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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55)]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했다는 느낌도 잠시, 침몰하던 적함에서도 포탄을 쏴댔다. 김창학과 전병익이 파편을 맞은 것이 이때였다. 백두산함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던 김창학 삼등병조(현재의 하사)는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주포 갑판에 있던 전병익 삼등병조는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 1950년 6월 26일 이른 새벽. 6·25남침전쟁은 막 시작됐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때 끝났다. ■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고( 故)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 적함과의 교전 막바지에 중상을 입은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사병식당으로 옮겨졌다. 먼저 김창학의 윗옷을 벗기니 복부 여러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업혀 들어온 전병익은 왼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회백색 폐부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이들은 연신 물을 찾았다. 주계장 조경규가 물컵을 입에 가져다줬으나 힘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솜에 물을 적셔 입에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적함은 요…?”라고 물었다. 항해사 최영섭 소위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이 말에 이들의 눈빛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숨을 거뒀다. 지켜보던 대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원 평강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해군 장교(해사 3기)가 된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는 평소 병사들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을 통해 증언했다. 이렇게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백두산함은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지만 큰일을 해냈다. 백두산함이 수평선 끝에 걸쳐 있던 ‘검은 연기’를 확인하지 않고 동해로 갔다면 부산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600여 명이 기습 침투상륙하면 그대로 점령됐을 수도 있었다. ■ 6·25남침전쟁의 분수령이 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해전’ 평가 백두산함은 3일정도 훈련을 한 뒤인 6월26일, ‘옥계해전’ 전개에 따라 동해안 작전지원을 위해 이동하던 중, 우리 군의 헛점을 찔러 부산 앞바다로 우회하여 기습 침투하려는 북한 함정을 발견하여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킴으로써 6.25남침전쟁의 첫 승전보를 알렸다.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의하면 ‘대한해협해전’은 6·25남침전쟁 발발후 우리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북한은 ‘대한해협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해상작전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지상군 작전과 연계해 무장 게릴라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철회하고 서해안 도서지역 침투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군사연구자들도 대한해협해전을 높이 평가했다. 6·25남침전쟁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첩보 임무를 수행했던 노만 존슨 박사는 1991년 출간한 책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특수요원 600~700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다행히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6·25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적었다. 2007년 미 해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해군’에는 “600여 명의 북한군이 탑승한 무장 수송선이 거의 무방비 생태였던 부산항을 향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이 적 위장함을 침몰시킨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고,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만큼 중요했다.’”라고 기록되어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놓았다. 또한 이 책은 “백두산함의 적함 격침은 중요한 항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찔한 국가적 위기를 막았고, 이후 모든 지원이 가능해져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우리 국민의 성금을 모아 무기를 장착한 눈물어린 애국의 결정판이자 해군의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6·25남침전쟁 초기에 큰 위기에 빠질 뻔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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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5
  • [김희철의 전쟁사(54)]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아침은 평온했다.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전날 밤 늦게 진해에 입항했다. “미국에서 사온 배를 한번 보여 달라”는 요청이 많아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기지를 돌고 복귀한 것이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영외 거주자들은 집으로 퇴근했다. 당일 오전, 당직근무를 하던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가 당직하사관과 함께 군함 청소를 마쳤을 때, 통제부사령장관(현 당직사령)이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장병들을 급히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정오 무렵 승조원 전원이 집결하자 최용남 함장은 “적군이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동해로 출동한다”고 밝혔다. 대원들은 그때까지도 전쟁이 시작된 줄 전혀 몰랐다. 