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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항일 무장투쟁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일찍 사회주의 단체 결성도 주도했고 뒤에는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자유시 참변때 주도권을 쥐려고 러시아로 귀화해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군사 주도권을 위해 따르지 않는 부대들 학살에 가담해서 독립군을 와해시켰다. 또한 사변후 홍범도장군은 재판관으로 참여해서 독립군들을 재판했던 것에 책임을 느끼는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전역군인
    • 전문가 분석
    2019-09-0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9) 낙오된 1개 중대가 인민군 1개 사단을 늪에 빠뜨리다
    ▲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 [사진제공=김희철] 낙오된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 북한군 1개 사단 공격 지연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발발한 6.25남침전쟁시 북한의 인민군은 국군에 비해 2배인 198,380명의 병력과 전차여단 등 3배인 화력/장비의 우세로 기습 남침공격을 했다. 북한은 6.25전쟁 후 ‘조국해방 전쟁사’에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여 ‘3단계 5차 작전기’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1단계는 개전-선 공격, 2단계는 한/만 국경선으로 패퇴, 3단계는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이다. 특히 1단계를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와 같이 5차에 걸친 작전기로 세분화하여 분석하였다. ‘조국해방 전쟁사’에 제시된 북한 인민군의 1단계 ‘선 공격’ 중 ‘제2작전기(6.29~7.6)’가 바로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하여 한국군의 방어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종 승리의 관건인 단계였다. 그런데 피아 혼란한 상황에서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원 소속부대에서 연락 두절로 낙오되었으나 해당 지휘관이 끝까지 부대를 인솔하여 아군 작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다. 비록 원소속부대가 아닌 타부대였지만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의 임기응변(臨機應變)식 ‘임무형지휘’ 결과로 인접 사단의 지휘 및 작전 공백을 해소시켰다. 즉 북한 인민군의 공격 템포를 24시간 끊어버리고 아군 방어 준비시간을 확보하여 한국군 전체 작전에 기여한 것이다. 블확실성의 연속인 전장 상황에서 임무형지휘가 중요 불확실한 전장, 예상과 다른 상황 전개 대처가 변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 인제군 기린면의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는 주력과 멀리 떨어진 방동리에 있어 철수 명령도 못 받아 뒤늦은 6월 27일이 되어야 철수를 시작하여 적중을 탈출했다.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면서도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를 이용 행군을 강행하여 7월 4일 아침에 제천에 도착했다. 다시 철수를 계속하다가 제천 4km남쪽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인 5일, 단양에 도달했을때 중대 병력은 타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중대가 단양까지 왔는데도 아군을 만날 수 없었고 도로와 철로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미 국군 8사단 후발대가 단양을 떠났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들은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8사단, 제천-단양 방어중 작전명령 착오로 전장이탈 한편, 동해 강릉에서 방어하다가 대관령으로 철수한 8사단은 6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던 중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진부-평창을 거쳐 7월2일 제천에 도착했다. 육본 명령은 6사단이 장호원-청부-보은 축선, 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받은 8사단은 6사단 7연대로부터 제천지역을 인수받고 제천 방어와 원주 탈환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7월4일 탈환작전을 위해 원주에 이르는 가리파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8사단 10연대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에 실패해 분산 철수하여 적과 접촉이 단절되었다. 때마침 육본에서 6사단장을 거쳐 전달된 육본 작전명령에는 “충주로 이동하라”고 했다가 다시 전문으로 “8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중요한 요충지인 제천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기하라는 육본 명령이 의심스러웠지만 관계 참모의 확실하다는 확인보고를 받은 뒤에 이동 명령을 하달했다. 7월 5일 새벽 2시, 제천에서 부대원들을 열차에 탑승시켜 대구로 출발시키고 사단장은 짚차로 충주를 거쳐 대전 육본에 도착하여 작전명령 확인 결과, 육본에서는 8사단을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곧바로 대전역으로 이동 철도비상전화로 이동 상황을 확인 결과, 이미 이동부대는 대구, 영천까지 도달하여 사단 참모장에게 되돌아갈 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L-5연락기편으로 대구로 이동, 주력과 합류했다. 바로 이 싯점에 6사단 2연대에서 낙오되어 본대를 찾을 수 없었던 9중대장 정대원 중위(육사8기)는 국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단약역으로 달려가 철도비상전화로 8사단 군수참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용병(用兵)에는 속임수를 써야한다”는 뜻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사례 상급부대와 통신이 단절됐지만 지휘관의 창의적 판단력으로 전투 승리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에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는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가장 우선해서 강조한 병법이다. 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 날 오후 피난민을 만재한 과중한 중량의 열차가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이상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때 낙오된 1개중대가 단양에 남아있다는 상황은 새로운 변수가 됐다. 8사단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선점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하였다. 때마침 북한 인민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천-원주-제천 축선을 따라 남하하던 인민군 7사단은 전투력이 쇠진하여 7월5일 제 12사단으로 개칭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충주로 투입하고 제천지구를 인민군 8사단에 인계하였다. 중앙선 축선으로 남진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민군 8사단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다소 미흡했다. 12사단과 임무교대 하였으나 국군의 방어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인민군 8사단은 편의대를 피난민 사이에 침투시킨 결과 제천 -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급히 일부 병력을 단양으로 진출 시켰다. 그러나 단양에는 낙오된 6사단 9중대의 병력들이 이미 단양철교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증강된 수색 분대가 남한강 북쪽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자, 국군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가 급편 방어하여 북한군 8사단 공격을 24시간 지연시킨 단양철교와 전쟁기념관 조형물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김희철] 인민군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병력이 방어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으로 오판하게 만든 낙오된 9중대는 자신들이 한국군 전체 작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모른 채 남한강을 넘어올 적들을 막아내려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골든타임의 밤을 견디어 냈다. 