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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5)]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은 전술학처, 전략학처, 참모학처, 이념학처, 지휘학처와 전투발전부 및 교무처로 편성되어 있었다. 교육과정은 전술 및 전략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참모학과 지휘학부터 배웠다. 또한 당시에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을 비판하고 이념무장을 강화하기위한 이념학처의 교육도 가미되었다. 더불어 모든 전술교범에는 그때까지도 일본식 용어가 남아있어 ‘작전요무령’이 가장 근간이 되는 교범이었다. 작전 뿐만 아니라 인사, 정보, 군수, 동원 업무도 배웠지만 사단작전 장교를 경험하면서 각종 훈련을 치루며 종합업무를 해온 필자는 타 병과 및 타 참모 직능보다 학습에 좀더 수월하게 임할 수 있었다. 특히 새로 접하는 동원 업무는 교육을 마치고 필자가 향토사단들로 구성된 수도방위사령부로 보직될 예정이라 더욱 관심을 갖는 과목이었다. 참모학 수업을 마치고 공격 및 방어의 전술학 시간이 되자 드디어 전술담임교관들의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빛나며 학생장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당시 학생장교들의 꿈 같은 희망 보직이 육군 대학 교관이었다. 이미 교육 종료후 차기 보직이 교관으로 내정된 동료 학생들은 더욱 열심히 학업에 열중하였고 분임조 토의시 지도하는 교관들도 더욱 정성을 쏟는 모습이 눈에 띠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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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4)]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입교식을 마치고 학생조직을 편성 할 때 사관학교 1년 선배들이 학생장 및 각 반의 반장직을 맡았고 미국, 터키, 대만에서 한국으로 위탁교육온 장교들도 포함하여 1년간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병·포병·기갑·공병·통신 등을 비롯한 전투병과와 병참·헌병·의무·법무 등 기타 병과 장교들도 함께 입교하며 이들은 각 반과 분임조에 고루 분포되어 수업을 진행했다. 특히 육군대학에서는 학생장교들의 전술지식 함양을 위해 타장교들에 그동안의 야전 근무를 통해 식견이 높고 탁월하다고 인정되며 대령으로 1차 진급한 3명을 전술담임교관으로 운용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당시 3개반으로 구분하여 각반에는 약 60명의 학생장교들을 책임지고 교육하도록 편성된 전술담임교관들이 공지전투[空地戰鬪, Airland Battle] 및 가용 전투력을 최대로 통합하여 조기에 주도권을 장악하고 승전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공세적 기동전 등의 전술 및 전략지식 함양에 큰 도움을 주었다. 1반의 전술담임교관 윤천득 대령은 갑종200기로 임관한 기갑병과 장교였고, 2반 엄항석 대령은 육사28기로 야전 사단 작전참모를 역임한 보병작전의 대가였다. 3반 김병관 대령은 엄대령과 육사동기이자 육사를 수석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이들은 육군대학에서 전술담임교관을 마치고 다시 야전으로 부임하여서도 역시 근무를 잘하며 군발전에 기여하였고, 훗날 모두 장군으로 진급되어 학생장교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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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1
  • [김희철의 전쟁사(71)]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대통령 후보가 된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자 그 후임으로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부임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는데 사실 처음부터 해당 전선을 지휘했던 것이 아니라 아이젠하워와 몽고메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옮겨가자 대타로 지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한때 몬테카시노 전투와 같은 격전을 치루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전선이 평온한 상태였는데, 이는 우선순위에 따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태평양보다 유럽쪽에 우선순위가 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전선은 2부 리그 취급이었다. 그래서 물자와 병력이 노르망디에 비해 많이 뒤쳐져 적극적인 공세에 임하지 못했다. 이유야 어쨌건 책임을 진 지휘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그 모든 책임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로마에 가장 먼저 입성하기 위해 적군의 후퇴를 방치하는 과오를 범했다는 등으로 연합군 내에서 평판은 매우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계의 미군 영웅이었던 김영옥이 이탈리아 전선에 있었을 때, 당시 이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는 로마 점령 이후 그를 보고 계급이 고작 중위라는 것에 놀라서 “왜 겨우 중위냐?”고 물었다. 이에 전쟁영웅 김영옥은 진급 신청을 5번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클라크가 당장 옆에 있는 전속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다가 붙여주면서 즉석 진급시켰다는 일화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던 클라크는 6.25남침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 여름, 나토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후임으로 임명되어 역대 유엔군사령관 중에 가장 장기간인 18개월 동안 한국 전선을 지휘하였다.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 후 고착된 전선에서 출혈만 강요되는 고지전이 지리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클라크 또한 트루먼 행정부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휴전협정을 서두르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클라크는 휴전협정 막바지에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대규모 공세를 위해 원산지역에 기습 상류작전을 펴겠다고 건의하였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52년 12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당시, 서울 동숭동 미 8군사령부에서 재차 상륙작전 승인을 요청했으나 또 거부당했다. 