흔히 있는 소규모 침투 정도로 생각했다. ■ 죽을 각오로 적함에 접근해 공격하여 승리를 쟁취한 ‘대한해협 해전’ 6월25일 오후 3시 백두산함은 소해정 YMS-512정과 함께 진해항을 출항했다. 부산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후 8시 10분경, 울산 부근 해상을 지날 때 우현 견시병(見視兵)이 “우현 45도 수평선에 검은 연기 보임”이라고 외쳤다.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가 쌍안경으로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하지 때라 잘 보였다. 잠시 항로를 벗어나 검은 연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뒤따라가도 늦지 않을 듯싶었다. 마침 함께 가던 소해정의 속도가 느려 백두산함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였기에 소해정을 먼저 옥계 해안으로 보냈다. 백두산함은 15노트 속도로 빠르게 검은 연기 쪽으로 달려갔다. 1시간 반쯤 항해하니 선체를 새까맣게 칠한 괴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배 이름이 없었고 국기도 달려 있지 않았다.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밤 10시 30분경,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했다. 그러자 괴선박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속력을 높였다. 거리는 300야드(약 270m)까지 좁혀졌다. 괴선박의 갑판 위에 무장 병력이 가득했다. 코 모양을 보니 동양인이었고 600명은 넘어 보였다. 앞쪽에 큰 대포가, 뒤에는 기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아, 인민군이구나….’라는 판단을 하고 급하게 속력을 높여 3000야드(약 2700m) 거리로 물러났다. 최용남 함장은 장교 7명을 모아 냉수로 건배를 제안했다. “괴선박은 인민군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해군본부에 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밤 12시가 지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26일 0시 30분경, 3인치 함포에서 첫발이 발사됐다. 그간 모의탄으로만 훈련하던 백두산함이 실탄 사격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적함은 기다렸다는 듯 함포와 기관포로 응사했다. 적함의 화력이 더 우세했다. 백두산함의 포탄은 100발이 전부였다. 20~30발을 쐈으나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서 거의 맞지 않았다. 최함장은 여기서 포탄을 다 쓰면 동해안에 상륙한 적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제한이 된다고 판단했다. 최용남 함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가까이 가면 우리도 맞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나, 어쩔 수 없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적함에 접근해 공격한다.”라고 결심했다. 이에 대원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행동했고,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18노트)으로 돌진해 500야드(약 450m) 거리에서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중 한발이 적함 함교에 적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마스트(돛대)가 꺾였고 기관실에도 여러 발이 명중했다. 최초 발견 후 5시간이 지난 새벽 1시10분경 연기에 휩싸인 적함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적함의 흘수선(배와 수면이 접하는 선)을 계속 때렸다. (하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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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1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8)] 어떤 일을 오래 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의 전문가가 된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 속담이자 고사성어인 당구풍월(堂狗風月)은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는 말로 어떤 일을 오래 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이다. 또한 비전문가도 전문가와 오래 생활하다 보면 전문가에 버금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필자는 속칭 장교 유배지라는 별명이 붙은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해 최전방 야전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새 7년이 다가왔다. GOP부대는 매년 임무교대를 했다. 따라서 대성산을 세바퀴나 돌면서 부대교대를 하게 되었고 지역내의 구석 구석까지 발로 다니면서 직접 확인하며 근무하다 보니 사단작전장교로 근무 당시에는 인접 부대의 작전계획까지 모두 습득할 수 있었다. 또한 중대장을 마치고 사단에서 전투지휘검열을 대비해 책임지역내의 모든 지뢰지대, 낙석, 도로대화구 등 장애물 현황을 정확히 유지하도록 장애물이력카드를 전산화를 시키는 작업을 하여 장애물을 포함한 모든 현황까지 머리 속에 입력되며 본인도 모르게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79)] “성공하려면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참조) ■ 40년전 사창리전투의 치욕스런 패배와 유사하게 인접부대간의 협조 문제점 식별 사단작전장교 2년차에 접어든 필자는 당구풍월(堂狗風月)이란 속담처럼 자연스럽게 지역내의 모든 작전계획 뿐만 아니라 진지위치 및 상태까지 숙지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 매년 한미 연합훈련으로 실시했던 을지연습을 앞두고 인접부대와 협조회의가 있었다. 마침 한여름인 그해 8월에 필자는 정규육대를 입교하기 때문에 후임자로 김종환 대위(단기사관 15기)를 받은 상태라 여유가 있어 작전참모를 대신해서 인접 군단에서 실시하는 협조회의에 사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인접군단 작전참모가 주관하여 시작된 회의에서 해당 부대의 작전계획 설명이 끝나고 인접부대의 작전계획을 설명하는 차례가 되었다. 