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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2)] 부여된 임무 완수를 위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고민과 두려움 느끼며 유종지미(有終之美)를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의 육군대학 전출신고가 드디어 사단장 시간계획에 반영되었다. 소위로 임관해 첫 부대인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에서 약 8년간의 근무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유종지미(有終之美)’는 중국 전국시대에 진나라 무왕의 세력이 커지자 점점 자만해져서 처음 품었던 마음을 잃어버림으로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신하가 무왕에게 다음과 같이 직언한 것에 유래한다. 그 신하는 “시경에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처음이 있지 않은 것은 없고, 능히 끝이 있는 것이 적다’는 뜻으로, 처음 시작한 것을 끝까지 이루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대왕께서 천하통일의 대업을 착실히 추진하시어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신다면 온 백성이 우러러볼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된 고사성어이다. ■ 직업인의 발전은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거두며 같이 근무한 동료와 10년 이내의 선배들이 큰 역할한 덕택 필자는 88을지연습을 마치고 복귀한 뒤 2주 동안 부대 야전예규를 수정하여 책자로 만들었고, 이것을 육군대학 전출 신고 전날 사단장에게 보고했다. 사단장(최권영 소장, 육사19기)은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을 이끌고 한미연합사에 파견돼 88을지연습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다가 타 부대로 전출가기 전에 부대 야전예규까지 수정해 재발간한 것을 높이 치하했다. 필자는 중국 진나라의 신하가 무왕에게 직언한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잘 이루기 위해 약간의 노력을 한 것을 칭찬해준 사단장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더욱 고마운 것은 사단작전장교로 근무하던 중 지난해 운 좋게도 소령 진급자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타 부대로 떠나는 그해 가을에 정상적으로 계급장을 달면 족보에도 등재되는 영광도 얻는 당상관의 직급이 된다. 또한 다음달이면 영관장교 보수교육인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년간 안정된 후방 생활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육군대학 졸업 후에는 차기 보직이 수방사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드디어 야전 근무를 지칭하는 비포장 도로 군인이 아닌, 도심권 지역에서의 근무를 의미하는 아스팔트 군인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필자는 최전방 격오지에서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근무한 것이 인사 측면에서 공평하게 수도권 근무로 조정을 해준 요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의 차기 보직이 수방사로 발령된 것은 최전방 격오지 부대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인연을 맺었던 선배가 이미 수방사에서 근무하며 그곳 인사관련자에게 강력히 추천한 결과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속칭 장교 유배지라는 별명이 붙은 중부전선 격오지 부대의 소대장으로 최초 부임해 최전방 야전 생활을 시작했고, 같이 전입했던 동기들은 모두 타 부대로 발탁돼 떠나고 필자만이 남아 장기간 근무한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직업인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남들이 회피하는 곳이라도 그 곳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곳이라도 그 곳에는 인재가 있고 그와 좋은 관계를 맺으면 훗날 꼭 보상이 있다는 진리이다. “썩어도 준치이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이 꼭 맞았다. 특히 학벌이나 출신 구분없이 같이 근무한 동료들과 10년 이내의 선배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인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수방사로 차기 보직을 받은 것도 계급이 높은 10년 이상의 선배 보다는 같이 근무한 그 이내의 선배와 동료들이 큰 역할을 한 덕택이었다. ■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 독려 사단장에게 육군대학 전출 신고를 마치고 관사에서 결혼 후 7번째 이사짐을 꾸리고 있을 때 장인의 전화가 왔다. 장인인 고(故) 강철 예비역 대령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해방후 인접 옥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공산당의 학대를 피해 홀홀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준비하던 중 간부호보생 3기로 합격하였으나 6·25 남침전쟁 발발로 병으로 입대하여 국군 6사단 7연대에서 춘천지구 전투를 치루었고, 그해 육군 종합학교 1기생으로 임관하여 전쟁기간 동안 소・중대장과 참모직을 수행했다. 이후 보병학교 교관, 미국 고등군사반 유학, 대대장, 12사단 및 주월 비둘기부대 작전참모, 28사단 연대장 및 육본 교육과장 등을 역임 후에 예편하여 방산업체에서 15년을 근무했다. 그는 치열한 격전 속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충무・화랑 등 무공훈장을 5개씩이나 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과거 육군대학을 1등으로 졸업했지만 장군의 반열에 못 올랐던 장인은 필자에게 육군대학 졸업 성적은 앞으로 진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며, “내 원한을 갚아 줘야 되지…, 김 장군 …?”