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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9)] 성공의 비결 3가지는 자기일에 정통,·미리 계획하고 행동,·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84년 사단 사령부에 전산실이 새롭게 설치되었다. 그곳은 기온에 민감한 컴퓨터들이 있어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시원하고 겨울에는 난방이 잘되어 환경은 좋았지만 출입제한 구역이었다. 그래도 작전장교는 확인 방문이 허용되어 가끔 들려 차를 한 잔씩 했다. 전산실에서 전산 장교로부터 장비들과 업무 및 기능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생도시절 전산을 배울 때 키펀치 카드로 컴퓨터 언어를 구사했던 기억들이 새록 새록 떠올랐다. ■ 콜럼버스 달걀 같은 ‘장애물 및 장벽 전산화’로 창의성있는 전투준비 인정받아 '식소사번(食少事煩)'은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는 뜻으로 제갈공명이 위나라 명장 사마의와 대치하고 있을 때 나온 사자성어이다. 사단 작전장교의 업무 중에 가장 실속없이 바쁜 것은 군단 및 군사령부에서 요구하는 현황 파악 보고였다. 당시에는 모든 것들이 수기로 작성되어 병력・장비・물자・진지・장애물 등의 현황이 매번 파악할 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가장 급한 것은 전투지휘검열을 앞두고 정확한 현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우선, 지뢰지대, 낙석, 도로대화구 등 장애물 현황을 정확히 유지하도록 고민을 하던 중에 전산실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전산장교와 상의를 했더니 전산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비문인 장애물이력카드를 전산장교에게 건네면서 장애물 번호, 장애물 위치와 종류, 갯수 및 담당부대 등의 순으로 입력하도록 협조했다. 일주일 동안의 작업이 끝나자 전산 출력지에 장애물의 모든 현황이 입력되어 책 한권이 되었다. 이를 바로 비문으로 등재하고 전투지휘검열 시에 장려사항으로 제시하기로 했다. 전투지휘검열이 시작되자 하루 동안의 행정 검열에 이어 예하부대 별로 개인 및 공용화기 사격 측정, 그리고 비상 발령되어 부대 전체가 출동 준비를 하고 진지에 배치되었다. 사단장과 참모들이 소속된 사령부는 부여된 상황에 따라 진지 변환 및 예비 지휘소로 이동하면서 전술적 상황조치와 지휘부의 지휘절차 역량을 평가 받았다. 평가 결과 군단장 방문 시 부대 지휘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주요 현장 사진 위주로 꾸며진 새로운 방식의 보고서와 함께 1984년 당시에는 콜럼버스 달걀처럼 군 역사상 최초였던 ‘장애물 및 장벽 전산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창의적으로 전투준비를 한 사단장의 지휘역량이 돋보이며 검열 분위기가 칭찬 위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영근 장군(육사27기)이 강조했던 성공하는 비결인 “첫째, 자기일에 정통하라. 둘째,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셋째,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는 세 가지가 적용됐을 뿐만 아니라, 손자병법에 제시된 장수의 덕목과 자질인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을 실천한 김관진 작전참모(육사28기)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멋진 전투지휘검열 수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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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2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8)] 성공의 비결 3가지는 자기일에 정통,·미리 계획하고 행동,·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성공한 인물들에게는 항상 훌륭한 스승과 탁월한 참모가 있었다. 그들의 조언과 질책이 있었기에 소수의 엘리트들이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을 주면서 사회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직업군인도 마찬가지이다. 모시던 상관의 조언과 꾸지람이 더 훌륭한 후배를 양성하게 만든다. 기무사령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송영근 장군(육사27기)은 부하 및 후배들에게 항상 다음과 같이 세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자기일에 정통하라. 둘째, 미리 계획하고 행동하라. 셋째, 항상 새로운 것을 제시하라. ■ 연락이 두절된 작전장교의 행방은 춘천 공지천 뱃놀이… 사단장 재임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단연코 전투지휘검열로 사단장 재임기간 중에 딱 한번 계획되어 있고 사단장의 지휘역량과 성과를 평가받는 검열이다. 게다가 전투지휘검열 수검 준비와 병행해서 군단장의 방문이 계획되어 있어 작전참모 지침에 따라 부대 지휘성과를 설명하기 위해 주요 현장 사진을 위주로 꾸며진 새로운 방식의 보고서를 준비했다. 당시 전방부대에는 진지공사가 한창이었고 각 연대로부터 구축한 진지, 새롭게 설치한 낙석 장애물, 화목으로 제작한 조명목, 전투준비 시간 단축을 위한 보조물과 기동로 개설 등의 사진들을 모아서 보고서에 붙였다. 특히 진지 앞에 우거진 녹음을 제거하는 사계청소가 관심 사항이었다. 필자는 대성산 북쪽 방향에 편성된 진지 앞 사계청소 실태를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인화 설비가 없는 전방부대이다 보니 사진을 인화하려면 춘천시로 가야 했다. 토요일 아침에 필름을 들고 춘천을 가면서 가족과 같이 동행했다. 버스안에서 두손을 꼭잡은 가족과 결혼 후 모처럼 허가된(?) 여행을 떠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고 인화하는 동안에 점심을 먹고 공지천에서 뱃놀이도 즐겼다. 저녁 무렵 준비한 사진들을 들고 부대로 복귀했는데, 선배 작전장교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오후에 갑자기 보고서를 점검하겠다는 사단장(민찬기 소장, 육사16기)의 호출이 있었고 참모는 사진 준비를 확인하고 필자에게 연락해 빨리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당시에 핸드폰도 없는 상황에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급해진 참모(김관진 중령, 육사28기)는 사진 자리에 박스만 그려 놓고 그대로 사단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늦게 복귀한 것에 대해 질책을 받을 각오를 하고 초주검 상태가 되어 인화해 온 사진을 들고 참모실로 향했다. 그런데 인접 장교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화를 냈었다는 참모의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그냥 사진들을 보면서 “잘 찍었네. 앵글도 좋고… 수고 했다. 내일 아침에 사진을 부착하여 제대로 된 보고서를 공관으로 넣어 드리자”라고 편안하게 필자를 대해주셨다. 손자가 “지식(智)이 있어야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신의(信)가 있어야 상벌을 공정히 할 수 있으며, 인애(仁)가 있어야 부하를 사랑할 수 있고, 용기(勇)가 있어야 싸울 수 있으며, 위엄(嚴)을 갖추어야 장수의 위치에 임할 수 있다”라고 병법에 제시한 장수의 덕목과 자질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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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25
