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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11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②마오쩌둥, 고지 위주 지구전 전환 명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국군 6사단이 속해있던 호그의 미 9군단은 화천(파로호)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미 10군단이 반격을 시작하면 중공군은 화천으로 철수하게 될 것인데, 미 9군단이 화천을 점령하게 되면 중공군을 포위망에 가둘 수가 있었다. 5월20일 호그의 미 9군단이 공격을 시작했고, 23일에는 알몬드의 미 10군단도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하여 병참선이 신장돼 있었다. 따라서 지역을 쟁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했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 또한 막심했다. 이로 인해 생존자들은 지쳐있었고 탄약과 식량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5월20일부터 서부의 미 1, 9군단이 용문산 및 파로호 전투 등에서 연이은 쾌승으로 중공군에게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다. 23일부터는 중동부의 미 10군단까지 공세로 전환하자 펑더화이는 전선이 불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동서해의 제해권과 함께 제공권도 다시 확보했다. 드디어 유엔군은 신속한 반격으로 문산 북방 임진강까지 도달했으며, 5월 말이 되자 유엔군은 중공군의 4월 춘계공세에서 빼앗긴 전선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은 거의 현재의 휴전선까지 북진한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6차에 걸친 공세를 펼쳤지만 스스로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치를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고 마오쩌둥은 중공군에게 지구전으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이제 지구전에 앞서 38선 부근의 방어를 지상방어에서 지하방어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38선 부근에 대규모의 지하방어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6월 1일,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강력한 방어선 구축을 결심했다. 그는 ‘철의 삼각지’ 모두를 점령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삼각형의 저변 두 지점인 철원, 금화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철의 삼각지’는 평강(현재 북한지역)을 꼭지점으로 하고 서측의 철원, 동측의 금화를 삼각형 밑의 두 꼭지점으로 하는 지역으로, 중요한 교통로들이 통과하는 중부전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고 공격하기는 불리하고 방어에는 유리한 곳이었다. 원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원산으로의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 작전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고, 대신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는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고 화천 저수지 동쪽의 펀치볼 지대를 공격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었으나, 반대로 교착된 중부전선에서의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의 격전과 답답한 휴전협정 진행이 예고되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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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8-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7)]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③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보람과 고난의 길입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도 직업으로서의 군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청춘들을 위해 '직업군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합니다. 필자가 지난 1974년부터 썼던 17권의 일기장에 담았던 사적인 기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장으로 전역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군인의 현실과 이상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 백과사전에 사단(division, 師團)이란 “군단보다 작고 여단 및 연대보다 큰 군대 조직상의 편성 단위로 육군의 전투병과와 근무병과로 구성된 기본적인 제병협동 부대이며, 자체가 가지고 있는 수단으로 독립해서 전술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의 단위 부대이다”라고 정의 되어 있다. 전형적인 사단은 보병사단과 기계화사단이며, 그 밖에 부대의 성격과 특수임무에 따라 향토사단, 동원사단, 공수·산악사단 등도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전략미사일 부대로 구성한 포병사단도 두고 있다. 사단은 1∼2만 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며 장군에 의하여 지휘된다. 