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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4)] GOP경계근무자 총기난사 및 무장탈영 사건(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문현답’이라는 축약된 '속어'가 한동안 유행했다. 즉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뜻이다. 또한 ’한서(漢書)’의 ‘조충국전(趙充國傳)’에는 전한(前漢)의 9대 황제 선제때 서북 변방에 사는 티베트 계통의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대패하였고, 고민 끝에 선제는 조충국에게 방책을 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이때 조충국은 이미 76세의 백전노장이었지만,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며(百聞不如一見), 군사란 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전술을 헤아리기 어려운 법이므로(兵難險度), 신을 금성(지금의 간쑤성 난주 부근)으로 보내 주시면 현지를 살펴본 다음 방책을 아뢰겠습니다(臣願馳至金城 圖上方略)"라고 대답했다. 조충국은 선제의 윤허를 받고 현지로 달려가 지세와 적의 동태를 면밀히 살펴보고, 잡힌 포로로부터 정보를 캐낸 뒤, ‘기병보다는 둔전병(屯田兵)을 두는 방책’을 제시하였고, 이후 강족의 반란도 차차 수그러졌다고 한다. ■ 주간에 수색정찰과 야간 매복의 반복이 장기화되어 피로누적으로 작전의 효율성 저하 도주를 고려한 시간과의 싸움에서 숨이 막히게 바빴던 무장탈영병 생포작전의 첫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작전지역은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어 휴전 후 인적이 끊긴 산악 밀림 지역이고, 미확인 지뢰지대가 산재해 작전에 제한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주간에 수색조가 면밀히 수색했으나 무장탈영병 이진수 일병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다. 주간작전후 야간에는 전원이 봉쇄선에 배치되어 무장탈영병의 도주를 차단했다. 이틀이 지나도 전방 GOP철책 너머로 도주했다는 흔적이나 후방지역에서의 주민신고가 없자, 일단 지휘부에서는 한편으로 안심하면서 봉쇄선안에 은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혹시 자해를 해서 사망 또는 실신했을 가능성도 고려하였다. 마침 한여름 폭우가 내렸다. 봉쇄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주야로 계속된 작전으로 주간에 열손상 환자가, 야간에는 폭우에 의해 저체온증 환자가 생길 우려가 있었고 장기화로 피로도 누적되었다. 도주한 무장탈영병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정보참모에게 현장을 확인하도록 조치했는데, 역시 지친 상태로 봉쇄선에 배치된 병력들의 근무 상태가 엉망이었고 작전의 효율성도 떨어졌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과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있다)이란 말이 꼭 맞아떨어졌다. 이에 작전참모는 전장군기 확립을 강조하는 지시문을 작성해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작전이 장기화되어 투입된 병력들이 이완된 상태이기 때문에 특단의 대책도 필요했다. ■ 기만작전과 심리전을 전개한 끝에 탈진한 무장탈영병 생포 따라서 작전간 전장군기를 강조하고 간부들의 순찰을 강화했으며, 주간에는 주변 수색 규모를 확대하면서도 잔여 병력의 휴식을 보장하도록 강조했다. 야간에는 봉쇄선 도로를 따라 라이트를 켜고 차량을 계속 왕복 이동시켜 은거한 무장탈영병이 꼼짝 못하고 지치도록 하는 기만작전도 시행하였다. 더불어 심리전 방송차량을 활용하여 원점부근과 주변에서 방송을 하였고, 부모님을 모시고 와방송차량에 탑승시켜 설득 방송도 추가했다. 무장탈영병 생포를 위한 대침투작전을 시행한지 일주일 가까이 되어가자 지휘부도 지쳤다. 각 봉쇄선에 배치된 병력들은 장기간 작전으로 모두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고 제발 무장탈영병이 발견되기만을 고대했다. 이미 총기난사로 사상자를 발생시킨 흉악한 범죄인이 총과 실탄을 휴대해서 작전대원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잊혀져 갈 무렵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인접 부대 취사장에서 아침 식사준비를 하던 병사가 용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는데 인근 숲속에서 철모도 없이 초췌한 모습에 지쳐있는 한 병사를 발견했다. 직감적으로 무장탈영병임을 감지했다. 허나 그는 그동안의 허기와 노숙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발견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니가 이진수냐….?”하고 질문하니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결국 부대원들과 주변 일반시민들까지 긴장시켰던 일주일간의 작전은 더 이상의 피해없이 막을 내렸다. 이는 비록 사고를 미연에 방지 못한 책임은 있으나, 사건 발생 이후 지휘관 및 참모들이 사건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책 강구하여 전방 사단전술지휘소 운용과 기만 및 심리작전 등 일련의 조치들로 차분하고 체계적으로 작전을 수행한 성과였다. 특히 현장을 철저히 확인하여 미비점을 보완하고, ‘형인이아무형 즉아전이적분 (形人而我無形, 則我專而敵分)’이란 손자병법을 적용하여 무장탈영병이 꼼짝없이 갇히게 만든 것과 이를 위해 간부와 병사들이 폭우가 쏟아지는 악조건에서도 각자의 임무를 완수한 결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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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7
