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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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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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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인구절벽 시대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근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혼외자를 출산한 것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있다. 통계청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출생아 43만7000명의 전반 수준인 약 23만명이 2023년에 태어났고, 이중의 4.7%인 1만900명이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혼인 외 출생아는 2013년 9300명에서 2020년 6900명까지 줄었다가 2021년 7700명, 2022년 9800명으로 3년 연속 증가했다. 다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혼외 출생율인 41.5%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저출산에 따른 인구절벽의 위기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있다. 한편 110년만에 최대로 많이 내린 첫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던 그날 저녁에 어릴적 친구와 소주한잔을 들이키며 건배를 하다가 우리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첫눈을 즐기는 삶을 아직도 영위함에 감사드리며 외친 말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였다. 하지만 필자를 포함한 60~90세대들이 ‘~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암송문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3년의 1만900명를 포함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1968년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의 가치를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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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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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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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11월의 6‧25남침전쟁영웅,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발도메로 로페즈 미국 해병 중위’ 선정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서 고(故) 강재구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전우들을 구한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미국 해병 중위를 ‘2024년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25년 8월23일,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난 로페즈는 1947년 6월6일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6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파병에 지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로페즈는 미 제1해병사단 5해병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소대원들과 함께 해안에 상륙한 로페즈 중위는 선두에서 사다리에 올라 해안 방벽을 넘은 후, 전방의 북한군 벙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우측 어깨와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바닥을 기어 수류탄을 다시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부상으로 멀리 던질 수가 없었던 로페즈 중위는 부하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대신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했고, 결국 수류탄을 끌어안으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러한 공로로 미국 정부는 1951년 8월 30일 미합중국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4월25일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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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2)]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첫번째 올림픽이기도 했다. 전에는 기록을 문서로 기록해 보관했으나, 이번부터는 컴퓨터 데이터로 관리하였다. 특히 계측 부문에도 컴퓨터 측정 기술이 도입되어 1/1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첫 번째 경기가 되었다. 또한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테니스는 1988년 기준으로 64년만의 합류하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 성공적으로 개최된 88올림픽은 신기록과 에피소드가 넘쳐, 육군대학엔 이야기 꽃 만발 미국의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는 5관왕을 차지했다.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역도에서 88서울올림픽 전까지는 자기 몸의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터키의 술레이마놀루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인 190kg을 들어올려 우승하며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남자팀은 은메달을 차지했다.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웠다. 여자 개인전은 금, 은, 동 모두 한국이 가져가며 양궁 최강국이 됐다. 올림픽 최종 결과 소련은 금메달 55개로 1위, 동독은 금 37개로 2위, 미국은 금 36개로 3위를 했고,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총 33개 메달을 획득하며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원으로 알려졌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판매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 밖에 소련과 동독 및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최종적으로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다. 동독과 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도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육군대학 교수 및 학생들은 TV 중계를 보면서 88서울올림픽을 응원했다. 특히 권투 경기에서 변정일 선수에 대한 오심 편파 판정에 대한 비난과 우리 선수들의 맹활약 등 탄생한 신기록과 에피소드를 화제로 삼았다. 강의실과 자유시간 및 회식자리에서는 올림픽 이야기 꽃이 만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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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2)]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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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8)]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50년 6월 한국 육군의 규모는 수도경비사령부까지 합쳐서 모두 8개 사단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은 병력만 약 9만 7000명 정도였고, 전쟁을 수행할 만한 화력과 장비는 거의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군은 김일성이 벌인 불법 기습남침 전쟁으로 3년 가까이 피눈물을 쏟는 처절한 저항을 하며 대한민국을 지켜냈으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휴전선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력증강이 필요했고, 반면에 미군은 한국에 장기간 주둔하는 문제가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워 이를 어떤 형식으로든지 휴전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마침, 전선을 이끄는 유엔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이것을 먼저 언급하고 나왔다. 미군이 지원한다면 한국군은 보다 현대화한 전력을 갖춘 전투 사단을 증강할 수 있었다. 밴플리트는 우선 20개 사단으로 증강을 제시했다. 전쟁 전에 비해 2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는 일이었다. 미국의 의지만 확고하다면 대한민국 군대는 전쟁에 참여한 미군의 막강한 화력과 장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는 한국군의 자립(Self standing)을 주장했고, 당장 우리 역량으로는 이룰 수 없으나 미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그래서 안보가 튼튼해지고 국가 역량이 커진다면 한국군은 독자적인 안보 역량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는 한국군의 힘을 강화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헌데 우리 정부와 군은 그 당시 상황에서 밴플리트가 이것을 언급하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전력 증강시키는 계획 아이젠하워에게 브리핑하도록 준비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들은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2주 동안 한국군 전력 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했고, 우리 군에서는 백선엽 육군총장과 정래혁(국회의장 역임) 작전교육국장이 함께 참여했다. 당시에는 중요한 계획은 모두 차트에 글과 그림을 적거나 그려서 보고를 받을 사람 앞에 걸어놓고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을 하는 방식이었다. 밴플리트는 차트가 완성될 무렵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증강계획 관련 브리핑을 받을 장소인 자기 집무실을 백선엽 장군이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앞에서 충분하고 자신 있게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도록 ‘예행연습’을 하라는 취지였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다. 아울러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는 한국을 방문해 직접 현장을 살피겠다”고 공언까지 했다. 