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시대Home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
[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
[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
[김희철의 전쟁사(79)]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용을 그린 다음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린다는 뜻으로 가장 요긴한 부분을 마치어 일을 끝냄을 이르는 의미이다. 6·25남침전쟁시 낙동강에서 교착 상태를 맞게 되자 유엔군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새벽,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그리고 26일 밤 12시에 낙동강에서 북진한 미 1기병사단의 선발부대인 777린치 특임부대와 오산에서 연결에 성공함으로써 크로마이트 작전을 완결 시켰다. ■ 777린치 특임부대는 하루 동안 160km이상의 초고속으로 진격해 연결에 성공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인천에 상륙한 국군 2해병대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을 만들었다. 때를 맞춰 낙동강 전선의 미 8군도 9월16일 09시를 기해 총반격을 개시했다. 위의 상황도처럼 미 1군단은 대구-김천-대전-수원의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미 10군단과 연결함으로써 북한군을 양분시켜 차단 고립시키고, 미 9군단은 호남 일대를, 국군 1, 2군단은 중동부 및 동부 축선을 담당하여 적을 분쇄하는 반격작전을 시작했다. 특히 중앙의 1기병사단은 총반격 작전의 주공부대였다. 선봉은 7기병연대 1,3대대를 주축으로 이룬 777린치 특임부대가 맡았다. 한편 인천으로 후속 상륙한 미 7사단 32연대가 해병의 우측방을 방호하며 연결 작전을 위해 안양으로 진출했다. 21일 밤 32연대는 야간전투를 불사하고 작전지도를 나온 작전참모까지 전사하는 격전을 치룬 끝에 수원 비행장을 탈취하는 수훈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수원비행장은 유엔군의 전진 기지뿐만 아니라 초과된 인천의 보급 수요를 대체할 보급기지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망치와 모루’의 작전개념에 의한 모루의 역할 분담이었다. 결정적 타격을 가할 망치의 역할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로 전환한 미 8군 사령부의 몫이었다. 모루의 역할을 맡은 미 10군단은 단지 2개 사단에 불과했다. 수원 일대에서 미 8군과 연결하고 서울을 탈취하는 것으로 작전을 제한하고 원주 방향으로 진출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최초의 시도도 위험 부담 때문에 자제했다. 망치역할의 미 1기병사단 최선두 777린치 특임부대(3대대)는 9월22일 08시 다부동 서쪽에서 출발하여 낙동리-상주-보은-청주-천안-오산으로 고속 돌파했다. 드디어 26일 하루 동안에 보은으로부터 무려 160km이상을 초고속으로 진격한 당일 22시26분경 미 7사단 31연대와 오산 북방 6km 지점에서 합류 및 연결에 성공하여 크로마이트 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되었다.(일설엔 32연대와 연결했다는 기록도 있음) 28일에는 31연대가 오산 부근의 92와 117고지에서 북한군 방어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즈음 미 1기병사단의 주력도 오산에 도달해 있었으나 31연대장은 미 1기병사단과 협공을 거부하며 독단 전투를 수행하다가 전진 속도를 지연시켰다. 이에 알몬드 군단장은 10월5일 31연대장을 전격 경질했다. 그만큼 협공과 작전 속도를 중시했다.(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79)] 인천상륙작전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연결작전 (상)
-
-
[김희철의 전쟁사((78)]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시점에서 퇴로를 차단당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은 산악지대의 소로를 통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때 패잔병이 되어 38선을 넘어간 북한군 병력은 10여만명 중 2~3만명으로 추정됐다. 국군과 UN군은 이들을 추격하며 다음 단계인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훗날 박정모 소위는 금곡전투, 원산상륙작전,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을지무공훈장 등을 수여 받았고 해병 대령으로 전역한 뒤 2010년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양병수 이등병도 미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2014년 ‘9월의 현충인물’에 6·25남침전쟁간 서울 탈환작전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영웅 박정모 대령이 선정되어 그 소중한 정신과 실천을 가슴 깊이 기리고 있다. 최근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장군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 무릎수술에도 불구하고 군생활을 한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다”라는 구두 논평을 냈다가 논란이 커지자 유감을 표명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박 의원 주장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안중근 장군의 말을 제대로 실천한 진짜 군인은 추장관의 아들 서일병이 아니라 6·25남침전쟁시 태극기를 게양한 박정모 해병소위, 연희고지 전투의 고길훈 해병소령, 영등포 전투의 탱크킬러 모네건 일병, 백선엽 장군 등과 같은 전쟁영웅들임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78)]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⑦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1)]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에 입교했을 때 사관학교 동기생들 뿐만 아니라 타출신 장교들의 눈빛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규과정에 선발된 우수한 장교들답게 모두들 필자보다 똑똑하고 탁월해 보였다. 