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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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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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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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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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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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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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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포럼의 주제발표 포문을 연 홍수미 방위사업청 과장은 첫째 방위산업분야 특성화 학과 개설 등을 통한 핵심인재육성, 둘째 지역중심의 인력양성 및 취업지원 강화, 셋째 방산업체 재직자 대상 교육 지원 및 인센티브 확대를 통한방위산업 전문인력 양성 인프라 강화 등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3가지 전략 과제를 제시했다. 홍 과장은 "각계의견을 수렴하고 향후 정부 인재양성 부처와 협업을 통해 인재 확보와 육성을 위한 지원을 적극 강화해 나갈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호성 창원대 교수는 방위산업 연구개발(R&D) 인력의 근무환경에 어려움이 있다며 방위산업 R&D의 경우 일반적으로 장기간의 제품 시험평가를 위한 지방 출장이 빈번하고, 이는 수도권 근무와 내근직을 선호하는 최근 트렌드와 맞지 않으며 이에 따라 많은 근로자들도 업무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방위산업이라는 특성상 보안에 대한 부담감을 항상 인지하고 있고 이는 지속적으로 근로자들을 압박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또한 “방산인력이 민수기업으로 떠나는 근본적인 문제는 연봉”이라며 “이직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환경 또는 지원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승영 LIG넥스원 본부장은 방위산업 매력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K-방산 호재를 필두로 산업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홍보와 학교의 계약학과 확대를 통한 맞춤형 인재 육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이 본부장은 산학 장학생 제도를 통한 핵심 박사급 인력 수급, 군사과학기술병의 진입 장벽을 낮춰 다양한 인재 풀(Pool) 마련, 수출 및 업체주관 사업을 위한 우수연구개발 인력 이동 지원 등을 제시했다. 최태복 HD현대중공업 이사는 함정사업을 타 분야 방산무기체계 사업과는 상이하기 때문에 함정건조 인력 확보를 위한 특별방안이 필요하다며, 함정사업은 타 분야와 다르게 복합 무기체계 성격이 짙고, 개발 의사결정이 복잡하며, 다종 소량 생산되기에 발주처와의 마찰이 잦고, 시제함부터 전력화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지방 소재 방산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특수선(군함) 분야의 광역 취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며 “예측가능한 영업 및 수주 또한 뒷받침 돼야 함정건조 사업이 장기간 존속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토론자인 오병후 한국군수품수출협회장은 방산분야의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취약한 중소기업을 위한 균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 회장은 "방위산업뿐 아니라 일반기업도 인력난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있다"며 "지난해 정부에서는 대기업의 취업을 위해 여러 제도를 지원했지만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은 매우 미비하여 폐업 직전까지 몰린 상황"이라며 암울한 중소기업의 현실태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현재 방산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인재가 부족한 상황으로 기업의 취업제한이 없어져야 한다"며 "방산업 완성품이 제대로 수출되기 위해서는 여러 중소기업의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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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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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독립기념관 부실 경영 등 질타 “전면 쇄신 요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립기념관은 기획재정부에서 지난 6월 발표한 2022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미흡(D) 등급을 받아 기관장 경고 조치를 받으며 경영상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20년 B등급이었던 경영평가는 이듬해인 2021년에 C등급으로 떨어졌고 이번에 D등급을 받아 지속적인 하락에 따른 부실 경영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히 독립기념관은 지난 2020년에 경영평가 항목 중 하나인 관람객 수를 부풀렸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을지연습 훈련 상황 점검을 겸해 장관 취임 후 처음으로 22일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오후 독립기념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업무보고 자리에서 2022년 공공기관 경영 평가 결과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사건 등을 질타하며 “부실 경영과 직원 복무기강 해이가 도마에 오른 독립기념관의 전면적 쇄신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은 올해부터 기타공공기관으로 전환되어 경영평가 주체가 기획재정부에서 국가보훈부로 변경됐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독립기념관의 경영관리 노력 및 사업 성과를 지속 점검·평가하여 경영실적 회복에 힘쓸 방침이다. 박 장관은 또한, 지난 2021년 제기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사건을 독립기념관의 대표적인 복무기강 해이 사례로 지적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주문했다. 해당 사건은 당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일부 독립기념관 직원들이 과거에 작성된 원고의 일부만 수정한 뒤 명의 대여자를 내세워 원고료를 환수하는 방식으로 부당 수령한 의혹을 받았다. 