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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1)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된 다부동 볼링장전투
    ▲ 경북 칠곡에 위치한 한반도 최초의 전차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좌측 다부동전투 기념비와 우측 기념관 및 볼링장전투의 영웅들(김점곤, 김동빈, 마이캘리스 대령 등)조형물 [사진=김희철] 핀(전차) 향해 질주하는 포탄들이 볼링공을 연상시킨 최초의 전차전 '볼링장 전투' '빈틈없는 용장' 김점곤 .. 6·25 남침전쟁의 전세 뒤집은 1사단 다부동 전투 영웅 다부동전투 승리는 연합군의 과감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로 작용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 남침전쟁시 ’50. 8. 3일부터 9월초까지 지금의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일대에서 사생결단의 결전이 벌어졌다. 한반도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등이 이끄는 국군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이 다부동 볼링장전투는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리고 있다.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월 1일 낙동간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월 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천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 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마산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을 돌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다. 김일성 군대의 사활을 건 몸부림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전선을 뚫기가 몹시 어려웠다.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는 마음이 급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상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작전은 그만둔다"고 했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이 주목을 받았다. 방어의 선봉에 있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 그 예하의 12연대는 김점곤 중령이 맡고 있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하지 못하면 인천을 통해 뭍에 올라온 미 해병대가 고립을 면치 못하리라 봤다. 인천을 포기하면, 다음 상륙 예정지는 군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훨씬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 낙동강전선 작전도와 다부동전투의 영웅 故 김점곤장군 영결식 모습(동영상 캡처=김희철) 제1보병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생고생하며 낙동강을 도하했다. 낙동강을 건넌 1사단은 제15연대를 인동에, 제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제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인민군이 1사단을 추격하여 인민군 제13사단이 낙동리로, 제15사단이 구미시로, 제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시에 인민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국군은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제6보병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인민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12연대는 견제력을 상실했다. 이날 22시에 강정 나루터로 인민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인민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시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그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당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는 왜관 북쪽 6.5km를 기점으로 하여 11, 12연대를 5내지 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구간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90~100%, 병력은 70%나 추가되었고, 뿐만 아니라 T-34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인민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의 삽질(...)로 2군단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하려 하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탈취하는데는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 국군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등 혈투를 벌였지만 12연대는 유학산 탈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에 백선엽은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인민군이 대구(당시 대구에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다. ▲ 다부동전투가 벌어진 천평리(볼링장)계곡의 1사단 각연대와 미27연대 작전배치도(자료=김희철) 맥아더 원수는 다부동 융단 폭격, 국군 15연대는 여세를 몰아 328고지 탈환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왜관 및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어쨌든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백선엽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인민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보병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인민군은 반면에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15사단을 20일 영천으로 돌렸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증원된 마이캘리스 대령의 미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다. 또한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두었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이곳의 좌표를 알려준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제8포병대대도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날 목숨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저지전을 펴며 전차전을 볼 수 있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 및 SU-76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져 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Y선으로 지정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위에 언급되었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지고, 이 Y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할 때 혼란스러운 낙동강 방어선의 진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 이러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국군 전사자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김점곤은 끝없이 샘솟는 예비대로 12Km를 북진, 미 위커장군도 놀라며 찬사보내 볼링장전투 승리는 연합군에게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됨 이후 장맛비가 내리던 1950년 9월의 어느 날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졌다. 혈로를 뚫고 국군 1사단 12연대장 김점곤 중령이 12㎞를 북상했다. 대구 북방 팔공산 자락에서 경북 의성까지였다. 워커는 1사단 백선엽 장군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뚫었단 말이냐? 정말 대단하다"는 찬사였다. 미 8군이 유일하게 보유한 고사포 여단, 국군 1사단 12연대의 보병 전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전 덕분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연대에 속한 대대는 3개가 기본인데 12연대는 추가로 2개 대대를 더 가지고 있었다. 연대장이 주변의 낙오병들과 학도병 500명 등으로 예비대대를 편성했고 추가로 150명의 여고생들까지도 후방요원으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김점곤은 사단장도 모르는 '끝없이 샘솟는' 충분한 예비대를 활용하여 워커장군이 감탄한 적진 돌파로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은 이 어려운 상황을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국군과 UN군의 피와 죽음, 희생으로 결국 승리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국군에겐 계속 밀리던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준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도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부동 볼링장전투의 승리는 연합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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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 이웅평의 미그19기 귀순사건이 만들어낸 '불타는 용사'의 교훈