다음날 9중대는 단양으로 진출한 8사단 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7월 10일 수안보에서 6사단 2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 후 8사단은 인민군 8사단의 지휘소 습격 등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탕진시키며 단양-죽령 지역에서 7월 12일까지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비록 초전부터 낙오된 2연대 9중대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고립된 상황에서 건제를 잃지않고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북한 인민군이 무혈 입성할 뻔 했던 단양을 기만 작전으로 확보함으로써 8사단의 중앙선 축선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는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의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급부대와 지휘 및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해당 지휘관의 자율적, 창의적 판단과 독단적 결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공적인 임무형지휘의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8-31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 [김희철의 위기관리]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상) 유해진, 최민식이 출연한 영화 ‘봉오동 전투’ 450만명 관객 돌파 봉오동서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 이끈 홍범도 장군 김좌진장군,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000여 명 살상하는 대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최근 흥행배우 유해진이 주연한 영화‘봉오동 전투’가 25일 오전 손익분기점인 누적 관객 수 450만 명을 돌파하여 장기 흥행세에 탄력을 더하게 되었다. 개봉 첫날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거침없이 흥행 질주를 달려온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인 홍범도장군(1868~1943)이 지휘하여 독립군의 뜨거운 첫 승리를 안겨준 역사적 순간을 담아낸 감동의 드라마이다. 시원한 질주 액션과 믿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 최민식과 박희순 등이 특별출연해 다채로운 연기 향연을 펼치고 있다. 이에 남녀노소 전 세대 관객들의 끊임없는 호평과 각계각층의 단체 관람 열풍을 이끌며 관객몰이를 이어와 올여름 극장가를 풍성하게 채우고 있다. 실제 영화에 묘사된 ‘봉오동전투’의 4개월 뒤, 청산리에서 또다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려 청산리·봉오동전투는 대첩(大捷)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서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에게 처절한 패배를 맛본 일본군 동지대(東支隊)는 10월 20일을 기하여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에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장군(1889~1930)은 백운평 고지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을 기다렸다가 21일 아침에 호구 속으로 들어온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일본군은 완전히 무너져 전위부대 200명이 전멸하였고 뒤이어 도착한 야마타[山田] 연대도 독립군의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퇴각하였다. 북로군정서군도 차후 작전을 대비하여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였다. 이 시각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도 일본군이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임명받은 홍범도 대한독립군 사령관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공격하였다. 홍범도의 1연대는 저지선에서 전투를 펼쳤으며 예비대는 우회해 오던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다가 독립군 예비대가 빠져나가자 자기 부대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일본군끼리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10월 22일 새벽에 갑산촌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은 인근 천수평(泉水平)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독립군은 일본군 120여 명 중 어랑촌(漁郎村)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어랑촌으로 탈출한 일본군은 참패 소식을 그곳에 주둔한 아즈마[東正彦] 부대에게 알렸다. 일본군의 반격을 예상한 북로군정서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출동한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다. 이 전투에 독립군은 북로군정서군과 완루구에서 승리한 홍범도부대 등 약 1,500명이 총동원되었다. 또한 10월 24일에는 천보산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25일 밤 고동하(古洞河) 골짜기에서 독립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일본군에게 매복하고 있다가 최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종합해보면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 3,000여 명이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동지대 5,000여 명과 전투를 벌인 최종 결과, 일본군 3,000여 명(일본측 자료 812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며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그러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에 협조했거나, 앞으로도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뿐만 아니라, 아예 독립군의 씨를 말려 버릴 작정으로 간도에 있는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다음 편 계속)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외교안보정책
    • 전문가 분석
    2019-08-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이성출 대장에게 전수받은 '탁월해지는 비법'
    ▲ GOP 전방부대에서 소대장 근무시절 필자의 모습 [사진제공=김희철] 최전방 GOP부대, 효율적인 DMZ작전 위해 주기적으로 임무 교대 소대장 근무 2년이 넘으면서 동기들과 비교 의식 생겨 상급자들, 부하들을 '무능-평범-우수-탁월'의 잣대로 평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최전방 적과 마주하는 GP장으로 DMZ작전근무가 끝나가자 소대장 보직도 마무리 되고 있었다. 최전방 GOP사단은 DMZ에서 적과 직접 접촉하는 작전근무를 하는 부대의 조화롭고 효과적인 근무를 위해 주기적으로 임무를 교대한다. 때마침 필자가 소대장을 마칠 무렵 해당 부대도 DMZ를 담당한 GOP연대의 임무를 인계하고 후방 FEBA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GOP임무교대시 현재 DMZ지역에서 GP를 담당하고 있는 소대들은 새롭게 투입되는 연대에 모두 인계되였다. 따라서 중대의 소대장 중 1/3만 함께 이동하게 되었고 나머지 동료들과는 뜻하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DMZ지역에서 GP장과 작전소대장을 두번씩 하니 시간은 벌써 2년이 다되었고 다음해가 되면 대위 진급 심사에 임하게 되어 내자신의 경력을 돌아 볼 필요가 있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소대장직을 6개월이 지나서부터 끝내기 시작해서 이미 사단 및 연·대대 등 상급부대 참모장교로 차후 미래를 위한 경력을 쌓아가고 있어 필자는 동기들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상급부대의 부대 교대명령에 의해 목숨을 위협하는 적과 지뢰지대 및 철조망의 압박감과 불편함에서 벗어나 대성산 서측 수피령지역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하지만 역시 민간인이 살고있는 마을까지는 한시간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첩첩산중의 심신산골이었다. ‘연대 활성교보재 운용 시범’ 후 상급 및 인접 부대 참모로 보직 이동 “산 넘어 산”이라고 후방지역으로 나오자 마자 교육훈련에 전념해야 한다며 새로 부임한 신임 연대장은 대대에 ‘활성교보재 운용 시범’ 명령을 하였고 대대장은 우수 GP장으로 선발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중대장에게 시범 명령을 재하달하였다. 역시 중대장은 필자에게 운용시범 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활성교보재’라는 것은 공포탄, 훈련용 수류탄/크레모아/지뢰 같이 생긴 것은 실물과 같으나 교육을 위해 작동시에는 폭음과 소규모 연막만 피어나고 실제 폭발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활성교보재는 교육훈련시에 흥미를 유발시키고 숙달에 용이한 효과적인 교육용 보조재이다. 