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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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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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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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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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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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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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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4)]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 중에 생명을 걸고 이 나라를 사랑한 선교사와 그의 자녀들이 있었으며, 한국인은 그들을 기억하고 감사해야한다. 가장 먼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917-2004) 박사는 연세대를 최초 건립하였고, 한국전쟁 발발로 재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한 뒤 유엔군의 수석통역관으로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약을 했다. 이후 한국의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며, 그의 아들 인요한 박사는 순천에서 태어나 현재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휴 린튼(Hugh MacIntyre Linton, 1926-1984)은 미 해군 대위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으며, 휴전 후 선교와 의료 봉사에 매진하여 한국의 결핵 퇴치에 이바지했다. 또한 하워드 마펫(Howaed Moffett, 1917-2013)은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해군 군목으로 참전했으며, 휴전 후 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무료 진료를 하는 등 45년간 한국에서 의료 선교에 헌신했다. 특히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는 미 감리회 선교사로 1921년 내한하여 서위렴(徐偉廉)이라는 이름으로 평양, 서울, 대전 등에서 1960년까지 선교와 교육에 크게 이바지했다. ■ 윌리엄의 손자까지 3대가 선교, 군인, 장학사업으로 한국인 도와 윌리엄 E. 쇼(Shaw, William Earl, 서위렴)는 1890년 8월22일 시카고에서 출생하여,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과 콜럼비아 대학원(1921)을 졸업했다. 선교 사업에 뜻을 두고 한국 선교사가 된 다음 보스턴 신학대학원도 졸업(1927)했다. 평양에서 광성학교 교사로 봉직(1921-1926)하고, 만주와 해주 지방에서 교육과 전도사업(1927-1937)에 몰두했다. 1938년 무어(J. Z. Moore)선교사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배출했으며, 평양소년단(보이스카웃) 단장으로도 봉사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7년 다시 내한했다. 1950년 6·25남침전쟁 때에는 미군 군목으로 종군하면서 피난 교역자 구호에 힘썼으며, 특히 한국군 군종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로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도 군목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했었다. 외아들 해밀턴 쇼가 6·25남침전쟁에서 전사하자 미국 본토에서 5,925명의 신자들이 보내준 14,500불의 헌금으로 쇼 기념교회를 대전에 건립했다. 1955년 목회자들의 수련을 위하여 쉐파트(Shepard) 부인이 헌금한 6,000불을 기초로 목자관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봉직했다. 감리교대전신학원(목원대) 창립 이사(1954-1960)로 참여했고, 신약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크게 존경을 받았다. 1961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귀국하여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병원에서 별세하자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부인이 안고 와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제2묘역 라-6)에 안장됐다. 부인 아데린 H. 쇼(Shaw, Adeline Hamilton,1895-1971) 선교사는 1895년 7월 2일 출생하여 1919년 7월 4일 윌리엄 쇼와 결혼하고, 1921년 내한하여 남편을 내조하면서 숭덕여학교 교사 등으로 1960년까지 교육에 헌신했다. 1971년 5월 8일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으며, 양화진 (제2묘역 라-5) 남편의 묘 옆에 안장됐다. 며느리 조니타 로빈슨 쇼(Shaw,Juanita Robinson)는 1943년 외아들 해밀턴 쇼와 결혼했으며,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세브란스 병원에 사회사업실(Medical-social)을 개설했다.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했으며, 1968년 귀국하여 미국 코네티켓에서 사회봉사 사업을 마치고 은퇴했다. 서위렴의 큰손자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은 1944년에 출생하여 서울외국인학교를 다녔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1977)를 받고, 내한하여 훌브라이트(Fulbright) 장학사업을 추진했고, 한국 대학생을 위한 하버드 대학 법률연구센터와 교류에 힘썼다. 1966년 캐롤 C. 쇼(Carol Cameron Shaw)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1993년 심장 질환으로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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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4)] 3대에 걸친 불멸의 한국사랑 ‘윌리엄 쇼’일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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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0)]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부동으로 몰려오는 북한군의 집중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왜관 및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어쨌든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 1사단장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백선엽 장군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포병대대, 8포병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 백선엽, 적 특공대의 사단 사령부 기습 등 위기에 다시 직접 권총을 빼들고 선두 