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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전쟁사(28)]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 지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제 6허실편의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은 “전쟁에서 거둔 승리는 반복되지 않으므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승리하기 어려우니 끝없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제 3차공세 이후 킬러, 리퍼, 러지드작전 등으로 캔사스(Kansas)선까지 반격하여 북진했고 이어진 제 4차공세까지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중공군의 제 5차 춘계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손자병법 허실편처럼 유엔군의 허를 찔러 국군이 배치된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알몬드의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방어 책임지역을 두고 분규에 빠지는 까닭에 후방이 차단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지속된 공격으로 손자병법의 ‘병형상수(兵形象水)’라는 의미처럼 흐르는 물같이 동부전선에서 오대산 밑의 속사리까지 커다란 주머니 모양의 돌파구가 형성되는 큰 위기를 맞이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미 2사단이 5월18일 하룻동안에도 중공군 1개 사단의 공격을 격퇴시키며 위의 상황도에서 보듯이 퇴각한 국군 5, 7사단이 방어했던 지역의 좌측 ‘벙커고지’를 사수했다. 이 날까지 미 38포병대대는 1만2000발 이상의 포격으로 중공군에게 화력세례를 퍼부어 중공군은 약 3만5000명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되었고, 이는 적의 돌파구 확장을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 동측 백선엽 장군의 국군 1군단도 오대산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전선에 수도사단과 11사단을 배치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사시 속사리에 도달한 중공군들이 K-18비행장에 탄약과 포탄 및 보급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강릉으로 향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현리전투 패배 씻어낸 밴 플리트 포격과 백선엽의 결단 현리전투에서 패배한 3군단의 퇴각에 따라 방어선이 무너진 상황으로 다급해진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중요하고도 기민하게 줄탁동시(啐啄同時)적인 판단을 했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미 8군의 예비 미 3사단에게 돌파구 첨단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고 대관령 서쪽 용평에 있는 3군단의 간이 활주로에서 작전회의를 개최했다. 큰 키의 밴 플리트 장군은 짚차 보닛 위에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놓고 이후 작전을 지시했다. 그는 “지금 전선에 큰 포켓(pocket, 주머니)이 생겨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며 단호한 어조로 “중공군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 내고 최대한 응징을 가해야 한다”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어 백장군에게는 “1군단은 대관령에서 서북쪽으로”, 미 3사단 소속 라이딩스 장군에게는 “하진부리에서 동북방향으로 지체없이(Wihtout delay)공격을 시도하라”고 지시하며 수세적인 방어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는 작전회의를 간명하게 10분만에 끝냈다. 워싱턴 정가, 5배 이상 포격 등 단호한 대응 보고 신조어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만들어 한편,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졌던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미 10군단 사령부에서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차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사단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바로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홍천 및 하진부리까지 약 200km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3사단은 1만 7000명의 병력과 전차, 야포 및 전투지원 중장비 등을 이끌고 좁고도 험한 길을 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반 만에 그 거리를 주파하는 ‘기적의 행군’을 해냈다. 다행히도 미군 부대원 대부분은 운전을 할 수 있어 밤낮없이 교대로 약 1,000대의 트럭을 몰면서 재촉하여 돌파구 첨단이 붕괴되기 전에 도착했다. 그들은 두갈래로 부대를 나누었는 데, 한쪽은 홍천에 도착해 미 2사단을 증원했고 다른 한쪽은 하진부리에 도착해 무너진 3군단의 서부지역을 방어했다. 사실 그 당시 미군도 모르고 있었으나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한 공격으로 병참선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지역목표를 탈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하였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막심하였다. 생존자들은 피로하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이렇게 중공군의 피해가 과중했던 이유는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이 적군을 꺽기 위해서는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육사 동기생이었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전차전으로 과감한 돌파를 시도했던 용장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에서 미 3군단을 이끌고 보병과 전차를 활용하여 과감한 기동전을 구사했던 명장이었다. 휘청거려 자칫 구멍이 뚫릴지도 모를 이 동부전선의 주머니형 돌파구에 미 8군의 강력한 예비인 미 3사단을 과감히 투입했다. 또한 군사령관으로 작전을 지휘하면서 공군기를 165회나 출격시켰으며 4만1천발의 포탄을 중공군에게 퍼부어 기준의 5배를 초과하는 많은 포탄을 소모했다. 그러자 워싱턴 정가는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대응을 보면서 ‘밴 플리트 포격(Van Fleet Day of Fire, 일명 무제한 사격)’이라는 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지시를 받은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대관령을 넘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세부적인 작전 구상을 했다. 군단사령부에 도착하자 바로 참모회의를 소집하여 “송요찬 장군의 수도사단 1연대(연대장 한신 대령)를 먼저 대관령에 급파해 길목을 막고, 그 공백을 11사단과 1101공병단에 맡기는 것”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1연대가 대관령까지 이동하는 데 약 3시간이 소요되어 오후 3시즈음 확인해보았던 작전참모 공국진 대령이 흥분한 목소리로 “송요찬 장군이 1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다”며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송 사단장은 자신의 정면도 인민군들이 압박을 해오는 위험에 처해 있어 1연대를 뺄 수 없다는 이유로 군단장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좁고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단독으로만 전투해왔던 경험에 인접부대와 협조된 작전을 고려하는 인식이 부족했고, 또한 수도사단장 송 장군은 군단장 백선엽 장군과 나이도 비슷하며 최근까지 같은 계급이었고,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잘하기로 용맹을 날리던 터라 어느 정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장군은 한국군 내부 구성원끼리 사소한 감정에 휘말려 벌이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리기로 했으나, 작전참모 공대령은 “당장 부대를 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이렇게 연약한 지휘 방식을 쓸 수 없다”며 “육군 소장으로 만족할 겁니까? 아니면 명장으로 이름을 남길 겁니까?”라고 극단적 언사로 다그쳤다. 이에 1군단장 백선엽 장군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로저스 1군단 수석 고문관을 대동하여 수도사단 사령부로 갔다. 백 장군은 엄숙한 목소리로 “귀관은 내 명령에 복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복할 것이냐?”고 질책했다. 송요찬 장군은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서서 “각하, 죄송합니다.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라며 바로 전화기를 들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마침 한신 대령은 두 사람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미 출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그때 작전참모 공대령이 지휘소를 빠져나와 1연대의 기동을 확인했다. 그때 한신 대령의 연대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동을 위해 트럭에 올라탈 준비까지 끝낸 상태였다. 