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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 M] 2019 KIMA국방정책 세미나에서의 오싹한 충격
    ▲ 4일 국방컨벤션에서 한반도 안보정세 평가 및 전망이라는 주제로 열린 ‘2019 KIMA(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국방정책 세미나’에서 사회를 맡은 허남성 박사와 패널 및 김용우 전 육군총장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의 기념촬영 모습 [사진제공=김희철] 세종연구소 홍현익, 북한 핵을 포기 못하는 것은 트럼프의 책임, 북 입장 옹호 조화로운 협력 위해 북한 방문한 시진핑, 빨리 한국도 방문하도록 노력필요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위해 주한 미군 중 1만명을 철수시키는 방안제시 북한, 위기조성 위해 추가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 시도 추정 예상되는 북미간 12월 실무 및 내년 1월 정상 회담은 트럼트의 대선 신호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보내는 12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4일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가 개최한 국제회의에서 "만약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그 상태로 북한과 협상을 하는 방안은 어떻겠느냐?"고 돌발 발언을 하여 소름을 끼치게 했다. 같은 날 국방컨벤션에서 김용우 전 육군총장과 김병관, 박정이, 권혁순 전 군사령관 등 40여명의 장성을 비롯한 예비역 장교들과 학자 및 안보전문가 등 150여명이 참석하여 ‘2019 KIMA(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국방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세종연구소 홍현익 박사도 “제재완화를 하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것이냐?”라는 플로어의 질문에 아찔한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홍박사는 “미국 시민들과 여론은 보수적이라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김정은은 미국을 불신하며 쉽게 핵을 포기하지 않고 장기전으로 미국의 다음 정권에서도 유리한 협상을 하려 시도할 것이다.” 라고 답을 했다. 이 발언은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답보다는 북한이 핵을 포기 못하는 것이 오로지 싱가폴 정상회담을 무산시키는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미국 트럼프의 책임이라고 발언하여 북한과 정부의 입장을 옹호한 것으로 인식됐다. 또한 “현재 트럼프는 주한 미군은 미국 안보에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을 하며 방위비를 올리지 않으면 철수 할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미국은 중국 억제를 위해서도 주한 미군 철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었다. 따라서 “지금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실패 원인은 미국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트럼프와 정권유지를 위해 무역제재를 하여 지소미아 종료와 연장을 번복하게 만든 아베 때문이다”라고도 말했다. 그 와중에도 현정부는 평화적인 대화로 해결하기 위해 미국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 사이에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며 “만약 미국의 요구하는 방위비분담금 5배 증액이 걸림돌이 되면 2만 8천명의 주한 미군 중 1만명을 철수시켜 분담금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지난 6월 시진핑 주석이 평양을 국빈 방문하고 최근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울릉도, 독도, 제주도 지역의 KADIZ를 수차례 무단 진입하여 경고 사격까지 하게 된 상황을 볼 때 중러의 압박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라며 중러 압박 회피와 일본 무역제재 해제를 협상하기 위해서도 현재는 조건부 연장됐지만 한일간의 ‘지소미아 종료’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문대통령이 6월 30일 청와대 한미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정책 간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힌 것과 같이 조화로운 협력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시진핑이 빨리 한국도 방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북한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과정으로 국내정치에서 수세에 몰리고 대선 승리를 위해 북한과의 협상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김정은이 제시한 최후통첩 시한인 연말이 다가오고 있지만 한미공중훈련 연기보다 몸 값을 올려 비핵화 협상 전에 미국의 양보를 확보하겠다는 적극적인 압박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이는 미국에 비해 500대 1의 군사력 수준을 가진 북한이 오히려 ‘갑’행세를 하고 있는 상태이며, 트럼프가 지난 3일 런던에서 대북 무력사용을 시사한 현 상황에서 “이번 달 안에 북미 협상이 진전 없으면 북한은 위기를 조성시키기 위해 추가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시도할 것이다”라고 추정했다. 이로 인해 “12월 중에는 정략적인 실무회담이 예상되고 내년 1월에 북미 정상 회담을 이루어 질 것이며, 이는 트럼트의 대선 신호탄이 될 것이다”라는 전망을 발표했다. ▲ 좌측 1주제 ‘2019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안보정세평가 전망’을 발표하는 패널들과 우측 2주제 ‘북한/주변국 군사위협 분석/대비’에서 발표하는 이건완 예비역 공군중장(전 공군작전사령관) 모습 [사진제공=김희철] 포필리즘에 빠진 자유 만주주위의 위기가 심화 미국이 ‘인도-태평양정책’ 선포한 상태에서 지소미아 종료는 매우 잘 못된 것 주변국에 전략적인 우위 확보와 작전적 단호한 대응과 확전방지 동시 추구 한국군사문제원 김열수박사는 “포필리즘에 빠진 자유 만주주위의 위기가 심화되고 민족주의 부상과 자유주의 질서의 쇠퇴와 패권 경쟁이 가속화되어 주변국들의 전략적 고민이 심화되고 있다며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동대 박원곤 박사는 “금년은 외교적으로 중요한 해이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에 ‘인도-태평양정책’으로 전면전을 선포한 상태에서 지소미아 종료는 매우 잘 못된 것이라며 주제발표자와 정반대 의견이다”라고 제시했다” 이어 “북미 실무 및 정상회담은 회의적이고 북한은 미국 대선을 고려하여 장기전을 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를 대비하는 원칙으로 “첫째 세계질서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고 판을 읽어야 한다. 둘째 한국은 포괄적 차원의 대전략이 필요하다. 셋째 불확실성 시대에서는 되도록 많은 선택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부 ‘2019년 북한·주변국 군사위협 분석·대비’주제에서는 예비역 해·공군 장성들이 “일본·중국·러시아의 영공 및 해상위협 사례와 북한 미사일 개발 현황 등을 분석하여 주변국 대비 전략적인 우위 확보와 작전적 측면에서 단호한 대응과 확전방지를 동시에 추구해야한다”는 대안을 발표했다. 또한 동맹관리 측면에서는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 능동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다. 사회를 맡은 KIMA(한국군사문제연구원) 석좌연구위원 허남성 박사(육사26기)는 “1945년 이래 미국의 극동지역 전략구도는 ‘한국은 일본의 방파제, 일본은 한국의 후방기지’라는 역할이 근본적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방위비 협상에서도 매티스 전 미국국방장관이 “한국은 미국을 지키는 최전선 국가이며 주한 미군도 미국 방위를 위한 것이다”라고 한 말을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합토론시 주제발표자의 발언과 상이한 이견 때문에 플로어에서 웅성거리자 사회자 허박사는 “휴전선은 군사적 경계선 뿐만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이다”라고 운을 띄우며 “왜냐면 경제 번영과 삶의 질을 고려할 때 북한 주민들의 고초를 비교할 수 없다”고 통탄했다. “문명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스스로 지키지 않는 자를 누가 지켜주겠는가?’라고 말한 마키아벨리의 명언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한다”며 결언을 맺었다. 이번 ‘2019 KIMA(한국군사문제연구원) 국방정책 세미나’는 현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을 배제시킨 가운데 형식적이고 과시형 행사를 지양하고, 보수와 진보를 떠나 실제 연구하고 관여한 학자 및 전문가들만으로 발표 및 토론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패널들도 극과 극을 달리는 정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토의하여 매우 수준 높고 내실있는 세미나였다는 참석자들의 평이 있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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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19-12-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 ‘위·아래 막고 물 퍼내기’ 낚시식 학습방법, 교관 의도를 낚다
    ▲ 초급간부 양성과정인 육군보병학교 마크인 ‘”나를 따르라!”와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제병협동훈련하는 모습 [사진제공=국방부/동영상 캡처]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새벽별 보기’식으로 공부해도 성적 안올라 '고추가루'에 의존에서 교관의 농담까지 암기하는 공부법으로 전환 교관의 의도에 맞는 답안 작성, 성적도 상층으로 진입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에 시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상류쪽에 흙을 쌓아 물을 막고 하류 쪽마저 막은 후에 물을 모두 퍼내면 물이 빠진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소위임관시에 교육받는 초등군사반(OBC) 성적은 중위 진급은 거의 가능하게 하지만, 장차 진급 심사시에 그렇게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위로 진급하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고등군사반(OAC)과정은 영관장교 진급 심사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고등군사반(OAC) 259기 과정에 입교한 동기생 16명을 포함한 20여명의 육사 출신들과 삼사, 학군, 단기사관 출신 104명의 장교들은 대입시험시 ‘4당 5락’이라는 유행어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별 보기식 학습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승리부대는 최전방 산골 오지의 산악부대라 아무래도 후방 부대들 보다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정보가 늦었다. 물론 게으르고 부족한 탓이겠지만 총 24주간 과정의 1/3이 지날 즈음에도 성적은 저조했다. 고등군사반(OAC) 입교전에 대대장과 주변 선배들도, 더구나 오랜 군생활을 이미 경험하셨던 장인도 모두가 1등을 목표로 제시해 주었으나 당시 필자의 상황은 1등은 커녕 1/3수준인 ‘상층’에도 못 들어갈 위험에 놓여있었다. 