대필 의혹 사건은 지난 7월 일부 관련자들의 혐의가 있는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가 통보된 상태여서 국가보훈부는 관련 직원들에 대한 엄정한 조치와 함께 향후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지속적인 특별점검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부 연구원들의 편향성 문제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역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부 연구원들이 특정 학교 출신이나 특정 계파 중심으로 편향적으로 운영되어 발생한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이나 학교 출신자들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채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 앞으로 독립운동사에 대한 균형 있는 연구가 이뤄지게 함으로써 미래세대와 국민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박 장관은 “독립기념관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시켜 줄 막중한 임무를 실현해야 하는 대한민국 대표 기념관이지만, 현재 처해 있는 제반 상황은 위기”라면서 “독립기념관의 공직기강 확립 등 전면적인 쇄신을 통해 전 국민이 즐겨 찾는 교육의 장이자 자랑스러운 역사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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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독립기념관 부실 경영 등 질타 “전면 쇄신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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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8월29일 여의도 국회 제2소회의실에서 한국안보협업연구소와 뉴스투데이 주관으로 산·학·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2023 K-방산혁신포럼’이 열렸다. 작년 2월에 3일이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범했던 러시아는 곤욕을 치루고 있으며 전쟁이 벌써 1년을 훨씬 넘어 장기전화 되고 있는 가운데 이 전쟁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의 방산수출이 급증하여 173억불의 찬란한 성과를 이루며 최근 K-방산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방산 분야에 혁신할 요소들이 다양하게 잠재돼 있어 이런 요인들을 적시에 해소하지 못하면 현재의 수출 분위기를 앞으로 계속 이어나가기 어렵다는 방산분야의 암울한 현실태를 토로하는 의견이 포럼을 통해 대두되었다. 방산은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방산의 지속 가능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 측면에서는 방산수출이며 공급 측면에서는 방산 전문인력 즉 사람이다. 방산 전문인력이 앞으로 계속 충원되고 지속 유지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즉, 방산의 미래는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 하지만 현재 방산업체들은 4차 산업혁명 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 인력 수급 및 유지에 애로를 겪고 있으며, 군·관·연구기관에서 근무했던 전문인력도 취업제한으로 인해 업체가 필요할 때 제대로 활용하기 힘든 여건이다. 이에 한국안보협업연구소와 뉴스투데이는 ‘K-방산혁신 포럼’개최를 통해 방산업체가 겪고 있는 다양한 전문인력 수급 등 다양한 문제들을 전문가 발표와 토론을 통해 가감 없이 제기하고 적절한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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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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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벌거숭이 인생은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나그네길이지만 필자는 일벌레(Workaholic)처럼 정신없이 사단작전보좌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대대장반 교육에 입소하여 겪은 교통사고로 군생활 포기까지 생각했던 재활의 시련이 계속되는 가운데 골수정이 박혀있는 좌측 대태부의 뼈가 분쇄 골절된 탓인지 잘 붙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12월 보험사가 소개해준 신림동 모정형외과에 다시 입원하여 분쇄골절 부위에 골 이식수술을 했다. 살을 째고 골반의 뼈를 일부 떼어내 갈아서 골절부위에 뿌려 채우는 이식수술이었지만 이미 4개월 넘는 을지병원 입원생활을 통해 익숙해져있는 덕택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헌데 보험사가 알려준 병원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꾀병 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었다. 아마도 보험금을 타기위해 입원기록을 남기기 위한 그들은 눈을 피해 잦은 외출 외박을 나갔고 밤이 되면 빈 침대가 유난히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진짜 환자는 필자뿐인 것 같았고, 가짜 환자들과는 말도 섞기 싫었다. 하지만 필자는 수술을 마치고 3일 뒤부터 걷기 시작했고 재활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2주만에 정확히 퇴원했다. 이런 모습을 의사, 간호사, 타 환자들은 별종으로 보는 눈치였다. 부대에 돌아오자 성탄절을 앞두고 세례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대부를 선정해야 하는데 마침 행정부사단장 김부명(육사27기)이 신자였고 집안에 수녀님도 계셔서 대부를 부탁했다. 두손을 저으며 거부했던 그는 명목상 신자였는데 가족의 권유로 마지못해 성당을 다녔으나 결국 허락을 했고 필자가 그의 첫 대자가 되었다. 그해 성탄절에는 가족 전체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다. 이를 지켜보시던 고향 시골의 부모님도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됐다. 이 모두는 을지병원에서 필자를 간병하던 아내가 매일 명동성당에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 덕택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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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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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故)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는 1883년 8월 4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1908년 7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사립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조선인 교육에 진력했으며 한국 이름으로 우리암(禹利岩)이라고 불리웠다. 1967년 10월 16일에 공주사립영명실수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는 동시에 동교 동창에서 동교장 우리암씨에 근속 30주년 기념동상을 동교정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후 동상 제작에 노력하여 동교 창립기념일에 동상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그런데 우리암 교장에 약력과 공헌을 들어보면 1907년 가을에 멀리 태평양을 건너와 당시 공주에 교육기관이 미약함을 보고 동읍 대화정 위에 명칭 명설학교(明設學校)라는 수동초막의 미약한 이 학교를 인수하여 영명학교로 명의를 변경하는 동시에 벽돌제 3층 양옥으로 훌륭한 교사를 신축하고 학급을 증설하여 수많은 청년 자질을 교육했다. 또한 1932년에 영명실수학교로 승격이 되어 이래 31년 간 세파에 난곡을 거듭하여 가며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직전까지 다수한 인재를 양성한 우리암씨의 공헌은 실로 막대하다. 또한 우리암 선생은 1943년 9월 인도 델리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의 영어를 가르쳐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측면 지원했다. 당시 인도에서 활약하는 조선용사들은 인도에 도착한(1943년 8월) 후 9월15일 인도군 총사령부에서 ‘피터하스’ 소교를 만나 상의한 결과 전체 동지들은 우선 영문과 방송 기술을 학습하기로 하고 ‘델리’에서 약 17공리 되는 곳에 있는 인도 학교에 가서 그 학교 교장 ‘웰리암’씨에게서 영문을 학습하였다. 학교장 웰리암씨가 예전에 미국 선교사로 조선 공주에서 35년 동안이나 있었던 우리암 선생으로, 조선어가 매우 유창하다. 