이라고 육군대학 입교를 앞둔 사위에게 격려의 전화를 건넸다. 육군대학 교육은 학교의 수용인원을 고려하여 1년의 정규과정과 3~6개월의 단기과정 그리고 통신과정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정규과정은 시험과 근무 성적을 고려하여 일부 인원만 선발하고 나머지는 단기 및 통신과정에 입교하는 제도였다. 정규과정에 입교한 자들이라도 다시 성적과 투쟁을 해야 했다. 최종 수료시 교육인원 중 1/3수준의 상층 성적을 얻지 못하면 진급 심사에서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는 장인이 현 진급에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는 주마가편(走馬加鞭)식의 독려였다. 그런데 필자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육군대학에 들어갔을 때에도 앞서 입교한 선배기수 중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와 동료들이 꼭 필요한 참고 자료와 공부 요령 등을 전수해 주었다. 덕택에 장인처럼 1등은 못했지만 무사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학벌이나 출신 구분없이 같이 근무한 동료들과 10년 이내의 선배들이 중요하다”라는 진리는 직장(부대) 생활 뿐만 아니라 육군대학에서 조차 또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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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2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1)] 부여된 임무 완수를 위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고민과 두려움 느끼며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초라하다는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사자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중국의 용흥사라는 절에 진존자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께 기도 올리는 일이 끝나면 지푸라기로 짚신을 만들었고, 다 만든 짚신은 한 켤레씩 짝을 맞춰 산길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에 궁금했던 사람들은 “먼 길 가는 사람 가운데에는 짚신이 낡은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아픈 발을 편하게 해 주려고 짚신을 매달아 두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진존자 스님의 아름다운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어느 날, 진존자는 처음 보는 스님과 상대방의 도(道)를 알아보는 선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진존자가 한 마디 건네자 그 스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단을 맞았네. 도를 아주 많이 닦은 스님인가 보구나”라고 생각한 진존자는 그 스님을 좋게 생각했는데 잠시 뒤 그 스님은 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진존자는 ‘겉보기에는 용의 머리처럼 훌륭한 스님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뱀의 꼬리처럼 형편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소리친 스님에게 “소리를 쳤으면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마무리를 지어야지요?”라고 질문하자. 그 스님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자기가 소리를 지르면 다들 대단한 인물인 줄 알고 슬금슬금 피했는데 진존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용두사미(龍頭蛇尾)’라며 그 처음 보는 스님을 비웃었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을 맺고 싶지는 않았던 격오지 부대의 장기간 근무 필자는 1981년 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해 광주 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당시에 장교 유배지라고 불리웠던 최전방 격오지 부대에서 천직(天職)을 시작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사랑하는 부대원들과 함께 대성산 골짜기와 비무장지대(DMZ)를 누비며 잠깐의 성취에 자긍심과 보람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부여된 임무 완수를 위해 죽음과 삶의 갈림길의 위기 속에서 고민과 두려움을 느끼며 작전수행도 했고, 같이 뒹굴던 전우를 멀리 떠나 보내는 아픔도 겪었다. 이렇게 한 부대에서 8년 가까이 근무하다 보니 책임지역 전체는 손바닥을 보는 것 같았고 무엇이든 맡겨만 주면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화 같은 용(龍)이 되어있는 것으로 착각도 했다. 마치 생도시절 귀 따갑게 듣던 ‘국가의 간성’이 이미 된 줄 알고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뛰어 다녔다. 하지만 후임자에게 업무까지 인계한 사단작전 장교직 말기에는 88을지연습 참가를 위해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을 이끌고 한미연합사로 파견됐다. 사단작전장교 근무를 마무리하는 순간에 소홀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도록 더욱 긴장해서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 파견 임무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2주간의 88을지연습을 마치고 복귀하자 사단장(최권영 소장, 육사19기)은 타부대와 비교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워게임 파견 요원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필자의 사단작전장교직 후임자로 보임된 김종환 대위(단기사관 15기)가 매우 성실하여 상급자 및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아 필자는 여유를 갖고 육군대학으로 전출갈 준비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무엇인가 배고픔을 느꼈다. 