그날(5월21일) 오후 9시 즈음에 연대 수색중대가 먼저 대관령에 도착했는데 1시간 뒤부터 중공군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라도 출동이 늦었다면 중공군은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대관령고지를 선점하여 전체 작전에 어려운 상황이 될 뻔한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연대장 한신 대령과 작전참모 공대령의 책임감과 용이주도함이 작전 성공에 기여하였다. 그때부터 1연대와 수도사단은 승리를 거듭했다. 그동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해온 중공군은 장거리 이동으로 지쳐 있었고 화력과 보급도 소진한 상태였다. 1연대의 첫 전투에서 아군 12명 피해에 1,180명의 적을 사살했다. 이후 1군단은 계속 진격하여 23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일대까지 도달했다. 이미 중공군은 공격 능력도 의지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고, 북진을 계속하던 수도사단은 현리전투에서 전의 상실로 패배해 퇴각했던 3군단 장병들도 대거 거둬들일 수 있었다. 이로서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2군단은 덕천전투에서, 3군단은 현리전투에서 해체됐다. 또한 3군단 예하였던 3사단은 백 장군의 1군단으로 배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당시 우리 국군 중에 군단 규모로 남은 것은 오직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제 1군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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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6)] 지뢰사고로 인접 사단 육사동기 이충원 대위 중상, 소대장 근무시절엔 분대장 순직하여 긴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이번 16일 북한은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고 그곳에 포병부대 등을 주둔시키며 우리 군과 국민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중대장 시절에도 이러한 북한 도발과 위협에 대비한 경계태세 강화를 위해 GOP철책 이중화공사가 있었다. 공사를 앞두고 필자가 소속된 독수리연대의 창설기념일인 6월13일에 연대체육대회가 있었고 이를 대비하여 대대에서도 5월말에 중대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이때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무리 지어 있는 닭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여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뛰어난 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멀티플레이어(multiplayer)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분야에 지식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칭한다. ■ 연대 창설기념 체육대회 종합우승은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GOP철책 이중화공사’에 투입시키는 미끼? 5월말 대대의 중대 대항 체육대회에서 소대장 함재명 소위(육사42기)가 달리기 등 모든 운동을 월등히 잘했고, 중대본부의 김석동 일병이 큰 키에 만능 스포츠맨이라 축구, 배구 등 모든 종목에 참가하여 배구, 족구, 줄다리기에서 우승하며 결국 종합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물론 연대 창설기념 체육대회에서도 중대가 주축이 된 종목인 ‘군무’에서 우승, ‘축구’는 준우승으로 대대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하였다. 필자를 신뢰하며 아껴준 대대장에게 몫을 다한 부하의 도리를 다한 것도 좋았지만 대대와 연대에서 연속 우승함으로써 중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어쩌면 이 우승은 미끼였는지도 몰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시행하는 GOP철책 이중화공사에 곧 투입해야 할 대대를 우승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가졌지만 아랑곳 없이 종합우승으로 넘치는 사기속에서 우리는 다음 임무 수행에 몰입했다. 허나 2015년 GOP 철책 통문에서 북한군이 불법 매설한 목함지뢰 3발이 폭발하여 수색작전 중인 우리 부사관 2명에게 중상을 입힌 DMZ 지뢰도발 사건에서 보듯이 GOP철책 이중화공사는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 인접 사단 지뢰 사고로 긴장된 가운데 시작된 GOP철책을 이중화 공사 당시 GOP철책 앞의 불모지에는 매설된 지뢰 뿔들이 식별되고 철책 뒤에는 미확인 지뢰지대였다. 이 단일 GOP철책을 이중화 시키려면 당연히 주변 지뢰지대를 확인하여 제거 후 공사를 시작했기에 사전 준비와 교육이 더 중요했다. 때마침 인접 사단에서 육사 동기 이충원 대위가 지뢰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필자가 소대장 근무시절 같이 근무했던 분대장도 지뢰 사고로 안타깝게 순직했기에 필자는 중대원들 보다 더 긴장했다. 하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고 어차피 임무는 수행해야 했다. 공사 투입할 GOP ㅇㅇ산 구 1통문 지역에 연대체육대회 1주일 뒤인 6월 20일 도착하여 숙영지를 편성했다. 약 한 달간 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여 완전히 야외 생활관처럼 24인용 텐트에 침상까지 준비했다. 우리 중대는 9개월전에 이미 폭우로 전도된 150m의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를 경험했기에 타 중대 보다는 더 숙달되어 효율적으로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뢰 탐지 및 제거 작업에 투입하는 병사들에게는 사선(死線)을 넘나들어야 하기에 유서와 머리카락 등 만일의 사태에 대한 준비를 하고 단단한 각오로 공사에 임했다. 이미 경험했던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처럼 신속히 끝내야 할 이유도 없고, GOP지역은 야간 경계근무 때문에 낮에만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에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있는 우리 중대의 공사 진도는 타 중대와 비교될 정도로 신속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2주일이 지나면서 긴장이 다소 이완되는 현상도 식별되어 간부들에게 안전을 재차 강조했다. ■ 완승 위해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와 하찮아 보이던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도 필요 제나라의 환공은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이란 말을 남겼다.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은 훌륭한 장인은 썩은 나무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이란 현명한 장수는 단 한가지 재능 있는 자라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조직이든 군계일학의 멀티플레이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완벽한 마무리로 최종 승리하기 위해서는 제나라 환공의 말처럼 인재를 아끼며, 하찮아 보이던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도 필요하다. 소대장과 분대장 및 고참병사들은 9개월전에 GOP철책 수해복구 공사의 경험으로 지시를 내리기 전에 다음일들을 찾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그들의 경험에 따른 지휘통제 아래 하찮은 굼벵이같은 하급자들도 적극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나름대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사 기간중 사단장, 부사단장, 연대장의 현장지도가 수시로 있었는데, 지역 터줏대감인 필자의 공사 현장에 집중되었고 지뢰확인, 공사 조편성, 경계 및 안전 대책 등의 설명을 듣고 현장 확인후에는 모두 ‘안심하며 고생한다’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었다. 당시에 대대의 간부들이 이용했던 오토바이는 대부분 125cc였는데 필자는 전출간 권성룡 군의관이 사용하다가 넘겨준 88cc의 작은 스쿠터였지만, 좁고 긴 담당구역을 쉽게 넘나들며 전 중대원을 지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퇴근을 못하는 시간이 한달이나 되어 기간 중 휴식 및 취침 시간에 88cc의 작은 스쿠터를 이용하여 독수공방하는 가족을 만나러 잠시 빠져나가는 일탈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안전 걱정만 하고 있던 남편의 기습 방문에 반가워하며 안심하던 가족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느덧 공사를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 7월22일이 되자, 다행이도 타 부대와 같은 안전사고 한 건도 없이 대북 경계태세를 강화시키는 GOP ㅇㅇ산 구 1통문 지역의 철책 이중화 공사는 마무리 되었고, 그 이후 우리가 공사한 지역으로 북한군이 침투에 성공한 사례 역시 한 건도 없었다. ‘양장불기후목(良匠不棄朽木)’, ‘명장무유일능(明將無遺一能)’의 마음으로 능력 여부를 떠나 모든 부대원들을 아꼈고, 또한 전 중대원이 일치단결하여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을 추구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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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5)] 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방패들