입교전인 신혼초에 연대의 장용성 군종목사님이 필자 혼자 육사에서 세례 받은 것은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 준비가 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 부부를 함께 부대 목욕탕 물에 담그면서 침례세례를 주시고 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을 명심하며 신앙 생활을 하라고 제시해 주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느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는 성경 귀절을 되씹으며 다시 용기를 내어 밤잠을 설치며 졸린 눈을 부릅뜨고 새벽까지 학습을 계속했다. 그래도 성적이 상승하는 변화가 없자, 그때까지 믿었던 선배들의 공부했던 자료인 일명 '고추가루'만을 중심으로 삼았던 그동안의 학습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무식한 전법으로 “막고 푸는 방법”을 택했다. 그 날 교관이 강의하며 강조했던 교리는 조사까지 그리고 농담까지도 모두 기록하며 모두 암기하기로 했다. 단지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한 성귀만을 믿었다. 웅덩이의 위와 아래를 막고 물을 퍼내어 물고기를 잡는 낚시 방법이었다. 선배들의 고추가루를 기초해서 채곡 채곡 쌓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꽉꽉 눌러서 마구 쑤셔 넣기식” 학습으로 전환했다. 물론 이방법은 학습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음 시험부터 달라졌다. 단지 혼자서 교범을 읽고 숙지하는 것은 나름의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으나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막고 푸는 식으로 강의 및 토의시 한마디씩 던지는 교관의 모든 발언에는 교범의 행간에 숨어있는 교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수업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농담은 당시 교리를 암기하는 중요한 연상도구가 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시험 평가시 강의시 교관이 이야기했던 토시까지도 적어낼 수 있었다. 교육 역시 인간이 가르치고 그 사람이 평가하는 법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에 맞춰서 공부한 시험 답안지는 해당 교관이 요구한 답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성적은 한단계씩 올라갔고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일 때에도 대화 속에서 해당 교관의 수준과 의도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어느덧 과정 종반에 접어들어 전술과목 및 제병협동(보병, 포병, 기갑, 항공, 공병 등 제 병과 통합)작전 등을 배울 때에는 드디어 성적이 상층에 포함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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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김희철의 전쟁사](16)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비호산 전투)과 맥아더의 오판
    ▲ 국군 제 6사단 7연대 1대대가 1950년 10월26일 14시, 압록강 초산진에 최초 도착하기 일주일전인 10월19일 이미 중공군 9/13병단 30개 사단 약 38만명은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사진은 1950년 10월19일,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사진제공=국방부] 마오쩌둥, 스탈린 요청받고 1950년 10월 3일 참전 결정 중공군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 건너 북한 진입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중국은 북한과 긴밀하게 협조를 해왔다. 중국은 7월에 미군이 참전하자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동북지역으로 파병하였으며, 대만침공을 연기하였다. 1950년 8월말에 인민군의 낙동강 공세가 실패한데 이어,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어지자 북한은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하였고. 마오쩌둥은 10월 1일부터 참전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미 9월 30일에는 중국외상 저우언라이가 ‘UN군이 38선을 넘어온다면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10월 2일~4일의 회의에서 참전을 확정지었으며 10월 15일에 압록강을 돌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8일, 동북변방군이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되었고, 사령관으로는 펑더화이가 임명되었다. 중국은 소련에 항공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하였다. 12일, 소련의 항공지원이 불가하다는 소식을 듣자 잠시 출병중지 명령을 내렸으나, 13일에 이 결정이 번복되어 소련 공군과는 별개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드디어 10월 19일,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중공군은 구성-오로리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UN군이 오로리로 진격중인 상황이었기에 중공군은 작전을 바꾸어 기습공격으로 나섰다. 맥아더사령관과 참모진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오판 유엔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 속으로 걸어들어가 10월 15일의 웨이크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초반에 개입했다면 전세에 큰 영향을 줬겠지만 지금은 그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압록강 인근의 종공군은 기껏해야 10만-12만 5000명 정도에, 실제로 강을 도하한건 5만-6만명 선이다”라고 호언 장담하면서 “중국은 항공 지원이 전혀없는 상태인데 반해, 아군은 한반도내에 기지설치를 완료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온다면 인류역사상 최대의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러한 맥아더의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 이후 국내정세가 많이 혼란스러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참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공군을 얕잡아 보았고, 크리스마스전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며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중공군이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중공군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을 이용하면 중공군을 쉽게 격파할수 있다. 첸놀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을 타고 다니면서 항공기 500기만 풀어놓으면 된다”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UN군은 오랜 진격으로 지쳐있었고, 분산되어 있었다. UN군은 거대한 중공군의 포위망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최악의 실수를 하게되었다. 당시 중공군 포로들이 포획되었고, 정보참모 윌로비에게도 보고되었는데, 윌로비는"그저 중국에 살던 조선인에 불과하다"며 참전 자체를 일축하였다. ▲ 중공군 1차공세와 비호산 전투 상황도[자료제공=이우형교수/국립현충원] 중공군의 1차공세에 따른 청천강선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에 대한 첫 승리로 막연한 공포감 해소 국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에 태극기를 꽂았지만, 중공군의 기습공격에 철수해야 했고, 상황이 악화되자 UN군 사령부는 방어로 전환하고 청천강선에서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철수명령이 떨어지자 국군 미1기병사단은(8기병연대와 5기병연대) 국군 15연대의 엄호를 받아 철수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철수도중에 15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어 8기병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됐다. 미 5기병연대가 구출작전에 나서 1대대와 2대대는 탈출에 성공하지만, 3대대는 탈출하지 못했고, 5기병연대의 구축작전도 실패하면서 결국 3대대의 구출은 포기되었다. 3대대는 중공군에 맞섰지만, 병력 대부분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미1군단과 국군 2군단이 청천강으로 철수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방어선의 형성은 매우 어려워지게 된다. 청천강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비호산 일대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했다. 비호산은 개천-안추-순천의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수 있고,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감제할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거기다 비호산이 점령된다면 미 8군 전체가 붕괴되어 버릴수도 있었다. 최초 국군 제7사단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덕천-구장동간의 방어진지를 점령하여 산악지대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 격멸하는 동시에 군단의 동측방을 방호하라”는 구두명령을 군단으로부터 전달받았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제7사단장으로부터 부대가 건재하다는 보고를 받은 군단장은 작전계획을 수정하여 개천 동쪽의 비호산 방어임무를 제7사단에 부여하였다. 그리고 청천강 계곡으로 침투하는 적을 견제하기 위해 1개 연대를 개천(군우리) 북쪽에 배치해 미 제7기병연대와 함께 대비할 것을 명령하였다. 사단은 즉시 연대를 이동시켜 11월 2일 오후에 진지편성을 완료하였다. 이때 제7사단은 약 1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고 장비는 사단 T/E의 90%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중공군은 제13병단 예하의 제38군단으로서 예하에 제112사단, 제113사단, 제114사단을 둔 약 30,000여 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다. 장비는 125㎜ 및 160㎜ 곡사포, 82㎜ 및 120㎜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과 소총 등을 보유하였으나, 미군 1개 사단 장비의 54%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성능도 낙후되어 있었다. 11월 3일부터 중공군38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진지에 있던 7사단 3연대는 중국군의 파상공격으로 유무선 통신이 모두 두절된 상태에서 3시간에 걸쳐 격전을 전개하였다. 이후로 비호산 정상은 3차례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이 벌어졌다. 3연대는 비호산 정상에서 육박전과 혈투 끝에 새벽녘에는 결사대를 편성 육탄공격을 펼쳐 적을 몰아내고 고지를 확보하였다. 1950년 11월 5일 아침 사단장은 제3연대와 예비대인 제8연대를 교대시켰다. 격전을 치른 제3연대는 개천의 조양국민학교에 집결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제8연대는 비호산 주봉에서 청천강 남안으로 연결된 북쪽 능선 일대에 편성된 진지를 강화하고 수색대를 파견해 적정 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제5연대는 비호산 남쪽의 535고지-760고지간의 진지를 강화하고 적과 대치하였다. 쌍방 간에 수색전이 전개되던 11월 5일 새벽 3시에 적은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중국군 제38군단은 개천을 탈취하기 위해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비호산 동쪽의 제5연대를 공격하였다. 