한편 유엔군사령관으로 수차례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클라크는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및 네루와 버금가는 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했던 것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했던 지도자였다”라고 말했다. 또한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고 자신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에 존경하는 마음의 글을 남겼다. 휴전협정이 난항을 거듭하던 1953년 3월, 6.25남침전쟁을 뒤에서 조종했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던 클라크는 눈물을 흘리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그해 7월27일 휴전 협정 당시의 유엔군 대표로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이때 휴전 회담장으로 가기 직전에 클라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는데, 이 대통령이 견장에 달린 별 4개 계급장을 보면서 "이건 적에게 항복하라고 달아준 거냐?"며 비꼬았다고 한다. 아무튼 6.25남침전쟁 중에 유엔군 및 미군을 지휘했던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들은 전략 및 전술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던 전형적인 군인들이었다. 또한 워커, 밴플리트, 클라크 사령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들은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여 노블리스 오빌리제를 실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쟁 중에 워커는 불의 사고로 순직했고 밴플리트와 클라크의 아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순직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군생활동안 이탈리아 전선 및 6.25남침전쟁을 지휘하면서 어쩔 수없이 책임만을 감수했던 클라크 장군은 비록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조롱까지 당했다. 하지만 워싱턴과 6.25남침전쟁 현장에서의 상충되고 까다로운(delicate) 상황속에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참군인이었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3)]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 준비 열기가 뜨겁던 1988년 8월, 진해 구 육군대학 강당에서 싸워 이기는 전술, 전략 및 전쟁술을 배우는 육대 정규과정 45기의 입교식이 열렸다. 작금에는 전쟁 양상을 4개의 세대로 구분한다. 제1세대 전쟁이 18세기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인력), 제2세대 전쟁이 19세기 이후 베트남전쟁까지의 화력소모전이다. 현대전인 제 3세대 전쟁은 1991년 걸프전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났다. 정밀유도무기. 순항미사일이나 스마트 폭탄 같은 정밀유도무기의 성능과 역할이 증대했고 네트워크전. 통신, 컴퓨터 등의 기술 발전으로 C4I체계가 완성되었다. 대통령으로부터 말단 전투원까지 하나의 유기체 같은 전쟁망(warnet)으로 엮이게 됐다. 소위 네트워크중심전(Network Centric Warfare·NCW)이 가능해졌다. 제3세대 전쟁이 정보화 시대의 네트워크전 등을 일컫는다면 최근 이슈가 되는 제 4세대 전쟁은 심리전, 사이버전을 포함해 비대칭ㆍ비정규 전력에 초점을 맞춘 분란전이 새로운 전쟁 양상이다. 이는 2001년 9ㆍ11 테러 사건 이후 급격하게 부상한 새로운 형태의 비정규전과 테러전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이 열세인 상황에서 대규모 정규전을 치를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수법이다. 북한의 중심부로 침투하여 우호세력과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분란전을 일으키면 북한 정권은 일대 혼란에 빠져 전쟁수행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국군의 북진 기동을 보장한다는 것이 '제4의 전쟁' 개념이다.[ 특히 최근에는 지상과 해양에서도 어렵고 위험한 군사적 임무는 무인 무기체계가 담당한다. 무인비행기가 상당한 수준의 자율성을 갖고 정찰과 타격 기능을 수행하게 됐다. 더불어 테러리스트나 지하드 전사들이 하이테크 무기와 전통적 군사작전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비전통적 분란전을 수행함으로써 정치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필자가 육군대학에서 교육받을 당시에는 제3세대 전쟁양상 중에 하나인 공지전투[空地戰鬪, Airland Battle]가 대세였다. 재래전에 핵, 화학, 전자전 등의 가용 전투력을 최대로 통합, 제대별 종심공격으로 전장을 확대하여 적 선두 및 후속제대를 동시에 타격함으로써 조기에 주도권을 장악하여 승전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공세적 기동전. 공지전투의 핵심개념은 전후방의 통합과 종심공격에 의한 전장확대하는 것이었다. (다음편 계속)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5-10
  • [김희철의 전쟁사(70)]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통령을 비롯한 각 부처 장관들과 많은 시민들이 기다리던 중앙청 광장에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약소국의 설움을 느끼며 무산됐던 환영행사 다음날은 행사장에 불참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떠나기로 예정했던 날이었다. 오기가 발동걸린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부터 사람들을 경무대에 모이도록 했다. 전날 환영식장에 있다가 그냥 귀가했던 3부 요인들과 장관들이 다시 모두 경무대의 응접실에 모였다. 아이젠하워를 다시 오도록 하기 위해서다. ■ 이승만 대통령, 경무대 초청에 불응하던 아이젠하워 설득 위해 백선엽을 보내 아이젠하워가 경무대에 도착하는 순간을 위해 의장대와 군악대를 오도록 준비까지 했지만 분위기가 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중함에 고집까지 강했던 아이젠하워는 역시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경무대를 예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대통령 당선자여서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오전 일찍 경무대에 모여들었던 한국의 3부 요인과 장관들은 불편한 기다림을 이어가야 했다. 