    [시큐리티팩크=김희철 기자] 군가 ‘전우’의 가사에는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사르며 깨끗이 피고 진 무궁화 꽃이다. 한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 ”라는 구절이 있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즐겨 부르는 군가 ‘전우’의 가사처럼 “한가치 담배도 나눠 피우고 기쁜 일 고된 일 다 함께 겪는 우리는 전우애로 굳게 뭉쳐진 책임을 다하는 방패들”이었기에 군생활 동안 만난 전우들은 평생을 함께한다. ■ 고락을 같이했던 전역자·후배 전우들과 함께 나눈 정(情)/묵묵히 감수하는 아내에게 고마움 느껴 중대장을 18개월 정도 근무할 때 즈음 고비가 찾아왔다. 중대의 일꾼으로 성실했던 김충한 상병이 전투일일결산을 위해 매복용 실탄을 점검 중 훈련용 크레모아 뇌관이 터져 얼굴에 파편상을 입어 의무대로 입실했다. 그는 일년 전에도 가스통 폭발로 화상을 입어 후송을 다녀온 병사였다. 연대에서는 병력 관리를 잘 못했다고 경고장을 하달했다. 중대장 근무 1년만에 선봉중대가 되어 한층 사기가 올라있던 즈음에 발생한 사고로 중대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어수선했다. 헌데 8개월전에 전역한 홍성천·배영환 예비역병장이 민가에서 한시간 떨어진 예상동 부대까지 면회를 와서 중대원들을 격려하는 바람에 다시 분위기는 즐거운 병영생활로 바뀌어갔다. 고마운 전우들이었다. 전방 격오지에서 신혼살림을 하던 필자에게도 개인적으로 사관학교시절 각별히 아꼈던 후배가 관사로 찾아와 오랫만에 회포를 풀며 소대장과 중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하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신혼살림 속에서도 남편의 술상을 준비해야하는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묵묵이 감수하는 그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꼈다. 어떤 후배는 전방에서 보기 힘든 어항을 선물해주어 가족의 지루함을 달래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필자가 총각시절 선배집에 쳐들어가 신세를 졌던 것을 되갚고있는 셈이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휴일엔 수색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김광우 동기에게서 연락이 와서 오토바이를 타고 한시간 달려 민촌 관사에 갔다. 그곳에는 서울 육사에 근무 중인 고장호, 김권희와 인접 3사단의 유종렬, 선종률 그리고 같은 사단에 있는 한황진, 강성묵, 김선권도 참석해 오랜만에 동기들과 기울이는 한잔 술에 전방 오지의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었다. ■ 제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에서 ‘제1군 야전 중대장근무 성공사례’ 강의 1986년 5월, 육군 제3사관사관학교출신 중·대위들의 학부과정에서 ‘야전부대 지휘관 초빙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필자가 ‘제1군 야전중대장 체험담’을 교육하라는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 사단은 일주일 뒤의 강의라 미처 공문으로 지시를 못했다. 때문에 필자는 사단에 직접 들어가 위 사진과 같이 상급부대 공문의 강의 내용을 적으며 확인했다. 그런데 더 황당하게도 3일 뒤 작전참모에게 강의 내용을 검토받으라고 했다. 자대로 복귀해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중대장 부임전 고등군사반(OAC)과정에서 공부하는 방법과 중대장 근무요령 및 실제 사고 및 대침투작전 성공 사례 등을 준비해서 사단 검토를 받았다. 중대장 기존임무를 수행하면서 강의 준비 및 상급 검토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같은 계급의 후배들인 학부과정 540명에게 ‘제1군 야전중대장 체험담’을 통해 필자의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도 느꼈다. 게다가 이번 교육 덕택에 중대장근무를 시작한 지 18개월째 만에 얻는 첫 휴가로 고향집과 처가에도 들려 인사도 할 수 있었다. 마침 3사관사관학교에 후배 정한기 대위(육사39기)가 교관을 하고 있어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강의 하루전에 영천에 미리 도착해서 복지회관에 여장을 풀었다. 정후배와 저녁을 하면서 당시 학교에서 강조되는 사항과 주요 직위자의 특징 등을 파악했다. 강의 당일 교수부장을 만나니 예상했던 바와 같이 강의시에 추가요구사항이 있었다. 최초 ‘야전부대 지휘관 초빙교육’ 프로그램에서 필요했던 것은 학부과정 학생들에게 중대장을 성공적으로 하기위한 체험담 교육이었는데 당시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이 추가되었다. 야전에서도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이 강조되어 교관 경연대회도 개최하고 지휘관이 직접 교육하도록 강조하여 이미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별 걱정은 안했다. 사전 대화를 나누던 교수부장은 새롭게 강조되던 ‘신좌경사상’에 대한 비판에 관련된 필자의 설명에 안심이 되었는지 중대장 근무시에 꼭 필요한 내용이라며 강의시간을 4시간으로 증가시켰다. 사실 정훈참모부에서 하달된 교육자료만 가지고는 부대원들을 이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신좌경사상’을 알려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침 중대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입대한 김찬석 상병(현 청주대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의 지식을 역이용하여 비판하도록 준비시켜 직접 강의하니 병사들에게는 더 효과가 있었고 필자도 그를 통해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강의 도중 학부과정의 학생들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주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하루전에 도착해 후배 정대위를 통해 습득한 정보로 학교에서 강조하는 사항과 교수부장 및 주요 간부의 별명을 활용하니 학생들의 웃음과 함께 한 호흡이 될 수 있어 강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 유제현 대령의 다정한 편지, 후배 중대장의 불운/모든 만남과 아픈 정(情)은 아련한 추억이 되어… 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의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중대로 복귀하니 낮 익은 글씨의 손편지 등기가 도착했다. 당시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지역인 예상동에서 소대장 시절에 모셨던 대대장 유제현 대령(육사23기)의 정(情)이 듬뿍 담긴 글이었다. “가족과 부하의 나쁜 버릇은 장점이 되도록 애정으로 감싸주고, 교육도 시간 떼우기 보다는 성과위주로 하며, 바쁜 가운데에서도 미래를 위해 틈틈이 공부하라”는 조언과 함께 자신이 근무하며 지휘했던 지역에서 또다시 근무하는 필자에게 부하들과 부대 발전에 보태라며 10만원을 동봉해 주셨다. 보내준 위문금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병사들이 이발할 때 용이하도록 당시 처음 판매한 ‘전동 바리깡’을 구입해서 대대장 존함을 새겨서 중대 이발병에게 전달했다. 최전방 오지에 전역한 병사들이 다시 찾아오고 동기, 후배들이 고생한다며 위문도 왔으며 모시던 상관이 격려의 손편지와 함께 금일봉까지 보내오니 필자 뿐만 아니라 중대원들과 가족도 사기가 치솟아 천정을 깨는 순간이었다. 헌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처럼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흘러 중대장직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사단작전 장교로 전보됐다. 후임자는 필자가 3사관사관학교 학부과정에서 ‘야전 중대장근무 성공사례’를 교육했던 후배였다. 그런데 그 후배는 6개월 뒤에 오토바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다. 정(情)으로 수행한 중대장직을 3사관사관학교에서 교육했던 인연이 닿은 후배에게 물려주었는데 그는 멋있게 중대장직을 수행하다가 불의의 객이 되었다. 부하, 전역자, 선후배, 동기들과 좋은 정도, 아픔도 결국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즉 희로애락이 있는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변화하고 있다. 거기에 모순이 있고 고(苦)가 있다. 이 모든 만남과 ‘야전 지휘관 초빙교육’의 소중하고 아픈 정(情)이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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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4)]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종근여시(終勤如始)하소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조선시대 임금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던 한명회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무렵에 임금이자 사위인 성종이 신하를 보내 내가 앞으로 왕을 하는데 무엇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한명회는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종근여시(終勤如始)하소서…"라고 답했다. 이는 “시작할때 부지런하고 끝에 태만해지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니 마지막까지도 부지런하기를 시작처럼 하라”고 당부한 말이다. 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회자되는 “육군대장 위에 병장이다”라는 말처럼 병장으로 진급하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가 되고 군생활을 마칠 때이면 모든 것에 열외하여 전역 준비를 하는 혜택을 누리기 때문이다. 간혹 단기근무 간부들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 고락을 같이한 통신병 진희선(서울시 부시장)과 조진희(부산 영진어묵 사장)과 함께 한 추억의 여운(餘韻) 최근 육군 병사들의 복무기간은 21개월에서 단계적으로 18개월까지 단축되어 시행하고 있다. 필자의 중대장근무 당시에 임기는 약 30개월이었고 병사들도 30개월 복무하였다. 그래서 필자와 같이 중대로 전입한 병사들은 거의 같은 기간 동안 함께 같은 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제대했다. 중대장 부임시 필자의 통신병(전령)은 처음에는 진희선 병장(현재 서울시 부시장)이었고 그다음에는 조진희 병장(현재 부산 영진어묵 사장)이 와서 중대장 보직 기간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진희선 병장은 중대장 부임초 중대 통신병으로 살을 에는 듯한 엄동설한 속에 시행된 작계시행훈련을 함께했다. 