지휘…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북한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국군8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반면에 다행스럽게도 국군 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북한군은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15사단을 20일 영천으로 돌렸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완전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북한군의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다시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훗날 논산훈련소장 역임, 소장 예편)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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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20)]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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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3)]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차 크리스마스고지 전투 다음해인 1952년, 대위로 진급한 이순호는 국군 7사단 3연대 3대대 9중대장으로 보직 받아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 전방 ‘크리스마스고지’에서 진지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계속 진행되던 중, 1차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에서 패배한 중공군 204사단은 크리스마스고지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10월 6일 기습 공격했고 6일간의 전투에서 아군은 또 다시 크리스마스고지를 피탈 당하기도 했다. 당시 9중대장인 이 대위는 패배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반드시 재탈환하여 사수하겠다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10월13일 저녁 중공군은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퍼부은 후, 재차 9중대 정면과측면에 각각 1개중대를 투입하여 공격해왔다. 적의 공격에 2소대 지역이 함락되면서 중대의 좌측이 뚫리고 말았다. 다급해진 중대는 수류탄과 총검으로 중공군에 맞섰지만, 적의 공세에 밀려 부대가 포위됐고 삽시간에 적과 아군이 한데 엉키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대위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끝까지 진지를 탈환할 것을 각오하고 화기 소대장에게 분산된 3소대를 수습해서 중대 지휘소로 몰려드는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본부요원에게 수류탄 상자를 들게 하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며 총검을 휘두르는 백병전 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때 투척한 수류탄은 3상자로 그의 옆에서 수류탄 통의 테이프를 입으로 뜯어주던 본부요원의 이빨이 2개나 빠질 정도였다. 이에 공격기세가 꺾인 적들이 무수한 시체들을 버리고 퇴각한 뒤에야, 이 대위는 자신이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적의 총탄이 왼쪽 팔과 우측 정강이 두 곳을 관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대원들의 후송 권고를 뿌리치고 압박붕대로 상처의 지혈만을 한 채 절뚝거리며 방어진지 점검에 나섰고 그 모습을 본 장병들은 가슴 깊이 감동을 받았으며 다시 한번 더 전투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이어 9중대 지역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증원을 받아 중대 지휘소로 재차 공격을 해왔고 교전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중대는 또다시 위기에 빠졌다. 이 대위는 중상을 입었지만 중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는 혈투를 벌이며 끝까지 진지를 지켰으나 그의 가슴에 흉탄이 관통하면서 장렬히 전사했다. 결국 이 대위의 장렬한 죽음을 본 9중대원들은 분노에 차 혼신의 힘을 다해 야간 격전을 처절하게 버텨냈고, 이튿날 11중대의 증원을 받아 이순호 대위의 염원대로 핏빛만 가득한 크리스마스고지를 끝까지 사수할 수 있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리어 1계급 특진추서와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이순호 소령은 보훈처에서 2018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어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유가족과 육군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 행사도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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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3)]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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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2)]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에서 첫 4개월은 북한군과의 싸움이었지만 나머지 33개월은 압록강을 넘어 남침한 중공군과의 지루한 싸움이었다.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1951년,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양측은 11월 27일부로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을설정하고 3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전쟁기간 중화력이 막강한 미군들보다우리 국군만을 향해 집중공격을 해왔다. 마찬가지로 현재 MDL(군사분계선)북쪽의 어은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은 이 조건부 잠정 합의를 무시하고, 크리스마스 전날 백석산 앞쪽 1090고지 일대의 거대한 산악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하던 국군7사단의 전초진지를 공격했다. ■ 흰 눈의 고지는 순식간핏빛으로 물들고,7사단은죽음 각오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 중공군 204사단과 아군 7사단은 이곳에서 4일동안 2차에 걸쳐 한 치의 양보 없는 처절한 혈투를 벌여 흰 눈으로 덮여있던 고지는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국군 7사단은죽음을 각오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중공군을 격퇴하고 전초진지를 사수했다. 이때 아군은 22명이 전사했고 21명이 실종되었지만중공군 172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크리스마스날 시작된 전투였기에 특별한 이름이 없었던 전초진지 무명고지에는 ‘크리스마스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휴전협정에서 최전방 전선을 설정하는데 큰 영향력을 미친 전투였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처럼 장병들에게 잠시나마 축복이 넘치는 시간이 됐으면좋았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캐롤송이 평화롭게 울려야 하는 이미지와는 정반대인핏빛 물든 시간이라서 아이러니하다. 