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7(월)

소통시대
Home >  소통시대

실시간 소통시대 기사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3) ‘평양탈환작전’의 영광보다 전략적 실패 분석이 중요
    ▲ 평양입성 직후인 1950년 10월 19일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평양 탈환 작전을 설명하는 백선엽 국군1사단장(왼쪽)과 10월 29일 오전 11시 평양시청 앞 ‘이승만대통령 평양입성 환영/탈환기념식’ (오른쪽)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 만큼은 국군이 먼저”, 평양탈환으로 전술적 승리의 영광 38선 돌파/북진 10여 일 지체와 간접접근 전략구현 미흡으로 전략적 실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38선 돌파시 맥아더는 북한 진공의 기본구상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고 있었다. “1. 제8군으로 서울 북방 지역에서 38선을 돌파, 평양을 향해 진공한다. 2.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한 후 원산에 상륙, 미 해병 제1사단은 중국과의 국경으로 북진케 하고, 미 제7사단은 평양 북쪽을 향해 서진케 한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으로 주력이 붕괴된 북한군은 평양을 지켜낼 수단이 거의 없자 후방의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3개 사단을 새로 편성, 우선적으로 평양 진입의 요충지인 금천 일대에 북한군 19ㆍ27사단을 배치하고, 해주 일대에 74사단을 배치했다. 따라서 평양과 원산항을 제외한 기타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의 전쟁지도부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더라도 유엔군은 38선 남쪽에서 멈춰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기대와 달리 가장 먼저 10월 1일, 국군 1군단이 동해안에서 38선을 돌파했고, 유엔군은 10월 9일, 서부지역에서 38선을 돌파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평양이었다. 평양 점령을 위한 주공부대인 1기병사단은 최단거리 접근로인 개성-금천-사리원-평양으로 이어지는 1번 도로 축선을 따라 진격했다. 조공인 국군 1사단은 임진강의 고랑포 일대에서 시변리-신계-상원 축선을 따라 평양의 동측방으로 향했다. 최초 군단의 예비임무를 부여받았던 백선엽 국군1사단장은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건의했다. “한국군과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할 때 적의 수도 평양을 공격하는 데 한국군 부대가 빠져서는 안 된다.” 백선엽의 건의에 따라 최초 조공부대로 편성됐던 미 24사단은 군단의 예비가 됐다. 또한 국군 1사단이 공격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치면서 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전차증원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줘 미군사단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케 했다. 미 1군단의 북진은 10월 9일 오전 9시,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였기 때문에 북한군의 항전은 결사적이었다. 곳곳에는 지뢰가 대량으로 매설돼 있어 11일까지 기병사단 공격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해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켰다. 그리고 10월 12일 아침, 마침내 기병사단의 2개 연대가 북한군의 후방 한포리를 점령했고 14일까지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2개 사단을 섬멸했다. 결사적인 북한군의 평양방어와 국군과 유엔군의 선두부대 경쟁 1950년 10월 14일, 금천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을 격멸한 유엔군은 평양을 향해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중국까지도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속도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결사적인 저항은 평양을 방위하기 위한 것보다는 북한 수뇌부를 비롯한 주요기관과 부대의 철수시간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금천전투가 치열할 때 강계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10월 16일 새벽 2시경 평양을 빠져나갔다. 이는 김일성을 호위하던 군관 한 명이 희천에서 국군7연대에 투항하여 알게 됐다. 김정일은 당시 10세였는데, 10일 전 이미 만주 장춘으로 피난했다. 평양에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그날 새벽, 평양을 출발한 김일성은 볼가라는 소련제 고급승용차를 이용하여 순천~개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그리고 희천에 이르렀을 때 난관에 부닥쳤다. 폭격으로 도로가 파손되어 승용차길이 막히고, 그때까지 지하에서 활동하던 반공애국주민들이 습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엔군의 북진 소식을 전해 듣고 내무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 북한군 패잔병들을 공격했다. 김일성은 겁에 질려 찻길을 포기하고 산길을 이용해 10월 26일 강계 근처 별오리에 도착했다. 이후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 후인 1950년 12월 별오리에서 개전 이후 6개월간의 전쟁을 분석하고 대책을 논의했다고 한다 평양진격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이고 각 사단, 사단 내의 각 연대까지도 서로 먼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경쟁심에 불타 있었다. 특히 미 1군단 내에서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의 경쟁이 치열했다. 미 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공격하는 국군 1사단은 차량 부족으로 11일 아침에야 고랑포 정면의 38선 진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 후 시변리(13일)-신계(14일)-수안(16일)-상원·율리(17일)-평양 동남쪽 지동리(18일)-대동강 동쪽 도달(19일 아침)까지 미 1기병사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국군 1사단 12연대와 미 1기병사단의 선두부대가 대동강변에 도달할 무렵인 19일 오전 11시쯤 북한군은 대동강 인도교와 복선철교를 폭파했다. 미군 1개 대대가 교량에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그들의 폭파작전은 시기적으로 매우 정확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대동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하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그 동안의 지체가 불가피하게 됐다. 10월 20일, 날이 밝자 대동강 남쪽에서 공격하는 미군은 부교를 가설하고 본격적인 도하를 감행했다. 반면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은 자신이 어릴 때 수영을 배웠던 이 지역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1사단은 도섭지점을 도하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찾아 급속도하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일 밤에는 15연대가 도하장비를 기다리고 있던 미군을 제치고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에 진출했다. 이로써 국군 1사단은 제11ㆍ12연대가 동평양에, 제15연대가 본평양을 점령한 부대로 역사에 기록되게 됐다. 백선엽 장군이 말하는 평양탈환작전, 감청 당한 적 통신병 “도망쳐야갔시요.” 아무리 쫓기는 군대라지만, 평양만은 내줄 수 없다는 듯 적의 저항은 제법 완강했던 10월 18일 밤이었다. 적은 나지막한 언덕마다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하고 폭 넓고 종심이 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도로에는 갖가지 장애물을 설치하고 지뢰를 촘촘히 매설해 1사단의 접근을 막았다. 한동안의 공격에도 지동리는 좀체 뚫리지 않았다. 밤새도록 적진에 포격을 가했다. 고사포와 전차포를 총동원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적진이 조용해졌다. 진지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백장군은 시가지에 무차별 포격을 막기 위해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평양에는 대동문, 을밀대, 연광정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많으니, 그런 곳에는 절대 포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이 일본의 교토만은 폭격에서 제외해 문화재를 지킨 사례를 알고 있었던 미군 지휘관들은 내 요청을 이해하고 잘 협조해 줬다. 평양 동남쪽 지동리를 돌파해 대동교를 향해 진격하다 통신참모 윤혁표 대위가 버려진 적 진지에서 전화선을 발견, 인민군 총사령부와의 통신을 감청하다 적 통신병과 통화가 됐다. 백장군은 윤 대위에게서 전화기를 받아들고 “동무, 수고가 많소. 누구요”하고 물었다. 그는 통신병이라 했다. 김일성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그런 건 모른다고 했다. 백장군이 “그럼 수고하라. 마지막까지 잘 버티라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적 병사는 “아닙네다. 지금 미 제국주의 땅크 수백 대가 몰려오고 있습네다. 도망쳐 나두 살아야 하갔시요”라고 했다. 