    ▲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조선인민군 공군 이웅평 상위가 지난 1983년 3월 4일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과 그가 몰고온 미그 19 전투기. [사진제공=국방부]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북한공군 고(故) 이웅평 상위 천문학적인 보상금과 명예 얻었으나 수술 부작용으로 48세에 요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3년 2월 25일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대한민국 공군의 대위에 해당)였던 고(故)이웅평은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하였다. 로켓 사격 훈련을 위해 10시 30분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미그19 전투기는 갑자기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 방향으로 기수를 돌렸다. 행로를 이탈한 미그기는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km의 전속력으로 남하, 10시 45분 황해남도 해주시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미그 19 전투기가 남한영역에 들어오자 놀란 민방위 관계자는 그날 오전 10시 58분경에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는 경보 방송을 울렸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당시 팀스피리트 훈련을 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방공망에 미그19 전투기가 포착되자 공군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미그기는 날개를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F-5기는 미그기를 유도해 11시 4분 수원 비행장에 착륙하여 귀순하였다.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이웅평은 귀순하여 천문학적인 보상금(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에 따라 MiG-19기로 무려 15억 6천만 원, 현재 가치로 대략 수백억 원 수준)도 받고, 결혼도 하고, 대령으로 진급하여 공군대학교관으로 명예까지 부족할 것 없는 선택과 삶이었는데 간이식수술 부작용으로 48세로 요절했다. ▲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 이웅평의 귀순 당시모습과 대령 진급후 공군대학 교관 시절 모습[사진제공=김희철] 타성에 젖은 매복작전으로 납득이 안되는 교통사고 발생 진지 투입시 무거운 실탄 대신 종이 카드 수령하기도 필자가 소대장을 마치고 대대 작전항공장교(교육장교로 통칭) 직책을 시작했을 때 GOP후방종심 매복작전에 투입했던 병사가 야간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도 오후 늦게 상급부대의 추가 업무사항이 하달되어 보고서 준비 때문에 야근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매복작전조에서 긴급 무전이 날라왔다. 작전중이던 병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 앰블란스를 보내달라는 전문이었다. 대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군의관과 앰블란스를 보냈다. 현장에 긴급 출동한 해당 중대장은 다행이 피해자는 어깨가 골절만 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보고를 해왔다. 사단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매복작전간 교통사고에 대해 감찰조사가 나왔다. 감찰조사 확인 결과 매복지점 산 정상에는 있는 미군의 라지트 기지로 투입하는 차량이 도로에 인접한 매복조를 발견하고 노출을 피해 차량 라이트를 소등하고 이동하다가 매복진지에서 팔을 내놓고 가면을 취하던 병사의 어깨를 치었던 것이었다. 마침 차량의 진지방향에 있던 차폭등이 꺼져 미군 운전병이 병사를 식별 못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차량 바퀴가 1센티만 더 들어 갔으면 머리를 치고 지나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매복진지 선정의 부적절함과 매복작전 중이던 병사들의 타성이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이 발령되어 진지에 투입할 때는 탄약을 휴대해야 하는데 통상 훈련시에는 실제 탄약 대신 탄약고에서 종이 카드를 수령하여 지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는 탄약을 꺼내는 것도 복잡하지만 산 정상에 배치된 진지까지 휴대하고 이동하면 분실 및 관리에 어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병사들도 완전군장에 식량, 탄약까지 무겁게 휴대하고 1시간 넘도록 산정상 진지로 올라가야 함으로 실제 탄약보다는 종이카드를 선호했다. 말 그대로 타성과 관례에 젖어 훈련 및 작전에 임하니 매복작전간 웃지 못할 교통사고도 발생하는 실정이었다. 이웅평 월남 당시 경고방송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 타성과 게으름에 젖었던 '철없는 병사들' 탄약과 수류탄 더 받으려고 아우성 하지만 1983년 2월 25일 방송에서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고 발표하고 상급부대에서 비상이 발령되자 상황은 달라 졌다. 당시 부대는 이웅평이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한 사실이 전파되지는 않은 상태로 전쟁이 곧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병사들은 완전군장으로 진지로 투입되기 시작하자 탄약고를 관리하던 병기관이 바빠졌다. 종이카드로 탄약을 대치했던 과거 훈련시의 모습은 없어지고 각개병사들은 훈련시 무거워서 카드로 대치했던 탄약과 수류탄을 한발이라도 더 받아서 진지에 투입하려고 아우성이었다. 타성에 젖어 안일과 편리함만을 추구했던 게으르고 요령만 피우던 철없는 병사들은 찾을 수가 없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임무를 완수할 차비에 매진하는 용사들의 불타는 전투의지만 보였다. 반드시 훈련은 실전 같이 해야 한다. 따라서 간부와 리더들의 훈련 및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군대나 사회조직에는 “나쁜 부대는 없다. 오직 나쁜 리더만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bad troops. What is there are only bad leaders.)”라는 영어 격언이 떠오른다. 작금의 국제정세와 대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에 접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현명한 리더와 미그기 귀순 사건시 보여준 것처럼 불타는 전투의지의 용사들이 꼭 필요한 때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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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25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0) 남부군 이현상과 백골병단 채명신의 유격전
    ▲ 이현상의 ‘남부군’ 영화 포스터와 백골병단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과 ‘HID36지구대’ 김동석 대령과 딸 가수 진미령 모습. [사진=김희철] 6.25남침전쟁시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유격전 전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교전한 전선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치루어 졌다. 유격전으로 유명한 부대는 북한군의 경우, 영화화된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이고 우리는 채명신장군의 ‘백골병단’있었다. 또한 서해쪽에서는 1950년 12월 故 김종벽대위가 창설한 ‘구월산 유격대’로 황해도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백령도로 철수하여 1954년까지 활동한 ‘동키부대’가 있었다. 동해쪽에서도 물쥐대장이라 불리면서 인민군 17사단장까지 생포해 전향시키며 1954년 2월까지 정보활동 및 유격전 활동을 한 김동석 대령의 ‘HID36지구대’도 있다 . 처절했던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 활동 이현상은 실존인물로 빨치산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존재로 알려진 사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남부군"이 소설과 영화로 소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이후 남로당의 무장투쟁 전술에 의해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후퇴에 따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가면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 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광범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현상 부대는 유엔군의 9.15 총반격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하였다.