양구 전쟁기념관에는 전쟁으로 인한 폐허가 연상되는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 9개가 서 있다. 9개의 기둥은 양구에서 벌어졌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를 포함한 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피의능선 전투, 대우산 전투, 백석산 전투, 가칠봉 전투, 949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를 상징한다. 기둥과 전시관의 벽면을 살펴보면 파인 곳들이 많은데 이것들은 포탄 및 총알의 자국을 나타낸 것이다. 9개의 기둥은 높낮이가 다른데 9개 고지의 높이를 비율로 달리했으며 각 기둥에는 참전부대와 전투 기간 등이 표시되어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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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02)] 캐롤송도 없이 핏빛만 가득했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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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9)]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도 12연대는 유학산을 계속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것을 반복하는 혈투를 벌였지만, 결국 12연대는 유학산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던 대구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이 피만 흘리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 백선엽, 권총 들고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이와 같이 11연대 일부 부대가 북한군에게 밀려 자칫 미27연대 측면이 뚫릴 위험에 처했다. 다급해진 미 연대장이 백 사단장에게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생각이 있느냐?”고 힐난했다. 미군의 볼멘소리를 듣자마자 백선엽 장군은 유학산 아래에서 백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부 도망병이 발생하던 328고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까지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아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그리고 백선엽은 허리춤에 찼던 권총을 빼들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11연대 1대대 장병들의 중간을 가르면서 달려 나갔다. 다급한 상황에서 솔선수범하며 몸소 보여주었던 ‘사단장 돌격’이었다. 사단장의 독전과 솔선수범에 감동한 병사들이 되살아난 ‘임전무퇴’의 화랑도 정신에 불타며 용전분투(勇戰奮鬪)하여 뺏고 뺏기기를 열다섯 차례 반복한 끝에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방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는 백선엽 장군이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328,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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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9)]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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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대 김태현 교수는 향후 안보협력 방향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평화로운 통일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의 안보이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우리는 당분간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정전체제의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한다. 둘째, 아태지역의 미중간 강대국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역내 평화와 안정의 유지는 세국가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 만큼 이러한 공통의 안보 관심사에 대해 긴밀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감염병과 같은 초국가적 위협 등 비전통적 안보 분야에서의 초국가적인 협력의 강화와 공조가 중요하다. 따라서 김교수는 “세국가가 6·25전쟁에서의 공동의 위기극복 경험을 토대로 변화하는 동아시아 안보질서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안정, 북한의 비핵화, 동아시아의 안정 유지, 비전통 안보위협 공동 대응 분야에서 긴밀한 안보협력을 선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후보가 승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겠지만 선거와 우편투표 조작 등을 주장하며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음으로써 품위와 규범을 내팽개쳤고, 전세계는 민주주의에 대한 혼돈의 늪에 빠져들었다.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볼 때, 미국 대선결과에 따른 한미동맹의 미래가 이 두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영향이 있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은 “미국은 혼란스럽지만 한·미 동맹에는 유익한 결과인 이번 선거는 한·미 동맹에 다섯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미 정상회담 기대하지 말고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에 힘써야 한다”며 “첫째, 주한미군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바이든·김정은 회담 없을 것이다. 셋째, 앞으로 몇 달은 위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왜냐면 북한은 미국의 정권이 바뀌는 시기에 도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국 관리들은 여느 때보다도 잘 준비돼 있고 한국 측과의 협력도 원활하다고 전망했다. “네째로, 민주주의가 회복된다”고 예측했다.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심화와 시위자들의 험악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역대 최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민주주의는 바이든 외교 정책의 핵심 가치이고 취임 이후 첫 행보는 한국을 포함한 민주주의 국가들과 정상회담이 될 듯하다. 한편 바이든 주변의 민주주의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능력자’ 전술에 취해 있는 동안 청와대에서 드러난 약간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걱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그린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 했지만 트럼피즘은 살아있다”라고 우려했다. 