당시에도 부대 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이 쌓여 있었으나 모른 채하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 중에 하나가 부대 야전예규 재발간 이었다. 1984년도에 수정해서 발간한 탓에 4년이 흐르자, 환경도 바뀌고 상급부대 지침도 변경되어 많은 수정문을 첨부하여 걸레가 되어 있었다. 타부대로 전출갈 날이 2주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후임자보다는 그동안 경험이 많은 필자가 과거와 현재의 변경된 규정을 더 잘 알고 있어 수정이 용이했기에 다시 책상에 앉았다. 격오지 부대에서의 장기간 근무를 마무리하는 순간에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을 맺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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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0
  • [김희철의 전쟁사 (58)]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외국 인사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맥아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다. 도쿄에 주재하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부인과 함께 서울에 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극동군 사령관이자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은 물론 남한을 비롯한 미군의 대일 점령 지역도 관할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군인 경력의 상당 부분을 필리핀에서 근무한 극동통으로 이승만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그는 필리핀 망명 정부의 각료이며 군인·정치가 였던 로물로를 통해 이승만과 친분을 맺었다. 반소·반공주의와 기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맥아더와 이승만은 의기투합했다. 덕택에 맥아더는 해방되자 이승만이 다른 망명 지도자들보다 빨리, 1945년 10월16일에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왔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를 거쳐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맥아더와 두 차례 회동을 가졌다. 맥아더는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도쿄로 불러서 함께 이승만을 만나게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가 결정한 한국 신탁통치와 미·소 협상에 부정적이었던 맥아더는 적극적인 대소련 공세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뜻을 같이했다. 1946년 5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 없이 끝난 뒤 미국 국무부와 남한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방미 활동을 계획했다. 그해 12월4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났다. 맥아더는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을 미국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고 1947년 1월 마셜 국무장관이 취임하자 이를 지켰다.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남한에 과도독립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가 유엔에 가입한 뒤 유엔을 통해 소련군을 철퇴시킨 다음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외교·선전 활동을 벌였다.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 확실해진 1947년 9월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제출했다. 11월 14일 유엔총회는 '한국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주관 아래 일련의 절차가 진행된 결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다. ■ 맥아더의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고 8군 사령관은 밴플리트 장군이 맡아… 1950년 6월25일에 북한군이 남침하자 미국이 참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권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망명시절 어느 모임에서 영관장교인 맥아더를 만났을 때 그의 인물 됨됨이를 감지하고 장래를 위하여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맥아더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식장에 참석한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을 경우, 캘리포니아를 지키듯이 코리아를 방위하겠다"라고 다짐했다. 