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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9)]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법,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자의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옛 학문을 되풀이하여 연구하고, 현실을 처리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이해하여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근무지에서 시작하는 신입이나 전입직원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해 쩔쩔매거나, 간혹 그동안 자신의 커리어만을 믿고 앞서가다가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도 중대장 근무를 잘 마무리하여 자신만만하게 사단 작전처 근무를 시작했는데 실상은 매사에 실수투성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격언이 머리를 때렸다. ■ 새로운 환경인 로마의 법을 따르기 위해 친절한 스승을 만나다 초급간부와 병사들을 눈·입·발로 보고 지시하며 앞서 나아가 따라오게 하는 중대장보다 지시를 받거나 미리 예측하여 문서로 작성해 층층의 상급자(작전보좌관→작전참모→인접 참모들 협조서명→참모장→사단장)에게 각각 검토를 받고 결재 후 예하부대에 근거있게 지시하고 확인하는 상급부대의 실무장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중대장 시절에는 업무가 부여되면 고민하여 착안한 사항들을 소대장들과 병사들에게 말로 지시하고 확인하면 됐는데 상급부대로 갈수록 구두 지시 보다는 문서로 지시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심지어는 사단장과 군단장이 구두로 지시를 했더라도 다시 정리하여 문서로 지시하는 것은 당연한 실무자의 몫이었다. 말만으로 명령하다가 매사를 문서로 지시를 하기 위해서는 문서 작성 능력이 필요했는데, 대대 교육장교를 경험했던 필자였지만 체계적인 문서작성 요령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때 작전처의 선임장교인 염철한 대위(삼사15기)의 친절한 가르침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은 사기진작을 위한 허언(虛言) 작전장교의 일상은 새벽 상황보고 준비를 해서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일일작전 상황보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야간 작전 상황보고와 아침 상황보고 준비를 확인함으로써 끝난다. 그러다 보니 새벽별빛 아래에서 오솔길을 따라 출근하여 주간에 상급부대 현황 파악 보고와 수시 보고 준비를 하는 등 바쁘게 달리다가 자정이 다 되어야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숙소로 향한다. 전입 얼마 안되어 상급자나 선임장교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지만 곧 다음 일을 위해 펜대를 잡으면 앞이 망막해졌다. 얼마나 모르는 것이 이렇게도 많은 대도 “무슨 열을 아는 신입장교인가..?”하고 반성했다. 돌이켜 보면 지쳐서 사기 떨어지지 말라고 격려하는 허언(虛言)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펜을 들고 다음 작전보고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인터폰이 울리며 작전참모가 호출을 했다. 수첩을 챙겨 상황실 벙커에서 부리나케 본청 참모실로 갔다. 김관진 작전참모(육사28기, 전 국방부장관/국가안보실장)는 메모지에 읽기 힘든 글자 모양과 선을 그리며 지침을 주었다. “제목은 000작전인데 사단장 의도가 ~ XX ~이니까 너는 박스를 그려 현황을 넣고 다음에 실태를 제시하고, 앞으로는 ~ ~~이렇게 되도록 작성해서 가지고 와라”라며 승천하는 용 같은 지렁이 모양과 글씨 그리고 동그라미가 그려진 메모지 6장을 주고는 필자의 얼굴을 보면서 “알겠냐…?”라고 지시를 하였다. “예, 네~”하고 쉽게 대답은 했으나 상황실 벙커로 올라오며 메모지의 지렁이 기어가는 선들과 알 수 없는 글자 모양에 혼돈 만 가중되었다. 그나마 지침 없이 000작전 지시문 만들어 와라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본인이 직접 메모지에 요약하며 방향을 제시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무실 자리에 도착해서 한숨을 쉬고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고민하는 필자를 지켜보던 선임장교 진종면 대위(삼사14기)가 다가왔다. 어깨 너머로 제목과 내용을 보던 그는 “잠시 기다려봐”라는 말과 함께 후송을 다녀온 뒤라 목발을 집고 절뚝거리며 이동해 캐비넷을 뒤적이더니 문서 한뭉치를 꺼냈다. “김대위, 이것은 작년에 비슷한 내용으로 작성했던 것이야. 참고가 될꺼야…!” ■ ‘온고지신(溫故知新)’, 스펀지처럼 옛 것을 빨아드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것보다 기존 멤버인 선임작전장교들의 지식과 자료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여야 한다. 밤새 준비를 하여 새벽 상황보고 전에 작전보좌관 검토를 받고 참모실에 들어갔다. 작전참모는 보고서를 넘겨보더니 서명을 하고 인접 참모 협조서명을 받아오라고 지시했다. 바빠졌다. 상황보고 전에 끝내야 한다. 인접 참모실에 갔으나 이미 다른 실무자가 들어가 보고 중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여 할 수 없이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보고 중이던 해당 참모부의 다른 실무자를 제끼고 필자의 보고서를 내밀면서 사단장 지시로 급하게 들어왔으니 협조서명을 부탁드린다고 얘기했다. 이렇게 협조서명을 무사히 마치고 작전참모에게 보고서를 가져갔다. 작전참모는 아침 일일작전 상황보고가 끝나자 곧바로 사단장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작전처의 오전은 그나마 휴식 시간이다. 밤새 보고서와 씨름해 피로가 밀려오며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때 버릇이 생겨 지금도 의자에 앉으면 졸음이 몰려온다. 특히 버스 등 차를 타면 그 진동에 바로 잠이 드는 습관이 생겼다. 깜빡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또 인터폰이 울렸다. 원래 다정했던 작전참모의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는 느낌을 받고 긴장하여 참모실로 내려갔다. 다행이도 보고서에 사단장 서명이 되어 있었다. 작전참모는 전날 사단장을 수행하며 이미 소통을 하였기에 사단장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시 받은 다음날 아침에 바로 결재를 할 수 있었고 그 작전은 정상적으로 신속하게 시행되었다. 허나, 보고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빨간 펜으로 체크가 되어 있었고 그 체크는 세 군데나 더 있었다. 김관진 작전참모는 “야, 김희철..! 사단장님이 오자를 체크했는데 앞으로도 난 오자 체크는 안하고 개념만 맞으면 바로 결재 들어갈꺼다. 그러니 앞으로 오자가 또 나오면 니가 책임져…!”하고 미소띤 질책과 함께 수고했다는 말을 던졌다. 옥에 티인 그 오자가 한계였지만 오후에 지시를 받고 준비해서 다음날 아침에 결재가 나올 때의 성취감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새로운 근무지에서 전입·신입직원의 노하우는 스펀지처럼 기존 멤버들의 지식을 흡수해서 업무를 해야한다. 더불어 탁월한 직원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마음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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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1
  • [김희철의 전쟁사(32)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의 진짜영웅 이근식 소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철수는 했지만 당시의 전투지역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식사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2일째 식사를 못하고 건빵과 물만 먹고 마시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2일간 밀렸던 식사가 노무자들의 지게로 운반되어 도착했다. 소대원들은 소금과 함께 주먹만한 삶은 쇠고기 덩어리를 반찬으로 철모에 수북히 담겨있는 밥 2일분을 다 한끼로 먹어 치웠다. 대원들의 얼굴에 희색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우리는 5시간 정도 푹 쉬고 잤다. 재 공격을 위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대 통신병이 SCR-300 무전기를 가지고 3소대장 이소위에게 왔다. 1대대 작전장교(서정남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렸다. ■ "국가를 위한 희생은 사치품 같은 소리…,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3소대장, 공격하느라 수고가 많지? 대대장님(공정식소령 해사1기, 훗날 해병대 사령관 역임)께서 이번 공격에서는 반드시 '무명고지'를 점령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으니 필히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격려하는 교신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긴박했으면 대대 작전장교가 중대장을 제치고 공격소대장에게 직접 목표점령을 지시했을까? 그 특별지시는 소대원들에게 큰 격려가 됐고 이번 공격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임무인가를 다시 깨우쳐 주었고,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17:00시, 2차 공격준비를 위해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켰다. 총원 40여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소대장을 포함하여 2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번쩍이고 있었다. 그속에는 살기가 있었다.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각오였다. 이소위는 살아남은 소대원들에게 "자, 아침 공격에서 우리는 많은 동료 해병을 잃었다. 그러나 목표는 점령 못했다. 이번에는 필히 목표를 점령하여 전우의 원수를 갚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다. 나를 봤지? 적탄에 맞았어도 나는 살아있지 않나…"라며 분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대원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지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그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이제 공격을 개시하면 소대원 중 누군가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것이고 그것이 운을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제 곧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이 때 무엇을 생각 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는 사치품과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전해졌다. 