적의 동요와 혼란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월 19일 지동리를 넘어선 1사단은 평양을 향해 총진격을 개시했다. 백장군은 그 광경을 “2개 보병연대가 길게 횡대로 전개해 적도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 들어간 그 순간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라고 회상했다. 1950년 10월 19일 오전 10시 50분. 드디어 제1착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목적지인 대동교 입구 선교리 로터리에 국군1사단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이 대통령,“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특명으로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도 평양 조기입성 평양에 최초로 입성한 국군부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소의 이견이 있다. “국군 7사단 8연대가 하루 먼저 평양을 점령했다”라는 주장도 있어 소개한다. 7사단 8연대가 평양으로 진격하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17일, 정일권 총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양만큼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라”라는 밀명을 내림으로써 국군 2군단의 7사단과 8사단이 평양진출 경쟁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중 8사단은 19일 성천을 점령하고 이어 20일 강동을 점령했으나 그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사단의 진로를 돌려 덕천 방향으로 진출했다. 7사단 8연대는 18일 아침, 평양 동남쪽 40㎞ 지점의 율리를 출발해 오후 8시 쯤 삼등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9일 아침 삼등을 출발한 8연대는 삼산리에서 대동강을 급속 도하한 후 19일 밤, 김일성대학에 도착하여 1사단 15연대와 거의 같은 시간에 본평양에 진입한 것이 된다. 그런데 8연대의 김일성대학 점령 시간이 18일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7사단에서 편찬된 ‘상승부대사’는 참전용사의 증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김호규 대위가 지휘하는 8연대 3대대 9중대가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대동강 상류를 도하, 오후 9시쯤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해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김일성대학 옥상에 일착으로 태극기를 게양했고, 퇴각하는 북한군 1사단 및 수도방위사단을 포위·섬멸하는 쾌거를 이룩해 사단의 용맹을 떨쳤다.”라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을 감안해 군사편찬연구소가 2009년에 펴낸 ‘6·25전쟁사’ 제6권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작전에는 관련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다. “평양탈환작전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이래 만 11일 만에 국군 1사단 11·12연대가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가 동평양을, 국군 1사단 15연대와 국군 7사단 8연대가 본평양을 각각 점령함으로써 종료됐다.”  ▲ 평양에 입성하는 국군 및 유엔군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모습 [동영상 캡처] 평양탈환 작전은 전술적 성공했으나 38선 돌파 및 북진 10여 일 지체로 전략적 실패 리델하트의 간접접근전략,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 베트남전에서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월맹군에 의해 점령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이와 같이 전쟁 시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은 상대편 국민들에게 전쟁패배 사실을 명확하게 심어주면서 저항의지를 상실케 하는 전략적 효과를 얻는 길이다. 반면 6·25전쟁의 사례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따라서 국군의 제2군단까지 가세한 평양점령은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차단하지 못한 이상 “북한의 중요도시를 점령했다”는 전술적 승리의 의미밖에는 없었다. 그때 만약 주력인 미 1군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평양의 동측을 크게 우회해 평양 후방의 순천이나 숙천으로 진출해 북한의 전쟁지도부를 포위하여 김일성을 제거했다면 중공군 참전 명분도 없어지며 전쟁은 조기에 종결될 수도 있었다. 리델하트가 간접접근전략에서 제시한 최소저항선과 최소예상선을 이용한 전략적 기동이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주공인 제1기병사단을 북한군이 강력히 방어하고 있는 금천 축선보다 비교적 미약한 전투력이 배치된 국군 1사단의 지역, 즉 토산-신계 축선에 투입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국군 제2군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 1군단이 평양을 공격하는 동안 전속력으로 숙천-순천방향으로 진격해 북한군 철수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더라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북한군 지도부가 안전하게 평양을 탈출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 이유는 유엔군이 9월 30일부터 38선에 근접한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기까지 10여 일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체한 3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국군이 지연전을 펼칠 여유를 회복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재연되었다. 유엔군이 지체한 단 며칠 사이에 북한군은 3개 사단을 신편한 후 금천 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물론 북진을 위한 유엔총회의 결의(10월 7일)가 필요했고, 낙동강에서 38도선까지 300여㎞를 불과 10여일 만에 진출한 탓에 부대 정비에도 다소 시간이 필요 했었다. 하지만 공격작전의 기세는 단 하루, 한 시간이 중요하다. 동해안의 국군 1군단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군단이 38선에서 지체함 없이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맥아더가 구상한 원산상륙 작전 부대보다 더 빠르게 동해안의 요충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굴러가는 바윗돌을 멈추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일단 멈춰 선 바윗돌을 다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것이 공격작전의 기세유지이며 주도권 확보이다.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한 우리 국군은 앞으로의 전쟁에서 전술적 승리보다 전략적 승리가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실천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11-06
  • [직격 인터뷰]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경항모 도입과 신형 이지스함 SM-3 탑재 ‘지지’
    ▲ 지난 18일 오후 ‘뉴스투데이’를 방문하여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 [사진=이원갑 기자]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지난 10일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해군 국정감사에서 경항공모함과 F-35B, SM-3를 해군의 ‘3대 비상식 무기 도입’으로 규정하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와 관련, 해군 예비역 제독 중 작전 분야에 정통한 인물로 알려진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해군중장)과 지난 18일 인터뷰를 가졌다. 이 전 사령관은 대령 시절 제1함대사 작전참모와 광개토대왕함 함장을, 준장 시절 합참에서 해군작전을 전담하는 합참 작전2처장 직책을 수행했으며, 소장 시절에는 서해 바다를 수호하는 제2함대사령관을 역임한 명실상부한 해군작전 전문가로서, 현재 해양대학교 초빙교수로 활동 중이다. 일본 이즈모함 수준의 경항모 도입은 해군 작전능력 향상시켜 경항모 도입이 상식 밖이라는 지적은 너무 지엽적인 안목 Q1. 김종대 의원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을 염두에 두고 경항모를 도입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지적했는데, 맞는 얘기인가? A1. 김종대 의원께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저도 언론을 보고 많이 의아했다. 해군의 전력증강 방향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과 핵·미사일 위협을 대비함은 물론 주변국의 잠재적 위협도 함께 고려하며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가 주변국과 동등한 수준의 전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무력을 사용할 경우 자신들도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느낄 정도의 전력은 보유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수준일지는 비용 대비 효과 등 여러 요소를 판단해 결정하는데, 경항모 도입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항공모함은 배수톤수가 7만 톤 이상인 대형 항모, 4∼7만 톤인 중형 항모 그리고 4만 톤 미만인 소형(경) 항모로 분류된다. 