결국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1950년 9월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이 약속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미 8군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하던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는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고 미 8군사령관의 자리는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 벌지전투 등에서 맹위를 떨쳤던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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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2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0)]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넘어서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교훈을 깨달게한 미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의미의 ‘타산지석(他山之石)’ 이라는 고사성어도 인생에서 도움이 되지만 근본이 바로 서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고 규칙과 체계가 없어진다는 의미의 ‘본립도생(本立道生)’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중국 한(漢)나라 때의 학자 유향은 그의 저서 ‘설원(說苑)’에서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기는 법이다’라며 군자는 근본 세우는 일을 귀중히 여기고 처음 시작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서울 올림픽 열기가 뜨겁던 1988년 여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를 앞두고 후임자까지 받은 상태로 현직의 작전업무는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88을지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7월2일부터 23일까지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을 이끌고 한미연합사로 파견됐다. 을지연습은 북한군의 불법 남침에 대비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전 미군과 미 본토에서 증원된 요원들도 포함하여 한국군 전체와 정부기관까지 참가하는 훈련으로 일부의 실제훈련을 제외하고는 전부대가 실병력 기동이 아닌 컴퓨터에서 모의된 상황에 따라 조치하는 워게임 훈련이다. ■ 미군이 세계 최강의 군대인 이유는 본립도생(本立道生) 자세 때문 미군들은 충분한 휴식 시간 보장을 위하여 별도의 공간에 숙소를 준비했다. 전방에서 야외 숙영할 때보다도 훌륭하게 당시 캠프 킴에 야전 침대를 충분하게 배치하여 취침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식사는 최상의 상태로 제시간에 제공하는 등 훈련 여건이 완벽히 보장되었다. 이러한 여건하에서도 미군들은 가장 효율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했으나, 적은 인원이 파견된 우리의 사단 요원들은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하여 피로감을 가중시켜 능률을 저하시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의미인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고사성어가 무색하게 오히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란 말처럼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는 미군들의 근무 모습이 세계 최강의 군대를 만든 근원이라는 좋은 교훈으로 얻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한국군도 모든 훈련과 작전에서 충분한 여건을 보장해주도록 발전시키며, 각자는 부여된 임무 완수를 위해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요령을 피우지 말고 전념하여 최선을 다하는 기본에 충실해야 된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4-19
  • [김희철의 전쟁사 (57)] 1군단장 백선엽 장군, 7차례의 고지 쟁탈전 끝에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정(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군이 ‘51년 11월에 수도사단(사단장 준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준장 최영희) 그리고 기존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통합하여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소장 백선엽)’를 창설하였다. 수도사단은 월비산·351고지일대에서 수색과 정찰의 반복으로 북괴군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군단 작전지시 제14호에 따라 책임지역을 11사단에 인계하고, 11월16일부로 호남지구에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공비토벌 작전에 임하게 되었다. 이에 11사단은 작전명령 제18호에 의거 사단예비인 9연대로 하여금 월비산∼261고지∼351고지∼148고지∼187고지∼36고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따라서 9연대는 배속 받은 대전차공격대대를 261고지와 월비산에, 사단 수색중대를 148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그로부터 2일이 지난 11월18일 저녁, 북한군 9사단 86연대의 1개 대대는 어둠이 깃든 후 월비산을 목표로 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이 고지에 배치된 대전차공격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날 후반야에 3개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아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였다. ■ 월비산·351고지는 피탈됐지만 서부전선보다 북으로 80㎞를 더 확보 월비산을 탈취한 북한군 1개 대대는 그 여세를 몰아 대전차 공격대대가 351고지에 미처 방어편성을 끝마치기도 전에 급습하여 이 고지마저 장악하였다. 11사단은 수도사단으로부터 월비산을 인수받은 지 불과 8일 만에 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당시 대전차공격대대 1중대 이재화 중위(예비역 대령, 16연대장 역임)는 수도사단 1개연대가 방어하던 진지를 2개중대로 배치한 것과 신병들로 구성되어 전투경험이 적은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증언했다. 11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심기일전하여 339고지∼351고지∼208고지∼37고지선에 새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방어태세를 강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 전투로 북한군 사살 891명, 포로 37명, 소총 369정 노획 등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수차례의 고지 쟁탈전이 휴전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나 우리 국군은 새롭게 편성된 방어진지를 잘 지켜냈다. 