 어떤 공식적인 활동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를 경무대로 오도록 하기위해 김태선 서울시장을 미 8군 사령부로 보냈으나 사령부 정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힘이 많이 빠진 이 대통령은 다시 백선엽 육군총장을 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비록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더라도 아이젠하워가 자존심 강한 이 대통령의 체면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면 앞으로 양국의 협력에는 상당한 장애가 생길 수 있었다. 특히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업을 앞두고 미군이 지닌 몫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지프가 미 8군 사령부에 도착하자 백선엽 장군은 2층의 사령관 집무실로 곧장 올라갔다. 사령관의 집무실을 아이젠하워에게 내준 상태였기에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지 않고 그 옆의 부속실에 있었다. 밴플리트는 돌연 나타난 백 장군을 보더니 “나도 설득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그는 짤막하게 “마크 클라크에게 직접 이야기해보라”며 사령관 집무실에 붙은 다른 부속실을 가리켰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머물던 방이었다. 백 장군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제 한국은 병력 수만으로는 100만 대군을 갖출 수 있다.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이 100만의 한국군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느냐?”라고 반문했다. 이어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고 그냥 떠나면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업 등 양국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진다. 클라크 장군께서 설득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이승만 대통령의 학식과 미국에 대한 이해, 자유와 민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존경했던 클라크였다. 그는 결코 길지 않은 백선엽 장군의 협박에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서 사무실 뒤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젠하워가 머물고 있던 방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다시 나왔다. 클라크는 백 장군을 보면서 “경무대로 돌아가 기다려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곧 경무대를 방문한다”고 짧게 말했다. 6시 무렵에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경무대에 왔다. 그는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 그리고 한국전선에서 활약 중이던 아들 존 아이젠하워를 대동하고 경무대에 도착했다.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의장대 사열식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아무래도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는 일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해 모종의 정치적 약속을 해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면 자존심 강했던 이 대통령과 차기 미 행정부의 관계는 매우 냉랭해지고 차후 협력이 어렵게 될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를 데리고 왔던 덕분에 그때의 환송 면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1시간 남짓 경무대에 머물다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도박 같은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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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9-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8)]연합 및 합동작전 3군대학 통합교육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는 맹자가 그의 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할 때 한 말로,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맹자는 승패의 기본적인 요건을 첫째 하늘의 때, 둘째 땅의 이득, 셋째 인화 등 세 가지로 보았다. “즉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리 기상과 방위, 시일의 길흉 같은 것을 견주어 보아도 지키는 쪽의 견고함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요새가 지리적 여건이 충족된 땅의 이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는 이들의 정신적 교감, 즉 정신적 단결이 없으면 지키지 못한다”라고 맹자는 부연 설명했다. ■ 육·해·공군 대학 통합교육은 합동작전을 위한 정신적 교감과 정신적 단결의 계기 당시 육군대학 전술학 교육시간에 모든 토의의 중심이 되었던 윤용남 장군이 저술한 ‘기동전’과 더불어 미 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한 개념들이 모든 공격 및 방어전술의 핵심이었다. 게다가 상급 부대에서 향후 미래전장에서 승패를 좌우할 한미 연합작전과 지·해·공 3군의 합동작전을 강조하여 육·해·공군 대학 학생장교들이 함께 모여 통합교육을 받는 과정도 있었다. 사관생도 시절 타군 사관학교를 방문하여 며칠 동안 타군 체험훈련을 할 때 만났던 타군 사관학교의 동기들을 10년이 지난 뒤인 육군대학 교육과정에서 다시 해후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중견 장교로 성장한 그들을 보며 든든함도 느꼈다. 앞으로 유사시에 발생할 전장 상황은 과거처럼 육군만의 힘으로는 제한 사항이 많아 하늘과 바다에서 상호 지원하는 합동작전이 더욱 필요하다. 따라서 육군도 해·공군의 운용체계와 작전절차 등을 알아야 합동작전을 더 원활하게 치루며 전장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에 육·해·공군 대학 학생장교들이 함께 모여 받는 통합교육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또한 타군 대학의 교관들의 교육을 받으며 그들의 전문 지식과 강의 기법 등을 상호를 비교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육군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정확한 공중 폭격과 상륙 및 해상작전을 접목시켜 작전술 및 전략을 구사할 수 있는 합동작전과 한미 동맹관계에서 미군 전력을 지원받고 운용할 수 있는 연합작전의 기초를 배운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더욱이 강의가 끝난 뒤에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함께하며 친교를 맺는 시간은 필자가 추후 합참에 근무할 때에도 타군을 이해하고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결국 연합 및 합동작전 육·해·공군 대학 통합교육은 맹자가 강조한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의 의미처럼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도 못하다’라고 했듯이 육·해·공군의 합동작전을 위한 각군의 정신적 교감과 정신적 단결인 인화(人和)를 다질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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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9-02