당시 대위였던 필자는 곧 장군이 될 대령 참모가 주관하며 영관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하는 토론에 참석하여 발표한다는 것에 다소 긴장은 되었으나 필자 보다 우리 부대의 작전계획을 더 잘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필자가 소속된 부대의 작전계획 설명이 끝나자 역시 인접부대의 협조선상에는 부대 배치의 공백과 화력 및 장애물운용 등의 취약점이 발견되었고 신랄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6.25 남침전쟁시 장도영 장군이 지휘했던 6사단의 사창리 전투에서 인접 미 24사단과 협조선(전투지경선)이었던 산악과 하오고개를 통해 후방으로 침투 공격한 중공군들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김희철의 전쟁사(23)]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 제 5차 공세 사창리 전투에서 치욕적 패배’ 참조) 그런데 약 40년이 지난 당시에도 사창리 전투 사례와 유사하게 양개 인접부대간의 협조에 문제가 있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란 말처럼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식별된 병력 배치, 화력 및 장애물 운용에 대한 미비점을 양개 부대가 상호 보완하기로 협조했다. ■ 가기 꺼려했던 장교 유배지인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의 7년 장기근무가 오히려 전화위복 저녁 무렵까지 계속된 인접부대 협조회의가 끝나자 인접 군단 및 사단 참모들은 을지연습을 앞두고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협조점의 미비점들을 발표한 필자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회의를 마치고 각 참모들이 잠시모여 차를 한잔하며 환담을 하는 사이에 인접부대 참모를 수행해 따라온 육사동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동기는 중대장을 늦게 마치고 사단작전장교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시기였다. 회의장에서 브리핑을 하며 영관급 선배장교들의 질문에 거침없이 답하는 필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던 그에게서 처음 작전장교를 시작할 때 문서 작성 요령부터 새로 배우며 적응하려 애쓰던 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들 가기를 꺼려했던, 속칭 장교 유배지라는 별명이 붙은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의 소대장으로 최초 부임해 같이 전입했던 동기들은 모두 타부대로 발탁되어 떠나고 필자만이 남아 7년 넘게 한부대에 근무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비록 타고난 능력은 부족하지만 어떤 일을 오래 접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일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이며, 비전문가도 전문가와 오래 생활하다 보면 전문가에 버금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한 ‘당구풍월(堂狗風月)’이 인접부대 작전회의에서 적용되어 오히려 빛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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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13
  • [김희철의 전쟁사(53)]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안보협업연구소장]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동해안으로는 북한군 5사단과 38선 경비 1여단이 기습남침 공격을 했다. 이에 대응하는 한국군 부대는 강릉에 있던 제8사단으로, 예하에 2개 연대를 두고 있었다. 당일 04시30분에 강릉, 옥계, 임원 등에 상륙한 북한군 부대가 후방을 교란하고 동시에 38선을 통해 북한군 5사단이 남침을 개시하자, 국군 8사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대관령을 넘어 충북 제천 방향으로 철수했다. ■ 6ㆍ25남침전쟁 시 우리 해군이 첫 전공을 세운 옥계해전 6ㆍ25남침전쟁 발발 당일 04시30분경에 북한 수송선단이 남하하여 강릉, 옥계, 임원 등에 북한군이 상륙하자 해군본부는 YMS509(가평)정에게 긴급 출동하여 격침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1948년 미 해군 YMS220정을 공여 받아 ’가평정’으로 명명한 우리의 YMS509정은 07시20분경 안개속에서 배 한척을 발견했다. 국제 해양법상 발광 신호로 수하를 시도했으나 북한 경비정이 포격을 가해와 교전이 시작됐다. 50여분 간 계속된 교전으로 YMS509정은 함수가 피격 당했으나 즉시 보수 완료했다. 반면에 고전하던 북한 수송선박은 15시경 북으로 도주했다. 해군은 17시30분경에는 해안선에 있던 상륙정 1척을 격파시키며 발동선 1척도 나포했다. 이때 북한군 33명을 사살하는 등 상륙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 해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결국 6ㆍ25남침전쟁 발발 당일 오후 옥계에 상륙을 기도하는 북한군을 교란, 지연시키며 아군 8사단이 철수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 뒤 YMS509(가평)정은 유엔 해군함대와 연합작전에 참가하여 서해안 봉쇄 작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 눈물 어린 애국의 국민 성금으로 무기 장착한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PC-701)’ 한편 6.25남침전쟁 직전까지 우리 정부는 영해를 지킬 단 1척의 전투함도 갖지 못했다. 정부 수립 이후 빈약한 국가 재정 때문에 함포가 장착된 군함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해군은 자체적으로 전투함 구입 자금을 모금했다. 대한해협해전 당시 해군소위(해사2기)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고 이후 백두산함 함장을 역임한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의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에 따르면 장병들이 월급에서 5~10%를 갹출했고,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과 정긍모 제독의 부인들을 포함한 군인가족들도 삯바느질과 수제품 가공으로 852만 원을 모았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 돈을 전달하며 군함 구입을 청원하자 이 대통령이 4만5000달러를 보태 구입을 추진했다. 이어 곧 많은 국민이 어려운 형편에서도 주머니를 열고 보리쌀까지 팔아 100원, 200원씩 보태며 애국의 뜻을 함께 했다. 백두산함은 미 해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건조한 군함으로 1946년 퇴역해 무장을 해제한 뒤 뉴욕의 해양대 실습선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 해군은 1949년 10월, 450톤급 백두산함을 1만8000달러에 사들였다.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 함포를 장착했지만, 돈이 부족해서 괌에서는 포탄을 100발만 살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6·25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10일 경남 진해에 입항하며 우리 바다에 띄울 수 있었다. 비록 미국이 2차 대전 때 쓰던 중고 함정이었지만 우리 국민의 성금을 모아 무기를 장착한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이었다. (중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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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7)]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5사단은 故 강 대령의 숭고한 애국심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5년 5월4일 강병식 추모비에서 승암고개 입구까지 ‘강병식로’로 명명했다. 