당시 경무대의 응접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빽빽하게 모여 앉은 대통령과 요인, 장관들 사이에서는 깊은 침묵만이 쌓여갔다. 지금의 대한민국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결국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경무대 밖으로 삼삼오오 나가서 끼니를 때웠다. 이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웬만한 경우에는 식사를 베풀지 않았다. 그럴 만한 공간도 부족했고, 여럿의 식사를 함께 준비할 인력과 시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이 대통령은 김태선 서울시장을 동숭동에 있는 미 8군 사령부로 보냈다. 그는 미국에 유학했던 경력이 있어서 미국대사관과의 교섭이 빈번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돌아왔다. “사령부 정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무대 응접실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이 대통령은 급기야 백선엽 육군총장을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이리 와보게, 백 총장.” 곁에 다가선 그에게 대통령은 착잡한 표정으로 “자네가 한 번 다녀와보게”라고 말했다. 힘이 많이 빠진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백선엽 육군총장은 군말 없이 경무대를 나왔다. 지프에 올라타고 동숭동으로 직행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비록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더라도 아이젠하워가 자존심 강한 이 대통령의 체면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면 앞으로 양국의 협력에는 상당한 장애가 생길 수 있었다. 미국과의 협력은 아주 절실한 과제였다. 특히 한국군의 전력증강 사업을 앞두고 미군이 지닌 몫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아이젠하워 일행을 설득해 경무대에 오도록 해야 했다. 미 8군 사령부 정문을 지키고 있던 미군 헌병은 낯익은 백 장군의 지프는 차가 도착하자 문을 바로 열었다. 백 장군은 2층의 사령관 집무실로 곧장 올라갔다. 사령관의 집무실을 아이젠하워에게 내준 상태였기에 밴플리트는 자신의 집무실에 있지 않고 그 옆의 부속실에 있었다. 밴플리트는 돌연 나타난 백 장군을 보더니 “나도 설득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 그는 짤막하게 “마크 클라크에게 직접 이야기해보라”며 사령관 집무실에 붙은 다른 부속실을 가리켰다. 클라크 사령관이 머물던 방이었다. ■ 이승만의 학식, 자유와 민주에 대한 인식을 존경했던 클라크는 아이젠하워를 설득 나는 그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클라크 사령관도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경호원들이 융통성이 없어 설득에 실패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백 장군은 단도직입적으로 협박 같이 강하게 설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제 한국은 병력 수만으로는 100만 대군을 갖출 수 있다.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이 100만의 한국군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아느냐?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지 않고 그냥 떠나면 그런 일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진다. 클라크 장군께서 설득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혔다. 클라크 사령관은 미국의 자존심을 최고로 내세우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잘 알았다. 이 대통령의 학식과 미국에 대한 이해, 자유와 민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존경했던 클라크였다. 그는 결코 길지 않은 내 ‘협박’에 얼굴이 금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클라크 장군은 사무실 뒤로 난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젠하워가 머물고 있던 방이었다. 그는 곧 밖으로 다시 나왔다. 나를 보면서 클라크는 “경무대로 돌아가 기다려라.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곧 경무대를 방문한다”고 짧게 말했다. 다행히 백선엽 장군의 설득이 주효했다. 백 장군은 곧장 경무대로 가서 클라크 사령관의 언질을 대통령에게 전했다. 이 대통령은 “수고했네”라는 말도 없이, 아이젠하워를 맞을 준비에 착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6시 무렵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마침내 경무대에 왔다. 그는 클라크 사령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 그리고 한국전선에서 활약 중이던 아들 존 아이젠하워를 대동하고 경무대에 도착했다.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간단한 의장대 사열식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아무래도 이승만 대통령과 요담하는 일을 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해 모종의 정치적 약속을 해줘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그때의 만남이 불발에 그쳤다면 자존심 강했던 이 대통령과 차기 미 행정부의 관계는 매우 냉랭해지고 차후 협력이 어렵게 될 가능성이 컸다. 다행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를 데리고 왔던 덕분에 그때의 환송 면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1시간 남짓 경무대에 머물다가 여의도 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관을 넘어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벌인 도박 같은 밀당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5-10