덕천-개천간 측방도로를 장악한 적은 비호산 동남쪽 2㎞ 지점에 위치한 535고지의 제5연대 제2대대 진지 정면에 병력을 집중투입 했다. 중국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제2대대 진지에서는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결국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제2대대 진지가 무너졌다. 이는 아군의 방어 진지에 연쇄적인 충격을 주었다. 방어진지가 무너져 흩어진 제5연대는 2㎞ 후방지역으로, 동쪽의 미 제5연대전투단은 1㎞ 후방지역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호산 주봉의 제8연대 제2대대도 협상참 계곡으로 밀려 비호산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개천마저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7사단은 11월 6일 아침 8시부터 30분간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적의 진지를 초토화시킨 후 제5연대와 제8연대로 고지 남북에서 협공작전을 전개하였다. 남쪽의 제5연대는 신성리에서 미 제5연대 진지를 초월하여 535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저항이 완강했으나 한번에 격퇴시키고 비호산 진지를 탈환하였다. 중공군은 전선에서 이탈하였으며, 결국 중공군의 1차공세는 여기서 멈추었다 국군 제7사단은 비호산을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더욱 강화한 후, 11월 9일과 10일의 이틀간에 걸쳐 미 제1기병사단에 임무를 인계하고 개천으로 이동해서 부대정비에 착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퇴한 국군 제7사단의 승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호산 전투는 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의 승리라는 의미가 컸다. 그밖에도 초창기 연패로 인해 국군 장병들이 느끼고 있던 중국군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또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군 장병들에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유엔군 B-29기의 대규모 폭격과 중공군 1차공세시 비호산 전투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대규모 공습과 국군 7사단의 승리에 도취된 유엔군의 재반격,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빠져… UN공군역시 대규모 공습에 나섰고, ‘신의주가 안된다면 다른 도시들을 시험삼아 불태우자’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의 끈질긴 요구 끝에 맥아더가 “스트레이트마이어, 그렇게 원한다면 모두 태워버리시오, 강계 외에도 적에게 중요한 시설이라 판단된다면 다른 소도시들도 모조리 시험삼아 불태우고 파괴하시오”라고 지시하였다. 11월 4일-5일간 청진-강계에서 B-29에 의한 소이탄 대량폭격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1월 8일에는 신의주 폭격이 시작되었다. 폭격은 12월 5일까지 개시되었고, 4개 교량이 파괴되었다 11월 6일, 맥아더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며 반격작전을 발표하였고, 물자가 확보되는 대로 공세에 나서기로 하였다. 하지만 물자의 보급은 늦어졌고, 11월 15일로 예정되었던 작전은 미루어졌다. 철교를 보수하고 진남포항의 기뢰를 제거한 후에야 보급이 활발해졌다. UN군의 재반격은 11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국군 제 1사단은 박천-태천-용산동 방면에서 위력수색을 가하며 공산군에게 출혈을 강요하고 있었다. 한편 1차 공세후 정비를 마친 중공군은 11월 13일 UN군을 깊숙이 유인해 섬멸한다는 방침을 확정하였고,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압록강변 혜산진을 점령한 21일에는 국군 2군단과 동해안을 목표로 하여 각각 11월 25일, 26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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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12-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8) 고등군사반의 추억, 치열한 경쟁 속 소주잔의 행복
    고등군사반(OAC) 입교를 앞두고 치열하게 입교 시험 준비하는 대위들 선배들의 공부자료 지칭하는 '고추가루' 확보해야?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軍에서는 장교로 임관할 때 초등군사반(OBC), 대위 진급하면 고등군사반(OAC), 소령 진급하면 육(해공)군대학 등의 보수교육을 필수로 이수하게 되어있다. 물론 중령, 대령, 장군으로 진급해도 직책에 맞춰서 대대장반, 연대장반, 장군반 교육을 받는다. 이 같은 육(해/공)군대학까지의 교육은 필수과정으로 졸업성적은 진급 및 보직을 검토할 때에 우수하고 능력있는 간부라고 평가받는 결정적인 고려요소가 된다. 필자의 경우, 대대장이 '입교시험' 성적이 졸업성적을 좌우한다며 부대에서의 야근을 불허하며 정시 퇴근해서 입교시험 준비에 전념하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입교 시험은 고등군사반(OAC) 교육후 중대장직 수행을 위한 것이다. 중대급부터 대대 및 연대 전술 교범과 전술 전략의 기본이 되는 ‘작전요무령’을 숙독해야 했다. 장교 임관 후 야전에서 3년 가까이 책과 거리를 두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있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또한, 이미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수료하고 현지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는 선배들의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 선배가 몇등으로 졸업했나를 참고하여 가능하면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배의 고추가루를 얻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軍 보수교육과정의 졸업 성적은 향후 승진의 중요 변수 입교 대상자의 상관과 가족은 '대입 수험생'처럼 뒷바라지 군사교육과정의 졸업성적이 상중하에서 ‘상(대략 1/3수준)’에 포함되어야 진급 심사시 그나마 경쟁 대상이 된다. 필자도 과거 진급심사위원으로 몇번 참여를 했지만 진급 공석은 적은데 진급 대상자가 너무 많아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기 보다는 결격 사유를 찾아 제외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급심사시 대상자가 상점, 평점, 근무실적 등이 동일할 때에는 결국 군사학교 성적의 우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도 본인도 현재의 행복과 만족에 안주하기 보다는 시간과 노력을 쪼개는 희생을 감수했다. 신혼 초, 군인은 적과 잘 싸우고 근무만 잘하면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던 필자의 아내는 때늦은 고등군사반 입시수능(?) 준비에 몰두하는 필자를 뒷바라지하면서 훗날 아들들의 진짜 대입 수능준비를 대비한 예행 연습을 미리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등군사반(OAC) 259기’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아내의 행복, 쥐 나오던 관사에서 9평 '백일 아파트'로 이사 드디어 대성산 기슭에서 천연자연의 신선한 공기와 동료 부하들의 땀냄새가 어우러져 신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전라도 광주의 상무대로 첫 이사를 했다.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교육생 부부들을 위해 준비된 ‘백일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비록 9평밖에 안되는 연탄 아궁이 아파트이지만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의 낡은 관사 보다는 너무도 좋았고 아내는 “시집 잘 왔네”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총각장교들은 보병학교인 ‘상무대’ 인근 화정동에 자취방을 마련했다. 자취방 구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현재 노량진의 고시 학원가처럼 자취방 주인들은 6개월마다 입교하는 학생장교들을 대상으로 하숙 영업을 하고 있었다. 화정동에 가면 ‘고등군사반(OAC) 1등을 배출’라는 프랭카드가 걸려있는 하숙집도 있었다. 그곳은 역시 출신을 떠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우수한 성적을 얻으려는 장교들의 피튀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3년만에 만나는 동기생들과 선배들과의 해후였다. 그동안 야전에서 경험한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위기 극복상황과 보람차고 즐거운 성공 사례들을 주고 받으면서 기울이는 소주 한잔은 치열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하는 청량제였다. 입교시험 성적에 실망, 끝없는 '경쟁사회'에 회의감 들기도... 학교장에게 입교 신고를 하고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입교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입교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개인의 성적표가 교실 사물함에 꽂혀 있었다. 실망이었다. 꼴찌는 아니지만 1/3선에는 미달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어떤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입학 기수를 잘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기수는 육사 출신들이 대거 입교하는 시기라 너무 치열하여 목표한 성적을 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동안 대대장님의 배려와 가족의 뒷바라지에 미안할 뿐이다. 인생을 이렇게 피튀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 감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강의를 더 집중하고 마지막까지 더 치열하게 책과 실습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한편 이런 경쟁이 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지 안타까웠다. 부부동반으로 최근 여행한 북유럽은 '평등한 행복' 누려 소주잔 기울이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한국인의 행복' 치열한 경쟁 속 '자기 몫'에 만족하는 태도가 행복의 길... 얼마전 필자의 부부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에서 웅장한 자연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유산들을 관광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헌데 현지 한국인 여성 가이드가 어느 도심에서 안내 중에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현재 한국의 치열한 입시 및 취업 경쟁에 대해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은 대사관 직원으로 이곳에 파견 나왔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고 정착하게 되었다”며 “한국과 이곳이 다른 점은 너무도 많은데 넓은 영토에 비해 적은 국민들로 천연자연이 풍부해 국민소득이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최상인 복지 국가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면서 “방금 창밖에 환경미화원이 거리 청소를 하는데 옆에 왠 청년이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보셨지요?”하며 “누구 일까요?”라고 반문을 했다. 북유럽은 세금이 수익의 40~60%로 과중하지만 국민들은 전여 개의치 않고 있다며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적게 버는 사람이나 실업자는 오히려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그밖의 복지혜택도 많다고 했다. 