경항모는 27,000톤인 일본의 이즈모함이 대표적으로 헬기는 물론 F-35B 12대 이상을 탑재할 수 있다. 우리 해군이 도입하려는 것은 일본의 이즈모함과 유사한 경항모다. 우리가 경항모를 갖게 되면 특히 전시에 상륙작전 능력이 강화된다. 상륙작전은 상륙군을 적지에 상륙시키는 이동수단과 상륙 과정의 화력 지원이 중요하다. 경항모는 전투기나 헬기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해상 플랫폼을 제공함으로 상륙군을 헬기로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고 전투기로 화력까지 동시 제공할 수 있어 상륙작전의 효율성과 즉응성을 높일 수 있다. 게다가 평시에 원거리 대양작전을 통해 해상교통로 보호, 재외국민 보호 등 해양에서 국익 보호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난민 보호 등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초국가적·비군사적 위협에 대응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맡아 공헌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국격에 맞는 책임을 다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경항모는 전시와 평시에 우리의 국가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해군 자산이다. 그럼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을 두고 경항모를 도입하는 것이 상식 밖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너무 지엽적인 안목이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대급’ 수직이착륙기 F-35B 도입은 경항모 도입 결정 이후 문제 Q2. 청와대가 F-35B 도입 검토를 지시했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도 비상식적이라고 비판했다. A2. F-35B는 스텔스 기능을 가진 항공기로서 현존하는 수직이착륙기 중 가장 우수한 전술기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F-35B를 도입하려면 경항모 도입이 먼저 결정돼야 한다. 또한 경항모 도입이 결정된다 하더라도 탑재할 항공기는 경쟁 기종 중에서 가격과 성능 등 여러 가지 요소를 평가하여 절차에 따라 획득된다. 따라서 경항모 도입이 결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F-35B 도입 검토를 지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만약 경항모 도입이 확정되면 설계 시부터 탑재할 헬기와 수직이착륙 항공기의 운영을 고려해 기존 함정보다는 훨씬 강한 선체로 비행갑판 및 격납고 등이 건조돼야 한다. 이에 대한 사전 검토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며, 탑재할 기종도 함께 검토해야 하는데 수직이착륙기 중 F-35B가 가장 우수하다 보니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경항모가 도입된다면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신속히 화력이 지원돼야 하며 이에 적합한 항공기가 도입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F-35B 도입 검토를 비상식적으로 치부하지 말고 이런 기회에 충분히 검토해 국익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 무엇인지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지스 구축함에 SM-3 탑재하면 사드보다 훨씬 유리하고 효율적 Q3. 해군이 신형 이지스 구축함(KDX-Ⅲ 배치-2)에 SM-3 탑재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서도 군사적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A3.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는 원거리·고고도 미사일 탐지 및 요격이 가능한 복합다층방어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원거리 탐지능력을 갖춘 이지스 구축함에 고고도 요격능력을 갖춘 SM-3를 탑재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도 극히 당연함에도 왜 군사적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현재 우리가 보유한 미사일은 40km 이하의 고도인 종말단계에서만 북한의 (핵·생물·화학무기 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일부 보완하기 위해 한·미간 합의로 사드(THAAD)가 배치됐는데, 만약 이지스 구축함에 SM-3가 탑재됐더라면 THAAD를 그렇게 급히 배치할 필요가 없었고, 한·중 및 남·남 갈등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SM-3는 함정에 탑재됨으로 지상에 배치된 THAAD보다 생존성이 훨씬 높고, 북한의 발사 징후를 탐지하면 최적의 요격 위치로 사전에 기동하여 요격 확률도 높일 수 있어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훨씬 많다. 또 북한 미사일을 고고도에서 요격해 핵탄두라 하더라도 잔해들은 대기권 진입 시 모두 소멸돼 잔해에 의한 2차 피해까지 막을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이 있다. 우리가 SM-3를 탑재할 경우 미국의 MD에 편입될 것이라고 우려하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의 MD에 편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천명해 왔고 독자적으로 KAMD를 구축 중에 있다. 중국에 대해서도 KAMD가 북한의 탄도미사일에 대한 대응임을 지속적으로 이해시키면서 이를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국형 차기구축함 전력화는 이지스함 작전능력 획기적 보완 Q4. 미니 이지스함으로 불리는 6천톤급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이 기본설계에 착수했는데, 전력화되면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나? A4. 우리 해군은 현재 3척의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작전·교육훈련·정비의 주기를 고려하면 실제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함정은 1척 또는 많아야 2척이다. 북한의 위협이 고조돼 긴급히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전력 부족으로 작전 공백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기동부대 작전 시 대탄도미사일 작전과 기동부대방어를 위한 대유도탄대항 작전 등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이지스 구축함이 1척뿐이면 함정에게 매우 큰 부담을 주게 된다. 따라서 적어도 2척 이상 이지스 구축함이 편성돼 각각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함정이 부족해 그렇게 운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지스 체계를 탑재한 차기구축함이 추가로 건조되어 작전에 투입된다면 우리 군의 북한 탄도미사일에 대한 탐지 및 요격 능력이 크게 향상됨은 물론 기동부대의 생존성 향상에도 기여함으로서 해상작전 능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핵잠수함, 북한 SLBM 발사 잠수함 대응 효과적...NPT 위배 안 돼 Q5. 일부 반대의 목소리도 있지만 핵잠수함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A5. 잠수함은 은밀성이 생명이며, 은밀성이 극대화 된 잠수함은 적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 은밀성을 가지려면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장시간 수중작전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재래식 디젤잠수함은 밧데리 충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스노켈(snorkel) 항해를 해야 하며, 그 시간이 가장 취약하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핵추진잠수함(핵잠수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핵추진잠수함을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핵잠수함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해군이 보유하려는 핵잠수함은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이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이다. 핵추진잠수함은 재래식 잠수함보다 기동성과 은밀성이 매우 우수해 적 잠수함에 대한 감시, 정찰 및 추적에 유리하다. SLBM(수중발사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북한 잠수함을 탐지하고 격침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전력이 될 수 있다. 핵추진잠수함을 보유하면 주변국의 잠재 위협에 대한 억제에도 아주 유용한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핵추진잠수함 건조가 핵확산금지조약(NPT)과 IAEA 안전조치에 위반이 아니냐며 우려하지만 NPT에서는 잠수함 추진용으로 사용하는 핵물질을 규제하지 않으며, IAEA 안전조치 적용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따라서 핵잠수함은 우리 안보 현실에 매우 적합한 무기체계로서 앞으로 보유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주력해야 한다. ※ 이기식 전 해군작전사령관(예비역 해군중장)은 현재 해양대 초빙교수, 한국해양연맹 부총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합참 군사지원본부장, 해군사관학교장, 국방정보본부 해외정보부장, 제2함대사령관, 합참 작전2처장, 제51대잠수함전대장, 한국형 구축함 1호인 광개토대왕함장 등을 역임했다.