학급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소양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소양시험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소양시험 성적표를 받았는데 실망이었다. 육군대학 정규과정에 입교한 기쁨보다 소양시험 성적에 실망한 필자는 끝없는 '경쟁사회'에 대한 비애와 회의감까지 들기도 하였다. 이어 계속된 일반학과 참모학 과정에서도 사단작전장교로 경험한 야전실무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준비하고 발표하며 시험을 치루었지만 결과는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공부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어린 시절에 시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상류쪽에 흙을 쌓아 물을 막고 하류 쪽마저 막은 후에 물을 모두 퍼내면 물이 빠진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을 참고하여 실천하기로 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1)]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③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0)]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경찰의 경우에는 최초 순경으로 임용된 후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경장에서 경감까지 일부 인원을 시험으로 진급시킨다. 직업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육군소위로 임관하면 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OBC), 대위로 진급하면 고등군사반(OAC), 영관장교가 되면 각군 대학에서 보수 교육을 받고 그 수료 성적이 차후 진급심사에서 결정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병학교나 육군대학에 입교한 학생장교들은 대입시험시 ‘4당 5락’이라는 유행어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별 보기식 학습을 했다. 우등생으로 수료하면 제일 좋지만 졸업 성적이 최소 1/3수준인 ‘상층’에 포함되어야 차후 진급 심사시에 피해없이 선발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된다.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첫 소양평가를 치루고 기본적인 참모 및 지휘학을 배우면 다음 과정으로 전환될 때 다시 시험을 봤다. 전술과목에 들어서면 전술담임교관의 지도아래 공격 및 방어 전술을 배우고 마지막으로 전략 과목과 종합시험까지 치루었다. 육대 정규과정의 1년 간 교육기간 중에 거의 매달에 한번씩 시험에 응해야 했고 강의 도중에 요약 및 중간 평가도 있었으며, 교육에 임하는 학생장교들의 자세까지 교관들이 평가하여 점수화 하기 때문에 발표시간이 되면 사전에 준비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여 교관의 눈에 띄도록 노력도 했다. 이러한 실상을 돌이켜 볼때, 30~40세의 나이가 된 학생장교들은 시험・평가가 직업인들에게 뗄래야 뗄 수 없이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임을 절감했다. 또한 서글픈 경쟁사회의 단면을 느끼게도 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0)]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②
-
-
[김희철의 전쟁사(77)]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서울 서측방에서 미 5해병연대가 고전하자 뒤늦게 합류한 미 7해병연대를 미 5해병연대 좌측방에 배치하였다. 25일에는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를 서빙고 쪽으로 도하시켜 서울 북서쪽과 남동쪽에서 포위하는 형태를 갖추고 일거에 서울 시내 돌입작전을 전개했다. 서울 탈환작전은 주공인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로 연희 고지와 와우산을 점령했고 일부부대는 서울시내로 진입한 상태였다. 북쪽은 미 7해병연대와 국군 5해병대대가, 남쪽은 미1해병연대와 국군 2해병대대가 배치된 반원 모양의 궁형(弓形)태세를 형성하였다. ■ 북한군 점령 89일 만에 박정모 해병소위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게 하다 9월25일 밤, 서빙고 쪽으로 도하했던 미 7사단 32연대와 국군 17연대가 남산을 점령하였을 때 서울 탈환의 막바지 전투가 개시됐다. 주요 공격목표는 중앙청과 서울시청을 연결하는 선이었다. 중앙에 위치한 주공 미 5해병연대와 국군 1해병대대는 며칠동안 서울 연희 고지 전투 등 격렬한 전투로 병력 손실도 많고, 인원도 부족해서 서대문 방면과 마포 일대에서 공세를 취했으나 북한군의 최후 발악적인 저항으로 이를 격파하는 동안 전진이 불가해 26일 새벽까지 고착되었다. 다만 서울 남쪽을 담당한 국군 2해병대대가 국부적인 적의 저항을 물리치고 원효로와 삼각지 일대를 확보했을 뿐이었다. 26일 서울 진입 전투는 철수를 위해 시간을 얻기 위한 북한군의 지연 전술을 분쇄하는 것으로 ‘바리게이트 전투’로도 불린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서울 시민을 동원해 주요 도로 요충지에 200~300m 간격으로 전진을 방해하는 바리게이트 장애물을 설치했고 북한군 병사들은 빌딩의 지붕이나 창문마다 득실거렸다. 그들은 전진하는 유엔군 부대원들을 저격하거나 휘발유로 만든 사제 폭탄을 던졌다. 