  • [김희철의 전쟁사(43)]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과시한 학당리 전투(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벨기에 북부 작은 마을 틸렌에 벨기에 육군 제3공수대대 병영 막사 건물이 있다. 정식 이름은 '제3공수대대, 피에르 가일리 부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가일리 대위는 1953년 중공군과의 잣골 전투에서 전사했다. 부대 중앙 연병장 옆 아담한 단층 건물이 ‘한국전쟁 기념박물관’이다. 한국전 참전 부대였던 제3공수대대와 참전 용사들의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아래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84)씨이다. 평생을 군에서 보내고 은퇴 이후에도 한국전 기념관을 위해 헌신해온 그에게 기념관을 소개하는 일은 필생의 과업이자 즐거운 봉사이다. ■ 벨기에 참전용사들의 한국사랑, 작은 마을에 '한국전쟁 기념박물관' 세워 1950년 당시 군사학교를 거쳐 군복무 중이던 페이트씨는 한국전쟁 참전 병사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참전을 결심했다. 참전 당시 하사였던 페이트씨는 벨룩스 대대(벨기에 대대에 룩셈부르크가 소대 병력으로 합류) 구성 초기부터 참여했다. 벨룩스 대대는 약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후 1950년 12월 18일 벨기에 앙베르 항에서 영국 수송선 카미나호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카미나호에는 당시 22살이던 페이트 하사도 타고 있었다. 페이트 씨는 필리핀 마닐라, 일본 사세보를 거쳐 1월 31일 부산항에 들어왔다. 그는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이후까지 남아 남방한계선 진지 구축 공사 등에 참여한 후 그해 9월 4일 귀국할 때까지 거의 만 3년을 한국전쟁에 복무했다. ■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 벨기에군의 임진강・학당리・잣골 전투에 모두 참여 참전 용사 코르넬리 페이트는 기념관에 전시된 지도와 전투 지형 모형 앞에서 벨룩스 대대의 전과를 자랑스럽게 설명하며 특히 함께 싸웠던 영국군과 미군에 뒤지지 않는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강조했다. 기념관 가운데에 놓인 패널에는 매일 매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숫자가 표시된다. 단 한국전 참전 벨기에 병사의 총 인원은 3171명, 전사자 106명으로 이 숫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국 후 죽은 전우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수는 수시로 바뀐다. 아직 살아 있는 전우는 1075명. 사망자 비율은 66.1%. 참전 용사 대부분이 이제는 70대 후반이나 80대여서 생존자 숫자는 더 빠르게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1985년 근 40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페이트씨는 1990년 옛 전우들과 함께 ‘한국전 기념관’을 만들었다.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 한국전쟁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한 페이트씨와 동료들은 제3공수대대의 도움으로 아담한 전시실을 마련하고 손수 전시물품을 채웠다. 그들은 옛 전우들로부터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영국군 및 미군 측 자료도 구해 전시관을 꾸몄다. 페이트씨는 "처음 시작할 때는 보잘것없었지만 이후 조금씩 더 나아졌다. 처음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국전 기념관 전시실 입구에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가일리 부대에 들어오면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기념관에서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와 전쟁 직후의 한국을 기억하는 페이트씨에게 한국의 발전은 경이와 보람이다. 그는 "3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많은 한국인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데 대해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 인생을 이보다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페이트씨에게 6・25남침전쟁은 '잊혀지지 않은 전쟁'이다. 지구 반대편의 참전용사들도 잊지 않는데, 하물며 전쟁 당사자인 우리 국민들은 ‘6・25남침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 최악의 비극을 반드시 기억하고 되풀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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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3-25
  • [김희철의 전쟁사(42)]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과시한 학당리 전투(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방부는 지난해에 이어 4월20일부터 '9・19 군사합의' 합의사안인 남북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준비차원에서 벨기에군이 전투했던 화살머리고지일대 우리측지역에서 지뢰제거 및 유해발굴 작업을 재개했다. 우리 군은 지난해 총 2030점(잠정 유해 261구)의 유골과 6만7476점의 유품을 발굴했으며, 국군 전사자 일곱분의 유해에 대해 신원확인 및 유해봉안・안장식을 거행했다. 또한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해 비무장지대내 잠들어 계신 만여 분의 6・25전쟁 전사자에 대한 유해발굴을 지속해 마지막 한 분까지 하루빨리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의 품으로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영국군과 미군에 뒤지지 않는 벨기에군의 용맹성을 과시한 학당리전투 38도선 인근이었던 철원군 바로 위쪽 지역인 화살머리 고지에서 격전을 치룬 학당리 전투는 6.25남침전쟁 당시 벨기에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서 발생한 국지전으로 1951년 10월10일부터 13일까지 벌어졌다. 벨기에군은 중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은 철원군을 확실히 확보하게 되었다. 화살머리 고지는 1.5km 정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은 지역으로 각 방향마다 수백 미터나 되는 평지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고립된 능선이다. 