가이드는 "직업에 귀천이 없어 창밖의 환경미화원은 자기 일에 만족하며 아들도 부끄러움 없이 힘든 아버지를 도와주는 모습"이라며 "계급의 고하에 따른 차별이 없이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살기 좋은 복지국가"라고 설명했다. 가이드는 더불어 본인의 자식이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행복하다며 미소를 띄웠다. 헌데 그녀는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유학가는 청년이 많이 있는데, 한국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한국에 정착하는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며 '도전을 좋아하는 청년들'이라고 했다. 왜냐면 한국은 치열한 경쟁사회이지만 밤새도록 상점을 열어 편리하며, 여의도 광장에서 통닭과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서비스는 북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경쟁이 치열하지만 좋은 점도 있는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경쟁에서 승리해 승진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삶과 주어진 현재에 만족하는 행복을 누리는 북유럽인의 삶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지만 오랜만에 선배 동료들을 만나 회포를 풀 수 있는 행복(幸福)도 있고, 목표한 성적을 한 단계씩 올려가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무한정 평등하지만 무미건조한 북유럽 복지 사회가 그렇게 부럽게 다가오진 않았다. 비록 경쟁은 치열하지만 마음을 비워 복(福)을 받으면 행복(幸福)하다. 왜냐면 “복(福)이라는 글자에는 한사람(ㅡ)이 먹을 수 있는(ㅁ) 밭(田)이 있어 베풀(示)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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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1
  • [김희철의 전쟁사](15) 미 7사단의 압록강 기념촬영은 맥아더 추락과 더 많은 피를 불러와
    ▲ 좌측 압록강에서 기념 촬영한 미군 지휘관들 외쪽부터 키퍼, 호디스, 알몬드 10군단장, 바 7사단장과 우측 11월21일 미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 압록강변에 도착하여 성조기를 꽂는 장면 [사진제공=국방부] 11월 21일, 미 제7사단17연대가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한 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미 제 7사단(사단장 소장 바)이 17연대(연대장 대령 파월)를 선두로 10월 29일 이원에 상륙하여 320km에 달하는 산악지대를 혹한과 강설을 무릅쓰면서 집요한 적의 저항 속에서 악전고투 끝에 11월 21일 만주가 보이는 한반도의 끝인 혜산진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의 미 제 8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이 전쟁은 끝내 종식되지 못하였다. 이후 제 17연대는 11월 30일 한국군 제 3사단 23연대에 혜산진을 인계하고 철수하게 되었거니와 그간 미 제 7사단은 11월 하순에 접어들면서는 기온의 급강하로 11월 23일까지 발생한 동상자만도 142명에 달하였다. 이상과 같이 북한 동북부의 작전은 끝을 보지 못한 채 장기적이고 불리한 새로운 작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선을 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7사단 17연대의 이원-혜산진 진격 과정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23/26연대 국군 7연대가 이미 압록강 초산진을 점령하고 뱃사공이 젓는 나룻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고 있었던 10월 27일 미 제 7합동기동함대 소속의 LST 7척에 분승한 미 제 7사단의 선두부대인 제 17연대 전투단은 이날 미명 부산항을 출항하였다. 미 제 7사단 선두부대의 수송 선단은 10월 29일 아침 이원에 상륙하였다. 이원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지 않았고, 10월 23일 수도사단 제 1기갑연대가 이미 이곳을 점령한 바 있어 아무런 저항없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선두 부대인 제 17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가 상륙 즉시 제 49야전 포병대대와 제 13 야전공병대대 A 중대와 함께 신북청-북청-장흥리를 거쳐 초리에 진출하였다. 이날 제 17연대의 전방에 위치한 풍산에는 수도사단 제 1연대가 임무를 교대하기 우하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우측 제 1기갑연대는 성진 일대를 완전히 확보하였다. 반면 전날 원산 상륙을 끝마친 미 제 1해병사단은 원산탈환 이후 원산 지구의 방어 임무를 맡아 온 한국군 제 3사단과 임무를 교대 하였다. 한국군 제 3사단은 다시 함흥 지구의 경비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함흥 일대로 병력을 이동했고 수도 사단의 제 1기갑연대는 성진을 점령하였으며, 제 1연대는 풍산을 점령했다. 이후 제 3사단 18연대는 보전령 일대에서 잔적을 격파한 뒤 백암산을 공격하였다. 11월 12일 풍산에 도착한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서부전선의 청천강 일대와 동부전선의 보전호-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종합적 정보보고에 의거하여 미 제 7사단장 바 소장에게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미 7사단장 바 소장은 제 17연대로 하여금 갑산을 거쳐 혜산진으로 진격케 하여 다음 날인 11월 13일 창평리 일대에 도달했다. 미 17연대는 압록강에서 남으로 흐르는 허천강의 지류로서 수심이 30~40cm 인 웅이강의 북안과 연결된 교량에 이미 적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확인한 연대장 파월 대령은 연대에 소속된 한국군 공병대로 하여금 빈 드럼통으로 도보교를 가설케 하였다. 11월 14일 미 제 17연대는 전날 한국군 공병대가 가설한 도보교를 이용하여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선두부대가 도하할 무렵 적의 사격이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무사히 건너 하저평 일대에 전개하였다. 11월 15일 미 제 17 연대는 전날에 이어 웅이강의 도하 작전을 계속 하여 제 1대대가 최후로 무사히 이를 완료하였다. 다음날 전방의 적은 소집단으로 분산되어 갑산방면으로 철수하고 있다는 항공 관측 보고에 따라 미 제 17연대는 웅이천 북안의 관평리에서 우가리-평인령(1186 고지)를 통과하여 동쪽 갑산도와 서쪽 삼수도의 교차로인 상리에 진출함으로써 이날 13km를 전진하였다. 그리고 전날 보전호의 동단에 진출한 미 제 31연대 3대대 정찰대의 뒤를 따라 이날 본대는 수상리-장진령(1898 고지)-보전호반의 경로를 따라 서북으로 전진하여 보전호 북단 한대리의 보전댐 부근에서 약 200명의 중공군을 격퇴시켰다. 미 제 17연대는 17일 갑산 남쪽 16km 지점인 석우리를 점령하고 18일에 전진을 계속하여 갑산 남쪽 6km지점인 송우리-장평리 일대에 진출하였다. 이어 선두 부대인 제 1대대는 11월 19일 10:30 경에 보, 전, 포 협동작전으로 갑산을 공격, 점령하였다. 특히 미 제 17연대 전차중대는 참호 속에 있는 적을 압살하였으며, 미 제 15대공포대는 40mm 고사포로 교통호의 잔적을 향해 맹열한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동 연대의 제 1대대는 갑산을 점령한 다음, 계속 혜산진 가도를 따라 적을 추격하여 이날 밤에는 갑산 전방 13km 지점인 판장리에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앞으로 혜산진까지는 37km가 남아 있었다. 한편, 지난 10일 사단의 제 7정찰중대가 파견되었던 슬령 발전소에는 이날 밤 한국군 제 3사단의 전차공격대대의 1개 중대가 도착하여 미 제 32연대의 1개 중대와 교대함으로써 동 1개 중대의 미군은 갑산의 연대 집결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 밤 적의 기습을 받고 한국군 양개 중대가 교전한 끝에 한국군 5명이 부상하였다. 드디어 11월 21일 아침, 미 제 17연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혜산진 가로를 전진하여 오전 10시에는 혜산진 시가와 압록강에 연한 주변일대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시가는 일주일 전인 13일 동해상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에 의하여 군영과 창고가 파괴되는 등 시가의 85%가 소신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가의 북쪽을 가로지른 압록강의 강폭은 45~70m 정도였는데, 유폭은 불과 2m였다. 강상의 교량은 동 연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괴되어 있었으며, 강의 북쪽 300m 지점의 만주경내에 위치한 장백에는 중공군의 보초와 장교들의 왕래를 역력히 볼 수 있었다. 당시 17연대 대위였던 레이하비씨는 KBS의 ‘6.25 60주년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인터뷰에서 “압록강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한국부대가 와 있었습니다. 부대장인 대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더군요. 우리 부대가 압록강에 머무르는 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하여 한국군이 먼저 도달했음을 증언했다. 또한 그는 “중국군은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폭이 좁아 밤에 중국군이 건너다니는 길목도 보였습니다. 우리 부대 안에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중국군에게 ‘이쪽으로 건너오지 그래’하자 중국군은 ‘네가 이쪽으로 와’라며 밤에 대화를 나눴습니다.”라고 그때 상황을 회상했다. 레이하비 대위의 증언처럼 미군이 도달하기 전에 혜산진에 먼저 도착한 한국군 부대는 두개라는 설이 있다. 그 부대는 10월1일 38도선을 강원도 양양에서 최초 돌파했고 미17사단과 협조된 공격을 한 3사단 23연대와 당시 3사단 소속이었던 26연대(현재는 수도기계화 사단 소속)이고 이 부대들은 부대 명칭을 혜산진 부대로 부르며 자긍심에 차있다. 맥아더,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라는 축전을 보내... 이와 같이 한국군 3사단과 더불어 미군 17연대 제 1대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자 전날 갑산에 와 있었던 미 제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사단장 바 소장과 연대장 파월 대령을 대동하고 혜산진에 도착하였고, 이어 동경의 맥아더 원수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전날 미 제 7사단 17연대가 혜산진을 점령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맥아더 원수는 다음날인 11월 22일 아몬드 소장에게 "네드여!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바 소장에게도 미 제 7사단이 정곡을 찔렀다(The 7th Division hit the jackpot.)고 전해주시오"라는 축전을 보내 왔다. 