짧은 시범준비 시간이었지만 연대와 사단, 인접 부대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고 DMZ를 누볐던 소대원들에게 창의적으로 시나리오를 써주며 연습을 시켰다. 결국 중대장과 대대교육장교의 적극적인 감독과 지원도 받은 덕택에 연대장을 모시고 시범을 성공적으로 무사히 마쳤다. 시범이 끝나자 연대 군수과와 사단 수색대대 그리고 GOP에서 GP작전을 통제했던 대대에서 참모로 오라고 통보가 왔다. 필자 소속 대대에는 중위 참모 자리에 다른 장교들이 이미 보직되어 공석이 없었다. 이성출 예비역 대장의 '4성론'은 직장인의 꿈을 이뤄줄 방법론 직장인들의 가장 큰 꿈과 희망은 ‘승진’이다. 혹자들이 감성적 철학적 표현으로 가치적 도덕적인 근무 자세를 강조했지만 궁극적으로 ‘승진’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상급자들은 부하들을 크게 4종류로 분류한다. '무능-평범-우수-탁월'이다. “성실하다, 착하다, 신뢰할 수 있다” 등은 앞서 4종류 분류 어디에도 적용될 수 있다. 때로는 무능하더라도 신뢰할 부하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무능하지만 성실한 사람이 발탁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4종류 중 탁월해야 승진하는데 유리하다. 군인을 포함한 많은 직장인들이 상급자로부터 탁월하다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본인도 논리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탁월해지는 비법을 훗날 군단 작전참모 시절 이성출 군단장(육사30기, 예비역 육군대장)으로부터 정확하게 전수받을 수 있었다. ▲ 소대장 근무시절 자화상과 소대 전술훈련 모습 그림 [사진제공=김희철] 어려운 취준생 시절을 겪고 취업을 하더라도 상급자로부터 인정받아 정규직으로 장수하면서 승진도 하려면 바로 다음의 4성(性)을 체질화하는 것이 필수이다. 첫째, 전문성(專門性)으로 무장하라. 전문성은 업무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소이다. 과거의 관행, 관례보다는 자기 업무에 관련된 법과 시행령, 예규, 방침, 지침 등을 먼저 숙지하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 또한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법규를 통해 확인하는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둘째, 적시성(適時性)을 놓치지 마라. 완벽한 보고와 철저한 준비도 중요하지만 적시성을 놓치는 순간 모든 준비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훌륭한 아이디어와 보고서는 필요한 시기를 놓치면 허망한 생각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완벽한 형식과 예의 보다는 적시적인 미완의 간단한 메모 등이 오히려 효과적이고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한다. 셋째, 창의성(創意性)으로 차별화하라. 전문성과 적시성을 갖춘 자는 성실하고 유능한 인재로 평가한다. 그러나 창의성이 가미된 업무는 탁월하다는 더 높은 평가를 받고, 나아가 꿈을 이루는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해낼 수 있다. 창의성을 기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벤치마킹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남의 장점을 잘 벤치마킹하여 자기화 한다면 본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성과와 평가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넷째, 현장성(現場性)으로 증명하라. 아무리 전문성, 적시성, 창의성을 갖추었어도 실제 현장에 부합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이 된다. 따라서 실제 상황에 꾸준히 적용․ 시행할 수 있는 업무를 위해서는 현장성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4성(性)의 체질화는 승진이나 성공의 비결이다. 또한 성공은 목표 달성을 위해 한 가지씩 성취해가는 노력의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즐기는 삶이 되어야 행복과 보람을 얻을 수 있다. 필자가 장교로 첫 배치받은 GOP최첨단 소대장 근무의 유종지미(有終之美)를 통해 깨달은 것은 이미 4성을 본인도 모르게 실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삶의 평범한 비법인 4性을 심신(心身)에 형틀화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내 몸속 형틀에 집어넣어 표출되는 말과 보고서 등 모든 업무를 처리하였다. 아니, 소대장 이후 40년 가까운 군생활을 마친 현재에도 그러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20, 30대 젊은이들도 4性을 자기 체질화 하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승진하여 상위 계급으로 진출하거나 해당 조직의 리더로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도 행복과 보람을 함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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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8-2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 DMZ작전소대의 마지막 임무는 아찔한 지뢰제거 작전
    ▲ DMZ내 지뢰지대 표식과 2018년 10월 비무장지대 화살머리고지에서 지뢰제거 작전 중인 국군장병 모습 [사진출처=연합뉴스] “시근종태 인지상정 종근여시(始勤終怠 人之常情 終勤如始)”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인의 숙명! DMZ근무 끝내고 후방철수 직전에 '새 임무' 부여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선 성종때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날 무렵인 권신 한명회에게 그의 사위인 성종이 신하를 보내 “내가 앞으로 왕을 하는데 무엇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되느냐?”고 물었더니 한명회는 “시근종태 인지상정 종근여시(始勤終怠 人之常情 終勤如始)”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작할 때는 부지런하고 끝에 태만해지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니 마지막까지 부지런하기를 시작처럼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필자에게는 하늘이 마지막까지 태만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DMZ작전 근무를 끝내고 후방으로 철수하기 얼마전에 소대에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다. DMZ내 고지 정상에 위치한 GP의 울타리 철책은 고지 경사로 인해 울타리 철책 밖의 흙이 깍여 흘러내려 울타리 철책 내부 순찰로 하단이 자주 침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타리 철책 밖의 지뢰지대에서 철책하단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울타리와 근접한 지뢰지대의 지뢰는 제거해야 했다. 결국 DMZ작전소대 근무를 마치고 후방으로 철수하기 전에 필자가 담당했던 GP 울타리 철책주변에 근접한 지뢰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고 소대원들과 GP로 다시 투입하게 되었다. GP울타리 철책에서 수류탄 투척이 가능한 거리까지는 불모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고지라 매우 급경사였다. 그곳에는 M16대인지뢰와 M14폭풍지뢰가 매설되어 있는데 울타리 철책 근접에는 지뢰가 흘러 내리지 않도록 실로 연결하여 M14폭풍지뢰로 매설되어 있었다. ▲ GP 및 GOP 철책 순찰 모습 [사진출처=국방홍보원] GP 담당소대는 주야간 등 기본 임무에만 전념하고 필자가 지휘한 작전소대가 아침에 GP로 들어가 일몰전까지 지뢰제거 임무를 수행하도록 지시됐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임무이다. GP 및 GOP불모지대에는 일부 M16지뢰의 삼각뿔이 지표면 위로 튀어 올라와 있어 “죽음의 사자들이 어서 오라”고 부르는 듯 했다. 지뢰제거 임무를 설명받은 소대원들, 손톱을 잘라 유서 봉투에 담아 지뢰제거 임무를 설명들은 소대원들은 조용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유서와 함께 편지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소대원들에게 세부적인 작업 계획을 제시하고 토의했다. 울타리 철책으로부터 불모지대 끝까지는 전체가 지뢰지대임으로 작업 구간을 울타리로부터 1m로 제한했다. 결국 선두만이 모든 위험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지뢰 매설한 지도 오래됐기 때문에 겉에 것을 탐지해 캐내더라도 그 밑에 또 지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무 깔판을 준비했다. 먼저 선두가 최초 탐지하여 제거하면 바로 뒷조가 나무 깔판을 전달하고, 다시 선두는 그 나무깔판을 딛고 다음 지역을 탐지 제거하며, 제거된 지뢰는 즉시 뇌관을 제거하고 후미에 전달하면 마지막 조는 뇌관과 지뢰몸통을 분리하여 보관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그때 분대장이 자신이 선봉에 서서 탐지를 하고 지뢰를 수거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하지만 필자는 가장 위험한 선두를 부하에게 맡길 수 없었다. 지뢰제거 첫날, 식은 땀을 흘리며 M14폭풍지뢰 제거 지뢰제거 작전 첫날, 소대원들과 DMZ통문에 도착하여 현장 지도하겠다는 중대장과 함께 GP로 들어 갔다. 