그때 대대장의 기습적인 심야 현장방문으로 침낭 속에 잠시 몸을 담았던 필자와 진병장은 급하게 옷을 추리며 일어났고 대대장은 한심한 듯 바라만 보았을 때의 난감했던 순간을 같이했던 전우이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51)] ‘분노로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낙담의 담뱃재’ 참조) 그 때 “9중대장, 인원 장비는 이상 없나..?”라고 질문하며 추위 속에 병력관리 잘하라고 당부하고 복귀했다. 하지만 대대장은 "지휘관은 마지막까지 부하들을 확인해야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주는 여운을 남기고 떠났다. 이미 각 소대진지를 모두 확인하고 필자의 위치로 복귀해 쉬는 중이었지만, 제대로 훈련상황 보고도 못 드렸고 이완된 모습을 보였기에 필자도 첫 훈련에 실망을 드린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아찔한 순간이었고 통신병 진희선 병장은 “대대장님 화 나신 것은 아닌가요?”하며 걱정을 하였다.그 후 책임감이 강한 진병장은 최선을 다해 근무하다가 멋지게 제대를 했다. ■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중대를 선봉부대로 탈바꿈할 때 고락을 같이했던 중대 통신병(전령)은 조진희 병장이었다. 그들은 중대 행정병 중에 나이도 많았고 고참이었던 박균명 병장을 주축으로 송두범, 허우행, 임재린 등과 함께 병사들 입장에서 중대장에게 조언도 잘했지만, 주야 불문하고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자기일처럼 모든 일을 잘 처리했다. 그래서인지 40년 가까이 된 아직도 그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끔 마련하고 있다. 그들과 같은 군인 덕분에 필자는 성공적으로 중대장직을 마칠 수가 있었다. 30개월 가까이 중대장직을 수행하면서 많은 병사 및 간부들이 부대를 떠났다. 그러나 유종지미(有終之美)를 잘 거두어야 하는데 간혹 제대를 앞두고 객기를 부리는 전역병들이 있어 그들을 달래거나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전출 또는 제대하기 전에는 꼭 중대장 관사에 불러 저녁과 함께 소줏잔을 나누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물론 가족이 고생이 많았지만 보람도 있었다. 특히 중대통신병이 제대할 때에는 그동안의 정이 너무도 많이 쌓여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몹시도 아쉬웠다. 진희선은 전입 및 부대교대를 할 때 이주한 관사의 도배를 도맡아 해주었고, 조진희는 제대 전일 중대막사 뒤에서 서로 껴안고 눈물로 가슴을 적셨던 사연들이 여운(餘韻)을 남기며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 단기근무를 하는 학군(ROTC), 학사장교 등은 취업준비 보장이 절실 국방 의무를 다하는 것은 병사들 뿐만 아니라 간부들도 포함된다. 단기근무를 하는 학군단(ROTC), 학사장교 등도 마찬가지이다. 간부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제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얼마전에 군의관들이 제대를 앞두고 인근 병원에서 알바를 하여 문제된 것과 같이 취업 준비를 앞두고 무단 이탈을 하는 등의 행동으로 부대운용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군에서 리더십을 익힌 학군(ROTC), 학사장교 출신들을 선호한다. 인재 유치를 위해 전역전에 취업 박람회를 열어 인원을 선발하기도 한다. 군부대는 휴가증이나 출장증을 발부해 그들의 취업을 도와주나, 아무래도 최전방 군인들은 후방지역 보다 정보가 부족하고 취업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다. 그래서 매년 학군단(ROTC)장교들이 제대하는 4월이 되면 그들의 취업 준비를 보장해주기 위해 각 부대의 간부 인력이 부족한 현상이 벌어진다. 당장 당직근무 인원을 염출하기도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그러던 중 상급부대에서 전역 간부 관리를 잘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고 필자가 당직근무시에 마침 전역을 앞두고 일부 간부들이 무단으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소문 해보니 전역을 앞둔 장교들이 인접 마을로 빠져나가 회식을 한다고 해서 5분대기조를 출동시켰다. 얼마후 잡혀온 간부들에게 지시사항을 들었는지 확인하고 지시사항을 위반한 장교들에게 처음으로 체벌을 하였다. 이것을 문제시하면 오히려 더 큰 사건으로 확대되어 그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어 독단으로 처벌한 조치였다. 그들 중에는 필자 중대의 소대장도 포함되었고 얼마전 필자의 신혼집에까지 방문해 술 한잔까지 나누었던 후배장교들 이었지만 엄정한 군기강 확립을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훗날 필자가 소령으로 진급하여 서울 수방사에 근무할 때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전역을 앞둔 당시에 자신들의 일탈을 눈감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을 들어 미안한 마음에 저녁도 사주고 벌주로 과음도 했었다. 하지만 비록 장교 간부들이라도 마지막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었으며 당시 조치에 대해 후회는 없었고 오히려 추억이 되었다. 한명회가 "시근종태(始勤終怠)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종근여시(終勤如始)하소서…"라고 성종에게 당부한 말이 새삼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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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63)] ‘호사다마(好事多魔)’나 ‘풍선효과’, 좋은 일을 추진할 때에 발생하는 역작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사자성어는 “좋은 일에는 탈이 나기쉽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무풍선 논리’는 풍선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반대쪽이 튀어나온다는 것으로 어떤 일을 추진할 때에 반드시 역작용이 생긴다는 논리이다.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총선에서 정치적 협상 끝에 변형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최초로 시행하였다. 원래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에 출마하는 후보자가 아깝게 떨어지면 유권자들 표의 약 3분의 2가 사표가 되는데 정당 득표율이 충족되면 상당 수가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민의를 매우 잘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선거방법이었다. 그러나 거대 양당이 미래한국당, 더불어시민당 등을 만들어 본래의 훌륭한 취지가 퇴색되었다. ■ 하인리히 법칙을 걱정하며 부하들을 입창시킨 그날 밤, 잠 설치며 안타까워 해… 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덧 중대장 근무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부대에서는 오랫동안 곪아왔던 고참 병사와 하사 분대장의 갈등이 결국 터졌다. ‘골목대장형 분대장 정예화’ 제도는 당시 정호용 육군참모총장이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 정예화를 새롭게 추진하며 또한 간부들에게는 전술토의, 지식/지휘능력 배양 등의 교육훈련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창군이래 가장 높은 전투력을 보유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었다.. 이것은 전투부대의 첨단 지휘자인 분대장을 강하게 양성하여 정예화시키고자 신병교육대 및 자대의 신병 중에 골목대장감 분대장 후보를 선발하여 상병까지 조기 진급시킨 후, 분대장 교육대에 입소시켜 교육을 마치면 하사 계급장을 달아주고 남은 의무복무 기간 동안인 1년~6개월간 분대장 근무를 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풍선효과’처럼 일부 역작용이 발생했다. 상병 또는 병장 계급의 일부 고참들은 자신보다 후임병이지만 조기 진급한 하사분대장 밑에 근무하게 되자, 그들의 질투와 질시는 부대 운용을 어렵게 만들었다. 심지어 분대장의 지시에 복종하는 후임병들에게 압박을 가해 분대장 말보다 자신들의 지시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편 군을 경험한 사람들은 육군 대장 위에 병장이라는 말들을 종종 한다. 의무 복무를 하는 병사들은 병장으로 진급하여 군생활을 마칠 때 즈음이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치가 된다. 즉 모든 것에 열외하여 전역 준비를 하는 혜택을 누리며, 부대에서도 여건보장 등의 대우를 해주기 때문이다 결국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병장이 후임인 상병에게 지시하여 분대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지시하는 분대장과 싸우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은 상급자에 대한 분명한 항명이었고, 보고를 받은 필자는 ‘골목대장형 분대장 정예화’ 제도의 성과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된 병사 모두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5명을 한꺼번에 영창을 보냈다. 회자되고 있는 하인리히의 ‘1:29:300법칙’은 대형 산업 재해가 발생하여 중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논리이다. 이는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힌 것으로, 큰 사고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하인리히 법칙에 따라 더 큰 사고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했으나 그들을 입창시킨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 했다. 그들 중에는 정말 신뢰하고 아끼는 병사도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타부대에서도 종종 발생했다. 결국 창군이래 가장 높은 전투력을 보유할 수 있는 좋은 시스템이었던 ‘골목대장형 분대장 정예화’ 제도는 정 총장이 바뀌고 후임 총장이 취임하자 얼마 안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도루묵이 되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골목대장형 분대장 정예화’와 같은 좋은 시스템을 구현하겠다는 대의와 조직을 위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정말 어렵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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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10