오전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이소위는 산악 지형의 특성으로 총보다 수류탄이 더 효과적인 공격임을 깨닫고 수류탄을 4개씩 분배했다. 소대원들의 손을 잡으며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점령 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손을 굳게 잡은 대원들의 얼굴은 무표정 했다 17:55분, 미 해병대의 항공기 와 155mm야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지원받고 5분 뒤에 그들은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공격대기지점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이소위는 목표 정상에 우선 뛰어 올라가 수류탄 돌격공격을 하기위해 3명의 특공대를 편성했고 중대장에게 연막차장 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멀리 후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105mm 연막탄이 "쉬"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목표 너머 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3탄과 제4탄이 날아와 정확히 목표상에 다시 명중했다. 이소위는 무턱대고 일어서서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연막 속으로 목표 정상에 뛰어 올랐다. 연막으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적이 파 놓은 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왼쪽에서 폭발했다. 나는 다시 나의 왼쪽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때마침 옆을 보니 특공대로 자원한 자동화기사수 고호선해병이 바로 오른쪽 호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호 속에는 적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체온을 느낄 정도였다. 정상에 소대장과 함께 둘이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이 들어있는 호 앞 너머에서부터 그 지긋지긋한 소련제 수류탄이 역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마치 까마귀 떼가 죽음의 사신으로 그들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부 그 둘의 머리 위로 지나쳐 뒤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그 중의 1발이 고해병이 있는 호 속으로 떨어졌다. "앗" 하며 놀라는 순간 고해병은 적의 수류탄을 주워 적진으로 되던졌다. 적진에서 "쾅"하고 터졌다. 계속 20~30발 정도의 수류탄이 날아오더니 뜸해졌고 잠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하고 둘의 것을 모으니 수류탄이 8발이다. 이소위는 오전 공격을 통해 적이 바로 앞 너머 10m정도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격발한 후 멀리. 가까이 그리고 좌우로 고루고루 적진에 던졌다. 자동화기사수 고해병은 적의 역습에 대비해 경계했다. "쾅,쾅…"하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오른쪽.왼쪽에서. 그리고 멀리서 들렸다. 8발의 수류탄 폭발 소리를 세었다. 조용해졌다. 이제 육박전을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무아지경으로 무명고지 정상에 우뚝 올라섰다. 고해병도 뒤따랐다. 앞에 도망가는 적들이 보였다. 그는 "돌격 앞으로!"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의 "돌격명령"은 적 격멸과 동시에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방어중에 있던 적을 소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보다 더 컸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승리의 소리였다. 그러나 "와" 하는 해병들의 돌격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와서 고지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소대원들은 굴러오는 적의 수류탄을 피해 정상에서 30~40m 아래쪽으로 물러서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이소위는 다시 소대원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았다. 대원들이 쫓아오건 말건 좀 무모했지만 그리고 쫓아가 적을 잡아서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적 1명을 뒤에서 덮쳐서 잡았다.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포로는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했다. 그 절망에 찬 애절한 표정의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부하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총구를 치우고 "일어섯" 했을 때, "살았다"하는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보이던 그 포로의 얼굴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자비를 베푸는 자의 희열을 맛본 것 같았으며 결국 그 포로를 사살하지 않고 후송시켰다. 그리고 이소위는 목표를 점령할 때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의해 몸의 왼쪽 부분, 겨드랑이, 왼쪽 다리 특히 무릎 관절 속으로 파편창을 입은 것을 잊고 있다가 목표 점령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왼쪽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쓰러졌다. 이근식 소위는 어두운 밤길 고지 능선을 따라 덩치 큰 3.5인치 로켓포 사수의 등에 엎혀 밤새 10시간 동안 넘어지고 뒹굴면서 동이 틀 무렵에 구호소에 도착했다. 그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원주를 거쳐 미군 수송기편으로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1개월간 입원치료 후 퇴원하여 다시 전투에 임했다. ■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한 대승리 그러나 계속된 교전으로 피해만 늘어나자, 2중대 3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수류탄을 이용하는 맹활약으로 중간 목표를 일몰 이후에 점령했던 사례를 참고로 해병대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정상적인 주간 공격보다는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1해병연대는 6월11일 02시에 무지원, 무조명하 야간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3시간 만에 방심했던 적들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전과확대로 전환하여 대암산(1,314고지, 목표15)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국군 해병의 공격기세를 유지한 계속 공격으로 전투력이 저하된 인민군들은 6월19일 도솔산(목표24)을 포기하고 대우산으로 도주함으로써 ‘도솔산전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투 중 적들이 노획한 아군 무전기로 감청을 잘하자 해병 1연대 장병들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에게 당시 잘알려지지 않은 제주 사투리로 무전 교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4.3사건’으로 자신 및 가족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위해 입대한 제주도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26일, 국군 해병 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 이라는 휘호와 함께 부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연대장과 이근식, 오정근, 김의태 소위는 미 은성무공훈장, 대대장들과 고호선해병 등에게는 미 동성무공훈장, 2중대장에게는 "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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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2-26
  • [김희철의 전쟁사(31)] 도솔산 전투 승리를 축하한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기념비, ‘무적해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 3군단은 ‘51년 중공군의 기습적인 제 6차공세(5월공세)로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이후, ‘용문산대첩’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며 쾌승한 장도영장군의 6사단은 5월 21일부터 양평에서 양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했다. 이때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며 대승을 올리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한편 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 1연대 수색중대가 대관령에 도착하여 선점했다. 이후 한신 대령의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리고 백선엽 장군의 1군단은 계속 북진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5월 말이 되자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5차공세인 4월 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의 전선이었던 캔사스(KANSAS)선까지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도솔산전투’는 처음에 캔사스(KANSAS)선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미 해병대 1사단의 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했다. 