항상 모든 일은 첫발이 중요하다. 필자가 먼저 지뢰탐지기를 들고 울타리 철책으로 접근했다.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고 탐지기만을 믿을 수 없었다. M14폭풍지뢰는 플라스틱으로 지뢰탐지기로는 탐지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지 지역을 다시 대검으로 찔러보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필자의 바로 뒤에 있는 분대장에게서 나무깔판을 받아 탐지한 지역에 깔고 다시 대검을 45도 각도로 찌르자 무언가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전달되어 왔다. 야전삽으로 살살 흙을 퍼내자 파란 플라스틱이 보였다. 손으로 흙을 걷어내고 M14폭풍지뢰를 꺼냈다. 뇌관을 제거하고 안전핀을 재결합한 뒤에 뇌관과 몸통을 분리해서 뒷조에게 전달했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첫날 작전을 마치고 숙소로 복귀하자 대대 통신대장 안철주중위(육사동기)와 인접 GP장(학군동기)에게서도 안전을 기원하는 전화가 왔다. 격려 전화를 받으면서 나의 버켓리스트(The Bucket List)가 떠올랐다. 죽기전에 개인전 한번은 할 수 있을까? 일주일 동안 105발의 지뢰를 캐내고 임무 완수 첫날 12발을 캤다. 둘째날은 7발을….. 지뢰를 캐어낼 때마다 섬짖하게 스쳐가는 사자(死者)의 휘파람 소리에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고 생사(生死)의 기로(岐路)를 넘기면서 105발의 지뢰를 캐내어 GP관리에 안전을 확보하면서 임무는 완료되었다.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나에게 맡겨진 임무를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군인!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명령하는 상급자, 위험 속에 빠져들면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하급자, 이 모두가 군인다운 군인이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08-12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8)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된 ‘형제의 상’
    ▲ 북한 미사일 발사장면과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형제의 상’조형물로 6.25 남침전쟁때 국군장교로 참전한 형과 인민군 병사인 아우가 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포옹하는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모습 [사진제공=연합뉴스/김희철] 6.25전쟁 아직도 끝나지 않아, 북한은 6일 새벽 미사일 2발 또 발사 6.25 전쟁때 국군장교 형과 인민군 병사 아우가 죽령 전투현장에서 극적으로 상봉 앞으로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 준수해 평화 정착 희망 '형제의 상'처럼 남북이 서로를 안아주며 사이좋게 지내기를 기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북한이 6일 새벽, 황해도 과일에서 내륙을 가로질러 동해상 450km거리로 미상의 발사체를 2발 또 발사했다. 이번 발사는 그동안 북한이 거세게 비난해온 이 한·미 연합연습이 시작되자 호된 비난방송과 함께 이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발사는 지난달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를 쏜 이후 13일 동안 4번째다. 군 당국은 “이들 발사체를 새로운 종류의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보고 있고 북한이 한·미 연합연습 기간에 추가 발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대북 감시태세를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문 대통령이 평양 가서 합의했던 ‘9.19 군사합의서’의 맨 앞부분 1조에 나와 있는 “해상, 지상, 공중에서 어떤 행위의 일체 상대방에 대한 적대 행위를 전면 중단한다”는 것을 심각하게 위반한 사항이다. 게다가 지금 북한이 최근에 ‘SLBM발사가 가능한 신형 잠수함건조’도 공개했다. 이것들은 누가 봐도 남쪽을 겨냥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의 북핵 협상에서 시간을 벌고 어떤 압박 전술로 쓰기 위해서 남쪽을 괜한 핑갯거리로 끄집어내는 우회 전술이다. 통일부는 6일 "최근 북한의 연이은 군사 행동은 내부 결속 및 향후 정세 국면에서 주도권 및 협상력 제고 차원"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이날 오전 “금일(6일) 오전 7시30분 국가안보실장,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긴급 관계부처 장관회의를 개최하여 북한의 연이은 단거리 발사체 발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하고,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전반적인 군사안보 상황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관계장관들은 현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앞으로 한미 간 긴밀한 공조 하에 관련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철저한 감시 및 대비 태세를 유지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나마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북한 미사일도발 규탄 결의안’을 본회에 상정하기로 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마치 형이 동생을 돌보듯, 북한 도발에 대한 비난과 앞으로의 재도발 방지보다는 김정은 위원장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정부 발표에서 읽을 수 있었다. 서울 삼각지 전쟁기념관에 가면 ‘형제의 상’이라는 동상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제목 그대로 국군과 인민군 군복을 각각 입은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도 이 형제의 상이 담고 있는 사연과 유사한 내용으로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진태, 진석 형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조형물의 형제는 실제로 6.25 남침전쟁 당시 서로에게 총을 겨누다 마주치게 된다. 이 실화의 주인공은 당시 국군소위였던 형 박규철과 북한군 하전사인 동생 박용철 형제이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이 고향인 박규철 소위는 해주공업학교 광산과 3학년 여름방학 중에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남북분단 직후 공산당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부모님과 여동생을 동생 박용철씨에게 당부하고 홀로 월남한 후, 보병 16연대에 신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리고 16연대가 8사단으로 편입된 후 태백산지구 공비토벌에 참가, 전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6.25가 발발하자 일등상사의 신분으로 의정부 지역 전선으로 투입되었고, 소대장이 부상으로 후송되자 소대장 대리가 되어 경북 영천 지구방어전에서 공을 세우는 등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한 결과 현지에서 소위로 진급, 임관했다. 한편 박규철 소위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북한군으로 징병된 동생 박용철씨는 북한군 제8사단 83연대 하전사(이등병 격)로 배치되었다. 동생이 소속된 북한군 8사단은 기이하게도 국군 8사단과 6.25 남침전쟁 초기 1개월하고 4일 동안을 제천-단양-죽령-영천을 연하는 축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직전인 9월초, 북한군 8사단은 영천지구 전투에서부터 패주, 북상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패주하는 북한군 8사단에 대한 추격을 맡은 부대가 기이하게도 또 형인 박 소위가 근무하는 국군 8사단 16연대였다. 따라서 이들 형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대편에 형과 동생이 있는 줄을 모른 채 총을 쏘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추격중에 안동전투에서 바로 형이 공격을 맡은 그 진지에 동생이 있어 서로 총을 쏘기까지 했지만 양쪽 모두 무사한 채로 북한군이 퇴각했다. 국군8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마지막으로 크게 격돌한 것은 단양군 죽령 전투에서 였다. 북한군은 죽령의 험한 산세를 이용, 국군의 반격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형제간의 살육전을 피하기 힘든 격전의 시간이 본인들은 모른 채 다가온 것이었다. 바로 이 같은 와중에서 형인 박 소위는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만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불효자식놈’이라고 호통을 쳤고 그는 엉엉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맹렬한 추격 공격중에 박소위는 5-6m전방에서 도망치던 적병이 재빠르게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그 적병을 반드시 생포하겠다고 마음먹고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절대 죽이지 않을테니까 도망치지 말고 그대로 있어. 