이 길은 그가 순직한 GOP로 향하는 길이고, 근처에 진지공사 시 도로낙석 맨 꼭대기의 위험한 현장에서 직접 작업을 하며 솔선수범(率先垂範)했던 장소도 있어 더 의미가 깊다. 이 당시 15사단장인 최영철 소장은 “故 강병식 대령의 정신이 사단의 역사와 함께 면면히 이어져 후배 전우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 길을 ‘강병식로’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승리부대는 2014년 11월부터 사단의 잊혀진 전쟁영웅을 찾기 시작해 총 15명의 선배 전우를 선정하고, 최종적으로 5명을 엄선했다. 이듬해 1월2일 사단 주요 직위자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승리 5대 전투영웅 선포식’을 거행하여 산화한 선배 전우의 숭고한 군인정신과 애국애족의 사명을 기리며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1952년 6·25남침전쟁 중 창설된 15사단은 이듬해 휴전 때까지 강원도 고성지역 북방 351고지 등에서 적 7사단을 궤멸하고, 현재의 전선을 확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15사단 5대 전투영웅의 첫번째인 故 강병식 대령은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지닌 솔선수범(率先垂範)의 표상이며, 故 김덕련 대위, 박정옥 소위, 김기만 하사는 1953년 고성지구 351고지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고, 故 김수현 병장은 1964년 11월, 사단지역내 수피골 일대의 대침투작전 시 은거한 적을 추격하던 중 본인이 복부 관통상임에도 사투를 치루어 1명 사살,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산화했다 부대는 매달 ‘이달의 승리 전투영웅’을 선정하고 헌정문을 낭독하며, 생존해 있는 유가족들을 초청해 추모 행사도 진행한다. 또 영웅들의 이름을 딴 ‘승리 5대 전투영웅 상(賞)’을 제정, 교육훈련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둬 타의 귀감이 된 장병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부대의 주요 훈련장과 시설물에 영웅의 이름을 부여해 이들의 숭고한 군인정신을 장병들이 자연스럽게 내면화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유가족들은 저마다 아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故 강 대령의 가족들이 아픔을 딛고 15사단에서 군복무를 했던 특별한 인연같이, 우리 국민 및 장병들도 국가가 있기에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 조국을 지킨다는 자세가 돼야 한다. 따라서 이 칼럼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번씩 잊혀진 영웅과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 애국 국민들이 확실히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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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6)]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뢰사고 발생 당시 인접 사단에서 GOP철책대대장을 했던 장광일 예비역 중장(육사31기, 전 국방부 정책실장)은 2020년 12월 “고(故) 강병식 동기의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을 기리며”라는 기고문을 국방일보에 게재했다. 그는 기고문을 통해 “1988년 5월4일 오전에 춘천병원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강병식 중령을 포함한 많은 동기생이 대대장직을 수행하다 모처럼 만나 점심을 함께 했다”고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하지만 책임감 투철한 강병식 중령은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혼자 부대로 복귀한 후 바로 지뢰매설 현장으로 갔다. 그 현장에서 강풍으로 경계보조물이 전도돼 지뢰가 터지는 순간 부하들에게 ‘엎드려!’라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했다.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참군인의 진면목이 아니었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라며 그날 저녁에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눈물을 닦았다고 했다. 이어 장 장군은 故 강병식 동기가 뒤늦게라도 이번의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 등으로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돼 다행이고 가슴이 벅차다는 내용의 감회를 기고했다. 한편 해당부대인 15사단에서는 故 강 대령이 주로 활동했던 승암고개에 추모공원과 동상을 헌정했으며, 우수 대대장에게 ‘강병식 상’을 수여하여 숭고한 뜻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또한 사고 이듬해 故 강 대령의 모교인 이리고등학교는 교문 옆에 ‘故 강병식 대령 추념비’를 세워 감수성 많은 고등학생들의 국가관과 사생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더불어 4년간 국가관과 사생관을 길렀고, 아직도 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육사 화랑대의 어딘가에도 그 순결하고 고귀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강병식 정신을 이어갈 기념물을 건립하기 위해 육사, 총동창회 그리고 31동기회가 공감대를 갖고 대안을 찾고있다. ■ 동생인 강병옥 예비역 대령, “형의 투철했던 희생정신, 잊지 말아줬으면…” 故 강 대령의 동생이자 당시 20사단에서 포대장(대위)직을 수행하던 강병옥 대령은 “큰형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이미 형은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습니다. 형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용감했던 형을 군인인 내 손으로 수습해 보내드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직접 염을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염을 마치고 나오니 군의관이 ‘형님의 유품입니다’라며 작은 수첩을 건넸는데 형의 심장 바로 옆, 상의 주머니에 있었던 수첩이었다. 가슴은 쓰렸지만 수첩을 받으며, “형을 보낸 마지막 순간에 울지는 않았지만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고, 형이 못다 한 임무는 내가 이어 받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또한 형의 순직이 군 생활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에도 큰형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15사단과 故 강병식 대령 가족들의 특별한 인연이 계속된 것은 마치 운명의 장난 같았다. 