아몬드 소장은 이에 부가하여 사단장 바 소장에게 『불과 20일 전에 이원에 상륙하여 320km 이상의 심산협곡을 적설과 영하의 혹한을 무릅쓰고 집요하게 저항을 반복하는 적을 무찌르고 귀하가 거둔 성과는 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일 "갑산에 집결한 미 제 32연대는 삼수를 거쳐 신갈파진에 진출하여 미 제 17연대의 서측에 배치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이날 갑산에서 삼수를 통과한 제 32연대가 삼수에서 신갈파진으로 진격을 개시함에 따라 혜산진의 제 17연대도 일부 병력을 신갈파진으로 우회시켜 제 32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 미 제 17연대의 수색대는 서쪽으로 11km를 전진하다가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을 받았고, 제 32연대 3대대의 특수 임무부대 역시 완강한 저항을 받게 되어 양 부대는 사투에 사투를 거듭한 나머지 28일에야 신갈파진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 좌측 10월 24일~11월26일간의 동부전선의 유엔군 진격로와 우측 10월25일 중공군 40군 118사단이 국군 6사단을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11월8일까지 진출한 중공군과 유엔군의 접전도 [자료제공=이우형교수] 미 알몬드 10군단장의 압록강 기념 촬영, 맥아더의 추락과 많은 미군의 피를 불러와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유엔군 약 1만7천명 사상 피해 하지만 이미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10월25일 국군 6사단을 궤멸시키기 시작하였고 동부전선에서 미17연대가 치열하게 혜산진으로 북진하던 11월8일 개천 -회천-황초령까지 진출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존재를 확인한 유앤군은 작전을 전환하여 10월 26일~12월 13일까지 함남 장진군, 함주군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전투에서는 많은 미군들의 피를 뿌렸고, 만주 폭격을 시도하려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경질을 확정짓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 전투는 피난민들이 흥남 부두에 정박한 미국 군함에 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단연 압권인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각인된 흥남 철수 작전은 아비규환의 필사적 탈출이었다. T R 페렌바크는 책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흥남 철수에 대해 “덩케르크 철수와는 달랐다. 서둘러 배에 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은 없었다”고 썼다. 군 작전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기습 공세로 전멸 위기에 처했던 연합군이 가까스로 빠져나온 덩케르크처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미 군함에 타지 못하면 공산치하를 탈출할 길이 없었던 피난민들의 절박성은 다른 문제였지만 유엔군과 민간인 20만 명의 흥남 철수를 가능하게 한 것은 미 10군단 예하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였다. 1950년 말 개마고원에는 유엔군은 7,83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해겨울은 어느 때보다 더 지독한 추위였다. 옷을 여러 겹 입어도 살을 에는 추위를 막을 수 없던 장병들의 손과 발은 동상으로 하얗게 변했다. 수통의 물도, 캔 속의 전투식량도 얼어버렸다. 수류탄은 불발되기 일쑤였고, 차량은 시동 걸기가 어려웠다. 그런 혹한 속에서 미 해병들은 음산한 나팔 소리와 함께 밀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격렬하게 싸우며 퇴로를 열었다. 남쪽으로 물러서면서도 공격전을 계속했다. 그래서 그 후퇴는 ‘남쪽으로의 공격’이라고 불렸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인들에겐 ‘잊혀진 전쟁’이 된 6·25의 기억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워싱턴 한국전쟁기념공원에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함께 서 있는 조형물도 장진호의 해병 장병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6만7천명 중 사상자는 4만 8천명이지만 유엔군 측은 3만명 중 사상자는 약 1만7천명에 달했다. 양쪽의 피해 규모를 볼때는 유엔군의 전술적 승리이지만, 중공군은 전쟁 국면의 전환시켜 본격적인 공세돌입하여 37도선까지 유엔군을 전면 철수시킨 중공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장진호 전투는 ‘초신 퓨(Chosin Few)’라고 불린다. 즉 장진(長津·일본어 발음으로 초신)에서 압도적 병력 열세에도 온갖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선택받은 소수(chosen few)’가 된 영웅들의 전투였지만 미군 지휘관들의 혜산진 기념촬영은 많은 미군들의 희생과 맥아더의 경질 그리고 한국 현 대통령을 배출시킨 흥남철수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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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11-22
  • [김희철의 전쟁사](14) 이승만이 맛본 수통의 압록강물,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
    ▲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가 1950년10월26일 14시즈음 압록강 초산진에서 수통에 물을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 참석...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이승만대통령은 1950년 10월 27일 김일성광장에서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과 국군-유엔군환영시민대회에 참석했다. 그 시각 초산의 압록강변에 선두로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부하에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이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시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산길을 이용해 침투식으로 공격을 하여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들에게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6사단 7연대가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달 패전한 북한군 사단은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 지휘 이대용 대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경에서 오랑캐 막아내다 죽을테니…” [김희철의 전쟁사](2)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편에 소개했던 동락리 전투는 6·25 남침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에게 희망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6·25 남침전쟁 발발 12일째인 7월7일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 7연대는 ▲적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화포 및 총기 2,012정 ▲장갑차 및 차량 88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하며 전쟁 발발 이후 최초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6사단의 선두 부대로서 화천을 점령하고 노획했던 북한 트럭 150 대를 밑천으로 쾌속으로 북진 중에 다량의 트럭들을 더 노획해서 300대의 트럭으로 완전 차량화했던 덕분에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게 10월26일 14시 즈음 1착으로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위의 우측지도는 빨랐던 6사단 7연대의 진격 상황을 보여준다. 1950년 10월 말에 각 경쟁 부대의 북진 도달점은 왼쪽 영연방 여단의 정주가 있고 오른쪽 7, 8사단의 덕천이 있다. 한달 뒤인 11월 말에 미군 7사단과 함께 오른쪽 혜산진까지 북상했던 3사단과 충북 도경 전투 경찰 병력이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전,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는 압록강을 접하고 있는 초산군의 읍 소재지 6km 지점에서 북한군 여단 병력과 압록강 도달을 앞둔 마지막 북진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사단은 계속된 패전으로 축소되어 여단 규모였다. 이 부대 지휘관은 현재 남한으로 망명한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었다고 한다. 적의 저항은 상당히 거셌으나 곧 한계에 와서 국군에게 길을 열어주고 패주했다. 김용주 중령이 지휘하는 1 대대는 텅텅 빈 초산읍내를 통과해서 압록강으로 치달렸다. 최선봉 1 중대장으로 초산 서북쪽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진격하여 압록강에 선두로 도착했던 故 이대용 장군은 그의 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에서 “자동차 도로는 큰 반원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었다. 이 위를 군용 트럭은 달렸다. 서북쪽으로 커브를 꺾어 조금 나가니 거대한 막이 확 열리는 듯 장엄한 신비의 대호수가 화면처럼 떠올랐다. 산과 산사이를 감색의 물로 가득 채운 장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압록강이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 분! 아 ! 이 나라 남아로 태어나서 자유의 종을 울리며 남북을 통일하고 나니 지금 죽어도 무슨 유한이 있으리오! "라고 전했다. 모두들 벅찬 가슴에는 흥분과 감회가 교차했다. 뒤이어 압록강에 도달한 1대대원의 눈에 띈 것은 북한군이 넓은 강을 가로 질러 중국까지 놓은 뗏목 다리와 이 다리를 건너고 있던 많은 북한 주민들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이미 다리를 건너가 중국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북한 노동당원 간부들과 관리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배속된 연대의 57mm 대전차포로 이 다리를 파괴하였다. 북진의 기념비적인 유명한 압록강의 물은 수통에 담아 연대 본부로 보내고 오후 4시경, 김용배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서 이대용 대위의 1 중대를 남겨놓고 대대의 다른 중대들은 모두 6km 남방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방문해서 서쪽 벽동 쪽으로 진격했던 2연대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고 걱정하며 돌아갔다. ▲ 좌측, 7연대 1 대대 1 중대장 이대용 대위(예비역 준장, 전 주월남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와 우측, 중공군의 진격로와 이대용 중대의 적진 탈출 요도 [사진제공=국방부] 초산 압록강물 수통에서 맛본 통일 기쁨, 이틀 못넘기고 비극 시작 7연대, 중공군의 후방차단으로 생존자 22명만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 복귀 그날 이대용 대위는 1 소대장 서근석 소위와 연락병 홍인곤 하사, 그리고 1 중대가 북진하면서 순천에서 구출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 명 박태숙, 정정훈 여사와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던 신도장과 중국 쪽을 오갔던 나룻배의 뱃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압록강에서 머무른 시간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압록강 도착 이틀째인 1950년10 월 28일,오후 다섯 시 이 신도장 나루터에 있던 검문소 성격의 분주소에서 위치한 1 중대 본부로 초산의 대대로 부터 “대군의 중공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는 불길한 정보와 함께 당일로 신속히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이대용 대위는 어이가 없어 대대장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국경선에서 오랑캐를 막아내다 죽을테니 이 곳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하고 철수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초산의 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상황의 엄중함을 설명하며 거듭 빠른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대용 중대는 눈물을 머금고 두 시간 뒤인 저녁 6시 45분 대대 본부가 있던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7연대는 다음 날인 10월 29일 7연대는 중공군의 사격과 교랑 파괴를 무릅쓰고 남하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빨리 벗어나려 노력했었으나 실패했다. 