  • [김희철의 전쟁사(37)] ‘이현상’의 남부군을 초토화시킨 백선엽의 진검승부(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에 수록된 ‘피실격허(避實擊虛)'와 '공기무비 출기불의(攻其無備 出其不意)’는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은 공격하며, 상대가 준비하지 않으면 공격하고 상대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유격전의 귀신인 이현상의 남부군이 즐겨 활용한 병법이었다. 준비가 미흡했던 후방지역에서 유엔군을 타격하고 지역 사회의 치안을 위협했던 남부군은 준비가 잘되고 강한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주력을 회피하여 교묘히 포위망을 벗어나 상대가 예상치 못한 지리산 외곽의 회문산, 덕유산, 운장산 등으로 회피하여 잠적했다. ■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제 2~4기 작전(1951.12.19~’52.3.14)으로 잔당 소탕/승기잡은 국군에 주민들 적극 협조 12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남부군이 주축이었던 공비들은 대부분 병력을 상실한 데다가 근거지 마저 잃게 되자 교묘히 포위망을 벗어나 지리산 외곽의 회문산, 장군봉, 백아산, 덕유산, 운장산, 삼도봉 등으로 숨어들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분산되어 달아나는 공비들을 근거지별로 각개격파하기로 결정하고 제2기 작전(1951.12.19~’52.1.4)을 시행하였다. 공비들의 은거 거점을 포위 공격하는 전반기작전(12.19~28)과 공비 잔당을 수색 섬멸하는 후반기 작전(51.12.30~’52.1.5)으로 구분하여 수도 및 8사단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가 지역별로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였다. 2기 작전기간 중에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전단 살포 570만매, 연 49시간의 선무방송을 실시한 결과 공비 370명이 귀순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이현상을 정점으로 한 공비 집단의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대부분의 근거지가 파괴되자 공비 잔당들은 유격활동에 유리한 지리산 지구로 재집결을 기도하였다. 따라서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공비 잔당들을 격멸하는 제 3기 작전(’52.1.4~1.31)을 수행하였다. 수도사단을 주축으로 지리산을 재차 포위공격하는 작전이 시작됐으나 오랜 토벌작전으로 아군은 심신이 몹시 지쳐있었다. 그러나 송요찬 사단장의 엄격한 지휘통제하에 추격과 매복 작전을 통해 잔존 공비들을 소탕하여 전과는 나날이 더해갔다. 이렇게 성과가 나타나자 주민들의 태도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공비 토벌작전이 민심을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작전부대는 절대로 침식 등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으며 험한 세파를 겪은 주민들의 생존 지혜는 강한 자의 편에 서는 것이므로 국군을 도와주어도 공비에게 보복당할 위험이 사라짐으로써 주민들의 협력에 비례해 전과도 늘어갔다. 그리하여 소부대로 분산된 공비들은 주민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지리산을 버리고 김제, 양산, 청도 등지로 다시 숨어들었다. 백야전 전투사령관 백선엽 중장(’52.1.12부로 진급)은 'Rat Killer'라는 별칭이 붙은 제 4기 작전(’52.2.4~3.14)을 개시했으나 2월6일 지휘권을 수도사단장에게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했고 이어 7월23일부로 7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수도사단은 남원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백아산, 모후산, 조계산에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운장산, 고산에서, 태백산지구 경찰 전투사령부는 덕유산, 장안산, 천황산에서 공비 잔당 섬멸작전을 계속하였다. 4기 작전이 종료되자 수도사단도 지휘권을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인계한 후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공비 토벌작전을 통해 공비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정부의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못할 정도로 위세를 떨치던 지리산 남부군을 비롯한 공비의 주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위축일로를 치닫게 되었다. 3개월 반에 걸친 호남지역 공비 토벌작전으로 사살 5009명, 생포3968명, 귀순 370명, 화기노획 682정/문, 아지트 파괴 341개소의 전과를 올렸으며 아군은 105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토벌작전을 통해 군경이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실제로 입증하여 작전지역 주민들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 김일성에게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비참한 최후 이후 1사단이 경기도 전곡에서 전북 남원으로 이동하여 ‘52년 7월부터 지리산에서 준동하는 잔존 공비들을 소탕했고, ‘53년 휴전 이후에도 양민을 학살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공비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5사단을 투입하였다. 5사단장 박병권 장군의 성을 붙인 ‘박전투사령부’는 ‘54년 5월까지 공비 소탕임무를 수행하였으며, ‘54년 10월 창설된 2군사령부 예하의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에 의해 ‘56년 말까지 잔당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한편 6,25남침전쟁의 원흉인 김일성이 정적인 남로당 숙청을 시작함에 따라 ‘53년 8월6일자로 북한에서 남로당 최고 간부 12명을 일제히 숙청하고 그 중 이승엽 등 10명은 사형에 처했다. 이에 5지구당 위원장으로 남로당 고위간부이자 산하에 남부군, 전북도당, 전남도당, 경남도당을 두고 이끌던 이현상 역시, ‘53년 9월 6일자로 김일성 절대지지파인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등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 되었으며, 무장 해제당하고 반감금 되었다. 같은 날에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 7명 중에서 2명인 김은석과 김진영이 체포됐다. 그 둘은 5지구당에서 이현상을 숙청한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는 상태라 모든 상황 정보를 제공했다. 즉 제 5지구당은 해체되었고 이현상은 개인 경호대 역시 해체된 상태로, 홀로 감금되어 경남도당으로 이송 대기중이라는 초특급 정보였다. 이 둘은 경찰 2연대 수색대(사찰유격대)로 편입되었다. 