화살머리 고지는 대부분이 암석 지역이며 엄폐하기에 완벽한 지역이기도 했다. 북쪽 끝 지점은 고지에서 가장 가파르고 높은 지역이었고 중앙 지역은 최남단 지역의 암반 노두 직전에 위치한 고원 지대였다. 이곳은 미국 육군에 의해 391고지로 명명되었다. 벨기에 대대가 학당리에 도착한 것은 1951년 10월 10일 오후 2시쯤이었다. 벨기에 대대는 다른 유엔군 위치보다 4마일 정도 앞으로 돌출된 무인 지대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있는 미 65보병여단이 1951년 10월 10일부터 담당하는 곳이기도 했다. 벨기에 대대 도착 직후 C 중대가 북쪽 봉우리에 자리 잡았고 B 중대는 중앙 고원의 북쪽 구역에 참호를 파고 대기했다. 남쪽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할 수 없다는 판단과 박격포 공격을 위한 본부로 사용될 것이라는 점에서 40명의 중화기중대가 그 지역에 자리잡았는데 이 지역은 대대의 다른 부대와 약 300m에서 4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벨기에 파견대는 일반적 분견대인 900명보다 훨씬 적은 560명으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로 전력이 부족했는데 이는 1951년 2월부터 한국 전쟁에 참전한 많은 용사들이 부대 전환 배치로 인해 귀국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A 중대를 구성하고 있는 룩셈부르크 파견대도 마찬가지였다. 1951년 9월 한국 전쟁에 처음 참전한 벨기에 군인들은 귀국했고 보충 병력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화살머리 고지 도착 직후부터 벨기에군은 중공군 76mm 포와 박격포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벨기에 병사 1명이 전사했고 몇몇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10월 10일 저녁에는 중공군 정찰대가 B 중대의 위치를 향해 처음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 위치를 사수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을 인지한 미 3사단의 사단장 로버트 소울은 학당리에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도 했었다. 10월 11일 밤에 벨기에군은 또다시 인접 지역인 317고지로부터 날아오는 중공군 60mm 포에 피해를 입었다. 1951년 10월 12일 이른 새벽 소규모의 중공군 공세가 재개되었다. 오전 3시 45분에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적 정찰대가 중화기중대를 공격했다. 미군이 105mm 포와 155mm 포로 중화기중대를 지원하여 적은 격퇴했다. 이 공격으로 벨기에 병사 1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는데 부상자 중 2명은 카투사 대원이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B 중대의 정찰대가 488고지를 올라가 점령한 뒤 이 곳을 중공군 관찰지대로 삼았다. 2번째 정찰 부대가 317고지를 오르던 중 파괴된 적 무기고를 발견하고 학당리로 돌아왔다. 그 날 야간에 두꺼운 안개가 끼면서 오후 11시 30분부터 중공군은 안개를 틈타 중화기중대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 부대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철조망을 타고 정찰 부대의 최전선을 향해 진격했다. 철조망에는 기관총과 조명탄이 있었기 때문에 벨기에 대대는 이것을 이용하면서 중공군을 타격할 수 있었다. 동시간대에 B 중대와 중화기중대도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공군 부대는 벨기에군의 지휘부로 쓰이던 지역까지 점령했다. 13일 새벽 2시에 새로운 중공군의 공세가 중화기중대를 향해 또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벽 4시가 되자 주공세는 격퇴되었고 벨기에군은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격렬한 전투 속에서 중공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동이 틀 무렵 오직 4명의 중공군 병사만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코만도 작전과 폴차지 작전에 참여한 중공군 제141사단 병사들이었다. 벨기에군은 정오 즈음 317고지를 다시 확보했지만 C 중대의 정찰대는 488고지에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안개가 걷힌 후 벨기에 전선에서는 98구의 중공군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실질적인 중공군의 피해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후 미 3사단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벨기에군은 UN군 방어선 일대로 철수해야 했으며 이들은 362고지에 재배치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벨기에군은 ‘학당리’라고 쓰여진 부대 깃발을 수여 받았고 또한 전투에 참전한 벨기에군 용사들에게 ‘학당리 훈장’도 추가되었다. (하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7)] 잘 싸우는 장수는 상대방을 마음대로 조정하지 상대방에게 조정 당하지 않는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전자, 치이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허실편(虛實篇)에 나오는 말로 “잘 싸우는 장수는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지 상대방에게 조정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직업군인은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하지만 업무나 인간관계 등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평시의 일상 속에서 주도권은 법과 규정의 범주 안에서 발휘될 수 있다. 작금의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상호 분쟁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 작전장교가 정확하게 점검했으니 이해하고 진정하세요…! 녹음기에 접어 들면서 적들의 침투가 예상되자 상급부대로부터 매복작전이 철저히 시행될 수 있도록 지휘감독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어 사단에서는 매복실태를 확인 점검하게 되었다. 필자는 소대장 시절 매복작전에 투입되었던 소대원들이 대대장의 불시 현장확인에서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기대를 하며 예하부대의 매복작전 시행을 불시에 점검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각 연대는 1~2개소씩 대성산 기슭의 접근로에 매복조를 운용했다. 필자는 야간 해트라이트 불빛이 매복작전에 방해되기 때문에 짚차를 인접 부대에 대기시켜 놓고 은밀하게 매복진지에 도착하자, 매복조는 수하 및 검문도 안하고 완전히 기습을 당한 꼴이 되었다. 