이와 같은 사단은 프랑스혁명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창안된 제도이며, 나폴레옹 1세에 의하여 개량되고, 19세기 말에 유럽 제국에서 채택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편화된 단위부대이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사단장 조성태 장군(육사 20기, 제35대 국방장관 역임)에게 현지실습 신고를 마치자 사단사령부 기밀실에서 사단의 부대 현황 및 작전계획 설명을 들었다. 당시 브리핑 내용은 향토사단으로써 전선을 형성하는 정상적인 방어라기보다는 중요시설을 방호하기 위해 책임 지역별로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고, 정상적인 방어작전을 할 수 있는 부대도 훈련단이란 명칭으로 예비군 훈련에만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작전계획 설명을 듣고 필자가 느끼기에도 적의 정상적인 공격을 방어하는 작전계획이라기 보다는 적의 침투부대가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것을 대비하는 대침투 작전계획 위주의 수준 정도이었다. 따라서 기동전과 도시방어 작전을 학습한 학생장교들의 무수한 질문이 쏟아졌고, 반면에 브리핑을 하던 작전장교와 배석한 작전참모 및 작전보좌관은 이미 작전계획 발전에 대한 복안이 세워져 있는 듯 개의치 않고 친절하게 답을 해주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물론 사단 작전참모나 보좌관은 이미 육대를 졸업한 선배였고, 그런 자신감은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시스템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학생장교들의 연구과정에서 가장 최신의 교리가 어떻게 변했고 적용할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육군대학 현지실습조는 거의 완전한 사단 참모부 편성을 해놓은 상태였다. 조에서 가장 선임장교가 사단장 역할을 맡았고 각 주특기별로 인사, 정보, 작전, 군수, 동원참모 등으로 편성을 했다. 기타 병과 장교들은 해당 분야의 보좌관을 맡아 작전계획 발전을 연구했다. 필자는 육대교육 수료후 차후 보직이 수방사 작전장교로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운이 좋게도 지닌 능력에 비해 과분하게 작전계획 연구를 총괄하는 작전참모직을 맡았다. 이때 함께 실습을 지도하는 육대교관은 연구과정과 발표를 지켜보면서 각 학생장교들을 평가를 병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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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04
  • [김희철의 전쟁사(11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①'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작전편’에 ‘병귀승 불귀구 구즉둔병좌예 졸속 미도교지구(兵貴勝 不貴久 久則鈍兵挫銳 拙速 未睹巧之久)’란 구절이 나온다. 이는 “전쟁할 때 신속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싸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지면 창끝이 무뎌지고 전투 의지는 약해진다. 준비가 조금 부족해도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뜻으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강조한 말이다. ■ 용문산 전투 압승에 이어 신속히 반격하자 중공군은 휴전회담 제의 1951년 5월21일 ‘용문산 대첩’에서 압승한 국군 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60여 km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위의 사진처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졌던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퇴각하는 중공군을 쫓아 30일까지 반격작전을 전개한 국군과 UN군은 파로호 전투 등에서 대승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자 결국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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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8-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6)]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②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보람과 고난의 길입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도 직업으로서의 군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청춘들을 위해 '직업군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합니다. 필자가 지난 1974년부터 썼던 17권의 일기장에 담았던 사적인 기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장으로 전역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군인의 현실과 이상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 서울 시내의 요란한 네온싸인 불빛이 점점 적어지더니 어느덧 반짝이는 도심을 벗어나 깜깜한 시골길에 접어들었고 실습부대 근처의 사단휴양소(간부교육대)에 도착했다. 기차에까지 마중을 나왔던 안내장교는 사단 작전장교였다. 그는 비록 대위였지만 나이가 들어보여 상호 존대를 하며 같이 이동했는데 버스안에서 자신 부대의 자랑을 어찌하던지 약간 건방지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친절하게 배정된 숙소를 설명해주고 다음날 아침 일찍 사단장 신고가 계획되어 있으니 편히 휴식을 취하라며, 아침에 다시 와서 안내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고 복귀했다. 다음날 아침, 사단장 집무실 앞 사열대에 실습조가 신고 대기를 할 때 늙어 보였던 그 안내장교는 자신이 사관학교 1년 후배인 이영돈 대위라고 정식으로 소개하며 육군대학 실습조의 보다 발전적인 신교리에 입각한 작전계획 검토를 기대한다고 읍소를 했다. 드디어 56사단장 조성태 소장(육사 20기, 제35대 국방장관 역임)이 단상에 올라 현지실습 신고를 받고 일일이 전학생 장교들과 환영의 악수를 했다. 