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범철수 대상인 GP와 병력과 화기 철수를 완료 후 폭파시키는 모습(사진 : 국방부 제공)
[시큐리티팩트 = 강철군 안보전문기자]
남북은 시범철수 대상인 GP 22곳의 병력과 화기 철수를 완료 후 폭파, 11월30일 마무리
주한미군의 가장 불만은 군사분계선 부근을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은 조항
남북은 비무장지대에서 철수하기로 한 감시초소(GP) 20곳의 파괴 작업을 11월 30일부로 마무리했다. 앞서 남북은 이달까지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 10곳씩을 완전 파괴하고 나머지 1곳에 대해서는 병력과 장비를 철수하되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북은 지난 9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3차 정상회담에서 지상과 해상, 공중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한 바 있다. 비무장지대(DMZ) 내 시범철수도 그 일환이다.
60여 개 GP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1개 GP를 없애는 것도 한국군의 휴전선 일대 감시체계에 구멍을 내는 일이다. 그런데 주한미군 측이 가장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은 군사분계선 부근을 비행금지구역으로 묶은 조항이다. 휴전선 일대는 계곡이 많고 휘어진 능선으로 인해 인공위성 사각지대가 많아 군단급부터 연대급까지 무인기를 띄워 북한군의 동향을 감시해왔는데,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돼 이것이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한미연합사 정보 분야에서 근무한 D 예비역장성은 “북한군 장사정포는 고지 후사면(보이지 않는 후면의 경사면)에 배치돼 있어서 중고도 정찰과 고고도 정찰로 탐지해야 하는데 이마저 못하게 됐다. 전방 지역은 이제 깜깜이가 됐다”고 했다.
이 감시-정찰수단과 정밀타격능력을 현저히 제한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은 북한군의 장사정포가 갱도에서 나오는지, 북한군이 이동하는지를 제때에 알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계산된 모험(calculated risk)이라 추정하지만, 남북 양측은 올해 군사분계선(MDL) 1㎞ 이내에 근접한 남북 GP 각각 11개소의 화기와 장비 그리고 근무인원을 철수한 후 시설물 완전 파괴했고, 12월 말까지 상호 방문해 GP 철수 및 파괴 상태에 대해 철저한 검증을 추진 중이다.
또한, 10월 1일 시작된 공동유해발굴 지역 내 지뢰 제거 작업도 30일 끝냈다. 국방부 관계자는 "북측은 수천발, 남측은 수백발의 지뢰와 폭발물을 제거했다"며 "지뢰 제거 구역의 외곽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표식물도 설치했다"고 말했다.
남북은 지뢰 제거 작업이 끝나면 연말까지 공동유해발굴에 필요한 도로를 개설하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내 자유 왕래는 다음 달 실현될 예정이다.
적의 말을 믿은 결과, 오사카 성주 히데요리는 바보가 되어 자결
▲ 일본 오사카성과 해자 모형도
정부가 정확히 판단한 계산된 모험(calculated risk)으로 GP철수 및 폭파한 것으로 믿고 싶지만, 왠지 과거 일본 막부시대의 치열한 전투 중 일어난 비극이 떠오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년 동안 치열하게 마지막 남은 오사카성을 공격했다. 히데요시의 아들이자 오사카 성주였던 히데요리는 평화의 상징으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垓字)를 메우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짓 화친을 받아 들인다.
그동안 오사카 성을 든든히 지켜주던 방어물인 해자를 메우자마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색을 드러내 순식간에 성을 함락했다. 순진했던 히데요리는 성을 빼앗기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결국 자결하고 만다. 물론 화친을 종용했던 어머니와 아내(도구가와 이에야스의 손녀)도 함께 자살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화친 약속을 깨교 공격한 것에 대하여 “적의 말을 믿는 바보가 어디에 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상주의적 평화론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일화다.