동생 강 대령은 지난 2006년 15사단 포병연대장으로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인 강인한 씨는 2006년 15사단이 속한 2군단 포병여단에서 군 생활을 했다. 둘째 형인 강병용의 아들 강경래는 백부의 이름을 딴 강병식 대대를 나와 조교 생활을 했고, 심지어 故 강병식 대령의 큰아들인 강준혁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15사단에서 군사기본교육을 받았다. 동생 강 대령은 “큰형이 가족들에게 자신이 지켰던 ‘화천 축선’을 대신 지키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라며 “故 강 대령의 영혼이 지켜줘서인지, 가족들은 모두 동부전선을 잘 지켜내고 당당히 전역했다”고 말했다. 그는 15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비포장도로였던 ‘강병식로’를 오르내리며 큰형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곤 했다며 “사단 장병들이 ‘강병식로’를 통해 나라와 부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형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이 매우 뜻 깊고 감사하다”고 강조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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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김희철의 전쟁사(52)]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된 1948년부터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다. 육군 내 좌익으로 활동하던 강태무, 표무원이 예하 2대대 병력 전체를 이끌고 월북했고, 해군에서도 암약하던 좌익이 동해에서 함정 4척을 동반해 월북한 일도 있었다. 또 9척을 유인 납북시키려다 발각되어 실패하고 저지하는 정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렇게 뒤숭숭하던 1949년 8월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 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납북된 사실이 밝혀졌다. 6일 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던 관함식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대담한 선제 도발을 한 것이다. ■ 육·공군 보다 먼저 창설된 해군의 ‘몽금포작전’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대책회의에서 동해에서는 태극기를 단 함정이, 서해에서는 성조기를 단 보트가 납북된 것에 대해 개탄하며 이응준 육군참모총장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질책했다. 국가의 정체성과 존립성 마져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손 해군참모총장은 북한에 강력한 충격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침 첩보부대는 북으로 끌려간 보트가 몽금포항에 계류된 사실을 밝혀냈다. 손 총장은 정보감 함명수 소령(해사 1기, 7대 해군총장)을 특공대장으로 하는 20명의 해병대 상륙대원들과 함정 5척으로 구성된 해군전단에게 보트 탈환 및 응징보복작전을 지시했고 전의에 불탄 이들은 전날 밤에 은밀히 인천항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8월 17일 새벽 여명 속에 몽금포 해변 윤곽이 들어나자, 특공대원들은 고무보트에 올라 항구로 돌진했다. 예상외의 기습에 놀란 북한군은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 사격을 가함으로서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이 때 적탄이 특공대장 함소령의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고, 뭍 근처까지 도달한 고무보트 중 4척은 기관 고장으로 멈췄다. 자칫 전멸될 위기였다. 이것을 목격한 공정식 소령(해사 1기, 6대 해병대사령관)이 통영(JMS-302)함을 지휘해 적진 속에서 포로가 될 상황에 처한 함소령과 상륙대원들을 구출한 후, 37미리 포로 북한 함정 4척을 대파 격침시켰다. 승조원들은 육박전을 벌여 북한군 120명을 사살하고 5명(장교1, 병4명)을 생포한 뒤 35톤급 제 18호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했다. 비록 목표했던 보트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예상외의 큰 전과를 거두게 됐다. ‘몽금포작전’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단호하게 응징한 작전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당시 우리 해군 전체 병력은 3000명으로 15분의 1인 200명이 출전했고, 특공대원을 포함한 참전자 중 1명만 부상을 입었다. ■ 70여년 전,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계승한 강군되길 하지만 이 작전 후 군은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무초 대사를 통해 ‘해군의 38선 월북작전’에 항의했고, 김일성은 “6.25남침전쟁 발원은 몽금포 작전”이라며 선전과 선동전을 폈다. 이 주장에 중국과 소련이 가세하며 북침설이 나돌았으나, 1990년대 초 러시아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침설은 존립 근거를 잃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몽금포 작전’을 인정하는데 60년 이상 허비하다가, 전 합참의장인 최윤희 제독이 2012년 6월 해군참모총장 재직 시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이란 책에서 공식 기록으로 등재돼 구전되어 오던 이 혁혁한 전공이 빛을 보게 되었다. 작금의 미사일 발사 등 북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우리 군은 성군기 문란, 하극상, 갑질 논란 등의 문제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근본 임무를 망각하지 말고, 내외부로부터 있을 불순한 세력에 의한 테러나 북한의 무력 도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70여년 전에 도발 원점과 지원세력을 과감히 타격하는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이어받아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고, 국민들에게는 신뢰의 카타르시스를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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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09