만일 내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치다간 너희 독전대에게 사살당한다” 그 때 홀끔 돌아보는 상대방의 얼굴을 본 박 소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어젯밤 꿈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야! 너 용철이 아냐. 야 임마! 나야 니 형이야”하고 그는 북한군 독전대가 퍼붓는 총탄속을 뚫고 달려가 동생을 안고 내리 굴렀다.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셨구나”하자 동생은 “형 나도 여기서 이렇게 총을 맞대고 싸우다가 형을 만나리라 곤 정말 생각도 못했어”하고 눈물을 쏟으며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형제의 상’ 조형물의 모습) 영문도 모르고 바라보던 소대원들은 그제서야 일제히 박수를 치며 축하했다. 동생은 이후 박 소위의 소속 지휘관의 배려로 국군으로 현지 입대하여 박 소위의 소대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은 필자가 8사단 16연대장 재임시 ‘연대 전투사’를 제작하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 ▲ 번개부대 (8사단 16연대) 전투사 [사진제공=김희철] 형제끼리 서로 총을 겨눠야 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서로를 알아본 형제의 모습은 바로 6.25 남침전쟁에서 우리 겨레의 모습이었다. 앞으로는 불법도발을 하지말고 ‘9.19 군사합의서’를 진심으로 잘 준수하여 평화가 정착되길 바란다. 이번 사연과 같이 형제끼리 총을 겨누는 6.25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남북이 총 대신 서로를 안아주고 진정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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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08-1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 (7) 대한국민이면 반드시 기억해야할 8월 1일
    ▲ 의병들을 학살하는 일본군(왼쪽) 과 일제시대 미국 주간지 '’더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에 실린 ‘1919년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제목의 한국인들이 십자가에 양팔을 묶인 채로 처형을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 김희철/연합뉴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황실근위 시위대 제 1대대장 ‘박승환’ 참령, 충성을 다하지 못했다며 자결 전국적인 연합의병으로 ‘13도창의군’ 1만여명 결성, 서울탈환 작전을 전개 국가와 군대 없는 국민은 노예, 국가와 군은 공동운명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금부터 112년 전인 1907년 8월 1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날은 과거 우리가 대한(大韓)의 이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한, 한마디로 거세를 당한 날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꼭 기억해야만 하는 날이기도 하다. 1907년 7~8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었다. 1907년 8월 1일 오전 11시 동대문 밖 훈련원에서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그날 아침 맨손 훈련을 한다고 소집해 놓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새로 왕위에 오른 순종황제의 군대해산 소칙을 낭독했다. 그 자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이 떼어지고 이들에게는 약간의 돈 몇 푼만 쥐어졌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지금의 종로와 을지로로 걸어 나와 돈을 땅바닥에 내던지면서 백성들과 함께 대성통곡 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기 2년 전엔 ‘이근택’군부대신 등 을사 5적에 의해 우리의 외교권은 박탈됐고, 그 이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을 거치며 우리도 몰랐고 대비도 못했던 사이에 500년 조선의 역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일 황실근위 시위대 제 1대대장으로 국가보위와 황실보호 업무를 수행하던 ‘박승환’ 참령은 이 소식을 듣고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은 들 무엇이 아깝겠는가”라며 자결했다. 격분한 우리 군인들이 무기고를 털어 당시 숭례문 밖에 있던 일본군대 진영으로 쳐들어 갔다. 일본군들은 기다렸다는 듯 사격을 시작했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 대한제국 군대 78명이 전사했으며 치열한 시가전은 계속됐다. 일본군은 막강한 화력을 동원해 공격했고 탄약이 떨어진 마지막 우리 군인들은 백병전을 감행하면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군대가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였다. 이에 의병의 전투력은 강화되었으며 봉기 지역 역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민긍호는 원주에서, 지홍윤과 연기우는 강화에서 군인들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켰다. 이들은 유격전에 능숙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경북 문경의 이강년, 강원도 원주의 이은찬, 호남의 기삼연·심남일·전해산·안규홍, 황해도의 이진룡·조맹선, 함경도의 홍범도, 경북 영천의 정환직 등이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이인영과 이은찬과 허위 등은 1907년 말 연합의병으로 ‘13도창의군’을 결성하였다. ‘13도창의군’은 경기도 양주에 약 1만 여 명의 병력을 집결한 후 1908년 1월 서울탈환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패배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결국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으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3년 뒤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그 후 우리 민족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일제에 항쟁해 나갔지만, 광복 이후 1948년 창군될 때까지 41년 동안 이 땅에 우리나라 군대는 없었다. 조선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던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최후를 맞던 날(1598.11.18),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동안 수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서 한 달 이상 체임되어 있다가 파직된다. 그 후 1607년 선대의 과오를 철저히 징계하고 후대의 후환을 경계하고자 ‘징비록’을 집필했는데 그 핵심은 “자강(自强)”이었다. 그러나 꼭 300년 지난 뒤, 서애의 경고를 망각한 조선은 불과 일본의 2개 사단의 무력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나라 없는 국민은 노예이며, 군대 없는 나라 또한 나라가 아니다. 국가와 군은 공동운명체다. 다행히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은 위풍당당한 국군을 보유하고 있다. 1948년 건국과 더불어 국군이 창설됐으며, 6.25남침전쟁을 맞아 우방의 군대와 힘을 합쳐 훌륭하게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지금은 국토방위의 책임을 넘어 15여개 국가에 세계평화질서를 위한 평화유지군을 파견, 국위를 높이고 있다. 또한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이 있듯이 국민교육의 도장으로도 우리 군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해 삼척항 인근 목선 입항 귀순 축소 은폐, 서해 거동수상자 신고 조작 등으로 우리 군이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 17일 장관 주관 32사단 잠망경 해프닝 화상회의시 청와대 통제와 간섭 등 군의 위상이 계속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 112주년을 맞이하는 8월1일, 치욕스런 역사가 주는 쓰디쓴 교훈을 꼽씹어야 한다. 철저한 정치적 중립으로 “싸우면 이기는 전투형 군대”로 재도약하는 대한민국 국군이 되야 한다. 한국인은 우리 국군이 참군인으로 보다 더 노력하기를 독려해야 한다. 우리 국군이 국민의 깊은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다시 회복하길 기대해 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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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19-07-31
  • [김희철의 전쟁이야기](6)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킨 ‘빨간마후라’의 전설 김영환 장군