당시 후평리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박헌영의 오른팔로 휴전후 7일만인 8월5일 평양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총살됨)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함께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철에게는 6개도당의 지도권이 위임되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 이승엽은 후평리에 모인 유격대와 인민군 후퇴시 잔류한 군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에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현상의 지휘 아래 남하한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그 직속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충북 단양지구로 내려와 문경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유엔의 공격을 받고 제천지구로 이동했다가 51년 2월 초 속리산까지 내려와 활동하다가 덕유산을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51년 5월 중순 송치골에서 6개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6개도당회의 이후 남한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였다. 대표적인 빨치산이었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비밀아지트(비트)였던 지리산 빗점골에서 1953년 9월18일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이것은 우리쪽의 공식 기록이지만 그가 자살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그는 1925년 박헌영 밑에서 김삼룡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남로당의 거물급 인사였으며 한국전쟁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각종 빨지산 유격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같은 남부군 빨치산은 인민군 퇴각이 있던 1950년 10월중에는 2만5천명(38선 이남 1만명, 이북에 1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군도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 ‘50년 10월 중순부터 강원도와 영남 지역, 호남 지역에서 조직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3개사단, 4만명의 인원을 동원한 것이다. 이듬해인 ’51년 1월 20일 당시 창궐한 전염병으로 남부군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도당위원장 박종근은 ’51년 5월3일자로 부수상 허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동안 제3 유격지대(일월산.보현산 일대) 편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빨치산 당일꾼들이 대부분 전염병을 앓고 있다"며 1,000명의 인력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남부군 빨치산들의 최후가 다가왔다. ‘56년까지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전선없는 전쟁이 계속됐지만 북측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빨치산으로서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빨치산 1명 사살, 2명 생포. 이로써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은 정부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방군사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국군이 전쟁기간중 3개 사단을 빼돌렸을 만큼 남부군 빨치산의 무장 투쟁은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다"며 "휴전 이후 남로당계의 숙청으로 남부군 빨치산에 대한 북측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그들의 무장 투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 있는 백골병단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묘비와 인제군의 전적비 [사진제공=김희철]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던 채명신의 ‘백골병단’ 활동 2013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서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그는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후, 남침 했던 인민군 패잔병들을 북한 전선사령관 김책의 명령으로 유격부대로 개편하자, 유엔군사령부는 이들에 대응하기 위한 유격전을 감행하기에는 피부, 언어, 지형 등을 이유로 유격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고충을 육군 수뇌부에 전달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보충대에 대기중인 장정 중에서 유격 특수전을 수행할만한 신체 건강하고 사상이 확고한 결사대원을 징병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때,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 보충대에 수용중인 의용경찰관, 철도경찰,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 현역 군인으로 낙오된 병사 등에서 충원하기로 했다. 이들 의용경찰 등 모두를 대구 소재 육군보충대에 입소시킨 병력자원은 6,000여명 중에 1차로 710명, 2차로 300여명을 특수작전을 수행할 결사대 요원으로 선발하여 육군정보학교에 입교시켜, 유격 특수전을 위한 ‘무장첩보 및 유격전에 필요한 교육’을 1951년 1월 25일까지 3주간의 실시하고, 각각 작전명령에 따라 적후방에 침투시켜, 적의 게릴라화 된 부대에 대응한 특수부대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이란 참전장병 모두가 백골이 되겠다는 기개를 과시하고 적에게 무시무시한 부대로 인식되게 함과 동시에, 병력의 수를 군단급 보다 큰 집단군급으로 과장하기 위하여 병단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완벽할 만큼 북한군 행색으로 위장하여 제1진 363명이란 병력을 현역 육군중령의 직접 진두지휘하에 적진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것은 건국이래 최초의 작전이었다. 백골병단은 ‘결사 제11연대’인 제1진 363명을 1951년 1월 30일 육군중령 채명신이 직접 지휘하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육군 수뇌부의 격려를 받으며, 국군 제7사단 전방 지휘소에서 평창 정선 방면의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2월 7일에는 제2진 ‘결사 제12연대’ 330명이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강동지서앞까지 도착하자 육해공군 총참모장 육군소장 정일권, 지역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 지역 작전부대인 수도사단장 송효찬 준장, 주한 미 군사 정보수석 고문관 미육군중령 하우스만, 한국 육군본부 정보국 3과장 등이 출진 장도를 격려하는 사열과 선서·훈시 그리고 보급수령후 강릉 구정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제3진으로 출동한 ‘결사 제13연대’ 124명은 부산항에서 미해군 수송함(L.S.T)에 승선하여 동해 묵호항에서 하선, 명주군 성산면 대관령 경유, 횡계 방면으로 이동, 월정사 방면으로 침투하여 2월 20일 삼산리에 도착함으로써 3개부대가 합류·통합되었다. 1월 30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적후방으로 침투작전을 개시한 ‘결사 제11연대’는 2월10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적 3군단 예하 병력 34명을 생포하고, 비상식량을 보충함을 시작으로 2월27일 작전참모 전인식 대위 지휘하에 3개소대(대원 9명과 장교 1명)를 구룡령 차단작전에 투입하여 작전중, 인민군 69여단 정치군관 대위 외 중위, 특무장, 전사 등 4인을 생포하여, 69여단의 전투상보와 기타 주요 기밀사항을 적 3군단에 보고하려던 1급 기밀문서를 압수·노획하여 이를 강두성, 장인홍 보좌관 외 2인으로 하여금 아군 수도사단에 신속히 전달하여 적을 괴멸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3월 18일 인제군 인제면 가리산리 필례 마을일대에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인민군 중장 길원팔과 빨치산 제5지대 참모장 인민군 대좌 강칠성 등 참모진 13명 전원을 생포 및 사살했다.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때 길원팔과 채명신장군의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 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는데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고 말하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고아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는데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을 추가했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 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훗날 남쪽으로 복귀 후 채 장군은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키며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특히 참군인이자 남자 중 남자인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백골병단은 적생포 309명, 사살 174명, 권총 9정, 다발총 17정, 장총 178정, 계 204정의 무기를 노획하고, 군관증 11, 노동당 당원증 40여매, 인민위원회 조직표 5점, 694 무전기 1대와 통신 암호문, 김일성의 직접지령문 등을 노획함으로써 적의 전의 상실과 후방지역의 혼란을 조성케 하여 상대적으로 아군작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장비·보급으로 미루어 14일 이전까지 작전을 끝내고 귀환해야 했으나 그들에게 부여된 작전명령은 보급의 현지조달을 통해, 계속 작전하게 하였으므로 생존성의 