    • 소통시대
    2019-10-2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2) ‘국군의 날’이 된 ‘3사단의 38선 돌파’ 비사(秘史)의 교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난 15일 북한 평양에서 '남북 대결'로 펼쳐진 월드컵 예선이 무승부로 끝났다.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는 이 결과를 "남북 모두를 살린 최선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날 북한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수령 우상화 작업을 언급하면서 "13일은 북한의 체육절이다. 만약 축구에서 졌더라면 최고 존엄(김정은 국무위원장) 얼굴에 똥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10-17
  • [직업군인사용설명서](45) YTT(yesterday, today, tomorrow)에도 통하는 별보고 영어하는 능력
    ▲ 좌측 KM180 도로대화구 폭파킷(Cratering Demolition Kit) 등을 이용해 도로를 폭파한 우측장면 [사진제공=국방부] 대성산 계곡 2천평 하늘엔 은하수 등 수 많은 별들이 수고했다고 격려….. ‘군단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창의적으로 준비하여 성공적 개최 어제, 오늘, 내일도 통하는 별보고 영어하는 근무는 성공의 지름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인생에 있어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성공의 첩경이다. 필자가 초급장교로 대대교육장교로 근무할 때 사관생도시절 훈육관 송영근 중령(전 기무사령관/국회의원)을 지휘관으로 모시며 군생활의 기본을 다졌다. 당시 대대장은 영어에도 능통하여 연합사에서 고위 방문객이 오면 사단에서는 당연히 대대작전지역으로 안내하여 작전계획과 전투준비를 설명하게 유도했다. 가을이 다가오자 군단에서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보이라는 지시가 사단으로 떨어졌고 자연스레 필자가 소속된 송영근 대대가 그 책임을 맡았다. 사실 겨울이 다가오면 전방 부대원들은 몹시도 바빠진다. 당시에는 생활관 창문이 허술해 비닐을 구입하여 문풍지를 발라 혹한의 추위에 대비하고 난방용 베치카에 사용할 조개탄 등 석탄도 창고에 쌓아 저장해야 한다. 또한 눈이 내리면 도로 개통을 위해 산에서 싸리를 채취해 빗자루를 만들고 넉가래도 추가로 제작한다. 특히 격오지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겨울내내 먹을 식량과 유류도 미리 공급받아 비축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동계에 북한군이 침투하거나 남침전쟁을 재발하면 막아낼 수 있도록 경계진지에 보온 발판을 준비하고 주요 접근로에 지뢰공(겨울에 땅이 얼기 때문에 미리 구멍을 파놓고 짚이나 병으로 채워 놓는 것)을 중대별로 수백개씩 설치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특히 도로에 큰 웅덩이가 패어 있다면 자동차는 물론 전차나 장갑차 등도 계속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비행장의 활주로에 패어 있다면 항공기는 당연히 이·착륙할 수 없다. 이처럼 도로나 비행장 등을 이용하려는 적의 기동을 ‘차단’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폭약(폭탄)으로 만든 웅덩이를 대화구(大火口, 분화구, Crater)라 하며 이를 설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동계작전 준비였다. 그날도 대대장과 작전장교와 함께 실물을 준비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떻게 효율적으로 많은 인원들에게 설명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를 했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 다음날 일과도 고려해 일단 퇴근하기로 했다. 피곤함이 양어깨를 짓누르지만 부대 옆에 있는 관사를 향해 같이 걸어나오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대성산 계곡 2천평 하늘엔 은하수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별들이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 좌측 동계에 근무중인 GOP 초소와 보급로상에서 넉가래와 빗자루(필자근무시에는 싸리빗자루)로 제설 작업하는 모습[사진제공=국방부] 일단 시범준비를 하여 대대장은 사단장께 계획보고를 했고 잘 준비했다는 칭찬을 들었으나 왠지 배가 고팠다. 사단보고를 마치고 다시 얼굴을 맞대고 고민을 했다. 보다 창의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결국 ‘도로대화구 설치킷’을 준비하기로 했다. 도로대화구를 설치하면 전선이 도로에 노출되어 장갑차들이 통과하면 절단되어 기능을 발휘 못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철파이프를 준비하여 사전에 전선을 넣고 매설하면 절단을 방지할 수 있었다. 시범당일 많은 인원들이 모였다. 인접 사단장을 비롯해 모든 지휘관 참모들이 두눈을 반짝거리면서 지켜보았다. 지금은 대형스크린이 있어 빔으로 쏘면 충분히 볼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돌림판을 이용하여 전지 3장을 붙여 큰 글씨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대장의 브리핑을 하면 화면을 돌려 다음화면이 나오게 하고 현화면을 설명하는 동안 뒤에서 설명이 끝난 자료를 제거하고 새판이 나오도록 해야하는 일은 필자의 몫 이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전시물을 관람할 때에는 정말 흐뭇했다. 매년 연중행사로 반복되는 시범이 아니라 동계작전 및 전투준비를 고민하고 ‘도로대화구 설치킷’을 최초로 창안하여 제시한 것이 대히트였다. 인접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시범과 똑같이 동계작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모습에서 밤하늘 별을 보면서 치밀하게 준비했던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보다 창의적으로 착안하는 송영근 대대장의 혼신의 노력에 존경심을 같게 했다. YTT(yesterday, today, tomorrow)어제, 오늘, 내일도 통하는 별보고 근무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영어도 잘하는 능력은 성공의 지름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0-16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1) 9.15일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된 다부동 볼링장전투
    ▲ 경북 칠곡에 위치한 한반도 최초의 전차전을 승리로 이끌어낸 좌측 다부동전투 기념비와 우측 기념관 및 볼링장전투의 영웅들(김점곤, 김동빈, 마이캘리스 대령 등)조형물 [사진=김희철] 핀(전차) 향해 질주하는 포탄들이 볼링공을 연상시킨 최초의 전차전 '볼링장 전투' '빈틈없는 용장' 김점곤 .. 6·25 남침전쟁의 전세 뒤집은 1사단 다부동 전투 영웅 다부동전투 승리는 연합군의 과감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로 작용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 남침전쟁시 ’50. 8. 3일부터 9월초까지 지금의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일대에서 사생결단의 결전이 벌어졌다. 한반도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등이 이끄는 국군이,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이곳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남한은 북한의 적화통일을 막고 추후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당시 한국군의 사활이 걸린 전투였고 결국 수비에 성공했다. 이 다부동 볼링장전투는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리고 있다. 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월 1일 낙동간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월 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천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 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마산을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을 돌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다. 김일성 군대의 사활을 건 몸부림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전선을 뚫기가 몹시 어려웠다. 대구에 있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는 마음이 급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상하지 못하면 인천상륙작전은 그만둔다"고 했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이 주목을 받았다. 방어의 선봉에 있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 그 예하의 12연대는 김점곤 중령이 맡고 있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하지 못하면 인천을 통해 뭍에 올라온 미 해병대가 고립을 면치 못하리라 봤다. 인천을 포기하면, 다음 상륙 예정지는 군산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훨씬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 낙동강전선 작전도와 다부동전투의 영웅 故 김점곤장군 영결식 모습(동영상 캡처=김희철) 제1보병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생고생하며 낙동강을 도하했다. 낙동강을 건넌 1사단은 제15연대를 인동에, 제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제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인민군이 1사단을 추격하여 인민군 제13사단이 낙동리로, 제15사단이 구미시로, 제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시에 인민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국군은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제6보병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인민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12연대는 견제력을 상실했다. 이날 22시에 강정 나루터로 인민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인민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시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그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시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당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는 왜관 북쪽 6.5km를 기점으로 하여 11, 12연대를 5내지 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구간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90~100%, 병력은 70%나 추가되었고, 뿐만 아니라 T-34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인민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의 삽질(...)