바리게이트 장애물 극복은 매우 느리고 위험했지만 보병들이 바리게이트 주변의 저격수나 기관총수들을 사살하거나 패주시키면, 공병들이 뛰어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후에 전차가 바리게이트를 깔아 뭉개면서 진격로를 열었다. 바리게이트 한 개를 돌파하는데 약 1시간 정도 걸려 속도가 매우 느렸다. 다음날 조선호텔까지 진출해 대대본부를 배치시킨 미 1해병연대에 소속된 국군 2해병대대장 김종기 소령은 중소대장들에게 작전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박성환 종군 기자가 “중앙청은 미 5해병연대의 목표이나, 우리 동포의 손으로 태극기를 올려야한다고 이승만대통령께서 말씀하셨고, 상금 3000만원이 걸려있다”는 것을 귀띔해줬다. 이 말을 들은 6중대 1소대장 박정모 소위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상금이 아니라, 태극기를 꽂을 사람은 결국 나 밖에 없다는 집념이었다.” 박소위는 곧바로 대대장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고 중앙청 돌진 허가를 상신했다. 허락을 받은 박소위는 9월 27일 새벽 3시경 대형 태극기를 몸에 감고 소대를 진두지휘하며 중앙청 장소로 접근했다. 세종로 일대에서 북한군이 구축한 마대 진지로부터 간헐적으로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수류탄 공격으로 수개의 진지를 격파하고 2시간 만에 연기가 자욱한 중앙청에 도착했다. 우선 청내의 잔적을 제압한 후에, 2개 분대를 중앙동 입구에 배치하고 1개 분대로 근접에서 방호하도록 운용하며 2미터 길이의 깃봉을 든 최국방 견습수병과 양병수 이등병을 대동하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철제 사다리는 폭격고로 절단되었고 끊어진 와이어 로프 일부를 사용해 꼭대기로 기어오르다 떨어져 부상을 당할 뻔 했다. 천신만고 끝에 동창문까지 접근한 다음 태극기를 봉에 달아 창밖으로 비스듬히 내걸고 고정시켰다. 이때가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지 꼭 89일 만에 다시 중앙청에 태극기가 새벽의 포연 속에서 휘날리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유엔군의 서울 공격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9사단과 18사단 등 2만여명 병력을 추가 동원해 서울을 끝까지 방어하려 했다. 그들은 서울 시가지 교차로 마다 장애물을 설치해 시가지 전투를 전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연희 고지와 안산을 고수해 아군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용감한 한미 해병대에 의해 무산됐고, 이어서 9월28일 유엔군들은 북한군을 서울 시내에서 쓸어내 듯 소탕하며 의정부 방면으로 공격을 계속했고 서울은 완전히 수복됐다. 3개월 동안 적의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찾은 자유는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기회에 분단된 조국이 통일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77)]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⑥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9)]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2021년 3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KOSIS,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전체 실업자가 121만 5000명이고 그중 청년은 42만 6000명에 이르고 있다. 청년실업율은 실업율은 10%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최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6년을 학교에서 각종 시험들과 씨름하며 희비가 엇갈린다. 좋은 성적을 올려 각자가 원하는 대학을 들어갈 때는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지만 졸업을 앞두고는 또다시 취업시험에 고민이 앞선다. 121만 5000명의 실업자 중에 많은 취준생들이 법관, 경찰, 군인 등의 공무원이 되기 위해 강남과 노량진 등지에 즐비한 일명 고시학원들을 다니고 낡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기숙하면서 청춘을 다 모두 소모하며 당락에 목숨을 건다. 허나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시험에 합격하며 취업하여 실업자 신세를 탈출하더라도 또 취업한 직장에서 진급시험, 보수교육 평가 등을 치루어야 한다. 또한 퇴직후에는 공인중계사, 복지사 등 각종 자격시험에 응시하는 경우도 있어 직업인들은 시험·평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임과 동시에 밀착 관계이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9)] 시험・평가는 평생을 함께하는 고질병 같은 존재 ①
-
-
[김희철의 전쟁사(76)]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기념관은 해병대 창설에 참여하고 6·25남침전쟁 때 공을 세운 고길훈 해병 소장을 '7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고 2020년 7월2일에 밝혔다. 함남 영흥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도쿄 메이지대 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후 귀국해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했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참여해 초기 해병대의 체제 정립에 기여했다. 1950년 북한군이 호남지역까지 남하하자 해군본부는 제주도에서 대기하던 해병 300여 명을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호남지역 사수를 명령했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지역에 상륙해 사흘 동안 군산 일대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이 과정에서 군산항에 적재된 정부 재산을 지켜냈다. 