중공군 13병단 예하의 사단 병력 규모 공격으로 길게 늘어선 7연대는 선두 부대부터 맨 뒤 후위 부대까지 피해를 입어 30일 자정 12시즈음에 연대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병력의 76%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부하 160명을 데리고 전투에 돌입한 이대용 장군은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바다와 같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고 철수 전투중에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었다. 이대용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9일 후인 11월 8일 7연대에서 최초로 단지 생존자 22명만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으로 간신히 복귀할 수가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의 의미처럼 초산 압록강물 수통의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지만 생존자들 중에는 기적 같이도 순천에서 북한군에게 끌려 가던 중 국군이 구출해서 데리고 북진했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명도 있었다고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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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11-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7)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
    민방위훈련은 1972년 '민방공·소방의 날'이 시초 대대교육장교 시절, 열외 병사 및 간부들로 고민 오토바이 뒷좌석에 최루탄을 달고 주둔지를 돌며 훈련 유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신혼 초, 대성산 기슭의 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살림을 시작한 우리 부부는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 방 속에서 한 겨울 연탄 아궁이 열로 방바닥 아랫목은 시꺼멓게 탔지만 이불 밖의 기온은 영하로 입김이 서렸던 추억을 갖고 있다. 현재 민방위훈련은 연간 총 5회 실시하나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유명무실화 되어 있지만, 필자가 대대교육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인 1980년대에는 매월 15일이 되면 전부대 및 주민들이 민방공훈련을 했다. 그때 어느 달 15일에도 어김없이 민방공훈련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핵심은 전 부대원들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적항공기 침공에 대비해 중대 및 소대별로 대공화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화재 발생 상황을 조성하여 대피 및 물자 운반, 화재진압 등 소방훈련까지 한다. 헌데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훈련을 열외하는 경우가 있어 고민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방독면을 강제로 쓰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노후된 관사에서 한 겨울 추위를 잊게 했던 연탄 운반용 집게에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한 바퀴 돌면 최류 가스 때문에 간부 및 병사들은 자동으로 방독면을 쓰고 훈련에 참가하도록 만들었다. 효과적인 훈련이 되었고 몰래 숨어 훈련 시간만 피해보려고 했던 장병들은 최류가스를 마시면 급하게 방독면을 찾아 착용했다. 또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 아마 군생활동안 요령을 피웠던 예비역들은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독면의 정화기 마개를 열어놓아 착용시 답답함을 모면 하려고 했던 일부 병사들이 방독면을 착용했어도 최류가스가 그대로 들어오는 '재난'을 겪게 됐다. 그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마개를 닫았다. 결국 자동으로 방독면 관리 상태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각 중대 막사마다 최류가스탄을 터뜨려야 했는데 오토바이를 이용하니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최류탄을 결합했던 연탄집게 사용하자 관사에 '최류가스 소동' 국민의 무관심과 경제논리로 소홀해지는 최근 새태 안타까워 그날 부대의 민방공훈련은 연탄 집게에 최류탄을 결합한 오토바이 운용 덕분에 방독면 관리도 확인하고 열외 없이 주둔지 내 전 병력이 제대로 훈련을 하게 되었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훈련이 끝나고 다음 일정에 바쁘게 업무를 하고있는데 관사 지역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필자의 가족이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휘저었던 연탄 집게를 이용하여 아궁 속 연탄을 갈자, 달구어진 집게에서 최류(CS)가 나와 집안은 물론 관사지역에 퍼져 군인 가족들이 비상이 걸린 것이다. 필자는 놀라 관사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사과를 했고 필자의 가족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원망의 하소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날은 민과 군이 제대로 통합훈련을 하게 되었던 셈이다. 동시에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을 낳게 하는 추억도 남겼다. 사실 우리나라 민방위업무 및 민방공훈련은 6·25전쟁 직후인 1951년 국방부 계엄사령부에 민방공총본부가 창설되면서부터 국민과 함께 해왔다. 민방위훈련은 1972년 최초 “민방공·소방의 날” 훈련이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민방위활동이 유사시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그동안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시민들은 민방위 대원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지하대피소, 지하보도 등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다. 또한 운행 중인 차량의 경우 긴급차량 비상차로 확보를 위해 도로 오른쪽에 정차한 후 시동을 끄고 라디오 실황방송을 청취하며 대기했다. 이후 경계경보가 발령되면 시민들은 대피소에서 나와 경계태세를 유지하면서 통행하고, 경보해제 발령 후에는 정상 활동으로 복귀하고 차량 역시 차량통제 해제방송에 따라 행동하면 훈련이 종료된다. 다만 병원, 지하철, 철도, 고속화도로, 항공기, 선박 등은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작금에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단순한 경제 논리에 의해 민방공훈련은 소홀하게 되는 실정이다. 앞으로는 이 제도가 제대로 부할해서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을 함으로서 국민들의 안보의식 고취시키며 이를 통해 실제 상황발생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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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1-12
  • [김희철의 Crisis M] 모든 위기와 성공은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 선영제 전 전쟁기념사업회장(전 육군참모차장, 예비역 중장)이 그동안의 경험과 강의를 통해 정리하여 발간한 ‘리더십이 답이다’책자 [사진=김희철] 육군참모차장 역임한 선영제 예비역 육군중장, '리더십이 답이다'출간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구 물리친 명량해전의 승리는 성공한 리더십" 모든 조직의 위기와 극복은 모두 서로 다른 리더십에서 비롯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결실의 계절인 10~11월 광화문과 서초동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메우며 대한민국은 분열되고 있다. 이것은 국가 리더십의 부재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 전 육군참모차장과 전쟁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한 선영제 예비역 육군 중장은 “오늘날 리더십은 풍요 속의 빈곤이며 동서고금의 사례와 방법론이 속출하지만 공허한 메아리로 다가온다”며 안타까워 했다. 따라서 본인의 군생활과 전쟁기념사업회장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강의 내용 등을 종합하여 ‘리더십이 답이다’라는 책을 발간했다. 선 장군은 프롤로그에서 “조직의 성패는 리더십의 성패에 달렸다”며 과거 예로 임진왜란의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이었다. 특히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랑해전처럼 모든 조직의 성공과 위기의 본질적인 문제는 리더십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리더십이 답이다’라는 책에서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가치추구, 진정, 맞춤형, 경영자 팀 리더십으로 제시하며 지금은 변화와 혁신 그리고 창의력이 경쟁력이며 융합과 협업의 시대라고 했다. 특히 리더의 9대 필수 핵심 역량으로 1. 조직관리 2.인간관계 3.소통 및 설득 4.의사결정 5.정보력 6.문제해결 7.갈등 및 분노 조절 8.위기 및 리스크 관리 9.유머 능력이 있다. 이러한 핵심역량을 갖춘 리더들의 특징은 꿈과 목표가 분명하며 성실하면서도 유능하고 좋은 습관을 지니면서도 남의 배려와 친절에 감사할 줄도 알며 경청과 소통에 능하다고 했다. 또한 효과적으로 시간과 인맥 관리를 잘하며 자신감과 적극성, 열정을 갖고 남을 섬길 줄 알고 인내심도 있는데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것 등이다. ▲ 혼돈의 시대에 표출된 광화문 민심과 선영제 전 전쟁기념사업회장이 발간한 리더십 책자 [사진제공=김희철] 저자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국가는 크게 발전했고, 함량 미달 리더십을 구사하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쇠락의 길, 사양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는 필리핀과 파키스탄이었다. 당시 필리핀 기술자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있는 우리나라에 와서 광화문에 있는 정부 청사 일부와 장충체육관을 지어주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건물도 지을 기술도 능력도 없었다. 이러한 필리핀이 불행이도 3대에 걸쳐 능력이 부족한 최고 정치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추락의 길을 걸었다. 또한 한국은 1963년도에 우리보다 잘사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입법, 사법, 행정, 외무고시 제도 등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잘살았던 필리핀과 파키스탄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선영제 장군은 이와같이 리더십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에필로그에서 “리더십 능력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으며 꾸준하고 오랜 노력과 성찰이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칭기스칸이 “한 사람의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회 각 분야의 리더들이 훌륭한 리더십으로 만인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꿈꾸며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리더십 또한 정답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모범 답안을 찾아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하길 기대한다는게 선 장군이 내린 결론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CRISIS M