    ▲ 6.25남침전쟁시 우리 공군 주력기였던 무스탕(왼쪽)과 금년에 도입한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사진=동영상 캡쳐]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 고(故)김영환 장군이 전장에서 착용했던 ‘빨간마후라’, 공군의 상징 돼 1951년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 지휘 미군의 폭격 명령 거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역사의식' ‘54년 3월 5일 F-51기를 타고 사천-강릉기지 이동 중 기상 악화로 실종/순직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형이다. 비록 지난 6월말 판문점에서역사적인 남북미 정상이 만나 비핵화를 논의하며 화해무드는 조성되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북한 언론 매체에서는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난하는 방송이 지속되고 북쪽과 남쪽은 각자의 군사훈련도 계속하고 있다. 진정한 평화와 통일은 현 155마일 휴전선에서 남북이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남북 군인들이 함께 국경을 지키고 남북이 서로 자유왕래를 할 때 완전하게 달성된다. 반면에 GOP지역의 철새들은 주요한 관광자원이기도 하지만 남북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미국과 일본의 최신예 F-35A 전투기는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는 스텔스 기능 때문에 적 미사일을 탐지, 추적, 파괴하는 일련의 작전개념인 전략표적 타격의 핵심 전력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텔스 전투기는 마음만 먹으면 남북하늘을 철새처럼 날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게 될 최신예 F-35A 스텔스 전투기 2대가 지난 3월29일 청주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청주 공군기지에 도착한 F-35A 전투기는 작년 말까지 미국에서 인수한 6대의 전투기 중 2대로 추후 매달 F-35A 전투기가 국내에 도착해 금년에는 총 10여대에 달하는 F-35A 전투기가 전력화 될 것으로 알려졌다. F-35A 스텔스 전투기는 최대 속력 마하 1.8, 전투행동반경 1093㎞로 공대공미사일과 합동직격탄(JDAM), 소구경 정밀유도폭탄(SDB) 등으로 무장한다. 대한민국 공군이 북한과 주변국의 위협에 대비할 수 있는 최강 F-35A 전투기는 트럼프와 문대통령의 미국정상회담시 협조하여 단계적으로 총 40대가 도입될 예정이다. ▲ [사진=동영상 캡쳐] F-35A 전투기 등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착용하는 ‘빨간마후라’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뜨거운 조국애를 상징한다. 공군의 상징인 이 ‘빨간마후라’는 고(故)김영환 장군이 처음 시도한 인물이다. 평소에 김영환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붉은 머플러를 착용하고 전장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전설의 독일 조종사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을 흠모했었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김영환 장군은 어느 날 그의 형 김정렬(당시 공군참모총장) 장군의 집을 방문했었다. 형수 이희재 여사가 입은 붉은 치마를 보고 형수에게 붉은색 천으로 머플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목에 두르기 시작한 것이 ‘빨간 마후라’가 된 것이다. 故 김영환 장군은 경기고등학교와 일본 관서대학 법과에 재학 중 징집되어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수료, 1948년 공군에 입대했다. 6·25 전쟁 당시 T-6 훈련기를 조종하며 폭탄과 수류탄을 직접 던져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1951년 9월 28일에는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출격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뛰어난 활약으로 한국전쟁 때 을지훈장·금성충무훈장·금성을지무공훈장·미비행훈장(美飛行勳章) 등을 받았다. ▲ [사진=동영상 캡쳐] 故 김영환 장군의 숭고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다. 1951년 8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잠입한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의 김영환 공군 대령은 휘하 조종사들에게 해인사 주변의 능선을 공격함에 있어 폭탄과 로켓포 대신 기총소사로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당시 우리 공군은 정찰기를 타고 다니면서 맨손으로 폭탄과 수류탄을 투하했는데,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기총소사로만 공격을 한 것이다. 미군 장교가 그에게 “왜 해인사를 폭격하지 않았나?”라고 묻자, 김영환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영국 사람들이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꿀 수 없다고 한 것 처럼, 한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가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래서 폭격을 하지 못하고 우회했다.” ▲ 생전 故 김영환 장군의 조종모습과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사진= 동영상캡쳐] 세계대전 패전을 앞두고 히틀러가 파리를 초토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를 거부하고 ‘파리가 불타고 있다.’고 허위보고를 했던 독일의 콜티츠 사령관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팔만대장경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을 맘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54년 3월 5일 제10전투비행단 창설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F-51기를 타고 사천기지를 이륙하여 강릉기지로 가던 중 기상 악화로 동해안 묵호상공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2010년 8월 21일 해인사에서 고(故) 김영환 장군 추모제가 열렸는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뜻을 기리고자 문화재청에서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하기도 했다. 우리는 동해의 목선 귀순 사건과 서해의 거동수상자 허위 자수 사건 등 일련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최초의 빨간 마후라 거(故) 김영환 장군의 숭고한 애국심과 군인으로써의 희생정신 그리고 전 세계를 감동시킨 역사관에 한없는 존경을 보낸다. 이번 하계휴가 때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합천 해인사의 소중한 팔만대장경을 찾아 맘껏 즐기고, 고(故) 김영환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싶어진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19-07-2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0) 악천후라는 또 하나의 적과 동거하는 DMZ매복작전
    ▲ DMZ매복작전 투입전에 주둔지에서 투입신고와 군장검사중인 국군장병 모습 [사진출처=국방부] DMZ수색과 매복작전, 70년간 보존된 '천연의 보고'를 만끽하는 혜택 침투하는 적을 색출/격멸하여 영토를 지키는 '무거운 임무' '적'으로 오인한 산짐승과 치열한 신경전으로 긴장했던 추억 고통스러운 악천후, 지휘관의 리더십 통해 '전화위복 (轉禍爲福)' 가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인적이 끊어진 DMZ(비무장지대)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특권은 세계적 권력자들에게도 없다. 오직 필자가 소속된 부대와 같은 DMZ작전부대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DMZ수색과 매복작전을 담당하는 부대원들은 침투하는 적을 색출하여 격멸하고 대한민국의 영토를 지키는 임무도 있지만 약 70년간 보존되어 온 천연의 보고를 마음껏 누리는 혜택을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대원들은 항상 발톱을 숨기고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는 지뢰폭발의 위험과 언제 출몰할지 예측 불가능한 침투조의 기습적인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 이러한 리스크는 일반적인 사고와 달리 자칫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DMZ는 과거와 현재에도 많은 전우들이 발목이 잘리는 등의 부상을 입거나 치명상으로 순직하며 생명을 걸고 지켜온 땅, 천연의 보고이다. 한 겨울이 되면 온 천지가 하이얀 설국과 동토의 땅이 된다. 당시에는 매복작전 투입전 GOP통문지역의 온도가 영하 10도 이하가 되면 작전이 취소가 되었다. 그날도 오후, 눈보라 치고 매서운 바람은 소매 끝을 파고들어 문밖을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도 온도는 영하 7도였다. 할 수 없이 야간 매복작전을 위해 작전조는 오후에 취침을 하고 투입준비를 했다. 우선 동상을 대비하여 전투화 대신 방한화를 준비했고 그 안에는 두꺼운 양말을 두겹씩 신었다. 