이후 고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1해병대대장으로 참여해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병학교장과 1해병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한 고장군은 휴전 후에는 해병1여단장과 1상륙사단장 등을 맡았다. 1963년 12월 해병 소장으로 예편했고, 1981년 2월 61세로 별세해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52년과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이 연희고지 전투는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도 감행하는 불굴의 해병대 정신을 알려주는 전례로 널리 알려졌다. 이에 해병대는 이 104(연희)고지에 전적비를 세우고 매년 9월 서울 수복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76)]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⑤
-
-
[김희철의 전쟁사(75)]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엔군은 부천과 영등포 등에서 전차를 동원한 북한군의 저항은 있었지만 모두 격파하고, 9월19일부터 행주나루, 마포나루, 동작나루 등 3개소에서 한강 도하를 시작했고 인천에 상륙한지 9일째인 24일 마포나루로 도강한 미 1해병연대 등으로 서울 탈환 작전에 돌입했다. 한편 김일성은 서울방어를 위해 철원에서 편성 중이던 북한군 25여단과 김천의 9사단 87연대 등 정예부대 2만 여명을 전환 배치했다. 이에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미 10군단장은 9월25일 즉 전쟁 발발 3개월을 맞춘 서울 탈환을 ‘목표’로 시행한 언론플레이와 군사작전의 달성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 1해병사단 및 국군 해병대는 작전기간 단축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 대대원의 90%가 넘는 희생을 감수하며 감행한 연희고지전투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후 한미 해병대는 부천, 영등포, 안양, 수원을 차례로 점령하고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연희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연희고지가 북한군의 최후의 요새였다. 그렇기에 이를 점령하는 것이 서울 수복의 최대 관건이었다. 연희고지는 서대문구에 있는 산으로 104고지 · 연희산 · 염산이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9월21일 미 5 해병연대에서 하달된 공격 명령으로 시작되어 23일에 끝났다. 행주나루로 도하에 성공한 후 수색지역을 무혈 점령하고 연희고지 앞까지 도달한 첫날 미 5해병연대장 머리 중령은 동쪽 끝에 위치한 105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미 3해병대대는 좌측에서, 미 1해병대대는 우측에서, 국군 1해병대대장 고길훈 해병소령에게는 중앙에서 근접한 연희능선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국군 1해병대대는 104(연희)고지의 양쪽으로 1중대와 2중대가 공격했고 이들이 개활지에 도달하자 바로 적의 기습사격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22일에는 박격포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 600명의 역습도 있었으나 격멸했고, 적들의 완강한 저항을 타개하기 위해 포병 및 항공기의 지원을 받으며 전차부대와 함께 104고지 근처의 철로를 따라 전진했다. 하지만 적의 집중포화로 막혔고 결국 이날 전사자 11명과 부상자 45명을 냈다. 이때 적의 병력은 약40%의 손실을 입었다. 한편 104고지 오른쪽에 있는 터널 속에서 피아 정찰대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미 우리 해병은 북한군 병사들이 삭발하고 있다는 알고 있었던 까닭에 해병들은 상대의 머리를 만져보고 적임을 확인하여 이들을 모조리 포로로 생포하기도 했다. 그 다음날인 23일 국군 1해병대대는 공격력을 증대하기 위해 3개 중대를 병진으로 적의 진영을 정면 돌파하는 공격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적의 거센 저항에 신양수 소위, 김한수 중위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1해병연대장 신현주 대령은 약 62명의 병력을 1대대에 추가로 증원했다. 이러한 전투들이 계속 되던 중 일부 소대가 개천을 넘어 약진하여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그동안 상급부대의 작전기간을 단축하라는 독촉때문에 무모한 정면돌파 위주의 공격으로 각 중대 모두 전술적 소대 운영은 사실상 어려웠다. 특히 이날은 대대와 각 중대가 모두 전혀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처럼 다가온 성공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이틀째의 공격에서도 국군 1해병대대는 전사 32명, 전상 68명, 실종 1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으며 22일과 23일 양일간의 계속된 전투에서 거의 모든 분대장들을 잃었다. 최후의 전투가 종료되고 1해병대대의 남은 병력은 26명에 불과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국군 1해병대대가 희생을 무릅쓴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며 104(연희)고지를 점령했고, 미 3해병대대는 안산까지 진출했으며 미 1해병대대가 와우산을 점령을 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결국 예비인 미 2해병대대까지 투입한 한미 해병대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9.28 서울 수복이 가능했으며 기적같은 인천 상륙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