인도의 조선인들은 오후에는 영문을 배우고 오전에는 총사령부에 가서 방송을 연습하며 광복군과 영국군의 연합작전을 지원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우리암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은 물론 1943년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투입된 것은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국제정세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감안된 것으로 보이며 이번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그는 1962년 6월9일 충남 공주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영명학교 출신 독립유공자로 유관순(2019, 대한민국장), 유우석(1990, 애국장), 김현경(1998, 건국포장) 등이 있으며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영국군 연락장교로 1945년 전사 순국한 로널드 클린턴 베이컨이 2020년 애국장에 추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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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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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⑯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18년 8월24일 국민가수 고(故) 최희준씨가 향년 82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벌써 5주기를 맞이하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도 널리 애창되고 있고 특히 ’하숙생‘의 가사는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 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 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가 인생의 본질이자 진리임을 모르는 바 아님에도 인간세상에 무의미한 교만과 시기 그리고 탐욕 등 일곱가지 죄악은 인생을 힘들고 슬프게 한다. 또한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노래하지만 특히 군생활은 잦은 부대 이동으로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라는 가사처럼 정붙일 시간없이 떠돌며 흘러가는 진짜 나그네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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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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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 난징에서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친일파 거두를 처단하였다가 장기간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형무소 재소 중 옥중 투쟁을 이끈 김현수 선생에게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현수 선생은 1933년 5월 상해로 도항했다. 그해 12월 중국 난징에서 한국 독립군의 산실인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 및 조선독립을 위한 훈련을 받았으며 1935년 4월 동교 졸업 후는 실천운동에 들어갔다. 1936년 2월 상하이에서 김구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자금획득을 위해 동지 이하유(李何有), 김성청(金聖靑)과 함께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한규영(韓奎永) 집에 침입하여 현금 및 해로인을 강탈했다.(단도 및 권총이용). 1937년 11월11일 상해 카페에서 식사중 상해거류민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적 일본 주구자라고 인정하여 민족혁명당원 최지삼(崔之三)과 함께 권총으로 저격하여 처단했다가 체포됐다. . 당시 김 선생은 독립군 양성 기관 및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한 이력 때문인듯 본명 외에도 김정안, 김정환, 주신화, 호영 등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938년 5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인해 징역 10년에 처해졌는데 동년 7월27일부터 경성형무소에 수용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루고 있었다. 이때에도 형무소에서 1939년 7월25일에는 변기통 위에서 혹은 식기 구멍으로부터 머리를 빼고 “이번 사건은 종국 대우문제에 귀착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의 대우문제를 요구하라. 좋은 식사를 제공하고 수인(囚人)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라. 이번과 같은 불상사건을 단절시켜라. 실임자인 소장, 계호과장, 교무과장을 배격하라. 우리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하자.”고 외치는 등 수형자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타인에 솔선하여, 옥중 투쟁을 이끌어 1941년에는 징역 1년이 추가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점령지인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으로 친일파 거두 처단에 그치지 않고, ‘생지옥’으로 불리는 형무소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음에도 수형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옥중시위를 이끈 점은 강한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보여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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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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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본의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표적 민족운동 중 하나인 일명 ‘노다이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혹독한 처벌을 받은 고(故) 김영조 선생에게 애족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영조 선생은 1940년 11월 경남 동래군(현 부산 동래구)에서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직후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인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노다이 겐지[內台兼治]를 구타하고 관저를 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퇴학을 당했을 뿐 아니라 징역 8월을 받는 등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는 총동원체제기에 일본이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개최한 기형적 운동경기 대회이다. 당시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 노다이 겐지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된 ‘노다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대표적 학생운동으로 손꼽히는데,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과 민족 차별에 대한 울분이 폭발된 사건은 부산의 대표적인 민족으로 알려졌다. 