  • [김희철의 전쟁사(121)]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⑧유엔군, 준동하는 친공포로들을 강경진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 대장의 후임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수용소의 질서를 잡기 위해 강경책을 구사했다. 1952년 5월 신임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한 헤이든 보트너 준장은 총검을 장착한 보병과 탱크를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10일 만에 포로들을 진압했다. 기가 꺾인 포로들은 작은 규모의 새 수용 막사로 분산 수용되었다. 먼저 분산 수용을 시도한 곳은 가장 저항이 심하고 친공포로들의 본부 역할을 했던 76수용소였다. 6월10일 새벽 경비병들이 기관총과 박격포를 조준한 가운데 대부분의 포로는 새 막사로 이동했으나, 1,500여명이 불을 지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30여 명이 죽고, 130여 명이 다쳤다. 결국 76수용소의 포로 6,500명은 500명 단위로 나뉘어 새 수용소로 분산 수용되었다. 포로들이 떠난 막사에서는 창 3,000여 개, 가솔린 수류탄 1,000여 개, 칼 4,500여 자루가 발견되었다. 거제도 부근의 봉남도에 설치한 새 막사에서도 12월14일 폭동이 발생해 85명이 죽고 113명이 다쳤다. 압수된 비밀문서에는 1952년 6월20일을 기해 모든 수용소에서 동시다발로 탈출한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보트너 소장은 이어 반공과 친공포로들을 심사를 통해 분리하여 반공포로들은 영천, 부평, 마산, 논산, 가야 등지로 옮겨 친공포로들의 테러에서 보호했다. ■ 어렵게 시작한 휴전회담, '뜨거운 감자'인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난항을 겪다 한편 전선이 휴전선을 경계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했다. 양측은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시작해 보름만에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의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포로 송환'을 둘러싸고 암초에 부딪쳤다. 이 문제는 10월에 처음 의제에 올랐으나 회의 벽두부터 공산측이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를 석방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와 공전을 거듭했다.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공산측 주장이 옳았다.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 최초 공산 측의 자랑과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 1년 후인 다음 해인 1952년 5월,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국 정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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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7)]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시행한 하나회 출신 주요 장성들의 기습적인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이 모두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하나회 출신은 군 승진인사에서 계속 배격당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 중에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하나회 명단 살포 건으로 인해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간혹 돌았으나,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이미 김영삼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진행중이었다. 이러한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최초 사례를 낳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 당시 ‘알자회’도 발각되었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졌다. 알자회 34~36기 중에는 하나회와 중복되는 일부도 있었는데 7월에는 하나회 영관·위관급 장교들까지 색출해 예편시키거나 좌천시켰다. 가히 전격전을 방불케 하는 숙군 행보였다. 당시 주요 군부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 24시간 비상대기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훗날 알려졌다. 하나회 자체가 군대를 실제로 동원할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물거품이 될수도 있었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동안 철야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 설이 돌기도 했다. 특히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말았다. 하나회의 주요 맴버들은 10ㆍ26 직후의 12·12 구테타 그리고 5·18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 세월을 누구 못지않게 험하게 보낸 정치인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를 벼른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의 분노는 명료하고 집요했으며, 숙청작업은 쿠데타 가능성에도 상관없이 앞뒤 안가리고 잘라 버려 무모해보일 정도로 무대포스러운 위엄을 과시했다. 이러한 과감한 숙청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평도 나돌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이것은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前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前 수방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던 일화들로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 중 우수한 인물들은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했다. 그래서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고 하면 치를 떠는 非하나회 출신 비영남권 군인들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그렇기에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4년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된 것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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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31
  • [김희철의 전쟁사(120)]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⑦ 친공포로들에게 납치당한 포로수용소 도드 소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포로수용소에서의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고,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났다. 이로인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양측의 충돌이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갈등은 1952년 5월7일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 도드(Francis. Townsend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 발생하면서 정점에 달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갑자기 공산포로들이 밥에 독을 넣었다고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단식투쟁을 하면서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평소 포로 대표단의 요청이 있으면 면담을 자주 가졌던 도드 소장은 아무 생각없이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포로들과 얘기를 나눴다.포로들이 슬그머니 수용소 문을 열고 나와 도드를 둘러싸는데도 경비병들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러다 '똥통'을 비우러 나왔다가 들어오는 포로들과 뒤엉켜 도드는 철조망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문은 닫혀버렸다. 세계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포로수용소장이 '포로들의 포로'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도드를 포로로 잡은 친공포로들은 곧바로 현수막을 걸었다."우리는 도드를 포로로 잡았다.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된다. 총격이나 그밖의 폭행이 가해진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줄 알아라"현수막이 납치 직후 곧장 내걸린 것으로 보아 도드 납치 계획은 미리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포로들은 이어 친공포로에 대한 학대 중지, 송환 강제 심사 철회, 자유 송환 중지, 포로 대표단 인정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후임 소장으로 임명된 찰스 콜슨 준장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포로들의 송환 강제 심사나 개인 심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했다. 