따라서 파로호 전투에서 혁혁하게 공을 세운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가 6월3일 도솔산 공격 임무를 인수하여 6월4일 첫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지역은 38선 이북으로 양구군 해안면 칠정리의 도솔산(1,148m)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유엔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캔사스선으로 철수한 공산군은 북한강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중공군 9병단이 축차적인 지연전을 실시하며 점령 중이었고, 북한강 우측인 이지역에는 북한 인민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펀치볼과 도솔산 일대의 전술적인 이점과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난공불락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중 도솔산 일대에 배치된 북한 인민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므로 국군 해병대는 한 걸음도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국군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인민군이 예상치 못한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전투의 발판이 되었다. ■ 도솔산 전투의 진짜 영웅, ‘수류탄 돌격 소대장’ 이근식 소위(예비역 대령) 국군 해병대 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는 1차 목표를 대암산(1,314고지, 목표15)로 정하고 최초 2개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첫 공격이 좌절되자 6월5일에는 위 상황도와 같이 3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해병대의 공격 4일째 되는 날인 6월7일 05:00시에 이근식 소위(해간 3기)는 해병 1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장으로서 "도솔산"공격 중간목표 중의 제 4목표인 "무명고지"에 대한 공격명령을 중대장 이응덕 중위(해간1기)으로 부터 받았다. 앞서 최초공격을 하던 1소대장 최영남 소위(해간.3기)가 중상을 입고 후송되어 선임하사관이 소대를 지휘했으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철수했다. 다시 2개소대로 재공격했으나 역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적의 소련제 수류탄 투척을 수반한 완강한 저항에 또 실패했다. 3소대장 이근식 소위는 소대원들을 공격대기 지점으로 인솔하던 중 상공에서 포탄의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낙하하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왼쪽 어깨등에 파편을 맞아 피가 흘렀으나 경상이었다. 다행히 소대원들의 피해는 없었다. 09:00시 소대는 짙은 안개가 사라지고 정상의 적 진지가 희미하게 보이는 돌격선에서 착검을 하고 돌격준비를 완료했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50~60m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수류탄 투척 거리 밖이다. 적의 진지는 산 정상에 있고 소대는 밑에서 돌과 흙으로 구성된 경사진 능선을 중심으로 기어올라가는 자세로 공격해야 했다. 2,3소대장의 "돌격 앞으로!"의 명령으로 호각소리와 함께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그 때 돌격 함성과 함께 정상의 적 진지로부터 소련제 수류탄이 위로부터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굴러내려와 폭발하였고 동시에 우측의 암벽진지로부터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불리한 여건이었으므로 앞으로 나가는 해병의 수보다 쓰러지는 해병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 적의 목전에서 공격은 돈좌되었다. 이소위는 수차에 걸친 공격 중에 많은 부하 해병들이 전사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책감과 강박감에 솟구쳐 오르는 통분을 억누르기 힘들었고 사기가 떨어진 대원들은 소대장의 얼굴 만 보고 있었다. 순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마비되어 어떤 결심을 한 표정으로 2소대장에게 "김 소위! 내가 저 정상의 적 진지를 분쇄할테니 뒤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2소대장은 "않돼. 올라가면 죽는 거야!" 하며 극구 그를 말렸다. 그러나 이소위는 “단지 나의 책임을 다할뿐이다" 라는 무언의 항변을 하면서 뒤쪽에 엎드려 있는 소대원들에게 "산 위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면 쏴!"라고 지시하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 2발을 양손에 쥐고 허리에 수류탄 2발을 차고 포복으로 정상의 적 진지를 향하여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는 바로 머리위에서 적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철모가 아닌 전투모를 쓰고 있었지만 무아 중에 벌떡 일어나 정상에 우뚝 섰다. 적을 2~3m 거리에서 내려다 보는 위치 였다. 적들은 방심한 채 옆과 앞뒤로 판 호안에서 수류탄을 모아놓고 아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적이 주어서 다시 던지는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양손에 쥐고있던 안전핀을 뺀 수류탄 2발을 미리 격발시켰다. "딱,딱"하고 수류탄의 격발 소리가 적막을 뚫고 들리는 순간 수그려져 있던 적의 머리가 들렸다. 적의 눈과 그의 눈이 소리 없는 불꽃으로 부딪쳤다. 순간 쌍방은 놀란 나머지 꼼짝도 않했다. 그는 바로 그들 속으로 수류탄 2발을 던지고 엎드렸다. "쾅,쾅"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수류탄도 뽑아 격발시키고 좀 멀리 던졌다. 그리고 해병들이 엎드려 있는 쪽으로 마치 수영선수가 다이빙하듯이 붕 떠서 40~50m의 거리를 곤두박질하면서 돌아올 때 2개의 수류탄 폭음이 뒤에서 들렸다. 순간 함성이 들렸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우리 소대장님이 제일이다!" 순식간에 대원들의 두려움이 소멸된 듯 했다. 사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이후 그에게는 "수류탄 돌격 소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느정도 사기를 회복한 소대원들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이 다시 공격을 계속했다. 그때 이소위는 복부에 적탄을 맞고 그 충격으로 몇바퀴 뒤로 뒹굴었고 순간적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권총 탄띠의 왼쪽 허리에 차고 있던 탄창(칼빈 소총탄 15발) 2개의 주머니가 그의 복부쪽으로 돌아와 있어서 그 탄창의 맨 위 쪽에 있던 총알탄피 2개를 관통하고 관통력이 약해져서 총알이 회전하면서 그의 전투복을 뚫고 속내의를 뚫고 복부 위에서 기적적으로 멈췄다. 소대장이 적탄에 맞은 것을 보고 심통한 표정에 잠겨있던 대원들도 그가 "안 죽었어!"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니 다시 함성이 일어났다. "우리 소대장님 만세!" 정말 천우신조였다. 그는 "이제 나는 죽지 않는다'라며 자신감과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중대장에게 무전기로 상황보고를 하고 중대본부 지역으로 전원이 재공격준비를 위해 철수 하였다. 중대장도 그들의 전투상황을 70~80m정도 뒤에 있는 고지에서 관측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질책도 없었다.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8)] 직업군인이란 ‘침과대적(枕戈待敵)’속에서도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줄 알아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침과대적(枕戈待敵)’이란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항상 전투태세(戰鬪態勢)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따라서 군인은 어느 직책이든지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시간이 제한된다. 즉, 휴일이나 휴가중에도 부대에 비상이 걸리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망서리지 않고 부대로 복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 처음으로 마음 놓고 망중한(忙中閑)의 휴가 즐기다 육군소위로 임관해서부터 GP장과 대대작전항공장교, 중대장 근무를 하면서도 마음 놓고 즐기는 제대로 된 휴가를 보낸 적이 없었다. 친구를 만나거나 집안 행사에 참석하더라도 ‘침과대적(枕戈待敵)’의 마음으로 잠시 눈 도장만 찍고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심지어 결혼 휴가 때에도 부대 일정이 조정되어 결혼식을 마치고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복귀해 훈련 평가에 참여했다.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스탭 꼬인 결혼식 날짜와 지휘관의 줄탁동시(啐啄同時)’ 참조)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휴가를 만끽했다. 사단에서는 이취임식을 하고 바로 출근하라고 했는데 강호갑 대대장(육사31기)의 배려로 연대장 신고 일주일전에 중대장 이취임식을 하도록 조치하여 모처럼 여유있는 휴가를 출발했다. 전방 근무를 시작하면서 친척 어른들과 친구들도 여유를 갖고 만날 수 있는 휴가를 보낸 적이 별로 없어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따라서 이취임식을 마치자 바로 서울로 출발해 처가도 들려 중대장을 무사히 마친 인사도 드렸다. 이어서 이미 서울로 이동하여 근무하는 옛 선배와 동기들을 만나 소주잔도 기울였다. 또 작은 할아버지, 고모님들, 외삼촌….. 가능한 모든 친척을 찾아 뵙고, 고향집에서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제대로 못간 신혼여행을 보상하는 의미로 따뜻한 남쪽지방 여행도 갈 수 있었다. 연애시절 추억이 담긴 창원, 마산과 논개의 한이 서린 진주 진양호 등을 거치며 부부만의 알콩달콩한 시간도 가졌다. 이 모두는 당시 필자의 소속이 이임한 부대로 되어있으나 이미 임무를 교대했기에 부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후임자가 처리를 하고 본인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에서 망중한(忙中閑)의 휴가를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임무 교대후 전출 시와 전역할 때 뿐인 것 같다. ■ 마음 놓고 즐기는 휴가를 당분간 포기한 사단작전장교 근무 시작 휴가 복귀해서는 바빴다. 연대장에게 전출신고를 하고 아파트에 돌아와 이사짐을 싸기 시작했다. 결혼식 이후 3년4개월동안 벌써 6번째 이사이다. 최초 육단리 관사의 신혼 살림을 시작으로, 6개월간의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기 위해 광주상무대 백일아파트로, 교육 수료후 다시 육단리 셋방에서 중대장을 시작하고, 당시 6개월주기의 GOP부대 교대에 따라 적근동 관사, 또 다시 삼거리 아파트로 이동했다가 이번엔 중대장을 마치고 사단본부 아파트로 이사를 준비했다. 1987년 3월말 사단본부 첫 출근을 위해 새벽에 오토바이를 운전하여 삼거리 아파트를 나서자 늦겨울이자 이른 봄의 폭설이 내렸다. 약 1시간 거리의 사단본부를 향해 출발했지만 눈길은 미끄러웠고 눈발은 점점 더 강해져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결국 사단본부 앞에서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간신히 사무실에 출근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때마침 작전처 선임 대침투장교인 진종면 대위(삼사14기)가 축구경기 중 다리가 탈골되어 춘천으로 후송을 떠나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 공백을 메우느라 고생하던 정규작전장교 염철한 대위(삼사15기)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느라 손발이 얼고 눈사람같이 변한 모습의 필자를 너무도 반겨주었다. 다음날 가족이 직접 군 트럭에 이사짐을 챙겨 사단본부 아파트 503호로 이사를 했고, 그렇게 마음 놓고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휴가를 당분간 포기한 사단작전장교 근무는 시작됐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24