당시 군에서 명망있는 선배들 가운데 전술·전략 분야에서 각광을 받던 조성태 사단장도 육군대학 현지실습에 대한 기대가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조 장군은 수도방위사령부가 수도권 방어 강화를 위해 부대를 개편함에 따라 사단의 작전계획을 발전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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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8-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5)] 육군대학 현지실습의 기대와 보람 ①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은 보람과 고난의 길입니다.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들도 직업으로서의 군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그 청춘들을 위해 '직업군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합니다. 필자가 지난 1974년부터 썼던 17권의 일기장에 담았던 사적인 기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전달합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장으로 전역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직업군인의 현실과 이상을 발견하길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89년 3월19일 일요일 저녁 진해역에는 군복입은 영관장교들이 어울리지 않게 더블백과 보따리 등을 짊어지고 분주하게 왕래하며 부산한 시골장의 난장판 같은 모습을 만들고 있었다. 최전방 GOP와 해안 및 향토사단 등에서 일주일간 진행되는 현지부대 실습을 위해 각 조별로 편성되어 기차를 타려고 바삐 움직이는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이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에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졸업을 약 4개월 정도 앞두고 있었으며 이미 차후 근무지가 내정된 상태였다. 그동안 참모학과 일반학 수업을 받았고 전술학교육까지 마쳐 이미 영관장교로서의 나름대로 일가견있는 전술 및 군사적 지식이 쌓여 있었다. 그날 오후 학생장교들은 그동안 학교내에서의 평소 교육시 입고있던 근무복을 전투복으로 바꿔입고 있었다. 또한 참고서적과 속옷 등 일주일간의 생필품을 더블백에 넣어 육군대학 연병장에 집합하여 실습조별로 군장검사를 받았다. 특히 3월 봄 날씨이지만 최전방부대로 실습가는 동료들은 현지 기온을 고려하여 동계피복까지 챙겨야 했다. 육대 졸업후 배치될 부대를 고려하여 현지 실습조를 편성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자신이 근무할 부대로 현지실습을 가는 만큼 잠시후 현지에서 만날 선후배에 대한 궁금증도 있어 다소 흥분 및 긴장감도 느낄 수 있었다. 통상 각 부대의 일정을 고려하고 지휘관인 사단장의 승인이 있어야 육군대학 현지실습을 부대로 선정하게 된다. 그리고 선정된 부대의 지휘관은 육군대학 현지실습에 기대를 많이 하며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면 육군대학이 아닌 보병 및 포병학교 등 병과학교에서는 중대 및 대대까지의 소부대 전술 위주로 학습을 하기 때문에 사단급 부대에 적용이 제한된다. 반면에 육군대학에서는 연대·사단급 이상의 전술 및 작전술을 교육하며, 특히 공지전투, 기동전 등 선진국의 전술 개념과 최신 교리를 학습한 육대 현지실습조가 연구 발표한 것을 참고하여 자신들의 현재 시행 중인 작전계획을 새로운 개념과 교리에 맞게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하였고, 필자도 포함된 실습조는 육군대학 교육 후 수도방위사령부 및 향토사단으로 보직이 예정된 학생장교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모두 56사단으로 향하는 열차칸에 탑승했다. 어느덧 서쪽으로 해는 기울고 한참 졸다보니 깜깜한 밤이 되어 서울역에 도착했다. 전방부대로 실습가는 동료들과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자는 아쉬운 이별을 하며 기차에서 내려 사단에서 마중 나온 버스에 올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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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30
  • [김희철의 전쟁사(113)]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1사단 12연대 3대대 작전관 한효석 중위는 “원래 퀸 고지는 미7사단 1개 중대가 방어를 하고 있다가 중공군에 빼앗겼던 것을 우리 한국군이 다시 탈환해서 2개 중대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공군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 사이에 고지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와 대대 병력을 은폐시켰다가 ‘53년 6월25일 기습을 감행했다. 고지의 아군들은 밤에 중공군이 땅속을 파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대단하게 여기질 않았다. 기습을 당한 아군은 상당수가 포로가 됐고 중대장도 한 명만 살아 남았다. 199고지의 3대대 관측소(OP)로 올라온 그 중대장은 온몸이 피투성인 채 김자열 대대장을 붙들고 울면서 기습을 받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중대 관측소(OP) 참호 속에 있다가 중공군이 올라 오길래 입구를 연락병과 함께 막아 버리고 이틀 동안 숨어 지내다가 다시 옆으로 굴을 뚫고 빠져 나왔다고 했다. 새벽에 호 속에서 뛰어 나와 고지 밑으로 마구 뒹굴어 내려오는데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연락병은 전사하고 자기만 살았다며 울먹였다. 이후부터 1사단은 중공군의 ‘두더지 작전’을 막기 위해 수색을 고지 밑까지 철저히 했다. 한편 15연대 전초진지였던 171과 퀸 고지를 중공군에게 뺏긴 뒤에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 독전하기 위해 사단사령부로 달려왔다. 