수색대는 대장인 김용식 경사 등 31명 중 한 사람을 빼고는 전원이 빨치산 출신이었다. 김용식은 유일한 정식 경찰이었는데, 조선대학 출신으로 덕유산지구 적상산에서 부하 15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이현상의 호위병이 제공한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53년 9월 13일자로 ‘작전명령 9호’ 즉 이현상 체포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현상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군부대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철수하는 ‘53년 9월 17일까지 작전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군부대가 철수하는 17일부터 체포작전을 개시하였다. 이현상 호위병까지 포함하여 33명이 된 경찰 2연대 수색대는 당일 23시부터 매복을 시작했는데, 다음날 18일 매복조 중 하나가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 3명을 포착하여 그중 1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하였는데, 사살한 1명이 바로 이현상이었다. 수색대장인 김용식경사는 증언을 통해 18일 새벽 매복중 공비 3명과 교전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도주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늙은 공비의 시신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정확히 등뒤에서 가슴을 관통한 총상 한발만 있었을 뿐이었고, 확인 사격을 몇 발 가했다. 그때가 11시경이였다. 이후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이었던 김은석 등이 이현상의 시체임을 확인하고 '선생님'하고 흐느끼며 거수경례를 했다고 한다. 이로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 조차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했던 이현상과 남부군은 비참한 최후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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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7
  • [김희철의 전쟁사(36)] ‘이현상’의 남부군을 초토화시킨 백선엽의 진검승부(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 중 국군이 38선을 넘어 통일을 위한 북진을 계속할 때 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 패잔병 약 1만여명이 지역 공비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북한군의 제2전선인 평강·양구·철원일대에 약 2만5000명, 후방지역인 태백산 일대에 4000명, 지리산 일대에 3,000~2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에 ‘50년10월 후방지역 작전을 전담할 3군단을 창설하여 공비토벌과 병참선 확보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3군단은 작전간 패잔병들인 북한군 2군단 예하 5·8·11·13사단을 격멸하고 그해 12월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국군 2사단은 중부지역에서, 5사단은 영남지구에서, 9사단은 대둔산 및 경북 서부지역에서 12월까지 작전했으며, 11사단은 지리산지구에서 ‘51년 3월까지 공비토벌 작전을 계속했다. 그후 횡성지구 전투를 치룬 8사단이 ‘51년 4월 전주로 이동하여 11사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금산·정읍·부안지구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 치안과 유엔군 작전에 지장을 줬던 이현상의 남부군 토벌 위해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창설 공비들의 온상지라고 칭하는 호남지구에는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의 주력 약 8800여명이 지리산 일대에서 출몰하고 있었다. 공비들의 주력은 낙동강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 정규군이었고 여기에 남노당 조직과 여순반란사건 등에 참여한 공비들도 가세하였다. 이들은 곳곳에서 후방 교란작전을 벌여 치안 및 유엔군 작전에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특히 산간오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할 만큼 그 폐해가 극심하여 민심은 극도로 불안하였고 정부와 군에 대한 불신감은 날로 고조되었다. 당시 이들을 담당하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준장 김용배)는 예하 3개 연대와 경찰부대로 소탕작전을 수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육군은 ‘51년 11월에 수도사단(사단장 준장 송요찬)과 8사단(사단장 준장 최영희) 그리고 기존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통합하여 ’백야전 전투사령부’를 창설하였고 미군들도 존경했던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지휘아래 ‘52년 3월까지 유격전의 귀신이라 불리는 신출귀몰한 이현상의 남부군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대구에서 창설된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51년 11월25일 전주로 이동하였고, 수도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담당지역을 11사단에게 인계하고 속초에서 LST편으로 해상 이동하여 여수와 마산에 상륙했다. 8사단은 중동부전선에서 담당지역을 7사단에 인계하고 육로로 전주에 도착했으며, 태백산지구 사령부와 경찰부대도 11월25일부로 백야전 전투사령부에 추가로 배속되었다. ■ 공비들의 지휘체제 와해와 근거지를 파괴시킨 백야전 전투사령부의 제 1기 작전(1951.12.2~12.14)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육본 지침에 따라 수도사단을 지리산 남쪽에 8사단을 지리산 북쪽에서 기동타격부대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공비들의 근거지를 분쇄하고 반복 수색으로 잔당을 색출, 격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 밖의 부대들은 저지부대와 거점 수비부대로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제 1기 작전은 51년12월 2일~12월 14일 동안 시행되었는데 먼저 각 사단이 목표지역을 전반기 5일간 공격하여 점령 및 격멸하고 이후 지역내 반복 수색을 통해 소탕하는 후반기 작전으로 구분했다. 