  • [김희철의 전쟁사 (27)] 서울 공격을 예상한 밴 플리트 장군, 중공군은 허를 찔러 동부전선을 공격
    치열한 고지 쟁탈전과 휴전협정의 서막이 된 중공군 제6차공세, 미군은 연속적인 포격으로 6개 중공군 사단의 공격차단에 성공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중공군의 제 5차공세의 2단계(5월공세, ’51, 5.16~22)를 제 6차공세라고도 한다.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중공군의 제 6차공세가 서울을 향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공군은 허를 찔러 동부전선을 공격했다. ‘현리전투’에서 치욕스런 패배로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알몬드의 제 10군단과 한국군 제 3군단이 방어 책임지역을 두고 분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악지형 상 국군 제 9사단에 대한 보급로가 오마치(오미재)고개를 포함한 미 제 10군단 지역을 수 km 통과해야만 했는데 알몬드 장군은 이 보급로를 경비하던 국군 제 9사단 예하 대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결국 경비대대가 철수한 그 지역으로 중공군이 돌파해 들어왔고 몇 시간 만에 중공군은 3군단의 후방에 진입하게 되었다. 3군단은 공황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한국군 제 7사단과 9사단 간의 전투지경선을 침투한 중공군은 돌파구를 확장하여 미 2사단으로 몰려 들어갔다. 다행히 미 2사단 포병과 10군단 포병의 연속적인 포격으로 6개 중공군 사단의 공격을 차단하여 진격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결국 유엔군의 패주를 막았다. 이렇게 미군이 중공군의 끈질긴 공격을 저지하던 5월19일 새벽 4시에 별안간 전선이 잠잠해졌다. 중공군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마도 보급의 한계와 미 포병에 의한 막대한 피해로 인해 중공군의 공격이 저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우익 포위를 담당한 북한 인민군의 지체도 중공군의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으로 분석되었다. 미 9군단은 화천(파로호) 점령, 미 10군단은 반격...중공군 포위 격멸 시도 대규모 공세 능력 없음을 인식한 마오쩌둥, 중공군에게 지구전으로 전환 명령, 지루하며 교착된 피비린 격전 예고 국군 제 3군단 전체가 해체되는 치욕스런 패배를 맞이했던 현리전투 이후 미군의 효과적인 저지로 중공군 공격이 주춤해진 5월19일 아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기 위해 미 제 10군단 사령부로 갔다. 이 자리에서 리지웨이 사령관은 밴 플리트, 알몬드 장군과 함께 추후 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밴 플리트 장군에게 미 8군 예비로 있던 187공수연대와 미 3보병사단을 요구하였다. 밴 플리트는 그날 저녁 187공수연대를 증원하기로 하고, 알몬드에게 곧 미 3보병사단도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호그의 미 9군단이 화천(파로호)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알몬드가 반격을 시작하면 중공군은 화천으로 철수하게 될 것인데, 호그가 화천을 점령하게 되면 중공군을 포위망에 가둘 수가 있었다. 5월 20일 미 9군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3일에는 알몬드의 10군단도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모르고 있었으나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하여 병참선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지역을 쟁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하였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는 막심하였다. 생존자들은 피로하고 탄약과 식량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5월21일부터 서부의 미 제 1, 9군단도 용문산 및 파로호 전투 등에서 연이은 쾌승으로 중공군에게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다. 23일 알몬드의 10군단까지 공세로 전환하자 펑더화이는 전선이 불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동서해의 제해권과 함께 제공권도 다시 확보하였다. 드디어 유엔군은 신속한 반격으로 문산 북방 임진강까지 도달했으며, 5월 말이 되자 유엔은 중공군의 제 5차공세인 4월 춘계공세를 시작하기 전의 전선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은 거의 현재의 휴전선까지 북진한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중공군의 6차에 걸친 공세를 통해서 중공군은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치를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였고 마오쩌둥은 중공군에게 지구전으로 전환할 것으로 명령하였다. 펑더화이는 이제 지구전에 앞서 38선 부근의 방어를 지상방어에서 지하방어선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38선 부근에 대규모의 지하 방어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6월1일,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강력한 방어선 구축을 결심하였다." 그는 ‘철의 삼각지’ 모두를 점령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삼각형의 저변 두 지점인 철원, 금화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철의 삼각지’는 평강(현재 북한지역)을 꼭지점으로 하고 서측의 철원, 동측의 금화를 삼각형 밑의 두 꼭지점으로 하는 지역으로, 중요한 교통로들이 통과하는 중부전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고 공격하기는 불리하고 방어에는 유리한 곳이었다. 원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원산으로의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 작전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고, 대신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는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고 화천 저수지 동쪽의 펀치볼 지대를 공격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교착된 중부전선에서의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예고되고 있었다. 중공군은 천천히 승리를 쟁취하며 휴전협정에 긍정 반응, 첫 휴전회담에서 고의적 지연하며 붕괴된 군사력을 재편 1953년 휴전까지 2년간 지루하고 치열한 ‘고지 쟁탈전’ 양상 지속 중공군 제 6차공세를 사투로 막아낸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함에 따라 중공군은 신속한 승리보다는 천천히 승리를 쟁취한다는 방침 아래 휴전협정에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미국 또한 한반도의 정책 목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전선을 유지하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휴전 이후 유엔을 통한 최종적인 한반도의 통일국가 수립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은 스스로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련 및 중국정부와 막후 접촉을 시작했다. 6월 23일 유엔 안보리의 소련측 대표 말라크가 '평화의 대가'란 연설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하고 미국이 이에 동의하였다. 중공군과 인민군 측의 요구로 개성에서 1차 예비회담이 열어 본회담을 위한 준비사항을 협의했고 드디어 7월10일 첫 본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양측간의 신경전속에 아무런 협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군 측에서는 회담이 늦어도 한 달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회담장의 정치적 선전에 급급한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진행으로 7월26일에야 토의할 의제를 합의했다. 그러나 첫 휴전회담에서 고의적인 15일간의 지연을 통해 중공군과 인민군 측은 그 동안 형편없이 붕괴된 군사력을 재편했다. 이에 유엔군은 전력정비의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헌데 문제는 휴전회담의 장소가 개성이므로 서부전선에서의 전면적인 공세가 불가능하게 되고, 중공군과 인민군 측도 반격을 할 경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을 감안하여 주 전장을 중동부지역의 산악지역으로 집중했다. 따라서 휴전이 되는 1953년까지 2년간 치열한 ‘고지 쟁탈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쟁이 전환됐다.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은 이렇게 교착된 전선에서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한 전투였던 ‘수도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등 고지전을 지루하게 지속 하였다.