테일러 장군은 “퀸 고지를 탈환할 생각은 말고 현 방어선을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1사단은 탈환전을 단념하고 방어선을 구축해 주 저항선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김동빈 사단장은 중공군들을 기만하기 위해 우선 첫째로 퀸 고지에서 주 저항선에 이어지는 산허리를 잘라 도랑을 깊게 파 지뢰를 매설해 놓았고, 두번째로 야간에는 지프 25대를 동원하여 올라갈 때는 라이트를 켜고 내려 올 때는 끄게 하면서 1백m 간격으로 계속 돌게 하여 우리 방어 진지에 대한 대량 보급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마지막으로는 고지마다 1개 분대씩의 병력을 올려 보내 작업을 시켜 후방 진지 공사가 활발한 것처럼 기만해서 감히 적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겁을 줬다. 철통 방어준비를 한 것처럼 활동한 위장 및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간 중공군은 공격 방향을 서쪽 11연대 정면으로 바꾸었고, 이때 10배 넘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켜 6·25남침전쟁사에 찬란히 기록된 베티고지 영웅 김만술 소위의 무용담이 탄생했다. 하지만 퀸 고지를 빼앗기고 얼마 안돼 노리고지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린 채 아쉽게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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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7-29
  • ‘6·25남침전쟁의 예수와 영웅’에게 무공·국민훈장 수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최초로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여 미국 참전용사 故 에밀 조세프 카폰(Emil Joseph Kapaun) 군종 신부와 호주 참전용사인 콜린 니콜라스 칸(Colin Nicholas Khan)장군에게 각각 태극무공훈장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 ‘유엔군 참전용사 훈장 수여식’에서 “참전으로 맺어진 혈맹의 인연을 되새기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겠다”면서 “역대 대통령 최초로 ‘유엔군 참전의 날’에 훈장을 수여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한국전쟁의 예수’ 故 에밀 카폰 군종 신부의 헌신적 생애 에밀 카폰 신부는 6·25남침전쟁 당시 미국 군종 신부로 참전해 '한국전쟁의 예수', ‘6.25전쟁의 성인’으로 불렸다. 이날 훈장 수여식에는 조카인 레이먼드 카폰이 대한민국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대리 수상했고, 염수정 서울대교구장 추기경과 주한 교황대사 대리인 페르난도 레이스 몬시뇰,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가 참석했다. 캔자스주 필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4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카폰 신부는 1950년 7월 군종 신부로 6·25남침전쟁에 파견됐다. 그의 소속 부대인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같은 해 11월 한국전에 불법 참전한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부대에는 곧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카폰 신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전선에 남았다. 그는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을 대피시켰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결국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도 카폰 신부는 자신보다 포로가 된 동료 병사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고, 그 와중에 이질과 폐렴에 걸려 1951년 5월23일 3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장에서 꽃핀 카폰 신부의 박애 정신은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남은 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고, 1954년 그의 생애를 담은 ‘종군 신부 카폰 이야기’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한국에는 1956년 당시 신학생이었던 故 정진석 추기경이 ‘종군신부 카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을 내면서 처음 소개됐다. 이후 그는 ‘한국전의 예수', ‘6·25 전쟁의 성인'으로 불리워왔다. 故 정 추기경은 ‘지난 3월 미국 하와이주 국립태평양 묘지에 안장된 신원 미상의 참전용사 유해 중에서 카폰 신부의 유골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고, 출간된 개정판의 서문에 추가하는 구술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카폰 신부는 전쟁터에서 인류애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교황청 시성성(순교·증거자의 시복·시성 담당)은 1993년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고, 카폰 신부 출신 교구가 성인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염 추기경은 “카폰 신부님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고 감사하다”며 “이 땅에서 전쟁 중 목숨을 바친 분들,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 청년들의 고귀한 죽음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밀 카폰 신부 유족에게 6.25전쟁 당시 카폰 신부가 착용하던 십자가가 달린 철모를 구현한 기념물을 선물하였다. 대리 수상한 레이먼드 카폰은 “이 훈장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및 전사자들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저희 삼촌을 대신하여 감사드린다. 