  • [김희철의 전쟁사(51)]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도발 발생 12일째 되는 2010년 12월4일 토요일임에도 국방부장관 이취임식을 강행했다. 신임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북한군이 도발할 시 우리 군은 그 원점 뿐만 아니라 지원과 지휘세력까지도 완전 타격하는 철저한 응징보복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히며, 예하 부대에는 “현장에서 선조치 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도발원점 타격을 지시한 결단력이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미 6ㆍ25남침전쟁 발발전인 1949년 8월17일 우리 해군에 의해 기록상 유일하게 도발원점과 지원세력을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몽금포작전’이 과감하게 시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2012년 당시 해군총장 최윤희 제독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 국군의 모체가 된 미 군정 조선경비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이 되자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경력이 있는 청·장년은 되찾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을 지키는 군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8월30일 좌익 세력이 먼저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했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계열도 10월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11월 미 군정에 등록된 군사 단체는 무려 30개에 이르렀다. 사설 군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소란이 빚어지자 미 군정은 좌우익의 모든 군사 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또한 경찰력만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은 직접 군대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13일 미 군정 내에 국방사령부(뒤에 통위부로 명칭을 바꿈)가 출범했다. 국방사령부는 38도선 경비와 해상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협의하기로 하자 미 군정은 정식 군대 대신 병력 규모 2만5000명의 치안군(조선경비대)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각 도에 1개 연대씩 경찰예비대를 편성하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자리 잡은 태릉에서 1946년 1월 15일 조선경비대 1연대 A중대가 창설됐다. 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청주), 8연대(춘천), 9연대(제주)가 편성됐다. 이에 미 군정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을 상해까지 가서 모셔왔으며, 광복군의 구조와 계급·명칭 등을 수용하려고 했다. ■ 해군 원조인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海防兵團)’과 국군 창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육군 못지않게 해군의 역할도 중요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은 1945년 8월 ‘조국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라는 모집광고를 냈다. 결국 육군보다 먼저 장병 200여 명을 모아 11월11일11시에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열었고 이날은 해군 창설기념일이 되었다. ‘해방병단’의 설립은 1894년 7월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4개월 만에 우리 바다를 스스로 지키는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창립 날짜가 11(十一)월 11(十一)일인 이유는 선비 사(士)가 두 번 겹치는 형태로 해군의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손 제독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46년 1월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 초대교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직접 생도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등 장교 육성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로 편입된 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1946년 1월 초 태극기가 나부끼는 진해 앞바다에서 첫 해상 훈련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인 ‘충무공정’을 진수시켜 인천 근해에서 편대 훈련을 했다. 손 제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12월15일 정식으로 발족된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직을 맡았고,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껴 1949년 4월15일 해병대도 창설하였다. 한편 1947년 가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조선경비대를 5만명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12월 기존의 9개 연대로 서울·대전·부산에 각각 여단을 창설했고, 이듬해 4월 추가로 2개 여단이 편성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국군 창설이었다. 1948년 8월 16일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발표하여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실천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국군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미 군정의 조선경비대와 해방병단이 모체가 된 조선해안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8월31일 광복군 선·후배인 유동열 미 군정 통위부장과 이범석 국방장관 사이에 군사 업무가 이양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하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0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5)]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88년 5월4일 오전, 필자는 사단 작전처 벙커 사무실에서 군단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용은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방 경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와 후방 FEBA지역의 장애물 보강작전 결과보고서였다. 물론 그날 계획된 폐쇄 감시초소(GP)에 대한 지뢰 매설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을 예상했던 보고서였다. 