휴전협정 이후, 월비산은 안타깝게도 북한 땅이 되었으며 월비산과 351 고지 아래로 북측 민통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국군은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보다 북쪽으로 80㎞를 더 확보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월비산 정상에 국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북한군 초소가 있으며 월비산 아래에는 북측 민통선과 더불어 남한 측에서 건설한 금강산으로 가는 도로가 지나간다. 금강산과 월비산의 모습은 고성군 현내면에 위치한 통일전망대에서 볼 수 있으며 월비산과 351 고지는 절경인 해금강과 더불어 분단의 아픔과 6.25남침전쟁의 치열함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89)]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넘어서는 ‘본립도생(本立道生)’의 교훈을 깨달게한 미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타산지석(他山之石)’ 이라는 고사성어는 ‘시경(詩經) 소아편 학명(鶴鳴)’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로 직역하면 ‘다른 산의 돌’이라는 뜻이다. 이는 다른 산에서 나는 거칠고 나쁜 돌이라도 숫돌로 쓰면 자기의 옥(玉)을 갈 수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라도 자기의 지덕을 닦는 데 도움이 됨을 비유하는 의미이다. 또한 ‘본립도생(本立道生)’이란 근본이 바로 서지 않으면 도리에 어긋나고 규칙과 체계가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중국 한(漢)나라 때의 학자 유향은 그의 저서 ‘설원(說苑)’에서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기는 법이다’라며 군자는 근본 세우는 일을 귀중히 여기고 처음 시작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올림픽 열기가 뜨겁던 1988년 여름에 필자는 육군대학 입교를 앞두고 후임자까지 받은 상태로 현직의 작전업무는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88을지연습에 참가하기 위해 7월2일부터 23일까지 사단의 워게임 실시반을 이끌고 한미연합사로 파견됐다. 을지연습은 북한군의 불법 남침에 대비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전 미군과 미 본토에서 증원된 요원들도 포함하여 한국군 전체와 정부기관까지 참가하는 훈련으로 일부의 실제훈련을 제외하고는 전부대가 실병력 기동이 아닌 컴퓨터에서 모의된 상황에 따라 조치하는 워게임 훈련이다. ■ ‘타산지석(他山之石)‘ 정도로 예상했던 미군은 기본에 충실한 옥(玉) 필자는 예하 각연대의 대대장 대표와 작전과장, 사단 참모부의 주무 장교들과 함께 한미연합사에 도착해서 사전 교육을 받고 나름대로 실습을 했다. 예하 연대에서는 중령급 대대장이 참가하여 책임을 지고 연대를 운용하였지만 사단은 각 참모부의 실무 장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88을지연습이 시작되자 사단에서 조치할 사항은 원거리로 이격된 사단 사령부와 통화하여 조치를 함으로 제한이 많았다. 결국 시간을 요하는 급한 위기 상황에서 조속한 판단이 필요할 경우에는 필자가 사단장 역할을 대신하며 신속히 결정하고 사전 조치를 했다. 따라서 사단작전장교로 근무하던 필자는 예하 연대처럼 3교대 근무가 불가능했다. 주요한 국면의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필자가 있어야 사단 전체 운용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었고 필자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인접 부대에 적의 공격이 집중되어 사단 상황이 한가해질 때에는 사단의 워게임 요원들은 종종 자리를 이탈해 휴식했고, 심지어 심야 시간에는 책상에 엎드려서 졸고 있는 경우도 발생했다. 반면에 인접에서 워게임을 하고 있는 미군들의 사무실을 살펴보니 24시간 중 어느 때라도 근무를 이탈하는 요원은 전혀 없었고, 심지어 식사 시간에도 간편하게 햄버거나 샌드위치 등으로 해결하며 상황조치에 전념했다. 게다가 미군 간부 및 지휘자들은 미동도 없이 모니터를 주시하며 지침을 하달하고 있었으며 예하 요원 중 일부 만이 간혹 느슨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근무 교대 시간을 준수하며, 대부분 요원들이 책임 시간에는 임무에 열중하는 등 기본에 충실한 자세를 견지했다. 연합사로 파견 나오기 전에 알고 있었던 군기가 문란하고 해이해진 미군이 아니라 모든 요원들이 법과 규정을 준수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군이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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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김희철의 전쟁사(56)] 1군단장 백선엽 장군, 7차례의 고지 쟁탈전 끝에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정(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군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은 강원도 고성군의 월비산과 351고지 탈환을 위해 1951년 10월 중순부터 휴전 직전까지 7차례에 걸쳐 고지 쟁탈전을 치루었다. 특히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수행한 전투로 해군의 지속적인 함포사격 지원과 더불어 공군은 총 1538회를 출격해 적 핵심시설 및 진지, 벙커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비록 마지막에 적에게 피탈됐지만 더는 전선이 밀리지 않은 덕분에 현재 38도선 북쪽인 설악산 일대를 우리 영토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 산으로 달이 솟는 것이 날아오르는 형상인 월비산에서의 치열한 전투 월비산은 건봉산 줄기가 동해로 뻗으면서 형성된 표고 459m로 고성 서남쪽 5㎞ 지점에 돌출한 산이다. “달이 솟는 것이 마치 날아오르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흥만과 더불어 월비산 일대는 6 · 25남침전쟁시의 전쟁영웅인 ‘김동석 대령(가수 진미령의 부친)’이 지휘한 HID36지구대의 활동지역이기도 했다. 