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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96)]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와 오성산 방어 성공에 맞추어 있고 지하 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다. 중국 선양 항미원조열사능원에 “동굴진지는 물이 적다.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다(吃糠咽菜·흘강인채).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당시 “오성산을 잃으면 조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전후 마오쩌둥의 지시로 1956년에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2011년 중국 주석 후진타오의 미국 백악관 방문 때,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연주곡은 ‘나의 조국(我的祖國)’으로 영화 ‘상감령’ 주제가 였다. 연주곡에는 “승냥이와 이리가 오면 엽총으로 맞이하겠다”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승냥이는 미국이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속절없이 당한 꼴이 되었다.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국군이,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 저격능선 전투 1단계는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하는 2사단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10월 14일 05시, 9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는 32연대 3대대가 1차 공격을 했지만 최초는 실패했으며 추가로 1개 중대를 지원받아 13시 40분에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미군 전폭기 6개 편대와 국군 2사단의 9개 포병대대의 집중 포격을 지원받아 공격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32연대 3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저격능선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점령한 후, 3대대는 Y고지와 돌바위 고지에 각각 1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하여 중공군 역습에 대비하였다. 중공군 133연대는 이날 야간에 강력한 포병 화력과 파상적 돌격 공격으로 Y고지와 A고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 끝에 3대대 전술지휘소는 함락되었고 3대대는 돌바위 고지를 남겨두고 퇴각했다. 이때 32연대는 예비연대인 17연대 2대대를 투입하여 돌바위 고지를 엄호하면서 전폭기 폭격 지원으로 10월15일 14시 30분, A고지를 재탈환했다. 이에 중공군은 이날 밤과 10월16일 새벽, 133연대의 2개 대대로 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진 중공군 134연대의 역습도 잘 막아냈다. 그 이후로 중공군은 135연대를 투입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공격했다. 우선 Y고지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공격했다. 결국, 국군 2사단 32연대는 중공군 135연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하면서 1대대가 역습을 하였으나 결국 A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10월20일 08시, 정일권 2사단장은 17연대가 3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A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17연대 1대대는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국군은 그 이후에도 76회의 항공 지원을 받아 1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탈환했다. 그 이후, 국군은 중공군의 역습으로 A고지를 피탈당하고, 17연대 3대대 역습과 중공군의 재역습과 다시 국군의 A고지 재확보로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이처럼 저격능선에선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는 가운데 군단 계획에 의해, 국군 2사단은 미 7사단의 작전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2사단은 A고지를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저격능선 전투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31연대를 삼각고지로 배치하고, 저격능선에 다시 32연대를 투입하면서 방어하던 17연대를 예비 임무로 변경하였다. 32연대의 투입 이후 무리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국군이 주간 작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면, 중공군은 야간 역습으로 대응했다. 32연대 2대대는 병력을 종심으로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45사단에서 29사단으로 교대해서 공격을 실시했지만, 국군 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재격퇴하는 등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국군 2사단 장병들의 투혼이 서린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우리 군이 점령하고,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일단 종결됐다. 그 후 김점곤 준장이 지휘하는 9사단이 저격능선 방어 임무를 인수했다. 저격능선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하던 2사단은 군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 정비 후에 9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백마고지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전개된 이른바 중공군의 마지막 ‘7·13공세’로 저격능선은 휴전선 북방의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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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15