헌데 정신없이 작성하는 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오후 지뢰매설 작전에 투입할 예정인 전초대대장 강병식 중령이 사무실 책상 앞에 서서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대대장님 오후에 폐쇄 GP 지뢰매설 작전에 투입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하며 당황하는 필자에게 그는 “오전에 정기 신검(건강검진)이 계획되어 있어 춘천병원으로 가는 중에 걱정하지 말라고 잠깐 들렸어…”라고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 책임감 투철한 강 중령은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부대로 복귀 폐쇄 GP의 지뢰매설 작전명령을 작성해 전초대대에 하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중대장 근무시에 지뢰제거 작전을 경험한 필자는 안전에 최대한 유의하고 가장 우수한 소대장을 선발해서 작전에 임해줄 것을 당부했다. 신병교육대장 시절부터 친 형같이 필자를 아껴주던 선배 강병식 중령은 “오후의 작전에는 신검(건강검진)을 마치고 내가 직접 현장에서 지휘할꺼니까 걱정하지마, 안전하게 이상없이 임무 완수할께…”라는 말을 남기고 춘천으로 향했다. 대대장직을 수행하던 강중령의 많은 동기생들이 5월4일 오전에 춘천병원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모처럼 만난 그들은 점심을 함께 했다. 그러나 책임감이 투철한 그는 부하들의 GP 지뢰매설 작업을 지휘 감독하기 위해 신검이 끝나자 마자 홀로 부대로 복귀했다. ■ “모두 엎드려!”라고 외치던 이 짧은 순간이 16명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신검(건강검진)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한 강 중령은 중대장과 함께 소대장 이동진 중위와 14명의 소대원들의 군장 상태를 확인하고 GOP 통문을 통과해 폐쇄 GP가 있는 DMZ안으로 투입했다. 지뢰를 매설할 폐쇄 GP에 도착한 강중령은 주변에 경계병을 배치하고 지뢰운반조와 매설조를 투입하려다가 그의 본능적인 부하를 사랑하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의 정신이 되살아났다. 전년도 추계진지공사시 도로 낙석 보강작업을 하던 현장의 위험한 낙석 맨 꼭대기에서도 직접 작업했던 강 중령은 위험한 곳에 사랑하는 부하만을 보내기가 싫었다. 그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보병학교의 구호처럼 지뢰운반과 경계는 중대장이 통제하는 부하들에게 맡기고 본인과 소대장 이중위 둘이서 직접 지뢰매설을 하기로 했다. 그날은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날’ 이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몹시 불었다. M14폭풍지뢰, M16대인지뢰 등 매설해야 할 지뢰도 많았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면이 40도 이상 기운 급경사가 나타났다. 전초대대장 강 중령과 소대장 이 중위는 앞에서 뇌관을 제거한 뒤 지뢰를 매설하고 있었고 뒤따르는 중대장과 소대원들은 다음에 매설할 지뢰들을 들고 있었다. 긴장한 가운데 시간이 흐르며 이마엔 땀방울도 맺혔다. 그때 DMZ 골짜기의 텃새바람인 매서운 돌풍이 산꼭대기 폐쇄 GP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돌풍은 GP 철책선 상단 2m위에 걸려 있던 애꿎은 경보 보조물을 건드렸다. 보조물은 땅에 떨어졌고, 매설했던 지뢰 뇌관을 건드렸다. 5월4일 15시15분, 선두에 있던 전초대대장 강 중령과 소대장 이 중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짧은 순간이 이들 16명의 운명을 갈라 놓았다. 그 둘은 소리쳤다. “모두 엎드려!” 모두가 일제히 땅 위에 엎드렸다. 반면에 강 중령과 이 중위, 두 사람이 몸을 던진 곳은 터지는 지뢰 위였다. 전초대대장 강병식 중령은 사랑하는 소대장과 부하들을 위해, 소대장 이동진 중위는 존경하는 대대장을 보호하려고 서로가 덮친 것이다. 강병식 중령은 육군사관생도 시절 수기부 및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든 주저하지 않았고 선두에서 진두지휘를 했다. 1975년 육사 31기로 졸업·임관 후 36사단 소대장을 시작으로 5사단 중대장·교육보좌관·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성격이 올곧고 대쪽 같았으며 부하를 끔찍이 사랑했던 그는 1987년 4월15일 15사단 독수리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해 전초대대장 직을 수행하는 등 상관의 신뢰와 부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또한 부산수산대(현 부경대학교)를 졸업하며 학군단 24기 소위로 임관한 이동진 중위는 전역을 두 달 앞두고 있었고 졸업 전 국내 굴지의 기업 공채에 합격해 부모를 기쁘게 했던 전도가 양양한 25살의 건실한 청년이었다. ■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솔선수범(率先垂範)의 희생정신 그날 오후 늦은 시각, 사단 사령부는 혼돈에 빠졌다. 헌병대장과 감찰참모가 현장 확인을 위해 출동하고 사단 의무대 헬기장에는 강중령과 이중위의 시신이 도착했는데 처참한 광경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들은 영안실로 옮겨졌고 사단장실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작전 및 정훈 참모와 참모장이 직접 발표문을 준비했다. 상급부대에서는 아마도 이번 사고에 대한 문책도 예상되었다. 하지만 전초대대장 강 중령의 확고한 사생관과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리더십 그리고 책임감 및 희생정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사실 인간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한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군인이 임무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장 숭고한 가치이지만 전투에 임하는 군인일지라도 죽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평소 사생관에 대한 자세가 확고하지 못하면 행동이 따르지 못할 것이다. 지뢰가 터지는 순간 부하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평소부터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솔선수범(率先垂範)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중령은 생도 시절부터 이순신 장군과 강재구 선배를 흠모하고 표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를 강조한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결연한 다짐이고 각오였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초연했기에 독전을 통해 13대300승리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다. 부하가 던진 수류탄이 잘못 떨어지자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본인은 장렬하게 순직했던 강재구 소령도 그의 일기에 “부하들을 위해 내 몸을 바쳐서라도 좋은 지휘관이 되리라”고 기록했다. 故 강병식 중령과 이동진 중위는 흠모하고 표상으로 삼았던 이순신 장군과 강재구 선배를 따라 몸을 던져 부하들을 구했다. 