수도사단은 작전 개시일까지 통제선 ‘A’의 외곽지역에서 준동하는 공비들을 목표지역내로 몰아 넣은 다음 이를 격멸하는 계획을 세우고 12월1일 최초 통제선 ‘A’로 은밀하게 이동해 12월 16일까지 정상을 향해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며 공비들을 소탕했다. 이때 공비들의 근거지를 모두 소각 및 파괴하여 다시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그 곳에 있던 주민들을 구호소로 소개시켰다. 이에 공비들은 곳곳에서 소총 및 박격포를 쏘며 저항했으나 점점 지리산 정상 반야봉 및 천왕봉일대로 후퇴하였고 결국 정상부근에서 우리 공군 무스탕기의 폭격 지원하에 섬멸시켰다. 8사단도 전주에 사단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수도사단과 협조아래 지리산 북쪽에서 통제선 ‘A’로 은밀하게 이동해 반야봉 및 천왕봉일대로 3개 연대 병진으로 일제히 공격했다.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남원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경찰부대와 함께 차단 및 반복 수색으로 공비를 찾아내어 섬멸했다. 반야봉 및 천왕봉일대를 점령한 수도사단 및 8사단은 전반기 작전기간 공격했던 코스를 역으로 산을 내려오면서 소탕작전을 수행했으며 경찰부대가 퇴로를 차단한 가운데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공비들을 추격하며 섬멸하여 난공불락으로 자랑하던 공비들의 근거지 지리산 요새들을 철저히 분쇄했다. 한편 타격부대의 공격과 아울러 심리전도 활발히 병행하였다. 남원에서 방송시설을 갖춘 미군은공비들에게 투항 권유방송을 송출하였고 각 부대마다 확성기를 메고 다니며 현지에서 육성으로 자수 및 투항할 것을 권고하였다. 또한 현지 주민들에게도 공비에 협조하지 말라는 경고방송을 하였으며 동경에서 인쇄해온 전단 992만장을 지리산이 하얗게 덮힐 정도로 살포하였다. 작전기간중 지리산의 많은 적설과 주야간 및 고도간의 기온차가 심해 토벌군은 혹심한 고초를 겪었으며 아군은 물론 잡혀온 공비들 중에도 동상환자가 많았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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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6
  • [김희철의 Crisis M] 군인들의 유별난 지휘책임에 의한 국가위기관리의 위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이 계속 교체된 반면에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계속 지휘했다. 1000년전이나 현재도 마찬가지로 역사는 매번 반복된다. 1134년 중국 송나라 시대의 악비 장군은 장강을 건너 남송을 침략한 금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1140년도 재침한 금나라는 또 악비에게 패해 개봉으로 물러났다. 이때 금나라의 간첩이자 간신인 진회는 화평 공작의 일환으로 승리를 거두던 한세충과 유기 장군들을 철수 및 파면시키며 전방사령관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결국 진회의 공작으로 금나라가 제일 두려워 했던 악비에게 모반을 기도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처형시켰다. 악비를 죽임으로써 금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었으나, 금나라는 반환을 약속했던 서남, 하남을 포함하여 오히려 당주, 동주 등을 금의 영토로 추가 편입했고, 훗날 독보적인 경제문화 대국이었으나 간첩과 간신들이 판을 치며 국방을 소홀히 한 송나라는 개국 167년만에 멸망했다. ■ 반복된 역사의 전철 밟지 않으려면 北 김정은의 역(逆) 이이제이(以夷制夷) 경계해야 한편, 이명박 정부 시절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관여 활동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10월22일 있었던 2심 공판에서 지휘책임을 지고 징역 2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김 전 장관은 2심 선고 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일부 소명한 사건은 받아들여진 걸로 이해를 하고 어차피 판결을 받았으니 그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시작전권 전환 등 최근의 안보 상황이 위기인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철없이 대응한다는 의미로 “현 안보 상황에 대해 ‘연작처당’ (燕雀處堂, '불타는 처마 밑에 사는 제비와 참새'라는 뜻으로, 편안한 생활에 젖어 위험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고 조금도 경각심을 갖지 않는 것을 비유)이라는 소회가 든다”고 밝혔다. 송나라 용장 악비는 거란과 금나라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으나 송나라 재상 진회에 의해 처형되었다. 임진왜란 시에도 왜군은 끝없는 밀정 활동을 통해 선조를 조정했고, 왕은 첩자들의 농간에 휘둘렸다. 결국 연전연승했던 이순신 장군은 임금의 진군 명령을 거역한 죄로 삭탈관직 당해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했고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며 선조는 이를 갈았다고 한다. 김관진 전 장관은 북한 인민군 사격훈련의 표적이자 화형식 인형이 되었던 인물이다. 즉 북한 김정은 집단이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그런 인물을 지금은 우리 손으로 송나라 악비나 이순신 장군처럼 처단하려고 한다. 현재 우리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자 K-pop, K-방역 등 문화 및 의료의 강국이다. 그러나 사마법에 나오는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 나라가 비록 평안할지라도 전쟁을 잊으면 필히 위기가 닥친다)의 뜻을 명심해야 한다. 그동안 대북경계가 뚫릴 때마다 지휘관을 해임하는 등의 지휘 문책과 대책 발표가 있었지만, 이번 ‘오리발 헤엄 귀순’사건으로 22사단의 부대구조와 작전 책임구역 범위의 적정성, 과학화 경계·감시장비 성능 등의 진단 작업을 통해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것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혹시 이런 상황에 휩쓸려 패망한 송나라처럼 북한 김정은의 역(逆)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놀아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국민들은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 소통시대