  • [김희철의 Crisis M] ‘군검찰 수사심의위’가 보육원으로 전락하는 군을 막을 수 있을까?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부는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본관에서 사상 처음으로 ‘군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위원’을 위촉하고 2021년도 제1차 심의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는 국방부가 10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진행된 공군 성추행 사건 관련 긴급현안질의에서 ‘군사법원 현안보고’ 자료를 통해 “제1회 군검찰 수사심의위원회를 11일부터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힌 후속 조치였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법사위에 출석해 ‘미국이 2005년부터 설치한 국방장관 직속 성범죄 전담기구를 대폭 수용할 의사가 있느냐’는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 질의에 “저희가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서 ‘민관군 합동위원회’를 만들면 반드시 검토를 같이 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미국이 국방장관 산하에 설치해 운영하는 ‘성범죄 예방 및 대응 전담기구(SAPRO)’와 같은 조직을 검토해 보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전담기구는 독립적인 성범죄 관련 컨트롤타워로, 군 성범죄에 대한 기준 및 세부 전략을 제시하는 감독기구 성격을 갖는다. 이 조직은 군 성범죄가 신고되면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알리지 않고 사건을 처리한다. 또한 군 성범죄 예방 교육과 피해자 법률 지원, 정신적 피해 지원 등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 발생 시점부터 최종 판결까지 전담해서 지원한다. 국방부가 연말까지 운영할 계획인 ‘민관군 합동위원회’는 국방부 장관과 민간위원장이 공동위원장을 맡고, 군 형사절차 및 국선변호제도 개선 등 4개 분과로 운영된다. 서 장관은 이날 법사위에서 인사말을 통해 “유족 여러분께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남겨 드리고,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어 매우 송구하게 생각하며,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며 공군 여군 부사관 성추행 피해 사망 사건과 관련해 유족과 국민에게 거듭 사과했다. 서 장관은 전날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에서도 같은 사과를 하며, “회유·은폐 정황과 2차 가해를 포함, 전 분야에 걸쳐 한 점 의혹 없이 엄정하게 처리하겠다”면서 “군내 성폭력 사건 예방 및 대응 실태와 시스템을 재점검해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 ‘정의’와 ‘인권’ 위에 새로운 병영문화를 재구축하는 역량 발휘 당부 ‘군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위원장은 김소영 전(前) 대법관이 맡게 됐으며 시민단체, 학계, 법조계, 언론계 등 10여 명의 민간전문가가 수사 과정에 참여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수사심의위는 공군 여군 부사관 성추행 사망 사건에 대한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 적정성 및 공소 제기 여부 등을 심사한다. 이를 위해 성폭력 범죄 수사와 관련한 실체적 진실 파악과 피해자 보호 등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을 제공할 성폭력·성범죄와 관련한 전문가도 위원에 포함됐다 군이 군검찰의 수사 계속 여부, 공소 제기 여부, 수사 적정성 및 적법성 등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는 민간 검찰과 유사한 수사심의위를 가동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는 앞으로 수사심의위의 역할 범위를 전군 군검찰 수사로 확대할 필요성을 검토하기로 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하면서 “'공군 성추행 피해자 사망 사건’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수사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큰 역할을 해줄 것”을 강조했다.또 “군 검찰 수사심의위원회는 ‘정의’와 ‘인권’ 위에 새로운 병영문화를 재구축하는 튼튼한 초석이 될 것”이라며 “군의 사법 정의 구현과 장병 인권보장을 위해서도 위원들의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해달라”고 당부했다. ■ 얼차려, 군기교육과 영창도 없어진 보육원 된 군에서 과연 전투 가능한지...? 대검찰청 등 민간 수사기관에서도 수사심의위원회를 운영해 수사 절차 및 결과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고 있다. 이번에 설치된 “군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최근 발생한 ‘공군 성추행 피해 사망 사건’에 대해 제기되고 있는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수사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군의 사법 정의 구현과 장병 인권보장을 위해서 수사심의위원들의 전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정의’와 ‘인권’ 위에 새로운 병영문화를 재구축하는 튼튼한 초석이 되면서 적과 싸워 승리하는 군이 될 것인가는 의문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군에는 얼차려, 군기교육 및 영창이 없어졌다. 이는 ‘정의’와 ‘인권’ 위에 새로운 병영문화를 재구축하려는 노력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많은 부대원들을 통솔할 때 지휘자의 통제수단이 제한되어 규칙과 법을 위반하면 가차없이 사법조치로만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 강하고 혹독하게 장병들을 단련시키다가 오히려 가혹행위로 문제시되기보다는 그저 안전하고 편하게 말썽만 피우지 않도록 보육원처럼 관리하는 방향에 함몰되고 있다며 군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간부가 병사들에게 꾸짖거나 얼차려라도 가하면 부대에서 사용이 허용된 핸드폰으로 찍어 부모에게 보내고 또 언론에 내보내 문제화시키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군에 입대한 병사들의 봉급이 늘어나자 핸드폰을 이용해 주식에 투자하는 열풍이 일어나 ‘병영개미’가 주식시장을 좌우한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따라서 간부들은 적과 싸워이기는 부대를 육성하는 것보다 병사들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며 무사히 임기를 마치거나 부하 병사들을 보육원이 된 군에서 사회로 전역시키는 것이 주 임무가 되었다. 군의 사법 정의 구현과 장병 인권보장이 중요한 사안이지만 이러한 어려움과 위기속에서도 부대를 이끌어가는 군 간부들의 노고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더불어 군 존재가치를 잊지 않고 적과 싸워 승리하는 강군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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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1-06-14
  • [김희철의 전쟁사(95)]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0월23일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한국전쟁을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라고 6·25남침전쟁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항쟁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국영방송 CCTV를 통해 6·25남침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미화한 다큐멘터리 ‘빙혈(冰血) 장진호’, 철의 삼각지 저격능선 전투를 다룬 영화 ‘상감령(上甘嶺)’ 등을 방영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상감령 전투’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6·25 남침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라고 자화자찬해왔다.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내년에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 그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중 간 화웨이 분쟁에 상감령이 소환되는 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불쾌했다. 