이런 분위기를 인지한 밴플리트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때를 활용해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주지시킨 뒤에 그 사업을 밀어붙이자는 계획이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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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8)]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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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1)]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한 '88올림픽경비단'은 86 서울아시안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모체로 개편했다. 위의 사진과 같이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이들은 경기장 주변 경비와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 및 대테러 작전수행 등을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했다. 예를 들면 공항 및 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또한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에는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팀,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했고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이와 같이 직업군인과 경찰 및 자원봉사자들은 음지에서 성공적인 국가 행사를 위해 헌신한 반면에 외출나온 군인들에게는 서울 시내 등 경기장 주변에서 군복을 착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한편 올림픽이 끝나자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져 실업자가 될 뻔했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공공기관인 ‘국민체육진흥공단’을 설립하여 그들을 채용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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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1)]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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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0)]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련의 사주에 의해 발발한 6·25 남침전쟁과 KAL기 격추 만행에도 불구하고 88서울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에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관중들의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물론 당시의 미국 NBC 취재진들이 한국의 집창촌이나 PX 유출 같은 것 등 사실상 한국을 폄하하는 식의 편파보도를 했고, 권투경기에서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중계를 했던 것의 영향이었다. 게다가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임산부 및 택시운전사를 폭행하는 사건사고, 미국 일부선수들의 태극기 모욕과 수영선수의 절도사건 그리고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이 겹쳐서 상대적으로 소련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 관중들이 올림픽 경기장에서 충격적으로 소련 대표팀을 엄청나게 응원 또한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소련 대표팀이 관객의 응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사실은 당시 운동권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설도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가 치러질 때 자신이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도록 조치했으며,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 응원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고 PD 출신 일부 정치인들이 보수 우파로 전향하기도 했다. 아무튼 관객들의 소련팀 응원이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것은 미국 선수들의 추태와 미NBC의 한국을 폄하하는 편파보도 및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 그리고 미국정부의 내정간섭 등이 겹쳐진 영향이었다. 육군대학 학생장교 시절에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며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던 필자도 축구종목에서 5승1무(예선전에서 한국과 무승부)전적을 거두며 우승한 소련이 4대2로 이기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관중들의 일방적으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느껴 의아해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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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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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100)]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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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7)]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사전에 침투한 클라크 대위가 밝혀 놓은 팔미도 등대를 활용하여 가장 먼저 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만조기에 한·미 해병대가 기습적으로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완료하여 본대 상륙을 위한 교두보 확보의 기초가 되었다. 2단계로 오후 만조기에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이 전격 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 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3단계로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이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넜다. 한강을 도강한 후, 남산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은 동작나루로 도하한 미 육군(7사단 32연대)과 한국군(수도사단 17연대)가 공격하고, 미 해병1사단 3개 연대는 서울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미 해병연대에는 한국군 해병대 1개 대대가 배치됐다. 결국 9월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을 성공리에 완료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또 하나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손자병법의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가 진리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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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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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7)]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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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6)]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는 “적이 방어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적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가라”는 의미이다. 6·25남침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1950년 9월15일 새벽,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칭한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다. ■ 지형의 불리점을 역이용한 맥아더의 기적 같은 인천상륙작전 1950년8월말 북한군은 거의 모든 전투 역량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낙동강 전선으로부터의 전면공격으로 인해 예상되는 10만명의 피해를 줄이고 작전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적의 병참선 중심부인 서울을 타격하여 북한군을 한꺼번에 포위, 격멸할 수 있는 인천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 따라서 최초 7월4일 작전명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을 수립했으나 초전의 연이은 패배와 빠른 북한군의 남진 때문에 취소했다. 미 합동전략기획단(JSPOG)은 인천, 군산, 주문진 상륙의 세가지 방안을 마련했다. 맥아더는 8월12일에 계획100-B인 인천을 선정하여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으로 명명하고, 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강화하는 계획으로 수립했다. 이를 위해 D-day를 9월 중순으로 잡고 일본에서 상륙부대인 미 10군단을 창설했다. 8월 23일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긴급 회의를 개최하여 최종 토의를 했는데, 미 합동참모본부(JSC)의 강력한 반대를 맥아더 사령관이 45분간에 걸친 연설로 설득했다, 사실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해 상륙이 적합한 만조시 수면이 높은 날은 15~18일 뿐이었고 인천 외항은 대규모 함정이 정박하기에는 협소하였으며 상륙해안은 대부분이 4~5m의 해벽을 이루고 있어 사다리와 쇠갈고리가 필요했다. 