    • CRISIS M
    2021-03-16
  • [김희철의 Crisis M] 군인들의 유별난 지휘책임에 의한 국가위기관리의 위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월 16일 오전 4시 20분경 강원도 고성으로 ‘오리발 헤엄 귀순’한 북한 남성 A 씨를 GOP민간인통제선 감시 폐쇄회로(CCTV)로 최초 인지했다. 하지만 이후 8km씩이나 남쪽으로 더 내려오도록 허용해 경계작전은 실패했고, 이번 사건으로 경계시스템 뿐만 아니라 군 지휘보고 체계에도 허점이 드러났다. 강원도 고성지역 일대의 최전방 및 해안 경계 임무를 맡는 22사단은 ‘별들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바람 잘 날이 없는 부대이다. 지난 1984년 병사가 GP에 수류탄을 투척해 20명 가까운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월북한 사건을 비롯하여 2005년 황만호 월북, 2009년엔 민간인이 철책을 절단하고 월북하는 사건 등으로 당시 사단장이 문책을 당했다. 2012년에도 ‘노크 귀순’사건이 있었고, 2014년엔 임 모 병장 총기 난사 사건으로 사단장과 참모들이 줄줄이 지휘 및 참모 책임을 지고 보직 해임됐다. 지난해 11월엔 이 지역에서 북한 민간인이 철책을 뛰어 넘어 귀순하기도 했다. 경계가 뚫릴 때마다 문책과 대책 발표가 있었지만 개선이 되지 않자 22사단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방부는 22사단에 대해 이르면 이달 초부터 현재 병력 및 부대구조와 작전 책임구역 범위의 적정성, 과학화 경계·감시장비 성능 등의 진단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3월1일 밝혔다. 군 일각에선 22사단을 ‘재창설’ 수준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작업이 본격화 될 예정이라고 말한다. ■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없어...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에게도 지휘책임은 예외가 아니었다. 최초 사령관인 맥아더(~1951년 4월) 원수는 1.4후퇴의 책임과 만주 폭격 등 워싱턴과 반대되는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지휘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그 후임이었던 리지웨이(1951년 4~12월)와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대장은 지휘책임과 무관하게 6~8개월 동안 단기간 지휘했고, 4번째인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미 8군사령관 직책도 계속 교체 되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이 부임했다. 하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는 등의 사유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 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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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RISIS M
    2021-03-15
  • [김희철의 전쟁사(86)]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하-2)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한국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 후 축차 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플리트가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전황을 유엔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1951년 7월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잠시 공석이 된 유엔군사령관직도 겸임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는 ‘맹조의 발톱 작전’을 하고 싶어했으나, 이미 6.25남침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미군 수뇌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신 밴플리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한다. 이 작전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의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돼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승리하게 된다. 이외에도 밴플리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으나, 1951년 10월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된다. 하지만 밴플리트의 공세적 작전으로 당황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미군이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관련, 2015년 미국에서 공개된 니덤보고서는 당시 중공군 자료를 바탕으로 미군이 세균전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부인하고 있으며, 옛 소련 문건에서도 '미군 세균전' 주장은 "잘못된 정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 6·25 남침전쟁에서 맹활약한 유엔군사령관을 포함한 미군 현역장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1952년 5월에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4번째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밴플리트는 8군 사령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 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또한 