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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png▲ 의열단 창설자 약산 김원봉선생(1898.9~1958. 11)이 조선의용대 시절 연설하는 모습(동영상 캡쳐화면)
 
시큐리티팩트 | 소통시대
김희철 안보전문기자 | 기사작성 : 2018-11-01 10:49

4세대 전쟁은 물리적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는 전쟁 방식
약산 김원봉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11월 9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시켰다. 그의 투쟁 방식은 이슬람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이슬람 국가)등이 대표적으로 전개하는 분란전, 정치전이라 불리는 4세대 전쟁의 효시가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의 양상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최근 정치·군사학적으로 ‘4세대 전쟁’이란 용어가 회자되고 있으나 많은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4세대 전쟁’이란 용어의 최초 사용은 1989년 William.S.Lind.를 비롯한 다섯명의 군사전문가가 미「해병대 관보」,‘변화하는 전쟁의 얼굴 : 제 4세대를 향한 전환’이라는 논문에서부터 주장돼 온 전쟁 개념이다.
그는 ‘제 1세대 전쟁’은 활강식 소총을 사용해 인력을 위주로 한 전쟁이고, ‘제 2세대 전쟁’은 강선식 소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후장식 포와 철조망, 기관총이 사용된 화력위주의 전쟁, 예를 들면 1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을 칭한다. 그리고 ‘제 3세대 전쟁’은 기동이 중요시 된 현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쟁이며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이 사용한 기동전 또는 전격전을 예로 들었다.
‘제 4세대 전쟁’은 정치사회적인 전쟁으로 물리적인 약자가 강자에 대항할 때 수행하는 전쟁이다. 이때 물리적 약자는(대부분 국가가 아닌 단체임) 비정형적인 방법으로 비대칭적인 수단을 활용해 강자의 취약한 사회분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정치적 선전을 수행한다.
Lind는 제4세대 전쟁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테러리즘을 들었다. 이는 상대방 군대의 패배가 아니라 상대 측 정치적 결정자들의 의지를 파괴하는 전쟁으로 규정했고 마오쩌둥(1938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인민전쟁을 제 4세대 전쟁의 기원으로 주장했다.

안중근 의사의 히로부미 사살은 4세대 전쟁의 신호탄
oan.png▲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삽화 [사진=구글 퍼블릭 이미지]
 
우리나라는 이미 1909년 10월 26일 09시 30분, 당시 ‘대한의군’ 지휘관이던 안중근 참모중장의 하얼빈 대첩으로 한일합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면서 4세대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작금의 알카에다와 IS처럼 납치, 테러 위주의 야만적인 4세대 전쟁처럼 우리의 항일독립운동은 폭력 위주만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이 주장했던 전후처리 14개 조항 중 민족자결주의는 1918년 1월에 제기되었고, 이 소식은 동경에 유학중인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그들은 ‘조선청년 독립단’을 구성하고 1919년 2월 8일 한국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공사, 일본정부요인, 귀족원, 중의원·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했다.
뒤이어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평화적인 3․1독립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1542회 집회에 총 200여만명이 참가했으며, 일본군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7509명이 사망하고 1만5961명이 부상 당했으며, 4만6948명이 피검됐다.
이에 우리의 평화적인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3․1독립운동 이후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근거지를 해외로 옮겨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 비밀 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라는 의미였다.

의열단이 정의를 맹렬히 실행하는 4세대 전쟁을 시작
창단 당시의 단원들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단장 김원봉 등 13명으로 조직하고 ‘공약 10조’와 ‘5파괴(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可殺 : 조선총독 이하 고관·수뇌부, 타이완 총독, 매국노·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토호일신 등)’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운동 지침으로 채택했다.
초기 의열단 의거활동은 밀양·진영 폭탄 반입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상하이 황포탄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도쿄 니주바시 폭탄 투척,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식산은행 폭탄 투척 등의 무수한 활동을 전개했고 1924년경에는 약 70여명의 단원으로 확대됐다.
우리 독립지사들이 전개한 ‘4세대 전쟁’은 의열단 이외에도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한 ‘한인 애국단’에서도 수행했다.
윤봉길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면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때, 폭탄을 단상위로 투척해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을 현장에서 살상시키고,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메다 중장은 다리절단, 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로 만드는 등의 쾌거를 달성했다.
이러한 독립투사들의 혼이 어린 피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의열단이 타격했던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일본은 반성해야
그러나 6․25 남침전쟁을 일으켜 천만 이산가족을 양상시킨 북한은 현재 겉으로는 남북화해를 추진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경보병 사단을 7개나 추가로 창설하는 등 20여만명의 4세대 전쟁 수행 부대를 편성 강화하고 지금도 대남적화를 위해 간첩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북전단 살포를 주도하는 자유북한 운동연합 박상학 대표와 국방장관. 태영호 등을 살해하겠다는 등의 공공연한 협박을 하고 있다.
사실 의열단의 창시자인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했었으나, 해방이후 1948년 김구선생 북한 방문시 수행하다가 복귀하지 않고 북한에 남아 북한의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의장직까지 역임하면서 북한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전쟁 후 김일성의 권력기반 다지기 공작으로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에 포함되어 사망했다. 이미 90여년 전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총구를 일본에 지향하고 '4세대 전쟁'을 주도했던 김원봉이 육성한 요원들의 후예가 작금에는 총구를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돌려 테러와 정치적 협박을 가하는 주인공이 되어 있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협에 철저히 대비하며 동족상잔의 아픔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한반도 평화정착 및 통일시대 준비를 위해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강한 힘을 배양하고, 동북아 협력질서 구축 및 세계 평화·발전에 기여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요즘도 철없고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정부는 지속적으로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고,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이 없다고 망발을 하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일본이 극우보수주의 심리를 자극하고 난국을 헤쳐나가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이번 11월 9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 기념일을 맞아 각별한 느낌으로 김원봉 의열단의 애국심에 다시 한번 더 고개 숙이며, “사과데이(10.24)”를 맞이해 일본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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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 M] IS가 주도하는 '4세대 전쟁'의 창시자는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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