추정하건데 당시의 매복조는 사단 작전장교가 심야시간 불시에 점검을 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인솔장교를 포함한 모두가 야영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실제로 각 개인의 안면위장, 휴대장비, 진지간 신호줄 및 크레모아 설치, 실탄 휴대량 및 신호규정을 확인한 결과 모두가 엉망이었고, 심지어 인솔자의 상황판에도 매복장소에 대한 도식이 하나도 없었다. 너무도 한심해서 현지에서 모든 것을 직접 교정해주고 아침이 되어 철수할 때까지라도 매복작전을 잘하라고 당부하며 다음 점검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날 아침에 점검 결과를 참모에게 보고했고, 작성된 매복점검 결과와 앞으로 더욱 철저하게 작전에 임하라는 강조 지시를 예하부대에 하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김관진(육사28기) 작전참모의 인터폰 호출이 있었다. 참모실 앞에 도달하자 문 앞에서 결재를 대기하던 동료 장교가 예하부대 연대장이 참모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는 귀뜸을 해주었다. 작전참모 책상에는 필자가 작성하여 사단장 결재를 득한 점검결과 문서가 놓여 있었고, 그 연대장은 참모에게 이러한 점검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항의하며 얼굴이 불거진 상태였다. 참모는 연대장의 항의에 당황하면서 필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비록 대위 계급의 하급 작전장교였지만 계급이 높다고 참모를 몰아붙이는 대령 계급의 해당 연대장에게 필자의 노트를 보여주며 말문을 열었다. “연대장님, 작전 중에 점검하는 법이 어디 있으며 너무 심하게 지적한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이 노트를 보십시오…”하며 결재 받은 지적사항 이외에 추가로 지적한 주변 술병 및 과자봉지 등 전장정리와 진지 위장상태 미흡, 음어 미휴대, 신호규정 미숙지, 야간 필터를 미장착한 후레쉬 등 하달 지시문에 미포함된 추가 지적 사항을 나열하며 “차마, 이러한 추가 지적 사항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생략했습니다”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러자 참모는 웃으며 “작전장교가 정확하게 점검했으니 이해하고 진정하세요”라고 연대장을 달랬다. 얼굴이 더 붉어진 연대장은 한숨을 쉬며 참모에게 사정하듯 “매복작전을 내보낸 지원중대장이 이번에 진급해야 하는데 이 지적으로 누락될까 걱정이다”라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 둔필승총(鈍筆勝聰)으로 상대방을 주도할 히든카드를 준비하는 것 소・중대장 시절에는 헌병(지금은 군사경찰)들에게 불시 검문 등 필요 이상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사단 책임지역 내에서도 헌병초소를 통과하려면 휴가증 및 출장증이 반드시 있어야 했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장교라도 헌병 병사가 휴대품을 점검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며 응해야 하는 등 호가호위(狐假虎威)하던 헌병의 위세는 계급을 초월하여 너무도 당당했다. 사단 작전장교가 되어서는 그동안 당했던 헌병(현 군사경찰)들의 무리한 제재와 호가호위(狐假虎威)를 고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예하부대 확인 점검을 할 때마다 그 주변 헌병초소와 막사를 들러 작전태세의 미비점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의식을 개선시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러한 필자의 활동은 헌병대에 근무하는 장병들에게 소문이 났고 그 보고를 받은 헌병대장 역시 작전참모를 찾아와 항의를 했다. 손자가 ‘선전자, 치이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의 의미같이 필자는 모든 일에서도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법과 규정의 범주 안에서 히든카드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점검 결과를 기록하고 보고는 안했지만 필자의 노트 속에는 각 초소별로 확인 점검하여 지적했던 사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필자는 참모보다 선임이었던 헌병대장에게 초소별로 총기 및 실탄관리 부실, 초소내 음식물 비치 및 부착물 미준수, 두발 및 복장불량, 암구호 미숙지, 막사주변 화재 등 안전사고 예방 미흡 등의 지적사항들을 설명하면서 “본부의 식구이기 때문에 위로는 보고를 안하고 현지에서 시정시켜 작전에 기여하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지 않냐?”고 되려 반문하여 참모의 위신을 높히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손자의 “잘 싸우는 장수는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지 상대방에게 조정 당하지 않는다”는 병법을 은연중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 강조했던 둔필승총(鈍筆勝聰, 둔하고 부족한 "붓"이 총명한 머리보다 더 낫다)을 실천해 기록을 유지했던 결과였다. 또한 직업군인으로서 주도권을 갖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있게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주도할 히든카드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24
  • [김희철의 전쟁사41)] 6.25남침전쟁의 지리한 고지 및 참호전 직전의 마지막 기동전인 마량산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에서 '코만도 작전(Operation Commando)'은 1951년 10월 3일부터 10월 15일까지 유엔군에 의해 수행된 공세적 기동전이다. 국군 1보병사단과 1영연방사단을 포함한 미 1군단은 제임스타운 선을 포위하여 중공군의 제42군, 제47군, 제64군, 제65군을 섬멸하였다. 317고지 또는 마량산이라 불리는 이 고지는 코만도 작전의 격전지였으며 참호전이 되기전에 치루어진 호주군의 마지막 기동 전투였다. 이 공세 이후 공산군은 서울 인근의 유엔군 보급선을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 ■ 임진강 일대의 ‘마량산(317고지) 전투’로 유엔군의 ‘코만도 작전’ 완결 미 1군단의 공세인 ‘코만도 작전’은 민덴 작전 동안 새로 형성된 와이오밍 선에서 1951년 10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1951년 10월 8일까지 공세는 지속되었고 와이오밍 선 남쪽의 몇몇 고지가 공산군의 수중에 있었지만 유엔군은 와이오밍 선 대부분을 수복했다. 폴차지 작전을 통해 남아있는 고지들이 포위되었고 전선도 10km 북상했지만 미국 1기병사단은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일본으로 철수했다. 코만도 작전의 마지막 전투는 10월 8일까지 이어졌지만 양측 간의 공방전은 중공군 춘계공세 때와 유사하게 임진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작전에서 승리한 결과로 공산군의 유엔군 보급선 차단 기도를 거부시킨 성과도 올렸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과 유엔군은 전면적 공세보다는 지연전과 교착전에 초점을 두었다. 