로 2군단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하려 하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탈취하는데는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 국군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등 혈투를 벌였지만 12연대는 유학산 탈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에 백선엽은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인민군이 대구(당시 대구에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없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다. ▲ 다부동전투가 벌어진 천평리(볼링장)계곡의 1사단 각연대와 미27연대 작전배치도(자료=김희철) 맥아더 원수는 다부동 융단 폭격, 국군 15연대는 여세를 몰아 328고지 탈환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왜관 및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어쨌든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백선엽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인민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보병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인민군은 반면에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15사단을 20일 영천으로 돌렸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 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증원된 마이캘리스 대령의 미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18일에는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21일에는 야간침투를 시도하는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기타 차량들을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격파하여 5시간만에 격퇴시켰다. 또한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두었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이곳의 좌표를 알려준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제8포병대대도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이날 목숨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저지전을 펴며 전차전을 볼 수 있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 및 SU-76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져 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Y선으로 지정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위에 언급되었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지고, 이 Y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할 때 혼란스러운 낙동강 방어선의 진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 이러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국군 전사자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김점곤은 끝없이 샘솟는 예비대로 12Km를 북진, 미 위커장군도 놀라며 찬사보내 볼링장전투 승리는 연합군에게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됨 이후 장맛비가 내리던 1950년 9월의 어느 날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졌다. 혈로를 뚫고 국군 1사단 12연대장 김점곤 중령이 12㎞를 북상했다. 대구 북방 팔공산 자락에서 경북 의성까지였다. 워커는 1사단 백선엽 장군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뚫었단 말이냐? 정말 대단하다"는 찬사였다. 미 8군이 유일하게 보유한 고사포 여단, 국군 1사단 12연대의 보병 전력이 절묘하게 결합한 작전 덕분이었다. 게다가 분명히 연대에 속한 대대는 3개가 기본인데 12연대는 추가로 2개 대대를 더 가지고 있었다. 연대장이 주변의 낙오병들과 학도병 500명 등으로 예비대대를 편성했고 추가로 150명의 여고생들까지도 후방요원으로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김점곤은 사단장도 모르는 '끝없이 샘솟는' 충분한 예비대를 활용하여 워커장군이 감탄한 적진 돌파로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결국 백선엽 장군의 천하제일 1사단은 이 어려운 상황을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국군과 UN군의 피와 죽음, 희생으로 결국 승리한 다부동전투에서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냄에 따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하였고,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국군에겐 계속 밀리던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해준 결정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최초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한 것도 중요한 점인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됨에 따라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한미간 상호신뢰감도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부동 볼링장전투의 승리는 연합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과감히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10-1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4) 이웅평의 미그19기 귀순사건이 만들어낸 '불타는 용사'의 교훈
    ▲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조선인민군 공군 이웅평 상위가 지난 1983년 3월 4일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과 그가 몰고온 미그 19 전투기. [사진제공=국방부]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북한공군 고(故) 이웅평 상위 천문학적인 보상금과 명예 얻었으나 수술 부작용으로 48세에 요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3년 2월 25일 당시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대한민국 공군의 대위에 해당)였던 고(故)이웅평은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하였다. 로켓 사격 훈련을 위해 10시 30분 평안남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한 미그19 전투기는 갑자기 편대를 이탈하여 남쪽 방향으로 기수를 돌렸다. 행로를 이탈한 미그기는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해 고도 50~100m를 유지하면서 시속 920km의 전속력으로 남하, 10시 45분 황해남도 해주시 상공을 지나 연평도 상공의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었다. 미그 19 전투기가 남한영역에 들어오자 놀란 민방위 관계자는 그날 오전 10시 58분경에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는 경보 방송을 울렸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무장을 갖추는 소동이 있었다. 당시 팀스피리트 훈련을 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방공망에 미그19 전투기가 포착되자 공군의 F-5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미그기는 날개를 흔들어 귀순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F-5기는 미그기를 유도해 11시 4분 수원 비행장에 착륙하여 귀순하였다. 미그기를 타고 귀순한 이웅평은 귀순하여 천문학적인 보상금(공산 진영의 군수품을 가지고 올 경우 장비에 대한 보상을 하도록 한 법률에 따라 MiG-19기로 무려 15억 6천만 원, 현재 가치로 대략 수백억 원 수준)도 받고, 결혼도 하고, 대령으로 진급하여 공군대학교관으로 명예까지 부족할 것 없는 선택과 삶이었는데 간이식수술 부작용으로 48세로 요절했다. ▲ 조선인민군 공군 상위 이웅평의 귀순 당시모습과 대령 진급후 공군대학 교관 시절 모습[사진제공=김희철] 타성에 젖은 매복작전으로 납득이 안되는 교통사고 발생 진지 투입시 무거운 실탄 대신 종이 카드 수령하기도 필자가 소대장을 마치고 대대 작전항공장교(교육장교로 통칭) 직책을 시작했을 때 GOP후방종심 매복작전에 투입했던 병사가 야간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도 오후 늦게 상급부대의 추가 업무사항이 하달되어 보고서 준비 때문에 야근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매복작전조에서 긴급 무전이 날라왔다. 작전중이던 병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 앰블란스를 보내달라는 전문이었다. 대대장에게 보고를 하고 군의관과 앰블란스를 보냈다. 현장에 긴급 출동한 해당 중대장은 다행이 피해자는 어깨가 골절만 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보고를 해왔다. 사단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매복작전간 교통사고에 대해 감찰조사가 나왔다. 감찰조사 확인 결과 매복지점 산 정상에는 있는 미군의 라지트 기지로 투입하는 차량이 도로에 인접한 매복조를 발견하고 노출을 피해 차량 라이트를 소등하고 이동하다가 매복진지에서 팔을 내놓고 가면을 취하던 병사의 어깨를 치었던 것이었다. 마침 차량의 진지방향에 있던 차폭등이 꺼져 미군 운전병이 병사를 식별 못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차량 바퀴가 1센티만 더 들어 갔으면 머리를 치고 지나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매복진지 선정의 부적절함과 매복작전 중이던 병사들의 타성이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이 발령되어 진지에 투입할 때는 탄약을 휴대해야 하는데 통상 훈련시에는 실제 탄약 대신 탄약고에서 종이 카드를 수령하여 지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는 탄약을 꺼내는 것도 복잡하지만 산 정상에 배치된 진지까지 휴대하고 이동하면 분실 및 관리에 어려움 때문이었다. 또한 병사들도 완전군장에 식량, 탄약까지 무겁게 휴대하고 1시간 넘도록 산정상 진지로 올라가야 함으로 실제 탄약보다는 종이카드를 선호했다. 말 그대로 타성과 관례에 젖어 훈련 및 작전에 임하니 매복작전간 웃지 못할 교통사고도 발생하는 실정이었다. 이웅평 월남 당시 경고방송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 타성과 게으름에 젖었던 '철없는 병사들' 탄약과 수류탄 더 받으려고 아우성 하지만 1983년 2월 25일 방송에서 "서울, 인천, 경기도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라고 발표하고 상급부대에서 비상이 발령되자 상황은 달라 졌다. 당시 부대는 이웅평이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월남한 사실이 전파되지는 않은 상태로 전쟁이 곧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병사들은 완전군장으로 진지로 투입되기 시작하자 탄약고를 관리하던 병기관이 바빠졌다. 종이카드로 탄약을 대치했던 과거 훈련시의 모습은 없어지고 각개병사들은 훈련시 무거워서 카드로 대치했던 탄약과 수류탄을 한발이라도 더 받아서 진지에 투입하려고 아우성이었다. 타성에 젖어 안일과 편리함만을 추구했던 게으르고 요령만 피우던 철없는 병사들은 찾을 수가 없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임무를 완수할 차비에 매진하는 용사들의 불타는 전투의지만 보였다. 반드시 훈련은 실전 같이 해야 한다. 따라서 간부와 리더들의 훈련 및 업무에 임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 군대나 사회조직에는 “나쁜 부대는 없다. 오직 나쁜 리더만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bad troops. What is there are only bad leaders.)”라는 영어 격언이 떠오른다. 작금의 국제정세와 대북관계가 어려운 상황에 접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현명한 리더와 미그기 귀순 사건시 보여준 것처럼 불타는 전투의지의 용사들이 꼭 필요한 때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9-25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10) 남부군 이현상과 백골병단 채명신의 유격전