  • [김희철의 전쟁사](30) 미군, 한국전에서 2주간의 공방에도 점령 못한 최초의 사례로 희생자만 낳은 ‘단장의 능선’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치열했던 고지전이 일어난 곳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전투지역은 ‘단장의 능선’이다. 한창 인기를 끌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중에서도 ‘단장의 능선’이라는 맵이 있었을 정도이다. ‘단장의 능선’은 강원 양구와 인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중 894고지, 931고지, 851고지를 연결하는 5km 정도의 능선을 말하며, 지금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은 연합통신 특파원이었던 스탠 카터(Stan Carter)가 전투상황을 취재하면서 어느 전방대대 구호소를 방문했을 때 한 부상병이 벌벌 떨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라고 고통스럽게 부르짖은 데에서 암시를 받아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여 이후부터 931고지 일대를 ‘단장의 능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한 프랑스 감독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1955년에 발표했고 1956년 오스카상 다큐멘터리 부분에 출품도 했는데 영화제목은 'Cr?vecœur'였다. 영어로 하면 'Heartbreak' 이며 한국어로 번역하면 '단장(斷腸 -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롭다)'이라는 의미이다. ‘단장의 능선 전투’는 1951년 7월 10일 개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 측이 고의적으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피의 능선 전투’와 바로 이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1951년 9월13일 ~ 10월13일 동안의 이 전투에서는 미2사단이 예하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대대와 미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하여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미 2사단은 단장의 능선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6, 12사단 및 중공군 204사단과의 일진일퇴를 벌이며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단장의 능선’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역사, 2만5000명의 젊음을 앗아간 치열했던 전투 피의 능선 전투(8월18일~9월5일)에서 인민군을 몰아낸 미 2사단 정보참모는 적의저항이 경미할 것으로 예상하며 공격 기세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포병사령관 워커 대령 등 연대급 지휘관들은 피의 능선처럼 단장의 능선도 저항이 완강할 것이라 고 건의했다.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은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1개 연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만으로 9월 13일부터 단장의 능선 공격작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단장의 능선 931고지에 주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소모를 자초하게 되었다. 5개 포병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은 미 23연대는 18일 야간 공격까지 감행하여 중간 목표인 850고지를 점령하였고 병행 공격하던 좌인접 미 9연대 2대대가 894고지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미 2사단장 디사조 준장이 9월20일 귀국하고 후임으로 로버트 염 소장이 부임했는데, 23일 미 23연대 1대대가 931고지를 점령했지만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었다. 9월 26일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가 다시 공격하였으나 피해만 늘어나 27일 공격작전을 중단시키고 재편성하였다. 미 2사단 23연대에 의해 시행된 이 ‘1차 공격 전투’는 미군이 한국전을 통틀어 2주간의 공방을 벌이면서도 점령을 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의1차 공격에서 실패를 교훈삼아 사단장 로버트 염 소장은 3개연대를 동시에 투입시키는 ‘터치다운 작전’을 시행하였다. 위의 상황도와 같이 2차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72전차대대가 좌측 문등리 계곡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10월1일~5일 간에 사단공병대대로 도로를 개통하였으며, 스터만 특수임무부대(전차1개중대)는 우측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을 교란시켰다. 2차 공격은 10월5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미 23연대 1대대는 851고지를 공격하여 931고지에 대한 적의 증원을 견제하고 2대대와 프랑스대대는 6일 아침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좌측 미 38연대도 단장의 능선 서측방 490고지와 728고지를 점령하였지만 미 9연대는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867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7일 미 23연대는 2개 대대를 추가 투입하여 851고지를 공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기일전한 미 9연대가 단장의 능선 서측방 작전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미 38연대는 8일에 636고지를, 9일에는 네덜란드대대와 협조하여 610고지를 점령하였을 뿐 더 이상 공격이 부진하였다. 이때 사단공병대대가 2구간 도로를 개통하여 10일에 2차 공격의 마지막 단계 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동안 준비해왔던 제72전차대대가 충격을 가하면서 단장의 능선 서측 문등리 계곡으로 돌입하여 북괴군을 유린함으로써 진지 교대차 남진하던 중공군 204사단을 분산시키고 적 후방을 교란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미 23연대와 프랑스대대는 능선의 동측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전 협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제9연대는 문등리 계곡 서측에서 병행공격을 실시하였다. 11일 미 23연대는 520고지를, 미 38연대는 905고지를 탈취하면서 미 2사단은 대부분 작전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 23연대 3대대가 서쪽에서 851고지를 공격하고 1대대와 프랑스대대가 남쪽에서 주 능선을 따라 진출하여 격전을 치른 끝에 13일 ‘단장의 능선 전투’ 최종 목표인 851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성공리에 작전을 종료하게 되었다. 적군 2만1000여 명, 아군 3700여명의 피로 ‘단장의 능선’ 확보...휴전회담 재개 약 1개월 동안 일진일퇴의 백병전을 거듭한 끝에 유엔군이 적의 최후 거점을 점령함으로써 전투가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탄약 69만 7000발, 항공기 출격 842회, 폭탄 투하 250톤이라는 엄청난 화력지원을 하였다. 또한 탱크를 이용해 충격을 가하는 기동전과 육박전에 이어 헬리콥터 작전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날에는 견고한 진지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까지 동원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과 중공군 3개 사단은 사상자가 21,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단장의 능선 고지들을 내주고 지혜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미 2보병사단 또한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단장의 능선’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함으로써 가칠봉과 백석산 사이에 한국군 쪽으로 생긴 공산측의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정리/조정하였다. 이 전투가 끝난지 9일 후,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공산군 측이 유엔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여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을 재개했지만, 결국 다른 의제들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휴전회담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로서 격전의 현장에 세워진 ‘비목(碑木) 비석’의 내용처럼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아까운 젊음들의 피만 부르는 고지쟁탈전은 1953년 7월까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2-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7)] 삶이란 우주생명에 기여하고 사라지는 것/흔적을 남기지 않고 후임 중대장에게 길을 열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 연구소장] 하늘아래 의미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기의 존재 의의가 무엇인가? 그것을 생사를 걸고 찾아라! 그리고 때와 장소를 알아 찾은 것을 아낌없이 태워라! 주변을 밝히려 자신을 태우는 태우는 촛불과 같이…….세상사 마무리 또한 중요한 것이니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고 증발해 버린 물과 같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져라! 남을 살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대인(大人)의 도(道)이다. 사나이여! “대인의 길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 연속된 훈련, 평가, 검열이라는 '극한' 속에서 여유를 찾아… 인접 사단 지뢰 사고로 긴장된 가운데 6월20일에 시작된 한달간의 GOP철책을 이중화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작전지역의 급경사도로인 중고개 도로 포장공사에 투입되었다. 