호주군이 참전한 전투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제1차 마량산 전투로 알려져 있다. ■ 호주군의 ‘능선 달리기(Running the ridges)’ 기동전을 끝으로 참호전으로 고착화돼 마량산 전투(Battle of Maryang-san)는 전선이 고착되어 지루한 참호전이 되기 직전인 1951년 10월 3~8일에 치루어진 호주군의 마지막 기동 전투였다. 호주군 3대대가 소속된 1영연방사단은 임진강을 건너 중공군 19사단으로부터 고지 전선을 탈취하려 시도했다. 중공군의 전선은 연속적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주요 고지위에 중대 및 대대 규모의 참호들로 포진되었다. 3대대를 지휘하는 프랭크 하세트 중령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처음 개발된 전술을 사용했다. 일명 ‘능선 달리기(Running the ridges)’라 불린 이 전술은 산비탈을 올라가는 대신 고지의 이점을 살리며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능선을 따라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10월3일, 뉴질랜드 16야전 포병연대 및 영국 국왕의 아일랜드 8기병대의 센츄리온 탱크를 지원 받은 28여단의 공격으로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3대대 B중대는 199고지를 확보했으며 하세트 중령은 이 고지를 이틀 후 마량산 능선을 따라 가할 집중공격을 위한 기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한편 C중대는 남쪽의 다음 고지인 고왕산을 공격하는 영국 국왕의 슈톱샤이어 경보병대(KOSB)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슈톱샤이어 경보병대(KOSB)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그 다음날 C중대가 북동쪽으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비로서 ‘능선 달리기(Running the ridges)전술’ 시행을 위한 여건이 조성된 마량산에 대해 10월5일부터 위의 상황도처럼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우선 호주군이 마량산 남쪽으로 집중공격할 것이라고 중공군을 속이면서 A중대는 평행 능선을 따라 서쪽을 공격하여 진지를 확보하고 그 지역에 중공군의 예비대를 끌어들였다. 최북방 능선을 타고 가해진 집중 공격은 일련의 중대 공격들로 이루어졌다. 먼저 B중대는 위스키 지형을 확보하고 D중대가 돌파 공격으로 중공군 진지 2개를 확보하는 동안 화력 지원을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고왕산으로부터 우회로로 진격한 C중대는 능선 봉우리를 따라 B중대와 D중대를 초월해 마량산 정상을 신속하게 점령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경첩고지(The Hinge)’와 ‘217고지’가 중공군 수중에 남아 있었다. 3대대가 고지 전체를 확보하기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단장은 왕립 노섬벌랜드 퓨질리어(RNF)를 파견해 217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0월7일, 마량산 줄기를 따라 전선을 수습한 용맹한 3대대는 계속 공격하여 ‘경첩고지(The Hinge)’마저 점령했다. 때마침 역습을 위해 중공군 571연대 3대대가 도착했고 호주군 참전이래 최악의 경험이었던 적의 포격과 방금 도착한 중공군 대대의 연속 공격이 이어졌으나 호주군은 결사적으로 막아냈고 영국군 대대가 마량산에 도착하면서 전투는 끝났다.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중공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2km 떨어진 다음 고지선으로 후퇴하며 ‘217고지’에서도 철수 하였다. 결국 코만도 작전이라 불리는 미국 1군단의 제한 공세 기간 전투에서 중공군은 결국 임진강에서 제임스타운 선까지 밀려나게 되었고, 중공군의 4개 사단은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후 휴전 협정이 진행되면서, 이 전투는 6개월 간 이어진 기동 공세의 마지막 전투로 남게 되었다. 이후 6.25남침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 전선과 비슷하게 고지전 또는 참호전이라 불리는 지루하고 고착된 전선에서 제한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고, 이 전선은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밀고 당기는 접전이 계속되다가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오늘날, 이 마량산 전투는 용맹한 호주 육군이 6.25남침전쟁에서 중 보여준 뛰어난 활약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23
  • [김희철의 전쟁사(40)]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9월30일 7사단으로부터 백석산 공격 임무를 인계받은 8사단 10연대는 1대대를 좌, 2대대를 우, 그리고 3대대와 대전차 공격대대를 예비로 편성하고 오전 6시에 공격개시선으로 진출, 공격준비사격 후 1대대를 시작으로 공격했다. 1대대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 9시경에는 2,3중대가 적진의 일각을 돌파하고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적의 저항에 수류탄 축척거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완만한 경사를 타고 올랐으나 백석산 우측 봉우리에 완전히 감제되어 전진이 어려웠다. 이에 연대 수색중대를 우측방에 보내 공격의 활로를 개척하려 했으나 이조차도 막히고 말았다. 다음날 10연대 1대대는 이른 아침의 안개를 끼고 재공격을 했으며, 3시간의 혈전 도중 우군 전투기들이 백석산을 폭격하자 일제히 돌격을 개시해 백석산의 좌측 봉우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우측의 2대대는 이날도 여전히 백석산 북쪽 1050고지의 적을 제압하지 못해 공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3대대의 공격을 저지한 백석산 우측의 적들이 좌측 봉우리에서 밀려난 적들과 합세해 좌측 봉우리로 역습을 실시하였고, 이에 1대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한편 2대대는 자신들로 인해 공세가 지지부진하자 재공격을 감행해 우측 9부 능선에 도달했고, 이에 적 역습부대가 2대대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2대대가 적의 어그로를 끄는 사이, 재편성을 마친 1대대는 1중대를 선두로 재돌격해 백석산 주봉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뒤이어 2대대도 5,6중대가 우측 봉우리를 점령해 백석산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점령 과정에서 6중대 공재호 하사가 대공포판을 등에 지고 단신으로 기암절벽을 기어올라 적의 기관총 진지를 수류탄으로 잠재우고, 적 산병호에도 사격을 가해 돌격의 기회를 여는 수훈을 세웠다. 한편 번개부대인 16연대(2005년 필자가 연대장으로 재직)는 중공군과 접전을 벌인 끝에 백석산 서쪽 743, 650고지를, 10월12일에 인근의 977고지를, 10월16일에는 931고지를 점령했다. 