콜슨이 무릎을 꿇자 도드 장군은 감금 78시간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는 도드가 살해되더라도 무력으로 수용소 질서를 바로잡으려던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뜻에 완전히 배치되는 조치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도드와 후임 소장 콜슨 장군을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했다. 미군은 수용소 내에서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결국 포로들을 광주, 논산, 부산 등으로 분산 배치시켰다. (다음편 계속) ◀ 김희철 프로필 ▶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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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8-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6)]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알자회‘와 같은 군내의 사조직 문제는 4년 뒤인 199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이 ’하나회‘ 출신인 서남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부장관을 통해 보고하라"라고 지시하면서 표면화됐다. 나무위키 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김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 값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실추된 군과 육군의 명예를 바로잡고(…)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김 대통령이 취임한지 11일째인 3월8일 이었다.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 대통령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는데, 몇몇 최측근들과 의논하다 이날 아침에 권영해 국방부장관을 불러 독대를 했다. "장군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느냐?"라고 일단 김 대통령이 운을 뜨자, 권영해 장관은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는다"라고 답했고, 김 대통령이 "그럼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고 말하자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부로 바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비 하나회 출신인 김동진과 김도윤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이러한 과정이 단 4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전격적인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의 신호탄이고 그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는 군은 물론 청와대 내에도 드물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를 이어받아 3당 합당으로 김영삼은 대선 후보가 됐고,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즐비했던 당시 민주정의당의 지원으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불과 며칠 단위로 각군 사령관과 사단장급까지 교체하는 일이 4월에 전개되었다. 4월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19기) 전역조치, 4월8일 1군사령관, 3군사령관, 2작전사령관 보직해임, 4월15일 하나회 출신 군단장과 사단장 거의 전원을 강제로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뇌부에 대한 숙청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하나회 출신이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하나회 회원이던 이충석(당시 소장)이 술자리에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술잔을 던지며 소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하나회 숙청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에 의해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아예 조기 전역까지 당하며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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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7
  • [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한 신경전이 전개되는 답답한 양상이었다. 그러던 중, 1951년 12월18일에 최초로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포로 명단을 교환했다. 이때 공산측 포로는 북한군 11만2000명과 중공군 2만명으로 도합 13만 2000명이었고, 반면에 연합군은 미군 3200명, 남한군 7000명, 유엔군 1600명으로 총 1만1800명이었다. 당시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다. 이에 따라 포로 교환 원칙에 대해 이견이 생기고 상호 갈등도 심화되며 회담도 장기화 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유엔군과 국군은 포로들의 1대1 교환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강조했다. 특히 남한은 북한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군으로 끌려갔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던 것은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급속한 유엔군의 북진과정에서 11만명이 넘는 많은 수의 북한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포로로 잡혔고, 반대로 중공군 개입후 1·4후퇴과정에서 1만명에 이르는 유엔군이 북한군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되여 미군이 관리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한국군에게 수용소의 통제와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포로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용소 내에 다양한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포로 교환이 논의되면서 다툼은 더욱 격해졌다.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포로들은 남한에 남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미군은 1952년에 포로 심사 과정 중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민간인으로 구분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 확인을 방해하면서 전원 북송을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다. 후에 이 기독교인들은 반공포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한에서 억지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 체제에 실망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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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8-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35)]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사조직 병폐소동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영삼 대통령이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중 가장 중심에 있던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필자는 그 사조직의 정확한 실체를 알게 되었다. 