그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국군 1군단은 1951년 9월6일경 향로봉∼건봉산∼송현리를 잇는 선상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여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10월10일 예하 수도사단으로 고성 일대의 전술적 요충지인 월비산을 선제공격하게 함으로써 월비산·351고지 전투가 개시되었다. 국군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지형상 월비산을 확보하지 않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도사단장(송요찬 준장)에게 그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1기갑연대로 하여금 1951년 10월 10일 월비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148고지∼351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를 탈취하였다. 10월 12일부터 3일간 1기갑연대는 주목표인 월비산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간신히 261고지와 350고지까지 진출하는 데 그쳤다. 수도사단 사령부에서는 병력을 집중투입하기로 작전계획을 수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기갑연대는 15일 오전에 공군이 포함된 제병협동 및 합동작전으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당시 유엔 공군기의 오폭으로 3대대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일대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으나, 월비산 정상으로 돌진하여 치열한 백병전을 벌인 끝에 이날 오후 마침내 월비산을 탈취하였다. 월비산 전투가 일단락되면서부터 동부전선의 상황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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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김희철의 전쟁사(87)]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에서 반격작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으로 접근하자, 이 선의 돌파 여부가 초미의 관심을 끈 정책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엔군 계통으로 38도선 돌파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돌파 결심이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한국군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그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는 70세, 미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은 60세였다. 둘 모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미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을 포함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및 클라크 장군 등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영한사전’을 저술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여년 간 망명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으며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고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이 6·25 남침전쟁을 포함한 대한민국 역사에 남긴 업적과 과오의 진실 밝혀야… 우남(雩南) 이승만은 이 땅에 5천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려 대한민국 번영의 기틀을 다진 건국 대통령이었다. 70여년 전 이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 강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을 바라본 외국인들의 다양한 시각과 평가들은 놀랍다. 이승만의 청년기를 직접 지켜봤던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이승만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위인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T.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은 금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 지도자형으로써 동서 문화를 조정 통합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올리버 박사는 "20세기를 통틀어 이승만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많은 정치가들을 배출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조직력과 지도력, 예언자의 비전을 두루 겸비한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이다"라며 극찬했다. 해외에서는 이처럼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았으나 이승만은 정작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잊혀졌다. 