야전훈련사령부 (FTC : Field Training Command)를 운용했고, FTC 구성 인원들의 열정 덕택에 한국군만을 위한 강의계획과 교범, 훈련 번역서를 제작하는 등의 노력으로 정예화된 12, 15, 20사단을 비롯한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재건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와 그가 만든 FTC에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인 밴플리트 대장은 1953년 1월 말 미 8군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에게 넘겨주고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4번째 유엔군 총사령관인 클라크(1952년 5월 ~1953년 10월) 대장은 6·25 남침전쟁 중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유엔군을 지휘했으며 최종적으로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한편 필자는 6·25 남침전쟁사를 집필하면서 전쟁에서 맹활약한 유엔군사령관을 포함한 미군 현역장성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존경심을 갖게 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소령은 미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한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대위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65년 7월19일)했을 때 유해를 모시고 한국에 올만큼 한국을 사랑했던 밴플리트 대장의 외아들 지미 대위도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됐다 또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으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했다. 그는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끝내 사망했다. 미 해병 1항공 사단장인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 소령도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미군 현역 장성 아들 142명이 6·25 남침전쟁에 참전하여, 이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헌데 이렇게 피를 흘리며 지켜낸 자유 대한민국은 최근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군대 특혜 또는 회피와 대학 부정입학 등을 비롯해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일부 공무원들이 LH투기 파동에 연류된 의혹이 있어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6·25 남침전쟁 시 미국 현역 장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을 보였던 것과 비교되는 우리사회 일부 지도층의 잘못된 행태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이 앞선다.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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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5
  • [김희철의 전쟁사(85)]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하-1)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육군 참모차장으로 재임 중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선에서 맹활약을 했다.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제2대 유엔군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GHQ(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 연합군을 지휘하게 됐다. 정전협상에서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개성을 대한민국이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개성을 되찾을 군사 활동 또한 계획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질려 있던 미 정부와 언론에게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반응만 나와 개성 되찾기를 결국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휴전선이 형성됨으로써 서울이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위협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등 대남 도발사를 볼 때에도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에 대한 코리안 리스크가 한국의 고질이 된 상황을 미리 식별한 리지웨이의 당시 판단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 후보에 오르게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한편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및 유엔군사령관 자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인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중장이 대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이어받았다. ■ 적군 시체나 포로를 와서 보지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포격'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 6·25 남침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플리트는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시 유명한 ‘발지 전투’를 지휘했던 밴플리트는 대전 후인 1948년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중공군의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했다. 