보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백골병단은 14일분의 비상식량으로 60여 일간의 전투를 감행하고 1951년 3월 24~25일 사이에 굶고 허기진 동·아사자 120여 명의 비전투 손실도 발생하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백골병단으로 통합된 총병력 647명중 희생 364명(56.3%), 귀환·개선 장병 283명(43.7%)으로 파악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간의 유격전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남침전쟁은 같은 민족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쓰라린 민족의 비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은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 5천명이 전사하고 44만 3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또한 8,333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다가 포로교환 시에 생환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지만 최근에 공개된 소련 측의 자료에 의하면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 말에도 약 4만 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에 억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행한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총 규모는 당시 금액으로 4,123억 원에 달한다. 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들의 군대가 이 전쟁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입수된 구 소련의 자료에 입각한다면 최소 약 38만 명의 북한 군인이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계산해낼 수 있다. 부상자에 관한 자료는 없지만 이 보다 훨씬 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75,823명의 북한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구 소련의 자료에 의한다면 80만 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 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재산피해는 4,201억원에 달한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받고 있는 이산가족이 2천만 명에 다다른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은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군사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제 2의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해서 굳건한 안보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9-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 국제신사를 '철면피'로 만든 최전방 오지
    ▲ 사관생도 시절 스스로를 '국제신사'라고 칭했던 육군 소위들은 전방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혼한 선배의 집에 찾아가 물펌프질을 해주고 '회포' 푸는 '철면피'가 되곤 했다. [사진제공=김희철/동영상캡처] 군부대 자유시간 핸드폰 허용, 필자의 초급 장교 시절엔 상상도 못할 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금년 4월부터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일과 후 자유시간과 휴무일에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덕분에 가족들과 연락을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발전을 위해 정보도 쉽게 접촉하게 되어 병사들은 대단히 만족한다. 하지만 음란물 시청, 도박, 부대 보안에 취약함 등이 제기되어 재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 게다가 병사들의 평일 외출도 허용되었고 위수지역 통제도 지역 개념에서 2시간 내 지역으로 완화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최전방에서 근무할 때에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필자가 초급장교 시절, 당시에는 지금의 혜택은 생각도 못 했고 서울에서 부대까지 이동하려면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무수한 검문소에서 헌병과 마주치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서울로 나올 때는 더욱 검문을 심하게 했다. 게다가 비포장 도로로 덜컹거리는 덕택에 흙먼지가 밀려들어오는 차안에서 멀미와 싸우며 긴 시간을 가야했다. 부모님이나 애인이 면회를 갈려면 하룻 밤을 잘 각오로 가야했다. 특히 최전방 GOP지역에서는 출입 통제로 가족들을 볼려면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식당없는 전방 오지 근무, 결혼한 선배집을 선술집으로 만든 '철면피' 되기도 식당이나 주점이 거의 없는 전방 격오지의 퇴근 후에나 휴일에는 마땅하게 소일할 거리가 없었다. 서울까지 나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같은 대대에 통신대장으로 함께 근무하던 동기(안철주 중위)와 1시간을 걸어 민간마을로 내려가면 마땅히 들릴 곳이 없어 쉽게 찾는 곳은 결혼한 동기생집 이나 선배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방문한 집에 동기나 선배가 없더라도 가족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남편 없이도 저녁 밥을 차려주어 대접을 했다. 시골 쪽방 셋집에서 고생하는 선배/동기의 가족이 안스러워 물가에 가서 펌프질을 하여 식수나 용수를 길어주는 등 약간의 봉사만 하면 그날은 맛있는 삼겹살로 배불리 한 끼를 때우고 늦게 퇴근한 선배와 소주까지 곁들여 회포를 푸는 날이었다. 사관생도 시절 국제신사라고 자부했던 육군 소위들은 철면피와 철판으로 변해 있었다. 식당 없는 전방 오지의 선배와 동기집을 하도 자주 찾아가서 선배집을 선술집으로 만들었고, 신사도와 체면도 없는 철면피/철판 인간이 되어 폐를 끼쳤다. 몇 년이 지나 필자가 결혼하자, 내가 했던 행동은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었다. 전방을 찾아오거나 전입온 선후배들도 똑같이 결혼 후 마련한 필자의 셋방집을 수시로 찾아왔다. 그 동기와는 지금도 철판, 철면피라고 서로 부르며 미소를 짓고, 내 집사람도 그때 일들을 회상하면 힘들지만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 철면피와 철판이었던 동기생 안철주와 시외버스에서 헌병이 검문하는 모습 [사진제공=김희철/동영상캡처] 지나친 규제는 위법을 양산하고, 이완된 규율은 방종과 무질서를 낳아 국제신사를 철면피와 철판으로까지 만들며 폐를 끼쳤던 선배의 가족은 아직 짝이 없는 후배가 안타까워 대학 후배나 친척을 소개 시켜주어 평생 반려자가 된 사례도 많았다. 필자도 인접 소대장 유승한중위(학군19기)의 동생을 소개 받아 지금의 내 짝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만남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최전방에서 결혼했다면 우선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간혹 근무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지금의 처남)는 내게 소개를 해주기 위해 휴일에 서울을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엄격한 위수지역 통제로 서울을 갈려면 증명서가 필요했다. 무수한 검문소에서 헌병들이 증명서를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출장을 신청하여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복잡하고 잠깐 휴일을 이용해서 다녀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정권이 있는 연대나 포병대대의 인사장교들에게서 출장증을 몇장씩 확보하고 비표를 확인하여 증명서를 임시로 작성하여 이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마침 선배 소대장이 증명서를 제공해주어 그 친구는 무사히 서울에서 지금 내 가족의 사진을 가져왔고 필자는 사진을 보고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위수지역이 시간개념으로 교통도 편리해져 2시간내 복귀할 수 있는 서울을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당시의 지나친 규제는 헌병 검문을 통과하기 위한 또다른 위법을 양산하고 있었다. 사실 그 위법 행위 덕에 필자는 평생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고 결국 결혼으로 성공했다. 전후방 격오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가족들을 포함한 전우애와 의리, 선배들의 무한한 후배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지난 5월 군 수사당국이 경기도 육군 모 부대 내에서 일부 병사가 휴대폰을 이용해 스포츠도박을 한다는 제보를 입수해 5명의 병사를 적발했다. 이 중 최근 전역한 A병장은 입대 후 960차례에 걸쳐 무려 1억8000만원 액수의 도박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얼마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도박 문제에 대해 상담을 군인 상담자는 2017년 48명에 불과했지만 2018년에 약 3배인 123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2019년에는 5월까지 집계했음에도 117명에 달해 도박자 중 상담을 신청한 이들만 집계한 통계이기 때문에 실제 도박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휴대폰을 이용한 군 내 각종 부정·불법행위 적발은 2350건에 달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사병은 물론 부사관, 장교까지 포함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부대 내에서 병사들의 일과 후 휴대폰 사용을 허용해준 뒤 사병들의 휴대폰 도박이 급증한 영향이 가장 클 것이라는 분석이다. 