  • [김희철의 전쟁사(69)]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아이젠하워는 1952년 12월 3일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다음날 오전 8시경 미 8군 사령부 2층 회의실에서 그가 주관하는 회의가 아침에 열렸다. 백선엽 장군이 브리핑을 위해 대기하던 회의장으로 맨 앞에 걸어오는 사람이 아이젠하워였고 그의 인상은 매우 부드러웠다. 그 뒤로는 클라크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과 밴플리트 사령관,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 레드포드 태평양함대사령관 등이 따르고 있었다. 이 때 아이젠하워는 “굿모닝,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모이니 노르망디 상륙작전 D데이 전날의 상황이 떠오르네요”라며 얼굴에 웃음을 띠고 2층에 있는 밴플리트 장군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우선 밴플리트 사령관의 브리핑으로 시작됐다. 한국 전선의 현황 브리핑이었다. 그런데 아이젠하워와 사관학교 동기였던 밴플리트 사령관은 우선 한국 전선에 와있는 아이젠하워 당선자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안부부터 보고했다. “존 소령은 현재 3사단에서 근무 중입니다. 선거에서 각하가 당선자로 선출된 뒤에는 인사 조치를 취했습니다. 일선 대대장에서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을 바꿨으며, 현재 그 자리에서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에 관한 인사 조치는 사령관 권한에 속하는 일입니다. 나는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어떤 보직을 받아도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존이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단호하게 자신이 아들로 인해 작전에 지장을 주거나 포로가 되어 적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미 대통령 당선자는 그때까지 한국전선에 참전 중이던 자신의 아들에 관해 사사로이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밴플리트는 존 아이젠하워 소령의 인사에 대해 처음 언급하면서 대통령 당선자의 염려 사항을 불식시켰다. 또한 밴플리트가 대통령 당선자의 아들 현황부터 보고를 한 것은 공(公)과 사(私)가 뒤바뀐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으나, 이는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부드럽게 진행되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밴플리트의 한국전선 상황보고가 간략하게 끝나자, 이어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이 옆에서 차트를 한 장씩 넘겨주며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추가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며 백 장군은 마지막에 준비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고 강하게 설득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브리핑을 경청한 뒤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고 했다. 이 발언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으로 그만큼 신중했던 사람이었다. 백 장군의 브리핑이 끝나자 밴플리트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할 말은 다 했고, 다 잘 풀릴 거야”라는 메시지를 백 장군에게 던지는 듯했다. 결국 한국에서의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의 표정은 좋아졌다. 그것은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불참한 환영식장에서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소개… 밴플리트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백선엽 장군에게 한국군 전력 증강 브리핑을 받은 아이젠하워 일행은 이어 일선에 있는 미군부대 시찰에 나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방한을 하나의 ‘큰 기회’로 간주했다. 휴전을 서두르려는 미국의 속내를 잘 알고 있던 이 대통령은 10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이 북한에 주둔하는 상황에서 휴전은 어림없다고 봤다. 휴전이 기정사실화하더라도 한국으로서는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명확한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그런 대통령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아이젠하워는 자신이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며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의 공식적인 접촉은 가능한 한 자제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광릉 수도사단에서 대기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는 수도사단을 함께 시찰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곧장 경기도 북부에 주둔 중인 미 3사단과 미 9군단을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했던 이 대통령은 수도사단에서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옛 중앙청 광장에 준비한 아이젠하워 환영행사장으로 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3부 요인, 각 부처 장관들이 기다리고 있던 중앙청 광장에 오지 않았다. 우리의 요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일정을 고집했다. 중앙청 광장의 행사장에서는 이미 많은 인파가 아이젠하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크게 어그러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어엿한 국가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라의 힘이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행사장으로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약소국의 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단상에서 함께 있던 한국의 3부 요인과 내각의 장관들 표정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요했다. 전쟁으로 휘청거리던 신생 대한민국을 어떻게 해서든지 제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늙은 대통령의 안간힘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주눅이 들지 않았다. 전선에 선 용사처럼 그는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잃지 않았다. 