대한민국은 저의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로 남았기 때문에 꼭 다시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 호주 왕립연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콜린 칸 장군,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문 대통령은 이어진 수여식에서 한국전쟁 때 파병된 호주군의 업적을 말하며 “호주왕립연대 소대장이었던 칸 장군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 발전상을 호주 전역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며 “전쟁 때 함께 싸웠고, 전후 복구에도 큰 힘이 되어준 장군님과 호주 참전용사들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은 칸 장군의 조카 손녀인 캐서린 엘리자베스 칸(Katherine Elisabeth Khan)이 대리 수상했다. 문 대통령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칸 장군의 유족에게도 호주군이 참전했던 가평전투를 기리는 가평석 기념석패를 선물했다. 칸 장군의 조카 증손녀 이매진 스미스는 “콜린 칸 증조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늘 훈장 수여식 참석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한국어로 말한 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하셨는데, 이 영광스러운 상과 영예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7-28
  • [김희철의 전쟁사(112)]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노리고지 쟁탈전 후에도 1사단은 317·199·박·백두산 고지 등 피아의 전초진지와 주요 감제 고지들을 둘러싼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특히 적은 ‘53년6월 하순 서울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와 들끓는 국민 여론의 기를 꺾어 보자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국군 1사단 지역 내의 171·박·퀸 고지 등에 격렬한 포격을 앞세운 공격을 가해 왔다. 1953년5월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한 김동빈 준장이 전선을 돌아봤더니 171·퀸 고지 등을 맡은 15연대의 방어선이 약간 허술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미8군 정보에 의하면 적의 공격 방향이 이들 고지 쪽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김 사단장은 미1군에서 트럭 40 대를 지원 받고 사단 본부 요원들까지 동원시켜 50m 폭의 철조망을 치는 등 15연대의 방어 진지를 재 강화시켰다. 6월25일 하오 4시께 작전 회의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적 포탄 2발이 사단 본부 후방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적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됐는 데 김 사단장이 6·25 남침전쟁 동안 당한 포격 중에서 가장 심한 거였다고 회상했다. 중공군의 포격은 국군 1사단 쪽만 집중적으로 가해졌는데, 이것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군의 사기를 꺾고 협정 조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공산군 측의 속셈이었다. 이 일대 다른 유엔군 지역엔 전혀 적의 포격이 없었다. 당시 1사단 참모장 장춘권 대령(·예비역 육군 소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적이 강 건너의 노리와 베티 고지를 공격해 올 것으로 추정하고 모든 포문을 그쪽으로 돌린 채 퀸 고지 쪽의 경계는 소홀히 했지요. 그러나 적은 이날 밤 임진강을 도하하여 퀸 고지로 달러 붙었어요. 완전히 적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지요” 어처구니없이 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성할 점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사실 당시 우리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은 서울이 너무 가깝고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으니까 긴장감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래서 이 같은 적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방어 태세를 제대로 못 갖췄다. 장 참모장이 얼마 전부터 일선 경계를 철저히 하고 철조망을 5중으로 쳐 놓으라고 독려를 했는데, 중공군이 공격한지 1시간만에 퀸 고지가 피탈됐다는 보고를 받고 지프로 달려나가 보니 연대 저항선의 철조망은 겨우 한 겹 뿐이었다. 물론 진지 구축에는 시간도 필요했고 또 당시 휴전 기운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겠지만 방어준비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었다. 화가 치민 장 참모장은 대대장을 군법 회의에 돌리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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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8