    2019-11-0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 선택의 연속……..?
    ▲ 지난 호국훈련 중 공중강습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UH-60 기동헬기 [사진제공=국방부]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선택함을 비유 결혼 날자를 택해 청첩장도 돌렸는데 상급부대훈련이 변경되어 난감한 처지됨 결혼도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인 인생의 선택 중 중요한 하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병아리 우는 소리를 啐, 깨뜨리는 것을 啄이라 하는데,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로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비유한 사자성어이다. 엄동설한의 추위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따사한 봄이 되어 꽃이 피자 언제 삭풍을 몰아쳤냐고 되물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 화사한 봄날에 인접 GP장의 여동생을 처음 만났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가을이 되자 그 만남은 열매를 맺어 결혼식을 올리는 날짜를 잡았다. 평범한 시민들은 길일을 찾아 혼인 날짜를 정하지만 군인들은 길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상급부대 훈련, 검열 등의 고려요소를 참고하여 가능한 날을 선정해야 한다. 필자는 대대교육장교 근무시절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연대 전투단 훈련 겸 평가일과 대대 전슬흔련 평가를 모두 마치고 여유있게 결혼 날짜를 선택했다. . 그러나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라고 이야기 한다. 선택을 잘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을 만나게 된다. ‘군단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연대 전투단(RCT)훈련을 받은 뒤에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가 계획 되어 있었는데 상급부대 일정이 변경되어 연대 전투단(RCT)훈련이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 시기로 연기되어 뒤로 미루어진 대대훈련평가와 결혼 날짜가 중복 되었다.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 이미 청첩장을 모두 발송했는데 난감했다. 고민에 말도 못하고 있는데 송영근 대대장이 호출했다. “교육장교, 니 결혼이 상급부대 일정 변경으로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와 중복되어 고민이지…..?”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픈 곳을 콕 찌르는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어서 대대장은 “송영근이 육군 중위 한명 없다고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를 못 받을 것 같으냐?”라며 “개의치 말고 계획대로 결혼하고 휴가까지 충분하게 갔다 와라”하자 필자가 계획하고 협조한 ‘항공정찰과 연막작전’은 누가하냐고 반문했으나 막무가내로 기간에 맞추어 출발하라며 지시임을 강조했다. 대대장실을 나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본인의 대대장 근무를 평가받는 훈련을 앞두고 부하들을 배려하는 도량에 감동의 연속이었다. 생도시절 훈육관으로 인연도 맺었지만 직속 상관으로 모시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다음주 있는 대대전술훈련 평가 전인 토요일 결혼식을 앞두고 목요일까지 훈련 준비를 한 뒤에 야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인생에 한번 밖에 없는 결혼식도 소속된 부대훈련평가의 부담을 안고 치루게 되었다. 인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선의 해결방법은 필자 본인이 선택해야 했다. ▲ 필자의 결혼식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서울에 도착한 야밤에 처갓집 대문을 두드려 한밤자고 새벽에 다시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바로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다른 동기도 결혼 날짜가 중복되어 걱정했는데 성남 행정학교에서 교육받던 동기들이 많이 찾아와 풍성하고 행복한 인생 출발 행사가 되었다. 제주도 신혼여행도 간단히 마치고 월요일 밤에 부대에 도착하니 이미 전부대원은 주둔지 준비태세 평가를 마치고 야외 훈련장으로 나가 부대는 텅 비어 있었다. 복장을 준비하여 다음날 새벽에 훈련장 상황실 텐트에 도착하니 작전장교는 너무도 반가워하며 맞아 주었다. 상황실 텐트애서 필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은 송 대대장이 지휘관 텐트로 호출을 했다. 들어가자 대대장은 화를 내며 본인의 평가를 위해 부하의 인륜지 대사인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민망하다며 꾸중을 했지만 입가에 숨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결혼식은 성황리에 잘 끝냈고 제주도 신혼여행도 다녀와서 행사는 잘 치루었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항공 정찰 시간이 되어 사단 항공대로 출발해야 된다며 급하게 대대장 텐트를 빠져나와 짚차에 올랐다. 항공대로 이동하는 짚차의 스치는 바람도 미소 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항공대에는 지금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O-2기가 있었다. 고정익 항공기를 타고 공격 대기중인 적지역을 정찰하며 집결해 있는 적군의 위치도 파악하고 좌표를 불러주며 화력 요청한 뒤 부대로 복귀했다. 곧 통제관실에서 대항군의 항의를 접수했다고 한다. 항공기가 적군의 상공을 날자 사전 항공기 사용을 협조 안했다며 본인들이 요청 못한 것을 오히려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해 필자가 한달전에 요청한 항공정찰 중 한건을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마루리 했다. 공격간에는 대대원이 도로를 횡단하게 되어 사전에 사단화학대와 협조한 연막통을 도로에 피워 아군의 위치도 기만하면서 은폐 기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신없이 작전항공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어느덧 대대전술훈련평가(ATT)도 막을 내렸다. 이번 훈련에서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항공정찰과 연막을 활용한 것과 대대장의 창의적인 전술 능력이 돋보이는 훈련이었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수는 부하의 입장에서 배려하여 지휘해야 한다. 또한 적시에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의 啐啄同時(줄탁동시)가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1-06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3) ‘평양탈환작전’의 영광보다 전략적 실패 분석이 중요
    ▲ 평양입성 직후인 1950년 10월 19일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하는 백선엽 국군1사단장(왼쪽)과 10월 29일 오전 11시 평양시청 앞 ‘이승만대통령 평양입성 환영/탈환기념식’ (오른쪽)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 만큼은 국군이 먼저”, 평양탈환으로 전술적 승리의 영광 38선 돌파/북진 10여 일 지체와 간접접근 전략구현 미흡으로 전략적 실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38선 돌파시 맥아더는 북한 진공의 기본구상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있었다. “1. 제8군으로 서울 북방 지역에서 38선을 돌파, 평양을 향해 진공한다. 2.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한 후 원산에 상륙, 미 해병 제1사단은 중국과의 국경으로 북진케 하고, 미 제7사단은 평양 북쪽을 향해 서진케 한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으로 주력이 붕괴된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거의 없자 후방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3개 사단을 새로 편성, 우선적으로 평양 진입의 요충지인 금천 일대에 북한군 19ㆍ27사단을 배치하고, 해주 일대에 74사단을 배치했다. 따라서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지도부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더라도 유엔군은 38선 남쪽에서 멈춰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대와 달리 가장 먼저 10월 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부대인 1기병사단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조공인 국군 1사단은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향했다. 최초 군단의 예비임무를 부여받았던 백선엽 국군1사단장은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건의했다. “한국군과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적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데 한국군 부대가 빠져서는 안 된다.” 백선엽의 건의에 따라 최초 조공부대로 편성됐던 미 24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됐다. 또한 국군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치면서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줘 미군사단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케 했다. 미 1군단의 북진은 10월 9일 오전 9시,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항전은 결사적이었다. 곳곳에는 지뢰가 대량으로 매설돼 있어 11일까지 기병사단 공격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해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켰다. 그리고 10월 12일 아침, 마침내 기병사단의 2개 연대가 북한군의 후방 한포리를 점령했고 14일까지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했다. 결사적인 북한군의 평양방어와 국군과 유엔군의 선두부대 경쟁 1950년 10월 14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결사적인 저항은 평양을 방위하기 위한 것보다는 북한 수뇌부를 비롯한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금천전투가 치열할 때 강계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10월 16일 새벽 2시경 평양을 빠져나갔다. 이는 김일성을 호위하던 군관 한 명이 희천에서 국군7연대에 투항하여 알게 됐다. 김정일은 당시 10세였는데, 10일 전 이미 만주 장춘으로 피난했다. 평양에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 새벽, 평양을 출발한 김일성은 볼가라는 소련제 고급승용차를 이용하여 순천~개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그리고 희천에 이르렀을 때 난관에 부닥쳤다. 