트럼피즘이란 미국 전역의 소도시와 지방에 거주하는 백인 미국인들의 반(反)엘리트적 정치 성향을 반영하며, 외교정책에 관심을 갖지 않은 미국 우선주의인 트럼프 추종세력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한·미동맹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한·미 동맹에 다섯 가지 의미를 되새겨 볼 때, 향후 문재인 정부에 시사하는 것은 바이든 정부에 북·미회담을 추진하라고 설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한국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미국의 동아시아 및 아태지역 정책을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비전통적 안보 분야에서 코로나 시대에 한국이 수행할 국제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며, 무엇보다도 마이클 그린이 지적한 “권위주의적 경향의 행태와 민주주의 대한 혼돈의 늪에서 빠져나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적 규범 준수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인식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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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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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뉴질랜드 국민들은 1939년9월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11년전 폴란드 침공시 나치독일이 기만했던 것과 같이 “한국이 북한을 침공해 이를 대응하기 위해 6·25전쟁이 촉발되었다”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이것은 훗날 스탈린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소련의 사주로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 뉴질랜드와 유엔은 공산주의자들이 재차 침공하면 다시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뉴질랜드는 한국이 유엔의 승인으로 정부를 수립했으며 이때 소련은 유엔의 이런 조치를 거부하고 평양에 김일성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안다. 또한 뉴질랜드 국민들은 이승만 정부를 합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협상이 길어지면서 국민들은 전쟁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뉴질랜드 국민들에게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 한편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시 유엔사령부 파병 16개국의 일원이 된 뉴질랜드와 유엔은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다시 침공할 경우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다시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도 “한반도에 유엔사령부가 존재하는 것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라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후 뉴질랜드군은 1957년까지 한국에 주둔했으며 현재는 군사정전위원회에 5명이 소속되어 감독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62년 6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에드워드 테일러가 초대 주한 대사로 임명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양국의 유대는 뉴질랜드의 용맹한 군인들이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한국을 지원했을 때부터 시작됐다”고 언급했다. 6·25전쟁 참전용사들은 뉴질랜드와 한국에서 적절한 예우를 받고 있다. 한국에는 부산 유엔기념공원과 가평지역에 참전 기념비가 있고 전사자 대부분이 그곳에 묻혀 있다. 뉴질랜드는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이 1915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을 기리는 앤잭데이(Anzac Day)와 6월25일에 국립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에서 희생된 참전용사의 이름을 호명하는 의식을 갖는다. 한국 정부도 1980년대부터 참전용사들의 한국 방문을 지원해왔다. 비록 현재는 나이로 인해 제약이 있으나, 이는 매우 인기있고 성공적인 프로그램이다.참전용사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전쟁 당시 한국과 고도로 성장한 오늘날의 한국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6·25전쟁은 아직 휴전상태이기 때문에 뉴질랜드 국민들은 현재 한반도 정세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6·25전쟁은 양국의 외교 관계의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또한 뉴질랜드의 한국 재향군인자선단체는 지난 16년간 가평북중학교와 백령도에 사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한국 청년들의 교육에도 이바지해 왔다. 뉴질랜드 국방부 이안 맥기본 전쟁사교수는 “양국의 외교 관계를 위해 참전용사들의 한국 방문을 지원하는 한국 정부의 프로그램과 함께 뉴질랜드의 가평 및 백령도의 장학금 지원도 계속 유지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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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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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호주국립대학교 존 블랙스랜드 교수는 “동맹국들의 이익으로부터 벗어날 때 자국의 국익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과 호주가 싱가폴의 몰락 이후나 2차 세계대전 말기에도 미국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오늘날 북한은 유엔의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국경을 초월한 무역과 중국의 경제 원조 및 방대한 네트워크의 비밀 사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같은 해 천안함 폭침, 2017년 북한의 핵실험 무력 위협과 2018년 싱가폴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상당한 미완의 사업과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앙금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반도는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 모두를 포함한 경쟁이 치열한 동북아 지역에서 전략적 경쟁의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 한국과 호주간 긴밀한 협력 강화가 양국의 전략적 이익 존 블랙스랜드 교수의 ‘호주에 남겨진 한국전쟁의 유산 고찰’에 따르면 첫째,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국 주도의 반격 공세에 호주 해공군과 육군의 신속한 기여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둘째, 유엔 안보리 결의하에 미국과 공조한 경험은 국제연합의 지위와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 셋째, 1956년 호주가 동남아시아 조약기구에 참가하고 1962년무터 베트남전에 병력을 투입한 것은 한국전쟁의 경험으로 확인된 태도를 잘 보여준 것이다. 