잘못된 역사 인식과 편견으로 인해 ‘이승만은 민주주의 파괴자’로 인식되어 왔고 ‘독재자’였다는 오명까지 쓰게 되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건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위상이 추락되었고, 갈 곳 없는 역사의 방랑자가 되어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행히도 2010년 이후 이승만에 대한 연구와 관련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여 이승만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왜곡과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어린 시절 배우고 들었던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왜곡되었고, 그 결과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이승만을 나쁘게 평가해왔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일궈낸 업적을 기리며 지금도 그를 추모하면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세운 업적들을 재조명하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과연 이승만 대통령이 6·25 남침전쟁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무슨 업적을 남겼는지, 그가 대한민국 번영과 자유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남긴 과오는 무엇인지, 우리 후대가 그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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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15
  • [김희철의 전쟁사(55)]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승리했다는 느낌도 잠시, 침몰하던 적함에서도 포탄을 쏴댔다. 김창학과 전병익이 파편을 맞은 것이 이때였다. 백두산함 조타실에서 키를 잡았던 김창학 삼등병조(현재의 하사)는 복부에 파편을 맞았고, 주포 갑판에 있던 전병익 삼등병조는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 1950년 6월 26일 이른 새벽. 6·25남침전쟁은 막 시작됐지만 그들의 전쟁은 그때 끝났다. ■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 고( 故) 김창학 하사와 전병익 중사 적함과의 교전 막바지에 중상을 입은 김창학과 전병익은 응급수술을 받기 위해 사병식당으로 옮겨졌다. 먼저 김창학의 윗옷을 벗기니 복부 여러 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업혀 들어온 전병익은 왼쪽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회백색 폐부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피를 많이 흘린 이들은 연신 물을 찾았다. 주계장 조경규가 물컵을 입에 가져다줬으나 힘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솜에 물을 적셔 입에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면서 “적함은 요…?”라고 물었다. 항해사 최영섭 소위는 “격침했다. 살아야 해. 정신 차려”라고 외쳤다. 이 말에 이들의 눈빛이 환해졌다. 두 사람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한민국…”이라고 하면서 숨을 거뒀다. 지켜보던 대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강원 평강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되던 1947년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해군 장교(해사 3기)가 된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 는 평소 병사들에게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자”고 말해 왔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순간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회고록 ‘6·25 바다의 전우들’을 통해 증언했다. 이렇게 국민의 힘으로 탄생시킨 백두산함은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지만 큰일을 해냈다. 백두산함이 수평선 끝에 걸쳐 있던 ‘검은 연기’를 확인하지 않고 동해로 갔다면 부산은 위태로웠을지 모른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 군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600여 명이 기습 침투상륙하면 그대로 점령됐을 수도 있었다. ■ 6·25남침전쟁의 분수령이 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해전’ 평가 백두산함은 3일정도 훈련을 한 뒤인 6월26일, ‘옥계해전’ 전개에 따라 동해안 작전지원을 위해 이동하던 중, 우리 군의 헛점을 찔러 부산 앞바다로 우회하여 기습 침투하려는 북한 함정을 발견하여 대한해협에서 격침시킴으로써 6.25남침전쟁의 첫 승전보를 알렸다.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에 의하면 ‘대한해협해전’은 6·25남침전쟁 발발후 우리군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북한은 ‘대한해협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해상작전을 바꿔야 했다. 따라서 “북한군은 지상군 작전과 연계해 무장 게릴라 병력을 해안에 상륙시킨다는 작전을 철회하고 서해안 도서지역 침투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미국 군사연구자들도 대한해협해전을 높이 평가했다. 6·25남침전쟁 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첩보 임무를 수행했던 노만 존슨 박사는 1991년 출간한 책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특수요원 600~700명이 해로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투입됐다. 다행히 부산 인근 해상에서 이 위장선이 한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이 사건이 6·25전쟁의 분수령이 됐다”고 적었다. 2007년 미 해군연구소가 발간한 ‘한국전쟁과 미 해군’에는 “600여 명의 북한군이 탑승한 무장 수송선이 거의 무방비 생태였던 부산항을 향하고 있었다. 