내부의 적을 방치한 결과는 월남패망
▲ [출처=방송화면 캡처]
1975년 4월엔 월남이 패망하자 공산치하가 싫어 탈출하려는 약 106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 중 11만 여명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되는 참혹한 비극도 일어났다.
월남 패망 2년 전인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남북베트남 3국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외국군대가 모두 철수했다. 그 후 월맹군의 총공세가 시작돼 부패한 월남정부와 반공정신을 모르는 월남국민들은 공산 월맹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공격해오는 월맹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시킨 월남의 전투기들은 기수를 돌려 월남 티우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하고(훗날 월맹군에게 영웅 대접 받음), 정부·군대·대학 등 어디든지 월맹의 스파이들이 득실됐다. 각종 민간단체로 위장한 공산분자들이 나라의 여론을 분열시키고 지식있는 학자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은 연일 반정부 데모로 날을 지새우며 서로 큰 목소리를 내던 그 나라는 목소리를 높이던 그들의 소원대로 나라가 멸망했다.
그 와중에 월남에서 반정부 데모를 주동했던 많은 지식인·종교인들을 포함한 반정부인사들이 형무소에 수감됐다.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며 파월 한국군과 미군들이 싸웠던 게릴라(베트공 전사)들 조차도 모두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때 처형된 월남 사람들의 규모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월남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인 세력들은 통일 베트남에서도 똑 같이 반정부활동을 벌일 것이라는 논리였다. 마치 6.25남침 전쟁 전에 남로당 당수를 하며 공산당의 총수임을 자처했던 박헌영이 6.25이후 월북해 열렬한 환영을 받다가 처형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다. 월남은 내부의 적을 방치했기 때문에 안에서 곪아 무너졌다. 우리도 내부의 적은 반드시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
비겁한 평화는 없고,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평화론이 확산돼 우려스럽다. 즉 호시탐탐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북한에 대해 “좀 더 퍼주고 달래고 대화로 설득하자”는 주장이다. 이들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란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긴장 고조가 우려된다며 한때 일체의 군사대응에 반대했다. ‘긴장 조성’보다 ‘비겁한 평화’가 낫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은 우리를 앞섰다. 그러나 무력적화통일 준비에 전념한 결과 북한경제는 몰락했고, 1994년 김일성 사후 아사자가 300만 명이나 발생하는 등 급격한 체제붕괴 위기에 내몰렸다. 전 세계 공산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어서 소련 등 외부 지원도 막혔다. 그러나 북한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오히려 막대한 군사력과 핵으로 무장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기적이 가능했을까? 고(故) 황장엽 씨는 “그동안 우리가 퍼준 돈이 몰락해가는 김정일 정권을 다시 일으키는 버팀목이 됐다”며 통탄했다. 실제로 우리의 대북지원은 약 69억 달러를 넘는다. 그러나 급사한 김정일은 이러한 막대한 지원에도 ‘고난의 행군’속에 수백만을 굶어 죽게 방치하고 오로지 당·정·군의 친위세력들만 먹여살리면서 강성대국을 목표로 핵을 만들었다. 29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지원은 13~17억 달러가 소요되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원으로 살아남은 북한으로부터 온당한 보답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북한은 대북 지원을 받으면서도 1999년 제1연평해전을 일으켰고, 2002년에는 월드컵 축제 중에 제2연평해전을 일으켜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꽃다운 넋들이 산화했다. 2010년 3월에도 천안함 사건으로 군인 47명, 연평도 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4명이 희생됐다.
따라서 정부가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계산된 모험(calculated risk)을 하더라도, 안보의 마지막 보루인 군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북한의 도발에 굴복해서는 안되며, 앞으로 다시 도발할 시에는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 혹자는 ‘전쟁으로 확산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겠지만 미국의 트럼프를 위시한 현 정세를 볼 때 이는 북한이 더 겁내고 있을 것이며, 우리 군의 응징 의지가 단호하다면 아예 도발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겁한 평화는 역사가 증명하듯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는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