넷째, 현재 호주의 방위군(ADF)으로 알려진 호주군 병력은 미국 및 다른 가까운 상대국과의 긴밀한 협력으로 발생하는 이익에 상당한 중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호주는 10년 넘게 일본에 있는 유엔군 후방사령부를 이끌어 가고 있고 한국의 유엔사령부에 소수의 장교를 배치해 왔으며 2014년부터 주한미군의 통합 구성원으로 장군급을 임명했다. 또한 2013년에는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참가하는 ‘2+2연례회의’를 설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한국이 이 같은 양자의정서를 체결한 두번째 국가(첫번째는 미국)가 됐다. 호주는 2005년 2척의 해군 함대 보급선 건조 계약에 최종후보자 명단으로 대우조선해양을 넣었으나, 스페인의 나반티아 조선사가 계약을 따냈다. 한편으로는 2020년 9월 호주 한화 디펜스가 K-9자주포 30대를 만들기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추가로 한화 디펜스는 호주 육군의 차세대 보병전투차 450대의 공급 후보자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AS21레드백 장갑차를 호주의 요구사항에 맞추어 개발하고 있다. 이때 호주가 한국 장비를 선택하더라도 한국의 호응이 중요하다. 호주는 한국과의 방위 협력에 우선순위를 잘 두지 않았다. 그러나 2020년 호주의 새로운 국방전략은 우선순위가 결정적으로 중동에서 한국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며 한호관계가 발전하고 있다. 현재와 미래에도 한반도의 험준한 지형과 러시아, 중국, 일본 사이의 동북아 요충지로서 위태로운 지리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함께 만들어 갈 미래의 한반도 평화를 위해 호주가 캐나다,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영국, 미국과 함께 유엔 군사정전위원회에 관여하고 있는 7개국 중 하나임을 한국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현재 한국에서 근무하는 한정된 수의 호주 병력들은 유사시에 어떠한 유엔의 조치와 함께 ‘자동적인 연계’될 것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한반도에 유엔사령부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존 블랙스랜드 교수는 “70년전 한국전쟁의 암흑기 이래로 해왔던 호주와 한국의 긴밀한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양국에겐 전략적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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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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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상황판 지도에서의 설명을 잠시 멈추고 학생장교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벌어졌던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김일성의 북한군은 처음부터 다부동을 노렸다. 불과 22km 떨어진 대구를 바로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 ■ 북한군의 수암산, 유학산 선점에 당황, 또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 돌파 위기 8월12일 하달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던 왜관 북쪽 6.5km지점부터 각연대를 5~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 장군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방어선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병력은 70%가 보충되어 90~100%정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T-34전차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북한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했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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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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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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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호주 국립대학교 존 블랙스랜드 교수는 AISAC(국제안보교류협회)가 지난해 개최한 6·25전쟁 70주년 국제학술회의에서 ‘6·25참전 의의 재조명과 한국-참전국 간 안보교류협력 발전 방안’을 주제로 가장 먼저 화상으로 발표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에는 호주의 육해공군이 한반도로 갈 것 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나 6·25전쟁 발발하자 유엔의 파병 요청에 바로 응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 김일성을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소련의 애완견으로 인식 1946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호주의 해군 구축함과 공군 전투기 및 수송기는 6·25전쟁 발발하자 즉각 한국의 상공과 영해 작전에 투입되었고, 육군은 새롭게 모병해서 왕립호주연대의 3개대대를 창설했는데 그들 중에는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일본에서 훈련을 마치고 1950년 9월27일 부산항에 도착해서 10월10일 개성 화장산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인 후, 정주, 박천, 이천, 마량산, 가평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두 번째로 화상발표한 뉴질랜드 이안 맥기본 역사학자는 “정부의 소형 구축함 지원 결정은 야당인 노동당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유엔이 대표하는 집단안보체제에 대한 확고한 지지였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노동당은 북한의 침략을 소련의 움직임으로 판단했다. 그들은 김일성을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소련의 애완견으로 인식했다. 헌데 뉴질랜드 공산당은 유일하게 한국전쟁 개입을 반대했는데 이것은 대다수의 국민들이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로 김일성이 침략한 것이라고 굳게 믿게 만들었다. 당시 뉴질랜드는 파병 가능한 정규군 부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서 18세가 된 모든 남성은 3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아야만 했고 한국군을 지원할 병력은 급조해서 창설해야 했다. 이렇게 창설된 16야전포병연대는 1950년 12월 월링톤을 출발해 한국에 도착한 후 영연방 27여단에 배속되어 가평, 마량산, 제임스타운 전투 등에서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하여 중공군 공세를 저지하는데 기여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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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6·25남침전쟁 참전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국 사랑과 바램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