어린 학생들이 일본군 장교를 강력히 응징할 정도의 과감한 행동은 당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민족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와 전시 동원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활동에 참여한 고(故) 김선갑(옥고 여독 순국)이 애국장, 이병도‧이세기‧김인규‧이달희‧이도윤‧안장원‧ 정두열 선생도 애족장에 서훈된 바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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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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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육군대학 정규과정 교육받을 때 졸업 후에 수방사로 같이 부임하게 될 박래호 선배의 강력한 권유로 부대 인접 동국대학교 석사과정을 지원했었다. 수방사 작전장교 근무는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아 포기했는데 통신단으로 명령을 받은 박 선배가 이때 아니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며 걱정말고 일단 응시하라고 설득했던 결과였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0)]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징표(하) 참조) 허나 이미 동국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지 5년이 다 되어 이번 학기가 석사 논문을 제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급해졌다. 그때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떠올랐다. 김 장군은 흔쾌히 귀국보고서를 필자에게 제공했다. 그때까지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다리에 통증은 있었으나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거의 석달 가까이 자료를 정리해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란 제목에 ‘남북한 적용 가능성을 중심으로’란 부제목의 논문 초안을 정용길 지도교수에게 보고했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렸지만 절실하게 학구열에 불타는 필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논문을 검토하던 정 교수는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사영어반 교육이 논문준비에 유리한 여건이 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고마운 김영식 동기가 제공한 귀국보고서를 기초로 국방백서 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남북한 통일시에 어떤 군사력을 보유할지를 분석한 논문 작성은 육군대학에서 박 선배의 강력한 권유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부대 임무를 우선했던 필자는 그때 아니면 석사 학위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로써 야전만을 전전하며 실무에 찌들렸던 필자는 재활치료 위기로 오히려 군사영어반에 다닐 수 있었고 석사학위도 받았다. 덕분에 땅속에서 유충으로 살던 매미가 지상으로 올라와 껍질을 벗고 성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뱀이 묵은 허물을 벗고 크게 성장하는 ‘선태사해(蟬蛻蛇解)’의 호기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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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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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생은 1903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8세의 나이이자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1일 전남 나주군에서 일본인의 성지(聖地)로 간주되는 나주 신사의 외곽 화표(華表)에 40여 개의 돌을 던지고, 신사 본 건물에 ‘대한독립 만세’와 태극 무늬 등 독립 의지를 알리는 낙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표는 신사 입구에 세워지는 돌기둥을 가리킨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사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죄를 받았고,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시점인 1920년 3월1일 거사를 일으킴으로써 3.1운동 정신의 확산에 기여하고, 3.1운동 1주년으로 경비가 삼엄하던 시기 일본인의 성지인 신사를 과감히 훼손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알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이번에 대통령 표창으로 추서됐다. ■ 고(故) 박재선, 1960년 퇴학 30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9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 고(故) 박재선 선생(여)은 졸업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인 1930년 1월 부산에서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격렬한 내용의 진정서 준비와 동맹휴교 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허나 사전 발각되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겪고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이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약 한 달 후인 어느 날 전교생이 전 공회당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가는 전차에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학생대표로부터 “우리들도 일어서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전기 두 조여사와 의논한 끝에 그날 밤 졸업반 동료 47명 전원을 영도(影島)의 박씨 언니 집에서 모이도록 하고 이곳에서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타협을 갖게 되었다. 이날 밤 36명이 모였으나 불참한 동료 1명이 배신, 학교에 내통한 탓으로 박씨와 조씨 등 4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고 약 2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자 약 2개월간을 경찰에 끌려다니면서 무진 고초를 당하고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도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3학년생 47명 중 34명이 지난 11일(토요일) 오후에 부산 목도(牧島) 동교 생도 모(某)의 집에 모여 그중에 여덟이 수모(首謀)가 되어 내용이 자못 격렬한 열두 가지의 조항을 갖춘 진정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13일(월요일) 조회시간 전에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일제히 동맹휴교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그 진성서를 초안까지 하여 정서(淨書)할 사람 한 명과 진성서 제출 책임자 두 명까지 선정하여 모든 협의를 진행하던 중에 그중 한 명의 학생이 그것을 자기 부모들에게 밀고(密告)를 하게 되어 그것이 드디어 학교 당국에게까지 알게 되어 거사하기 전에 발각되었다”고 보도됐다. 선생의 활동은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부산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 준비를 지휘한 선생은 퇴학 30년 만인 1960년 2월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경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1929년 광주에 머물지 않고 해를 넘겨 1930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 사례이며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학교 측에 대한 진정서 전달과 동맹휴교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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