결국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요인, 장관들, 수많은 서울 시민의 기대와는 달리 환영식장에 결국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대통령과 요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무대 위는 군중들의 열기와는 달리 아주 착잡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연단 앞으로 나섰다. 늘 강조하던 ‘북진통일’을 중심으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그에 화답했다. 연설 말미에 대통령은 무대 뒤를 흘끗 돌아보더니 “지금 한국에 온 아이젠하워 차기 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끈 전쟁 영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전쟁 영웅이 있습니다. 백선엽 참모총장이 바로 그 영웅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주 갑작스럽게 대통령은 백 장군을 대기하던 시민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었고 그 순간 우레와 같은 시민들의 박수가 터졌다. 백 장군은 무대 앞에 나가 얼떨결에 경례를 올리고 말았다. 아이젠하워의 태도에 심사가 뒤틀렸던 이 대통령이었다. 그가 영웅이라면, 한국에도 그런 영웅이 있다는 즉흥적인 소개를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타고난 승부사였다. 의지가 강했고, 실천력은 더 강했던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 태세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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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2)]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첫번째 올림픽이기도 했다. 전에는 기록을 문서로 기록해 보관했으나, 이번부터는 컴퓨터 데이터로 관리하였다. 특히 계측 부문에도 컴퓨터 측정 기술이 도입되어 1/1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첫 번째 경기가 되었다. 또한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테니스는 1988년 기준으로 64년만의 합류하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성공적으로 개최된 88올림픽은 신기록과 에피소드가 넘쳐, 육군대학엔 이야기 꽃 만발 미국의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는 5관왕을 차지했다.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역도에서 88서울올림픽 전까지는 자기 몸의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터키의 술레이마놀루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인 190kg을 들어올려 우승하며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남자팀은 은메달을 차지했다.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웠다. 여자 개인전은 금, 은, 동 모두 한국이 가져가며 양궁 최강국이 됐다. 올림픽 최종 결과 소련은 금메달 55개로 1위, 동독은 금 37개로 2위, 미국은 금 36개로 3위를 했고,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총 33개 메달을 획득하며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원으로 알려졌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판매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 밖에 소련과 동독 및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최종적으로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다. 동독과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도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육군대학 교수 및 학생들은 TV 중계를 보면서 88서울올림픽을 응원했다. 특히 권투 경기에서 변정일 선수에 대한 오심 편파 판정에 대한 비난과 우리 선수들의 맹활약 등 탄생한 신기록과 에피소드를 화제로 삼았다. 강의실과 자유시간 및 회식자리에서는 올림픽 이야기 꽃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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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7
  • [김희철의 전쟁사(68)]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50년 6월 한국 육군의 규모는 수도경비사령부까지 합쳐서 모두 8개 사단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병력만 약 9만 7000명 정도였고, 전쟁을 수행할 만한 화력과 장비는 거의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군은 김일성이 벌인 불법 기습남침 전쟁으로 3년 가까이 피눈물을 쏟는 처절한 저항을 하며 대한민국을 지켜냈으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휴전선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력증강이 필요했고, 반면에 미군은 한국에 장기간 주둔하는 문제가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워 이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휴전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마침, 전선을 이끄는 유엔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이것을 먼저 언급하고 나왔다. 미군이 지원한다면 한국군은 보다 현대화한 전력을 갖춘 전투 사단을 증강할 수 있었다. 밴플리트는 우선 20개 사단으로 증강을 제시했다. 전쟁 전에 비해 2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는 일이었다. 미국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대한민국 군대는 전쟁에 참여한 미군의 막강한 화력과 장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군의 자립(Self standing)을 주장했고, 당장 우리 역량으로는 이룰 수 없으나 미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래서 안보가 튼튼해지고 국가 역량이 커진다면 한국군은 독자적인 안보 역량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한국군의 힘을 강화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헌데 우리 정부와 군은 그 당시 상황에서 밴플리트가 이것을 언급하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전력 증강시키는 계획 아이젠하워에게 브리핑하도록 준비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들은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2주 동안 한국군 전력 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했고, 우리 군에서는 백선엽 육군총장과 정래혁(국회의장 역임) 작전교육국장이 함께 참여했다. 