이것은 ‘밴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밴플리트 포격’ 방식은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어 화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덕분에 사상율이 높아져 피해가 폭증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됐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무력화 되었다. 게다가 이 '밴플리트 포격'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 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한편 밴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키자고 주장했다. 한편 밴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2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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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73)]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 난사 및 무장탈영 사건(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전자 치인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은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적에게 조정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형인이아무형 즉아전이적분 (形人而我無形, 則我專而敵分)’이란 “적은 형체를 드러내 보이나 우리가 실제로 형체가 보이지 않게 하면, 우리는 집중할 수 있고 적은 분산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 심야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불길한 소식의 신호탄 1987년 7월 어느날, 작전장교의 폭주하는 업무 속에 지쳐 깊은 꿈속에 빠져있던 심야에 아파트 숙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잠이든지 몇시간도 안되는 시점이라 전혀 들리지 않았다. 가족이 놀라 필자를 흔들어 깨웠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수화기를 들자 당직 근무자의 전달에 눈이 번쩍 뜨여지며 토끼 눈이 됨과 동시에 주섬주섬 군복을 입으며 통화를 했다. 잠시 후 사단 상황실에는 사단장을 위시하여 모든 참모들이 모였다. 당직 근무자가 GOP 철책에서 초병근무 후 복귀하던 이진수 일병이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장 탈영한 후 도주하여 행방이 묘연하다는 보고를 했고 이미 강화된 대침투작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상태였다. 이어 정보참모가 도주 가능 거리를 분석해 보고했고, 현장에는 연대의 정보분석조와 헌병 및 군의관 등이 이미 도착하여 사고 조사와 응급 조치를 하고 있었다. 또한 연대 자체 병력으로 차단선을 형성했다는 연대장의 상황조치 보고도 있었다.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참모들과 대책을 논의하던 김관진(육사 28기) 작전참모는 참모장과 상의 후, 신속하게 GOP 전초대대 상황실에 사단 전술지휘소를 설치 운용할 것을 민찬기(육사 16기) 사단장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각 연대장들에게 전화하여 기상과 동시에 가용 병력을 직접지원 포병부대의 포차를 활용하여 GOP 작전지역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 GOP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 차단 가장 크게 우려되는 최악의 상황은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이 GOP 철책을 넘어 월북하는 것과 도심으로 빠져나가 일반 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전방의 사단전술지휘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작전참모는 단편명령 작성을 지시했다. 필자는 그동안에 작전참모가 각 부대에 지시했던 사항들을 되씹으며 단편명령서 초안을 구상했다. 전초대대 상황실에 도착해서 바로 책상에 앉아 초안을 작성하는데 참모의 독촉이 심해졌다. 결국 참모는 필자에게 다가와 작성 중인 초안을 보더니, 본인이 필자의 자리에 앉아 GOP 철책 경계를 강화시키고 봉쇄선을 3단계로 형성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라는 단편명령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필자에게 전해주며 신속하게 타자를 쳐서 사단장 결재 후 전문으로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창피했다. 사단작전장교이면서 단편명령서도 신속하게 제대로 작성 못해 참모가 직접 초안을 작성하게 만들어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참모가 직접 작성한 덕분에 시간이 단축되어 아침에 각 연대 병력들이 작전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단편명령은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포병부대 차량을 활용해 이동한 부대들을 신속하게 GOP 철책 무명고지 총기난동 원점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연대 자체 병력이 이미 운용된 차단선을 기준으로 1봉쇄선을 선정 배치하였다. 또한 원점을 중심으로 식별이 용이한 도로를 따라 2봉쇄선을, 민간인 통제선을 연하는 지역에 3봉쇄선까지 작전배치를 완료했다. 그리고 인접 및 후방부대에도 차단선 형성과 함께 검문 검색 및 주민신고를 강화하도록 협조했다. 이것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허실편(虛實篇)에 나오는 ‘선전자 치인이불치어인(善戰者 致人而不致於人)’이란 말처럼 무장 탈영한 이진수 일병이 마음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작전부대가 그에게 조정 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의도였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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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1