바로 이어 8월이 되자 4주간의 대대전술종합훈련이 있었다. 먼저 공지합동훈련으로 장거리 행군을 하여 장군산 훈련장에 도착한 후 작전항공장교의 유도로 공군 전투기가 표적에 폭격을 하고 우리 중대가 대대의 주공을 맡아 공격하여 목표를 점령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마침 현장지도를 나온 정성호 연대장(육사22기)은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을 모아 격려를 하면서 지휘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연대장은 월남전이 치열할 때 소대장으로 참전했는데 그때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상급 명령으로 어느 마을을 수색하라는 작전 지시를 받고 그 마을 입구에 도착했는데 너무 조용하여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껴 전진을 중단시키고 적정을 다시한번 더 살피고 있었다”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병행 수색을 하던 인접 소대는 정지 없이 그대로 마을로 진입하다가 베트공 매복조의 집중사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상황을 확인한 연대장의 소대는 측방 공격으로 베트공을 타격하여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정 연대장은 지휘자의 직감과 통찰력은 부대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강조하고 훈련장을 떠났다. 4주간의 대대전술종합훈련이 끝나자 타부대 경계지원, 유격훈련, 추계진지공사, 사단 전투지휘검열 등이 계속 이어졌다. 연속된 훈련, 평가, 공사, 검열 속에서 어느덧 중대장 시절 막바지에 이르렀다. 생도시절 훈육관이자 대대 교육장교 시절 지휘관으로 모셨던 송영근(육사27기, 기무사령관,19대 국회의원 역임)장군이 강조했던 가르침을 실천하여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겸손하게 임하되, 자기일에 정통하라!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는 이 세 가지의 근무자세를 이후 어느 보직을 부여 받아도 변함없이 적용함으로써 극한 속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 상급 지휘관 교체 시 생존 방법은 중용지도(中庸之道) 1984년 12월부터 근 2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부대를 멋있게 지휘했던 양치규 대대장(육사29기, 32사단장, 방사청장 역임)이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고 3군 사령부로 영전하게 되었다. 추계진지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86년 10월 고별순시를 하시던 대대장 부부 앞에서 중대원들은 부모님과 이별하듯 아쉬워 했고 사모님은 눈가에 이슬을 감추며 그렇게 떠났다.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던 필자도 그동안 존경했고 정들었던 대대장을 떠나보내기 싫었지만 아쉬움을 달래는 마음이 식기도 전에 신임 지휘관인 강호갑 대대장(육사31기)의 지휘방침을 따르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급 지휘관이 바뀌었는데도 과거에 안주하면 절대 안된다. 그동안의 절차, 예절, 근무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운 상급자에게 맞추어야 한다. 일단은 새로 부임한 상급자의 방침을 따라서 전환하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과 관습에 익숙해 있더라도 잘 아는 것처럼 너무 나서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마침 육사 2년 선배들의 유신사무관 모집이 있었는데 사단의 7명 선배중에 6명이 동시에 응시하는 상황이 벌어져 사단이 발칵 뒤집혔다. 필자가 근무하는 사단에서 유별나게도 사무관 지원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전환한 선배들 중에는 아마도 대부분이 상급 지휘관 교체 시 적응이 어려웠던 것이 그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즉, 상급 지휘관 교체시 생존 방법은 공자의 중용지도(中庸之道)가 정답이다. ■ 유종지미(有終之美) 얻으려면 흔적도 남기지 말도 아낌없이 비워라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조직사회의 당연한 흐름이다. 대대장이 교체되자 참모들도 바뀌었다. 대대 지원장교로 보병학교에서 본부대장을 헸던 3사관사관학교 출신 지원장교가 부임했다. 군으로 따지면 3년선배인 그는 소령 진급을 못하고 전방으로 부임된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또한 직전에 근무했던 보병학교에는 전역을 앞둔 대령급 장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진급을 미끼로 부하들에게 뇌물을 요구했고 본인도 더 많이 상납한 동기에게 밀렸다며 만연된 부정부패를 한탄했다. 임관 후 계속 5년 넘게 최전방생활을 한 필자에게는 청천병력 같은 소리였다. 한편은 그런 비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최전방 오지에서 열심히 하는 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방부대가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자 그의 논리비약이 심했다는 것을 그의 근무자세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일부의 부정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군 전체에 만연된 것은 아니라는 게 사실이었다. 부패 체험을 못하고도 정상적으로 진급하고 전역한 필자가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도 존경하고 배울 것이 많았던 송영근 대대장님이 6사단 작전참모로 근무 중인대도 대령 심사에서 낙선을 했고, 수도권과 육군본부 등지에서 날개를 달고 실력발휘를 하는 동기생들을 비교해볼 때 최전방 좁은 영역에서 우물안의 개구리(井中之蛙)처럼 항상 우월감에 빠져있는 필자의 초라하고도 뒤쳐진 자아를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한편 대대에서는 후반기 체육대회가 있었다. 전반기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해([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66)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GOP철책 이중화공사’ 참조) 양보하고도 싶었지만 중대장 근무 마지막 기회이고 중대원들의 사기고양과 애대심(愛隊心)을 공고하게 만들고 싶어 철저히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계주와 줄다리기에서 우승하여 종합우승 2연패를 했다. 선승구전(先勝求戰)이었다. 송영근 장군이 강조했던 “자기일에 정통하라!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는 이 세가지의 근무자세를 실천한 결과였다. 계주는 함재명 소위 등 잘 뛰는 인재를 확보한 결과였고, 줄다리기는 불량한 운동화 상태가 미끄러짐을 유발시켜 힘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축구화로 미리 준비해 연습하는 등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중대장 마지막 겨울에 3사 및 학사 초임장교 집체교육과 육사생도 전방실습 및 동계 야외종합훈련 등으로 혹한과 씨름하다보니 중대장 보직을 마칠 때가 3개월 남게 되었다. 마침 사단 작전장교로 근무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27개월 동안 중대장으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생사를 걸고 찾아서 마치 주변을 밝히려 자신을 태우는 촛불과 같이 청춘을 아낌없이 태웠다. 또한 1987년 3월16일 성공적인 중대장 이취임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를 믿고 따랐던 사랑스런 부하들과 신뢰해준 상급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중대장 마무리 또한 중요한 것이기에 필자도 철근 콘크리트를 만들고 증발해 버린 물과 같이 흔적도 남기지 말고 사라져 후임 중대장의 길을 열어 놓았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대인(大人)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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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2
  • [김희철의 전쟁사(29)] 지리한 휴전회담 속의 고지전 서막인 피의능선 전투에서 2만명의 희생자 낳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유엔군 사령부는 군사력에 의한 압력으로 협상을 강요할 필요성을 느껴 지상에서 적에게 적극적인 압력을 가하고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7월21일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에게 동부전선의 아군 취약 지역인 펀치볼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해발 450 m 내외의 분지로써, 주변의 지형은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등 1,200m 내외의 고지군으로 둘러쌓여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긴 지형이다. 펀치볼 능선에서의 공방전은 9월 중순까지 지속되었으며 이후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지금 휴전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엔군은1951년 8월 중순 장마가 그치면서 그동안 중단했던 공격을 재개했다. 이때 벤플리트 사령관은 미 2사단장에게 이른바 펀치볼이라고 불리는 해안 분지에의 공격과 병행하여 대우산 서측의 983고지(피의 능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피의 능선(Bloody Ridge)’은 양구 북방 방산면 고방산리와 동면 월운리 일대의 983고지·940고지·773고지를 잇는 능선을 가리키며,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의 종군기자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능선이 피로 물들게 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투에서 벤플리트 사령관은 한국군의 전투 기량과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국군 5사단 36연대를 미 2사단에 배속시켰다. 국군 5사단 36연대(연대장 황엽 대령)는 미 2사단과 함께 양구 북방 해안분지 서쪽에 있는 983고지의 공격을 맡게 되었다. 피의 능선 983고지 일대는 양구읍과 해안분지인 펀치볼을 내려다보며 아군 동향을 관측하고 포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북한군은 이곳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해 놓았을 뿐 아니라,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 병력을 집중시켜 배치하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 2700명 희생으로 북한군 1만5000명 사살하며 ‘피의 능선’ 완전장악 성공 국군 36연대는 8월 18일 새벽부터 미군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북한군 제12사단이 지키는 983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밤까지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북한군이 진지 전방에 대규모로 매설해 놓은 지뢰 때문에 적의 방어선 돌파에 실패했다. 