핸드폰 사용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록 인생 반려자를 얻기 위해 위수지역 이탈 등의 무리한 위반 행위를 했지만 당시의 지나친 규제는 또다른 위법을 양산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핸드폰의 무분별한 허용 등 이완된 규제는 방종과 무질서를 낳기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최선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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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6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항일 무장투쟁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일찍 사회주의 단체 결성도 주도했고 뒤에는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자유시 참변때 주도권을 쥐려고 러시아로 귀화해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군사 주도권을 위해 따르지 않는 부대들 학살에 가담해서 독립군을 와해시켰다. 또한 사변후 홍범도장군은 재판관으로 참여해서 독립군들을 재판했던 것에 책임을 느끼는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전역군인
    • 전문가 분석
    2019-09-0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9) 낙오된 1개 중대가 인민군 1개 사단을 늪에 빠뜨리다
    ▲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 [사진제공=김희철] 낙오된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 북한군 1개 사단 공격 지연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발발한 6.25남침전쟁시 북한의 인민군은 국군에 비해 2배인 198,380명의 병력과 전차여단 등 3배인 화력/장비의 우세로 기습 남침공격을 했다. 북한은 6.25전쟁 후 ‘조국해방 전쟁사’에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여 ‘3단계 5차 작전기’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1단계는 개전-선 공격, 2단계는 한/만 국경선으로 패퇴, 3단계는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이다. 특히 1단계를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와 같이 5차에 걸친 작전기로 세분화하여 분석하였다. ‘조국해방 전쟁사’에 제시된 북한 인민군의 1단계 ‘선 공격’ 중 ‘제2작전기(6.29~7.6)’가 바로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하여 한국군의 방어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종 승리의 관건인 단계였다. 그런데 피아 혼란한 상황에서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원 소속부대에서 연락 두절로 낙오되었으나 해당 지휘관이 끝까지 부대를 인솔하여 아군 작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다. 비록 원소속부대가 아닌 타부대였지만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의 임기응변(臨機應變)식 ‘임무형지휘’ 결과로 인접 사단의 지휘 및 작전 공백을 해소시켰다. 즉 북한 인민군의 공격 템포를 24시간 끊어버리고 아군 방어 준비시간을 확보하여 한국군 전체 작전에 기여한 것이다. 블확실성의 연속인 전장 상황에서 임무형지휘가 중요 불확실한 전장, 예상과 다른 상황 전개 대처가 변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 인제군 기린면의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는 주력과 멀리 떨어진 방동리에 있어 철수 명령도 못 받아 뒤늦은 6월 27일이 되어야 철수를 시작하여 적중을 탈출했다.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면서도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를 이용 행군을 강행하여 7월 4일 아침에 제천에 도착했다. 다시 철수를 계속하다가 제천 4km남쪽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인 5일, 단양에 도달했을때 중대 병력은 타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중대가 단양까지 왔는데도 아군을 만날 수 없었고 도로와 철로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미 국군 8사단 후발대가 단양을 떠났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들은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8사단, 제천-단양 방어중 작전명령 착오로 전장이탈 한편, 동해 강릉에서 방어하다가 대관령으로 철수한 8사단은 6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던 중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진부-평창을 거쳐 7월2일 제천에 도착했다. 육본 명령은 6사단이 장호원-청부-보은 축선, 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받은 8사단은 6사단 7연대로부터 제천지역을 인수받고 제천 방어와 원주 탈환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7월4일 탈환작전을 위해 원주에 이르는 가리파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8사단 10연대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에 실패해 분산 철수하여 적과 접촉이 단절되었다. 때마침 육본에서 6사단장을 거쳐 전달된 육본 작전명령에는 “충주로 이동하라”고 했다가 다시 전문으로 “8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중요한 요충지인 제천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기하라는 육본 명령이 의심스러웠지만 관계 참모의 확실하다는 확인보고를 받은 뒤에 이동 명령을 하달했다. 7월 5일 새벽 2시, 제천에서 부대원들을 열차에 탑승시켜 대구로 출발시키고 사단장은 짚차로 충주를 거쳐 대전 육본에 도착하여 작전명령 확인 결과, 육본에서는 8사단을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곧바로 대전역으로 이동 철도비상전화로 이동 상황을 확인 결과, 이미 이동부대는 대구, 영천까지 도달하여 사단 참모장에게 되돌아갈 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L-5연락기편으로 대구로 이동, 주력과 합류했다. 바로 이 싯점에 6사단 2연대에서 낙오되어 본대를 찾을 수 없었던 9중대장 정대원 중위(육사8기)는 국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단약역으로 달려가 철도비상전화로 8사단 군수참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용병(用兵)에는 속임수를 써야한다”는 뜻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사례 상급부대와 통신이 단절됐지만 지휘관의 창의적 판단력으로 전투 승리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에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는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가장 우선해서 강조한 병법이다. 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 날 오후 피난민을 만재한 과중한 중량의 열차가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이상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때 낙오된 1개중대가 단양에 남아있다는 상황은 새로운 변수가 됐다. 8사단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선점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하였다. 때마침 북한 인민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천-원주-제천 축선을 따라 남하하던 인민군 7사단은 전투력이 쇠진하여 7월5일 제 12사단으로 개칭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충주로 투입하고 제천지구를 인민군 8사단에 인계하였다. 중앙선 축선으로 남진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민군 8사단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다소 미흡했다. 12사단과 임무교대 하였으나 국군의 방어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인민군 8사단은 편의대를 피난민 사이에 침투시킨 결과 제천 -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급히 일부 병력을 단양으로 진출 시켰다. 그러나 단양에는 낙오된 6사단 9중대의 병력들이 이미 단양철교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증강된 수색 분대가 남한강 북쪽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자, 국군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가 급편 방어하여 북한군 8사단 공격을 24시간 지연시킨 단양철교와 전쟁기념관 조형물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김희철] 인민군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병력이 방어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으로 오판하게 만든 낙오된 9중대는 자신들이 한국군 전체 작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모른 채 남한강을 넘어올 적들을 막아내려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골든타임의 밤을 견디어 냈다. 