    ▲ 이현상의 ‘남부군’ 영화 포스터와 백골병단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과 ‘HID36지구대’ 김동석 대령과 딸 가수 진미령 모습. [사진=김희철] 6.25남침전쟁시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유격전 전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25남침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교전한 전선 뿐만 아니라 후방지역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혈전이 치루어 졌다. 유격전으로 유명한 부대는 북한군의 경우, 영화화된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이고 우리는 채명신장군의 ‘백골병단’있었다. 또한 서해쪽에서는 1950년 12월 故 김종벽대위가 창설한 ‘구월산 유격대’로 황해도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백령도로 철수하여 1954년까지 활동한 ‘동키부대’가 있었다. 동해쪽에서도 물쥐대장이라 불리면서 인민군 17사단장까지 생포해 전향시키며 1954년 2월까지 정보활동 및 유격전 활동을 한 김동석 대령의 ‘HID36지구대’도 있다 . 처절했던 이현상의 '남부군(남조선 인민 유격대)’ 활동 이현상은 실존인물로 빨치산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존재로 알려진 사람으로 일반인들에게는 "남부군"이 소설과 영화로 소개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해방이후 남로당의 무장투쟁 전술에 의해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의 후퇴에 따라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가면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투쟁을 벌여오던 이현상 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광범한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현상 부대는 유엔군의 9.15 총반격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북상하여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하였다.당시 후평리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박헌영의 오른팔로 휴전후 7일만인 8월5일 평양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총살됨)은 이현상, 여운철 등과 함께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무장투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여운철에게는 6개도당의 지도권이 위임되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 이승엽은 후평리에 모인 유격대와 인민군 후퇴시 잔류한 군인,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에 '남조선 인민 유격대'(통칭 남부군)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현상의 지휘 아래 남하한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인민여단 혁명지대와 그 직속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충북 단양지구로 내려와 문경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유엔의 공격을 받고 제천지구로 이동했다가 51년 2월 초 속리산까지 내려와 활동하다가 덕유산을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51년 5월 중순 송치골에서 6개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6개도당회의 이후 남한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였다. 대표적인 빨치산이었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비밀아지트(비트)였던 지리산 빗점골에서 1953년 9월18일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이것은 우리쪽의 공식 기록이지만 그가 자살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그는 1925년 박헌영 밑에서 김삼룡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남로당의 거물급 인사였으며 한국전쟁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각종 빨지산 유격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같은 남부군 빨치산은 인민군 퇴각이 있던 1950년 10월중에는 2만5천명(38선 이남 1만명, 이북에 1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국군도 더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 ‘50년 10월 중순부터 강원도와 영남 지역, 호남 지역에서 조직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3개사단, 4만명의 인원을 동원한 것이다. 이듬해인 ’51년 1월 20일 당시 창궐한 전염병으로 남부군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도당위원장 박종근은 ’51년 5월3일자로 부수상 허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동안 제3 유격지대(일월산.보현산 일대) 편성을 위해 노력했으나 빨치산 당일꾼들이 대부분 전염병을 앓고 있다"며 1,000명의 인력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남부군 빨치산들의 최후가 다가왔다. ‘56년까지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전선없는 전쟁이 계속됐지만 북측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빨치산으로서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1956년 7월13일 전북 정읍에서 빨치산 1명 사살, 2명 생포. 이로써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은 정부 공식 기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방군사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국군이 전쟁기간중 3개 사단을 빼돌렸을 만큼 남부군 빨치산의 무장 투쟁은 나름대로 효과를 거두었다"며 "휴전 이후 남로당계의 숙청으로 남부군 빨치산에 대한 북측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그들의 무장 투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 있는 백골병단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묘비와 인제군의 전적비 [사진제공=김희철]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던 채명신의 ‘백골병단’ 활동 2013년 11월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에서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그는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후, 남침 했던 인민군 패잔병들을 북한 전선사령관 김책의 명령으로 유격부대로 개편하자, 유엔군사령부는 이들에 대응하기 위한 유격전을 감행하기에는 피부, 언어, 지형 등을 이유로 유격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고충을 육군 수뇌부에 전달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보충대에 대기중인 장정 중에서 유격 특수전을 수행할만한 신체 건강하고 사상이 확고한 결사대원을 징병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때, 육군본부 정보국은 육군 보충대에 수용중인 의용경찰관, 철도경찰,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 현역 군인으로 낙오된 병사 등에서 충원하기로 했다. 이들 의용경찰 등 모두를 대구 소재 육군보충대에 입소시킨 병력자원은 6,000여명 중에 1차로 710명, 2차로 300여명을 특수작전을 수행할 결사대 요원으로 선발하여 육군정보학교에 입교시켜, 유격 특수전을 위한 ‘무장첩보 및 유격전에 필요한 교육’을 1951년 1월 25일까지 3주간의 실시하고, 각각 작전명령에 따라 적후방에 침투시켜, 적의 게릴라화 된 부대에 대응한 특수부대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백골병단'이란 참전장병 모두가 백골이 되겠다는 기개를 과시하고 적에게 무시무시한 부대로 인식되게 함과 동시에, 병력의 수를 군단급 보다 큰 집단군급으로 과장하기 위하여 병단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완벽할 만큼 북한군 행색으로 위장하여 제1진 363명이란 병력을 현역 육군중령의 직접 진두지휘하에 적진 후방지역으로 침투한 것은 건국이래 최초의 작전이었다. 백골병단은 ‘결사 제11연대’인 제1진 363명을 1951년 1월 30일 육군중령 채명신이 직접 지휘하여,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육군 수뇌부의 격려를 받으며, 국군 제7사단 전방 지휘소에서 평창 정선 방면의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였다. 2월 7일에는 제2진 ‘결사 제12연대’ 330명이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강동지서앞까지 도착하자 육해공군 총참모장 육군소장 정일권, 지역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 지역 작전부대인 수도사단장 송효찬 준장, 주한 미 군사 정보수석 고문관 미육군중령 하우스만, 한국 육군본부 정보국 3과장 등이 출진 장도를 격려하는 사열과 선서·훈시 그리고 보급수령후 강릉 구정방면으로 출동하였다. 제3진으로 출동한 ‘결사 제13연대’ 124명은 부산항에서 미해군 수송함(L.S.T)에 승선하여 동해 묵호항에서 하선, 명주군 성산면 대관령 경유, 횡계 방면으로 이동, 월정사 방면으로 침투하여 2월 20일 삼산리에 도착함으로써 3개부대가 합류·통합되었다. 1월 30일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서 적후방으로 침투작전을 개시한 ‘결사 제11연대’는 2월10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에서 적 3군단 예하 병력 34명을 생포하고, 비상식량을 보충함을 시작으로 2월27일 작전참모 전인식 대위 지휘하에 3개소대(대원 9명과 장교 1명)를 구룡령 차단작전에 투입하여 작전중, 인민군 69여단 정치군관 대위 외 중위, 특무장, 전사 등 4인을 생포하여, 69여단의 전투상보와 기타 주요 기밀사항을 적 3군단에 보고하려던 1급 기밀문서를 압수·노획하여 이를 강두성, 장인홍 보좌관 외 2인으로 하여금 아군 수도사단에 신속히 전달하여 적을 괴멸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3월 18일 인제군 인제면 가리산리 필례 마을일대에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 인민군 중장 길원팔과 빨치산 제5지대 참모장 인민군 대좌 강칠성 등 참모진 13명 전원을 생포 및 사살했다.