    • 소통시대
    • 종합
    2021-02-0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2)] 선봉중대는 전중대원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달려온 결과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올해 초부터 ‘코로나19’ 확산으로 전국민이 힘겨워 할 때, TV에서의 ‘미스터트롯 경연’은 큰 위로가 되었다. 그중 ‘세계 태권도 자유품세 1위’인 나태주는 경연 1대1 매치에서 태권무와 공중돌기 격파 등을 선보이며 ‘너는 내남자’라는 노래를 불러 찬사를 받았고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필자의 중대장 근무 시절에도 태권도와 태권군무가 부대 활동과 평가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또한 상급부대에서는 태권군무 사열과 측정 등을 통해 활성화된 부대를 운용하도록 유도했다. 중대장 근무 30개월 중 한 때는 전중대원이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도 했지만 태권도 경험이 없는 전입 신병의 계속적인 보충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군인 가족들까지 혼연일체가 된 완전군장 10km 뜀걸음 평가 연대전투단(RCT) 훈련이 11월에 성공적으로 끝나자 동계작전 준비로 바쁘게 몰두했는데 상급부대인 사단에서는 예하부대에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고 바로 태권·군무 사열계획을 추가로 하달했다. 사단의 태권·군무 사열 준비로 병력들이 연병장에서 함성을 지르며 단체로 품세연습을 하는 와중에 군단에서는 부대별 위관반 측정이 시작되어 군의관을 포함한 대대의 전 위관장교는 개인화기 사격과 10km완전군장 뜀걸음도 평가를 받았다. 대대를 평가하는 측정이기에 선임 중대장을 맡은 필자는 사격장과 뜀걸음 코스에서 간부들의 실력향상을 위해 계속 앞장서서 연습을 유도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군의관이었다. 매번 의무차량을 타고 환자들을 치료하여 체력과 연습량 부족으로 낙오가 분명해 보였다. 측정 당일 대대의 위관장교들이 10km완전군장 뜀걸음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군의관의 얼굴이 사색이었다. 마침 군단 측정관으로 특공연대에 근무하는 동기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간부가 1시간안에 모두 들어와야 합격하는데 걱정이었다. 드디어 측정관의 출발 호각이 울리고 보조를 맞춰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5km즈음 뛰었을 때 군의관은 낙오 직전이었다. 할 수없이 군장을 대신 메고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며 함께 뛰었다. 측정관으로 나온 동기생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시간안에만 모두 들어오라고 당부하였다. 목표를 1km남기는 지점까지 겨우 도달하여 마지막 힘을 내고 있었으나 필자도 군장을 두개를 메고 뛰다보니 낙오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 장소에 대대 간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가족들도 같이 뛰면서 “파이팅, 하나, 둘…”구령을 붙였다. 그중 군의관 아내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낙오 직전까지의 상태였던 간부들은 가족들도 같이 뛰자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뛰어 간신히 목표시간에 모두 통과하였다. 골인점 통과 후 지쳐 쓰러진 간부들은 함께한 가족들이 전해주는 시원한 얼음물로 흘린 땀과 가쁜 호흡 그리고 뭉친 다리근육의 고통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 또한 가족들과 혼연일체가 된 위관장교들의 10km완전군장 뜀걸음은 참가한 간부 부부의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하는 사랑의 징표가 되었다. ■ 감동적인 미스터트롯 나태주의 태권무, 군 시절의 열정 떠올리게 해 고통스러웠지만 사랑의 징표와 감동의 추억을 남긴 10km완전군장 뜀걸음 측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대 태권군무 측정대회가 열렸다. 우리 중대는 ‘전원 태권도 유단자화’ 목표로 그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타 중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어 사단장 태권군무 사열에서도 우리 중대가 대대를 책임지고 준비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 모두는 중대의 ‘태양분대 선발’ 시스템으로 지속적으로 분대장 중심으로 태권도 수준 등을 평가하며 단련해온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대대장의 호출이 있어 대대장실로 집합했다. 대대장은 방금 사단의 우수대대 선발심의에서 우리 대대가 선봉 또는 ATT우수대대로 선정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고생했다고 격려의 차를 마시며 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중대와 대대 전술훈련평가(ATT), 연대전투단(RCT) 훈련평가를 통해 개인 훈련부터 전술훈련까지 숙달되고 사단장 태권군무 사열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은 부대원들은 지금 전쟁이 발발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전의가 불타오르며 자신감이 샘솟는 순간이었다. ■ 중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선봉·RCT·태권도·군무 우수 등 8개 분야에서 우수중대 수상 그해 12월 말, 연대에서도 연말 성과분석회의가 열려 한해를 평가하고 다음해 비약을 다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등병부터 중대장까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일년을 달려온 결과, 보람은 있었지만 최전방 연대의 특성상 전방 경계를 담당한 GOP부대에게 선봉중대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참석했다. 그런데 연대 선봉중대를 2개 선정하는 유사이래 첫 사례가 나왔다. 연대 참모들이 평가한 결과 GOP부대가 아닌 예비부대인 필자 중대가 우수하다고 나오자 GOP선봉과 예비부대 선봉으로 우수부대를 추가로 선발했다. 게다가 우리 중대는 전 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선봉·RCT·태권도·군무 우수 등 8개 분야의 우수중대 표창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중대원의 반이나 되는 63명 분량의 포상휴가증과 벽시계·트로피들도 부상으로 받았다. 부대 주둔지로 복귀했을 때, 중대원들의 환영은 너무도 뜨거웠고 높아지는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전술훈련평가(ATT), 연대전투단(RCT) 훈련 뿐만 아니라 사단장 태권군무 사열, 개인화기 사격과 10km완전군장 뜀걸음 측정 등에서 몸과 마음은 지쳤지만 마지막까지 잘해준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적근산 골짜기의 엄동설한속에서도 축하의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중대 행정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는 천하를 얻은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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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05
  • [김희철의 전쟁사(26)] ‘결사(決死)’ 맹세 띠 두르고 용문산 방어전투에 성공, UN군 반격작전 계기 마련
    국군 제 6사단, 사창리의 치욕적 패배 후 설욕 노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 [시큐리티팩트=김희철 기자]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제 5차 4월공세(’51.4.22~4.30)시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 및 도주로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을 받는 시련을 겪은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용문산(1157고지) 일대에서 방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제 5차 4월 춘계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 용문산으로 눈을 돌렸다. 북한강은 춘천-화천-양구로, 남한강은 여주-충주로 이어지는 뱃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곳은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의 도로가 교차하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으므로 중공군이 점령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5월공세’를 개시하여 혈전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제19병단 제 63군 3개 사단(제187, 188, 189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점 부근을 방어중인 미 제 9군단의 중앙인 국군 제6사단의 용문산 지역을 공격했다. 국군 제6사단은 당시 북한강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세기도가 감지되자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1연대가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 제7사단 31연대가 두능산에서 주저항선으로 각각 철수함으로써 제 6사단 2연대만이 용문산 전방인 청평호 남쪽에 남게 되었다. 당시 장도영 장군 휘하 제6사단 2연대는 인접 부대가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 전초진지를 사수했다. 이는 치욕적인 사창리 전투의 패배 결과로 연대장과 참모들이 해임되고 송대후 중령이 신임연대장으로 부임했으며, 패배의 설욕을 위해 장병들은 머리에 ‘결사(決死)’라고 써진 띠를 두르고 사력을 다할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대비했기 때문이었다. 연대의 정찰대는 17일 적의 예상 도하지점을 탐색하던 중 이미 도강하여 방하리 계곡에 집결중인 중대 규모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격퇴하였으나, 일몰이 되어 대규모의 적이 북한강 도처에서 도하를 기도함으로써 연대 주진지로 복귀하였다. 5월 18일 낮 동안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국군 제6사단 전초 진지인 제 2연대(연대장 송대후 중령) 1(대대장 홍재익 대위), 3대대(대대장 김두일 대위)를 향해 몇 차례 도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격퇴되었다. 