전투복안에 내복을 껴입고 방한복을 입은 모습은 완전히 눈사람이다. 목도리에 귀마개까지 하고 철모를 쓰니 고개 돌리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주둔지에서 투입전 즉각조치 사격을 하고 군장검사 후 5/4톤 트럭을 타고 GOP통문으로 향했다. 이동간 노출된 트럭위에서 매서운 겨울바람이 옷사이를 스며들어올 때에는 아무리 두껍게 입은 방한복도 소용이 없었고 대원들의 콧 밑에는 새하얗게 고드름과 서리가 맺혔다. 일몰이 되고 사방이 깜깜해질 무렵, GOP통문에 도착했다. 군장검사를 위해 방한장갑을 벗고 소총 안전검사를 할 때에는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온도를 체크하니 영하 9도였다. 삭풍까지 몰아치는 이 혹한에 에누리 없이 작전에 투입해야 할 기온이었다. GOP작전 대대장에게 인원장비와 군장검사 결과를 전화로 보고하려고 초소로 들어가는데 그 날 따라 격려하려고 현장에서 대기중이던 대대장 송영근 중령(훗날 기무사령관, 19대 국회의원 역임)이 초소에서 나오며 작전대원들에게 뜨거운 차를 한잔씩 나누어 주었다. 혹한에 생고생을 불평했던 대원들은 대대장의 기습적인 격려에 오히려 감동해서 이번 야간작전에서는 침투한 적을 반드시 잡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드디어 , GOP통문이 열리고 대원들은 두꺼운 동계복장 때문에 끼우뚱거리며 DMZ안에 발을 디뎠다. GOP통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대대장과 통문 소대장의 걱정어린 눈빛을 뒤로한 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도 조용한 침묵 속에 인적이 끊어진 눈 덮힌 DMZ는 우리 작전조를 반겼지만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대남방송과 ‘사각 사각’하는 눈 밟는 소리만이 혹한과 친구가 되었다. 약 1시간 가까이 이동하는 동안 방한복 속에서는 땀이 솟기 시작했고 결국 매복진지에 도착 했을 때는 이마에도 땀이 송송 맺혔다. 진지 내의 눈을 치우고 크레모아를 적 침투 방향으로 설치하고 인접 진지와 신호줄을 연결한 뒤, 수류탄을 꺼내 뚜껑을 개봉하여 바로 던질 수 있게 준비를 했다. 깔판을 깔고 진지에 앉으니 바로 이동간 흘렸던 땀이 식으면서 혹한이 옷자락을 스며들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앉아있는 무릅에서 열 소모가 그렇게 많은 줄은 전에는 몰랐었다. 땀이 식으면 추위를 느낄 때 무릅덮개로 허벅지와 무릅을 덮으니 꽤나 추위가 반감되었다. 군장 속에 있던 핫패드를 꺼내 배와 등에 붙히고 혹한과 싸우기 시작했다. 좌우에 있는 진지에 신호줄을 당겨 이상유무 확인했다. 온 세상이 하이얀 눈이 덮힌 한 겨울에 몰아치는 삭풍마저 괴롭히지만, 모두들 잘 견디며 두 눈을 부릅뜨고 혹시 침투하는 적을 색출하여 처단하기 위해 얼음 같은 소총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얼어가는 손가락을 계속 꼼지락대며 밤을 지새웠다. 침투로만 뜷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삼천평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춤추는 별들과 박자를 맞추듯 대남방송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상에선 새하얀 눈꽃들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남과 북의 심리전 방송에 장단을 맞추는 통에 추위도 졸음도 적을 잡아야 한다는 긴장감도 잠시 사라지며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우측 진지에서 신호가 왔다. 전방에 미상 물체가 식별되었다. 숨을 죽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며 몇 분이 흘렀다. 등에는 아까 이동하며 흘린 땀이 아니라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신호줄은 내용 전파가 한계가 있다. 옆 진지에서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소대장이 직접 가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은밀하게 옆 진지로 이동했다. 소대원이 지목한 곳에 필자가 보기에도 미상 물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미동도 없다. 만약 그대로 사격을 하면 매복 위치가 노출되어 오히려 침투한 적에게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가 미동이 없는 것도 이상했지만 산짐승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돌을 들어 그곳을 향해 던지고 바로 사격자세를 취했다. 만약 적이면 바로 사격하려고 했는데 돌에 놀라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하니 역시 산짐승이었다. ▲ DMZ 산양 및 동계 훈련하는 국군장병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 / 국방부] 발견해 보고한 대원에게 졸지 않고 근무를 잘했다는 칭찬을 하고 진지에 돌아오니 식은 땀이 추위를 더 압박해 왔다. 가장 심한 것은 발이었다. 그때 즈음이면 완전 동태가 된 것 같았다. 식은 땀 때문에 두꺼운 방한화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덧 추워와 싸우는 시간의 끝이 다가왔다. 일출 한시간 전 즈음 무전기로 대대 상황실에서 신호가 왔다. 철수신호이다. 옆 진지로 신호를 보냈다. 철수 준비도 꽤 복잡하다. 경계병을 배치하고 크레모아와 신호줄을 회수했다. 진지 깔판과 기타 흔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인원 장비를 체크했다. 통문으로 복귀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비록 침투하는 적이 없어 성과는 없었지만 대원 모두가 무사한 것에 다행이면서도 보람을 느꼈다. 빨리 주둔지로 복귀해서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헌데 GOP 통문에서 문제가 생겼다. 통문 소대장이 아직 도착을 안했다. 대원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통문 앞에서 한시간 가까이 기다리고야 통과했고 통문 소대장은 늦게 나와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땅거미가 걷히고 동녁이 밝아올 무렵 5/4톤 트럭을 타고 복귀할 때에는 기온이 영하 20도 가까이 됐다. 코밑에 달린 고드름도 아랑곳 없이 마음은 포근하다. 삭풍의 혹한 속에 동상의 아픔도 극복하고 임무를 완수한 보람 때문일 것이다. 한 여름 매복작전시에도 갑작스런 소나기와 모기들이 대원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적도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리더십이다. 악천후와 기타 리스크도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성공요인으로 전화위복 (轉禍爲福)시킬 수 있는 조용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DMZ매복 작전이었고 '그 날' 하루도 무사히 또 지나갔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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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19
  • [김희철의 Crisis M]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필요한 지혜는 '모호한 전략'
    ▲ 지난 10일 한국군사문제연구원이 주최한 열린 제5차 KIMA FORUM에서 우정엽 세종연 미주센터장이 주제 발표하는 모습 [사진=김희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 심층 분석하여 우리 대응 전략을 발표 한미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보의 ‘린치핀(Linchpin, 핵심축)’ 미중간 딜레마로 한국은 연루(Entrapment)와 방기(Abandonment)의 위험에 노출돼 외교 노력으로 미국과의 인식차이 좁히고, 우리 입장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지난 10일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주최로 ‘미·중 패권경쟁과 한국 안보 구축방향’ 에 대해 이상의(전 합참의장), 선영제(전 전쟁기념사업회장), 박정이, 이홍기(전 군사령관), 정연봉(전 육군참모차장), 김춘수 장군들과 교수, 안보전문가, 국회보좌관, 국방부, 각군본부 실무자 등 60여명이 참석하여 ‘제5차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포럼(KIMA FORUM)’이 개최됐다.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원장 오창환(예비역 공군중장)의 환영사로 시작하여 이윤규(기획홍보실장) 박사의 사회로 진행된 포럼은 우정엽 박사(세종연 미주센터장)가 주제발표를 하고 김열수(안보전략실장), 홍규덕(전 국방개혁 실장), 손한별(국방대교수), 황재호(외국어대 교수) 박사들이 토론을 하였다. 우정엽 박사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한국의 안보’란 주제로 지난 6월 1일 발간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IPSR)’를 심층 분석하여 30분간 발표하였다. 오바마 1기 때만 하더라도 미국은 ‘판다 안아주기(Panda hugger)’로 표현되는 중국에 대한 유화적 접근이 지배적이었다. 오바마 2기에는 중국의 계속되는 불투명함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어 이른바 ‘용의 목베기(Dragon slayer)’라고 하는 대중 강경책이 공감대를 얻기 시작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 역조가 미국 쇄락의 원인이라고 보았고 대중 강경책이 기어가는 과정을 마감하고 걸어가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해리스 주한 미대사의 최근 언급대로 인도· 태평양 전략 및 반(反) 화웨이 전선 동참 요구 등이 그 과정의 결과물로 이해된다. 