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때 길원팔과 채명신장군의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 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는데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 고 말하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고아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는데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을 추가했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 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훗날 남쪽으로 복귀 후 채 장군은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키며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특히 참군인이자 남자 중 남자인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백골병단은 적생포 309명, 사살 174명, 권총 9정, 다발총 17정, 장총 178정, 계 204정의 무기를 노획하고, 군관증 11, 노동당 당원증 40여매, 인민위원회 조직표 5점, 694 무전기 1대와 통신 암호문, 김일성의 직접지령문 등을 노획함으로써 적의 전의 상실과 후방지역의 혼란을 조성케 하여 상대적으로 아군작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장비·보급으로 미루어 14일 이전까지 작전을 끝내고 귀환해야 했으나 그들에게 부여된 작전명령은 보급의 현지조달을 통해, 계속 작전하게 하였으므로 생존성의 보장은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백골병단은 14일분의 비상식량으로 60여 일간의 전투를 감행하고 1951년 3월 24~25일 사이에 굶고 허기진 동·아사자 120여 명의 비전투 손실도 발생하게 되었다. 종합해보면 백골병단으로 통합된 총병력 647명중 희생 364명(56.3%), 귀환·개선 장병 283명(43.7%)으로 파악되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간의 유격전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남침전쟁은 같은 민족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쓰라린 민족의 비극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은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 5천명이 전사하고 44만 3천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또한 8,333명의 군인들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생을 하다가 포로교환 시에 생환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함구하고 있지만 최근에 공개된 소련 측의 자료에 의하면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 말에도 약 4만 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에 억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행한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총 규모는 당시 금액으로 4,123억 원에 달한다. 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들의 군대가 이 전쟁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에 입수된 구 소련의 자료에 입각한다면 최소 약 38만 명의 북한 군인이 전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계산해낼 수 있다. 부상자에 관한 자료는 없지만 이 보다 훨씬 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음에 틀림없다. 또한 75,823명의 북한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구 소련의 자료에 의한다면 80만 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 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북한의 재산피해는 4,201억원에 달한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받고 있는 이산가족이 2천만 명에 다다른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은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군사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제 2의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해서 굳건한 안보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9-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 국제신사를 '철면피'로 만든 최전방 오지
    ▲ 사관생도 시절 스스로를 '국제신사'라고 칭했던 육군 소위들은 전방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혼한 선배의 집에 찾아가 물펌프질을 해주고 '회포' 푸는 '철면피'가 되곤 했다. [사진제공=김희철/동영상캡처] 군부대 자유시간 핸드폰 허용, 필자의 초급 장교 시절엔 상상도 못할 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금년 4월부터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일과 후 자유시간과 휴무일에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게 허용되었다. 덕분에 가족들과 연락을 할 수 있고 또 자신의 발전을 위해 정보도 쉽게 접촉하게 되어 병사들은 대단히 만족한다. 하지만 음란물 시청, 도박, 부대 보안에 취약함 등이 제기되어 재검토가 필요한 실정이다. 게다가 병사들의 평일 외출도 허용되었고 위수지역 통제도 지역 개념에서 2시간 내 지역으로 완화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최전방에서 근무할 때에는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 필자가 초급장교 시절, 당시에는 지금의 혜택은 생각도 못 했고 서울에서 부대까지 이동하려면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무수한 검문소에서 헌병과 마주치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서울로 나올 때는 더욱 검문을 심하게 했다. 게다가 비포장 도로로 덜컹거리는 덕택에 흙먼지가 밀려들어오는 차안에서 멀미와 싸우며 긴 시간을 가야했다. 부모님이나 애인이 면회를 갈려면 하룻 밤을 잘 각오로 가야했다. 특히 최전방 GOP지역에서는 출입 통제로 가족들을 볼려면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식당없는 전방 오지 근무, 결혼한 선배집을 선술집으로 만든 '철면피' 되기도 식당이나 주점이 거의 없는 전방 격오지의 퇴근 후에나 휴일에는 마땅하게 소일할 거리가 없었다. 서울까지 나오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같은 대대에 통신대장으로 함께 근무하던 동기(안철주 중위)와 1시간을 걸어 민간마을로 내려가면 마땅히 들릴 곳이 없어 쉽게 찾는 곳은 결혼한 동기생집 이나 선배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방문한 집에 동기나 선배가 없더라도 가족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남편 없이도 저녁 밥을 차려주어 대접을 했다. 시골 쪽방 셋집에서 고생하는 선배/동기의 가족이 안스러워 물가에 가서 펌프질을 하여 식수나 용수를 길어주는 등 약간의 봉사만 하면 그날은 맛있는 삼겹살로 배불리 한 끼를 때우고 늦게 퇴근한 선배와 소주까지 곁들여 회포를 푸는 날이었다. 사관생도 시절 국제신사라고 자부했던 육군 소위들은 철면피와 철판으로 변해 있었다. 식당 없는 전방 오지의 선배와 동기집을 하도 자주 찾아가서 선배집을 선술집으로 만들었고, 신사도와 체면도 없는 철면피/철판 인간이 되어 폐를 끼쳤다. 몇 년이 지나 필자가 결혼하자, 내가 했던 행동은 그대로 나에게 적용되었다. 전방을 찾아오거나 전입온 선후배들도 똑같이 결혼 후 마련한 필자의 셋방집을 수시로 찾아왔다. 그 동기와는 지금도 철판, 철면피라고 서로 부르며 미소를 짓고, 내 집사람도 그때 일들을 회상하면 힘들지만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 철면피와 철판이었던 동기생 안철주와 시외버스에서 헌병이 검문하는 모습 [사진제공=김희철/동영상캡처] 지나친 규제는 위법을 양산하고, 이완된 규율은 방종과 무질서를 낳아 국제신사를 철면피와 철판으로까지 만들며 폐를 끼쳤던 선배의 가족은 아직 짝이 없는 후배가 안타까워 대학 후배나 친척을 소개 시켜주어 평생 반려자가 된 사례도 많았다. 필자도 인접 소대장 유승한중위(학군19기)의 동생을 소개 받아 지금의 내 짝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만남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최전방에서 결혼했다면 우선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게 된다. 간혹 근무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지금의 처남)는 내게 소개를 해주기 위해 휴일에 서울을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에는 엄격한 위수지역 통제로 서울을 갈려면 증명서가 필요했다. 무수한 검문소에서 헌병들이 증명서를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출장을 신청하여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복잡하고 잠깐 휴일을 이용해서 다녀오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정권이 있는 연대나 포병대대의 인사장교들에게서 출장증을 몇장씩 확보하고 비표를 확인하여 증명서를 임시로 작성하여 이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마침 선배 소대장이 증명서를 제공해주어 그 친구는 무사히 서울에서 지금 내 가족의 사진을 가져왔고 필자는 사진을 보고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위수지역이 시간개념으로 교통도 편리해져 2시간내 복귀할 수 있는 서울을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당시의 지나친 규제는 헌병 검문을 통과하기 위한 또다른 위법을 양산하고 있었다. 사실 그 위법 행위 덕에 필자는 평생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고 결국 결혼으로 성공했다. 전후방 격오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가족들을 포함한 전우애와 의리, 선배들의 무한한 후배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지난 5월 군 수사당국이 경기도 육군 모 부대 내에서 일부 병사가 휴대폰을 이용해 스포츠도박을 한다는 제보를 입수해 5명의 병사를 적발했다. 이 중 최근 전역한 A병장은 입대 후 960차례에 걸쳐 무려 1억8000만원 액수의 도박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얼마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도박 문제에 대해 상담을 군인 상담자는 2017년 48명에 불과했지만 2018년에 약 3배인 123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2019년에는 5월까지 집계했음에도 117명에 달해 도박자 중 상담을 신청한 이들만 집계한 통계이기 때문에 실제 도박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종섭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휴대폰을 이용한 군 내 각종 부정·불법행위 적발은 2350건에 달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사병은 물론 부사관, 장교까지 포함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부대 내에서 병사들의 일과 후 휴대폰 사용을 허용해준 뒤 사병들의 휴대폰 도박이 급증한 영향이 가장 클 것이라는 분석이다. 핸드폰 사용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비록 인생 반려자를 얻기 위해 위수지역 이탈 등의 무리한 위반 행위를 했지만 당시의 지나친 규제는 또다른 위법을 양산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핸드폰의 무분별한 허용 등 이완된 규제는 방종과 무질서를 낳기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최선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9-06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항일 무장투쟁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일찍 사회주의 단체 결성도 주도했고 뒤에는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자유시 참변때 주도권을 쥐려고 러시아로 귀화해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군사 주도권을 위해 따르지 않는 부대들 학살에 가담해서 독립군을 와해시켰다. 또한 사변후 홍범도장군은 재판관으로 참여해서 독립군들을 재판했던 것에 책임을 느끼는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전역군인