또 얼마 전 중국은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가 담긴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호수 ‘파로호(破虜湖)’의 명칭 변경을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파로호는 6·25 남침전쟁 당시 중공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도 주중대사 시절 이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파로호 외에도 영화 ‘안시성’을 두고 중국 측이 “우리 영웅(당 태종)을 비하한다”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구려 장군 양만춘이 당 태종을 물리친 전투를 담은 영화가 불편했던 것이다. 중국은 저격능선(상감령) 전투와 파로호, 영화 ‘안시성’에 이르기까지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우리 민족의 승전기록까지 바꾸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국도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인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승리의 진실을 살펴보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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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14
  • [김희철의 전쟁사(94)]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10월14일 김종오 장군의 9사단은 중공군 38군(江擁輝)을 격퇴시키고 395(백마)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집중포격 때문에 민둥산으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저격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의 삼각고지)’ 등의 치열했던 6·25남침전쟁을 통해 이름이 붙여진 고지들이 있다. ■ 밴플리트 사령관은 주도권 장악 위해 제한된 목표 탈취하는 ‘쇼다운(Show Down) 작전’ 개시 오성산(五聖山, 1062m) 남쪽 기슭에 있는 저격능선(Sniper ridge)과 삼각고지(Triangle or Jane Russell Hill)는 상감령(上甘嶺)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중공군들은 ‘상감령 전투(上甘嶺戰鬪)’라고 통틀어 부른다. 중국은 미군을 격퇴하고 오성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신화를 만들며 승리한 전투라고 영화까지 만들었다. 이곳에서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현재의 철원군 김화읍 주변) 지역에 배치되어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한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중공군 15군에 맞서, 1952년 10월14일부터 6주간에 걸쳐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치루어졌다. 저격능선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노매드(Nomad)선을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한 미 25사단이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26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이 538고지로 진출한 미군을 저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러자 미군 병사들은 이 무명능선을 가리켜 ‘저격능선(Sniper Ridge)’ 또는 ‘저격병 능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2년 10월, 중공군이 전초진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중공군 15군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예하 3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 중 45사단은 저격능선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여 경계부대를 배치했다. 아군 진지에서 200m정도 거리에 배치된 중공군 부대 규모는 중대에 불과했지만, 사단 및 군단급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른바 저격능선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미7사단이 삼각고지(Jane Russell Hill)를 공격하기 시작한 1952년 10월 14일부터 미 7사단이 삼각고지에서 철수하게 된 10월 25일까지다. 이 때 국군 2사단도 17, 31, 32연대와 추가로 증원된 30, 37연대 및 16개 포병대대로 10월 14일부터 저격능선을 공격했다. 2단계는 2사단이 미 7사단으로부터 삼각고지를 인수하여 양 고지에서 전투를 수행한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3단계는 저격능선 전투가 종료되는 11월 24일까지다. 이 42일간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결국 어느 편에도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총 11권)’의 제 10권(휴전협상 고착과 고지쟁탈전 격화)에 이 전투를 한국군의 승리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진행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이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 전선에 걸쳐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는 유엔군 측이 휴전회담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사살 3772명, 추정사살 1만1023명, 포로 72명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도 아군 역시 국군 2사단이 그동안의 반격작전에서 전사 1096명, 부상 3496명, 실종 97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서의 모든 전투를 ‘상감령 전투’라고 칭하며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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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6)]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④