그러자 국군 제36연대는 피의능선 983고지 전방에 소수 병력으로 고착시키며 북한군 27사단이 지키는 동쪽의 940고지와 773고지로 우회하여 공격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8월 19일부터 773고지와 940고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해서 8월 20일 773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940고지와 983고지를 공격해서 8월 22일에는 983고지마저 점령했다. 그날 밤 북한군 12사단이 반격을 가해오자 미 2사단 사령부는 9연대와 38연대를 보내 국군 36연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북한군 12사단과 27사단이 전력을 보강해 총공세를 가해오면서 8월 27일 피의 능선 고지들은 모두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국군 5사단과 미 2사단 사령부는 열흘간 전투에 지친 36연대와 국군 35연대를 교대하여 고지 탈환 임무에 나섰다. 국군 35연대는 8월 28일 773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날 밤 북한군의 역습을 받고 고지에서 또 퇴각했다. 그러나 국군 35연대는 8월29일 오전 반격에 나서 773고지를 다시 탈환한 뒤 미 9연대 3대대와 임무를 교대했다. 미 9연대는 940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반격을 받아 773고지마저 다시 빼앗기고 물러났다. 이처럼 피의 능선 고지들을 둘러싸고 격전이 계속되자 북한군은 6사단을 추가로 이 지역으로 보내 병력을 증강시켰다. 그러자 국군과 유엔군도 이 지역으로 국군 7사단 8연대 등의 병력을 추가로 투입시켰다. 9월에 들어서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9월3일 미 9연대가 다시 773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미 1해병사단과 국군 1해병연대는 해안분지 북쪽의 고지들에 대한 공격에 나서 924고지와 1026고지 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해안분지 서쪽의 피의 능선을 방어하던 북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될 것을 우려해 940고지와 983고지를 포기하고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고 불리는 방산면 문등리와 동면 사태리 일대의 894고지·931고지·851고지로 퇴각했다. 북한군이 퇴각하자 미 9연대와 23연대는 9월5일까지 940고지와 983고지를 확보해 ‘피의 능선’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1만5천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국군과 유엔군에도 2천7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루 3만 발 포격,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 적용 특히 미군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4개 포병대대를 동원해 105mm와 155mm 대포 등으로 북한군 진지에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고 불리는 하루 평균 3만 발씩 무자비한 포격을 가했다. 훗날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전쟁 중에 가장 많은 포탄이 소모됐다고 말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펀치볼 해안분지 북쪽의 능선으로 몰아내고 양구읍과 해안분지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였으며 이어 ‘피의 능선’ 북방의 ‘단장의 능선’탈취를 위한 공격을 계속하게 된다. ‘피의 능선 전투’로 피아 2만명의 수많은 희생자가 묻혀 있는 이 지역에서는 6.25남침전쟁이 끝나고 47년 후인 2000년부터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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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2-19
  • [김희철의 전쟁사(28)]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 지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제 6허실편의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므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승리하기 어려우니 끝없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3차공세 이후 킬러, 리퍼, 러지드작전 등으로 캔사스(Kansas)선까지 반격하여 북진했고 이어진 제 4차공세까지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중공군의 제 5차 춘계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손자병법 허실편처럼 유엔군의 허를 찔러 국군이 배치된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알몬드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방어 책임지역을 두고 분규에 빠지는 까닭에 후방이 차단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지속된 공격으로 손자병법의 ‘병형상수(兵形象水)’라는 의미처럼 흐르는 물같이 동부전선에서 오대산 밑의 속사리까지 커다란 주머니 모양의 돌파구가 형성되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 2사단이 5월18일 하룻동안에도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시키며 위의 상황도에서 보듯이 퇴각한 국군 5, 7사단이 방어했던 지역의 좌측 ‘벙커고지’를 사수했다. 이 날까지 미 38포병대대는 1만2000발 이상의 포격으로 중공군에게 화력세례를 퍼부어 중공군은 약 3만5000명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는 적의 돌파구 확장을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동측 백선엽 장군의 국군 1군단도 오대산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에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사시 속사리에 도달한 중공군들이 K-18비행장에 탄약과 포탄 및 보급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강릉으로 향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리전투 패배 씻어낸 밴 플리트 포격과 백선엽의 결단 현리전투에서 패배한 3군단의 퇴각에 따라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으로 다급해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중요하고도 기민하게 줄탁동시(啐啄同時)적인 판단을 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미 8군의 예비 미 3사단에게 돌파구 첨단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대관령 서쪽 용평에 있는 3군단의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했다. 큰 키의 밴 플리트 장군은 짚차 보닛 위에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이후 작전을 지시했다. 그는 “지금 전선에 큰 포켓(pocket, 주머니)이 생겨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며 단호한 어조로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백장군에게는 “1군단은 대관령에서 서북쪽으로”, 미 3사단 소속 라이딩스 장군에게는 “하진부리에서 동북방향으로 지체없이(Wihtout delay)공격을 시도하라”고 지시하며 수세적인 방어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는 작전회의를 간명하게 10분만에 끝냈다. 워싱턴 정가, 5배 이상 포격 등 단호한 대응 보고 신조어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만들어 한편,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졌던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10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차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사단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바로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홍천 및 하진부리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3사단은 1만 7000명의 병력과 전차, 야포 및 전투지원 중장비 등을 이끌고 좁고도 험한 길을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기적의 행군’을 해냈다. 다행히도 미군 부대원 대부분은 운전을 할 수 있어 밤낮없이 교대로 약 1,000대의 트럭을 몰면서 재촉하여 돌파구 첨단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갈래로 부대를 나누었는 데, 한쪽은 홍천에 도착해 미 2사단을 증원했고 다른 한쪽은 하진부리에 도착해 무너진 3군단의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사실 그 당시 미군도 모르고 있었으나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한 공격으로 병참선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지역목표를 탈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하였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막심하였다. 생존자들은 피로하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피해가 과중했던 이유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적군을 꺽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육사 동기생이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전으로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던 용장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서 미 3군단을 이끌고 보병과 전차를 활용하여 과감한 기동전을 구사했던 명장이었다. 휘청거려 자칫 구멍이 뚫릴지도 모를 이 동부전선의 주머니형 돌파구에 미 8군의 강력한 예비인 미 3사단을 과감히 투입했다. 또한 군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면서 공군기를 165회나 출격시켰으며 4만1천발의 포탄을 중공군에게 퍼부어 기준의 5배를 초과하는 많은 포탄을 소모했다. 