이때 적은 10월10일부로 북한군 5군단이 후방으로 철수하고, 그 자리를 원산방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공군 20병단 예하 68군이 맡아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백석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 8사단은 오뚝이처럼 적들이 부대교대로 혼란한 틈을 타 백석산 북쪽까지 진출, 10월 15일 748고지, 도피막, 1090고지 서쪽을 점령한 뒤 10월 18일 미 2사단으로부터 1220고지를 인수받아 이곳을 발판으로 최종목표 1090고지 공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 백석산 전투후,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당시 전선이 유지되어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됨 백선산 전투와 연계된 전투기간은 최초 8월18일부터 시작되어 최종 10월28일까지 였다. 전투기간중의 전과는 적 사살 1,460명, 포로 101명이었으며, 아군 피해는 전사 244명, 부상 1,165명, 실종 14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렇게 우리 국군이 작전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은 백석산과 그 주변을 완전히 장악한 결과 중공군의 주 방어선은 최소한 이보다 5∼10㎞ 북쪽의 어은산(1277) 일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우측 단장의 능선과 문등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이후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를 비롯, 국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중공군이 어은산 방면으로 퇴각하자 10월 25일부터 휴전회담도 재개되어 백석산 일대의 전투가 종료되었고, 이 전선은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밀고 당기는 접전을 벌이다가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결정되었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2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6)]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 (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접 부대장인 이진삼 군단장(육사 15기) 주관으로 오후 2시에 시작된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은 당시 상황에 적절하게 필요한 내용으로 잘 진행되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장수의 5개 덕목인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이 시범을 주관한 이진삼 장군과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비교하며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 위엄 있고 저돌적인 용장(勇將)인 이진삼 군단장 특히 아군 진지를 구축할 때 보기 좋게 전시효과적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침투한 적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위장을 잘하여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실물 시범을 보인 것은 매우 유익했다. 또한 야간에 접근하는 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진지 사계 청소하면서 확보된 나무들을 모아 진지 앞 적의 접근로에 원두막식의 조명목을 설치하는 것은 모든 예하부대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시범 준비부대의 연구개선안 발표와 신랄(辛辣)한 토의가 끝나자, 왜소하지만 당차 보이던 이진삼 군단장은 채양이 유난히도 큰 전투모에 규격보다 큰 삼성별을 달고 위엄 있게 지휘봉을 휘두르며 훈시를 시작했다. 이 장군은 609특공대장을 지낸 대위시절 응징보복작전으로 3번에 걸쳐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 35명을 사살했고, 남파된 무장공비들도 본인이 포복으로 접근해 수류탄을 투척하여 척살시킨 이야기로 말문을 열어 무려 두시간 넘도록 자신의 무용담을 쏟아 냈다. 이미 석양이 들기 시작하여 다음 순서인 현장견학 시간이 촉박하게 되었다. 헌데 자신의 말에 도취된 이장군은 사단장 시절 적들이 잘 보이는 가칠봉 정상에 수영장을 만들어 적들을 현혹시키게 만들었고, 심지어 테니스 게임에서 패배한 적도 없다며 본인의 태권도 7단 실력을 과시하듯 간부들과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앞차기와 옆차기 시범도 보였다. 거품을 물며 열변을 토하던 이 군단장은 석양이 서쪽산에 걸리자 훈시를 부랴부랴 끝냈다. 물론 날이 저물어 먼 길을 이동하여 복귀할 참가자들은 현장견학을 생략한 채 출발했고, 시범을 준비한 부대원들은 훈시를 마친 이진삼 군단장이 칭찬하자 성공적인 시범이었다고 모두 자축하는 모습이었다. ■ 현재와 미래의 직업군 리더들이 조직관리 위해 꼭 필요한 인자무적(仁者無敵)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에서 용장(勇將)으로서 4차원같으면서도 특별한 인상을 남겨준 이진삼 군단장은 하나회로 노태우 정부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 참모총장을 거쳐 체육부 장관을 역임 후 18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본인은 군인출신으로 제대후까지도 차고 있는 군번줄을 보여주면서 수감 중인 현역군인 간부들의 군번줄을 확인하며 군인의 기본자세를 강조하는 엄장(嚴將)이라는 것을 과시했고 ‘군번줄 의원’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반면에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지휘세력을 타격하겠다.”, “개성공단 인질 억류 시 군사조치를 취하겠다”라면서도, “본인은 전쟁주의자가 아니다. 전쟁 예방 주의자이며 전쟁을 하고 싶지 않지만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강한 의지를 나타내며 용장(勇將)임과 동시에 엄장(嚴將)임을 밝혔다. 당시에 북한은 그를 한국사회에서 정치적·대중적·심리적으로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김관진 장관 같은 전쟁주의자가 있는 한 평화협상은 불가능하다”는 억지 논리를 내세우며 임진왜란 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 장군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끌어내리려고 했다. 또한 김 장관이 사단 작전참모 재직 시, 무장탈영병 발생하자 본인이 필자의 자리에 앉아 GOP 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라는 단편명령 초안을 직접 작성했으며, 그 초안을 필자에게 전해주며 사단장 결재 후 전문으로 하달하라고 신속하고도 현명하게 처리하는 등의 지장(智將)이었다. 그리고 을지연습 상황회의 브리핑에서도 순발력으로 부하들의 실수를 커버하며 순간의 위기를 넘기는 위기 극복 및 용병을 잘하는 솔연(率然)같은 리더로서, 상관에게는 신뢰와 인정을 받고 부하에게는 존경받는 신장(信將)이면서 인장(仁將)인 작전참모였다. 손자는 ‘장자, 지신인용엄(將者, 智信仁勇嚴)’이라며 장수의 5덕목을 강조했다. 허나 앞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리더의 자질을 중에 첫번째 지혜(智慧)가 가장 중요하고, 믿음(信)과 용맹(勇), 엄격(嚴)도 훌륭한 덕목이지만, 세번째인 ‘인(仁)’이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매우 필요하다. 맹자가 말한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라는 명언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며, 남북 및 대미 등 국내외 관계를 고려한 현재와 미래의 직업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사회 조직의 리더들에게도 산 교훈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3-22