제 2연대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지원받아 완강하게 저항하며 진지를 고수하자 중공군은 이곳 전초 진지를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부터는 제187, 제188사단의 주력을 투입하여 돌파를 기도하였다. 사단 전초 진지를 담당한 제 2연대 1, 3대대가 사력을 다해 막아봤지만 중공군의 막대한 물량 공세에 후퇴, 중앙지역인 나산과 427고지 일대를 담당하였던 2대대(대대장 김덕복 소령)와 합류하여 전면방어로의 전환을 준비했다. 제 2연대는 나산과 427고지 일대에서 미군의 항공폭격으로 힘겹게 전초 진지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이틀간의 격전으로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또 식량과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국군 제2연대의 전황을 간파한 중공군은 19일 야간에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이때부터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 하에 진내로 접근한 적과 백병전을 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그 후 2연대는 전투 상황을 고려시 철수하는게 맞지만 간신히 진지를 지키며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에 당연히 후퇴할 줄 알았던 국군이 제자리를 지키며 결사적으로 항전하자 중공군은 당황했다. 중공군은 우전방 공격에 이어 이번에는 예비인 제189사단을 투입하여 좌전방 제 2대대의 울업산을 집중 공격하였다. 제 63군의187, 188사단에다 군 예비 189사단까지 투입해 중공군 3개 사단이 국군 1개 연대에게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사실 당시 중공군 입장에선 오판할 만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중공군이 도하하던 상황에 전초로 배치되어 있던 제6사단 2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도하하던 중공군을 기습 강타한 뒤 빠져나간 상태에서 2연대가 427고지 일대에서 고수방어로 저항을 하자 주저항선으로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1대대와 2대대가 기습강타 후 치고 빠지는 방법을 활용한데다 진지 전환하면서 원래 1대대와 2대대가 있던 곳에서 미친듯이 결사저항을 하기도 했고 야음을 틈타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3대대와 2연대 본부대가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연대는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방어진지 일부가 돌파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어려운 상황을 맞기도 하였으나 사단의 적극적인 화력 지원과 강력한 정신력으로 진지를 고수하였다 또한 장도영 사단장은 기습적인 묘수를 발휘하여 중공군을 혼란에 빠뜨려 공황이 발생하게 만들었다. 바로 중공군이 2연대를 주저항선의 주력군으로 착각하여 총공격을 감행하고 있었을 때, 위의 상황도와 같이 제6사단의 7(연대장 양중호 대령), 19(연대장 임익순 대령)연대가 중공군의 측후방을 역습한 것이다. 즉, 포위하여 2연대를 섬멸할 계획이었던 중공군은 역으로 포위되어 섬멸당할 위기에 처했다. 분명 주력군을 몰아넣고 승리하리라 장담했던 중공군에게 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기습적인 역습의 묘수는 중공군 자신들이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습을 감행한 제7,19연대는 중공군이 2연대를 총공격을 하고 있었을 때 기습 준비를 철저히 하고있었다. 그리고 UN군과 국군 포병들의 집중포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중공군은 많은 전사자를 냈고, 잔존한 중공군은 포위 섬멸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장도영 장군의 제6사단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던 제2연대와 연결한 후 즉시 반격을 전개하였다. 사단은 20일 07:00부터 18:00까지의 전과만도 중공군 사살 4,912명, 포로 9명과 소화기 312정에 이르렀다. 반면 이날 국군 제6사단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단은 5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는 정도의 경미한 피해였다. 당시 국군과 중국군의 병력 차이는 제6사단 전체로 보면 1:3, 전투를 치르고 있는 2 연대만 놓고 보자면 1:9로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값진 승리였다. 용문산에서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은 5월 21일 새벽에 서둘러 퇴각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은 국군에게 있었고, 제6사단은(2,7,19연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북진하는 국군에게 내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 `화천댐을 확보하라'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받게 만든 ‘사창리 전투’의 치욕적 패배 설욕 ‘용문산대첩’에서 쾌승한 국군 제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제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제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진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제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제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퇴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장도영 장군의 국군 제6사단은 위의 사진과 같이 철모에 결사(決死)라는 문구로 전투의지를 표식하고 중공군의 제 5차 5월 춘계공세에서 용문산과 파로호 전투의 대승이라는 기록을 세워 국군의 위용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그리고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불명예스런 조롱을 받게 만든 ‘사창리 전투’의 치욕스런 패배를 설욕할 수 있었다. 또한 육군은 용문산 전투의 주역이었던 제6사단 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해 오늘까지 이 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한편, 당시 국군 제6사단장이었던던 장도영 장군은 평북 출신으로 광복 후 모교인 신의주 중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한때는 태능의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사)에서 제5기 생도대의 중대장도 하였다. 1950년 6.25남침 전쟁이 발발하자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제6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나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용문산 전투에서는 대승하였다. 휴전 이후 육군 제8사단장, 육군 제2군단장,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으나,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어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5월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1년 5월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2012년 8월 3일 90세의 나이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 소통시대
    • 종합
    2021-02-0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61)] '허위 보고'의 유혹 떨쳐내고 고지위로 총돌격, 거기서 만난 사람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안보전문기자] 전방의 11월은 완전한 겨울이다. 새벽이 되면 손발이 얼 정도이다. 중대와 대대 전술훈련 평가가 10월 중에 종료되고 11월 중순이 되자 연대전투단(RCT : Regimant Combat Team) 훈련 평가가 일주일간 시행되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에는 여름내내 햇볕과 싸워온 비닐과 남겨진 벼이삭만이 뒹굴고 덕분에 훈련에 따른 농가의 대민피해는 줄일 수 있었다. ■ 연대전투단(RCT)훈련의 피날레를 장식한 '진실의 힘', 평가단장인 이준 준장이 지켜봐 훈련평가에 임하기 전에 상급부대에서는 준비 사열도 하지만 중요하게 적용시킬 사항에대해 시범식 교육도 시행한다. 당시 다수의 활성교보재가 개발되어 훈련간 잘 활용하도록 대대에 시범지시가 하달됐다. 장기호 군단장을 모시고 예하 연대장 및 사단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활성 교보재 시범’도 보였다. 선승구전(先勝求戰)이었다. 군단 시범까지 보이고 임하는 연대전투단(RCT) 훈련평가는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격이 되었다. 게다가 상대 연대는 홍천에 있는 11사단에서 사창리까지 행군으로 이동하여 그 피로 때문에 우리 연대가 더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훈련만을 전담하는 연대로 강원도 어느 지역이든지 이동해서 임무 및 훈련을 수행하는 터라 만만하지는 않았다. 연대전투단(RCT) 훈련평가 첫날 새벽에 출동준비태세 훈련을 마치고 완전군장을 짊어진 중대원들은 적근동에서 직선거리로 40km떨어진 화악산까지 하루종일 행군하여 숙영지에 도착했다. 훈련도 시작되기 전에 모두 지쳐버렸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틀간 쌍방으로 상대연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어훈련을 잘 해냈다. 이어 하룻동안 재편성을 하면서 상호 공격 및 방어준비를 하고 다음날 실내고개로 공격하는 진행으로 평가가 계속 되었다. 56번도로 양쪽으로 2개 대대병진으로 공격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중대에게 앞선 중대를 초월하여 탱크와 보전협동으로 실내고개 최종 목표를 탈취하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연대전투단(RCT) 훈련평가의 마지막날 최종 피날레를 중대가 장식하게 되었다. 지난 1주일간의 긴장된 훈련에 중대원들은 모두 지쳐 있었으나 초겨울 추위도 아랑곳 없이 이마와 등줄기엔 땀이 줄줄 흐르며 실내고개 정상을 향해 뛰어 갔다. 1개 소대는 도로에서 보전협동으로 1개소대는 능선을 타고 고지 정상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대대본부에서 작전장교가 “아직도 못 올라갔냐?”며 독촉 무전교신을 해왔다. 대대의 재촉이 반복되자 소대장은 특공조를 먼저 보내 정상에서 신호탄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건의했다. 