    [시큐리티팩트=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은 약 2만1500명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정면공격을 시도했던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북한군 15사단은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축선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55일간이나 계속되었던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맛비가 내리던 9월이 되자, 드디어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김점곤 중령의 국군 1사단 12연대가 최초로 다부동 혈로를 뚫고 12㎞를 북상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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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6-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5)]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서울 점령후 남하를 계속했던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때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1군단은 김천에 2군단은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고, 7월20일에는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중앙의 주력으로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하고 동측은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서측은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남해안을 따라 마산∼부산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는 4개의 공격 축선에서 동시 공격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부산을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주력 5개 사단을 대구 북방에 배치해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따라서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 결과에 따라 결정될 정도였고 만약 유엔군이 패배할 때는 인천상륙작전도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마음은 급했다. 실제로 맥아더 총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상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작전은 그만둔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군 중앙의 주력이 지향한 지역에 아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1·6사단, 미 1기병사단) 뿐이었으며,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의 주접근로를 담당한 국군 1사단은 낙동리 부근으로 도하하는 적을 몇 차례 격퇴시켰으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6사단은 북한군과 공방전을 반복하다가 결국 용기동에서 위천으로 물러났다. 왜관 일대의 미 1기병사단은 역습을 전개해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적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무렵인 8월11일 육군본부는 위의 상황도와 같이 국군의 방어선을 303고지(작오산, 왜관 북쪽) ∼다부동 ∼군위 ∼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했다. 이에 따라 국군 1, 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낙동강변 왜관 부근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다. 이는 대구 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워커 장군의 미 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유엔군사령부에 건의해 실시된 폭격이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18일 가산에 침투한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 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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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4)]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대학 교육도 후반기에 접어들어 막바지 성적관리에 몰입할 즈음에 시행된 전적지 답사교육은 시작 전부터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구전으로만 들어왔던 전쟁영웅들을 6.25남침전쟁시에 적과의 교전 현장에서 직접 만나 실전 체험을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그동안 책상에 앉아 지도상으로 만 수많은 전투를 간접 경험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진해 육군대학에서 역사의 현장인 다부동으로 버스를 타고 2시간 넘게 이동하는 시간도 백선엽 장군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지루함을 잊을 수 있었다. 교육장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자 전쟁영웅들이 학생장교들의 열렬한 박수속에 도착해서 본인의 체험담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1사단장(준장)으로 다부동 전투를 지휘했던 백발의 백선엽 장군과 중령으로 12연대를 지휘했던 김점곤 장군은 달변에 여유있고 풍요로움을 느끼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체험담을 이어갔다. 또한 자부심 넘치는 강의를 통해 유아독존적인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것 같은 그들의 공통점도 느낄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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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3)]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戰爭, war, warfare) 이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움하는 것을 의미하며, 전투(戰鬪, combat, battle, fight, engagement)는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하여 싸움하는 것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반면에 육군대학의 군사학 교육을 통하여 전쟁을 운용하는 술(術)이 전투, 전술(戰術, tactics), 작전술(作戰術, operation(al) art), 전략(戰略, strategy) 등 세부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전쟁 또는 전투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과 방법인 전술(戰術, tactics)은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전망을 갖는 전략의 하위 개념으로써 주로 위관장교시절 보병학교에서 학습을 했고, 전투는 사관학교나 신병교육대 및 부사관학교 등에서 숙달한다. 육군대학에서는 사단급 이하 제대의 용병술인 전술에 추가하여 전쟁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이나 책략으로 전술보다 상위의 개념이자 통상 군단급 제대의 작전술(作戰術)도 학습했다. 필자는 새롭게 접했던 전술과 전략사이의 용병술 개념인 작전술을 이해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어려웠지만 매우 흥미를 느꼈다. 