같은 달 12일, 이들은 보국훈장 삼일장과 함께 각각 중령에서 대령으로, 중위에서 대위로 추서됐고 다음 달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1묘역에 나란히 안장됐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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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4)]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한 솔선수범의 표상 고(故) 강병식 대령(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병장병들의 구호는 ‘First In, Last out…!’이다. 왜냐면 적들이 설치해 놓은 장애물을 공병이 먼저 투입하여 제거한 후에 전투부대가 진입할 수 있고 철수할 때는 맨 나중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빠져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육군장교들이 필수로 입교하여 교육받는 보병학교의 모토는 “나를 따르라(Follow me!)”이다. 간부가 되면 ‘First In, Last out…!’구호의 공병보다도 더 솔선수범(率先垂範)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필히 “부하들을 위해 내 몸을 바쳐서라도 좋은 지휘관이 되리라”는 각오로 사랑하는 부하들을 지휘통솔해야 한다. 이러한 솔선수범의 표상인 故 강병식 대령은 1988년 5월4일 15:15에 15사단 전방DMZ(비무장지대) 내에 GP에서 지뢰가 터지는 순간 자신의 몸을 던져 부하를 구하고 본인은 장렬하게 순직했다. ■ 남북은 시범철수 대상인 GP 22곳의 병력과 화기 철수 완료 후 폭파 정전협정에는 DMZ 안에 군사시설물 설치나 군사장비 반입을 불허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DMZ 내에 감시초소(GP)를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경쟁적으로 GP가 증가했다.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던 시기에 우리 군은 60여 개, 북한군은 160여 개의 GP를 각각 설치해 운용 중이었다. 남북 GP 중 가장 가까운 거리는 700여m였고, 남북 GP에 근무하는 병력은 모두 1만2000여명 이었다. 남북은 지난 2018년 9월19일 평양에서 열린 제3차 정상회담에서 지상과 해상,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한 바 있다. DMZ 내 GP 시범 철수도 그 일환이다. 60여 개 G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1개 GP를 없애는 것도 한국군의 휴전선 일대 감시체계에 구멍을 내는 일이다. 그런데 주한미군 측이 가장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은 군사분계선 부근을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은 조항이다. 휴전선 일대는 계곡이 많고 휘어진 능선으로 인해 인공위성 사각지대가 많아 군단급부터 연대급까지 무인기를 띄워 북한군의 동향을 감시해왔는데,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돼 이것이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한미연합사 정보 분야에서 근무한 모 예비역장성은 “북한군 장사정포는 고지 후사면(보이지 않는 후면의 경사면)에 배치돼 있어서 중고도 정찰과 고고도 정찰로 탐지해야 하는데 이마저 못하게 됐다. 전방 지역은 이제 깜깜이가 됐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조치는 감시-정찰수단과 정밀타격 능력을 현저히 제한한다”며 “이제 한국군은 북한군의 장사정포가 갱도에서 나오는지, 북한군이 이동하는지를 제때에 알 수 없게 됐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계산된 모험(calculated risk)이라 추정하지만, 남북 양측은 군사분계선(MDL) 1㎞ 이내에 근접한 남북 GP 각각 10개소의 화기와 장비 그리고 근무 인원을 철수한 후 11월 30일부로 시설물을 완전 파괴했고, 나머지 1곳에 대해서는 병력과 장비를 철수하되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 또한 그해 12월 말까지 상호 방문해 GP 철수 및 파괴 상태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했다. 또한, 10월 1일 시작된 공동 유해발굴 지역 내 지뢰 제거 작업도 30일 끝냈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측은 수천발, 남측은 수백발의 지뢰와 폭발물을 제거했다"며 "지뢰 제거 구역의 외곽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표식물도 설치했다"고 말했다. 이와같이 남북은 지뢰 제거 작업이 끝나면 연말까지 공동 유해발굴에 필요한 도로를 개설하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자유 왕래는 조만간 실현될 예정이었으나 북한의 일방적 파기로 모두 무산됐다. ■ 서울올림픽 앞두고 전방 경계태세 강화 위한 지뢰매설 등 장애물 보강 서울올림픽 준비로 전국이 들썩거리던 1988년 4월경,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육군15사단 역시 세계적인 행사를 앞두고 혹여 있을지 모르는 적의 도발을 막기 위해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전방 경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GP 인근에서 장애물 보강을 위한 지뢰매설작업을 계획했다. GOP후방 지역과 FEBA지역의 장애물 보강을 끝내고 DMZ내의 GP에 대한 보강작업을 위해서는 정전위의 DMZ 출입 승인과 작업을 위한 별도의 작전명령이 필요했다. 사단 작전장교였던 필자는 5월초 폐 GP에 적들이 침투하여 활동할 것을 대비하여 장애물 보강을 위한 지뢰매설 작전명령을 작성해 전초대대에 하달했다. 당시 DMZ 와 GP작전을 담당했던 전초대대는 강병식 중령(육사31기)이 지휘하고 있었다. GOP 투입전에는 사단의 주요관심 대상인 신병교육대대를 담당했던 강 중령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해 강인한 신병들을 교육훈련시켜 사단장으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GOP 부대의 임무 교대 시 가장 중요한 지휘관인 전초대대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의 사단 작전참모인 성영민 중령(육사30기)도 전초대대장 출신이라 대대장 임기를 마치면 사단의 주요 참모로 보직될 가능성도 높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년도 가을에 진행됐던 추계진지공사 기간에는 사단장이 가장 신임하는 예하 지휘관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전방 GOP 부대의 순시를 위해 승암고개를 지나가던 사단장이 도로 낙석 보강작업을 하던 현장에서 고생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잠깐 멈추었을 때 솔선수범(率先垂範)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위험한 낙석 맨 꼭대기에서 작업하던 장병이 바로 강 중령이었다. 사단장은 놀라 “그 위험한 일을 대대장이 직접 하느냐?”고 걱정스레 질문하자, 강 중령은 “최근 입대한 병사들은 작업을 잘 못하고 위험해 보여서 본인이 직접 한다”며 겸연쩍어 했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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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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