폭격으로 도로가 파손되어 승용차길이 막히고, 그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던 반공애국주민들이 습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 소식을 전해 듣고 내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 북한군 패잔병들을 공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려 찻길을 포기하고 산길을 이용해 10월 26일 강계 근처 별오리에 도착했다. 이후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 후인 1950년 12월 별오리에서 개전 이후 6개월간의 전쟁을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평양진격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이고 각 사단, 사단 내의 각 연대까지도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경쟁심에 불타 있었다. 특히 미 1군단 내에서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의 경쟁이 치열했다.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국군 1사단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오전 11시쯤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철교를 폭파했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폭파작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정확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그 동안의 지체가 불가피하게 됐다. 10월 20일, 날이 밝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반면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1사단은 도섭지점을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일 밤에는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ㆍ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평양탈환작전, 감청 당한 적 통신병 “도망쳐야갔시요.” 아무리 쫓기는 군대라지만, 평양만은 내줄 수 없다는 듯 적의 저항은 제법 완강했던 10월 18일 밤이었다. 적은 나지막한 언덕마다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하고 폭 넓고 종심이 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도로에는 갖가지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촘촘히 매설해 1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한동안의 공격에도 지동리는 좀체 뚫리지 않았다. 밤새도록 적진에 포격을 가했다. 고사포와 전차포를 총동원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적진이 조용해졌다. 진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백장군은 시가지에 무차별 포격을 막기 위해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평양에는 대동문, 을밀대, 연광정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많으니, 그런 곳에는 절대 포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일본의 교토만은 폭격에서 제외해 문화재를 지킨 사례를 알고 있었던 미군 지휘관들은 내 요청을 이해하고 잘 협조해 줬다. 평양 동남쪽 지동리를 돌파해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다 통신참모 윤혁표 대위가 버려진 적 진지에서 전화선을 발견, 인민군 총사령부와의 통신을 감청하다 적 통신병과 통화가 됐다. 백장군은 윤 대위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들고 “동무, 수고가 많소.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는 통신병이라 했다. 김일성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백장군이 “그럼 수고하라. 마지막까지 잘 버티라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적 병사는 “아닙네다. 지금 미 제국주의 땅크 수백 대가 몰려오고 있습네다. 도망쳐 나두 살아야 하갔시요”라고 했다. 적의 동요와 혼란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월 19일 지동리를 넘어선 1사단은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백장군은 그 광경을 “2개 보병연대가 길게 횡대로 전개해 적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들어간 그 순간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라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 19일 오전 10시 50분. 드디어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국군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 대통령,“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특명으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도 평양 조기입성 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국군부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소의 이견이 있다. “국군 7사단 8연대가 하루 먼저 평양을 점령했다”라는 주장도 있어 소개한다. 7사단 8연대가 평양으로 진격하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라는 밀명을 내림으로써 국군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이 평양진출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중 8사단은 19일 성천을 점령하고 이어 20일 강동을 점령했으나 그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사단의 진로를 돌려 덕천 방향으로 진출했다. 7사단 8연대는 18일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를 출발해 오후 8시 쯤 삼등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삼등을 출발한 8연대는 삼산리에서 대동강을 급속 도하한 후 19일 밤, 김일성대학에 도착하여 1사단 15연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본평양에 진입한 것이 된다. 그런데 8연대의 김일성대학 점령 시간이 18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7사단에서 편찬된 ‘상승부대사’는 참전용사의 증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김호규 대위가 지휘하는 8연대 3대대 9중대가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대동강 상류를 도하, 오후 9시쯤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해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김일성대학 옥상에 일착으로 태극기를 게양했고, 퇴각하는 북한군 1사단 및 수도방위사단을 포위·섬멸하는 쾌거를 이룩해 사단의 용맹을 떨쳤다.”라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을 감안해 군사편찬연구소가 2009년에 펴낸 ‘6·25전쟁사’ 제6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에는 관련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다.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에 국군 1사단 11·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7사단 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됐다.”  ▲ 평양에 입성하는 국군 및 유엔군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모습 [동영상 캡처] 평양탈환 작전은 전술적 성공했으나 38선 돌파 및 북진 10여 일 지체로 전략적 실패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전략,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 베트남전에서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이와 같이 전쟁 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상대편 국민들에게 전쟁패배 사실을 명확하게 심어주면서 저항의지를 상실케 하는 전략적 효과를 얻는 길이다. 반면 6·25전쟁의 사례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따라서 국군의 제2군단까지 가세한 평양점령은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한 이상 “북한의 중요도시를 점령했다”는 전술적 승리의 의미밖에는 없었다. 그때 만약 주력인 미 1군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평양의 동측을 크게 우회해 평양 후방의 순천이나 숙천으로 진출해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포위하여 김일성을 제거했다면 중공군 참전 명분도 없어지며 전쟁은 조기에 종결될 수도 있었다. 리델하트가 간접접근전략에서 제시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주공인 제1기병사단을 북한군이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금천 축선보다 비교적 미약한 전투력이 배치된 국군 1사단의 지역, 즉 토산-신계 축선에 투입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국군 제2군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1군단이 평양을 공격하는 동안 전속력으로 숙천-순천방향으로 진격해 북한군 철수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북한군 지도부가 안전하게 평양을 탈출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 이유는 유엔군이 9월 30일부터 38선에 근접한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기까지 10여 일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한 3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국군이 지연전을 펼칠 여유를 회복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재연되었다. 유엔군이 지체한 단 며칠 사이에 북한군은 3개 사단을 신편한 후 금천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물론 북진을 위한 유엔총회의 결의(10월 7일)가 필요했고, 낙동강에서 38도선까지 300여㎞를 불과 10여일 만에 진출한 탓에 부대 정비에도 다소 시간이 필요 했었다. 하지만 공격작전의 기세는 단 하루, 한 시간이 중요하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군단이 38선에서 지체함 없이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맥아더가 구상한 원산상륙 작전 부대보다 더 빠르게 동해안의 요충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굴러가는 바윗돌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멈춰 선 바윗돌을 다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것이 공격작전의 기세유지이며 주도권 확보이다.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한 우리 국군은 앞으로의 전쟁에서 전술적 승리보다 전략적 승리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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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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