    • 전문가 분석
    2019-09-0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9) 낙오된 1개 중대가 인민군 1개 사단을 늪에 빠뜨리다
    ▲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 [사진제공=김희철] 낙오된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 북한군 1개 사단 공격 지연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발발한 6.25남침전쟁시 북한의 인민군은 국군에 비해 2배인 198,380명의 병력과 전차여단 등 3배인 화력/장비의 우세로 기습 남침공격을 했다. 북한은 6.25전쟁 후 ‘조국해방 전쟁사’에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여 ‘3단계 5차 작전기’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1단계는 개전-선 공격, 2단계는 한/만 국경선으로 패퇴, 3단계는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이다. 특히 1단계를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와 같이 5차에 걸친 작전기로 세분화하여 분석하였다. ‘조국해방 전쟁사’에 제시된 북한 인민군의 1단계 ‘선 공격’ 중 ‘제2작전기(6.29~7.6)’가 바로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하여 한국군의 방어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종 승리의 관건인 단계였다. 그런데 피아 혼란한 상황에서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원 소속부대에서 연락 두절로 낙오되었으나 해당 지휘관이 끝까지 부대를 인솔하여 아군 작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다. 비록 원소속부대가 아닌 타부대였지만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의 임기응변(臨機應變)식 ‘임무형지휘’ 결과로 인접 사단의 지휘 및 작전 공백을 해소시켰다. 즉 북한 인민군의 공격 템포를 24시간 끊어버리고 아군 방어 준비시간을 확보하여 한국군 전체 작전에 기여한 것이다. 블확실성의 연속인 전장 상황에서 임무형지휘가 중요 불확실한 전장, 예상과 다른 상황 전개 대처가 변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 인제군 기린면의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는 주력과 멀리 떨어진 방동리에 있어 철수 명령도 못 받아 뒤늦은 6월 27일이 되어야 철수를 시작하여 적중을 탈출했다.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면서도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를 이용 행군을 강행하여 7월 4일 아침에 제천에 도착했다. 다시 철수를 계속하다가 제천 4km남쪽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인 5일, 단양에 도달했을때 중대 병력은 타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중대가 단양까지 왔는데도 아군을 만날 수 없었고 도로와 철로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미 국군 8사단 후발대가 단양을 떠났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들은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8사단, 제천-단양 방어중 작전명령 착오로 전장이탈 한편, 동해 강릉에서 방어하다가 대관령으로 철수한 8사단은 6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던 중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진부-평창을 거쳐 7월2일 제천에 도착했다. 육본 명령은 6사단이 장호원-청부-보은 축선, 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받은 8사단은 6사단 7연대로부터 제천지역을 인수받고 제천 방어와 원주 탈환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7월4일 탈환작전을 위해 원주에 이르는 가리파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8사단 10연대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에 실패해 분산 철수하여 적과 접촉이 단절되었다. 때마침 육본에서 6사단장을 거쳐 전달된 육본 작전명령에는 “충주로 이동하라”고 했다가 다시 전문으로 “8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중요한 요충지인 제천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기하라는 육본 명령이 의심스러웠지만 관계 참모의 확실하다는 확인보고를 받은 뒤에 이동 명령을 하달했다. 7월 5일 새벽 2시, 제천에서 부대원들을 열차에 탑승시켜 대구로 출발시키고 사단장은 짚차로 충주를 거쳐 대전 육본에 도착하여 작전명령 확인 결과, 육본에서는 8사단을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곧바로 대전역으로 이동 철도비상전화로 이동 상황을 확인 결과, 이미 이동부대는 대구, 영천까지 도달하여 사단 참모장에게 되돌아갈 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L-5연락기편으로 대구로 이동, 주력과 합류했다. 바로 이 싯점에 6사단 2연대에서 낙오되어 본대를 찾을 수 없었던 9중대장 정대원 중위(육사8기)는 국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단약역으로 달려가 철도비상전화로 8사단 군수참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용병(用兵)에는 속임수를 써야한다”는 뜻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사례 상급부대와 통신이 단절됐지만 지휘관의 창의적 판단력으로 전투 승리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에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는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가장 우선해서 강조한 병법이다. 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 날 오후 피난민을 만재한 과중한 중량의 열차가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이상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때 낙오된 1개중대가 단양에 남아있다는 상황은 새로운 변수가 됐다. 8사단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선점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하였다. 때마침 북한 인민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천-원주-제천 축선을 따라 남하하던 인민군 7사단은 전투력이 쇠진하여 7월5일 제 12사단으로 개칭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충주로 투입하고 제천지구를 인민군 8사단에 인계하였다. 중앙선 축선으로 남진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민군 8사단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다소 미흡했다. 12사단과 임무교대 하였으나 국군의 방어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인민군 8사단은 편의대를 피난민 사이에 침투시킨 결과 제천 -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급히 일부 병력을 단양으로 진출 시켰다. 그러나 단양에는 낙오된 6사단 9중대의 병력들이 이미 단양철교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증강된 수색 분대가 남한강 북쪽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자, 국군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가 급편 방어하여 북한군 8사단 공격을 24시간 지연시킨 단양철교와 전쟁기념관 조형물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김희철] 인민군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병력이 방어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으로 오판하게 만든 낙오된 9중대는 자신들이 한국군 전체 작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모른 채 남한강을 넘어올 적들을 막아내려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골든타임의 밤을 견디어 냈다. 다음날 9중대는 단양으로 진출한 8사단 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7월 10일 수안보에서 6사단 2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 후 8사단은 인민군 8사단의 지휘소 습격 등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탕진시키며 단양-죽령 지역에서 7월 12일까지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비록 초전부터 낙오된 2연대 9중대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고립된 상황에서 건제를 잃지않고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북한 인민군이 무혈 입성할 뻔 했던 단양을 기만 작전으로 확보함으로써 8사단의 중앙선 축선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는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의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급부대와 지휘 및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해당 지휘관의 자율적, 창의적 판단과 독단적 결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공적인 임무형지휘의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8-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