사실 하나회 숙청소동이 있었지만 그들의 면모를 살펴볼 때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후배들에게서 무한한 존경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후 보직과 진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하들을 불필요하게 괴롭히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도 없었고, 상급부대의 부당한 지시에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등 자신감 넘치는 탁월한 리더십으로 부대 발전에 기여한 면도 일부 있었다. 한편 육군대학에서는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같은 학급에서도 조별, 대각선, 열과 오 등 가능한 많은 사적모임을 만들었다. 따라서 육군대학 교육과정에서도 상호 교류하며 새로운 사조직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1989년 육군대학에서 벌어진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위해 만나는 모임들을 볼 때 서울에서 들려온 선후배들의 사적모임 회원들을 동기회에서 제명을 했던 소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생도시절 사관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며 동기회에 포함시켜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꼭 이렇게 제명까지 필요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전체 동기회를 열기 전에 일부 동기들과 상의하며 의견도 수렴한 결과로 우리 동기회에서는 다른 선후배 기수처럼 제명까지는 안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당시 동기회 간부직을 수행했던 필자에게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며 제명을 강조했던 일부 동기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가장 적절한 논리는 “같은 고향 선후배와 중고교 동창 등의 모임도 어떻게 보면 사조직이라고 할 수 있고, 게다가 모두가 알고 있는 럭비, 축구부 출신들의 모임은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고 이해를 시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조직 명단을 확보하여 사조직에 포함된 동기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후배기수에서 “편파적인 인사를 통해 그들만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격앙된 논쟁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은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던 동기생부터 각개 격파식으로 이해를 시키자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전체 동기회도 개최할 필요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상태를 돌이켜보면 격앙된 논쟁을 통해 사조직 동기생들을 제명시켰던 선후배 기수에서는 사조직에 해당된 사람이 4성 장군까지 진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져 당시의 제명 소동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필자의 동기들은 아직도 상호 교류를 친밀하게 나누며 각종 애경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40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결국 군내의 사조직 병폐 소동의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필자의 동기회는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동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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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25
  • [김희철의 전쟁사(118)]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⑤미국, 휴전 반대하는 이승만 제거도 검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말리크의 휴전협상 제의가 있기 전인 6월11일 변영태 외무장관의 국회연설을 통해 ‘38선 휴전설’을 강력히 부인했으며, 양유찬 주미대사도 휴전이라는 타협은 유엔의 자살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렸고, 이후 판문점으로 장소를 옮겨 7월10일부터 15일 간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도 전선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하고 자국 내에서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던 미국은 휴전을 강행해야겠지만, 그럴 경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이승만이 큰 걸림돌이었다. 만일 이 대통령이 단독 북진한다면, 당연히 휴전은 깨지고, 미국은 다시 전쟁에 끌려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은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상당히 고차원적인 여러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이렇듯 미국의 입장에서 휴전에 결사반대하고 있는 이승만은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미국은 한 때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했다. 휴전후 20여년이 지난뒤인 1975년 8월3일 ‘뉴욕 타임스’는 새로 분류된 기밀문서에 근거를 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장관, 그리고 합동참모본부의 각 군 참모총장들이 이승만을 체포하고 남한을 다시 미군정 하에 두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미국은 다른 정책으로 선회한다. 그 이유는 반공주의의 상징인 이승만을 강압적으로 굴복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과의 열전과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서도 상당한 손실과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이 택한 다른 정책이란 선거를 통해 미국에 유리하게 행동할 인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51년 후반기부터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로 장면, 장택상, 김성수, 조병옥 등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195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을 패퇴시키고 미국 측 의견을 잘 따르는 유화적인 인물을 당선시키면 휴전협정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장면은 38도선을 분단선으로 재설정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승만의 국내에서의 입지, 특히 국회 내에서의 입지도 불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택한 돌파구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에서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여러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평소 그의 소신이기도 했다. 1948년 제헌헌법 당시 국회의 대통령 선출 방식인 간선제에 그는 마지못해 찬성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국회 간선제에 동의했지만 ‘한국 국민이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입증되면 반드시 선출 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6.25남침전쟁 발발 이후 한국인들은 공산침략에 대항해 불굴의 저항정신을 발휘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국민들이 국가 원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와 능력의 충분한 증거라고 보았으며, 이를 근거로 개헌을 추진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 등을 겪으며 ‘독재자’라는 비난을 국내외로부터 듣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과 분단 상태의 존속은 기정사실화된 결론이었고, 이에 대해 약소국 대통령인 이승만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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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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