우리 정부는 2017년 11월 한미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편입할 필요 없다는 거부의사를 밝힌데 이어 5G 통신은 안보와 무관하다며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에 거부하는 입장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지난 6월30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동기자 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의 신남방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 간 조화로운 협력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 역시 트럼프 대통령 방한 설명 자료를 배포하며 “한미 정상은 강력한 한미동맹이 인도·태평양 지역 평화와 안보의 ‘린치핀(Linchpin, 핵심축)’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미국이 한미동맹을 인도· 태평양전략의 린치핀으로 공개적으로 규정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우정엽 박사는 70쪽 분량의 인도· 태평양전략보고서가 용두사미식이라며 인도양의 내용이 부족하고 안보 보다는 무역에 중점을 두고 있고 동맹의 역할, 즉 추구하는 목표지점이 불확실하며 모호하다고 분석했다. 한편 인도· 태평양 지역의 현재 및 미래의 안보태세를 살펴보면 현재 인도· 태평양전략사령부는 2000대의 항공기와 200대의 군함 및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고 37만명 이상의 전투병, 수병, 해병, 항공대원, 행정인력, 계약인력 등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미군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파견된 곳은 일본과 한국이다. 반면에 중국은 1993년 '국가안전법'을 필두로 '사이버보안법' 및 '해외 NGO법안' 등을 제정하였다. 이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낳게 하였고 이러한 우려가 미국 전략 중심에 있게 만들었다. 이런 부정적 인식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중국을 경쟁상대(Competition)로 보다는 대결상대(Confrontation)로 보는 경향이 강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이 상황은 결국 동맹국간에 발생하는 딜레마로 연루(Entrapment)와 방기 (Abandonment)로의 위험을 제시하였다. 그 예로 북한의 미사일발사, 미 사드배치 등은 한국이 결국 인도· 태평양전략에 연루(Entrapment)되게 만들어 중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미국은 ‘인도· 태평양전략’에서 한국을 북한 관련 한가지로 국한해 배제하면서도 ‘신남방정책’으로 한정시켜 일본, 호주, 인도 등과 비교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긴밀한 외교관계 유지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비참여 혹은 거부’ 의사를 밝히는 것보다 부단한 외교 노력으로 미국과의 인식 차이를 좁히고 우리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우리 입장을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한미동맹을 축으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 태평양전략(FOIP)'추진해야 ‘투키티데스 함정’ 에서 벗어나 중국의 장기전에 대해 ‘모호한 전략’ 유지해야 이어 패널로 참가한 김열수(육사33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은 미국은 전방위적 차원에서 중국을 압박하고 중국은 4차 산업혁명인 5G통신을 선도하면서 장기· 지구전 구사로 장차 패권국가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투키티데스의 함정(1등이 2등을 좌초시키는 경우)’을 극복하고 ‘모호한 전략’보다는 한미동맹을 축으로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 태평양전략(FOIP)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번째로 홍규덕(전 국방개혁 실장)교수는 주제발표자의 의견과는 달리 ‘인도· 태평양전략 보고서’에 동맹의 역할이 제시되어 있으며 일본이 제일의 파트너이고 뒤이어 문재인 정부의 참여 의지 표명에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만 두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북한 문제의 시급한 해결이 물론 중요하지만 북한 이후에 대한 로드맵을 구성하는 장기전략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정부가 북한의 동시적 단계적 비핵화 과정을 수용하고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안전과 핵 억제에 대한 전략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즉 '한반도를 넘어 지역과 세계를 무대'로 동맹을 활용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고 기본의 관행에서 탈피하는 지혜와 결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중국 전문가인 황재호(외국어대 교수) 박사는 우리가 80년대 말부터 아시아태평양시대에 살았지만 이제는 인도태평양(인태)시대에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인태는 중국 국력이 아태를 넘어섰음을 상징하며 미국이 아태로는 중국 견제가 역부족임을 자인한 것이다. 중국은 2010년 경제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2013년 일대일로와 AIB를 통해 신경제질서, CICA에서 아시아안보는 아시아인이 결정해야 한다는 신안전관을 주창하며 ‘신안보질서’ 수립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2049년 ‘중국몽’을 실현해 세계 초강대국 달성 목표를 분명히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First America)와 맞서는 기존 질서 혼란 상황이 된 것이다. 중국은 중국몽 실현을 위해 지구전 및 장기전으로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어느 편에도 쏠리지 않는 ‘모호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패널들의 한국의 안보 구축 방향에 대한 의견은 한미동맹을 강조한 미국의 ‘인도· 태평양전략’에 적극 참여와 미국도 중국도 아닌 ‘모호한 전략’으로 양분되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사진제공=연합뉴스]ⓒ그래픽=뉴스투데이 원로선배의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는 노마지지(老馬之智)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화해무드는 조성되는 듯 했지만 북한 비핵화는 좀더 멀어진 양상이 되어 북의 비대칭 위협은 가중되고 있다. 중국은 미·중패권 경쟁하에서 일대일로 전략 구현을 위해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국내적으로는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져 G20중에서도 바닥을 치고 있다. 어쩌면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로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통령훈령인 ‘국가위기관리 기본 지침’에 위기관리단계는 예방-대비-대응-복구의 4단계로 명시되어 있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어느 예비역 장성은 국가위기관리 양태를 3가지로 분류하여 현상황을 매우 걱정하였다. 첫째가 ‘국가위기관리 기본 지침’에 위기관리단계대로 징후목록을 분석하여 위기를 식별하고 철저한 예방 및 대비를 통해 위기의 피해를 최소화 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징후분석을 잘못하여 위기를 인식 못하고 예방과 대비를 못하는 것이며, 셋째는 징후분석을 통해 위기를 식별했으나 타목적을 위해 위기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예방 및 대비를 하지않는 양태라고 말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후 약 150개국이 독립을 하였다. 그중 대한민국은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독립한 국가중 G20에 가입한 유일한 국가이며 어느 순간 세계 10대 경제대국안에도 포함되었고 K-POP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가장 문명이 뛰어나 '삼국지연의', '수호전' 등의 명작들과 포청천의 신화들을 기록한 송나라는 자신들보다 몇배 이상 가난하고 약한 나라들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패망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병법가 ‘사마양저’가 저작한 병법 ‘사마법’에 나오는 명언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천하가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가 새삼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온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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