  • [김희철의 전쟁사](39) 6.25 남침전쟁간 혈전의 승부로 휴전선을 결정지은 '백석산 전투'(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6.25 남침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1주년이다.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3년1개월간 벌어진 전쟁에서는 유엔군과 한국군 18만여명이 전사하고 북한군 52만여명, 중공군 90만여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됐다. 남과 북이 격렬하게 맞붙었던 고지전지역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최근 김여정의 대북전단 관련 격한 발언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의 휴전선을 결정하게 된 마지막 전투인 양구 백석산지구 전투를 통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6.25전쟁을 되새겨 본다. ■ ‘백석산 전투’ 전초전인 ‘송현리-송정동 전투’, 7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고지전 백석산 전투는 1951년 9월24일부터 10월1일까지 국군 7사단과 8사단이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와 연계해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의 북한군 32사단, 12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벌인 고지전이다. 1951년 8월 초 7사단은 양구 서북방 파로호 남쪽 캔사스선과 그 북측 신 캔사스선을, 5, 8연대로, 3연대는 그 북쪽 전초선(Badge Line)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북쪽 백석산 일대엔 북한 5군단 예하 32사단과 12사단이 있었고, 32사단은 백석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883고지-901고지-554고지를 요새화한 뒤 남쪽을 향해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14일, 미 8군사령관은 국군 1군단 및 미 10군단의 합동으로 양구군 해안분지 동쪽 낚시바늘 형상의 능선(J Ridge)을 탈취, 해안분지 공격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포박작전(Operation Creeper)’을 하달했고, 이에 미 10군단장은 16일 국군 5사단에게 가칠봉 일대를, 미 2사단에게는 단장의 능선 공격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국군 7사단에겐 작전지역 동쪽의 미 2사단이 단장의 능선 남쪽에 위치한 피의 능선에서 전투를 벌이자, 8월18일 적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전투지경선 너머 피의 능선 서측 554고지 공격임무를 부여했다. 이때 7사단은 554고지 공격에 앞서 인근의 883고지와 901고지를 공격하였다. 3연대는 883고지를 공격하여 8월 18일에 탈취하였지만 북괴군의 역습에 다시 철수했다. 8월 20일 3연대는 밀리고 밀리는 격전 끝에 901고지와 883고지를 점령하였고, 5연대는 양갈래고지를 점령하였다가 8월 21일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했다. 8월 25일 8연대와 전차공격대대가 536고지를 탈취했고 이어 8월 31일 901고지를 9월 2일에는 554고지를 탈환했다. 마침내 3연대가 9월18일 883고지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송현리-송정동 전투’는 막을 내렸다. 7사단은 적의 고지들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기상 악화나 동쪽에서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가 연이어 진행중인 탓에 항공지원이나 포병지원을 효과적으로 받지 못하여 병력이 70% 수준으로 감소해 전멸 상태가 되었고, 지원화기들도 고장나 8사단과 바로 임무교대해야 할 정도로 부대의 재정비가 시급히 요망되었다. 그러나 미 10군단장 Clovis E. Byers 소장은 동쪽에서 병행중인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적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적이 백석산을 확보하고 있는 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7사단에게 교대준비를 미루고 끝까지 백석산(1142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 7사단은 ‘백석산 전투’ 1차전(9.24~27)으로 미2사단 ‘단장의 능선 전투’에 기여 9월24일 당시 7사단은 892, 743, 883, 901 고지를 지키기 위해 좌로부터 5, 8, 3연대 순으로 3개 연대를 몽땅 전방 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북한군 32사단 및 이를 지원하는 12사단은 여전히 백석산을 정점으로 양 능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언제든 반격할 태세라 예비대를 대규모로 구성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기에 우선 8연대가 주공으로 883고지에서 좌측 능선 접근로를 타고 북쪽의 894 고지를 공격했고, 3연대는 901고지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북쪽 300m에 있는 무명고지를 11중대 및 대대화력을 집중 퍼부어 총포와 방망이 수류탄으로 저항하는 적을 혈전으로 물리치고 1시간만에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9월25일 8연대는 894고지를 두고 여전히 난황을 거듭하다 화기중대의 포화로 적의 진지들이 무력화된 틈을 타 백병전을 벌여 결국 894 고지와 백석산의 서남쪽을 흐르는 능선의 남쪽 요지를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3연대 3대대는 동쪽 미 2사단의 1024고지 공격에 호응하듯 전진하며 그 고지가 탈취될 무렵에 서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무렵 국군 7사단은 28일에 8사단과 임무 교대를 앞두고 있는 상태여서 그 전에 공략중인 고지들은 어떻게든 점령해 명예롭게 인계한다는 결의가 있었고, 이에 백석산 전방에 위치한 3연대와 8연대를 앞세워 9월26일 백석산을 공략했다. 우선 3연대 1대대는 1024고지 서측을 점령한 3대대를 지나쳐 백석산 남동측 1060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치달았으나 적의 포격에 물러나고 말았다. 한편 8연대는 2대대를 선두로 894고지로부터 공격을 속개해 항공폭격과 포병지원을 받으며 백석산 정상부에 남북으로 우뚝 솟은 두개의 봉 가운데 남쪽에 있는 봉을 손에 넣고 마지막 봉우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정말 불운하게도 3연대를 화력지원하던 미군 전차의 직격탄이 아군을 덮쳐 많은 피해가 발생했고 공격기세도 꺾이고 말았다. 