그러자 워싱턴 정가는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대응을 보면서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지시를 받은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세부적인 작전 구상을 했다. 군단사령부에 도착하자 바로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 1연대(연대장 한신 대령)를 먼저 대관령에 급파해 길목을 막고, 그 공백을 11사단과 1101공병단에 맡기는 것”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연대가 대관령까지 이동하는 데 약 3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3시즈음 확인해보았던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송요찬 장군이 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며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송 사단장은 자신의 정면도 인민군들이 압박을 해오는 위험에 처해 있어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좁고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단독으로만 전투해왔던 경험에 인접부대와 협조된 작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수도사단장 송 장군은 군단장 백선엽 장군과 나이도 비슷하며 최근까지 같은 계급이었고,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잘하기로 용맹을 날리던 터라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장군은 한국군 내부 구성원끼리 사소한 감정에 휘말려 벌이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으나, 작전참모 공대령은 “당장 부대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연약한 지휘 방식을 쓸 수 없다”며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고 극단적 언사로 다그쳤다. 이에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로저스 1군단 수석 고문관을 대동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다. 백 장군은 엄숙한 목소리로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복할 것이냐?”고 질책했다. 송요찬 장군은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서서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며 바로 전화기를 들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마침 한신 대령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미 출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 작전참모 공대령이 지휘소를 빠져나와 1연대의 기동을 확인했다. 그때 한신 대령의 연대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동을 위해 트럭에 올라탈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날(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연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는데 1시간 뒤부터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도 출동이 늦었다면 중공군은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고지를 선점하여 전체 작전에 어려운 상황이 될 뻔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연대장 한신 대령과 작전참모 공대령의 책임감과 용이주도함이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때부터 1연대와 수도사단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동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해온 중공군은 장거리 이동으로 지쳐 있었고 화력과 보급도 소진한 상태였다.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이후 1군단은 계속 진격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이미 중공군은 공격 능력도 의지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북진을 계속하던 수도사단은 현리전투에서 전의 상실로 패배해 퇴각했던 3군단 장병들도 대거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로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2군단은 덕천전투에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해체됐다. 또한 3군단 예하였던 3사단은 백 장군의 1군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우리 국군 중에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오직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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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2-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6)] 지뢰사고로 인접 사단 육사동기 이충원 대위 중상, 소대장 근무시절엔 분대장 순직하여 긴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이번 16일 북한은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고 그곳에 포병부대 등을 주둔시키며 우리 군과 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중대장 시절에도 이러한 북한 도발과 위협에 대비한 경계태세 강화를 위해 GOP철책 이중화공사가 있었다. 공사를 앞두고 필자가 소속된 독수리연대의 창설기념일인 6월13일에 연대체육대회가 있었고 이를 대비하여 대대에서도 5월말에 중대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이때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무리 지어 있는 닭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뛰어난 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분야에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칭한다. ■ 연대 창설기념 체육대회 종합우승은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GOP철책 이중화공사’에 투입시키는 미끼? 5월말 대대의 중대 대항 체육대회에서 소대장 함재명 소위(육사42기)가 달리기 등 모든 운동을 월등히 잘했고, 중대본부의 김석동 일병이 큰 키에 만능 스포츠맨이라 축구, 배구 등 모든 종목에 참가하여 배구, 족구, 줄다리기에서 우승하며 결국 종합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물론 연대 창설기념 체육대회에서도 중대가 주축이 된 종목인 ‘군무’에서 우승, ‘축구’는 준우승으로 대대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하였다. 필자를 신뢰하며 아껴준 대대장에게 몫을 다한 부하의 도리를 다한 것도 좋았지만 대대와 연대에서 연속 우승함으로써 중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어쩌면 이 우승은 미끼였는지도 몰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시행하는 GOP철책 이중화공사에 곧 투입해야 할 대대를 우승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가졌지만 아랑곳 없이 종합우승으로 넘치는 사기속에서 우리는 다음 임무 수행에 몰입했다. 허나 2015년 GOP 철책 통문에서 북한군이 불법 매설한 목함지뢰 3발이 폭발하여 수색작전 중인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DMZ 지뢰도발 사건에서 보듯이 GOP철책 이중화공사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 인접 사단 지뢰 사고로 긴장된 가운데 시작된 GOP철책을 이중화 공사 당시 GOP철책 앞의 불모지에는 매설된 지뢰 뿔들이 식별되고 철책 뒤에는 미확인 지뢰지대였다. 이 단일 GOP철책을 이중화 시키려면 당연히 주변 지뢰지대를 확인하여 제거 후 공사를 시작했기에 사전 준비와 교육이 더 중요했다. 때마침 인접 사단에서 육사 동기 이충원 대위가 지뢰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필자가 소대장 근무시절 같이 근무했던 분대장도 지뢰 사고로 안타깝게 순직했기에 필자는 중대원들 보다 더 긴장했다. 하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고 어차피 임무는 수행해야 했다. 공사 투입할 GOP ㅇㅇ산 구 1통문 지역에 연대체육대회 1주일 뒤인 6월 20일 도착하여 숙영지를 편성했다. 약 한 달간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여 완전히 야외 생활관처럼 24인용 텐트에 침상까지 준비했다. 우리 중대는 9개월전에 이미 폭우로 전도된 150m의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를 경험했기에 타 중대 보다는 더 숙달되어 효율적으로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뢰 탐지 및 제거 작업에 투입하는 병사들에게는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하기에 유서와 머리카락 등 만일의 사태에 대한 준비를 하고 단단한 각오로 공사에 임했다. 이미 경험했던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처럼 신속히 끝내야 할 이유도 없고, GOP지역은 야간 경계근무 때문에 낮에만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있는 우리 중대의 공사 진도는 타 중대와 비교될 정도로 신속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나면서 긴장이 다소 이완되는 현상도 식별되어 간부들에게 안전을 재차 강조했다. ■ 완승 위해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와 하찮아 보이던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도 필요 제나라의 환공은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이란 말을 남겼다.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은 훌륭한 장인은 썩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이란 현명한 장수는 단 한가지 재능 있는 자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조직이든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완벽한 마무리로 최종 승리하기 위해서는 제나라 환공의 말처럼 인재를 아끼며, 하찮아 보이던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도 필요하다. 