  • [김희철의 전쟁사(84)]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한반도에 진입한 중공군 70만명의 약 절반 병력이 전선에 투입된 4월22일 춘계공세를 감행했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서울 북방 임진강-의정부-가평-인제를 연하는 선까지 철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1주일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참지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분석한 유엔군은 29일에 전 전선에서 적을 저지하고 반격하여 문산과 의정부를 재탈환하며 북상했다. 이때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는 3일 동안 설마리 전투에서 500여 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는 등 처절한 피로써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중공군의 서울 침공 의도를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국군 6사단이 졸전으로 패퇴하며 사창리가 돌파되어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연방 27여단 예하 호주 및 캐나다 대대가 진내사격 등의 선전으로 가평을 사수하였고 중공군 5차 공세의 전선분할 기도는 백지화 되었다. ■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 불구, 6사단의 용문산/파로호 대승으로 UN군 반격작전 계기 마련 이후 5차 4월 춘계 공세에 실패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미군이 더 이상 예전같이 당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4월 공세에서 일찍 손을 떼고 전력의 집중 방향을 전환하여 중동부전선의 돌출되고 특히 약한 국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은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중공군의 주요 공격목표는 현리 지역의 3사단과 9사단을 앞세운 국군 3군단과 미 10군단의 지휘를 받는 국군 5사단, 7사단이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국군 7사단의 전방연대들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20시경에 진지를 피탈당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군 3군단이 배치된 현리 및 인제와 후방지역인 홍천을 잇는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유일 퇴로인 오마치고개가 차단되자 3군단은 전의 상실해 6·25남침전쟁사상 가장 큰 최악의 치욕적인 패전 기록을 남겼다.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 대장의 뒤를 이어 미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밴플리트 중장은 5월21일 3군단이 담당했던 지역을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에게 인계시키고, 5월26일 유재흥 장군이 지휘했던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로써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6사단도 중공군 4월 공세 시 사창리에서 치욕적인 패배 및 도주로 ‘겁쟁이 블루스타’라는 조롱을 받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6사단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용문산에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며 방어 준비를 했고, ‘결사(決死)’ 맹세 띠를 두르고 공격해 온 중공군19병단 63군의 3개 사단을 격멸하며 ‘용문산 대첩’의 쾌거를 달성했다. 중공군 6차(5월) 공세의 한 축인 용문산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 63군은 5월 21일 새벽에 서둘러 퇴각하였다. 하지만 주도권을 확보한 국군 6사단은 곧 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60여 km를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진격하였고 ‘파로호 전투 대승’의 신화를 남기며 UN군 반격작전 계기를 마련했다.(하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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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9
  • [김희철의 전쟁사(83)]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중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은 맥아더(~1951년 4월)원수를 시작으로 리지웨이(~1951년 12월)와 밴플리트(~1952년 5월) 대장이 6~8개월 동안 지휘하다가 4번째인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싸우며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 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 8군사령관들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면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중공군은 계속된 공세 감행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1950년 8월12일 미 공군은 두만강 연안 나진 일대를 폭격했다. 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던 9월11일경 중국은 북한과 미국 양측에 중재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재탈환하자 중국은 9월30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고 유엔에 경고했다. 10월3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서 중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워싱턴에 통보했다.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5차 공세(춘계공세)를 시작했다.(중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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