당시에는 중요한 계획은 모두 차트에 글과 그림을 적거나 그려서 보고를 받을 사람 앞에 걸어놓고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을 하는 방식이었다. 밴플리트는 차트가 완성될 무렵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증강계획 관련 브리핑을 받을 장소인 자기 집무실을 백선엽 장군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앞에서 충분하고 자신 있게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예행연습’을 하라는 취지였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다. 아울러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한국을 방문해 직접 현장을 살피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를 인지한 밴플리트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때를 활용해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주지시킨 뒤에 그 사업을 밀어붙이자는 계획이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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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1)]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한 '88올림픽경비단'은 86 서울아시안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모체로 개편했다. 위의 사진과 같이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이들은 경기장 주변 경비와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 및 대테러 작전수행 등을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했다. 예를 들면 공항 및 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또한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에는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팀,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했고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이와 같이 직업군인과 경찰 및 자원봉사자들은 음지에서 성공적인 국가 행사를 위해 헌신한 반면에 외출나온 군인들에게는 서울 시내 등 경기장 주변에서 군복을 착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편 올림픽이 끝나자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져 실업자가 될 뻔했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공공기관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설립하여 그들을 채용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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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0)]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련의 사주에 의해 발발한 6·25 남침전쟁과 KAL기 격추 만행에도 불구하고 88서울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에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관중들의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물론 당시의 미국 NBC 취재진들이 한국의 집창촌이나 PX 유출 같은 것 등 사실상 한국을 폄하하는 식의 편파보도를 했고, 권투경기에서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중계를 했던 것의 영향이었다. 게다가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임산부 및 택시운전사를 폭행하는 사건사고, 미국 일부선수들의 태극기 모욕과 수영선수의 절도사건 그리고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이 겹쳐서 상대적으로 소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 관중들이 올림픽 경기장에서 충격적으로 소련 대표팀을 엄청나게 응원 또한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련 대표팀이 관객의 응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사실은 당시 운동권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가 치러질 때 자신이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도록 조치했으며,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 응원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고 PD 출신 일부 정치인들이 보수 우파로 전향하기도 했다. 아무튼 관객들의 소련팀 응원이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것은 미국 선수들의 추태와 미NBC의 한국을 폄하하는 편파보도 및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 그리고 미국정부의 내정간섭 등이 겹쳐진 영향이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 시절에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며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던 필자도 축구종목에서 5승1무(예선전에서 한국과 무승부)전적을 거두며 우승한 소련이 4대2로 이기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관중들의 일방적으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느껴 의아해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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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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