  • [김희철의 전쟁사(111)]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혈전과 격전이 거듭된 노리고지의 산병호 속에는 쌓인 시체가 썩어 구더기들이 득실득실하여 발목까지 빠졌으며, 교통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포격에 메워져 버린 흙더미에 치여 중공군을 껴안은 채 그대로 죽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지들은 피 흘린 보람도 없이 휴전 직전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한 발악적인 맹공격을 받고 빼앗겨 지금은 대부분이 군사분계선(MDL) 이북에 들어가 있다. ■ 4개월 동안의 노리고지 두더지 생활로 ‘털보’라는 별명얻은 도상보 소위 12연대 3중대 1소대장 도상보 소위는 11연대의 격전이 끝난 후인 ‘52년 12월13일, 노리고지 방어에 투입됐다. 11월14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중인 닉슨 미 부통령이 1사단 12연대를 방문하여 격려도 했다. 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미군 포와 탱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우리 한국군과 미군은 화력지원 협조본부(FSCC)를 설치해 놓고 보전포 협동 작전을 긴밀히 조정했다. 당시 유엔 공군은 피아식별을 위해 대공포판이 있는 곳은 회피하여 폭격을 가했다. 그래서 12연대가 확보하고 있던 소노리 고지에는 밤이 되면 대노리 고지의 중공군들이 내려와 호 속에서 손목에 끈으로 잡아매고 있던 국군 병사들의 대공포판을 뺏으려고 해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고지는 이렇게 인접해 있어 강 이남에 주력을 둔 아군으로서는 적의 야간 공격 때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미군 측에서는 이곳을 포기하고 강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주장도 했다. 그러나 박림항 1사단장은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자 소노리 고지는 우리가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면서 적극 반대했다. 1사단 좌우에는 영 연방군과 미 7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12월 중순 즈음에 도상보 소위는 12연대장 정영흥 대령의 “도 소위 소대가 투입해 소노리 고지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때부터 4개월 동안을 이 소노리 고지에서 두더지 생활을 했다. 고지에 도착해보니 호들이 거의 다 포격에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막힌 교통호를 파다가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중공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죽어 있는 시체를 몇 구 발견했고, 간혹 남아 있는 호 속에는 구더기들이 꽉 차 있어 발을 넣을 수도 없었다. 밤중에 순찰을 나가 졸고 있는 듯한 동초병을 깨워 보면 어느 사이에 적 총탄을 맞고 죽어 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격해오는 적들이 아군 진지에 달라붙어서 진내 사격을 요청하고 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위생병이 없어졌다. 그때 건너편 골짜기에서 그 위생병이 중공군한테 끌려가면서 “소대장님.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무차별 사격을 시켰다. 사격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더니 부르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더니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위생병은 휴전협정후에 포로 교환 때 송환돼 왔다. 도상보 소위가 ‘53년3월 하순에 이 소노리 고지에서의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했는데, 수염이 둘째 단추까지 내려와 ‘털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염을 깎고 나니까 소대원들도 전혀 몰라보았다고 한다. 그는 소노리 고지 방어의 전공으로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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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7
  • [김희철의 전쟁사(110)]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여러 차례의 공방전 끝에 많은 병력이 손실돼 11연대 수색중대가 공격 작전에 추가로 투입됐다. 너무 작아서 밥풀고지라고 곳에서 출발했는데 노리고지까지는 300m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사이는 완전히 벌판이라 그대로 가면 적에게 노출되고 마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수색중대의 3개 소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일단 고지 밑까지 접근한 다음 1소대는 소노리를, 2·3소대는 대노리 고지를 공격했다. 황병식 상사가 지휘한 1소대는 소노리 고지의 교통 호를 타고 나가다 적의 포격을 만나 모두 전사하고 생존한 10명이 계속 전진해서 대노리 고지 우측으로 도달했다. 날이 밝았는데도 포격으로 먼지와 포연이 하늘을 덮어 좌우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이었지만 동굴 속에서 저항하는 적들에게 수류탄을 넣어 폭사시키고 올라가 굴속을 향해 “손들고 나와라..!”라고 소리를 치니까 아군 무전병 2명이 손을 들고나왔다. 알고 보니 이 고지 쟁탈전 중 후퇴를 못한 채 동굴속에 남았던 아군이 워낙 깊고 캄캄하니까 서로 분간을 못하고 중공군과 함께 이때까지 지낸 거였다. 이 동굴을 점령하고 인원을 확인해보니 소대장 황병식 상사를 포함해 4명밖에 안 남았다. 대노리 고지 좌측을 공격한 2, 3소대는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오전 10시쯤 되니까 중공군이 맹렬히 반격했는데 이때 생존 전우 3명과 같이 동굴 속에 들어가 방어를 했다.수색중대 1소대장 황상사는 추가로 투입돼 고지로 올라온 2대대 6중대장 정대선 대위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12시쯤 내려왔다. 전사자들을 처리하고 있는 밥풀고지에 오니까 황상사는 이미 전사한 것으로 보고가 돼 있었다. 중공군은 물론 우리의 몇 배가되는 전사상자를 냈지만 11연대 수색중대가 거의 전멸되고 만 것은 너무도 처절한 희생이었다. 연대 수색중대와의 치열한 접전에서 전투력이 약화된 중공군은 임무를 교대해 올라온 6중대 전우들에게는 저항도 전혀 못한 채 참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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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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