백두산함이 적 위장함을 침몰시킨 이후 부산은 한반도에서 연합군의 최후 보루가 됐고, 증원 병력과 물자의 주요 도입항이 됐다. 백두산함의 승리는 그만큼 중요했다.’”라고 기록되어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아 놓았다. 또한 이 책은 “백두산함의 적함 격침은 중요한 항구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아찔한 국가적 위기를 막았고, 이후 모든 지원이 가능해져 유엔군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우리 국민의 성금을 모아 무기를 장착한 눈물어린 애국의 결정판이자 해군의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6·25남침전쟁 초기에 큰 위기에 빠질 뻔했던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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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4-15
  • [김희철의 전쟁사(54)]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ㆍ25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아침은 평온했다. 우리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은 전날 밤 늦게 진해에 입항했다. “미국에서 사온 배를 한번 보여 달라”는 요청이 많아 동해, 서해, 남해의 여러 기지를 돌고 복귀한 것이다. 마침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영외 거주자들은 집으로 퇴근했다. 당일 오전, 당직근무를 하던 갑판사관 최영섭 소위(예비역 해군 대령, 현 최재형 감사원장의 부친)가 당직하사관과 함께 군함 청소를 마쳤을 때, 통제부사령장관(현 당직사령)이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장병들을 급히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정오 무렵 승조원 전원이 집결하자 최용남 함장은 “적군이 오늘 새벽 동해안 옥계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동해로 출동한다”고 밝혔다. 대원들은 그때까지도 전쟁이 시작된 줄 전혀 몰랐다. 흔히 있는 소규모 침투 정도로 생각했다. ■ 죽을 각오로 적함에 접근해 공격하여 승리를 쟁취한 ‘대한해협 해전’ 6월25일 오후 3시 백두산함은 소해정 YMS-512정과 함께 진해항을 출항했다. 부산에서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오후 8시 10분경, 울산 부근 해상을 지날 때 우현 견시병(見視兵)이 “우현 45도 수평선에 검은 연기 보임”이라고 외쳤다. 갑판사관 겸 항해사 최영섭 소위가 쌍안경으로 보니 검은 연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해는 이미 넘어갔지만 하지 때라 잘 보였다. 잠시 항로를 벗어나 검은 연기의 정체를 확인하고 뒤따라가도 늦지 않을 듯싶었다. 마침 함께 가던 소해정의 속도가 느려 백두산함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차였기에 소해정을 먼저 옥계 해안으로 보냈다. 백두산함은 15노트 속도로 빠르게 검은 연기 쪽으로 달려갔다. 1시간 반쯤 항해하니 선체를 새까맣게 칠한 괴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배 이름이 없었고 국기도 달려 있지 않았다.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묻는 발광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밤 10시 30분경,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했다. 그러자 괴선박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속력을 높였다. 거리는 300야드(약 270m)까지 좁혀졌다. 괴선박의 갑판 위에 무장 병력이 가득했다. 코 모양을 보니 동양인이었고 600명은 넘어 보였다. 앞쪽에 큰 대포가, 뒤에는 기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아, 인민군이구나….’라는 판단을 하고 급하게 속력을 높여 3000야드(약 2700m) 거리로 물러났다. 최용남 함장은 장교 7명을 모아 냉수로 건배를 제안했다. “괴선박은 인민군 군함이 틀림없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살아서 마시는 마지막 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 해군본부에 공격 허가를 요청했다. 밤 12시가 지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26일 0시 30분경, 3인치 함포에서 첫발이 발사됐다. 그간 모의탄으로만 훈련하던 백두산함이 실탄 사격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적함은 기다렸다는 듯 함포와 기관포로 응사했다. 적함의 화력이 더 우세했다. 백두산함의 포탄은 100발이 전부였다. 20~30발을 쐈으나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서 거의 맞지 않았다. 최함장은 여기서 포탄을 다 쓰면 동해안에 상륙한 적군을 격퇴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제한이 된다고 판단했다. 최용남 함장은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가까이 가면 우리도 맞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나, 어쩔 수 없이 죽을 각오를 하고 “적함에 접근해 공격한다.”라고 결심했다. 이에 대원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행동했고, 백두산함은 최고 속력(18노트)으로 돌진해 500야드(약 450m) 거리에서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중 한발이 적함 함교에 적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어 마스트(돛대)가 꺾였고 기관실에도 여러 발이 명중했다. 최초 발견 후 5시간이 지난 새벽 1시10분경 연기에 휩싸인 적함이 왼쪽으로 기울어져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가라앉는 적함의 흘수선(배와 수면이 접하는 선)을 계속 때렸다. (하편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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