사단급의 공격 및 방어 전술교육을 통해 전술 담임교관들의 지식을 전수 받으며 어느정도 군사전문가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될 즈음에 실제로 전적지 답사교육을 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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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김희철의 전쟁사(93)]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⑧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6·25남침전쟁에서 한국군이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9군단 작전처는 사후 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도 했다. 유엔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날조하는 중공군 역시 6·25남침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했고, 적이었던 중공군과 북한군이 김종오 장군을 ‘군신(軍神)’으로 부르며 위명을 떨치게 된 전투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용사의 말에 의하면 야간에 백병전을 할 때 머리카락 길이로 피아 여부를 판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머리를 박박 깎았고 국군은 머리가 길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에 전혀 안보이는 상태에서 한손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만져 길면 살려주고 짧으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대검으로 베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턱~ 하고 올려서 만졌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가 죽일 가능성이 50:50 이었으므로. 다행히 아군이었는지 자신을 놔두고 다른 사람 머리 만지러 떠났다고도 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는 에피소드는 물론 실제 고지전 혹은 점령전하에서 야간백병전은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 총검이나 군용삽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난투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6․25남침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 전쟁영웅이자 한국 육군사의 전설적인 명장 김종오 장군이다. 그는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4년 24살의 나이에 일본군에게 학도병으로 강제 징용되었으나 다행히 일본의 패망으로 참전하기 직전에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여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31)로 임관했다. 그 후,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북한군 1대대를 유인 섬멸한 사직리전투 등 큰 전공을 세웠고, 이후 6․25남침전쟁을 불과 며칠 앞둔 1950년 6월10일 29세의 나이로 6사단장으로 보직되어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 또한 충북 음성군 동락리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사살 1천 명, 포로 97명과 수많은 장비를 빼앗는 등 개전 이래 최초·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 같은 해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 작전에 나선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은 10월26일 초산을 점령,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51년 3사단장 재직시 현리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도 겪었다. 허나 이후에도 백마고지전투 승리 등 6․25남침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한국군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영웅으로 불렸던 그는 종전 후, 육사교장, 1·5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및 합동참모회의 의장 등 군의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수만의 적군을 물리친 그였지만 몸속 깊이 찾아온 병마와의 싸움에서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66년, 4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김종오 장군은 마지막 병상에서 조차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니,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뤄 달라’는 유언을 대통령에게 남기며 일평생 조국을 향한 애국과 충절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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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02
  • [김희철의 전쟁사(92)]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열흘간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의 손실은 전사 8234명, 포로 5097명으로 38군 전체가 공격력을 상실했고 아군은 3428명이 전사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그동안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실망스러운 졸전을 거듭했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에 따라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남침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을 소모했다. 국군은 겨우 1개 사단이 중공군 최정예 3개 사단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 있었지만, 9사단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 탈취를 위해 강인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기간중 적시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교대 등으로 부대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을 받을 수 있어 4배의 포탄을 퍼부어댄 것이 승리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국군의 또 다른 대승인 용문산 전투 이후 병력의 열세를 화력의 우세로 메꿀 수 있음을 또 다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려던 중공군의 전략 기도를 꺾고 끝내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 팽더화이 사령관에게 "제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아 그때부터 만세군으로 불릴 정도로 중공군 내에서는 최정예 부대인 38군(江擁輝)은 궤멸상태가 되어 중공군 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났다. 현재 철원에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로 확보된 북한군의 노동당사가 위치해 있다. 현재 백마고지는 5사단 관할로 근처에 열쇠전망대가 있으며 신청하면 둘러볼 수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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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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