[김희철의 전쟁사(75)] 서울 탈환작전 영웅들의 활약상 ④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8)]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육군대학 전술학 교육시간에 모든 토의의 중심이 되었던 윤용남 장군이 저술한 ‘기동전’과 더불어 미 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한 개념들이 모든 공격 및 방어전술의 핵심이었다 3명의 전술담임교관이 책임지고 교육시키는 각반은 다시 4개의 분임조로 구분하여 토의를 진행했다. 각 분임조에는 중・소령급 전술교관의 개별 지도아래 좌상단의 사진과 같이 조원들은 정보, 작전, 인사, 군수, 공병, 통신 등 참모직을 분담해서 맡았고 조장은 사단장 역할을 했다. 부여된 작전지역에 대한 조별 작전계획이 완료되면 각 분임조의 작전참모 또는 사단장이 전술담임교관에게 발표를 했고 4개조에서 가장 우수하게 수립한 작전계획은 다시 3개반 전체가 모인 가운데 발표를 하고 신랄한 토의를 했다. 육군대학 3대 전술학파의 혈전이 전개된 것이다. 이때 필자는 사단작전 장교의 경험이 있어 분임조 작전참모를 맡아 토의를 거쳐 반 토의시에 발표를 했으나 타 분임조가 보다 잘 준비하여 전체 3대 전술학파의 혈전시에는 타 분임조가 2반 대표로 발표를 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 중에 평정, 지휘추천, 시험 등을 종합한 성적순으로 정규, 단기,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입교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정규 45기과정’으로 입교한 동료들은 세련되며 매너도 좋아 도무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우수한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전체 3대 전술학파의 혈전시에는 동료들의 매너 등 인간미 뿐만 아니라 언제 이렇게 뛰어난 기동, 화력, 장애물 운용 및 기만작전에 대한 전술지식을 습득했는지 놀랄 정도였다. 기갑부대 운용에 정통한 1반이나 화력운용에 탁월한 3반 등 각반의 발표자들은 참관한 학생장교 중의 숨은 진주들의 예리한 질문에 당황했고 또 능숙하게 답변을 하여 임석한 교관들 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혈전 토의가 진행됐다. 심지어는 퇴근 시간을 지나 저녁을 거르고 하늘에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 다가온 것도 잊은 채, ‘기동전’과 미 육군의 ‘공지전투(Airland Battle)’ 교리를 적용한 전술학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지속되었다.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8)]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⑥
-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7)]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용남 장군(육사19기, 전 합참의장 및 육군참모총장)이 준장시절인 1987년에 저술한 "기동전 : 어떻게 싸울 것인가"란 책은 한반도 전장환경을 고려하여 기술한 최초의 군사서적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미 육군의 공지전투 교리에 입각한 논문을 한국육군 장교들이 다수 발표했었다. 서적 ‘기동전’은 윤 장군이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을 거치면서 육군의 모든 장교가 필독했다. 더욱이 합참의장이 되면서 한국군의 미래 군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상기 책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육군의 군 구조와 교리를 대폭 수정하면서 육군 장교들의 의식구조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윤용남 장군에 대한 육군 장교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혹자는 윤 장군의 ‘도로견부위주 종심방어작전’에 입각하여 사계가 좋은 장소에 위치해 있던 진지를 2부 능선 이하로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육군 교리를 대거 바꾸는 등 육군을 일대 변모시킨 반면, 윤 장군이 군을 떠난 즉시 이들 대부분이 원위치 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한국육군을 대거 후퇴시켰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그러나 군사문제에 관해 연구하며 전문성이 있는 육군 장교들은 공통적으로 윤 장군이 한국 육군에 대단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육군 장교의 경우 당시까지 만해도 교육받은 사람들은 혜택 받았다고 취급하며 진급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던 반면, 윤 장군을 기점으로 교육이 잠재역량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미군 교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한반도 전장환경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연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군 장군 가운데 윤용남 장군처럼 전쟁의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장군은 많지 않았다. 당시 한국육군 장교들에게 창의적으로 전쟁의 문제를 연구했던 ‘기동전’이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이 책자는 지상군 중심 사고에 입각한 단일 서적에 불과한데, 공지전투 또는 입체고속기동전 교리에만 입각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4세대 전쟁과 비대칭전력 등 신개념을 고려하지 않고 국방개혁을 추진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다음편 계속)
-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7)] 육군대학에서는 3대 전술담임교관 학파의 치열한 혈전 전개 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