다음날 9중대는 단양으로 진출한 8사단 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7월 10일 수안보에서 6사단 2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 후 8사단은 인민군 8사단의 지휘소 습격 등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탕진시키며 단양-죽령 지역에서 7월 12일까지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비록 초전부터 낙오된 2연대 9중대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고립된 상황에서 건제를 잃지않고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북한 인민군이 무혈 입성할 뻔 했던 단양을 기만 작전으로 확보함으로써 8사단의 중앙선 축선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는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의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급부대와 지휘 및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해당 지휘관의 자율적, 창의적 판단과 독단적 결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공적인 임무형지휘의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8-31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 [김희철의 위기관리]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유해진, 최민식이 출연한 영화 ‘봉오동 전투’ 450만명 관객 돌파 봉오동서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 이끈 홍범도 장군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 살상하는 대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최근 흥행배우 유해진이 주연한 영화‘봉오동 전투’가 25일 오전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하여 장기 흥행세에 탄력을 더하게 되었다. 개봉 첫날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거침없이 흥행 질주를 달려온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장군(1868~1943)이 지휘하여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를 안겨준 역사적 순간을 담아낸 감동의 드라마이다. 시원한 질주 액션과 믿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 최민식과 박희순 등이 특별출연해 다채로운 연기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에 남녀노소 전 세대 관객들의 끊임없는 호평과 각계각층의 단체 관람 열풍을 이끌며 관객몰이를 이어와 올여름 극장가를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실제 영화에 묘사된 ‘봉오동전투’의 4개월 뒤, 청산리에서 또다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려 청산리·봉오동전투는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맛본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1889~1930)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가 21일 아침에 호구 속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하였고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山田]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군도 차후 작전을 대비하여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도 일본군이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임명받은 홍범도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의 1연대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일본군끼리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그곳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게 알렸다.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출동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다. 또한 10월 24일에는 천보산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서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일본군에게 매복하고 있다가 최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종합해보면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 3,000여 명이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동지대 5,000여 명과 전투를 벌인 최종 결과, 일본군 3,000여 명(일본측 자료 812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그러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협조했거나, 앞으로도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독립군의 씨를 말려 버릴 작정으로 간도에 있는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다음 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19-08-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이성출 대장에게 전수받은 '탁월해지는 비법'
    ▲ GOP 전방부대에서 소대장 근무시절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김희철] 최전방 GOP부대, 효율적인 DMZ작전 위해 주기적으로 임무 교대 소대장 근무 2년이 넘으면서 동기들과 비교 의식 생겨 상급자들, 부하들을 '무능-평범-우수-탁월'의 잣대로 평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전방 적과 마주하는 GP장으로 DMZ작전근무가 끝나가자 소대장 보직도 마무리 되고 있었다. 최전방 GOP사단은 DMZ에서 적과 직접 접촉하는 작전근무를 하는 부대의 조화롭고 효과적인 근무를 위해 주기적으로 임무를 교대한다. 때마침 필자가 소대장을 마칠 무렵 해당 부대도 DMZ를 담당한 GOP연대의 임무를 인계하고 후방 FEBA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GOP임무교대시 현재 DMZ지역에서 GP를 담당하고 있는 소대들은 새롭게 투입되는 연대에 모두 인계되였다. 따라서 중대의 소대장 중 1/3만 함께 이동하게 되었고 나머지 동료들과는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DMZ지역에서 GP장과 작전소대장을 두번씩 하니 시간은 벌써 2년이 다되었고 다음해가 되면 대위 진급 심사에 임하게 되어 내자신의 경력을 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소대장직을 6개월이 지나서부터 끝내기 시작해서 이미 사단 및 연·대대 등 상급부대 참모장교로 차후 미래를 위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어 필자는 동기들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상급부대의 부대 교대명령에 의해 목숨을 위협하는 적과 지뢰지대 및 철조망의 압박감과 불편함에서 벗어나 대성산 서측 수피령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하지만 역시 민간인이 살고있는 마을까지는 한시간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첩첩산중의 심신산골이었다. ‘연대 활성교보재 운용 시범’ 후 상급 및 인접 부대 참모로 보직 이동 “산 넘어 산”이라고 후방지역으로 나오자 마자 교육훈련에 전념해야 한다며 새로 부임한 신임 연대장은 대대에 ‘활성교보재 운용 시범’ 명령을 하였고 대대장은 우수 GP장으로 선발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중대장에게 시범 명령을 재하달하였다. 역시 중대장은 필자에게 운용시범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활성교보재’라는 것은 공포탄, 훈련용 수류탄/크레모아/지뢰 같이 생긴 것은 실물과 같으나 교육을 위해 작동시에는 폭음과 소규모 연막만 피어나고 실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활성교보재는 교육훈련시에 흥미를 유발시키고 숙달에 용이한 효과적인 교육용 보조재이다. 짧은 시범준비 시간이었지만 연대와 사단, 인접 부대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고 DMZ를 누볐던 소대원들에게 창의적으로 시나리오를 써주며 연습을 시켰다. 결국 중대장과 대대교육장교의 적극적인 감독과 지원도 받은 덕택에 연대장을 모시고 시범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마쳤다. 시범이 끝나자 연대 군수과와 사단 수색대대 그리고 GOP에서 GP작전을 통제했던 대대에서 참모로 오라고 통보가 왔다. 필자 소속 대대에는 중위 참모 자리에 다른 장교들이 이미 보직되어 공석이 없었다. 이성출 예비역 대장의 '4성론'은 직장인의 꿈을 이뤄줄 방법론 직장인들의 가장 큰 꿈과 희망은 ‘승진’이다. 혹자들이 감성적 철학적 표현으로 가치적 도덕적인 근무 자세를 강조했지만 궁극적으로 ‘승진’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상급자들은 부하들을 크게 4종류로 분류한다. '무능-평범-우수-탁월'이다. “성실하다, 착하다, 신뢰할 수 있다” 등은 앞서 4종류 분류 어디에도 적용될 수 있다. 때로는 무능하더라도 신뢰할 부하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무능하지만 성실한 사람이 발탁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4종류 중 탁월해야 승진하는데 유리하다. 