소대장과 분대장 및 고참병사들은 9개월전에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의 경험으로 지시를 내리기 전에 다음일들을 찾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그들의 경험에 따른 지휘통제 아래 하찮은 굼벵이같은 하급자들도 적극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나름대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사 기간중 사단장, 부사단장, 연대장의 현장지도가 수시로 있었는데, 지역 터줏대감인 필자의 공사 현장에 집중되었고 지뢰확인, 공사 조편성, 경계 및 안전 대책 등의 설명을 듣고 현장 확인후에는 모두 ‘안심하며 고생한다’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당시에 대대의 간부들이 이용했던 오토바이는 대부분 125cc였는데 필자는 전출간 권성룡 군의관이 사용하다가 넘겨준 88cc의 작은 스쿠터였지만, 좁고 긴 담당구역을 쉽게 넘나들며 전 중대원을 지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퇴근을 못하는 시간이 한달이나 되어 기간 중 휴식 및 취침 시간에 88cc의 작은 스쿠터를 이용하여 독수공방하는 가족을 만나러 잠시 빠져나가는 일탈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안전 걱정만 하고 있던 남편의 기습 방문에 반가워하며 안심하던 가족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덧 공사를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 7월22일이 되자, 다행이도 타 부대와 같은 안전사고 한 건도 없이 대북 경계태세를 강화시키는 GOP ㅇㅇ산 구 1통문 지역의 철책 이중화 공사는 마무리 되었고, 그 이후 우리가 공사한 지역으로 북한군이 침투에 성공한 사례 역시 한 건도 없었다.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의 마음으로 능력 여부를 떠나 모든 부대원들을 아꼈고, 또한 전 중대원이 일치단결하여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을 추구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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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5)] 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방패들
    [시큐리티팩크=김희철 기자] 군가 ‘전우’의 가사에는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사르며 깨끗이 피고 진 무궁화 꽃이다. 한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 ”라는 구절이 있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즐겨 부르는 군가 ‘전우’의 가사처럼 “한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책임을 다하는 방패들”이었기에 군생활 동안 만난 전우들은 평생을 함께한다. ■ 고락을 같이했던 전역자·후배 전우들과 함께 나눈 정(情)/묵묵히 감수하는 아내에게 고마움 느껴 중대장을 18개월 정도 근무할 때 즈음 고비가 찾아왔다. 중대의 일꾼으로 성실했던 김충한 상병이 전투일일결산을 위해 매복용 실탄을 점검 중 훈련용 크레모아 뇌관이 터져 얼굴에 파편상을 입어 의무대로 입실했다. 그는 일년 전에도 가스통 폭발로 화상을 입어 후송을 다녀온 병사였다. 연대에서는 병력 관리를 잘 못했다고 경고장을 하달했다. 중대장 근무 1년만에 선봉중대가 되어 한층 사기가 올라있던 즈음에 발생한 사고로 중대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어수선했다. 헌데 8개월전에 전역한 홍성천·배영환 예비역병장이 민가에서 한시간 떨어진 예상동 부대까지 면회를 와서 중대원들을 격려하는 바람에 다시 분위기는 즐거운 병영생활로 바뀌어갔다. 고마운 전우들이었다. 전방 격오지에서 신혼살림을 하던 필자에게도 개인적으로 사관학교시절 각별히 아꼈던 후배가 관사로 찾아와 오랫만에 회포를 풀며 소대장과 중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신혼살림 속에서도 남편의 술상을 준비해야하는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묵묵이 감수하는 그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어떤 후배는 전방에서 보기 힘든 어항을 선물해주어 가족의 지루함을 달래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필자가 총각시절 선배집에 쳐들어가 신세를 졌던 것을 되갚고있는 셈이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휴일엔 수색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김광우 동기에게서 연락이 와서 오토바이를 타고 한시간 달려 민촌 관사에 갔다. 그곳에는 서울 육사에 근무 중인 고장호, 김권희와 인접 3사단의 유종렬, 선종률 그리고 같은 사단에 있는 한황진, 강성묵, 김선권도 참석해 오랜만에 동기들과 기울이는 한잔 술에 전방 오지의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었다. ■ 제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에서 ‘제1군 야전 중대장근무 성공사례’ 강의 1986년 5월, 육군 제3사관사관학교출신 중·대위들의 학부과정에서 ‘야전부대 지휘관 초빙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필자가 ‘제1군 야전중대장 체험담’을 교육하라는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 사단은 일주일 뒤의 강의라 미처 공문으로 지시를 못했다. 때문에 필자는 사단에 직접 들어가 위 사진과 같이 상급부대 공문의 강의 내용을 적으며 확인했다. 그런데 더 황당하게도 3일 뒤 작전참모에게 강의 내용을 검토받으라고 했다. 자대로 복귀해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중대장 부임전 고등군사반(OAC)과정에서 공부하는 방법과 중대장 근무요령 및 실제 사고 및 대침투작전 성공 사례 등을 준비해서 사단 검토를 받았다. 중대장 기존임무를 수행하면서 강의 준비 및 상급 검토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계급의 후배들인 학부과정 540명에게 ‘제1군 야전중대장 체험담’을 통해 필자의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도 느꼈다. 게다가 이번 교육 덕택에 중대장근무를 시작한 지 18개월째 만에 얻는 첫 휴가로 고향집과 처가에도 들려 인사도 할 수 있었다. 마침 3사관사관학교에 후배 정한기 대위(육사39기)가 교관을 하고 있어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강의 하루전에 영천에 미리 도착해서 복지회관에 여장을 풀었다. 정후배와 저녁을 하면서 당시 학교에서 강조되는 사항과 주요 직위자의 특징 등을 파악했다. 강의 당일 교수부장을 만나니 예상했던 바와 같이 강의시에 추가요구사항이 있었다. 최초 ‘야전부대 지휘관 초빙교육’ 프로그램에서 필요했던 것은 학부과정 학생들에게 중대장을 성공적으로 하기위한 체험담 교육이었는데 당시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이 추가되었다. 야전에서도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이 강조되어 교관 경연대회도 개최하고 지휘관이 직접 교육하도록 강조하여 이미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별 걱정은 안했다. 사전 대화를 나누던 교수부장은 새롭게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에 관련된 필자의 설명에 안심이 되었는지 중대장 근무시에 꼭 필요한 내용이라며 강의시간을 4시간으로 증가시켰다. 사실 정훈참모부에서 하달된 교육자료만 가지고는 부대원들을 이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신좌경사상’을 알려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침 중대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입대한 김찬석 상병(현 청주대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의 지식을 역이용하여 비판하도록 준비시켜 직접 강의하니 병사들에게는 더 효과가 있었고 필자도 그를 통해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강의 도중 학부과정의 학생들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주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하루전에 도착해 후배 정대위를 통해 습득한 정보로 학교에서 강조하는 사항과 교수부장 및 주요 간부의 별명을 활용하니 학생들의 웃음과 함께 한 호흡이 될 수 있어 강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유제현 대령의 다정한 편지, 후배 중대장의 불운/모든 만남과 아픈 정(情)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의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대로 복귀하니 낮 익은 글씨의 손편지 등기가 도착했다. 당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지역인 예상동에서 소대장 시절에 모셨던 대대장 유제현 대령(육사23기)의 정(情)이 듬뿍 담긴 글이었다. “가족과 부하의 나쁜 버릇은 장점이 되도록 애정으로 감싸주고, 교육도 시간 떼우기 보다는 성과위주로 하며, 바쁜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위해 틈틈이 공부하라”는 조언과 함께 자신이 근무하며 지휘했던 지역에서 또다시 근무하는 필자에게 부하들과 부대 발전에 보태라며 10만원을 동봉해 주셨다. 보내준 위문금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병사들이 이발할 때 용이하도록 당시 처음 판매한 ‘전동 바리깡’을 구입해서 대대장 존함을 새겨서 중대 이발병에게 전달했다. 최전방 오지에 전역한 병사들이 다시 찾아오고 동기, 후배들이 고생한다며 위문도 왔으며 모시던 상관이 격려의 손편지와 함께 금일봉까지 보내오니 필자 뿐만 아니라 중대원들과 가족도 사기가 치솟아 천정을 깨는 순간이었다. 헌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처럼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중대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사단작전 장교로 전보됐다. 후임자는 필자가 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에서 ‘야전 중대장근무 성공사례’를 교육했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 후배는 6개월 뒤에 오토바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정(情)으로 수행한 중대장직을 3사관사관학교에서 교육했던 인연이 닿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는데 그는 멋있게 중대장직을 수행하다가 불의의 객이 되었다. 부하, 전역자, 선후배, 동기들과 좋은 정도, 아픔도 결국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즉 희로애락이 있는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이 모든 만남과 ‘야전 지휘관 초빙교육’의 소중하고 아픈 정(情)이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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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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