게다가 이를 기회로 삼은 적의 역습이 이어졌고, 대대는 좌측 봉우리만 겨우 점령한 채 야간방어에 돌입했다. 9월27일 새벽 적군이 역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단장의 능선에서 교대 후 이곳의 적 3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된 적 12사단 소속 부대들이었고, 이 공격으로 8연대는 점령중이던 백석산 서쪽 봉우리도 상실하였으며 직후 실시한 역습도 실패했다. 3연대 측도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3대대가 격전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우측의 미 2사단이 1024고지를 빼앗겨 연대의 우측방이 위협받자 예비대를 투입해 이를 탈환한 뒤 미군에게 인계하였다. 9월28일 자정이 되자 7사단은 노전평 부근 작전지역을 미 해병 1사단에 인계하고 온 8사단에 인수인계 후 육본예비로 전환될 준비를 했고, 공교롭게도 이 날 북한군 측도 32사단과 12사단간의 임무교대가 있었다.(하편 계속)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1-03-1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5)] 직업군인 리더의 자질은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 조직관리는 ‘인자무적(仁者無敵)’(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사자성어는 양나라 혜왕의 질문을 받은 맹자의 답에 나온다. 혜왕은 “예전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진(晉)나라가 지금은 주위 나라들에게 땅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 있는데, 과인은 이를 수치로 여겨 그들을 물리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질문하자, 이에 맹자는 “만일 대왕께서 어진 정치를 베푼다면 이 땅의 모든 사내들은 몽둥이 밖에 없어도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적군을 물리칠 것입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 어진 사람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명언을 남겼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시계편(始計篇)에도 ‘장자, 지신인용엄(將者, 智信仁勇嚴)’이라며 장수의 5덕중에 세번째로 ‘인(仁)을 강조했다. 인(仁)의 마음가짐은 지인기갈(知人飢渴, 부하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아는 것)과 동인노고(同人勞苦, 부하의 수고와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의 자세라고 했다. ■ 지휘세력을 타격하여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북한이 지난 22일 실종자 해양수산부 공무원 A(47)씨에게 총격을 가하고 불로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김정은이 사과발표를 했다며 대단히 만족하는 듯한 행태가 계속되어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2010년에도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있었고 우리는 k-9자주포로 대응 사격을 퍼부었는데, 이 사건으로 취임한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게 준비하라”, “지휘세력을 타격하겠다.”, “개성공단 인질 억류 시 군사조치를 취하겠다.” 등으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4년동안 북한은 도발을 못했다. 또한 김 장관이 북한 군부가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로서 MB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많은 우여곡절 끝에 “국방부 장관에 연임된 것은 김정은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스트레스를 가하게 된 것이다”라며 기사화 되었고 그는 용장(勇將)이면서도 엄장(嚴將)임을 드러냈다. 한편 시인 김지하도 “저토록 무섭고 슬픈 눈을 가진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김관진 장관의 눈은 깊고 그 빛은 강하다. 무서운 것은 강한 빛 때문이고, 슬픈 건 어떤 운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저 깊은 눈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리더는 조직관리를 위해서는 지장(智將)과 인장(仁將)이 돼야 하지만 필자가 사단 작전장교 시절 8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만 모셨던 김 전(前) 국가안보실장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냉혈한도 아니었고, 어떤 운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저 깊고 강한 눈빛을 가진 무서운 자라고도 느낄 수 없었다. 당시 작전참모 김관진 중령은 손자의 장수 5덕중에 지(智)분야에서 탁월하면서도 의외로 소박하고 지인기갈(知人飢渴)과 동인노고(同人勞苦)의 자질을 실천하는 인장(仁將)이었다. 군에서는 가을이 오면 동계를 대비한 추계진지공사가 진행된다. 마침 인접 군단에서 대침투작전 및 진지공사 시범이 계획되어 필자는 작전참모를 수행하여 참석했다. 시범장까지는 약 3시간 가까이 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오전 회의를 마치고 비포장 도로를 따라 출발했다. 사단본부를 벗어나 고개를 몇 굽이 돌아 1시간 정도 지나자 도로가에 고장난 미군 짚차가 한대가 있었고 미군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관진 참모는 차를 세우고 미군들에게 “What's the matter with you?”라고 물어보았다. 미군의 답을 들은 그는 필자에게 가까운 부대에 연락해서 구난차를 보내주어야 하겠다며 그들을 안심시키고 인접부대 위병소에 들려서 응급 조치를 하도록 지시했다. 다시 이동하던 중 점심시간이 되자 마을 식당으로 들어갔다. 늘 김관진 참모에게 신세를 지고있던 차에 모처럼의 좋은 기회다 싶어 화장실에 가는 척을 하고 점심값을 미리 치루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김 참모의 인상이 구겨졌다. “야, 김희철…! 너 어디서 이런 거 배웠어? 상급자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 상급자가 돈을 내는 거야…! 내가 너보다 봉급도 많이 받는데…”하며 본인의 지갑을 열어 식사값을 현금으로 필자에게 내밀었다. 당시 군부대에는 출장비가 없었다. 심지어 소·중대장 시절 임무 수행을 위해 경비가 들어가 비용을 요구하면 상급자는 “장교가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어떻게 경비를 요구하나? 한심한 장교 아니야…?”하는 면박을 받기도 했었다. 짚차 뒷좌석에서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도 못하며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인접 군단의 대침투작전 시범장에 도착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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