군인을 포함한 많은 직장인들이 상급자로부터 탁월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본인도 논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탁월해지는 비법을 훗날 군단 작전참모 시절 이성출 군단장(육사30기, 예비역 육군대장)으로부터 정확하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 소대장 근무시절 자화상과 소대 전술훈련 모습 그림 [사진제공=김희철] 어려운 취준생 시절을 겪고 취업을 하더라도 상급자로부터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장수하면서 승진도 하려면 바로 다음의 4성(性)을 체질화하는 것이 필수이다. 첫째, 전문성(專門性)으로 무장하라. 전문성은 업무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 과거의 관행, 관례보다는 자기 업무에 관련된 법과 시행령, 예규, 방침, 지침 등을 먼저 숙지하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 또한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법규를 통해 확인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적시성(適時性)을 놓치지 마라. 완벽한 보고와 철저한 준비도 중요하지만 적시성을 놓치는 순간 모든 준비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훌륭한 아이디어와 보고서는 필요한 시기를 놓치면 허망한 생각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완벽한 형식과 예의 보다는 적시적인 미완의 간단한 메모 등이 오히려 효과적이고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창의성(創意性)으로 차별화하라. 전문성과 적시성을 갖춘 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로 평가한다. 그러나 창의성이 가미된 업무는 탁월하다는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나아가 꿈을 이루는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해낼 수 있다. 창의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벤치마킹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의 장점을 잘 벤치마킹하여 자기화 한다면 본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성과와 평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넷째, 현장성(現場性)으로 증명하라. 아무리 전문성, 적시성, 창의성을 갖추었어도 실제 현장에 부합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이 된다. 따라서 실제 상황에 꾸준히 적용․ 시행할 수 있는 업무를 위해서는 현장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4성(性)의 체질화는 승진이나 성공의 비결이다. 또한 성공은 목표 달성을 위해 한 가지씩 성취해가는 노력의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즐기는 삶이 되어야 행복과 보람을 얻을 수 있다. 필자가 장교로 첫 배치받은 GOP최첨단 소대장 근무의 유종지미(有終之美)를 통해 깨달은 것은 이미 4성을 본인도 모르게 실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삶의 평범한 비법인 4性을 심신(心身)에 형틀화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내 몸속 형틀에 집어넣어 표출되는 말과 보고서 등 모든 업무를 처리하였다. 아니, 소대장 이후 40년 가까운 군생활을 마친 현재에도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20, 30대 젊은이들도 4性을 자기 체질화 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승진하여 상위 계급으로 진출하거나 해당 조직의 리더로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도 행복과 보람을 함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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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8-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 DMZ작전소대의 마지막 임무는 아찔한 지뢰제거 작전
    ▲ DMZ내 지뢰지대 표식과 2018년 10월 비무장지대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제거 작전 중인 국군장병 모습 [사진출처=연합뉴스] “시근종태 인지상정 종근여시(始勤終怠 人之常情 終勤如始)”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숙명! DMZ근무 끝내고 후방철수 직전에 '새 임무' 부여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선 성종때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무렵인 권신 한명회에게 그의 사위인 성종이 신하를 보내 “내가 앞으로 왕을 하는데 무엇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한명회는 “시근종태 인지상정 종근여시(始勤終怠 人之常情 終勤如始)”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고 끝에 태만해지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니 마지막까지 부지런하기를 시작처럼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하늘이 마지막까지 태만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DMZ작전 근무를 끝내고 후방으로 철수하기 얼마전에 소대에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DMZ내 고지 정상에 위치한 GP의 울타리 철책은 고지 경사로 인해 울타리 철책 밖의 흙이 깍여 흘러내려 울타리 철책 내부 순찰로 하단이 자주 침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타리 철책 밖의 지뢰지대에서 철책하단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울타리와 근접한 지뢰지대의 지뢰는 제거해야 했다. 결국 DMZ작전소대 근무를 마치고 후방으로 철수하기 전에 필자가 담당했던 GP 울타리 철책주변에 근접한 지뢰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소대원들과 GP로 다시 투입하게 되었다. GP울타리 철책에서 수류탄 투척이 가능한 거리까지는 불모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고지라 매우 급경사였다. 그곳에는 M16대인지뢰와 M14폭풍지뢰가 매설되어 있는데 울타리 철책 근접에는 지뢰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실로 연결하여 M14폭풍지뢰로 매설되어 있었다. ▲ GP 및 GOP 철책 순찰 모습 [사진출처=국방홍보원] GP 담당소대는 주야간 등 기본 임무에만 전념하고 필자가 지휘한 작전소대가 아침에 GP로 들어가 일몰전까지 지뢰제거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됐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임무이다. GP 및 GOP불모지대에는 일부 M16지뢰의 삼각뿔이 지표면 위로 튀어 올라와 있어 “죽음의 사자들이 어서 오라”고 부르는 듯 했다. 지뢰제거 임무를 설명받은 소대원들, 손톱을 잘라 유서 봉투에 담아 지뢰제거 임무를 설명들은 소대원들은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유서와 함께 편지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소대원들에게 세부적인 작업 계획을 제시하고 토의했다. 울타리 철책으로부터 불모지대 끝까지는 전체가 지뢰지대임으로 작업 구간을 울타리로부터 1m로 제한했다. 결국 선두만이 모든 위험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지뢰 매설한 지도 오래됐기 때문에 겉에 것을 탐지해 캐내더라도 그 밑에 또 지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무 깔판을 준비했다. 먼저 선두가 최초 탐지하여 제거하면 바로 뒷조가 나무 깔판을 전달하고, 다시 선두는 그 나무깔판을 딛고 다음 지역을 탐지 제거하며, 제거된 지뢰는 즉시 뇌관을 제거하고 후미에 전달하면 마지막 조는 뇌관과 지뢰몸통을 분리하여 보관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그때 분대장이 자신이 선봉에 서서 탐지를 하고 지뢰를 수거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필자는 가장 위험한 선두를 부하에게 맡길 수 없었다. 지뢰제거 첫날, 식은 땀을 흘리며 M14폭풍지뢰 제거 지뢰제거 작전 첫날, 소대원들과 DMZ통문에 도착하여 현장 지도하겠다는 중대장과 함께 GP로 들어 갔다. 항상 모든 일은 첫발이 중요하다. 필자가 먼저 지뢰탐지기를 들고 울타리 철책으로 접근했다.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고 탐지기만을 믿을 수 없었다. M14폭풍지뢰는 플라스틱으로 지뢰탐지기로는 탐지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지 지역을 다시 대검으로 찔러보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필자의 바로 뒤에 있는 분대장에게서 나무깔판을 받아 탐지한 지역에 깔고 다시 대검을 45도 각도로 찌르자 무언가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전달되어 왔다. 야전삽으로 살살 흙을 퍼내자 파란 플라스틱이 보였다. 손으로 흙을 걷어내고 M14폭풍지뢰를 꺼냈다. 뇌관을 제거하고 안전핀을 재결합한 뒤에 뇌관과 몸통을 분리해서 뒷조에게 전달했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첫날 작전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하자 대대 통신대장 안철주중위(육사동기)와 인접 GP장(학군동기)에게서도 안전을 기원하는 전화가 왔다. 격려 전화를 받으면서 나의 버켓리스트(The Bucket List)가 떠올랐다. 죽기전에 개인전 한번은 할 수 있을까? 일주일 동안 105발의 지뢰를 캐내고 임무 완수 첫날 12발을 캤다. 둘째날은 7발을….. 지뢰를 캐어낼 때마다 섬짖하게 스쳐가는 사자(死者)의 휘파람 소리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고 생사(生死)의 기로(岐路)를 넘기면서 105발의 지뢰를 캐내어 GP관리에 안전을 확보하면서 임무는 완료되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군인!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명령하는 상급자, 위험 속에 빠져들면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하급자, 이 모두가 군인다운 군인이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8-1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8)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형제의 상’