필자도 힘들지만 중대원들도 지쳐있어 나머지는 밑에서 천천히 가고 몇 명만 올려보내고 점령했다고 허위보고를 하고 싶었지만, 중대전술훈련 평가시 동네 전쟁놀이로 만든 과오가 다시 반복될까 싶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상적으로 전병력이 전술적 행동을 하기로 했다. 드디어 선두 소대가 고지 밑 돌격선에 도달하여 전열을 갖춘 후 ‘돌격 앞으로’ 함성과 함께 고지를 점령했다. 소대장이 고지에서 목표탈취 신호탄을 공중으로 쏘아올리며 적의 역습을 대비하기 위해 전사면에 진지 재편성을 하는 와중에 필자는 뒤따라 고지로 올라 갔는데 깜짝 놀라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지 정상에는 통제관 완장을 찬 장군이 우리의 전술적 행동 실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헐떡거리며 그 장군께 경례를 하고 현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군단 참모장 이준 준장(육사19기, 전 국방부 장관)으로 이번 연대전투단(RCT) 훈련 평가단장이었다. 그도 일부 병력만 올려보내고는 목표를 탈취했다고 허위로 보고하는 비전술적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상하고 고지 정상인 현장에서 제대로 훈련하는가를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참모장은 중대 병력들이 정상적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진지강화까지 하는 행동절차를 확인한 뒤에 필자에게 “수고했어, 마지막 병력관리를 잘해라”고 당부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 군인 가족들의 기도와 정성이 성공적인 연대전투단(RCT) 훈련을 만들어 연대전투단(RCT) 훈련 평가단장이 자리를 떠난 뒤 대대로부터 훈련 종료 연락이 왔다. 일주일간의 연대전투단(RCT) 훈련으로 몸은 지쳐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잘해준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각 소대의 인원장비를 확인하고 철수 준비를 했다. 그때부터 부대 주둔지 막사까지 또 긴 복귀행군을 시작했다. 그래도 야외 노숙을 하다가 이젠 두발을 죽 뻗고 잘 수 있는 생활관으로 복귀한다는 생각에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었다. 각개 병사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행군이 불가한 병사들을 중대행정보급관이 식사 추진차에 태워 먼저 출발을 시켰다. 훈련 첫날 40km행군을 하여 화악산 숙영지에 도착했을 때 각 대대의 숙영지 야전취사장에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대대별로 장교 부사관 가족들이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땀에 절어있는 전투복을 입은 채 가족들이 만들어 준 식사에 엄청 기대를 했었다. 헌데 취사장 화구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만들어 준 육계장에서 기름 냄새가 나 약간 먹다가 포기하고 건빵으로 떼웠다. 그래도 간부 가족들의 정성이 고마웠고 그 마음과 기도 덕분에 연대전투단(RCT) 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귀하는 길에도 이벤트가 있었다. 연대본부가 있는 마을에는 관사와 아파트가 밀집되어있어 지역주민에는 군인가족들도 대다수 포함된다. 복귀행군이 거의 끝나가면서 연대본부가 있는 마을을 통과하는 데 지역주민들과 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도열을 하면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동네 주점 아가씨들이었다. 사탕과 빵을 나누어 주면서 노고를 격려해주는 모습이 꼭 머언 바다에 고기잡으러 갔다가 만선을 한 채 고향 항구로 도착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 같았다. 화장을 진하게 한 어떤 아가씨는 인접 소대장에게는 달려가 꼬옥 안아주며 수고했다고 하여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인접 부대의 큰 훈련을 격려하는 지역 주민들을 볼 때, 민과 군이 한 몸이 되어 민군 협력이 잘 이루어지는 따뜻한 풍경이었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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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1-02-0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60)] 경쟁자가 깨닫게 해준 교훈과 대대장의 리더십이 이끌어 낸 승리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안보전문기자] 모든 사회 조직에서는 항상 평가, 검열 및 감사가 존재한다. 그 결과에 따라 성과급을 받거나 승진도 하지만 징계 또는 처벌을 받거나 해임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 사회는 감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팽배하다. 간혹 확실한 성과가 예상되더라도 무리한 도전을 하다가 감사에서 문책을 당하기 보다는 법규를 핑개대며 안일하게 모험을 회피하는 복지부동의 행태가 만연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군(軍)도 마찬가지로 각급 제대별로 주기적인 검열 및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군대에서 제대별로 시행되는 전술훈련평가는 통상 쌍방으로 진행되어 경쟁이 치열하다. 또한 그 결과가 부대의 성과로 직결되어 제대별 연말 우수부대 선발의 기준으로 반영 되기도 한다. 각개 병사들은 분·소대장이 평가하여 진급 및 휴가에 영향을 끼친다. 부대는 통상 2차 상급부대에서 평가를 하는데 이렇게 하다 보면 하급 제대중 특별한 임무를 담당하거나 특정 지역을 책임지는 부대일수록 1년 내내 검열 및 평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어이없는 비전술적 행동에 당한 중대 전술훈련평가(ATT) 필자도 중대장 근무 당시 2차 상급부대인 연대 참모들이 평가관으로 편성된 중대 전술훈련평가(ATT)를 받았다. 이 결과가 추후 진급 심사시에도 영향이 있고 1년에 한번씩 받는 평정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대장 본인도 중요하지만 간부와 병사들은 자기 중대의 평가를 잘 받기위해 각별히 신경을 쓴다. 당시는 연대가 GOP를 담당하고 있어 실제 전술훈련 평가를 받는 중대는 GOP대대를 제외한 2개 예비대대 예하의 6개중대였다. 마침 훈련주기를 고려하여 필자의 중대는 같은 대대에 있는 인접 중대와 쌍방훈련을 하게 되었다. 비록 같은 대대에 속한 중대였지만 상호 경쟁의식은 치열했다. 개다가 필자가 경쟁상대의 중대장보다는 연대에서 더 오랫동안 근무하여 누가 봐도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주둔지에서 출동준비태세 평가를 받고 상호 공방을 위해 주변 야지로 전술적 행군을 하며 또 평가를 받았다. 이동해 숙영지 편성을 하면서 통제부에서 하달된 중대 공격명령을 수령했다. 통제관들이 참관한 가운데 작전지역을 분석하여 중대 공격명령을 하달하고 다음날 여명 공격을 위해 야간 숙영에 들었다. 자정이 좀 넘어갈 즈음 갑자기 텐트밖이 시끄러웠다. 상대 중대장의 경쟁의식이 강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필자는 역시 도발을 하였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 경계병을 배치해 사주경계를 하면서 숙영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 중대의 특공조 1명이 비무장으로 은밀하게 다가와서 중대장 텐트 옆에 꽂아 놓은 중대기를 탈취해 달아났다. 경계병은 발견했지만 막무가내로 뛰어 달아나는 그 병사를 잡을 수 없었고, 본격적인 전술훈련 평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상대방의 치졸한 경쟁심이 권위있는 전술훈련을 비전술적 동네 전쟁놀이로 전락시킨 순간이었다. 통제관에게 비전술적 행동에 대한 항의도 하고 이의도 제기해 무마는 되었지만, 이후 훈련은 맥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치밀한 기동 및 화력 그리고 기만작전 계획과 그 시행 등으로 공격 및 방어훈련간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중대기를 빼앗긴 중대전술훈련 평가로 막을 내렸다. 아무튼 이 훈련으로 필자에게는 군생활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꼭 간직하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 손자병법 병세편의 ‘범전자 이정합 이기승(凡戰者 以正合 以奇勝)’는 “무릇 전쟁은 정공법으로 대결하고 기습으로써 승리한다”라는 의미이다. 사회속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은 친구도 되지만 적도 될 수 있고, 모든 상황에서 항상 정공법(正攻法)과 기공법(奇功法)이 존재함을 예측해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대대장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전력투구한 대대 전술훈련평가(ATT) 중대전술훈련 평가가 끝나기 무섭게 바로 대대전술훈련평가가 이어졌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 즉 “전쟁에서는 장수와 병사가 같은 목표를 가지면 승리한다”는 뜻이다. 이 병법처럼 중대전술훈련 평가시 앙금이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같은 소속의 대대평가를 잘 받기 위해 어제의 적이었던 상대 중대와 어쩔 수 없이 뭉쳐야 했다. 그동안 필자를 아껴준 대대장의 신임에 보답하기 위해 전력투구한 대대 전술훈련평가(ATT)였다. 과거 6·25남침전쟁시 양구 펀치볼(해안분지)에서 약 221일 동안 벌어졌던 주요 전투를 분석하면 고지를 공격이나 방어할 때 대부분 중·소대장들은 유선 전화기로 상하급 제대간에 소통을 했다. 무선 교신은 적들에 의해 감청이 가능했고 난청 지역도 많았으며 전장 소음으로 인해 정확한 의사전달이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대대장은 공격시 지휘조의 장비휴대 복장을 통일 시켰다. 중대장은 무선 교신을 위해 P-77무전기를 메고 직접 교신하며, 통신병은 중대장 인접에서 전화기를 바로 연결할 수 있도록 방차통을 메고 유선을 풀어가며 전진했다. 후방 관측소(OP)에서 대대장이 전방 중대의 전진을 확인하며 긴급하게 변해가는 적 상황에 따라 유무선을 활용하여 즉각적으로 융통성 있게 대처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양치규 대대장(육사 29기, 예비역 소장)의 치밀한 계획과 방차통 휴대와 같은 야전적인 아이디어가 가미된 기동 및 화력지원 그리고 기만작전 등으로 공격 및 방어훈련간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작전계획 작성, 상황조치, 그리고 각개 병사 및 예하 중·소대의 전술적 행동에서 상대 대대보다 월등하다는 평을 받았고, 존경하는 대대장의 부하로서 약간의 도리는 했다는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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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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