또한 상륙후에는 시가지의 건물을 방벽으로 삼는 적과 교전하는 불리점도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인천에 경비여단과 31여단예하 1개대대가 방어하고 있었고, 서울에는 북한군 18사단 등으로 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 나오는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가 적용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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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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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6)]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를 적용한 인천상륙작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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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규모인 159개국 8,397명이 참가해 9월17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올림픽은 통상 오후 3시에 시작되었는데 국가 이미지 모토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췄 오전에 개최했다고 설명했으나, 미국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마침 토요일이 반공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성화대도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식이 아닌 엘리베이터(보이지 않게 피아노 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림)방식을 도입했다. 이후 새로운 점화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반면에 외국 언론들이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문화를 앞다퉈 보도하며 엄청나게 지탄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림픽 기간 전부터 개고기 음식점을 강력하게 단속했는데 이때부터 ‘사철탕’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판매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88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양대 진영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격전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증언이 얼마전에 공개된 1988년 외교문서에 나왔다. 당시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사흘 전 주 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경유하여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으나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특히 4년 전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안전'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88서울올림픽 개최 5년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등으로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88서울 올림픽을 최대의 축전으로 만들기 위해 소련 등 동구권도 참가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더 이상 보도하지 못했다.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노력으로 결국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면서 소련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됐고 동구권들의 참가로 역대 최대규모의 올림픽 제전이 되었다. 반면에 88서울올림픽에 불참한 북한은 한국에 뒤지는 것을 만회하고자 이듬해인 1989년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면서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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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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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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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고(故) 최규봉 KLO(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 유엔군에 제공한 민간인 조직)부대장의 전공에 대한 진위 여부(월간조선 2003년 9월호 기사 참조)의 논란이 있었지만, 2012년 6월22일 서울 해군호텔에서 최 KLO 부대장의 전공을 인정했던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가 개최되었다. 이에 따르면 “최규봉 KLO 부대장은 인천상륙작전 당일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적을 교란시키라는 UN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적 2개 분대와 싸워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9월 15일 0시 12분, 인천 진입의 중요한 교두보인 팔미도 등대 점화에 성공함으로써 UN군 상륙기동부대 함정들의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해군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 책자 발간보고회에서 전 최윤희 해군참모총장이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이면서도 서훈이 누락된 최규봉(당시 89세, 前 KLO부대기념회 명예회장)씨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작금의 언론과 세간에 떠도는 코로나19 감염위험을 무시한 모 목사와 모장관 등의 언행을 볼때 몰상식한 책임 전가 및 회피성 행태가 만연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시 국가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정신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임무를 다한 클라크 대위, 최규봉, 장사리 상륙작전의 772명의 학도병,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전쟁 영웅들의 귀감이 되는 역사적 교훈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며 조용한 파장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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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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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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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 ▲ 88서울올림픽 포스터와 육군대학 시절 모습 [사진=연합뉴스/육군대학 45기 졸업앨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초급 장교로 약 8년을 근무했던 격오지 전방의 GOP 부대에서는 불시의 적 도발 및 부대내의 불미스런 사고 발생의 우려 때문에 휴일에도 항상 비상 소집하는 전화 벨소리에 대기하며 긴장을 하고 지내야 했다. 실제로 1987년 7월, 필자가 사단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을 때,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병사가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이와 같이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직업군인들은 전후방 각지에서 휴일보장 없이 근무하다가 육군대학 교육과정에 입교해서는 비록 교육 성적에 신경은 쓰이지만 휴일에 찾는 사람 없이 완전한 휴무 시간을 보장 받는다. 덕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 초기 소양시험이 끝나고 모처럼의 휴일에 서울 처가집에 들렸다가 88서울올림픽 미국과 러시아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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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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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98)]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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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4)]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 해군 첩보대 고(故)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 등이 영흥도에서 치열한 교전을 하는 동안 팔미도에서는 또다른 영웅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팔미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Operation Chromite) 기념비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 작전의 최고 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클라크(Eugene Clark) 미 해군대위였다. 그는 한국인 전우 연정 해군소령이나 계인주 육군대령 등과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간의 작전기간 동안 기록한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발견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뒤에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The Secrets of Inchon)으로 발간되어 겨우 햇볕을 보게 되었다.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진짜 영웅 클라크 대위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에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 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 해군대위, F. 클락혼 미 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 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 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였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 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 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 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 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 부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라고 되어있다. 헌데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월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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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4)]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희생한 숨은 영웅들(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