    ▲ 북한 미사일 발사장면과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형제의 상’조형물로 6.25 남침전쟁때 국군장교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 병사인 아우가 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포옹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김희철] 6.25전쟁 아직도 끝나지 않아, 북한은 6일 새벽 미사일 2발 또 발사 6.25 전쟁때 국군장교 형과 인민군 병사 아우가 죽령 전투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앞으로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 준수해 평화 정착 희망 '형제의 상'처럼 남북이 서로를 안아주며 사이좋게 지내기를 기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북한이 6일 새벽, 황해도 과일에서 내륙을 가로질러 동해상 450km거리로 미상의 발사체를 2발 또 발사했다. 이번 발사는 그동안 북한이 거세게 비난해온 이 한·미 연합연습이 시작되자 호된 비난방송과 함께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발사는 지난달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를 쏜 이후 13일 동안 4번째다. 군 당국은 “이들 발사체를 새로운 종류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고 있고 북한이 한·미 연합연습 기간에 추가 발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대북 감시태세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문 대통령이 평양 가서 합의했던 ‘9.19 군사합의서’의 맨 앞부분 1조에 나와 있는 “해상, 지상, 공중에서 어떤 행위의 일체 상대방에 대한 적대 행위를 전면 중단한다”는 것을 심각하게 위반한 사항이다. 게다가 지금 북한이 최근에 ‘SLBM발사가 가능한 신형 잠수함건조’도 공개했다. 이것들은 누가 봐도 남쪽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의 북핵 협상에서 시간을 벌고 어떤 압박 전술로 쓰기 위해서 남쪽을 괜한 핑갯거리로 끄집어내는 우회 전술이다. 통일부는 6일 "최근 북한의 연이은 군사 행동은 내부 결속 및 향후 정세 국면에서 주도권 및 협상력 제고 차원"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금일(6일) 오전 7시30분 국가안보실장,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개최하여 북한의 연이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하고,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전반적인 군사안보 상황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관계장관들은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앞으로 한미 간 긴밀한 공조 하에 관련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철저한 감시 및 대비 태세를 유지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나마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북한 미사일도발 규탄 결의안’을 본회에 상정하기로 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치 형이 동생을 돌보듯, 북한 도발에 대한 비난과 앞으로의 재도발 방지보다는 김정은 위원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정부 발표에서 읽을 수 있었다. 서울 삼각지 전쟁기념관에 가면 ‘형제의 상’이라는 동상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국군과 인민군 군복을 각각 입은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이 형제의 상이 담고 있는 사연과 유사한 내용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진태, 진석 형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조형물의 형제는 실제로 6.25 남침전쟁 당시 서로에게 총을 겨누다 마주치게 된다. 이 실화의 주인공은 당시 국군소위였던 형 박규철과 북한군 하전사인 동생 박용철 형제이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이 고향인 박규철 소위는 해주공업학교 광산과 3학년 여름방학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남북분단 직후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부모님과 여동생을 동생 박용철씨에게 당부하고 홀로 월남한 후, 보병 16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리고 16연대가 8사단으로 편입된 후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에 참가,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일등상사의 신분으로 의정부 지역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소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소대장 대리가 되어 경북 영천 지구방어전에서 공을 세우는 등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결과 현지에서 소위로 진급, 임관했다. 한편 박규철 소위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북한군으로 징병된 동생 박용철씨는 북한군 제8사단 83연대 하전사(이등병 격)로 배치되었다. 동생이 소속된 북한군 8사단은 기이하게도 국군 8사단과 6.25 남침전쟁 초기 1개월하고 4일 동안을 제천-단양-죽령-영천을 연하는 축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직전인 9월초, 북한군 8사단은 영천지구 전투에서부터 패주, 북상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패주하는 북한군 8사단에 대한 추격을 맡은 부대가 기이하게도 또 형인 박 소위가 근무하는 국군 8사단 16연대였다. 따라서 이들 형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대편에 형과 동생이 있는 줄을 모른 채 총을 쏘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추격중에 안동전투에서 바로 형이 공격을 맡은 그 진지에 동생이 있어 서로 총을 쏘기까지 했지만 양쪽 모두 무사한 채로 북한군이 퇴각했다. 국군8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마지막으로 크게 격돌한 것은 단양군 죽령 전투에서 였다. 북한군은 죽령의 험한 산세를 이용, 국군의 반격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형제간의 살육전을 피하기 힘든 격전의 시간이 본인들은 모른 채 다가온 것이었다. 바로 이 같은 와중에서 형인 박 소위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만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불효자식놈’이라고 호통을 쳤고 그는 엉엉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맹렬한 추격 공격중에 박소위는 5-6m전방에서 도망치던 적병이 재빠르게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 적병을 반드시 생포하겠다고 마음먹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절대 죽이지 않을테니까 도망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만일 내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다간 너희 독전대에게 사살당한다” 그 때 홀끔 돌아보는 상대방의 얼굴을 본 박 소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어젯밤 꿈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너 용철이 아냐. 야 임마! 나야 니 형이야”하고 그는 북한군 독전대가 퍼붓는 총탄속을 뚫고 달려가 동생을 안고 내리 굴렀다.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셨구나”하자 동생은 “형 나도 여기서 이렇게 총을 맞대고 싸우다가 형을 만나리라 곤 정말 생각도 못했어”하고 눈물을 쏟으며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형제의 상’ 조형물의 모습) 영문도 모르고 바라보던 소대원들은 그제서야 일제히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동생은 이후 박 소위의 소속 지휘관의 배려로 국군으로 현지 입대하여 박 소위의 소대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은 필자가 8사단 16연대장 재임시 ‘연대 전투사’를 제작하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 번개부대 (8사단 16연대) 전투사 [사진제공=김희철]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서로를 알아본 형제의 모습은 바로 6.25 남침전쟁에서 우리 겨레의 모습이었다. 앞으로는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를 진심으로 잘 준수하여 평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이번 사연과 같이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6.25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남북이 총 대신 서로를 안아주고 진정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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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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